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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관 전면 융단폭격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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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왜관 전면 융단폭격작전은 1950년 8월 16일, 한국 전쟁 중 조선인민군의 대구 점령을 막기 위해 유엔군이 왜관 일대에 감행한 대규모 폭격 작전이다. 조선인민군이 낙동강을 도하하여 대구로 진격하려 하자, 미군은 B-29 폭격기 98대를 동원하여 5.6km x 12km 지역에 960톤의 폭탄을 투하했다. 이 작전은 조선인민군의 후방 보급 기지와 통신망에 피해를 입혔지만, 실질적인 전과에 대한 논란과 오폭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융단폭격은 한미 연합군의 사기를 진작시켰으나, 대구 방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는지는 논쟁의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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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관 전면 융단폭격작전
왜관 전면 융단폭격작전 정보
1950년 8월 16일 융단폭격을 가한 왜관지구의 모습
1950년 8월 16일 융단폭격을 가한 왜관지구의 모습
전체다부동 전투
날짜1950년 8월 16일
장소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결과북한군의 포격 약화
교전 세력
병력 규모
병력 1B-29 폭격기 98대
병력 2군사 3개 사단 40,000여명
105 전차사단
사상자 규모
사상자 1없음.
사상자 2정확히 확인 불가
다부동 전투 관련 정보
주요 전투유학산
가산산성
328고지
674고지
왜관 폭격
303고지 학살
볼링대
연계 전투제1차 낙동강 돌출부
제2차 낙동강 돌출부
대구
영천
낙동강 대공세
관련 기념물/박물관다부동 전적기념관
다부동 전승비
전쟁기념관

2. 전투 배경

지연전을 통해 전투력이 약화된 조선인민군은 국군과 유엔군낙동강 일대에서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결전을 다짐하자 전쟁의 목표를 수정할 수 밖에 없었다. 조선인민군의 수정된 목표는 8월 15일까지 대구[1]를 점령한다는 것이었다.

8월 초, 낙동강 방어선의 대구방향에는 조선인민군 주공부대가 집중 공격을 감행하고 있었다. 특히, 조선인민군 제 1, 13, 15사단 등 3개 사단은 8월 5일부터 낙동강을 도하한 후 국군 제 1사단을 압박하면서 대구공격에 안간힘을 다하고 있었다. 국군 제 1사단은 조선인민군 3개 사단의 집중공격을 받게 되었고, 공방전을 지속하던 중 8월 12일에는 육군본부의 전선 축소 및 조정으로 다부동 지역으로 철수하였다.

국군 제 1사단이 다부동 진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일부 조선인민군이 328고지와 유학산 등 주요 고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또한, 대구 방면으로 조선인민군의 공세가 한창인 8월 14일에는 왜관 북방에 조선인민군 3개 사단과 기갑부대가 집결하여 도하를 준비 중에 있다는 정보가 미 제 8군 사령부에 접수되었다.[1]

2. 1. 조선인민군의 남하와 낙동강 방어선 구축

1950년 6월 25일, 조선인민군의 기습 남침으로 6.25 전쟁이 시작되었다.[1] 지연전을 통해 전투력이 약화된 조선인민군은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일대에서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결전을 다짐하자 전쟁의 목표를 수정할 수 밖에 없었다. 조선인민군의 수정된 목표는 8월 15일까지 대구를 점령한다는 것이었다.[1]

8월 초, 낙동강 방어선의 대구 방향에는 조선인민군 주공 부대가 집중 공격을 감행하고 있었다. 특히, 조선인민군 제1, 13, 15사단 등 3개 사단은 8월 5일부터 낙동강을 도하한 후 국군 제1사단을 압박하면서 대구 공격에 안간힘을 다하고 있었다.[1] 국군 제1사단은 조선인민군 3개 사단의 집중 공격을 받게 되었고, 공방전을 지속하던 중 8월 12일에는 육군 본부의 전선 축소 및 조정으로 다부동 지역으로 철수하였다.[1]

국군 제1사단이 다부동 진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일부 조선인민군이 328고지와 유학산 등 주요 고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또한, 대구 방면으로 조선인민군의 공세가 한창인 8월 14일에는 왜관 북방에 조선인민군 3개 사단과 기갑부대가 집결하여 도하를 준비 중에 있다는 정보가 미 제 8군 사령부에 접수되었다.[1]

2. 2. 다부동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

조선인민군은 8월, 국군유엔군낙동강에서 방어 진지를 구축하기 이전에 낙동강을 신속히 도하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주된 공격은 다부동 축선에 투입하여 8월 공세의 목표인 대구를 조기에 점령하려 하였다. 이를 위해 조선인민군은 전 전선에서 가용한 모든 접근로에 동시 공격을 개시하여 한미 연합군의 전투력을 조기에 분산시키고, 어느 축선에서든지 돌파구가 형성되면 이를 확대하여 후방 깊숙이 진출해 차기 작전의 발판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이에 국군은 왜관에서 낙성리까지 국군 제1사단, 낙성리에서 의성까지 제6사단, 현풍에서 왜관까지 제1기병사단 등 3개 사단을 배치하여 낙동강 방어선을 지켰다. 특히, 국군 제1사단은 낙동강 방어선이 형성된 8월 3일부터 왜관-낙동리 일대에서 낙동강을 도하하는 조선인민군에게 막대한 타격을 가하며 진지를 방어하고 있었다.

낙동강 방어선의 모습


8월 13일 당시 다부동에 배치된 15연대의 배치도

2. 3. 조선인민군의 공세 강화와 국군의 저항

8월 초, 조선인민군은 대구를 목표로 총공세를 감행했다.[1] 조선인민군 제1, 13, 15사단 등 3개 사단은 8월 5일부터 낙동강을 도하한 후 국군 제1사단을 압박하면서 대구 공격에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1] 국군 제1사단은 조선인민군 3개 사단의 집중 공격을 받으면서도 다부동 일대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1]

다부동 지역에는 조선인민군 제2군단 예하 제1, 13, 15의 3개 사단과 제105전차사단이 투입되었다. 당초 조선인민군의 목표는 국군과 유엔군낙동강에 방어 진지를 구축하기 전에 낙동강을 신속히 도하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주된 공격을 다부동 축선에 집중하여 8월 공세의 목표인 대구를 조기에 점령하고자 했다. 조선인민군은 전 전선에서 가용한 모든 접근로에 동시 공격을 개시하여 한미 연합군의 전투력을 분산시키고, 돌파구를 확대하여 후방 깊숙이 진출하려 했다.[1]

이에 국군은 왜관에서 낙성리까지 국군 제1사단, 낙성리에서 의성까지 제6사단, 현풍에서 왜관까지 미 제1기병사단 등 3개 사단을 배치하여 낙동강 방어선을 지켰다. 특히 국군 제1사단은 8월 3일부터 왜관-낙동리 일대에서 낙동강을 도하하는 조선인민군에게 막대한 타격을 입히며 진지를 방어했다.[1]

지연전으로 전투력이 약화된 조선인민군은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일대에서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자, 전쟁 목표를 수정하여 8월 15일까지 대구를 점령하는 것으로 변경했다.[1]

국군 제1사단은 8월 12일 육군 본부의 전선 축소 및 조정으로 다부동 지역으로 철수하였다. 국군 제1사단이 다부동 진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일부 조선인민군이 328고지와 유학산 등 주요 고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8월 14일에는 왜관 북방에 조선인민군 3개 사단과 기갑부대가 집결하여 도하를 준비 중이라는 정보가 미 제8군 사령부에 접수되었다.[1]

3. 융단폭격의 전개

3. 1. 조선인민군 집결 정보 입수와 융단폭격 건의

미 제8군 사령부 정보처에서는 왜관 북서쪽 부근에 조선인민군 3개 사단과 제105전차사단이 집결하고 있으며, 그 병력이 약 40,000명 정도로 추산하였다.[2] 또 국군 제1사단 제12연대 정보과에서도 수색대의 보고를 통해 연대 정면에 2개 사단이 집결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2] 이에 연대장은 이러한 적정 상황을 사단장에게 보고하였고, 사단장 백선엽 준장은 직접 비행기를 타고 정찰을 실시한 뒤 적정을 육군본부에 보고하였다.[2]

미 제1기병사단과 국군 제1사단으로부터 적정을 보고받은 미 제8군은 전 전선에서의 조선인민군 공세로 인해 왜관 정면의 적에 대한 별다른 대비책이 없었다.[2] 이에 미 제8군 작전처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 시 생로(Saint Lo) 지역에 감행한 융단폭격을 생각하고, 이를 유엔군사령부의 맥아더(Douglas MacArthur)에게 건의하였다.[2] 유엔군 사령부에서는 미 극동공군사령관에게 적의 집결지를 폭격하라고 지시하였고, 미 폭격사령관과 협의 후에 8월 16일 융단폭격이 계획되었다.[2]

융단폭격에 투입가능한 전력은 B-29 중폭격기 2개 전대와 다른 3개 전대에서 차출한 6개 대대였다.[2] 미 공군 폭격사령관 오도넬(Emmett R.O'Donnell) 소장은 이들 12개 대대 전력으로 27평방마일에 달하는 표적지역을 완전히 초토화 시킬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2] 그러나 현 전선 상황을 고려할 때 융단폭격은 적에게 심리적 효과에 불과할지라도 그런대로 가치가 있는 것으로 판단하였다.[2] 폭격사령부 작전계획장교들은 27평방마일의 표적을 12개의 구역으로 분할하여 각 구역별로 폭격조준점을 설정하여 각 대대에 한 구역씩 배당하였다.[2] 모든 폭격기 승무원은 낙동강 동안에 배치된 유엔지상군에게 오폭하는 일이 없도록 각별한 주의를 받았다.[2]

왜관 폭격에 사용된 B-29 폭격기


유엔군 사령부는 아군 지상부대에 피해를 우려하여 왜관 서북지역에 폭격을 한 후 그 성과를 고려하여 낙동강 동쪽 지역에 8월 19일 2차 폭격을 계획하였다.[2] 미 제1기병사단장 게이 소장은 조선인민군의 도하가 이미 끝났기 때문에 왜관 동북부 지역(강 동안)을 폭격해 주도록 몇 번이나 건의했으나 극동공군은 오폭을 우려하여 이를 거절하였다.[2] 이에 게이 사단장은 연막으로 표시를 하던가, 경비행기로 유도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거듭 제의해 보았지만 공군측은 서안에 대한 폭격결과를 보고 결정하자며 거절했다.[2]

그 결과 첫 번째 융단폭격은 8월 16일 11시 58분부터 26분 동안에 걸쳐 실시되어 B-29 폭격기 98대가 투입되었다.[2] B-29폭격기 98대는 일본 요코다와 가데나 비행장에서 출격하여 5.6km x 12km 지역에 400~900kg 폭탄 960톤[3]을 투하하였다.[2] 이 폭격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래 최대 공군력을 투입한 것이다.[2]

3. 2. B-29 폭격기의 투입과 폭격 실시

미 제8군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 시 생로(Saint Lo) 지역에 감행했던 융단폭격을 참고하여, 유엔군사령부의 맥아더(Douglas MacArthur)에게 융단폭격을 건의하였다.[2] 유엔군 사령부는 미 극동공군사령관에게 적의 집결지를 폭격하라고 지시하였고, 미 폭격사령관과 협의 후 8월 16일 융단폭격이 계획되었다.[2]

융단폭격에는 B-29 중폭격기 2개 전대와 다른 3개 전대에서 차출한 6개 대대가 투입될 예정이었다. 미 공군 폭격사령관 오도넬(Emmett R.O'Donnell) 소장은 12개 대대 전력으로 27평방마일에 달하는 표적지역을 완전히 초토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현 전선 상황을 고려할 때 융단폭격이 적에게 심리적 효과를 줄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2] 폭격사령부 작전계획장교들은 표적을 12개 구역으로 분할하여 각 구역별로 폭격조준점을 설정하고 각 대대에 한 구역씩 배당하였다. 모든 폭격기 승무원은 낙동강 동안에 배치된 유엔지상군에게 오폭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를 받았다.[2]

유엔군 사령부는 아군 지상부대에 피해를 우려하여 왜관 서북지역에 폭격을 한 후 그 성과를 고려하여 낙동강 동쪽 지역에 8월 19일 2차 폭격을 계획하였다. 미 제1기병사단장 게이 소장은 조선인민군의 도하가 이미 끝났기 때문에 왜관 동북부 지역(강 동안)을 폭격해 주도록 건의했으나 극동공군은 오폭을 우려하여 이를 거절하였다.[2] 게이 사단장은 연막으로 표시를 하거나, 경비행기로 유도하는 방안을 제의했지만, 공군측은 서안에 대한 폭격결과를 보고 결정하자며 거절했다.[2]

8월 16일 11시 58분부터 26분 동안 B-29 폭격기 98대가 투입되어 융단폭격이 실시되었다.[3] B-29폭격기 98대는 일본 요코다와 가데나 비행장에서 출격하여 5.6km x 12km 지역에 400~900kg 폭탄 960톤을 투하하였다.[3] 이 폭격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래 최대 규모의 공군력 투입이었다.[3]

3. 3. 폭격 이후 상황과 전과 확인의 어려움

융단폭격이 끝난 이후 폭격사령관 오도넬(Emmett R.O'Donnell) 소장은 폭격 성과를 확인하기 위해 2시간 이상 목표지역 상공을 선회하였으나, 폭격 뒤에 일어난 짙은 연기로 정확한 전과를 확인하지 못했다.[4] 8월 16일 저녁 제15연대 제1대대 정보장교는 연대로부터 대안의 적정과 폭격성과를 확인하라는 명령을 받고 5명으로 편성된 수색조를 이끌고 낙동강을 건너 융단폭격 지역 100m까지 접근하였다.[4] 그러나 적 1개 소대와 조우한 수색조는 적과 총격전을 벌인 후 복귀하였다.[4] 미 제1기병사단에서도 융단폭격의 성과를 확인하기 위해 전투정찰대를 침투시켰으나 적의 매복조에 걸려 폭격지역에 접근하지 못했다.[4]

4. 융단폭격의 결과 및 영향

4. 1. 조선인민군의 피해와 반응

융단폭격으로 조선인민군의 후방 보급기지와 통신망이 큰 피해를 입었으며, 사기가 저하되었다는 증언이 있었다.[6][7] "공산군 전선은 물론 후방까지 모조리 마비됐고, 은폐했던 장비, 차량, 탱크, 포열, 각종 보급품이 파괴되었으며, 전선은 아비규환의 생지옥으로 변했다. 또 장비의 손실도 손실이지만 이 폭격으로 공산군 사기는 아주 땅에 떨어졌다."는 증언도 있었다. 그러나 조선인민군은 이를 '비밀'로 분류하고, 대외적으로는 폭격을 "닭 두마리가 시끄럽게 떠들어 댄 것과 다를바 없다."라고 폄하하며 그 효과를 축소하려 했다.[6]

4. 2. 한미 연합군의 사기 진작

융단폭격은 한미연합군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미 제8군의 한 상사는 8월 30일 폭격사령관 오도넬 소장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냈는데, 편지에는 "우리 미 보병은 귀하가 왜관 지역을 폭격하여 준 데 대하여 워커 장군과 같이 모자를 벗고 정중히 감사드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또한, 융단폭격 당시 328고지를 방어하던 15연대 1소대장 유영남 소위는 "가을철 잠자리 떼가 뜬 것처럼 B-29폭격기가 새카맣게 떠 알을 낳듯이 폭탄을 흘려댔다. (중략) 당시 우리는 기분이 좋아 '만세!'를 불렀다."고 증언했다.

4. 3. 전황에 미친 영향과 논란

왜관 전면 융단폭격작전은 조선인민군의 공세를 완전히 꺾지는 못했지만, 대구 방어에 중요한 시간적 여유를 확보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6][7] 그러나 오폭 가능성과 실질적인 전과에 대한 논란도 여전히 남아있다.

백선엽 장군은 융단폭격이 북한군의 후방 물자 보급 기지에 큰 피해를 입혔다고 평가했다. 포로로 잡힌 북한군의 증언에 따르면, 왜관 인근 약목 일대의 북한군 3사단과 15사단 예비대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으며, 지원 포병과 공병, 전차와 탄약, 보급품 등이 미군의 융단폭격을 피해가지 못했다. 또한 북한군 내부 통신선도 모두 끊겼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조선인민군의 주력 부대는 이미 낙동강을 도하한 후였기 때문에 융단폭격의 효과는 제한적이었다. 낙동강 서안에는 전차 일부와 포병, 그리고 일부 병력만이 남아있었을 뿐이었다.[6]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융단폭격을 "닭 두 마리가 시끄럽게 떠들어 댄 것과 다를 바 없다"라고 평가절하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융단폭격은 유엔군 방어지역에 대한 조선인민군 포격 감소, 조선인민군의 심리적 공황 발생, 조선인민군 병력 분산 등의 효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확인된 전과는 폭격 후 일시적으로 조선인민군의 포격이 약화된 것뿐이었고, 대구 정면에 대한 조선인민군의 압력은 감소되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2차 융단폭격은 취소되었다.

융단폭격 이후, 8월 18일 새벽에는 가산에 침투한 조선인민군의 박격포탄이 대구역에 떨어지면서 대구의 임시정부가 부산으로 이동하고 시민들에게 피난령이 내려지는 등 혼란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병옥 내무부 장관이 직접 나서 피난령을 취소하고 민심을 수습하면서 질서가 회복되었다.

4. 4. 다부동 전투의 지속과 대구 방어

국군과 미군은 융단폭격을 통해 유엔군 방어지역에 대한 조선인민군의 포격 감소, 심리적 공황, 병력 분산 효과를 달성했다. 그러나 확인된 전과는 일시적인 포격 약화뿐이었고, 대구 정면에 대한 조선인민군의 압력은 감소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19일로 계획된 2차 융단폭격은 미 극동공군사령관의 건의로 취소되었다.

융단폭격에도 불구하고 8월 16일, 조선인민군이 유학산 부근으로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국군 제1사단은 다부동 방어의 기로에 놓였다. 미 제8군 사령부는 국군 제1사단만으로는 방어선 유지가 어렵다고 판단, 8월 17일 미 제25사단 제27연대를 다부동 지역에 투입하고, 미 제2사단 제23연대를 예비로 확보했다. 육군본부도 국군 제8사단 제10연대를 제1사단에 배속시켜 가산 지역에 투입, 전투력을 증강시켰다.

8월 18일 새벽, 가산에 침투한 조선인민군의 박격포탄이 대구역에 떨어져 대구의 위기가 고조되었다. 이날의 충격으로 임시정부가 부산으로 이동하고, 시민들에게 피난령이 내려져 대구는 혼란에 휩싸였다. 그러나 조병옥 내무부 장관이 경찰과 함께 직접 나서 피난령을 취소하고 민심을 수습하여 질서를 회복했다.

5. 다부동 전투의 역사적 의의

5. 1. 관련 추모 시설

왜관지구 전적비


다부동 전투와 왜관 전면 융단폭격의 희생자를 기리는 왜관지구 전적비가 건립되어 있다. 비문에는 "영령들이여! 우리는 보았노라, 들었노라, 기억하노라, 이곳 유학산 봉우리에 그리고 낙동강 기슭에 남긴 그때 그 날의 거룩한 희생을 고귀한 피의 발자국을 우리 겨례는 영원히 소중하게 간직하리라"라는 내용이 적혀있다.

참조

[1] 문서 당시 대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미 제 8군 사령부가 위치하고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2] 문서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 오폭으로 군단장이 전사했다.
[3] 문서 야포 중포탄 3만발과 맞먹는 파괴력을 지닌 양
[4] 문서 한인성 대위
[5] 문서 소령
[6] 문서 포병연대 포함
[7] 문서 약 4000명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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