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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진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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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어진익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인조 시대에 태어나 숙종 시대에 사망했다. 그는 서인 당원 출신으로, 효종과 현종 시대에 관료로 활동하며 정언, 지평, 장령 등을 역임했다. 함평 현감, 동래 부사, 여주 목사, 충청도 관찰사, 강원도 관찰사 등을 거치며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치려 노력했다. 특히 임진왜란 때 순절한 동래부 사람들의 자손에게 혜택을 주고, 왜관 문제로 유배되기도 했다. 1684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증손녀는 경종의 왕비인 선의왕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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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진익
어진익
어진익의 초상화
어진익의 초상화
한자魚震翊
로마자 표기Eo Jin-ik
기본 정보
출생1847년 4월 11일 (음력 2월 26일)
사망1896년 10월 9일
묘소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삼하리
본관함종(咸從)
성오(聲五)
관력
주요 관직탁지부 대신, 군부 대신

2. 생애

1625년(인조 3년) 11월 6일 한성부에서 세조 때의 무신 어유소의 8대손으로 태어났다. 증조부 어운해는 평창군수를 지냈고, 할아버지 어몽린은 증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아버지 어한명은 증 의정부좌참찬에 추증된 명문가 출신이었다. 어머니는 안동 권씨로, 참봉 권숙지의 딸이었다. 당색은 서인이었다.

아버지 어한명은 1636년 병자호란 당시 봉림대군(후일의 효종)과 인평대군 등 왕자와 궁인들을 강화도까지 보호한 공로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기상이 남달랐으며, 15세에 과시에 합격하여 명성을 얻었다. 민정중, 이민서, 이단하, 박세당서인 명사들과 가깝게 지냈다.

1648년(인조 26) 부친상을 당하고 3년상을 마친 뒤 1652년(효종 3년)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658년(효종 10년) 의금부낭관을 시작으로 내자시직장, 호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662년(현종 3) 정시 문과에 을과 아원(亞元)으로 급제하여 병조좌랑, 병조정랑, 함경도도사, 성균관직강 등을 역임하였다. 1665년 사헌부지평이 되었다.

1665년사헌부지평 재직 중, 남인 탁남 허적우의정에 발탁되자 사사로운 혜택을 준다고 현종을 비판했다가 파직된 이무(李堥)를 송시철, 권격, 박세성 등과 함께 변호하다가 현종의 분노를 사 파직되고 유배되었다. 그러나 서인 대신과 동료들의 거듭된 구원 상소로 곧 복직되었다. 이때 의정부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홍명하 등의 대신과 간관들의 변호로 사간원 정언에 발탁되었다. 정언 재직 중 송시열이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한다고 비판한 남인 윤선도를 비판하고, 윤선도를 감형시키려는 왕명의 취소를 요청하였다. 이후로도 누차 윤선도의 감형을 반대했다.

1666년(현종 7년) 3월 영남 유생 유세철 등이 1659년 효종의 사망 당시 송시열이 주장한 자의대비 장렬왕후의 기년복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자 이를 공박하였다. 이때 우의정 허적이 유세철을 옹호하자, 그는 헌부, 사간원의 동료들과 함께 유세철 등을 처벌할 것을 청하였다.

1670년 모친상을 당해 3년상을 마쳤다. 1672년 사헌부장령, 종부시정을 역임하였다. 1672년(현종 13) 7월 8일 지평 정유악과 함께 이민적을 인동부사에 제수한 명령을 철회해 달라고 요청했다가 파직되고 추고받았다.

병조 낭관, 정언을 거쳐 함평 현감으로 부임하여 형 어진열과 함께 어머니 안동 권씨를 봉양하였다. 이후 사간원헌납, 사간원사간, 1673년(현종 15) 사복시정, 세자시강원사서, 문학, 보덕을 역임하며 세자 (숙종)을 보도하였다. 1674년 효종비 인선왕후 사망 후, 자의대비 장렬왕후의 상복 문제로 윤휴, 허목남인을 공격했다가 동래부사로 좌천되었다.

1675년(숙종 1) 5월 동래부사 재직 중,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순절한 김정단, 송계남 등 동래부 사람 24인의 자손에 대해 천역과 군역을 모두 면제시킬 것을 상소하여 성사시켰다. 1677년 형조참의가 되었으나, 가뭄으로 유배된 이세필 등의 석방을 주장했다가 파직되었다. 윤휴를 만나자마자 옷을 떨치고 일어나 윤휴의 유감을 샀다. 1677년(숙종 3) 12월 동래부사 재직 시 왜관 관련 문제로 허적의 탄핵을 받고 파직, 1678년(숙종 4) 1월 경기도 고양군으로 유배되었다. 양주 마산의 기슭에 아버지 어한명이 지은 별장에 은거하며 사수정에서 시문과 교류하였다.

1679년(숙종 5년) 부름을 받고 여주목사로 부임하였다. 1681년(숙종 7년)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가 그해 2월 13일 사간원 헌납 박태손(朴泰遜)의 지적을 받고 스스로 사임하였다. 이에 송시열이 어진익을 변호하고 그의 유임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1682년 1월 승정원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 개성부에서 박상충(朴尙衷)의 사당 건립을 위한 부지 마련을 돕도록 상소하여 윤허받았다. 이후 호조참의, 병조참의, 예조참의, 승정원 좌승지를 역임하였다. 1683년(숙종 9년) 1월 28일 임진왜란 때 순절한 부산 첨사(釜山僉使) 정발(鄭撥)의 후손을 등용하도록 상소하였다. 1683년(숙종 9년) 5월 강원도관찰사로 부임했다가 병이 심해져 사직하고 되돌아왔다. 1684년 3월 10일 승정원 승지에 임명되었다.

그는 홀로된 누나를 봉양하고, 빈궁한 친척들을 구휼하였다. 1684년(숙종 10년) 8월 25일 한성부 백동(栢洞) 집에서 사망하였다.

2. 1. 생애 초반

1625년(인조 3년) 11월 6일 한성부에서 세조 때의 무신 어유소의 8대손으로 태어났다. 증조부 어운해는 평창군수를 지냈고, 할아버지 어몽린은 증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아버지 어한명은 증 의정부좌참찬에 추증된 명문가 출신이었다. 어머니는 안동 권씨로, 참봉 권숙지의 딸이었다. 당색으로는 서인이었다.

아버지 어한명은 1636년 병자호란 당시 봉림대군(후일의 효종)과 인평대군 등 왕자와 궁인들을 강화도까지 보호한 공로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기상이 남달랐으며, 15세에 과시에 합격하여 명성을 얻었다. 민정중, 이민서, 이단하, 박세당서인 명사들과 가깝게 지냈다.

1648년(인조 26) 부친상을 당하고 3년상을 마친 뒤 1652년(효종 3년)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2. 2. 관료 생활

1658년(효종 10년) 의금부낭관을 시작으로 내자시직장, 호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662년(현종 3) 정시 문과에 을과 아원(亞元)으로 급제하여 병조좌랑, 병조정랑, 함경도도사, 성균관직강 등을 역임하였다. 1665년 사헌부지평이 되었다.

1665년사헌부지평 재직 중, 남인 탁남 허적우의정에 발탁되자 사사로운 혜택을 준다고 현종을 비판했다가 파직된 이무(李堥)를 송시철, 권격, 박세성 등과 함께 변호하다가 현종의 분노를 사 파직되고 유배되었다. 그러나 서인 대신과 동료들의 거듭된 구원 상소로 곧 복직되었다. 이때 의정부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홍명하 등의 대신과 간관들의 변호로 사간원 정언에 발탁되었다. 정언 재직 중 송시열이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한다고 비판한 남인 윤선도를 비판하고, 윤선도를 감형시키려는 왕명의 취소를 요청하였다. 이후로도 누차 윤선도의 감형을 반대했다.

1666년(현종 7년) 3월 영남 유생 유세철 등이 1659년 효종의 사망 당시 송시열이 주장한 자의대비 장렬왕후의 기년복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자 이를 공박하였다. 이때 우의정 허적이 유세철을 옹호하자, 그는 헌부, 사간원의 동료들과 함께 유세철 등을 처벌할 것을 청하였다.

1670년 모친상을 당해 3년상을 마쳤다. 1672년 사헌부장령, 종부시정을 역임하였다. 1672년(현종 13) 7월 8일 지평 정유악과 함께 이민적을 인동부사에 제수한 명령을 철회해 달라고 요청했다가 파직되고 추고받았다.

병조 낭관, 정언을 거쳐 함평 현감으로 부임하여 형 어진열과 함께 어머니 안동 권씨를 봉양하였다. 이후 사간원헌납, 사간원사간, 1673년(현종 15) 사복시정, 세자시강원사서, 문학, 보덕을 역임하며 세자 (숙종)을 보도하였다. 1674년 효종비 인선왕후 사망 후, 자의대비 장렬왕후의 상복 문제로 윤휴, 허목남인을 공격했다가 동래부사로 좌천되었다.

1675년(숙종 1) 5월 동래부사 재직 중,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순절한 김정단, 송계남 등 동래부 사람 24인의 자손에 대해 천역과 군역을 모두 면제시킬 것을 상소하여 성사시켰다. 동래부사 재직 중 왜인에게 너그럽게 대하였다.

1677년 형조참의가 되었으나, 가뭄으로 유배된 이세필 등의 석방을 주장했다가 파직되었다. 윤휴를 만나자마자 옷을 떨치고 일어나 윤휴의 유감을 샀다. 1677년(숙종 3) 12월 동래부사 재직 시 왜관 관련 문제로 허적의 탄핵을 받고 파직, 1678년(숙종 4) 1월 경기도 고양군으로 유배되었다. 양주 마산의 기슭에 아버지 어한명이 지은 별장에 은거하며 사수정에서 시문과 교류하였다.

2. 3. 생애 후반

1679년(숙종 5년) 부름을 받고 여주목사로 부임하였다. 1681년(숙종 7년)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가 그해 2월 13일 사간원 헌납 박태손(朴泰遜)의 지적을 받고 스스로 사임하였다. 이에 송시열이 어진익을 변호하고 그의 유임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1682년 1월 승정원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 개성부에서 박상충(朴尙衷)의 사당 건립을 위한 부지 마련을 돕도록 상소하여 윤허받았다. 이후 호조참의, 병조참의, 예조참의, 승정원 좌승지를 역임하였다. 1683년(숙종 9년) 1월 28일 임진왜란 때 순절한 부산 첨사(釜山僉使) 정발(鄭撥)의 후손을 등용하도록 상소하였다. 1683년(숙종 9년) 5월 강원도관찰사로 부임했다가 병이 심해져 사직하고 되돌아왔다. 1684년 3월 10일 승정원 승지에 임명되었다.

그는 홀로된 누나를 봉양하고, 빈궁한 친척들을 구휼하였다. 1684년(숙종 10년) 8월 25일 한성부 백동(栢洞) 집에서 사망하였다.

3. 사후

1710년 경기도 풍덕군 망포리로 묘를 옮겼다. 수암 권상하가 신도비문을 지었는데 국조인물고에 실렸다.

아들 어사형이 종2품 동지돈녕부사에 올라 증 이조참판이 되었다. 손자 어유구가 보국숭록대부 돈녕부영사에 올라, 그는 다시 증 의정부좌찬성으로 추증되었다. 증손녀 선의왕후 어씨는 경종비가 되었다.

4. 평가

권상하는 어진익을 "너그러우면서도 절제함이 있고, 곧으면서도 과격하지 않으며, 재주는 번잡한 사무를 처리하기에 충분했는데도 마치 무능한 것 같았고, 청렴함은 세상을 경계시키기에 충분하지만 명예를 원하는데 가까울까봐 두려워했고, 변고와 험난한 일을 두루 겪으면서 지조를 바꾸지 않았다"라고 평가하였다. 어진익은 강직하고 청렴한 성품으로,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치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서인으로서 남인에 맞서 왕권 강화와 성리학적 질서 유지를 위해 노력하였다.

5.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조부어몽린동몽교관(童蒙敎官), 병절교위 행충좌위 부사정 역임, 증 좌승지, 의정부좌찬성
부친어한명1592년 ~ 1648년, 봉정대부, 봉렬대부 좌수운판관(左水運判官), 증 호조참판, 증 자헌 의정부좌참찬
모친안동 권씨? ~ 1670년, 참봉 권숙지(權叔之)의 딸
어진열(魚震說)1621 ~ 1677
동생어진석(魚震奭)
조카어사휘(魚史徽)1654 ~ 1706, 어진석의 아들
동생어진척(魚震陟)
부인원주 원씨1625년 ~ 1715년 7월 15일, 통사랑 원빈(元玭)의 딸
장녀어씨
사위이유(李濡)
차녀어씨
사위이의현1669년 ~ 1745년
장남어유봉1672년 ~ 1744년
손녀함종 어씨
손녀사위홍상한1701년 - 1769년, 홍봉한, 홍인한, 홍용한, 홍준한의 사촌 형
차남어유구1675 ~ 1740
손녀선의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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