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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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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서왕은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활동했다고 전해지는 브리튼의 전설적인 왕이다. 아서 왕의 이름은 로마 씨족 이름인 아르토리우스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유력하지만, 그 기원은 논쟁의 대상이다. 아서 왕의 역사적 실존 여부는 불분명하며, 9세기의 《브리튼인의 역사》, 10세기의 《캄브리아 연대기》 등에서 그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지만, 최근 연구에서는 이들의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12세기 몬머스의 제프리가 쓴 《브리타니아 열왕사》는 아서 왕의 생애를 서사적으로 서술하여 아서 왕 전설을 정립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아서 왕 이야기는 중세 문학 전통에서 널리 다루어졌으며,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 부활하여 오늘날까지 다양한 형태로 재해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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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왕 - [가상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385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아서왕의 삽화
1385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아서왕의 삽화
통치 정보
작위/직책브리튼인의 왕
재위 기간5세기 말? ~ 537년?
전임우서
후임콘스탄틴
생애 정보
사망일537년?
사망지아발론
매장지글래스턴베리
가족 관계
부모우서, 이그레인
배우자귀네비어
자녀모드레드
친척모르간 르 페이, 가웨인
소속 및 참전
소속원탁의 기사
참전앵글로색슨인의 브리타니아 정착
바돈산 전투
캄란 전투
기타 정보
복무 기간5세기 말?-537년?
계급전시 사령관()
무기엑스칼리버, 롱고미니아드

2. 이름

1922년 출판된 《소년왕 아서》의 16쪽 삽화. “그들은 그 손이 들고 있는 검에 다가갔고, 아서왕은 그것을 잡았다.”


"Arturus rex"(아서 왕), 1493년 초판 인쇄본인 ''뉘른베르크 연대기'' 삽화


아서 왕(하워드 파일 『아서 왕과 기사들』의 삽화)


"아서(Arthur)"라는 이름의 기원은 여러가지 설이 있으며, 학자들 사이에서 여전히 논쟁 중이다. 대표적인 기원설은 다음과 같다.

  • 로마식 이름 기원설: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설은 로마의 씨족 이름인 아르토리우스(Artorius)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36] 하지만 아르토리우스 자체의 기원도 불분명하며, 메사피아어[43] 또는 에트루리아어[44] 기원을 가졌다는 설도 있다.
  • 곰-왕 기원설: 브리튼어 ''*Arto-rīg-ios''("곰-왕"이라는 뜻)가 라틴화된 형태인 Artōrius를 거쳐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38]
  • 웨일스어 기원설: 웨일스어 ''arth''("곰") + ''(g)wr''("사람")에서 유래했다는 설은 음운론적 및 철자법적 이유로 현대 학자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40]
  • 아르크투루스 기원설: 목동자리의 가장 밝은 별인 아르크투루스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는데, 큰곰자리 근처에 있어 "곰의 수호자"라는 의미를 가진다.[42]

2. 1. 로마식 이름 기원설

웨일스어 이름 "아르서르(Arthyr)"의 어원은 논쟁의 대상인데, 일부에서는 로마 이름 아르토리우스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280] 그러나 이 이름은 메사피어[281][282][283] 또는 에트루리아어[284][285][286] 이름일 수도 있다는 설도 있다. 초기 라틴어 문헌에는 아서의 이름이 "아르투르(Arthur)" 또는 "아르투루스(Arturus)"로만 기록되어 있고, "아르토리우스(Artōrius)"로 기록된 것은 없다는 지적도 있다.[287] 하지만 고전 라틴어 "아르토리우스"가 일부 통속 라틴어에서 "아르투리우스(Arturius)"로 발음되었고, 이것이 웨일스어로 들어오면서 "아르투[수]르(Art[h]ur)"로 변형되었을 가능성을 고려하면, 이 지적은 "아서"라는 이름의 어원을 설명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287]

다른 설로는 브리튼의 부칭 ''*Arto-rīg-ios''(곰-왕이라는 뜻)가 라틴화된 형태 Artōrius를 거쳐 유래되었다는 주장이 있다.[288] 고대 아일랜드어 ''Art-ri''에서도 이와 비슷한 어근이 나타난다. 웨일스어로 "곰"을 뜻하는 ''arth''에 "사람"을 뜻하는 ''(g)wr''가 결합된 것이라는 소수 의견도 있지만, 음운론적 문제로 인해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는다.[289][290]

일부 학자들은 큰곰자리 근처의 별자리 목동자리에서 가장 밝은 별 아르크투루스에서 아서 왕의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주장한다.[291] 고전 라틴어 "아르크투루스(''Arcturus'')"가 웨일스로 들어오면서 "아서(''Art(h)ur'')"가 되었고, 하늘에서 밝게 빛나는 아르크투루스는 곰자리를 지키는 목동자리의 "지도자" 별이라는 것이다.[292]

고대 아일랜드어에 비슷한 이름 ''Artúr''가 있는데, 이는 고대 웨일스어 또는 캄브리아어 ''Artur''에서 직접 파생된 것으로 추정된다.[293] 이 이름을 가진 사람 중 역사상 가장 먼저 나타나는 인물은 기원후 609년에 죽은 아단 막 가브란이다.[294]

2. 2. 곰-왕 기원설

웨일스어 이름 "아르서르(Arthyr)"의 어원은 논쟁의 대상이다. 일부는 이것이 로마 이름 아르토리우스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280] 그러나 이 이름은 메사피어[281][282][283] 또는 에트루리아어 이름일 수도 있다.[284][285][286] 초기 라틴어 문헌에 아서의 이름은 "아르투르(Arthur)" 또는 "아르투루스(Arturus)"라고만 기록되어 있고, "아르토리우스(Artōrius)"라고 기록된 것은 없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고전 라틴어 "아르토리우스"가 일부 통속 라틴어에서 "아르투리우스(Arturius)"라고 발음되었고, "아르토리우스"가 웨일스어로 들어올 때 "아르투[수]르(Art[h]ur)"로 변형되는 일이 흔했음을 고려하면, 이러한 지적은 "아서"라는 이름의 어원을 설명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287]

다른 설로는 브리튼의 부칭 ''*Arto-rīg-ios''(어근 ''*arto-rīg-''는 "곰-왕"이라는 뜻으로 고대 아일랜드어 ''Art-ri''에서도 나타난다)가 라틴화된 형태 Artōrius를 거쳐 유래되었다는 것이 있다.[288]

웨일스어로 "곰"을 뜻하는 ''arth''에 "사람"을 뜻하는 ''(g)wr''가 결합된 것이라는 소수 의견도 있다. 그러나 이 이론에는 음운론적 난점이 있다. 브리튼의 합성어 이름 ''*Arto-uiros''는 고대 웨일스어로 ''*Artgur'', 중세 및 근대 웨일스어로 ''*Arthwr''는 될 수 있지만 ''Arthur''는 아니다. 웨일스 시문학에서 ''Arthur''는 항상 ''Arthur'' 로 철자되며, 운율상응로도 항상 ''-ur'' 로 끝나지, ''-wr''로 끝나지 않는다. 이것은 두 번째 성분이 "사람"이라는 뜻의 ''[g]wr''가 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289][290]

전문가 및 학자들 사이에서는 제한적으로만 수용된 다른 설에서는 아서의 어원을 큰곰자리 근처의 별자리 목동자리에서 가장 밝은 별 아르크투루스에서 찾는다.[291] 고전 라틴어 "아르크투루스(''Arcturus'')"가 웨일스로 들어오면서 "아서(''Art(h)ur'')"가 되었고, 하늘에서 밝게 빛나는 아르크투루스는 곰자리를 지키는(고대 그리스어로 아르크투루스의 뜻이기도 하다) 목동자리의 "지도자" 별인 것이다.[292]

고대 아일랜드어에 비슷한 이름 ''Artúr''가 있는데, 이는 고대 웨일스어 또는 캄브리아어 ''Artur''에서 직접 파생된 것으로 생각된다.[293] 이 이름을 가진 사람으로서 역사상 가장 먼저 나타나는 인물은 기원후 609년에 죽은 아단 막 가브란이다.[294]

2. 3. 웨일스어 기원설

아서(Arthur)라는 이름의 웨일스어 기원은 논쟁의 대상이다. 로마 이름 아르토리우스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이 일반적이다.[280] 그러나 이 이름은 메사피어[281][282][283] 또는 에트루리아어[284][285][286] 이름일 수도 있다. 초기 라틴어 문헌에는 아서의 이름이 "아르투르(Arthur)" 또는 "아르투루스(Arturus)"로만 기록되어 있고, "아르토리우스(Artōrius)"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도 지적된다.[287] 하지만 고전 라틴어 "아르토리우스"가 일부 통속 라틴어에서 "아르투리우스(Arturius)"로 발음되었고, 이것이 웨일스어로 들어오면서 "아르투[수]르(Art[h]ur)"로 변형되었을 가능성이 있어, 이 지적만으로는 어원을 설명하기 어렵다.[287]

다른 설로는 브리튼 부칭 ''*Arto-rīg-ios''("곰-왕"이라는 뜻, 고대 아일랜드어 ''Art-ri''에서도 나타남)가 라틴화된 형태 Artōrius를 거쳐 유래되었다는 주장이 있다.[288] 웨일스어 ''arth''("곰") + ''(g)wr''("사람")에서 유래했다는 소수 의견도 있지만, 음운론적으로 문제가 있다. 브리튼 합성어 ''*Arto-uiros''는 고대 웨일스어 ''*Artgur'', 중세 및 근대 웨일스어 ''*Arthwr''가 되지만, ''Arthur''는 될 수 없다. 웨일스 시문학에서 ''Arthur''는 항상 ''Arthur''로 표기되며, ''-ur''로 끝나지 ''-wr''로 끝나지 않으므로, 두 번째 요소가 ''[g]wr''일 수 없다.[289][290]

목동자리의 가장 밝은 별 아르크투루스에서 어원을 찾는 설도 있다.[291] 고전 라틴어 "아르크투루스(''Arcturus'')"가 웨일스로 들어오면서 "아서(''Art(h)ur'')"가 되었고, 아르크투루스는 곰자리를 지키는 (고대 그리스어로 아르크투루스의 뜻) 목동자리의 "지도자" 별이라는 것이다.[292]

고대 아일랜드어 ''Artúr''는 고대 웨일스어 또는 캄브리아어 ''Artur''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인다.[293] 이 이름을 가진 역사상 최초의 인물은 609년에 사망한 아단 막 가브란이다.[294]

2. 4. 아르크투루스 기원설

웨일스어 이름 "아르서르(Arthyr)"의 어원은 논쟁의 대상이다. 일부는 로마 이름 아르토리우스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지만,[280] 메사피어[281][282][283] 또는 에트루리아어[284][285][286] 이름일 수도 있다는 설도 있다. 초기 라틴어 문헌에는 "아르투르(Arthur)" 또는 "아르투루스(Arturus)"로만 기록되어 있고, "아르토리우스(Artōrius)"는 없다는 지적도 있지만,[287] 통속 라틴어에서 "아르투리우스(Arturius)"로 발음되었을 가능성과 웨일스어로 변형되는 과정을 고려하면 큰 의미가 없을 수 있다.

다른 설로는 브리튼어 ''*Arto-rīg-ios''("곰-왕"이라는 뜻)가 라틴화된 형태 Artōrius를 거쳐 유래되었다는 주장,[288] 웨일스어 ''arth''("곰")에 ''(g)wr''("사람")가 결합된 것이라는 소수 의견도 있다. 그러나 후자는 음운론적 난점이 있는데, 브리튼어 ''*Arto-uiros''는 고대 웨일스어 ''*Artgur'', 중세 및 근대 웨일스어 ''*Arthwr''가 되지만 ''Arthur''는 아니기 때문이다. 웨일스 시문학에서 ''Arthur''는 항상 ''Arthur''로 철자되며, ''-ur''로 끝나지 ''-wr''로 끝나지 않아 두 번째 성분이 ''[g]wr''가 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289][290]

큰곰자리 근처 목동자리의 가장 밝은 별 아르크투루스에서 어원을 찾는 설도 있다.[291] 고전 라틴어 "아르크투루스(''Arcturus'')"가 웨일스어로 "아서(''Art(h)ur'')"가 되었고, 아르크투루스는 곰자리를 지키는 "지도자" 별이라는 것이다.[292]

고대 아일랜드어 ''Artúr''는 고대 웨일스어나 캄브리아어 ''Artur''에서 파생된 것으로 추정된다.[293] 이 이름을 가진 사람 중 역사상 가장 먼저 나타나는 인물은 609년에 사망한 아단 막 가브란이다.[294]

2. 5. 기타 기원설

웨일스어 이름 "아르서르(Arthyr)"의 어원은 논쟁의 대상이다. 일부는 로마 이름 아르토리우스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280] 그러나 이 이름은 메사피어[281][282][283] 또는 에트루리아어 이름일 수도 있다.[284][285][286] 초기 라틴어 문헌에는 아서의 이름이 "아르투르(Arthur)" 또는 "아르투루스(Arturus)"로만 기록되어 있고, "아르토리우스(Artōrius)"로 기록된 것은 없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고전 라틴어 "아르토리우스"가 일부 통속 라틴어에서 "아르투리우스(Arturius)"로 발음되었고, 웨일스어로 들어올 때 "아르투[수]르(Art[h]ur)"로 변형되는 일이 흔했음을 고려하면, "아서"라는 이름의 어원을 설명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287]

다른 설로는 브리튼의 부칭 ''*Arto-rīg-ios''(곰-왕)가 라틴화된 형태 Artōrius를 거쳐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288] 소수 의견으로는 웨일스어로 "곰"을 뜻하는 ''arth''에 "사람"을 뜻하는 ''(g)wr''가 결합된 것이라는 설도 있지만, 음운론적 난점이 있다. 브리튼 합성어 ''*Arto-uiros''는 고대 웨일스어로 ''*Artgur'', 중세 및 근대 웨일스어로 ''*Arthwr''는 될 수 있지만 ''Arthur''는 아니다. 웨일스 시문학에서 ''Arthur''는 항상 ''Arthur'' 로 철자되며, ''-ur'' 로 끝나지, ''-wr''로 끝나지 않아 두 번째 성분이 ''[g]wr''가 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289][290]

큰곰자리 근처 목동자리에서 가장 밝은 별 아르크투루스에서 아서의 어원을 찾는 설도 있다.[291] 고전 라틴어 "아르크투루스(''Arcturus'')"가 웨일스로 들어오면서 "아서(''Art(h)ur'')"가 되었고, 아르크투루스는 곰자리를 지키는 목동자리의 "지도자" 별이라는 것이다.[292]

고대 아일랜드어에 비슷한 이름 ''Artúr''가 있는데, 이는 고대 웨일스어 또는 캄브리아어 ''Artur''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인다.[293] 이 이름을 가진 사람 중 역사상 가장 먼저 나타나는 인물은 609년에 죽은 아단 막 가브란이다.[294]

이 외에도, 아서 왕 전설과 흑해 동해안 오세트인의 나르트 서사시가 공통 기원을 가진다는 설이 주목받고 있다.[169] 특히 아서 왕의 죽음과 나르트 서사시의 영웅 바트라즈의 죽음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 아서 왕은 죽기 직전 베디비어에게 엑스칼리버를 호수에 던지라고 지시하지만, 베디비어는 거짓말을 한다. 아서 왕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은 것을 이유로 거짓말을 간파하고, 베디비어는 결국 검을 호수에 던진다. 바트라즈 역시 죽기 직전 신검을 바다에 던지라고 명령하지만, 나르트들은 거짓말을 하고, 기적이 일어나지 않자 결국 검을 바다에 던진다.

3. 역사적 실존 여부

아서왕 전설의 역사성은 오랫동안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의 대상이었다. 《브리튼인의 역사》, 《캄브리아 연대기》 등을 인용하여 아서가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앵글로색슨족에 맞서 싸운 로마-브리튼 지도자였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아서왕은 역사적 인물이 아니며, 민담 속 가공의 영웅이거나 잊혀진 켈트의 신이라는 주장도 있다.

9세기 라틴어 역사서 《브리튼인의 역사》는 아서왕에 대한 연대 추정이 가능한 가장 이른 문헌으로, 아서가 싸웠다는 열두 번의 전투를 수록하고 있다. 마지막 바돈 산 전투에서 아서는 혼자서 960명을 쳐 죽였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서는 《브리튼인의 역사》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296]

10세기 《캄브리아 연대기》는 아서를 바돈 산 전투와 연관짓고, 516년 ~ 518년에 전투가 벌어졌다고 기록한다. 또한 아서와 모드레드가 맞붙어 둘 다 죽은 캄란 전투가 537년 ~ 539년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캄브리아 연대기》는 8세기 말 웨일스에서 쓰여진 연대기를 기반으로 하고 있어, 아서 관련 기록이 10세기를 전후하여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바돈 산 전투 기록도 《브리튼인의 역사》에서 가져온 것일 수 있다.[297]

10세기 《캄브리아 연대기》(1100년경 필사본)


이러한 초기 증거 부족으로 오늘날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후로마 브리튼 시대를 논할 때 아서를 다루지 않는다. 토머스 찰스에드워즈는 "역사적 인물 아서가 존재했을 수도 있지만, 역사학자들이 그에 관해 의미있는 이야기를 해줄 수 없다"고 말한다.[298] 존 모리스는 《아서의 시대》(1973년)에서 아서의 추정 영토를 제시했지만, 역사적 인물로서의 아서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299]

일부 학자들은 아서가 역사적 존재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고고학자 노웰 미레스는 "역사와 신화의 경계에 있는 인물이 더 이상 역사학자의 시간을 낭비하게 할 수 없다"고 말했다.[300] 6세기 길다스의 《브리튼의 파괴와 정복》에는 바돈 산 전투 언급은 있지만 아서에 대한 언급은 없다.[301]앵글로색슨 연대기》, 베다 베네라빌리스의 《앵글인의 교회사》 등에도 아서는 없다.[302][303] 역사학자 데이비드 덤빌은 "아서에 관한 역사적 증거가 없다"고 말한다.[304]

일부 학자들은 아서가 민담의 가공 영웅, 또는 잊혀진 켈트의 신이라고 주장한다. 초기 문헌에서 아서가 임금으로 여겨졌는지조차 확실하지 않다. 《브리튼인의 역사》와 《캄브리아 연대기》는 그를 “왕(rexla)”이라고 부르지 않는다.[306]

로마 이후 시대 브리튼의 사료는 매우 희박하여, 아서의 역사적 존재에 관한 확정적인 대답은 어렵다. 콘월 틴타겔성 유적에서 발견된 “아서 석(Arthur stone영어)”은 6세기 유물로 확인되어 파란을 일으켰지만, 곧 무관한 것으로 밝혀졌다.[308] 글래스턴베리 십자가는 12세기경 위조된 것이라고 보고 있다.[309] 여러 역사적 인물들이 아서의 정체로 거론되지만, 이를 뒷받침할 만한 증거는 없다.[310]

3. 1. 초기 기록

아서왕 전설의 역사성은 오랫동안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의 대상이었다. 《브리튼인의 역사》, 《캄브리아 연대기》 등을 근거로 아서가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앵글로색슨족에 맞서 싸운 로마-브리튼 지도자였다는 주장이 있다.

9세기 라틴어 역사서인 《브리튼인의 역사》는 아서왕에 대한 연대 추정이 가능한 가장 이른 문헌으로, 아서가 싸웠다는 열두 번의 전투를 기록하고 있다. 마지막 바돈 산 전투에서 아서는 혼자서 960명을 쳐 죽였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서는 《브리튼인의 역사》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296]

10세기의 《캄브리아 연대기》는 아서를 바돈 산 전투와 연관짓고, 516년 ~ 518년에 전투가 벌어졌다고 기록한다. 또한 아서와 모드레드가 맞붙어 둘 다 죽은 캄란 전투가 537년 ~ 539년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캄브리아 연대기》가 8세기 말 웨일스에서 쓰여진 연대기를 기반으로 하고 있어, 아서 관련 기록이 10세기를 전후하여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바돈 산 전투 기록도 《브리튼인의 역사》에서 가져온 것일 수 있다.[297]

이러한 초기 증거 부족으로 오늘날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후로마 브리튼 시대를 논할 때 아서를 다루지 않는다. 토머스 찰스에드워즈는 "역사적 인물 아서가 존재했을 수도 있지만, 역사학자들이 그에 관해 의미있는 이야기를 해줄 수 없다"고 말한다.[298] 존 모리스는 《아서의 시대》(1973년)에서 아서의 추정상의 영토를 제시했지만, 역사적 인물로서의 아서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299]

일부 학자들은 아서가 역사적 존재가 아니라는 주장을 제기한다. 고고학자 노웰 미레스는 "역사와 신화의 경계선상에 서 있는 인물이 더 이상 역사학자의 시간을 낭비하게 할 수 없다"고 말했다.[300] 6세기 사람 길다스의 《브리튼의 파괴와 정복》에는 바돈 산 전투에 대한 언급은 있지만 아서에 대한 언급은 없다.[301]앵글로색슨 연대기》를 비롯한 기원후 400년에서 820년 사이의 필사본들 중 아서의 이름이 언급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302] 베다 베네라빌리스의 《앵글인의 교회사》에도 아서는 없다.[303] 역사학자 데이비드 덤빌은 "아서에 관한 역사적 증거가 없다"고 주장한다.[304]

일부 학자들은 아서가 민담의 가공의 영웅, 또는 잊혀진 켈트의 신이라고 주장한다. 초기 문헌에서 아서가 임금으로 여겨졌는지조차 확실하지 않다. 《브리튼인의 역사》와 《캄브리아 연대기》는 그를 “왕(rexla)”이라고 부르지 않고, “전쟁지도자(dux bellorumla)”, “군인(milesla)”이라고 부른다.[306]

로마 이후 시대 브리튼의 사료는 매우 희박하여, 아서의 역사적 존재에 관한 질문에 대한 확정적인 대답은 어렵다. 12세기 이래로 아서와 관련된 이름이 붙은 지명들이 나타나지만,[307] 고고학적으로 확신하기 위해서는 금석문 같은 물적 증거가 필요하다. 1998년 틴타겔성 유적에서 발견된 “아서 석”은 6세기 물건이 확실하여 파란을 일으켰지만, 곧 무관한 것으로 밝혀졌다.[308] 글래스턴베리 십자가는 12세기경에 위조된 것이라고 보고 있다.[309]

3. 2. 역사적 실존 부정론

아서왕 전설의 역사성은 오랫동안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의 대상이었다. 《브리튼인의 역사》, 《캄브리아 연대기》 등을 근거로 아서가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앵글로색슨족에 맞서 싸운 로마-브리튼 지도자였다는 주장이 있다.

9세기 라틴어 역사서 《브리튼인의 역사》는 아서가 싸웠다는 열두 번의 전투를 수록하고 있으며, 바돈 산 전투에서 아서가 혼자 960명을 죽였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서는 이 문헌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한다.[296]

10세기 《캄브리아 연대기》는 바돈 산 전투가 516년 ~ 518년에, 캄란 전투가 537년 ~ 539년에 있었다고 기록한다. 그러나 이 기록은 8세기 말 웨일스에서 쓰여진 연대기를 기반으로 하며, 10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어 《브리튼인의 역사》를 뒷받침하기에는 문제가 있다.[297]

이러한 초기 증거 부족으로 인해 오늘날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후로마 브리튼 시대를 논할 때 아서를 다루지 않는다. 토머스 찰스에드워즈는 “역사학자들은 그에 관해 어떠한 의미있는 이야기도 해줄 수 없다”고 말한다.[298] 존 모리스는 《아서의 시대》(1973년)에서 아서의 추정상의 영토를 제시했지만, 역사적 인물로서의 아서에 대해 할 말은 거의 없었다.[299]

일부 학자들은 아서가 역사적 존재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고고학자 노웰 미레스는 “역사와 신화의 경계선상에 서 있는 인물이 더 이상 역사학자의 시간을 낭비하게 할 수 없다”고 말했다.[300] 6세기 길다스의 《브리튼의 파괴와 정복》에는 바돈 산 전투에 관한 언급은 있지만 아서에 관한 언급은 없다.[301]앵글로색슨 연대기》, 베다 베네라빌리스의 《앵글인의 교회사》 등에도 아서는 없다.[302][303] 역사학자 데이비드 덤빌은 “아서에 관한 역사적 증거가 없다”고 말한다.[304]

일부 학자들은 아서가 민담의 가공의 영웅, 또는 잊혀진 켈트의 신이라고 주장한다. 초기 문헌에서는 아서가 임금으로 여겨졌는지조차 확실하지 않다. 《브리튼인의 역사》와 《캄브리아 연대기》 둘 다 그를 “왕(rexla)”이라고 부르지 않는다.[306]

로마 이후 시대 브리튼의 사료는 매우 희박하기에, 아서의 역사적 존재에 관한 질문에 대한 확정적인 대답은 있기 어려울 것 같다. 콘월의 틴타겔성 유적에서 발견된 “아서 석(Arthur stone영어)”은 6세기 물건이 확실하여 잠깐 파란을 일으켰지만, 곧 무관한 것으로 밝혀졌다.[308] 글래스턴베리 십자가는 12세기경에 위조된 것이라고 보고 있다.[309]

3. 3. 역사적 실존 가능성

아서왕 전설의 역사성은 오랫동안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의 대상이었다. 9세기 웨일스의 사제 넨니우스가 썼다고 알려진 《브리튼인의 역사》는 아서왕에 대한 연대 추정이 가능한 가장 이른 문헌으로, 아서가 참여한 열두 번의 전투를 기록하고 있다. 이 중 마지막 전투인 바돈 산 전투에서 아서는 혼자 960명을 죽였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서는 이 문헌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296]

10세기의 《캄브리아 연대기》 또한 아서를 바돈 산 전투와 연관짓고, 전투가 516년 ~ 518년에, 아서와 모드레드가 모두 죽은 캄란 전투가 537년 ~ 539년에 있었다고 기록한다. 그러나 이 기록 역시 8세기 말 웨일스에서 쓰여진 연대기에 기반하고 있어, 10세기를 전후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바돈 산 전투에 관한 기록은 《브리튼인의 역사》에서 가져온 것일 가능성이 제기된다.[297]

이러한 초기 증거 부족으로 인해 오늘날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후로마 브리튼 시대를 논할 때 아서를 다루지 않는다. 토머스 찰스에드워즈는 "역사적 인물 아서가 존재했을 수도 있지만, 역사학자들은 그에 대해 의미있는 이야기를 해줄 수 없다"고 언급했다.[298] 존 모리스는 《아서의 시대》(1973년)에서 아서의 추정상의 영토를 제시했지만, 역사적 인물로서의 아서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못했다.[299]

일부 학자들은 아서가 역사적 존재가 아니라 민담 속 가공의 영웅이거나 잊혀진 켈트의 신이라고 주장한다. 고고학자 노웰 미레스는 "역사와 신화의 경계선상에 서 있는 인물이 더 이상 역사학자의 시간을 낭비하게 할 수 없다"고 말했다.[300] 6세기 사람 길다스의 《브리튼의 파괴와 정복》에는 바돈 산 전투에 대한 언급은 있지만 아서에 대한 언급은 없다.[301]앵글로색슨 연대기》나 8세기 초 베다 베네라빌리스의 《앵글인의 교회사》를 비롯한 다른 초기 문헌에도 아서는 등장하지 않는다.[302][303] 역사학자 데이비드 덤빌은 "아서에 관한 역사적 증거가 없으므로, 우리는 그를 역사에서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304]

아서가 켄트의 헹기스트와 호르사처럼 토테미즘적 말의 신이었다가 역사화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305] 초기 문헌에서 아서가 왕으로 여겨졌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브리튼인의 역사》와 《캄브리아 연대기》는 그를 "왕(rexla)"이 아닌 "전쟁지도자(dux bellorumla)" 또는 "군인(milesla)"으로 칭한다.[306]

1998년 콘월의 틴타겔성 유적에서 발견된 "아서 석"은 6세기 유물로 확인되어 파란을 일으켰지만, 곧 관련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308] 글래스턴베리 십자가 역시 12세기경 위조된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309]

결론적으로, 로마 이후 시대 브리튼의 사료는 매우 희박하여 아서의 역사적 존재에 대한 확정적인 대답은 어렵다. 여러 역사적 인물들이 아서의 정체로 거론되지만, 이를 뒷받침할 만한 증거는 없다.[310]

4. 중세 문학 전통

오늘날 널리 알려진 아서 왕의 이미지는 1130년경에 몬머스의 제프리가 쓴 유사역사서 『브리타니아 열왕사』에서 비롯되었다. 이 때문에 아서 왕 관련 문헌은 제프리의 저작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제프리 이전 시대를 '프리-갈프리디안(Pre-Galfridian, 제프리의 라틴어 이름 갈프리두스(Galfridus)에서 유래)'이라고 하며, 이후 시대를 '포스트-갈프리디안(post-Galfridian, 혹은 단순히 갈프리디안)'이라고 부른다.

12세기부터 13세기에 걸쳐 유럽 대륙, 특히 프랑스에서 새로운 아서 왕 문학, 즉 '브르타뉴 계열' 작품이 다수 등장했다. 이는 제프리의 『브리타니아 열왕사』와 그 파생 작품(바스의 『브뤼 이야기』 등)이 큰 인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브리튼 이야기'의 발전에 영향을 준 것은 제프리뿐만이 아니었다. 제프리의 작품이 널리 알려지기 전부터 이미 대륙에 아서 왕과 관련 이야기가 전해졌다는 증거가 있으며(예: 모데나 대성당의 아키볼트), 제프리의 작품에는 없는 켈트식 이름과 이야기가 대륙의 로맨스에 등장한다.[90][91]

이러한 새로운 아서 왕 이야기들의 등장은 이야기 속 아서 왕의 역할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12세기 이후의 아서 왕 문학은 아서 왕 자신보다는 랜슬롯, 귀네비어, 퍼시벌, 갤러해드, 가웨인, 트리스탄과 이졸데 등 주변 인물에 더 초점을 맞추었다. 제프리 이전의 작품과 『열왕사』에서는 아서 왕이 이야기의 중심이었지만, 로맨스에서는 조연으로 밀려났다.[92]

아서 왕의 성격 또한 크게 변했다. 초기 작품과 『열왕사』에서 아서 왕은 위대한 전사로서, 마녀나 거인을 직접 처치하고 전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93] 반면, 대륙의 로맨스에서 아서 왕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왕(roi fainéant)'이 되어, 이상적인 사회의 균열을 방치한다.[94] 프랑스 작품에서 아서 왕은 현명하고 위엄 있지만, 다소 평범하고 때로는 나약한 군주로 묘사된다. 예를 들어, 『아서 왕의 죽음』에서 아서 왕은 랜슬롯과 귀네비어의 불륜을 알고도 침묵하며, 크레티앵 드 트루아의 『사자의 기사 이뱅』에서는 연회 후 낮잠을 자려고 침실로 들어간다.[95] 그러나 노리스 J. 레이시가 지적했듯이, 로맨스 속 아서 왕에게 약점이 나타나더라도 "그의 명성은 개인적인 약점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으며, 그의 권위와 영광은 온전히 남았다."[96]



아서 왕과 그 수행단은 마리 드 프랑스의 레 여러 편에 등장한다.[98] 아서 왕의 캐릭터와 전설을 정립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프랑스 시인 크레티앵 드 트루아였다.[99] 크레티앵은 1170년경에서 1190년경 사이에 다섯 편의 아서 왕 로맨스를 썼다.

  • 『에레크와 에니드』와 『클리제』: 아서 왕의 궁정을 배경으로 한 궁정 연애담으로, 웨일스 신화나 제프리의 영웅적 세계관과는 거리가 멀다.
  • 『사자의 기사 이뱅』: 이바인과 가웨인이 초자연적인 모험을 하는 내용으로, 아서 왕은 쇠약하고 무기력한 조연이다.
  • 『수레의 기사 랑슬로』: 랜슬롯과 귀네비어의 불륜 관계를 추가하여 묘한 순환 구도를 만들었다.
  • 『성배 이야기 퍼시벌』: 성배어부왕 소재가 추가되면서 아서 왕의 역할은 더욱 축소되었다.[100]


크레티앵은 "아서 왕 전설을 정교화하고, 그 전설이 발산할 이상적인 형태를 정립"했다.[101] 이후 아서 왕을 다룬 작품들은 대부분 크레티앵이 쌓아놓은 토대를 기반으로 아서 왕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퍼시벌』은 미완성작이었지만 인기가 좋아 이후 반세기에 걸쳐 속편을 자처하는 시만 네 편이 더 나왔다. 성배 탐색은 로베르 드 보롱 등의 작가들에 의해 발전되었고, 그 과정에서 아서 왕의 위치는 계속 좁아졌다.[102] 랜슬롯과 귀네비어의 불륜은 아서 왕 전설의 고전적인 모티프가 되었다. 산문 『랑슬로』(1225년경) 등은 크레티앵의 캐릭터와 울리히 폰 차치크호벤의 『란첼레트』의 캐릭터를 혼합해 사용하고 있다.[103] 크레티앵의 작품들은 웨일스로 역수입되었고, 영웅적인 웨일스의 아서 왕이 무훈시의 나약하고 비중 없는 아서 왕으로 대체되기 시작한다.[104]

원탁성배의 상이 나타났다. 에브라르 데스팽크의 1475년 경 작품


1210년경 이전까지 대륙의 아서 왕 로맨스는 대개 시의 형태로 쓰였지만, 이후로는 산문 형태로 이야기가 쓰이기 시작했다. 13세기 산문 무훈시 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13세기 상반기에 쓰인 중세 프랑스어 산문 작품들로 이루어진 불가타 대계(랜슬롯-성배 대계)이다.[107] 대계를 이루는 이야기들로는 〈성배의 이야기〉, 〈메를랭의 이야기〉, 〈정결한 랑슬로〉(이 작품 혼자서 불가타 대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성배 탐색〉, 〈아서 죽다〉가 있다. 불가타 대계는 갤러해드를 추가하고 멀린의 역할을 늘려 아서 왕의 역할을 축소했다. 또한 모드레드를 아서 왕과 그 누이 사이에 태어난 사생아라고 설정했고, 카멜롯을 아서 왕의 궁정이 소재한 곳으로 확정시켰다.[108] 불가타 후 대계(1230년경 ~ 1240년경)가 불가타 대계의 뒤를 이었다. 그중 〈메를랭의 수행원〉은 랜슬롯과 귀네비어의 불륜 비중을 줄였지만, 아서 왕은 여전히 곁다리 조연이었다. 대신 성배 탐색에 집중했다.[107] 아서 왕은 프랑스 산문 무훈시들에서 더욱 축소된 단역으로 전락한다. 불가타 대계만 해도 아서 왕이 제대로 등장하는 것은 〈메를랭의 이야기〉와 〈아서 죽다〉 둘뿐이다. 이 시기에 아서 왕은 기사도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구위인(세 명의 이교도, 세 명의 유대인, 세 명의 기독교인) 중 한 명으로 추앙된다. 구위인 개념은 1312년 자크 드 롱귀용의 ''Voeux du Paon''에 처음 등장했다.[109]

중세 아서 왕 이야기 대계와 "무훈시의 아서"는 토머스 맬러리의 『아서 왕의 죽음』에 의해 끝을 맺는다. 『아서 왕의 죽음』은 15세기 말 맬러리가 전체 전설을 한 권으로 정리한 영어 책이다. 원제는 《아서 왕과 그 명예로운 기사들과 원탁 전서》였다. 맬러리는 불가타 대계를 참조해 종합적인 아서 왕 이야기 모음집을 만들고자 했다.[110] 『아서 왕의 죽음』은 1485년 윌리엄 캑스턴에 의해 간행되었다. 이후의 아서 왕 관련 작품들은 거의 모두 맬러리의 책에서 파생된 것들이다.[111]

4. 1. 제프리 이전의 전통

아서가 등장하는 초기 웨일스어 문헌 중 가장 유명한 《어 고도딘》(1275년경)의 사본.


아서에 관한 최초의 문헌 기록은 웨일스 및 브르타뉴에서 나타난다. 제프리 이전의 전통에서는 아서의 특징과 캐릭터를 전체적으로 정의하려는 시도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각각의 문헌 또는 이야기에서만 나타난다. 2007년 학계 조사를 통해 토머스 그린(Thomas Green)은 이 시기 문헌에 묘사되는 아서의 세 가지 모습을 밝혀냈다.[311] 첫째, 아서는 괴물을 사냥하고 모든 내우외환으로부터 브리튼을 수호하는 비할 데 없는 전사이다. 아서의 전공 중 일부는 《브리튼인의 역사》의 색슨족과의 싸움처럼 인간들끼리의 싸움이지만, 대부분은 거대한 고양이 괴물, 신적인 멧돼지, 드래곤, 개 머리 인간, 거인, 마녀 등 초자연적 존재들을 상대하는 내용이다.[312] 둘째, 제프리 이전의 아서는 설화(특히 지명전설 등) 및 마법적 이야기의 등장인물로서 황무지를 누비는 초인적 영웅들의 무리를 이끄는 지도자이다.[313] 셋째, 웨일스의 별세계 안눈과의 연관성이다. 어떤 이야기에서는 아서가 보물을 찾아 별세계의 성을 공격하고 거기 잡혀 있던 사람들을 풀어주기도 하는 반면, 또 다른 이야기에서는 아서의 당여 중에 과거 비기독교의 신이었던 존재가 포함되어 있거나, 아서의 아내와 소지품들이 별세계에서 온 것임이 분명해 보이기도 한다.[314]

아서가 언급되는 웨일스어 시가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6세기 시인 아네이린이 썼다고 하는 영웅적인 죽음 노래들의 모음집인 《어 고도딘》(''Y Gododdin'')이다. 한 구절에서 적 300명을 쳐 죽인 전사의 용맹을 찬양하다가, “그는 아서는 아니었다”고 하는데, 이는 곧 그 전사가 아무리 뛰어나도 아서의 용맹에는 비할 바가 되지 못한다는 뜻이다.[315] 《어 고도딘》은 13세기에 만들어진 필사본으로만 전해지기 때문에, 이 아서에 관한 언급이 원래부터 있던 것인지, 아니면 후대에 삽입된 것인지 확실히 판별할 수 없다. 존 코흐(John Koch)는 이 구절이 7세기 이전에 쓰여진 것이라고 하지만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고, 대개 9세기 또는 10세기가 가장 흔히 제기된다.[316] 6세기 사람 탈리에신이 썼다고 하는 시 여러 편에서도 아서가 언급되지만, 이것들은 거의 다 8세기에서 12세기 사이에 쓰여진 것으로 추측된다.[317] 탈리에신의 시들 중에서 예시를 꼽아보면 〈왕자의 의자〉("Kadeir Teyrnon")에서[318] “축복받은 자 아서”가 언급되고, 〈안눈의 전리품〉("Preiddeu Annwn")에서[319] 앞서 언급한 아서의 별세계 원정 이야기가 나오며, 〈우서 펜[드래건] 비가〉("Marwnat vthyr pen[dragon]")에서[320] 아서의 용맹을 이야기하면서 아서와 우서가 부자관계일 가능성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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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가 언급되는 다른 초기 웨일스어 문헌으로는 《카이르버르딘의 흑색서》(''Llyfr Du Caerfyrddin'')에 실린 시 〈문지기는 어떤 이냐?〉("Pa gur yv y porthaur?") 등이 있다.[322] 이 시는 아서와 아서가 들어가려고 하는 한 성의 문지기 사이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는데, 아서는 자신과 자기 부하들의 이름과 업적, 특히 카이(케이)와 베드위르(베디비어)에 관한 내용을 읊는다. 마비노기온에도 포함되는 웨일스어 산문 이야기 《쿨후흐와 올루엔》(''Culhwch ac Olwen'', 1100년 경)에는 아서의 부하 이름이 200개 이상 나열되어 있는데, 본격적으로 활약하는 것은 카이와 베드위르 정도이다. 이 이야기에서 아서는 사촌 쿨후흐가 거인들의 두목 이스바다덴의 딸 올루엔과 결혼하기 위하여 이스바다덴이 요구하는 불가능해 보이는 임무들(예컨대 반신적 멧돼지 투르흐 트뤼스를 잡는 것 등)을 수행하는 것을 도와준다. 9세기의 《브리튼인의 역사》에도 이 이야기가 나오는데, 여기서는 멧돼지 이름이 "트로인트(Troy[n]t)"라고 한다.[323] 웨일스의 전설 민담들의 짤막한 요약을 모아서 외우기 좋게 세 명의 관련된 등장인물들에 따라 분류해 둔 《프러데인섬의 삼제시》에도 아서가 여러 차례 언급된다. 《삼제시》의 후기 필사본은 몬머스의 제프리 및 그 뒤의 대륙 유럽의 무훈시의 영향을 받았지만, 초기 필사본은 그러한 오염의 흔적이 없으며, 대개 고래의 웨일스 전통이 기록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이 이야기들에서도 아서의 궁정이 브리튼 섬 전체를 포함하는 것처럼 되어 있다. 《삼제시》의 내용은 “모처의 어떠한 세 가지”라고 한 뒤 그 세 가지의 이름과 활동을 나열하는 식으로 공식화되어 있는데, 이때 “프러데인섬의 3대 XXX” 같은 것에서 “프러데인섬”이라는 표현 자체가 “아서의 궁정”으로 대체될 때도 있다.[324] 《브리튼인의 역사》 및 《캄브리아 연대기》에서는 아서가 영웅이기는 하지만 왕인지는 확실하지 않은데, 〈쿨후흐와 올루엔〉, 《삼제시》가 쓰여진 시기에 오면 아서를 웨일스와 콘월과 북부의 대군주인 “이 섬의 가장 우두머리 군주(Penteyrnedd yr Ynys hon|펜테이르네드 이르 어니스 혼cy, Chief of the Lords of this Island영어)”라고 칭하게 된다.[325]



제프리 이전의 웨일스의 시 및 이야기뿐 아니라, 《브리튼인의 역사》와 《캄브리아 연대기》 이외의 일부 초기 라틴어 문헌에서도 아서가 등장한다. 특히 로마 이후 시대 기독교 성인들의 여러 전기(성인록)에 아서가 등장하는데, 이들 전기들은 대개 믿을 만한 사료가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가장 오래된 것이 11세기경의 물건이다).[327] 12세기 초에 흘란카르판의 카라독이 쓴 《성 길다스의 생애》에 보면, 아서가 길다스의 형제 후에일(Hueil)을 죽이고 그 아내 그엔휘파르(Gwenhwyfar)를 글래스턴베리에서 구출했다고 한다.[328] 1100년경 또는 그보다 약간 이전에 흘란카르판의 리프리스(Lifris)가 쓴 《성 카독의 생애》에서는 카독이 아서의 병사 세 명을 죽인 한 남자를 보호해주었다고 한다. 아서는 병사들의 목숨값으로 소 한 떼를 요구했고, 카독은 요구받은 대로 소를 주었다. 그러나 아서가 소 떼를 받자 소들은 고사리 뭉치들로 변해 버렸다.[329] 12세기 전후에 쓰여진 카란노그, 판다른, 에우플람(Eufflam) 등의 성인록에도 비슷한 이야기들이 나와 있다. 《성 고에즈노비의 전설》에는 이보다는 덜 전설적인 아서에 대한 언급이 있다. 이 문헌은 11세기 초에 쓰여졌다고 스스로 주장하지만, 가장 오래된 필사본은 15세기 물건이다.[330] 말름즈베리의 윌리엄의 《앵글로 왕국의 사적》과 헤르만의 《라우덴시스의 성 마리아의 기적》에서도 아서가 언급되는데, 이 두 문헌은 아서가 죽지 않고 언젠가 귀환할 것이라는 믿음에 대한 가장 오래된 증거이다. 이 왕의 귀환이라는 주제는 제프리 이후의 민담에서도 자주 회자된다.[331]

4. 2. 몬머스의 제프리

몬머스의 제프리가 라틴어로 쓴 《브리타니아 열왕사》(''Historia Regum Britanniae''la)는 1138년경 완성되었으며, 아서의 삶을 서사적으로 서술한 최초의 기록이다.[332] 이 책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트로이의 브루타스가 브리튼 땅으로 이주한 이래 7세기 웨일스 왕 카드왈라드에 이르기까지의 공상적인 브리튼 왕들을 매우 상상적으로 서술한 것이다. 제프리는 《브리튼인의 역사》나 《캄브리아 연대기》에서처럼 아서를 로마 지배 이후 시대 사람으로 비정했다. 그는 아서와 우서 펜드래건 사이의 부자관계, 마법사 조언자 멀린, 우서가 멀린의 마법으로 적 고를로이스로 둔갑하고 틴타겔에서 고를로이스의 아내 이그라이네와 동침하여 아서를 수태시켰다는 이야기 등을 정립했다. 우서가 죽자 아서는 15세의 나이로 브리튼 국왕 자리를 계승하고 《브리튼인의 역사》와 비슷하게 색슨인과 여러 차례의 전투를 치렀고, 이러한 무훈은 바스 전투에서 절정에 이른다. 그 뒤 아서는 북쪽의 픽트인스코트인을 쳐부수고 아일랜드, 아이슬란드, 오크니 제도를 정복하여 아서 제국을 세운다. 12년간의 평화가 있은 뒤, 아서는 다시 정복사업에 나서 노르웨이, 덴마크, 갈리아를 정복한다. 아서의 정복지 중 갈리아는 로마 제국의 영토였기에 아서의 승리는 필연적으로 아서의 제국과 로마 제국 사이의 대결로 이어진다. 아서와 그의 전사들(카이우스 = 케이, 베두에루스 = 베디비어, 구알구아누스 = 가웨인 등)은 갈리아에서 로마 황제 루키우스 티베리우스를 격파한다. 그러나 아서가 로마로 진격하려는 순간 아서의 조카 모드레우스(= 모드레드)가 브리튼 땅에서 반란을 일으켜 구엔후아라(= 귀네비어) 왕비를 자기 아내로 삼고 왕좌를 차지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아서는 브리튼으로 회군하여 콘월의 캄블람강에서 모드레우스를 죽이지만 자신도 치명적인 부상을 입는다. 아서는 일가붙이 중 한 명인 콘스탄틴에게 왕관을 물려주고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아발론 섬으로 떠난다. 그 뒤로 아서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한다.[333]

섬네일


상술한 이야기 중 제프리의 오리지널 창작 지분이 얼마나 되는지는 아직도 논쟁의 대상이다. 제프리가 9세기 문헌인 《브리튼인의 역사》와 《캄브리아 연대기》에서 각각 색슨인과의 열두 차례의 전투, 모드레드와의 캄란 전투 같은 것들을 차용해 왔고, 또 아서가 메시아처럼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개념도 과거부터 존재했던 것을 가져왔다는 것은 확실하다.[335] 아서가 브리튼 전체의 왕이라는 칭호 역시 제프리 이전의 〈쿨후흐와 올루엔〉, 《프러데인섬의 삼제시》, 성인전 등에서 빌려온 것으로 생각된다.[336] 또한 제프리는 아서의 가족, 동료 등의 인명을 자기 이전의 웨일스 신화에서 그대로 가지고 왔는데, 대표적으로 카이우스는 웨일스의 카이이고, 베두에루스는 베드위르, 구엔후아라는 그웬휘파르, 우서는 우서르이다. 또 칼리부르누스 역시 웨일스의 칼레드풀흐일 가능성이 있다. 칼레드풀흐는 후기 아서 이야기에서 엑스칼리버로 등장한다.[337] 그러나 인명, 주요 사건, 칭호 등이 차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브리늘리 로버츠(Brynley Roberts)는 제프리의 아서 이야기는 제프리 자신의 문학적 창작이며 제프리 이전의 이야기들에 빚진 바가 전혀 없다고 주장한다.[338] 예컨대 웨일스의 메드라우트는 제프리에 의해 악당 모드레우스로 창작되었지만, 웨일스어 문헌들에서는 16세기가 될 때까지 이렇게 부정적인 등장인물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339] 오늘날 《브리타니아 열왕사》가 그 전까지의 전승보다 제프리의 창작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설에 이의를 제기하는 목소리는 극소수이다. 학자들의 의견은 12세기 후반 뉴버리의 윌리엄이 제프리가 자기 이야기를 "만들어냈"으며, 어쩌면 "거짓말에 대한 지나친 사랑"을 통해 만들어냈다고 말한 것과 공명되는 바가 있다.[340] 이런 시각에 반대하는 사람 중에는 제프리 애시가 있다. 그는 제프리의 이야기가 5세기의 브리튼 왕 리오타무스의 행적을 서술한 지금은 소실된 문헌에 기반한 것이며, 이 리오타무스가 아서의 원래 모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애시의 주장과 그 결론을 따르는 역사학자나 켈트학자는 거의 없다.[341]

몬머스의 제프리가 사용한 문헌이 무엇이었건 간에, 《브리타니아 열왕사》가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제프리의 라틴어판 필사본만 해도 잘 보존된 것이 200점 이상 남아 있으며, 다른 언어로 번역된 것들까지 고려하면 셀 수 없이 많아진다.[342] 예컨대 웨일스어로 번역된 《열왕사》 필사본은 약 60 점이 남아 있으며, 그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3세기에 만들어졌다. 이러한 웨일스어 판본들 중 일부가 오히려 제프리의 《열왕사》의 기저를 이루었다는 오랜 생각은 18세기의 루이스 모리스 같은 고전학자들에 의해 발전된 것으로서, 오랜 세월을 거쳐 오늘날의 학계에서는 평가절하되고 있다.[343] 이렇게 인기가 좋았기 때문에 제프리의 《브리타니아 열왕사》는 이후 중세의 아서왕 전설의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물론 《열왕사》가 중세 아서 무훈시들의 배후에 도사린 유일한 창조적 힘이었을 리는 없지만, 멀린의 존재나 아서의 최후 같은 많은 요소들이 여기서부터 파생되어 발달하였고, 무훈시인들의 마법적인 모험 이야기들 속에 역사적 뼈대를 제공한 것이 바로 《열왕사》인 것이다.[344]

4. 3. 무훈시 전통

12세기가 되면 트리스탄과 이졸데 같은 다른 이야기들이 "아서" 이야기에 추가되면서 아서라는 인물 자체는 곁다리로 밀려나는 경향을 보인다. 그림은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의 1916년 작품.


몬머스의 제프리의 《열왕사》 및 그 파생 작품들(와스의 《브뤼 이야기》 등)은 12세기 ~ 13세기에 걸쳐 중앙유럽, 특히 프랑스에서 상당한 수의 아서물 작품들이 나오는 데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345] 그러나 "브리튼 이야기"를 형성하는 데 제프리류만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다. 제프리의 저작들이 널리 알려지기 전부터 대륙 유럽에서 아서 및 아서 이야기가 친숙했다는 증거가 존재한다(예: 모데나 대성당의 홍예궁륭).[346] 제프리의 《열왕사》에는 나타나지 않는 켈트식 이름과 이야기들이 아서 무훈시들에는 나타난다.[347]

이 새로운 아서 이야기들의 대분출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아서왕이라는 인물 자체의 역할 변화였다. 12세기 및 그 이후의 아서물 문학은 아서 본인보다는 랜슬롯과 귀네비어, 퍼시발, 갤러해드, 가웨인, 트리스탄과 이졸데 등 주변 인물에게 더 주목했다. 제프리 이전의 전통과 제프리의 《열왕사》가 아서에게 큰 비중을 주었던 것과 비교하면 무훈시들에서의 아서는 거의 곁다리로 밀려나 있다.[348]

아서의 성격도 상당히 변화했다. 고대 전승이나 제프리의 책에 나오는 아서는 위대하고 흉포한 전사로서, 마녀나 거인 같은 괴물들을 쳐죽이며 광소하고, 군사 원정이 있을 때면 언제나 군의 선두에 서는 인물이었다.[349] 반면 대륙 유럽의 무훈시에 나오는 아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며, 자신의 이상 사회의 균열도 방치한다.[350] 프랑스 작품들에서 아서는 현명하고 위엄있고 침착하지만 다소 단조롭고 때로는 나약한 군주이다. 랜슬롯이 귀네비어와 불륜했다는 사실을 듣고도 침묵하고, 크레티앵 드 트루아의 《사자의 기사 위바인》에서는 숙취로 낮잠을 자야 하는 인간으로 묘사된다.[351] 노리스 J. 레이시는 무훈시들의 아서에게서 약점이 나타나긴 하지만, “그의 위신은 그 개인적 약함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 그의 권위와 영광은 온전히 남았다.”라고 분석했다.[352]

아서와 그 수행단은 마리 드 파리의 《설화시》 중 일부에 나타난다.[354] 아서의 캐릭터와 전설을 정립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프랑스 시인 크레티앵 드 트루아였다.[355] 크레티앵은 1170년 경에서 1190년 사이에 아서 무훈시를 다섯 편 썼다. 〈에레크와 에니드〉, 〈클리게스〉는 아서의 궁정을 배경으로 삼은 궁정 연애담으로, 웨일스 신화나 제프리의 아서에게서 보이는 영웅적 세상과는 동떨어져 있다. 〈사자의 기사 이바인〉은 이바인과 가웨인이 초자연적 모험을 하는 내용으로서, 아서는 쇠약하고 노쇠한 조연이다. 〈수레의 기사 랑슬로〉는 랜슬롯과 아서의 왕비(귀네비어) 사이의 불륜관계를 추가하여 묘한 순환 구도를 만들었다. 〈퍼시벌과 성배 이야기〉에서 성배어부왕 소재가 추가되면서 아서의 역할은 더욱 축소되었다.[356] 크레티엥은 “아서 전설의 정교화 및 그 전설이 발산할 이상적 형태를 정립”했다.[357] 크레티엥 이후 아서를 다룬 작품들은 대부분 크레티엥이 쌓아놓은 토대를 기반으로 아서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퍼시벌과 성배 이야기〉는 미완성작이었지만 인기가 좋아 이후 반 세기에 걸쳐 속편을 자처하는 시만 네 편이 더 나왔다. 성배 탐색은 로베르 드 보롱 등의 작가들에 의해 발전되었고, 그 과정에서 아서의 위치는 계속 좁아졌다.[358] 랜슬롯과 귀네비어의 불륜은 고전적 아서 전설 모티프가 되었다. 산문 《랑슬로》(''Lancelot'', 1225년경) 등은 크레티엥의 캐릭터와 울리히 폰 자치크호벤의 《란첼레트》(''Lanzelet'')의 캐릭터를 혼합해 사용하고 있다.[359] 크레티엥의 작품들은 웨일스로 역수입되었고, 영웅적인 웨일스의 아서가 무훈시의 나약하고 비중없는 아서로 대체되기 시작한다.[360] 이 과정에서 중요한 웨일스의 아서 무훈시 세 작품이 있다. 〈호수의 귀부인 오와인〉은 크레티엥의 〈사자의 기사 이바인〉에 대응하고, 〈게라인트와 에니드〉는 〈에레크와 에니드〉에, 〈에프라우그의 아들 페레두르〉는 〈퍼시벌과 성배〉에 대응한다.[361]

1210년 경 이전까지 대륙 아서 무훈시는 대개 시의 형태로 쓰여졌다. 이후로는 산문 형태로 이야기가 쓰이기 시작한다. 13세기 산문 무훈시 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13세기 상반기에 쓰여진 중세 프랑스어 산문 작품들로 이루어진 불가타 대계(랜슬롯-성배 대계)이다.[363] 대계를 이루는 이야기들로는 〈성배의 이야기〉(''Estoire del Saint Grail''), 〈메를랭의 이야기〉(''Estoire de Merlin''), 〈정결한 랑슬로〉(''Lancelot propre''; 이 작품 혼자서 불가타 대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성배 탐색〉(''Queste del Saint Graal''), 〈아서 죽다〉(''Mort Artu'')가 있다. 불가타 대계는 갤러해드를 추가하고 멀린(메를랭)의 역할을 늘려 아서의 역할을 축소했다. 또한 모드레드를 아서와 그 누이 사이에 태어난 사생아라고 설정했고, 카멜롯을 아서의 궁정이 소재한 곳으로 확정시켰다.[364] 불가타 후 대계(1230년 경 ~ 1240년 경)가 불가타 대계의 뒤를 이었다. 그 중 〈메를랭의 수행원〉(''Suite du Merlin'')는 랜슬롯과 귀네비어의 불륜 비중을 줄였지만, 아서는 여전히 곁다리 조연이었다. 대신 성배 탐색에 집중했다.[363] 아서는 프랑스 산문 무훈시들에서 더욱 축소된 단역으로 전락한다. 불가타 대계만 해도 아서가 제대로 등장하는 것은 〈메를랭의 이야기〉와 〈아서 죽다〉 둘 뿐이다. 이 시기에 아서는 기사도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구위인(세 명의 이교도, 세 명의 유대인, 세 명의 기독교인) 중 한 명으로 추앙된다. 구위인 개념은 1212년 자크 드 롱귀용의 ''Voeux du Paon''에 처음 등장했다.[365]

가웨인 경과 녹기사〉 삽화(14세기). 가운데 위에 있는 사람이 아서.


중세 아서 이야기 대계와 “무훈시의 아서”는 토마스 맬러리의 《아서왕의 죽음》에 의해 끝을 맺는다. 《아서왕의 죽음》은 15세기 말 맬러리가 전체 전설을 한 권으로 정리한 영어 책이다. 원제는 《아서왕과 그 명예로운 기사들과 원탁 전서》( ''The Whole Book of King Arthur and of His Noble Knights of the Round Table'')였다. 맬러리는 불가타 대계를 참조해 종합적인 아서 이야기 모음집을 만들고자 했다.[366] 《아서왕의 죽음》은 1485년 윌리엄 캑스턴에 의해 간행되었다. 이후의 아서 관련 작품들은 거의 모두 맬러리의 책에서 파생된 것들이다.[367]

5. 쇠락과 부활, 그리고 오늘날

중세가 끝나면서 아서 왕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 쇠퇴했다. 토머스 맬러리가 프랑스 무훈시들을 영어로 번역한 작품들이 인기를 끌었지만, 몬머스의 제프리가 정립한 아서 무훈시의 역사적 뼈대에 대한 진실성에 의문이 제기되면서 브리튼 이야기 전체의 타당성도 공격받았다. 16세기 인문학자 폴리도루스 베르길리우스는 아서가 로마 제국 이후 존재한 제국의 지배자라는 주장을 기각하여 웨일스와 잉글랜드의 문헌학자들에게 충격을 주었다.[368] 중세의 종말과 문예부흥은 아서와 관련된 전설들이 사람들에게 매력을 잃게 만들었고, 맬러리의 《아서왕의 죽음》은 1634년에 마지막으로 인쇄된 뒤 거의 200년 동안 출판되지 못했다.[369]

19세기 초까지 아서 왕과 아서 전설은 진지하게 취급되지 않았고, 17~18세기 정치판의 알레고리 수단 등으로 가볍게 사용되었다.[370] 리처드 블랙모어의 서사시 《왕자 아서》(1695년)와 《국왕 아서》(1697년)는 윌리엄 3세와 제임스 2세 사이의 싸움에 대한 알레고리로 아서를 등장시켰다.[276] 이 시기에 가장 인기 있었던 아서 이야기는 엄지손가락 톰이었는데, 행상인들이 팔던 싸구려 책을 통해 처음 알려졌고 나중에는 헨리 필딩의 정치 연극 등으로 소비되었다. 필딩의 연극은 아서 왕 시대의 브리튼을 배경으로 했지만, 아서는 매우 해학적이고 희극적으로 묘사되었다.[371] 존 드라이든의 가면극 《아서왕》은 오늘날에도 공연되지만, 이는 헨리 퍼셀의 음악 때문이며 원래 연극 내용이 생략 없이 상영되는 일은 드물다.

19세기 초, 중세주의, 낭만주의, 고딕 리바이벌은 아서 왕과 중세 로맨스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켰으며, 19세기 신사들을 위한 새로운 윤리 강령은 "로맨스의 아서 왕"에 구현된 기사도적 이상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1816년에 맬러리의 《아서 왕의 죽음》이 1634년 이후 처음으로 재출판되면서 이러한 경향이 나타났다.[116]

20세기 후반, 아서 왕 로맨스 전통은 T. H. 화이트의 소설 《영원한 왕》(1958), 메리 스튜어트의 《크리스탈 동굴》(1970)과 그 속편들, 토머스 버거의 비극적 희극 《아서 렉스》, 마리온 짐머 브래들리의 《아발론 연대기》(1982)와 같은 소설과 《프린스 발리언트》(1937년 이후)와 같은 만화로 이어졌다.[131] 미국의 작가들은 평등과 민주주의와 같은 가치에 더 부합하도록 아서 왕의 이야기를 각색하는 경우가 많았다.[133]

T. H. 화이트의 소설은 러너와 로에브의 뮤지컬 《카멜롯》(1960)과 월트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영화 《바위 속의 칼》(1963)로 각색되었다. 랜슬롯과 기네비어의 사랑과 아서 왕의 정조 유린에 초점을 맞춘 《카멜롯》은 1967년에 동명의 영화로 제작되었다. 로베르 브레송의 《호수의 란슬롯》(1974), 에릭 로메르의 《페르세발 르 갈루아》(1978) 및 존 부어먼의 《엑스칼리버》(1981)는 아서 왕 로맨스 전통을 잘 나타낸 영화들이다. 또한 아서 왕을 풍자한 《몬티 파이튼과 성배》(1975)의 주요 소재이기도 하다.[137]

아서 왕(엑스칼리버를 들고 있음)과 팻시, 1975년 코미디 영화 ''몬티 파이튼과 성배''를 각색한 연극 뮤지컬 ''스패멀롯''의 한 장면


"로맨스"를 제거하고 아서 왕을 진정한 역사적 인물로 묘사하려는 시도도 등장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제프리 오브 몬머스와 《브리튼 열왕사》의 중세 "연대기 전통"으로 복귀하는 경향이 나타났고, 아서 왕이 게르만족의 적에 저항하는 모습이 영국인들에게 공감을 얻으면서 아서 왕 문학에서 지배적인 흐름이 되었다.[138]

현대에 아서 왕은 행동 모델로도 사용되었다. 1930년대 영국에서는 기독교 이상과 중세 기사도의 아서 왕적 개념을 장려하기 위해 원탁의 기사단 친목 단체가 결성되었다.[141] 미국에서는 수십만 명의 소년 소녀들이 아서 왕 관련 청소년 단체에 가입했다.[142] 현대 문화에서 아서 왕의 이름은 물건, 건물, 장소에 정기적으로 붙여진다.[143]

한국에서는 메이지 시대나쓰메 소세키가 알프레드 테니슨의 시를 바탕으로 단편 『해로행』을 썼다. 1942년에는 토마스 불핀치의 책이 노가미 야에코에 의해 번역되어(『중세 기사 이야기』) 아서 왕 이야기의 개요가 일반 독자들에게도 알려졌다.[272] 어린이용으로는 시드니 라니어의 책이 1972년에 번역되었고, 1979년에는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원탁의 기사 이야기 타올라라 아서』가 방영되었다. 1980년대 후반 이후 서브컬처가 젊은이 문화에 깊이 침투하면서 서양의 판타지를 통해 아서 왕 전설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화이트의 『영원의 왕』(1992년)과 브래들리의 『아발론의 안개』(1998년)가 잇따라 번역되었다.[272]

5. 1. 테니슨 남작과 아서 이야기의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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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초, 중세주의, 낭만주의, 고딕 부흥운동이 일어나면서 아서 이야기를 비롯한 중세 무훈시들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났다. 19세기 신사들은 아서 무훈시에 내재된 기사도를 중심으로 새로운 윤리를 형성했다. 1816년 맬러리의 《아서왕의 죽음》이 182년 만에 재출판된 것에서도 이러한 풍조가 완연히 드러난다.[373]

처음에는 중세 아서 전설은 주로 시인들의 관심거리였다. 윌리엄 워즈워스는 1835년작 〈이집트 하녀〉에서 성배의 알레고리를 사용했다.[374] 앨프리드 테니슨 남작은 1822년 처음으로 아서 시 〈샬롯 공주〉를 발표했다.[375] 몇몇 작품에서는 중세 무훈시에서처럼 아서 본인은 조연에 지나지 않았다. 테니슨 남작의 아서 관련 작품들은 아서의 이야기를 빅토리아 시대풍으로 완전히 번안한 《국왕목가》에서 그 인기가 절정을 찍었다. 《국왕목가》는 1859년 초판이 출간되어 첫 주에만 10,000부가 팔렸다.[376] 《국왕목가》의 아서는 지상에 완벽한 왕국을 세우려 하지만 인간의 나약함으로 인해 결국 패배하고 마는 이상적 인간의 상징으로 등장한다.[377] 테니슨의 작품들은 상당한 모방자들을 만들어냈고, 아서 전설과 아서 개인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이끌어내면서 맬러리의 이야기가 더욱 많은 독자들에게 퍼지게 되었다.[378] 맬러리의 아서 이야기 전집의 근대 영어 판본은 《국왕목가》 출판 직후인 1862년 출판되었으며, 그 뒤로 19세기가 끝나기 전까지 6개 판본이 더 출판되고 5개 출판사가 서로 경쟁하였다.[379]

이러한 관심은 19세기를 넘어 20세기까지 계속되었고, 윌리엄 모리스 같은 시인들이나 에드워드 번존스 같은 라파엘 전파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380] 18세기에 유행했던 엄지손가락 톰 같은 해학적인 이야기도 《국왕목가》가 출판된 이후 다시 쓰였다. 톰은 덩치가 작고 개그 캐릭터라는 속성은 보존했지만, 줄거리에 중세 아서 전통의 것이 상당히 포함되었고 아서도 매우 진중하고 역사적인 인물로 다루어졌다.[381] 부활한 아서 무훈시 전통은 미국에도 영향을 미쳐서 시드니 라니어(Sidney Lanier)의 《소년왕 아서》(1880년) 같은 것이 나오는가 하면 마크 트웨인은 풍자적인 타임슬립 소설 《아서왕 궁정의 코네티컷 양키》(1889년)를 썼다.[382] 새로운 아서물에서 무훈시의 아서가 중심 인물로 나올 때도 있었으나(번존스의 〈아서왕 아발론에 잠들다〉), 다른 경우에는 아서는 중세적 위치로 돌아가서 조연화되거나 아예 나오지 않기도 했다. 리하르트 바그너의 아서 오페라들이 후자 유형의 대표적인 사례들이다.[383] 19세기 말엽 라파엘 전파의 모방자들로 인해 이미 포화 상태였으며,[384] 제1차 세계 대전의 영향으로 끔찍한 대전은 기사도를 위협했고, 이상적 기사로서 아서의 중세적 현현에 대한 관심도 사그라들었다.[385] 그러나 무훈시 전통 자체는 충분히 강력하게 살아남아 토머스 하디, 로런스 비뇬, 존 메이스필드 등이 아서 희곡을 썼고,[386] T. S. 엘리엇은 시 〈황무지〉에서 어부왕을 언급하면서 아서 신화를 암시했다.[387]

5. 2. 근현대의 아서 왕



아서왕 무훈시의 전통은 20세기 후반에도 그 영향력을 이어갔다. 테런스 핸버리 화이트의 《과거의 왕이자 미래의 왕》, 매리언 짐머 브래들리의 《아발론의 안개》 등의 소설이나 《용감한 왕자》 같은 만화가 이 때 나왔다.[389] 브래들리의 이야기는 아서 전설에 여성주의 접근 방식을 취했는데, 이는 중세 문헌의 아서 이야기와 대조된다.[390] 미국 작가들은 아서 이야기를 평등과 민주주의 같은 가치를 담는 방향으로 재창작하기도 했다.[391] 무훈시의 아서는 영화와 연극을 통해서도 널리 알려졌다. 화이트가 지은 소설은 러너와 로우가 뮤지컬 《카멜롯》으로 만들었고, 월트 디즈니 컴퍼니는 애니메이션 《아더왕의 검》을 제작했다. 《카멜롯》은 1967년 동명의 영화로 영화화되었다. 아서왕 무훈시 전통을 다루어 평론가들에게 성공적인 평을 받은 영화로는 로베르 브레송의 《호수의 랜슬롯》, 에릭 로메르의 《웨일스 사람 퍼시벌》, 존 부어먼의 판타지 영화 《엑스칼리버》 등이 있다. 그리고 유쾌한 패러디 영화인 《몬티 파이선과 성배》도 빼놓을 수 없다.[392]

《아서의 죽음》. 존 개릭의 1862년 그림.


무훈시 전통을 복원하고 재현하는 것만이 오늘날의 아서 전설 향유 수단은 아니다. 아서를 무훈시에서 탈피시켜 기원후 500년 경에 실존했던 역사상의 인물로 묘사하려는 시도 또한 이루어졌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아서물 문학계에서 주류로 부상했다. 게르만계 침략자들에 맞서 싸우는 아서 이야기가 당대 영국인들에게 큰 공감을 얻은 것이다.[393] 클레멘스 데인의 라디오드라마 시리즈 《구원자들》은 역사적 아서를 이용해 절망적 역경에 맞서 싸우는 영웅적 저항정신을 고취했고, 로버트 케드릭 셰리프의 연극 《긴 일몰》 역시 아서를 게르만 침략자들에 맞서 로마-브리튼인들의 저항을 결집시킨 지도자로 보았다.[394] 아서를 역사적 인물로 다루는 이 조류는 이 시기에 출판된 역사소설판타지 소설들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395] 아서를 5세기의 실존 영웅으로 묘사하는 영상 매체로는 TV 드라마 《브리튼인의 아서》, 《아서왕의 전설》, 《카멜롯》 등이 만들어졌고,[396] 영화로는 《아서왕》, 《최후의 군단》 등이 있다.[397]

5. 3. 한국에서의 아서 왕

메이지 시대나쓰메 소세키가 알프레드 테니슨의 『샬롯의 여인』과 『랜슬롯과 엘레인』을 바탕으로 단편 『해로행』을 썼지만, 그 외에는 일본에서 아서 왕을 다룬 본격적인 문학 작품은 없다.[272]

1942년에는 미국의 작가 토마스 불핀치의 재화를 노가미 야에코가 번역하여(『중세 기사 이야기』), 아서 왕 이야기의 개요가 일반 독자들에게도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유럽 중세 문학 연구자가 늘어나면서, 말로리의 『아서 왕의 죽음』 초역이나 크레티앵볼프람 폰 에셴바흐 등 대륙 로맨스의 번역도 조금씩 출판되기 시작했다.[272]

어린이용으로는, 시드니 라니어의 재화가 1972년에 번역되었고, 1979년에는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원탁의 기사 이야기 타올라라 아서』가 방영되었다. 이 작품은 중세 판타지에 익숙하지 않았던 당시에 굳이 애국 기사 아서를 그린 의욕작이었지만 인기를 얻지 못했고, 속편 『타올라라 아서 백마의 왕자』(1980년)에서는 알기 쉬운 권선징악물로 노선을 변경해야 했다.[272]

1980년대 후반 이후, 애니메이션게임, 만화, 라이트 노벨 등의 서브컬처가 젊은이 문화에 깊이 침투하면서, 그것들의 기반이 된 서양의 판타지를 통해 아서 왕 전설에 대한 관심도 높아져 갔다. 이를 받아, 아서 왕을 소재로 한 현대 소설(아서리안 팝) 중에서 평가가 높은 화이트의 『영원의 왕』(1992년)과 브래들리의 『아발론의 안개』(1998년)가 잇따라 번역되었고, 『마비노기온』의 중세 웨일스어 번역(2000년)과 말로리의 『아서 왕의 죽음』 완역(2004년 - 2007년), 제프리의 『브리타니아 열왕사』 번역(2007년) 등, 아서 왕 문학의 중요 문헌을 일본어로도 읽을 수 있게 되었다.[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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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5] 도서 Firelord
[395] 도서 The Pendragon Cycle
[395] 도서 The Coming of the King
[395] 도서 A Dream of Eagles
[395] 도서 The Warlord Chronicles
[396] 웹사이트 Arthur of the Britons (TV Series 1972–1973) – IMDb https://www.imdb.com[...]
[396] IMDb Camelot
[397] IMDb King Arthur
[397] IMDb The Last Leg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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