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코쿠지 에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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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코쿠지 에케이는 1537년 또는 1539년에 태어난 센고쿠 시대의 승려로, 아키 다케다씨의 가신 출신이다. 모리 가문의 외교승으로 활약하며 오토모 소린과의 화친을 성사시켰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중신으로 임진왜란에 참전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가담하여 모리 데루모토를 옹립했으나, 전투 패배 후 처형되었다. 그는 다이묘였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으며, 예리한 선견지명과 외교 능력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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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코쿠지 에케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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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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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안코쿠지 에케이 |
본명 | 안코쿠지 에케이 (安国寺 恵瓊) |
출생 | 1539년 |
사망 | 1600년 11월 6일 |
출생지 | 아키국 |
사망지 | 교토 |
별칭 | 묘호 에케이 (瑶甫 恵瓊) 일임사이 (一任斎) 쇼케이 (正慶) |
소속 | |
가문 | 모리 가문 도요토미 가문 |
군대 | 세키가하라 전투 서군 |
직위 | |
직책 | 군인 외교관 승려 |
종교 | |
종파 | 임제종 |
사찰 | 아키 안코쿠지 겐닌지 |
스승 | 지쿤 에신 |
가족 | |
배우자 | 정보 없음 |
자녀 | 정보 없음 |
참여 전투 | |
주요 전투 | 다카마쓰성 공성전 시코쿠 정벌 규슈 정벌 시모다 공방전 임진왜란 세키가하라 전투 |
2. 생애
아키 다케다씨 일족 출신으로, 출생년도와 아버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출생년도는 덴분 6년(1537년) 혹은 덴분 8년(1539년)이며, 아버지는 다케다 노부시게 또는 노부시게의 아버지인 반 시게키요라는 설이 있다.
덴분 10년(1541년), 모리 모토나리의 공격으로 아키 다케다씨가 멸망하자 가신에 이끌려 탈출했고, 아키의 안코쿠지(부동원)에 들어가 출가하였다. 이후 교토의 도후쿠지에 들어가 지쿤 엔신의 제자가 되었다. 덴쇼 2년(1574년) 아키 안코쿠지의 주지가 된 후, 도후쿠지, 난젠지의 주지가 되는 등 중앙 선종사찰의 최고 직위를 얻었다.
한편 모리씨의 스승 엔신에 귀의한 관계로, 모리씨의 외교승이 되었다. 겐키 원년(1570년) 모리씨와 대립하고 있던 분고의 오토모 소린과의 화친을 성사시켰다.
덴쇼 10년(1582년) 모리씨는 하시바 히데요시가 주고쿠 정벌의 발판으로 빗추 다카마쓰성으로 진군하였고 공방전 중 혼노지의 변이 일어나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에서 횡사하였다. 이 때, 하시바 히데요시는 이 사실을 숨기고 모리씨와 화친을 제안했고, 안코쿠지는 이를 수락한다. 이는 안코쿠지 자신이 히데요시의 약진을 예측해 수락한 것이라고 한다.
덴쇼 13년(1585년) 음력 1월, 히데요시가 모리씨에게 정식으로 복속할 것을 요구하자 안코쿠지는 이를 수락하여 히데요시의 신임을 얻는다. 시코쿠 정벌(시코쿠 평정) 이후, 이요국내 2만 3천 석의 영지를 하사받았으며, 덴쇼 14년(1586년) 규슈 정벌 이후, 6만 석으로 증가되었다. 또, 히데요시의 측근이 되어 전국에서 행해진 검지의 실무를 담당하였다.
분로쿠 원년(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예하 부대에 속해 웅치 전투, 정암진 전투 등을 지휘하였다.
게이초 4년(1599년) 교토의 겐닌지(建仁寺)를 재흥하는 데 힘쓴다.
안코쿠지는 모리씨 중 친(親)히데요시파인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와 친분이 깊었지만, 고바야카와 사후, 친(親)도쿠가와파인 깃카와 히로이에와 반목한다.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시다 미쓰나리를 도와 서군에 참전하였고, 모리씨의 수장 모리 데루모토를 설득하여 서군 총대장으로 옹립하는데 조력했다.
음력 9월 15일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모리 히데모토, 깃카와와 함께 도쿠가와군의 후방에 진을 쳤다. 하지만, 바로 앞에 진을 친 깃카와군에 막혀 군을 움직일 수 없었다. 이는 깃카와가 은밀히 도쿠가와와 내통했기 때문이다.
전후, 안코쿠지는 도주하지만, 교토에서 도쿠가와의 사위 오쿠다이라 노부마사 부대에 포박되어 서군 수뇌부 중 한 명으로 로쿠조가와라에서 참수되었다. 향년 62세 혹은 64세였다.
묘소는 교토부 교토시 히가시야마구의 겐닌지에 목무덤이 있고, 히로시마현 히로시마시 히가시구의 후도인에도 묘가 있다.
2. 1. 출생과 출가
덴분 6년(1537년) 혹은 덴분 8년(1539년)에 태어났다는 여러 설이 있다. 아버지는 아키 다케다씨의 다케다 노부시게 또는 그의 아버지 도모 시게키요로 전해진다.덴분 10년(1541년) 모리 모토나리의 공격을 받고 아키 다케다씨가 멸망하자 가신에 이끌려 탈출했고, 아키의 안코쿠지(부동원)에 들어가 출가해 세속과 관계를 끊었다. 그 뒤, 교토의 도후쿠지에 들어가 지쿤 엔신의 제자가 되었다. 덴쇼 2년(1574년) 아키 안코쿠지의 주지가 된 후, 도후쿠지, 난젠지의 주지가 되는 등, 중앙 선종사찰의 최고 직위를 얻었다.
2. 2. 모리 가문의 외교승
안코쿠지 에케이는 모리 모토나리가 아키 다케다씨를 멸망시킨 후, 아키의 안코쿠지에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이후 교토의 도후쿠지에서 지쿤 엔신의 제자가 되었고, 엔신이 모리 다카모토와 친분이 있었던 덕분에 모리 가문과 관계를 맺게 되었다.[4]덴쇼 2년(1574년) 아키 안코쿠지의 주지가 되었고, 이후 도후쿠지, 난젠지의 주지가 되는 등 중앙 선종 사찰의 최고 직위에 올랐다. 게이초 4년(1599년)에는 겐닌지 재건에 힘썼다. 이 외에도 호조지, 레이센지 등의 사찰을 재건하고, 오우치 요시타카가 건립한 료운지 불전을 안코쿠지로 이전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한편, 모리 가문에 귀의한 엔신의 연줄로 일찍부터 모리 가문을 섬기는 외교승이 되었다. 겐키 원년(1570년) 모리 가문과 대립하던 분고의 오토모 소린과의 화친을 성사시켰다.[4] 에이로쿠 11년(1568년) 오토모씨와의 전투에서는 여러 호족을 모리 가문 편으로 끌어들이는 외교적 공헌을 했다.
겐키 2년(1571년) 6월에는 모리 모토나리의 서신을 가지고 상경하여 무로마치 막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에게 오토모씨, 우라카미씨, 미요시씨와의 화의 중재를 요청했지만, 요시아키가 미요시 가문과의 조정에 난색을 표하여 실패했다. 그러나 이듬해 겐키 3년(1572년)에는 미요시 가문을 제외한 오토모 가문, 우라카미 가문과의 강화에 대해 요시아키가 승낙하여 다시 상경, 10월에는 오토모 가문, 우라카미 가문 양측과의 화의 중재에 성공했다.
덴쇼 원년(1573년),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교토에서 추방된 요시아키가 사카이로 이동하자, 노부나가의 측근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아사야마 니치조가 사자로 방문하여 요시아키의 귀경을 요청했다. 이 회담에는 모리 가문의 사자로서 에케이도 참가했다.[4] 그러나 요시아키가 노부나가에게 인질 제출을 요구하는 등의 문제로 협상은 결렬되었고, 이때 에케이는 요시아키가 서쪽으로 오지 않도록 요청했다.
덴쇼 4년(1576년)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빈고 도모로 옮겨온 후에도, 우키타 나오이에와 단교하고 오다 노부나가와 맺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덴쇼 10년(1582년) 모리 가문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빗추 다카마쓰 성에서 대치하고 있었을 때(빗추 다카마쓰 성 전투) 혼노지의 변이 일어나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했다. 이때 히데요시는 이 사실을 숨기고 모리 가문에 영토 할양을 요구했으나, 에케이는 시미즈 무네하루의 할복을 조건으로 하는 히데요시의 화친 제안을 받아들였다. 에케이는 히데요시의 약진을 예측하고 먼저 화친을 맺었다고 여겨지며, 히데요시의 신임을 얻었다. 강화 협상이 정식으로 마무리된 것은 덴쇼 13년(1585년) 1월의 일이다.
덴쇼 11년(1583년) 8월 22일, 에케이는 모리 데루모토의 가신에게 보낸 편지에서 어머니의 병환을 이유로 국경 회담에 불참하겠다고 밝혔다. 공무를 제쳐두고 어머니를 간호하여 위기를 구하는 것이 당시 일반적인 모자 관계였다.[5]
2. 3. 도요토미 정권 하의 활동
덴쇼 10년(1582년), 모리씨는 하시바 히데요시(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주고쿠 정벌의 발판으로 빗추 다카마쓰성으로 진군하였고 공방전 중 혼노지의 변이 일어나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에서 횡사하였다. 이때, 히데요시는 이 사실을 숨기고 모리씨와 화친을 제안했고, 외교승이었던 안코쿠지는 이를 수락한다. 이는 안코쿠지 자신이 히데요시의 약진을 예측해 수락한 것이라고 한다.[4]덴쇼 13년(1585년) 1월, 히데요시가 모리씨에게 정식으로 복속할 것을 요구하자 안코쿠지는 이를 수락하여 히데요시의 신임을 얻는다. 시코쿠 정벌(시코쿠 평정) 이후, 이요국 내 2만 3천 석의 영지를 하사받았으며, 덴쇼 14년(1586년) 규슈 정벌 이후에는 6만 석으로 증가되었다. 또한 히데요시의 측근이 되어 전국에서 행해진 검지의 실무를 담당하였다.
분로쿠 원년(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예하 부대에 속해 웅치 전투, 정암진 전투 등을 지휘하였다.[2]
게이초 4년(1599년) 교토의 겐닌지(建仁寺) 재흥에 힘쓴다.
2. 4. 임진왜란 참전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예하 부대에 속해 웅치 전투, 정암진 전투 등을 지휘하였다.[2]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이끄는 6번대 소속으로 출병하여 전라도 공략을 담당했다. 점령지 통치에도 관여했는데, "여름에 술을 식히는 창고까지 있다"며 조선의 풍부한 군량에 놀라워하는 문서를 보내거나, 현지 아이들을 모아 가나다를 가르치고, 머리 모양을 일본식으로 바꾸어 부리게 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전투에도 참가하여 충청도에서 봉기한 조헌(趙憲)과 영규(霊圭)의 의병을 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와 함께 금산에서 격파하고 두 사람을 사살했다.2. 5. 세키가하라 전투와 최후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시다 미쓰나리를 도와 서군에 참전하였고, 모리 데루모토를 설득하여 서군 총대장으로 옹립하는데 조력했다.[3]음력 9월 15일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모리 히데모토, 깃카와 히로이에와 함께 도쿠가와 이에야스 군의 후방에 진을 쳤으나, 바로 앞에 진을 친 깃카와 군에 막혀 군을 움직일 수 없었다. 이는 깃카와가 은밀히 도쿠가와와 내통했기 때문이다.[6]
전후, 안코쿠지는 도주하지만, 교토에서 도쿠가와의 사위 오쿠다이라 노부마사 부대에 포박되어 서군 수뇌부 중 한 명으로 로쿠조가와라에서 이시다 미쓰나리,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참수되었다.[7] 향년 62세 혹은 64세였다.

묘소는 교토부 교토시 히가시야마구의 겐닌지에 목무덤이 있고, 히로시마현 히로시마시 히가시구의 후도인에도 묘가 있다.
3. 안코쿠지 에케이가 다이묘였는가?
안코쿠지 에케이에 대해서는 모리씨(毛利氏)의 외교승(外交僧)으로 권력 중추의 일원이었다는 견해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서 영지를 받아 도요토미 정권(豊臣政権)의 다이묘(大名)가 되었다는 두 가지 상반된 견해가 존재한다.
메이지(明治) 이후 역사학에서는 에케이를 다이묘로 간주해 왔지만, 1970년대 이후 연구에서는 에케이가 1585년 이후에도 모리씨의 중신들과 함께 문서에 서명한 사실이 지적되면서 이러한 견해에 의문이 제기되었다.
츠노 노리아키(津野倫明)는 에케이가 다이묘로 임명되었다는 기존 견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의문을 제기했다.[8]
- 『폐절록(廃絶録)』 등에 기록된 에케이의 영지(6만 석)는 뒷받침할 만한 사료가 부족하다.
- 실제로 존재하는 문서의 수취인은 "안국사"로 되어 있어, 에케이 개인의 영지인지 사찰의 영지인지 불분명하다.
- 분로쿠의 역(文禄の役)의 진립서(陣立書)에 에케이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 에케이가 히데요시에게 고용된 관계라고 언급한 서장[9]이 존재한다.
츠노는 이러한 점들을 근거로 에케이가 다이묘가 아니라 모리 데루모토의 가신(家臣)이었으며, 히데요시와는 고용 관계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후지타 타츠오(藤田達生)는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의 사례를 들어 에케이 다이묘설을 옹호하며 비판했다.[10] 그러나 츠노는 분로쿠의 역 진립서에 고바야카와의 이름은 있지만 에케이의 이름은 없다는 점, 기엔(義演)이 에케이를 독립적인 다이묘로 간주하지 않았다는 점 등을 들어 재반박했다.
4. 인물 및 평가
- 덴쇼 원년 음력 12월 12일,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측근 이노우에 하루타다에게 보낸 서장에서 오다 노부나가가 쇠하고 하시바 히데요시가 약진할 것을 예측하여 선견지명이 있는 인물로 평가받는다.[13] 이러한 예측은 적중하였고, 《태합기》에서는 무명 시절의 히데요시에게 "장래 천하를 취할 상"이라고 예언하여 훗날 영지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12]
- 시코쿠 조소카베 가문의 외교승 히유와 함께 잇쓰보즈(一対坊主)[14]라고 불렸다.
- 웅치 전투 이후, 조선군의 충성심과 용맹성에 탄복하여 유해를 모아 큰 무덤을 만들고 ‘조선의 충신 의사들의 영혼을 조상하노라(弔朝鮮國忠肝義膽)’라는 표목을 세웠다고 한다.[15] 전투 지휘는 안코쿠지 에케이가 하였다.
-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에케이는 문장이 뛰어나고 관직이 높으며 임진왜란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지시를 따랐다고 한다.[16] 강항의 진술에 따르면, 주요 국정에 에케이가 참여하고 주변에 조선인을 두었다고 한다.[17]
-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 후, 동군의 추격을 받자 히라이 후지쿠로와 나가사카 쵸시치로 두 명이 자결을 제안했으나, 에케이는 목을 움츠리고 도망쳐 칼이 탈것의 지붕에 맞고 오른쪽 뺨에 약간의 상처만 입었다는 일화가 이타사카 보쿠사이의 기록에 전해진다.
5. 등장 작품
- 게임 귀무자2에서는 안코쿠지 에케이가 주인공 야규 쥬베이와 함께 모험을 떠나는 주정뱅이 스님으로 나타난다.
; 텔레비전 드라마
- 황금의 날들 (1978년, NHK 대하드라마, 역: 가미야마 시게루)
- 여자 태합기 (1981년, NHK 대하드라마, 역: 우치다 미노루)
- 세키가하라 (1981년, TBS 창립 30주년 기념 드라마, 역: 가미야마 시게루)
- 히데요시 (1996년, NHK 대하드라마, 역: 나카죠 키요시)
- 아오이 덕가와 삼대 (2000년, NHK 대하드라마, 역: 자이츠 이치로)
- 군사관베 (2014년, NHK 대하드라마, 역: 야마지 카즈히로)
; 영화
; 소설
- 마쓰모토 세이쵸 『밤의 발소리: 단편 시대소설 선』 "등신대" 가도카와문고, 2009년 ISBN9784041227657
참조
[1]
서적
The Samurai Sourcebook
Cassell & Co
1998
[2]
서적
Samurai Invasion. Japan's Korean War 1592–98
Cassell & Co
2002
[3]
서적
The Samurai: a Military History
Osprey Publishing London
1977
[4]
서적
信長と消えた家臣たち
中央公論新社
2015-06
[5]
학술지
戦国母子像の虚実
[6]
서적
関ヶ原合戦―戦国のいちばん長い日―
中央公論社
[7]
서적
コンサイス日本人名辞典 第5版
株式会社三省堂
[8]
간행물
広島県史古代中世資料編IV
広島県
[9]
간행물
鹿児島県史料旧記雑録後編二
鹿児島県
[10]
서적
日本近世国家成立史の研究
校倉書房
[11]
문서
吉川元春家臣
[12]
서적
[13]
문서
信長之代、五年、三年は持たるべく候。明年辺は公家などに成さるべく候かと見及び申候。左候て後、高ころびに、あおのけに転ばれ候ずると見え申候。藤吉郎さりとてはの者にて候
[14]
문서
잇쓰란 한쌍으로 묶어 설명할 때 쓰는 말이며, 보즈란 승려 중에 우두머리 즉 주지승을 가리키는 말이다.
[15]
웹사이트
두산백과_웅치전적지
http://100.naver.com[...]
[16]
문서
선조 60권, 28년(1595 을미 / 명 만력(萬曆) 23년) 2월 10일(계축) 6번째기사
[17]
문서
선조 126권, 33년(1600 경자 / 명 만력(萬曆) 28년) 6월 9일(경진) 2번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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