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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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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효원은 1542년에 태어나 16세기 조선 시대의 문신이자 동인의 영수로 활동했다. 그는 이황과 조식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명종 말엽 사림파가 진출할 때 관직에 진출하여 이조전랑을 역임했다.

관료 생활 중 심의겸과의 갈등으로 동서 분당의 원인을 제공했으며, 경흥부사, 삼척부사 등을 역임하며 지방관으로 활동했다. 청렴한 생활과 교육 진흥에 힘썼으며, 사후 이조판서로 증직되고 경행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그의 사상은 동인 분열에 영향을 미쳤으며, 저서로는 《성암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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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원
김효원
인물 정보
한글김효원
한자金孝元
로마자 표기Gim Hyo-won
기본 정보
국적조선
직업문신, 정치가
출생1542년
사망1590년
관직
이조정랑역임
당파
소속동인
영수심의겸 사후 동인의 영수

2. 생애

1542년에 태어나 1590년에 사망한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이다. 이황조식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으며, 1565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젊은 시절 윤원형의 사위 이조민과 교류하기도 했으나, 이후 신진 사림파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1575년 이조전랑직 임명을 둘러싸고 명종의 외척인 심의겸과 갈등을 빚으면서 동서 분당의 직접적인 계기를 마련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김효원은 자신의 집이 있던 한성부 동쪽 건천동의 이름을 따 동인의 영수로 여겨졌고, 심의겸을 지지하는 세력은 서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분열은 이후 조선 정치사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분당의 갈등을 완화하기 위한 선조의 조정으로 심의겸과 함께 외직으로 나가게 되었으며, 김효원은 함경도 경흥부사, 부령부사를 거쳐 강원도 삼척부사로 임명되었다. 이후 10여 년간 지방관으로 활동하며 정치보다는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 문교 진흥에 힘썼다. 안악군수를 거쳐 영흥부사로 재직하던 중 사망하였다.[3]

사후 증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가 다시 증 이조판서로 가증되었으며, 삼척의 경행서원 등에 제향되었다.[2] 저서로는 《성암집》이 있다. 그의 후손들은 주로 북인으로 활동했다.

2. 1. 생애 초기

김효원은 1542년에 태어났다. 증조부는 상원서 직장 수현(秀賢)이고, 할아버지는 전생서 직장 덕유(德裕)이다. 아버지는 영유 현령(永柔 縣令) 홍우(弘遇)이며, 어머니는 윤은좌(尹殷佐)의 딸 해평 윤씨이다. 동생으로는 김이원 등이 있었다. 일찍이 한성으로 올라와 남부 건천동(乾川洞)에 살면서 류성룡 등과 교류했다.

1564년(명종 19) 진사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바로 성균관에 들어가 유생으로 공부했다. 이듬해인 1565년에는 알성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3] 그는 퇴계 이황남명 조식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이황의 제자 중 한 사람이자 김종직의 학통을 이었으며, 조식의 문하에도 직접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스승 중 한 사람인 조식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방향 모르는 날 가르쳐주셨고(誘掖回迷走)/ 날 채워서 옳은 사람 되게 했다네(充盈見實歸)/ 인문이 이제는 끝나고 말았구나(人文今已矣)/ 이제 우리 도를 누구에게 의지할꼬(五道竟何依)?"라는 만사를 지어 그의 가르침을 기렸다. 이를 통해 그는 학문적으로 김종직-이황 학맥과 조식 학맥을 모두 계승하였다.

그의 친구 중에는 명종의 외삼촌인 윤원형(尹元衡)의 사위 이조민(李肇敏)이 있었다. 이조민은 장인 윤원형의 집에서 처가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김효원도 윤원형의 집에 자주 드나들게 되었다. 다른 친구들은 이조민과의 관계를 우려하여 멀리할 것을 권했지만, 김효원은 이조민의 사람됨을 보고 교류를 이어갔다. 그러나 왕실의 인척이자 인순왕후의 남동생인 심의겸이 집안 어른들과 함께 윤원형의 집에 방문했다가 김효원을 보게 되면서 두 사람의 관계가 시작된다.

김효원은 문을 닫고 지내며 봄에 직접 꼰 신발 한 켤레로 십 년 이상을 신을 정도로 검소하게 생활했다고 전해진다. 이황조식의 문하에서 수학했지만, 윤원형의 사위 이조민과의 친분 때문에 한때 윤원형 집안의 식객처럼 지내기도 했다. 명종 말년에 윤원형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 세력이 몰락하고 사림파가 정치의 중심에 서게 되면서, 이황조식의 문인이라는 배경 덕분에 김효원 역시 신진 사류의 일원으로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다.

2. 2. 관료 생활과 동서분당

그 뒤 병조좌랑·정언·지평을 지냈다. 사헌부 지평으로 재직 중 문정왕후 윤씨가 죽고 척신 세력이 몰락하자, 김효원은 새롭게 정계에 진출한 신진 사림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부상했다. 1574년(선조 7년) 이조전랑으로 있던 오건(吳健)이 자리를 옮기면서 후임으로 김효원을 추천했으나[4], 이조참의 심의겸(沈義謙)이 과거 김효원이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의 문객이었다는 이유로 강하게 반대하여 무산될 뻔했다. 그러나 김효원은 외척 세력과 거리가 멀었고 이황조식 문인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에, 심의겸의 반대를 극복하고 이조전랑에 임명되었다. 이후 김효원은 심의겸이 외척 가문이며 윤원형 집안과 가깝게 지냈다는 점과 그의 숙부 심통원의 부패와 비리를 지적하며 공격했다.

김효원은 이 일을 계기로 심의겸에게 앙심을 품고 복수의 기회를 노렸다. 김효원이 이조전랑을 지낸 이듬해인 1575년, 그의 후임 이조전랑 후보로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沈忠謙)이 천거되자, 김효원은 심충겸명종인순왕후(仁順王后)의 남동생인 척신이라는 점을 들어 "이조전랑직이 어찌 외척 집안의 소유물이 될 수 있는가?"라며 강하게 반대하였다.[3] 당시 선조는 명종의 양자 자격으로 즉위했기 때문에 외척 세력에 대한 경계심이 높았고, 김효원의 주장은 설득력을 얻어 공론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갈등 과정에서 사림 세력은 김효원을 지지하는 측과 심의겸을 지지하는 측으로 나뉘게 되었다.

김효원과 심의겸의 대립이 격화되자, 우의정 노수신부제학 이이 등은 갈등 완화를 위해 두 사람을 모두 한성부에서 떨어진 외직으로 보낼 것을 선조에게 건의했다. 이에 따라 김효원은 함경도 경흥부사로, 심의겸은 개성부유수로 전보되었다. 그러나 동인 측에서는 김효원이 정치적 배경이 약하다는 이유로 더 멀고 험한 곳으로 쫓겨났다고 강하게 반발했으며[3], 이 조정안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동인의 반발에 부딪혀 김효원은 다시 부령부사로 옮겨졌으나, 부령 역시 변방이라는 불만이 계속되자 결국 강원도 삼척부사로 다시 임명되었다.

2. 3. 지방관 생활과 사후

청의(淸議)를 주장하여 사림으로부터 선명성을 인정받고 동인의 영수로 추대되었다.[2] 그러나 이후 10여 년간 지방관으로 활동하며 서원과 서당 설립을 장려하는 등 문교 진흥 정책에 힘썼다. 당쟁 발생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정치와 시사(時事)에 대해서는 되도록 발언을 삼갔으며, 지방관 재임 중 사사로운 일로는 한 번도 도성을 방문하지 않았다.

선비들과 강론할 때는 가난한 살림에도 음식을 나누었고, 때로는 식사를 잊을 정도로 토론에 몰두했다. 교육에도 심혈을 기울여 이황조식에게서 배운 학문을 후대에 전수하고 직접 후학을 양성하여 성리학자들을 길러냈다.

안악군수를 거쳐 영흥부사로 재직하던 중 사망하였다.[3] 사후 주을천 옆 묘소 입구에 신도비가 세워졌는데, 이준(李埈)이 글을 짓고 김세렴(金世濂)이 글씨를 썼으며, 허목(許穆)이 전액하여 1743년에 건립되었다.[2] 묘갈명은 갈암 이현일이 썼으며, '조정에 있을 때 정색(正色)과 직언(直言)으로 조금도 거리낌이 없어 일시의 권간들이 모두 그를 두려워했다'고 평가했다.[2] 저서로는 《성암집》이 있다.

사후 증 가선대부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가 후에 다시 증 이조판서로 가증(加贈)되었으며, 삼척의 경행서원(景行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묘갈은 미수 허목이 지었으나 후에 1803년(순조 3) 다시 세워졌다.

그의 딸 중 한 명은 허균의 후처가 되었고, 허균의 형인 허봉의 딸은 그의 아들 김극건의 부인이 되는 등 허씨 가문과 인척 관계를 맺었다. 동인남인북인으로 분열될 때 그의 동생 김이원 등은 북인에 가담했으며, 증손 김세렴 등 후대 인물들도 북인으로 활동했다.

3. 사상과 평가

사후 증 가선대부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이후 다시 증 이조판서로 직위가 높아졌다. 삼척의 경행서원(景行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그의 묘갈명은 허목이 지었으나, 후에 1803년 (순조 3년)에 다시 세워졌다.

가족 관계를 보면, 그의 딸 중 한 명은 허균의 후처가 되었고, 허균의 형인 허봉의 딸은 김효원의 아들 김극건의 부인이 되어 허씨 형제와 겹사돈 관계를 맺었다. 김효원은 동인의 주요 인물이었는데, 동인이 남인북인으로 분열될 때 그의 동생 김이원 등 가족 일부는 북인에 가담하였다. 동생 김이원과 증손 김세렴 등은 모두 북인의 당원이었다.

4. 가족 관계

초당 허엽과는 사돈 관계이다. 그의 딸 중 한 명은 허균의 후처가 되었고, 허균의 형인 허봉의 딸은 그의 아들 김극건의 부인이 된다.[1] 동인남인북인으로 분당될 때 그의 동생 김이원 등은 북인에 가담했으며, 증손 김세렴 등도 북인의 당원이었다.[1]

관계이름비고
할아버지김덕유(金德裕)[1]
아버지김홍우(金弘遇)[1]
어머니윤은좌(尹殷佐)의 딸[1]
동생김이원(金履元)소암(疎庵)[1]
동생김신원(金信元)[1]
동생김의원(金義元)[1]
부인초계 정씨정승계(鄭承季)의 딸[1]
장남김극건(金克鍵)[1]
며느리양천 허씨허봉(許篈)의 딸[1]
손자김세렴(金世濂)[1]
장녀선산 김씨[1]
사위허균(許筠)허봉(許篈)의 동생[1]


5. 저서


  • 《성암집》

참조

[1] 데이터베이스 金孝元 http://koreandb.nate[...]
[2] 뉴스 '[종가기행 24] 善山金氏 省庵 金孝元 - 부친 여윈 뒤 家勢 기울어 "가문의 전통 범절 잘 몰라요"' http://weekly.hankoo[...] 주간한국 2006-11-14
[3] 뉴스 윤종일교수의 남양주역사기행(26)- 동인(東人) 김효원(金孝元) http://www.wa-bu.net[...] 남양주타임즈 2007-01-26
[4] 문서 1575년 이전까지 조선에서는 이조 전랑의 임명은 전임자의 후임자 천거로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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