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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말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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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쇠말뚝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한반도의 지맥을 끊기 위해 각지에 쇠말뚝을 박았다는 괴담이다. 조선 시대에는 정조가 함경도 지역의 인재가 없는 이유로 쇠말뚝 단맥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쇠말뚝 괴담은 한국 사회에 널리 퍼졌으며, 풍수와 결합되어 민족주의적 감정을 자극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김영삼 정부는 쇠말뚝 제거 사업을 추진했으나, 대부분의 쇠말뚝이 측량용 말뚝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쇠말뚝 괴담은 과도한 풍수지리설과 반일 감정을 반영한다는 비판을 받으며, 영화 《파묘》와 같은 작품의 소재로 활용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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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말뚝
개요
명칭일제 풍수 모략설
내용일제가 쇠말뚝을 전국 명산에 박아 한국의 정기를 훼손하려 했다는 주장
관련 주장미나미 조선총독이 조선의 혈을 끊기 위해 전국에 쇠말뚝을 박았다.
일제가 고의적으로 지맥을 훼손했다.
일제가 경복궁을 가리고 조선총독부를 지어 경복궁의 혈을 끊으려 했다.
일제가 도로를 만들 때 단맥을 끊어버렸다.
일제가 전라선 철도를 놓을 때 민족정기를 끊으려 모악산 허리를 잘랐다.
일제가 나주에 나주읍성을 헐고 도로를 내어 쇠말뚝을 박아 금성산의 정기를 끊었다.
일제가 충주 계명산에 쇠말뚝을 박아 맥을 끊었다.
같이 보기

2. 조선시대의 쇠말뚝 전설

조선시대에는 풍수지리설과 관련된 쇠말뚝 이야기가 전해진다. 한국은 역사적으로 풍수설과 풍수지리설이 깊이 뿌리내린 땅이다. 풍수는 중국에서 이론으로 정리된 후 신라 시대에 한반도로 전해져, 적어도 고려 시대에는 풍수에 기반한 통치가 이루어졌다.[4] 조선의 풍수는 주로 유력자들 사이에서 사용되었지만, 18세기까지는 서민들 사이에도 퍼졌다고 여겨진다.[5]

한반도 풍수의 특징 중 하나는 정치와 강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점이다. 천도(수도를 옮기는 것)를 할 때에는 풍수에 기반하여 후보지를 검토했다고 알려져 있으며,[4][6][7] 현재에도 서울은 뛰어난 "지맥"을 가진 이상적인 풍수 도시라는 의견도 있다.[8] 또한, 조상 숭배 사상과 함께 묘의 위치가 중요하게 여겨졌으며, 지금도 집이나 묘의 입지가 풍수에 따라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9][10][11]

조선시대에는 풍수로 지맥(용맥)을 끊는다는 전설이 종종 등장한다. 임진왜란명나라 장군인 이여송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등에서 40개 이상의 지맥을 끊었다는 조사 결과도 발표되었다.[14]

2. 1. 정조 시대의 기록

1797년 7월 18일(정조 21년 음력 6월 24일), 정조는 우의정 이병모를 불러 "우리나라에 인재가 없는 것은 명나라 초기에 도사 서사호가 단천 현덕산에 천자의 기운이 있다고 다섯 개의 쇠말뚝을 박고 떠났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정조는 수십 년 전에 북한산성 아래에 소금을 쌓고 태워서 염산(鹽山)을 만들어 삼각산의 맥이 끊겼으니, 서울에 인재가 없는 것은 여기에 연유한다고 하였다. 이에 조심태 등을 불러 염산이 어디 있는지 물었으나 아무도 알지 못해 흐지부지되었다.[30]

정조는 고려 말기에 명에서 파견된 도사인 서사호가 단천(현 북한 함경남도)의 현덕산에 5개의 쇠말뚝을 박은 탓에, 북관(함경도)에 인재가 나오지 않는다는 "쇠말뚝 단맥설"을 주장했다.[14]

2. 2. 태종 시대의 기록

태종은 자신과 대립했던 이방간의 묘가 전주의 풍수에서 길지로 여겨지는 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산에 뜸을 떠서 지맥을 끊게 했다.[14]

3. 일제강점기 쇠말뚝 괴담

일제강점기 쇠말뚝 괴담은 조선총독부풍수 침략을 통해 한국의 민족정기를 끊으려 했다는 믿음에 기반한다. 이 괴담은 조선총독부가 주도적으로 한반도 각지에 쇠말뚝을 설치하여 한반도의 "맥"을 끊으려 했다는 내용으로, 한국에서 널리 유포되어 믿어지고 있다.

이는 한국 언론에 의해 다시 보도되기도 했지만, 유사역사학이라는 비판과 조롱도 뒤따랐다.

3. 1. 조선총독부 풍수공격설

조선총독부가 한반도의 "맥"을 끊기 위해 각지에 쇠말뚝을 설치했다는 소문은 한국 사회에 널리 퍼져 있다. 이는 한국 언론에 의해 다시 보도되기도 했지만, 유사역사학이라는 비판과 조롱도 뒤따랐다.

한국은 역사적으로 풍수설과 풍수지리설이 깊이 뿌리내린 곳이다. 풍수는 중국에서 이론으로 정리된 후 신라 시대에 한반도로 전해져, 적어도 고려 시대에는 풍수에 기반한 통치가 이루어졌다.[4] 조선 시대에는 주로 유력자들이 풍수를 이용했지만, 18세기에는 서민들 사이에도 퍼졌다.[5] 한반도 풍수의 특징 중 하나는 정치와 강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점이며, 천도 시에는 풍수에 기반하여 후보지가 검토되었고,[4][6][7] 현재에도 서울은 뛰어난 "지맥"을 가진 이상적인 풍수 도시라는 의견도 있다.[8] 또한, 조상 숭배가 강한 한반도에서는 묘의 입지가 매우 중요하며, 지금도 집이나 묘의 입지가 풍수에 따라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9][10][11]

한반도 역사에서 풍수로 지맥(용맥)을 끊는다는 전설은 종종 등장한다. 태종은 자신과 대립했던 이방간의 묘가 풍수적으로 좋은 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산에 뜸을 떠서 지맥을 끊게 했다.[14] 1797년 정조나라 도사 서사호가 단천(현 북한 함경남도) 현덕산에 5개의 쇠말뚝을 박아 함경도에 인재가 나오지 않는다는 "쇠말뚝 단맥설"을 주장했다.[14]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군 이여송이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등에서 40개 이상의 지맥을 끊었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14]

황문웅은 조선총독부가 골머리를 앓았던 문제 중 하나로 풍수를 꼽았다.[15] 특히 철도 건설 부지 매수는 어려웠다고 하며, 당시 서울 도시계획 책임자였던 혼마 도쿠오의 고뇌를 언급했다. 조선총독이었던 사이토 마코토가 그만두라고 할 정도로, 철도나 도로 부설은 풍수를 끊는다는 이유로 거센 반발을 받았다.[15] 1912년 일본이 조선에서 삼각 측량을 실시할 때에는 "'삼각점 표석 아래에 마물이 묻혀 재앙이 온다'는 유언비어에 속지 않도록" 주의를 주는 통지를 내릴 정도였다.[14] 이러한 도시 계획은 이은의 동의를 얻어 진행되었지만,[15] 현재의 풍수 침략론으로 이어지게 된다.

1995년, 김영삼 대통령은 "광복절 50주년"을 기념하여 "역사 바로 세우기 사업"의 일환으로 과거 일본이 한반도에서 행했던 정책으로 인해 한국에 남은 "일제 잔재"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중에는 일본이 한국의 지맥과 민족정신을 끊기 위해 "풍수 침략"을 했다는 비난도 있었다. 그 예시로 유명한 것이 일본이 산 정상 등 풍수 요지에 쇠말뚝을 박았다는 "'''일제의 쇠말뚝'''"이다.[16]

1985년 북한산에서 쇠말뚝이 발견된 이후 "일제의 쇠말뚝"이 널리 믿어지게 되었다. 이 말뚝은 불규칙적이고 풍수적으로 의미가 없었지만, 일본인이 말뚝을 박았다는 증언으로 인해 굳게 믿어졌다.[18] 김영삼의 역사 바로 세우기 사업 배경에는 일제의 풍수 정책을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서길수라는 학자의 영향이 있었지만, 그는 역사학자가 아니었고, 그의 논문 역시 역사학계에서 인정받은 것이 아니었다.[19]

구로다 가쓰히로는 이러한 설을 "일제 풍수 음모설", "풍수적 매카시즘"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과도한 풍수론과 민족주의가 결합된 것이라고 단정하며, 한국 언론의 정서적인 반일 감정과 한국인의 피해자 의식이 배경에 있다고 주장했다.[20]

민간 차원의 쇠말뚝 제거 운동은 역사 바로 세우기 사업 이전부터 있었으며, 현재에도 민간인에 의한 사적인 제거 작업이 활발하다. 1미터가 넘는 것부터 아주 짧은 것까지 다양한 "쇠말뚝"이 뽑히고 있지만, 대부분은 측량용 말뚝이라는 증언도 많다.[23]

쇠말뚝 외에 유명한 것으로 조선총독부 청사가 있다. 조선총독부 청사는 일제 잔재로 판단된 것 외에도, 풍수학적 관점에서 왕궁을 막는 듯이 세워져 있고, 왕궁을 정면으로 마주보지 않고 "사선"으로 세워져 있다는 점 때문에 문제시되었다.[24] 결국 조선총독부 청사는 역사 바로 세우기 사업의 일환으로 해체되었으며, 그 해체 작업에는 퍼레이드가 열리는 등 축하 행사의 성격을 띠었다.[25]

이러한 설에 대해, 구로다 가쓰히로는 일본인은 풍수를 믿는 사람이 적고,[10] 터무니없는 설이라고 "한국 사회에서의 일종의 전설"이라고 단정하고 있다.[26] 다만, 서울대학교 신용하 교수는 일본인이 풍수를 믿지 않더라도, 풍수를 믿는 한국인에게 좌절감을 심어주기 위해 행했다고 주장하고 있다.[27]

  • 1995년, 서울의 일본 대사관 위치가 풍수 침략의 일환이라고 비판받았다. 전 서울대학교수인 풍수학자는 "수도의 주산인 북악의 정기를 빼앗고 있다", "외명당에 공급되는 정기를 차단하고 있으며, 일제에 의한 풍수 침략의 상징이다"라고 주장했다.[28]
  • 풍수는 아니지만, 일본이 건설한 조선총독부 청사, 서울시청, 북악의 상공에서 본 외관을 조합하면 "대일본"이라고 읽을 수 있다고 했다.[29][3]
  • * 2009년, 일본이 건설한 부산교도소, 경남도청, 부산부청의 상공에서 본 외관을 조합하면 "대일본"이라고 읽을 수 있다고 보도되었다.[3]

3. 2. 풍수 침략의 사례 (일본 측 주장 비판)

일본에서는 쇠말뚝 외에도 조선총독부 청사, 서울시청, 부산교도소 등의 건물이 풍수 침략의 일환으로 건설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3]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근거가 부족하며, 한국의 민족주의적 감정을 자극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특히, 이 건물들이 '대일본'이라는 글자를 형상화했다는 주장은 더욱 신빙성이 떨어진다.[3][29]

구로다 가쓰히로는 이러한 주장을 "일제 풍수 음모설", "풍수적 매카시즘"이라고 칭하며 비판했다.[20] 그는 과도한 풍수론과 민족주의가 결합된 것이라고 단정하며, 한국 언론의 정서적인 반일 감정과 한국인의 피해자 의식이 배경에 있다고 주장했다.[20]

1995년, 서울의 일본 대사관 위치가 풍수 침략의 일환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전 서울대학교수인 풍수학자는 "수도의 주산인 북악의 정기를 빼앗고 있다", "외명당에 공급되는 정기를 차단하고 있으며, 일제에 의한 풍수 침략의 상징이다"라고 주장했다.[28]

4. 쇠말뚝 괴담의 확산과 비판

한국(한반도)은 풍수설과 풍수지리설이 깊이 뿌리내린 곳이다. 신라 시대에 중국에서 들어온 풍수는 고려 시대에 통치 기반으로 작용했고, 조선 시대에는 서민들에게까지 퍼졌다.[4][5] 한국 풍수는 정치와 강하게 결합되었는데, 서울이 풍수적으로 뛰어난 도시라는 의견도 있다.[8] 조상 숭배와 함께 묏자리 선정 또한 중요하게 여겨져, 조선 말기에는 묘지 관련 분쟁이 잦았다.[9][10][11][12]

조선 시대에는 풍수 때문에 지맥을 끊는다는 전설이 종종 있었다. 태종은 이방간의 묘가 있는 산에 뜸을 떠 지맥을 끊었고,[14] 정조단천 현덕산에 쇠말뚝을 박아 북관에 인재가 없다는 "쇠말뚝 단맥설"을 주장했다.[14] 임진왜란이여송이 지맥을 끊었다는 주장도 있다.[14]

일제 강점기 당시, 조선총독부는 풍수 때문에 철도 건설 부지 매수 등에 어려움을 겪었다.[15] 1912년 삼각 측량 시에는 "삼각점 표석 아래에 마물이 묻혀 재앙이 온다"는 유언비어가 돌기도 했다.[14] 이러한 상황에서, 일제가 풍수를 끊으려 도시 계획을 했다는 주장이 현재의 풍수 침략론으로 이어졌다.

쇠말뚝 외에도 조선총독부 청사는 왕궁을 막고 정면을 마주보지 않게 지어졌다는 이유로 문제시되어 결국 철거되었다.[24][25]

4. 1. 김영삼 정부의 역사 바로 세우기 사업

1995년, 김영삼 대통령은 "광복절 50주년"을 기념하여, 이른바 "역사 바로 세우기 사업"의 일환으로 과거 일본이 한반도에서 행했던 정책으로 인해 한국 내에 잔존하는 물건들이 "일제 잔재"이며, 제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중에는 당시 일본이 한국(조선반도)의 지맥과 민족의 정기를 끊기 위해 "풍수 침략"을 감행했다는 비난이 있었다. 그 예시로 유명한 것이 일본이 산 정상 등 풍수상의 요지에 쇠말뚝을 박았다는 "'''일제의 쇠말뚝'''"이 있다.[16]

김영삼 정부는 쇠말뚝 제거를 통해 일제 잔재를 청산하고 민족정기를 회복하고자 했다. 당시 한국에서는 1985년 북한산에서 쇠말뚝이 발견된 이후 특히 "일제의 쇠말뚝"이 믿어지게 되었다. 이 말뚝은 불규칙적이고 풍수적으로 의미를 지니지 않았지만, 일본인이 말뚝을 박았다는 증언으로 인해 굳게 믿어졌다.[18]

김영삼의 역사 바로 세우기 사업 배경에는 일제의 풍수 정책을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서길수라는 학자의 영향이 있었지만, 그의 전공은 역사가 아니었으며, 그의 논문 역시 역사학계에서 인정받은 것이 아니었다.[19]

구로다 가쓰히로는 이러한 설을 "일제 풍수 음모설", "풍수적 매카시즘"이라고 칭하며 비판했다. 과도한 풍수론과 민족주의가 결합된 것이라고 단정하며, 한국 언론의 정서적인 반일 감정이 원인이며 한국인의 피해자 의식이 배경에 있다고 주장했다.[20]

민간 차원의 쇠말뚝 제거 운동은 역사 바로 세우기 사업 이전부터 있었다고 하며, 현재에도 민간인에 의한 사적인 제거 작업이 활발하다. 1미터가 넘는 것부터 아주 짧은 것까지 다양한 "쇠말뚝"이 지금도 뽑히고 있지만, 그 대부분은 측량용 말뚝이라는 증언도 많다.[23]

4. 2. 쇠말뚝 괴담에 대한 비판적 시각

쇠말뚝 괴담은 과도한 풍수론과 민족주의가 결합된 것으로, 한국인의 피해 의식과 반일 감정을 반영한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구로다 가쓰히로는 이를 "일제 풍수 음모설", "풍수적 매카시즘"이라고 칭하며 비판했다.[20] 그는 한국 언론의 정서적인 반일 감정이 원인이며, 한국인의 피해자 의식이 배경에 있다고 주장했다.[20]

일본에서는 풍수를 믿는 사람이 적기 때문에[10] 쇠말뚝 괴담은 터무니없는 주장이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구로다는 이를 "한국 사회에서의 일종의 전설"이라고 단정하고 있다.[26] 다만,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신용하 교수는 일본인이 풍수를 믿지 않더라도, 풍수를 믿는 한국인에게 좌절감을 심어주기 위해 행했다고 주장한다.[27]

김영삼의 역사 바로 세우기 사업에 영향을 준 서길수라는 학자는 역사학 전공이 아니었으며, 그의 논문 역시 역사학계에서 인정받은 것이 아니었다.[19] 따라서 역사학계에서는 쇠말뚝 괴담의 신빙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5. 현대 한국 사회와 쇠말뚝 괴담

1995년, 김영삼 대통령은 "광복절 50주년"을 기념하여 "역사 바로 세우기 사업"의 일환으로 일제 잔재 청산을 추진하면서, 일본이 한국의 지맥과 민족정기를 끊기 위해 "풍수 침략"을 했다는 주장을 제기하였고, 그 예시로 "'''일제의 쇠말뚝'''"을 언급했다.[16] 당시 김영삼 정부는 180개의 쇠말뚝을 확인하고 제거했다고 밝혔다.[17]

1985년 북한산에서 쇠말뚝이 발견된 이후, "일제의 쇠말뚝"에 대한 믿음이 확산되었다. 이 말뚝은 불규칙적이고 풍수적 의미가 없었지만, 일본인이 박았다는 증언으로 인해 쇠말뚝 괴담은 더욱 굳어졌다.[18]

구로다 가쓰히로는 이러한 설을 "일제 풍수 음모설", "풍수적 매카시즘"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과도한 풍수론과 민족주의가 결합된 것이며, 한국 언론의 정서적인 반일 감정과 한국인의 피해자 의식이 배경에 있다고 주장했다.[20] 그는 한국 언론 대부분이 "풍수 침략"론을 사실로 보도했지만, 의문을 제기하는 기사도 있었다고 언급했다.[21][22]

쇠말뚝 제거 운동은 역사 바로 세우기 사업 이전부터 민간 차원에서 있었으며, 현재도 민간인에 의한 제거 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뽑히는 "쇠말뚝"의 대부분은 측량용 말뚝이라는 증언도 많다.[23]

조선총독부 청사는 일제 잔재이자 왕궁을 막는다는 풍수적 관점에서 문제시되어, 결국 역사 바로 세우기 사업으로 해체되었다.[24] 이 해체 작업은 축하 행사처럼 진행되었다.[25]

신용하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는 일본인이 풍수를 믿지 않더라도, 풍수를 믿는 한국인에게 좌절감을 주기 위해 쇠말뚝을 박았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27]

5. 1. 관련 작품

영화 《파묘》는 쇠말뚝 괴담을 소재로 다루고 있다.

5. 2. 쇠말뚝 괴담의 지속과 의미

쇠말뚝 괴담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한반도의 지맥과 민족정기를 끊기 위해 쇠말뚝을 박았다는 이야기로, 한국 사회에 널리 퍼져 있다. 이는 역사적 사실보다는 한국 사회의 집단적 기억과 트라우마를 반영하는 현상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한국은 역사적으로 풍수지리 사상이 깊이 뿌리내린 곳이다. 신라 시대에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풍수지리는 고려 시대에 국가 통치에 활용되었고, 조선 시대에는 서민들에게까지 퍼져나갔다.[4][5] 특히, 풍수는 정치와 결합하여 천도와 같은 중요한 결정에 영향을 미쳤으며, 현재 서울은 풍수적으로 이상적인 도시로 여겨지기도 한다.[4][6][7][8] 또한, 조상 숭배 사상과 결합하여 묏자리 선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9][10][11]

조선 시대에는 풍수와 관련된 여러 전설이 등장하는데, 태종이 이방간의 묘에 뜸을 떠 지맥을 끊었다는 이야기나, 정조나라 도사 서사호함경도에 쇠말뚝을 박아 인재가 나오지 않는다는 "쇠말뚝 단맥설" 등이 대표적이다.[14] 임진왜란이여송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등에서 지맥을 끊었다는 주장도 있다.[14]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는 철도 건설 등 도시 계획 과정에서 풍수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15] 당시 사이토 총독이 그만두라고 할 정도로, 철도나 도로 부설은 풍수를 끊는다는 이유로 거센 반발을 샀다.[15] 1912년 삼각 측량 때에는 "삼각점 표석 아래에 마물이 묻혀 재앙이 온다"는 유언비어가 돌 정도였다.[14] 이러한 상황은 결국 이은의 동의를 얻어 도시 계획이 진행되었지만,[15] 이는 현재의 풍수 침략론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1995년, 김영삼 대통령은 "광복절 50주년"을 맞아 "역사 바로 세우기 사업"의 일환으로 일제 잔재 청산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이 풍수 침략을 통해 한반도의 지맥과 민족정기를 끊으려 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일제의 쇠말뚝"이 대표적인 사례로 부각되었다.[16]

쇠말뚝 괴담은 1985년 북한산에서 쇠말뚝이 발견된 이후 더욱 확산되었다.[18] 비록 이 말뚝이 풍수적 의미가 없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일본인이 박았다는 증언 때문에 쇠말뚝 괴담은 더욱 굳어졌다.[18]

구로다 가쓰히로는 쇠말뚝 괴담을 "일제 풍수 음모설", "풍수적 매카시즘"이라고 비판하며, 과도한 풍수론과 민족주의, 한국 언론의 반일 감정과 피해자 의식이 결합된 결과라고 주장했다.[20] 그는 대부분의 한국 언론이 쇠말뚝 괴담을 사실로 보도했지만, 일부 언론은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21][22]

쇠말뚝 제거 운동은 민간 차원에서 활발하게 진행되었으며,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뽑힌 쇠말뚝 대부분은 측량용 말뚝이라는 증언도 많다.[23]

쇠말뚝 괴담 외에도 조선총독부 청사가 일제 잔재이자 왕궁을 막는다는 풍수적 이유로 문제시되어, 결국 역사 바로 세우기 사업의 일환으로 해체되었다.[24][25]

신용하 교수는 일본인이 풍수를 믿지 않더라도, 풍수를 믿는 한국인에게 좌절감을 주기 위해 쇠말뚝을 박았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27]

더불어민주당은 쇠말뚝 괴담을 통해 일제 잔재 청산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지지층 결집을 유도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쇠말뚝 괴담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한일 관계 개선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참조

[1] 서적 黒田 p.132
[2] 논문 朝鮮断脈説の形成について 人文研究 1996
[3] 뉴스 釜山の市街地でも「大日本」の文字を確認 https://japanese.joi[...] 中央日報 2009-04-10
[4] 서적 黒田 p.123
[5] 서적 金 p.377
[6] 서적 荒俣 pp.68-71
[7] 서적 浅井 p.31
[8] 서적 荒俣 p.66
[9] 서적 野崎 p.22
[10] 서적 黄 p.331
[11] 서적 黒田 p.124
[12] 신문기사 朝鮮の土地紛争 url 京城日報 1916-07-23
[13] 서적 青野 p.129
[14] 웹사이트 "風水で朝鮮の「気」断とうとした?日本の鉄杭、もう一つの真実" http://www.chosunonl[...] 朝鮮日報日本語版 2013-12-29
[15] 서적 黄 pp.330-335
[16] 서적 黒田 p.125
[17] 서적 黒田 pp.126-127
[18] 웹사이트 파묘 흥행동력은 한국인 피 달구는 '일제 쇠말뚝 단맥설' https://www.asiae.co[...] 2024-05-27
[19] 웹사이트 '일제가 쇠말뚝을 박았다'는 주장은 거짓이다 https://www.newstof.[...] 2024-05-27
[20] 서적 黒田 pp.132-137
[21] 간행물 金泳三政府は「風水政権」なのか 月刊朝鮮 1995-10
[22] 서적 黒田 p.134
[23] 서적 黒田 p.136
[24] 서적 荒俣 pp.82-83
[25] 서적 黒田 p.152
[26] 서적 黒田 p.139
[27] 서적 黒田 p.136
[28] 서적 黒田 p.132
[29] 서적 黒田 pp.140-141
[30] 문서 정조실록 46권, 21년(1797 정사 / 청 가경(嘉慶) 2년) 6월 24일(계사) 1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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