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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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인은 조선 시대 사림파가 동인에서 분열된 후 형성된 붕당으로, 정철의 처벌 문제로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북인이 집권하면서 야당으로 전락했으나, 예송 논쟁과 환국 정치를 거치며 세력을 확장하기도 했다. 숙종 대에는 환국으로 인해 정권이 남인과 서인 사이를 오갔고, 결국 갑술환국으로 몰락했다. 이후 탕평책 시기에 채제공 등 남인 인물들이 등용되었으나, 신유박해를 겪으며 다시 쇠퇴했다. 남인은 유교와 성리학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실학과 천주교를 수용하는 등 다양한 사상을 포용했으며, 주요 인물로는 류성룡, 허목, 정약용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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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 - [정당]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남인 |
로마자 표기 | Nam-in |
한자 표기 | 南人 |
의미 | 남쪽 사람 |
정치 | |
분열 | 동인 |
창당 | 1589년(기축옥사) |
해산 | 1674년(갑인예송) 또는 1791년(신해박해) 또는 1801년(신유박해) |
후계 정당 | 탁남(갑인예송) 청남(갑인예송) 신서파(신해박해) 공서파(신해박해) |
정치 이념 | 유교(성리학) |
주요 인물 | |
영수 | 서애 류성룡 퇴계 이황 한음 이덕형 백호 윤휴 묵재 허적 추연 우성전 오리 이원익 |
2. 태동과 구성
1575년 사림파는 이조전랑 자리를 놓고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지는 동서분당 사건이 발생했다.[5] 서인과 대립하던 동인은 조선 선조 때 정철의 건저의 사건을 계기로 정철의 처벌에 대해 온건론을 주장한 남인과 강경파인 북인으로 다시 나뉘었다. 1591년(선조 24년) 서인 정철이 건저의 사건으로 파직되자 서인 배척에 온건했던 동인 일파가 남인이다.[5]
1580년대 후반, 정권을 장악한 것은 동인이었다. 1589년, 정여립이 반란을 모의했다는 사실이 발각되면서 정철을 중심으로 한 서인이 실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정철이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건의하자 동인은 “광해군을 왕세자로 삼고 인빈 김씨와 그 아들 신성군을 살해하려 한다”는 거짓 밀고를 받고 정철은 좌천되었고, 동인은 서인에 대한 숙청을 감행하여 다시 정권을 장악했다.
동인은 정철의 처벌에 대한 주장의 차이로 우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온건파와 이산해를 중심으로 하는 강경파로 나뉘었다. 이산해는 다른 문제로 류성룡과도 대립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동인은 우성전·류성룡을 중심으로 한 남인과 이산해를 중심으로 한 북인으로 분당했다.
‘남인’이라는 명칭은 류성룡이 영남 출신이었던 것과 우성전의 실가가 남산 기슭에 있었던 것, 그리고 거점이 당시 수도였던 한성보다 남쪽에 있었던 것 등에서 유래했다는 의견이 있다.
분당 이후, 정철의 처벌에 대해 남인이 주장하는 유배가 채택됨에 따라 류성룡과 우성전이 정권을 주도하게 된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을 계기로 류성룡이 파면되면서 북인에 의한 정권이 수립되었고, 남인은 오랫동안 야당 생활을 하게 되었다.
2. 1. 사림파의 정계 진출
성종은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서 사림을 중용하였다. 사림은 3차례의 사화로 큰 화를 입었으나 서원을 중심으로 한 지역세력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중앙정계에 진출하였다. 명종 말년에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사망으로 훈구와 척신정치는 종말을 고하고 선조대에 이르러 사림파가 조정을 장악하게 되었다. 사림파 내부의 갈등은 이조정랑(吏曹正郞) 자리 문제를 놓고 다투며 본격적으로 표면화되며 붕당정치가 시작되었다.본래 붕당(朋黨) 형성은 범죄행위였으나[2] 정치란 소인배를 배제한 군자들이 주도해야 한다는 성리학의 붕당관(朋黨觀)을[3][4] 조정을 장악한 사림(士林)들이 받아들이면서 선조 때부터 붕당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2. 2. 동인에서 분당
1575년 이조전랑 자리를 놓고 사림파가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진 동서분당 사건이 발생했다.[5] 서인과 대립하던 동인은 조선 선조 때 정철의 건저의 사건을 계기로 정철의 처벌에 대해 온건론을 주장한 남인과 강경파인 북인으로 다시 나뉘었다. 1591년(선조 24년) 서인 정철이 건저의 사건으로 파직되자 서인 배척에 온건했던 동인 일파가 남인이다.[5]1580년대 후반, 정권을 장악한 것은 동인이었다. 1589년, 정여립이 반란을 모의했다는 사실이 발각되면서 정철을 중심으로 한 서인이 실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정철이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건의하자 동인은 “광해군을 왕세자로 삼고 인빈 김씨와 그 아들 신성군을 살해하려 한다”는 거짓 밀고를 받고 정철은 좌천되었고, 동인은 서인에 대한 숙청을 감행하여 다시 정권을 장악했다.
동인은 정철의 처벌에 대한 주장의 차이로 두 파로 분열되었다. 정철은 유배로 충분하다는 온건론을 펼친 우성전과 정철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강경한 주장을 한 이산해로 나뉘었다. 이산해는 다른 문제로 류성룡과도 대립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동인은 우성전·류성룡을 중심으로 한 남인과 이산해를 중심으로 한 북인으로 분당했다.
‘남인’이라는 명칭은 류성룡이 영남 출신이었던 것과 우성전의 실가가 남산 기슭에 있었던 것, 그리고 거점이 당시 수도였던 한성보다 남쪽에 있었던 것 등에서 유래했다는 의견이 있다.
분당 이후, 정철의 처벌에 대해 남인이 주장하는 유배가 채택됨에 따라 류성룡과 우성전이 정권을 주도하게 된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을 계기로 류성룡이 파면되면서 북인에 의한 정권이 수립되었고, 남인은 오랫동안 야당 생활을 하게 되었다.
2. 3. 남인과 북인
이산해를 중심으로 한 강경파는 북인으로 불렸고, 우성전이 남산에 살아서 류성룡을 중심으로 한 온건파는 남인으로 불렸다.[6] 남인은 초기에는 우성전, 이덕형, 류성룡, 김성일이, 후기에는 윤휴, 허목, 허적, 목내선, 권대운 등이 이끌었다. 학문적으로는 조식을 따르는 선비들은 북인을, 이황의 학파는 남인을 구성했다.1589년, 정여립 모반 사건을 계기로 서인이 정권을 잡았으나, 정철이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건의하자 인빈 김씨와 신성군을 살해하려 한다는 모함을 받고 실각하면서 동인이 다시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동인은 정철의 처벌 문제를 두고 온건론을 주장한 우성전과 류성룡 중심의 남인과, 강경론을 주장한 이산해 중심의 북인으로 분열되었다. 남인이란 명칭은 류성룡이 영남 출신이었던 점, 우성전의 집이 남산 기슭에 있었던 점, 그리고 거점이 한성 남쪽에 있었던 점 등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분당 이후, 정철에 대한 처벌은 남인이 주장한 대로 유배로 결정되면서 류성룡과 우성전이 정권을 주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계기로 류성룡이 파면되면서 북인이 정권을 잡았고, 남인은 오랫동안 야당 생활을 하게 되었다.
3. 변화
북인은 선조 사후 광해군 집권으로 정권을 잡았으나, 인조반정으로 몰락하여 소수파가 되었다. 이후 동인의 전통은 인조반정 때 서인을 지지한 남인이 대부분 계승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많은 남인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3. 1. 예송 논쟁과 환국 정치
효종, 현종 연간에 율곡과 우계의 문묘종사 논쟁과 예송 논쟁 과정에서 남인 강경파인 허목, 윤선도, 윤휴 등은 송시열을 맹렬하게 공격하여 갈등을 증폭시켰다.[1]1674년 갑인예송때 남인은 서인을 실각시켰으나 서인 배척 문제로 강경한 청남(淸南)·온건한 탁남(濁南)으로 분열되었다.[1] 청남에는 허목, 윤선도, 윤휴, 오시수, 홍우원 등이 있으며 탁남에는 허적, 권대운, 민암, 목내선, 김덕원, 민종도 등이 속하였다.[1]
그 뒤 인현왕후 폐위, 장희빈 중전 옹립, 인현왕후 복위 등으로 서인들과 대결하며 3차례의 환국 끝에 1694년 갑술환국때 몰락하고 서인에게 정권을 넘겨주고 말았다.[1]
현종이 즉위하자, 당시 남인의 영수였던 허목은 서인을 배척할 기회를 엿보았다.[1] 효종이 승하하자, 인조의 계비였던 장렬왕후의 상복 기간이 문제가 되었다.[1] 장렬왕후는 효종의 의붓어머니였지만, 조선에서는 자식을 잃은 부모는 장남이면 3년, 장남이 아니면 1년 상을 치르는 것이 관례였는데, 효종을 적장자로 볼 것인가 아닌가를 두고 논쟁이 일었다.[1]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은 1년 상을 주장하며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1] 그러나 허목은 논의가 충분하지 않았다는 구실로 3년 상을 주장했다.[1] 3년 상을 주장하는 것은 효종을 인조의 적장자로 보는 것이며, 효종의 정통성을 높이 인정함으로써 남인 세력을 신장시키려는 목적이 있었다.[1] 그러나 남인의 예상대로 되지 않고, 서인의 견해가 인정되는 형태로 마무리되었다. (제1차 예송 논쟁)[1]
1674년, 효종의 왕비 인선왕후가 승하했다.[1] 그러자 다시 장렬왕후의 상복 기간을 둘러싸고 논쟁이 일어났다.[1] 장남의 며느리가 죽었을 경우 상복 기간은 1년이었지만, 장남이 아닌 며느리라면 상복 기간은 9개월이었다.[1] 이때 서인은 9개월 상을 주장했지만, 남인은 효종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관점에서 1년 상을 주장했다.[1] 현종은 아버지의 정통성을 낮추는 것은 인정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남인의 견해를 채택했다.[1] 결과적으로 영의정에 남인의 영수인 허적이 발탁되면서, 50년간 이어진 서인의 정권을 남인이 빼앗게 된 것이다. (제2차 예송 논쟁)[1]
3. 2. 탕평책과 신유박해
영조와 정조 대에는 탕평책에 따라 남인이 등용되었는데, 이 시기 남인의 영수는 채제공이었으며 대표적인 인물로는 이승훈, 안정복, 정약용, 권철신, 이가환 등이 있다. 이들은 실학파 형성과 천주교 도입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1]1800년 6월 정조 승하 이후 발생한 정순왕후의 신유박해 때 대사간으로서 영의정 심환지, 형조판서 목만중 등 남인(南人)의 시파(時派) 계열의 천주교도들에 대한 탄압이 있었다. 서학을 반대하던 남인 공서파(攻西派)와 신서파(信西派)의 크고 작은 갈등이 지속되었다. 신서파는 황사영 백서사건을 결정적 계기로 대대적인 숙청을 당하고 재기불능에 가까울 정도로 몰락하고 말았다. 이후 펼쳐진 세도 정치 아래서 중앙 정계에서 완전히 밀려나 재야에 머물렀다.[1]
영조 시대 1728년, 노론에 의해 배척된 이인좌(소론)가 무신의 난을 일으키자 경상도에서 반란에 가담한 남인이 있었다. 이 사건 이후 남인은 역적의 낙인을 찍히게 되었다.[1]
갑술환국 이후 100년 가량 지난 1798년, 정조의 탕평책에 따라 당시 영수였던 채제공이 대신으로 발탁되었다. 이를 계기로 중앙 정계에 복귀하고자 유자인 이진동은 남인이 무신의 난에서 반란군에 저항했음에도 역적의 오명을 쓰고 있다고 정조에게 호소했다. 그러자 정조는 남인에 대한 지원을 약속하고, 적극적으로 과거에서 남인을 등용해 나갔다.[1]
남인들이 잇달아 등용되자 노론은 이에 저항했다. 정조가 남인에 치우쳐 노론의 의견을 듣지 않는 것, 이를 두고 학문을 소홀히 하고 놀고 있다고 간언한 것이다. 남인은 이 발언을 한 노론의 한 사람을 탄핵하고, 이 발언을 옹호한 윤구종의 조사를 진행했다. 조사를 진행하던 중 윤구종이 제20대 국왕 경종의 왕비인 단의왕후의 능묘 앞을 지날 때 가마에서 내리지 않았던 사실이 드러났다. 이로써 노론이 경종을 국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 드러났다. 이를 계기로 채제공은 노론에 의해 죽임을 당한 장헌세자의 이야기를 꺼내 노론을 비판했다. 더 나아가 남인은 장헌세자의 명예회복과 노론의 역모죄 적용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고, 이 상소에는 1만 57명이 서명했다. 이에 정조는 감격하면서도 노론을 배려하여 남인의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0일 후, 남인은 전회보다 311명 많은 1만 368명으로 다시 상소를 올렸다. 또 한 번 상소를 계획했으나 정조의 간곡한 설득으로 포기했다.[1]
정조 시대, 장헌세자의 죽음에 대해 동정적인 세력을 시파라고 한다. 남인은 소론과 함께 시파를 형성했다.[1]
당시 남인은 기독교를 수용하고 있었다. 청나라 신부가 조선에 밀입국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노론에 의해 배척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조는 숙종 시대 노론의 영수가 기독교를 평가했던 사실을 언급하며 노론의 기독교 배척을 비판하고, 남인의 이가환이나 정약용이 정권을 맡을 것을 암시했다. (오회의교)[1]
그러나 남인은 1799년 채제공이 사망하여 세력이 약해진 데다 오회의교 직후 정조가 사망함으로써 궁지에 몰렸다.[1]
순조가 즉위하자 정순왕후를 중심으로 노론이 신유박해를 단행하여 남인들을 많이 처형 및 유형에 처하며 남인을 배척했다. 이후 남인이 다시 정권을 잡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외척이 등장하여 섭정 정치가 시작되면서 붕당 정치는 종말을 고했다.[1]
4. 사상과 강령
남인의 정치 이념과 강령은 기본적으로 유교, 성리학이었다. 그러나 허목 등은 도교와 노장사상에도 관심이 있었고, 유형원, 이익 등은 청나라의 고증학과 실리 사상을 추구하여 실학 사상을 잉태하기도 했다. 이는 성리학과는 정면 배치되는 사상이라 남인 당내에서도 이론의 여지가 있었다.[1]
18세기에 오면 이승훈이 천주교를 받아들인 이래 권철신, 이가환, 정약용 등이 천주교 사상을 받아들였다.[1] 그러나 천주교 사상을 좋지 않게 생각하는 세력이 등장하였으며 이를 천주교를 받아들인 신서파와 구별하여 공서파라 부른다.[1] 윤지충, 권상연 등의 위패 소각 사건을 계기로 벌어진 신해박해(1791), 황사영백서의 공서파가 두드러졌다.[1]
인조 반정 이후에도 남인은 거의 오랜 기간 야당화를 겪었으므로 남인은 성리학을 당의 주요 강령으로 삼았으나, 남인내 일부는 실학과 천주교 등 다른 사상에서 사상적 기반을 찾으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1]
5. 주요 인물
참조
[1]
서적
정조실록
[2]
웹사이트
붕당 [朋黨]
https://terms.naver.[...]
[3]
웹사이트
붕당 [朋黨]
https://terms.naver.[...]
[4]
서적
우리역사를 읽는 33가지 테마
푸른숲
1997
[5]
서적
테마로 읽는 우리역사
동방미디어
2004
[6]
서적
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
석필
2004
[7]
문서
심의겸 - 기호학파(율곡학파, 우계학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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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김효원 - 영남학파(퇴계학파, 남명학파) 및 화담학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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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에 대한 보복 반대. 주로 퇴계학파. 류성룡, 이원익 등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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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에 대한 강경 보복 주장. 주로 남명학파. 이산해, 정인홍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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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폐위 반대. 유희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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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의 폐모살제 찬성. 이경전, 이이첨, 허균 등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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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의 폐모 반대, 살제는 찬성. 홍여순 등
[15]
문서
광해군의 폐모살제 반대. 유몽인, 곽재우 등
[16]
문서
인조반정 주도세력. 이귀, 김류, 최명길, 심기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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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반정에 참여치 않은 재야세력. 김상헌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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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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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송 이전에 서인과 대충 잘 지낸 세력. 허적, 유혁연, 권대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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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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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 및 그 추종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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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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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문서
영조의 탕평책과 척신정치에 영합. 홍봉한, 정후겸, 김상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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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천주교 박해 주장. 홍의호, 홍낙안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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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천주교에 사상적으로 반대하는 안정복, 신후담 등
[32]
문서
천주교 박해 반대. 채제공, 이가환, 정약용 등
[33]
문서
사도세자 추숭 반대파. 심환지, 김달순 등
[34]
문서
사도세자 추숭 찬성파. 홍국영, 채제공, 김조순, 심상규 등
[35]
문서
정순왕후 사망 이후 벽파 세력을 전멸시키고 정권 독점. 김조순, 박종경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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