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산산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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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산산성 전투는 6.25 전쟁 중 1950년 8월 30일부터 9월 14일까지 가산산성과 팔공산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조선인민군은 대구 점령을 목표로 9월 공세를 펼쳤으나, 대한민국 국군과 유엔군은 이를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칠곡 지역 전투와 유학산 전투, 포남 328고지 전투 등 치열한 전투 끝에 조선인민군의 공세는 실패했고,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의 개시로 인해 9월 공세는 완전히 종결되었다.
1950년 6월 25일, 조선인민군의 기습 남침으로 한국 전쟁이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조선인민군이 일방적으로 우세하였다.
1950년 8월 초, 조선인민군은 8월 15일 광복절에 맞춰 대한민국 영토 전체를 점령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3] 김일성은 조선인민군에게 일체의 후퇴나 도주 없이 전선을 사수할 것을 명령했지만,[4] 이미 조선인민군은 유엔군의 근접지원폭격과 대한민국 국군의 방어 작전으로 인해 사기가 저하되고 병력 손실이 큰 상황이었다.[5]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인민군은 8월에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한 공세를 감행했고, 대구를 점령하기 위해 전차 32대를 낙동강 전선에 투입하기도 했다.[6] 반면, 대한민국 국군은 미군으로부터 최신식 장비를 보급받고 낙오병들이 복귀하면서 손실된 병력을 보충했다.[5]
2. 배경
2. 1. 조선인민군의 남침과 초기 상황
1950년 8월 6일 조선인민군 전선총사령부가 예하 부대에 발송한 <조선인민군 전체 하사 군관들에게 보내는 호소문>에 따르면 김일성은 8월 15일 광복절에 맞추어 남아있는 대한민국 영토 전체를 점령하고자 했다.[3] 8월 13일 김일성은 낙동강 방어선을 비롯한 각 지역에 있는 조선인민군에게 일체의 후퇴 및 도주를 거부하고 끝까지 전선을 사수할 것을 명령했다.[4] 비록 김일성의 명령과 달리 조선인민군은 이미 유엔군의 근접지원폭격과 대한민국 국군의 방어작전으로 사기가 저하되고 병력을 크게 잃은 상황이었지만,[5] 그럼에도 불구하고 8월에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한 공세를 감행했다. 안용현의 『한국전쟁비사』 2에 따르면 김일성은 대구를 점령하기 위해 개전 이래 처음으로 전차 32대를 낙동강 전선까지 "긁어모아" 보내기까지 했다.[6] 반면 대한민국 국군은 미군으로부터 최신식 장비를 보급받았고 낙오병들도 속속 부대로 복귀하여 손실된 병력을 보충했다.[5] 유엔군은 조선인민군의 공세에 대비해 낙동강 방어선을 설정하고 방어 준비를 갖췄다.
2. 2. 낙동강 방어선 구축과 대구의 중요성
1950년 8월 초, 낙동강과 팔공산 자락은 대구를 방어하는 천연 요새 역할을 하고 있었다.[18] 대구는 낙동강 방어선의 중심이자 부산 다음으로 유엔군이 점령한 큰 도시였으며, 교통의 중심지이자,[18] 8월 17일까지 대한민국 정부의 임시수도였다.[19]
월턴 워커는 대전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대구를 제8군의 야전본부로 삼았다.[17] 대한민국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설정해 방어 준비를 갖췄다.[5] 당시 대구 방어는 남에서 북으로 미국 제1기병사단과 대한민국 제2군단의 제1사단 및 제6사단이 맡고 있었다.[20] 미국 제1기병사단은 낙동강을 따라 왜관읍 동쪽을 방어했고, 대한민국 국군은 팔공산을 중심으로 제1사단이 서북쪽에, 제6사단이 군위로 이어지는 국도를 따라 방어했다.[20]
2. 3. 팔공산과 가산산성의 전략적 가치
팔공산은 대구 북쪽에 있는 큰 산으로, 칠곡, 군위, 영천, 경산에 걸쳐 있다. 북쪽에서 대구로 오려면 이 산 주위의 협곡이나 계곡을 따라 내려와야 했다. 팔공산의 동서 산줄기를 팔공산맥이라고 하는데, 남동쪽 초례봉부터 환성산, 인봉, 동봉, 서봉, 한티재까지 대부분 봉우리 높이가 800m를 넘는다.[11]
가산산성은 조선시대 칠곡도호부가 있던 곳으로,[7]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뒤 국방 강화를 위해 높이 901m의 가산 주변 계곡 일대에 만들어졌다.[8] 가산은 동서로 길게 뻗은 산으로, 동쪽 끝은 한티재를 통해 팔공산으로 이어지고,[9] 서쪽 끝은 유학산과 석적읍이 한천을 경계로 나뉜다. 가산산성이 있는 칠곡군 가산면은 오계산과 가산을 통해 대구 동명면과 만나고, 가산면 중심의 한천을 따라 구미, 안동, 의성, 군위, 대구로 이어지는 도로가 있었다.[10] 이처럼 팔공산과 가산산성은 대구를 방어하는 데 중요한 천혜의 요새였다.
3. 전투 전개
가산산성은 조선시대 칠곡도호부가 있던 곳으로,[7]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국방 강화를 위해 가산 주변 계곡 일대에 만들어졌다.[8] 칠곡군 가산면은 동명면과 만나고, 구미, 안동 등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있어 교통의 요지였다.[10]
1950년 8월 9일, 미국 제1기병사단 소속 제7기병연대는 왜관읍 금무봉에서 조선인민군 제3사단의 공격을 격퇴했다.[12] 8월 14일, 조선인민군 제3사단은 다시 왜관읍을 도하하여 남하했으나, 미국 제5기병연대에 의해 저지되었다.[13]
1950년 7월부터 8월까지 극동 공군은 보잉 B-29 슈퍼포트리스, 노스아메리칸 P-51 무스탕, 더글러스 A-26 인베이더와 같은 다양한 군용기를 사용하여 조선인민군과 그들이 점령한 지역 및 시설에 대량으로 폭격을 가했다.[26] 1950년 8월 16일 유엔군 공군이 왜관읍 일대에서 수행했던 왜관 전면 융단폭격작전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최대 규모의 융단폭격이었다.[27] 이 융단폭격으로 조선인민군은 주요 보급 및 물자 수송을 야간에만 할 수 밖에 없었다.[26]
3. 1. 칠곡 지역 전투
1950년 8월 초, 조선인민군은 8월 15일 광복절에 맞춰 대한민국 영토 전체를 점령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3] 김일성은 조선인민군에게 일체의 후퇴나 도주 없이 전선을 사수할 것을 명령했지만,[4] 이미 조선인민군은 유엔군의 근접지원폭격과 대한민국 국군의 방어 작전으로 인해 사기가 저하되고 병력 손실이 큰 상황이었다.[5]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인민군은 8월에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한 공세를 감행했고, 김일성은 대구를 점령하기 위해 전차 32대를 낙동강 전선에 투입하기도 했다.[6] 반면, 대한민국 국군은 미군으로부터 최신식 장비를 보급받고 낙오병들이 복귀하면서 손실된 병력을 보충했다.[5]
가산산성은 조선시대 칠곡도호부가 있던 곳으로,[7]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국방 강화를 위해 가산 주변 계곡 일대에 만들어졌다.[8] 칠곡군 가산면은 동명면과 만나고, 구미, 안동 등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있어 교통의 요지였다.[10]
1950년 8월 9일, 미국 제1기병사단 소속 제7기병연대는 왜관읍 금무봉에서 조선인민군 제3사단의 공격을 격퇴했다.[12] 8월 14일, 조선인민군 제3사단은 다시 왜관읍을 도하하여 남하했으나, 미국 제5기병연대에 의해 저지되었다.[13]
3. 1. 1. 유학산 전투
1950년 8월 14일 대한민국 국군 제12연대는 유학산-수암산 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유학산 주봉인 839고지에 제3대대를, 수암산에 제2대대를 배치한 뒤 837고지를 장악하려 했다.[14] 그러나 조선인민군이 837고지를 미리 점령하고 있어 국군과 조선인민군 간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다.[14] 칠곡군 석적읍 포남리에 있던 328고지에서도 조선인민군 제3사단과 대한민국 국군 제1사단 제15연대가 1950년 8월 14일부터 전투를 벌였다.[15][16]
3. 1. 2. 포남 328고지 전투
1950년 8월 14일부터 한국군 제1사단 제15연대는 북한군 제3사단과 칠곡군 석적읍 포남리의 328고지에서 도하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전투를 벌였다.[15][16]
3. 2. 조선인민군의 대구 공세
1950년 8월 6일, 조선인민군 전선총사령부는 예하 부대에 호소문을 보내 김일성이 8월 15일 광복절에 맞춰 대한민국 영토 전체를 점령하고자 했다고 밝혔다.[3] 8월 13일, 김일성은 낙동강 방어선을 비롯한 각 지역의 조선인민군에게 후퇴나 도주를 하지 말고 끝까지 전선을 사수할 것을 명령했다.[4]
하지만, 조선인민군은 이미 유엔군의 근접지원폭격과 대한민국 국군의 방어 작전으로 사기가 저하되고 병력을 크게 잃은 상황이었다.[5]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인민군은 8월에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 공세를 감행했다. 김일성은 대구를 점령하기 위해 개전 이래 처음으로 전차 32대를 낙동강 전선까지 "긁어모아" 보내기도 했다.[6]
반면, 대한민국 국군은 미군으로부터 최신식 장비를 보급받았고, 낙오병들이 부대로 복귀하면서 손실된 병력을 보충했다.[5] 유엔군은 조선인민군의 공세에 대비하여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고 방어 준비를 갖추었다.
3. 2. 1. 대구 전투
조선인민군은 여러 방향에서 대구를 포위 공격했으나, 대한민국 국군과 유엔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월턴 워커는 대구를 제8군의 야전본부로 삼았으며, 대구는 낙동강 방어선의 중심이자 부산 다음으로 유엔군이 점령한 큰 도시였다.[17][18] 1950년 8월 초, 대구 방어는 미국 제1기병사단과 대한민국 제2군단의 제1사단 및 제6사단이 맡았다.[20]
조선인민군은 제10사단,[21] 제3사단, 제15사단, 제13사단을 투입하여 대구를 공략하고자 했다.[22] 제1사단은 고령군 득성동과 왜관, 군위 등을 점령하여 대구를 포위하고 있었다.[23] 제105기갑사단의 일부 병력도 지원부대로 참전했다.[20]
8월 4일부터 8월 5일까지 조선인민군 제13사단이 상주 낙동면 낙동리에서 도하를 시작했고, 8월 7일 전부대가 낙동강을 건너는 데 성공했다.[20] 조선인민군 제1사단 역시 함창읍과 상주 사이의 낙동강 지역을 도하했지만, 대한민국 제1사단과의 전투가 벌어졌다.[20] 8월 17일까지 양측 사단은 군위군을 둘러싸고 공방전을 벌였지만, 조선인민군은 대한민국 국군의 견고한 방어와 유엔군의 폭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20]
3. 3. 유엔군의 반격과 융단 폭격
6.25 전쟁 발발 3일 후인 1950년 6월 28일부터 극동공군은 남한 지역 파괴 우선순위에서 교량을 적 병력 및 전차 다음으로 중요한 목표로 지정했다.[25] 7월 1일 미국 극동공군 사령관은 한강 이남에 최초로 폭격선을 발표했고, 7월 22일에는 유엔군 최고사령부에 목표선정위원회가 수립되었다.[26] 7월 24일, 목표선정위원회는 B-29 전대 1개를 근접지원작전에, 나머지 2개 전대는 차단작전에 사용한다는 결정을 내렸다.[26]
1950년 7월부터 8월까지 극동 공군은 보잉 B-29 슈퍼포트리스, 노스아메리칸 P-51 무스탕, 더글러스 A-26 인베이더와 같은 다양한 군용기를 사용하여 조선인민군과 그들이 점령한 지역 및 시설에 대량으로 폭격을 가했다.[26]
3. 3. 1. 왜관 전면 융단폭격작전
1950년 8월 16일 유엔군 공군이 왜관 일대에서 수행했던 왜관 전면 융단폭격작전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최대 규모의 융단폭격이었다.[27] 이 융단폭격으로 조선인민군은 주요 보급 및 물자 수송을 야간에만 할 수 밖에 없었다.[26]
4. 전투 결과 및 영향
김일성은 1950년 8월 15일 광복절에 대한민국 영토 전체를 점령하려 했으나,[3] 조선인민군은 유엔군의 근접지원폭격과 대한민국 국군의 방어 작전으로 병력이 크게 감소한 상태였다.[5] 그럼에도 조선인민군은 8월 낙동강 방어선 돌파를 위한 공세를 감행했고, 김일성은 대구 점령을 위해 전차 32대를 투입했다.[6] 그러나 대한민국 국군은 미군으로부터 최신 장비를 보급받고 낙오병들이 복귀하여 전력을 보강한 상황이었다.[5]
가산산성 전투에서 패퇴한 후, 조선인민군 제2군단은 제1사단을 대구 공략 부대로 지정했다. 1950년 8월 30일부터 9월 14일까지 조선인민군 제1사단은 가산-팔공산 방어선을 공격했지만,[28] 대한민국 제1사단과 미 제7군단 예하 기병연대들은 약 2주 동안 공세를 성공적으로 방어했다.[29]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으로 조선인민군의 후방이 위협받으면서 9월 공세는 종료되었다.[30] 이후 다부동을 비롯한 낙동강 방어선의 대한민국 국군과 유엔군은 공세로 전환, 반격 작전을 개시했다.
4. 1. 조선인민군의 공세 좌절
김일성은 1950년 8월 15일 광복절에 맞추어 대한민국 영토 전체를 점령하고자 했으나,[3] 조선인민군은 이미 유엔군의 근접지원폭격과 대한민국 국군의 방어작전으로 인해 병력을 크게 잃은 상황이었다.[5]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인민군은 8월에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 공세를 감행했다. 김일성은 대구를 점령하기 위해 전차 32대를 낙동강 전선까지 보냈지만,[6] 대한민국 국군은 미군으로부터 최신식 장비를 보급받고 낙오병들이 복귀하여 손실된 병력을 보충한 상태였다.[5]가산 일대에서 패퇴한 후에도 조선인민군 제2군단은 제1사단을 대구 공략 부대로 임명했다. 1950년 8월 30일부터 9월 14일까지 조선인민군 제1사단은 9월 공세의 일환으로 가산-팔공산 방어선에 있는 유엔군 방어부대를 공격했다.[28] 대한민국 제1사단 예하 제11연대, 제12연대, 제15연대와 미국 제7군단 예하 제5기병연대, 제7기병연대, 제8기병연대는 약 2주 동안 조선인민군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방어했다.[29]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으로 조선인민군의 후방이 위협받으면서 9월 공세는 끝나게 되었다.[30] 이후 다부동을 비롯한 낙동강 방어선 각 지역의 대한민국 국군과 유엔군은 공세로 전환하고 반격작전을 개시했다.
4. 2. 낙동강 방어선 사수
1950년 8월 6일, 조선인민군 전선총사령부는 8월 15일 광복절까지 대한민국 영토 전체를 점령하라는 김일성의 명령을 예하 부대에 하달했다.[3] 8월 13일, 김일성은 낙동강 방어선을 비롯한 각 지역의 조선인민군에게 후퇴나 도주 없이 전선을 사수할 것을 명령했다.[4] 그러나 조선인민군은 이미 유엔군의 근접지원폭격과 대한민국 국군의 방어 작전으로 사기가 저하되고 병력 손실이 큰 상황이었다.[5]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은 대구 점령을 위해 전차 32대를 낙동강 전선에 투입하는 등 8월 공세를 강행했다.[6]반면, 대한민국 국군은 미군으로부터 최신 장비를 보급받고 낙오병들이 복귀하면서 병력을 보충했다.[5] 유엔군은 조선인민군의 공세에 대비해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고 방어 준비를 갖췄다.
1950년 8월 9일, 미 제1기병사단 제7기병연대는 칠곡군 왜관읍 금무봉에서 조선인민군 제3사단의 공격을 격퇴했다.[12] 8월 14일, 조선인민군 제3사단은 다시 왜관읍을 도하하여 작오산 일대로 남하했으나, 미 제1기병사단 제5기병연대에 의해 격퇴되었다.[13] 같은 날, 대한민국 국군 제12연대는 유학산-수암산 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조선인민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14] 칠곡군 석적읍 포남리의 328고지에서도 조선인민군 제3사단과 대한민국 국군 제1사단 제15연대가 8월 14일부터 전투를 치렀다.[15][16]

가산산성 일대에서 패퇴한 후, 조선인민군 제2군단은 제1사단을 대구 공략 부대로 지정했다. 1950년 8월 30일부터 9월 14일까지, 조선인민군 제1사단은 9월 공세의 일환으로 가산-팔공산 방어선을 공격했다.[28] 대한민국 제1사단 예하 제11연대, 제12연대, 제15연대와 미 제7군단 예하 제5기병연대, 제7기병연대, 제8기병연대는 약 2주 동안 조선인민군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막아냈다.[29]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으로 조선인민군의 후방이 위협받으면서 9월 공세는 종료되었다.[30] 이후 다부동을 비롯한 낙동강 방어선 각 지역의 대한민국 국군과 유엔군은 공세로 전환하여 반격 작전을 개시했다.
4. 3. 인천 상륙 작전과의 연계
인천 상륙 작전의 개시로 조선인민군의 후방이 위협받으면서 1950년 9월 공세는 끝나게 되었다.[30] 이후 다부동을 비롯한 낙동강 방어선 각 지역의 대한민국 국군과 유엔군은 공세로 작전을 전환하고 전 전역에 걸쳐 반격작전을 개시했다.5. 역사적 평가 및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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