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이중섭은 평안남도 출신의 한국 화가로, 1916년에 태어나 1956년에 사망했다. 오산학교에서 서양화를 배우고 일본 유학을 거쳐 조선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는 등 미술계에서 활동했다. 한국 전쟁 이후 가족과 헤어진 채 극심한 빈곤 속에서 작품 활동을 이어갔으며, 담배 은박지 그림, 가족에게 보낸 편지 그림 등 독창적인 작품을 남겼다. 대표작으로는 《흰 소》, 《싸우는 소》 등이 있으며, 1970년대에 그의 예술적 가치가 재조명되어 은관문화훈장을 추서받았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장수 이씨 - 이종무
이종무는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신으로, 태종을 도와 왕자의 난을 평정하고 세종 원년에 삼군도체찰사로서 대마도 정벌을 지휘했으며, 사후 양후라는 시호를 받았다. - 장수 이씨 - 이상민 (1942년)
이상민(1942년)은 태림상사 대표, 국회의원, 헌정회 회장 등을 역임한 대한민국의 기업인 및 정치인이다. - 평원군 출신 - 우동측
우동측은 김일성종합대학 졸업 후 요직을 두루 거치며 김정은 체제 안착을 위한 숙청을 주도했으며, 뇌졸중 또는 숙청설 이후에도 열병식에 참가하여 건재함을 과시했다. - 평원군 출신 - 박흥주
박흥주는 일제강점기 출생으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중위, 중앙정보부 근무, 김재규 전속부관을 거쳐 10·26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 간염으로 죽은 사람 - 장면
장면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자 교육자로, 제2공화국 초대 국무총리 및 제4대 부통령을 역임했으며, 가톨릭 신자로서 교육계에서 활동하다 정계에 입문하여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유엔 승인에 기여했으나, 4·19 혁명 후 국무총리로서 의원내각제를 이끌다 5·16 군사정변으로 축출되었고 그의 삶과 정치 활동은 논쟁과 의혹 속에 평가된다. - 간염으로 죽은 사람 - 멜빈 슈워츠
멜빈 슈워츠는 뮤온 중성미자 발견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물리학자로, 컬럼비아 대학교와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연구했으며 디지털 패스웨이 사장을 역임하고 브룩헤이븐 국립연구소 부소장으로도 활동하며 고전 전자기학 교과서를 저술하는 등 물리학 교육에도 기여했다.
이중섭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본명 | 이중섭 |
한글 이름 | 이중섭 |
한자 이름 | 李仲燮 |
로마자 표기 | I Jung-seop |
일본어 표기 | イ・ジュンソプ |
출생일 | 1916년 4월 10일 |
출생지 | 일제강점기 조선 평안남도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 742 |
사망일 | 1956년 9월 16일 (향년 40세) |
사망지 | 서대문적십자병원 |
묘소 | 망우역사문화공원 |
국적 | 대한민국 |
학력 | |
학교 | 도쿄 문화학원 |
직업 | |
직업 | 화가 |
가족 | |
배우자 | 이남덕(야마모토 마사코) |
자녀 | 장남(요절), 이태현, 이태성 |
부모 | 아버지 이희주(1886년~1920년), 어머니 안악 이씨(?~1950년) |
형제 | 2남 1녀 중 막내 |
친척 | 증조부 이동규(1826년~1898년), 조부 이창희(1856년~1898년) |
작품 활동 | |
분야 | 미술 |
사조 | 해당사항 없음 |
대표작 | 흰 소 황소 |
기타 정보 | |
관련 인물 | 김월용(오산고보 동창) |
2. 생애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태어나 평양에서 성장했다. 정주시 오산학교에서 임용련에게 서양화를 배웠다. 1936년 일본 제국미술학교(현 무사시노 미술대학)에 입학했지만, 이듬해 문화학원으로 전학하여 야마모토 마사코(한국명 이남덕)를 만났다. 당시 학교 내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 3명이라 "아고리(턱의 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13] 1941년 조선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고, 1943년 자유미술가협회 특별상 태양상을 수상했다.
1945년 원산에서 야마모토 마사코와 결혼했다. 한국 전쟁 발발 후 부산, 제주특별자치도서귀포시 등지로 피난을 갔고, 1952년 극심한 빈곤으로 처자를 일본으로 보냈다. 1953년 가족과 짧게 면회했으나, 이것이 마지막 만남이었다. 1955년 미도파백화점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지만, 큰 수익을 얻지 못하고 알코올 중독과 간염으로 1956년 적십자병원에서 행려사망인으로 사망했다.[13]
1978년 은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으며,[14][15] 한국 현대 미술에서 국민적 작가로 평가받는다. 그의 작품은 소, 닭, 아이와 가족 등을 소재로 향토적, 동화적인 요소를 담고 있으며, 《싸우는 소》, 《흰 소》, 《황소》 등이 대표적이다.[16] --
2. 1. 생애 초기
1916년 9월 16일 평안남도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가족과 함께 외가가 있던 평양으로 이주하여 성장하였다. 외조부는 평양에서 손꼽히는 부자로 사업이 번창하여, 유년 시절을 편안하게 보냈다.[1]평안북도 정주시의 오산학교에 입학하여 서양화가 임용련에게서 미술을 배우며 본격적으로 미술의 세계에 입문하였다. 임용련은 시카고 미술학교(1923-26)와 예일 미술학교(1926-29)에서 드로잉, 유화, 역사 벽화를 공부한 인물이었다.[1] 오산학교에서 민족 정기에 대한 교육을 받은 이중섭은 일본에서 개최되는 미술전에 황소를 소재로 한 작품을 출품하였다. 당시 황소는 일본인들 사이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여겨져, 일본은 의도적으로 소에 관련된 표현을 금지하는 분위기였다. 이중섭은 이러한 분위기에 저항하며 작품을 그렸다.
첫 작품이라 전시 때 비교적 그림 크기를 크게 그리는 경향을 알면서도 손바닥만한 작은 크기에 강렬한 눈빛을 가진 소를 그린 그림을 제출했다. 이 그림을 본 일본의 한 기자는 이중섭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감탄했다고 한다. 특히 소 그림의 낙관에 '중섭'이 아닌 '둥섭'이라고 씌어 있었는데, 이는 당시 친일파로 변절한 한 조선인 문학가가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게재한 〈머리를 중(승려)처럼 밀고 전쟁에 참가하는 아름다운 청년이 되자〉라는 논조의 사설에 분노하여 자신의 이름에 있는 '중'자도 부르기 싫어 낙관의 이름까지 바꿔 쓴 일화이다.
1936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제국미술학교(현 무사시노 미술대학)에 입학했지만, 이듬해 더 자유로운 학풍의 문화학원으로 전학하여, 야수파 경향과 강하고 자유로운 드로잉 스타일을 보였다. 이 시기에 이중섭은 한국 모더니즘을 추구하면서 소를 자신의 그림의 주요 주제로 삼아 소와 자신을 동일시했다. 문화학원에서 그는 훗날 그의 아내가 될 후배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일본어, 한국 이름 이남덕)를 만나 깊이 사랑에 빠졌다. 당시 학교 내에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 3명 있었기 때문에, 이중섭의 별명은 "아고리(턱의 이)"였고, 마사코는 가늘고 긴 다리 때문에 "아스파라거스"였다.[13]
2. 2. 일본 유학
1936년 일본 도쿄 데이코쿠 미술 학교(현재의 무사시노 미술대학)에 입학했지만, 1937년 자유롭고 혁신적인 분위기의 학풍을 중시하는 도쿄 분카 학원(문화학원)으로 옮겨 졸업하였다.[13] 1941년 이쾌대, 진환, 최재덕 등 일본 도쿄에서 유학 생활을 하던 조선인 화가들과 함께 조선신미술가협회(朝鮮新美術家協會)를 결성했고,[13] 1943년 자유미술가협회 특별상 태양상을 수상했다.[13]분카 학원에서 야마모토 마사코(한국명 이남덕)를 만났다. 당시 학교 내에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 3명 있었기 때문에 이중섭의 별명은 "아고리(턱의 이)"였고, 마사코는 가늘고 긴 다리 때문에 "아스파라거스"였다.[13]
2. 3. 귀국
1945년 고향인 평안남도 평원군으로 돌아왔다. 같은 해 5월 원산에서 일본인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 한국명: 이남덕(李南德), 1921년 ~ 2022년 8월 13일)와 결혼했다.[13] 이남덕은 이중섭이 문화학원 유학 시절에 만난 인물이다.1946년 원산사범학교 미술 교사로 근무했지만 1주일 만에 사직했다. 같은 해 친구인 구상 등이 펴낸 시집 《응향》(凝香)의 표지 제작을 맡았지만, 《응향》이 퇴폐적, 반인민적, 반동주의적인 작품으로 규정된 응향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2. 4. 한국 전쟁 이후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이중섭은 남쪽으로 내려와 부산, 통영, 제주도 등지를 떠돌며 피난 생활을 했다. 통영에서는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힘든 생활 중에서도 비교적 안정된 시기를 보냈다. 가족을 한국으로 데려올 수 있다는 희망도 품었다.[2]이중섭은 그림 재료를 살 돈이 없을 정도로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다. 담뱃갑 은박지에 그림을 그릴 정도였다.[16] 1952년 부인과 두 아들은 일본으로 건너갔다.[2] 1953년 이중섭은 부두 노동으로 번 돈으로 선원증을 구해 일본의 처갓집을 방문, 가족과 짧은 만남을 가졌지만, 선원증 때문에 오래 머물 수 없어 1주일 만에 대한민국으로 돌아와야 했다.[2] 이후 부산, 대구, 통영, 진주, 서울 등지를 떠돌며 가난 속에서도 그림에 몰두했다.
전쟁 말기부터 1954년 6월까지 이중섭은 통영에서 강사로 활동하며 비교적 안정적인 생활을 했다. 이 시기 동안 '소' 연작과 아름다운 통영 풍경을 그린 유화 연작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5]
가난에 지친 아내는 1952년 7월 아이들과 함께 일본으로 떠났다. 이중섭은 가족과 함께 비자를 받지 못해 우울증을 겪으며 가족을 그리워했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그림 편지와 엽서를 보내며 사랑과 그리움을 표현했다.[3]
이중섭의 절친한 친구인 시인 구상은 이중섭이 일본에 있는 가족과 재회하기 위해 작품을 팔려고 애썼지만, 희망을 잃고 고통스러워하다가 결국 정신 질환까지 앓게 되었다고 묘사했다.[5] 이중섭은 구상이 어린 아들에게 세발자전거를 선물하는 모습을 그린 ''구상 시인의 가족''(1955)을 통해 가족에 대한 갈망을 표현했다. 그러나 이중섭은 이주하고 재회할 충분한 돈을 모으지 못했고, 1953년 도쿄에서 5일 동안 짧게 만난 것을 제외하고는 다시는 가족을 만나지 못했다.[5]
2. 5. 전시회
1955년 이중섭은 친구들의 도움으로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인 개인전을 미도파백화점에서 열었다.[3] 서울 전시회에서 마흔 점이 넘는 작품을 전시하고 20점이나 판매하는 높은 성과를 거두었다.[3] 그러나 작품을 사기로 한 사람들이 전쟁 후 어려운 형편 때문에 작품값을 돈 대신 먹을 것으로 주거나, 차일피일 미루며 제대로 지급하지 않아, 결국 손에 쥔 돈은 얼마 안 되는 수고비 정도였다.[3]이중섭은 전시회를 도와준 동료와 선후배들에게 술이나 대접할 수 있는 정도의 수입만 얻게 되자, 가족을 책임지지 못하는 가장이라는 자괴감에 빠졌다.[3] 그로 인해 거식증과 조현병 증세를 보였으며, 1956년 간염으로 서울 서대문적십자병원에서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3]
같은 해 1월, 미도파 화랑에서 연 개인전은 성공했지만, 판매된 작품 20점에 대한 돈을 제대로 받지 못해 심각한 빚에 시달렸다.[5] 친구 구상은 4월 대구의 미국 정보 봉사관 화랑에서 또 다른 전시회를 열도록 도왔지만, 서울 전시보다 더 나쁜 결과를 낳았다.[5] 이중섭은 깊은 우울증에 빠져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지 못한 것뿐만 아니라 예술가로서의 실패에 대해 자책했다.[5]
2. 6. 사망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생활고에서 오는 스트레스로 조현병을 앓았다. 외로움 속에서 술에 의존하게 되었고, 심각한 거식증에 걸려 서울, 대구, 통영을 오가는 유랑 생활을 계속했다.[13] 마지막 해에는 여러 병원과 친구들의 집에서 보냈으며, '''River of No Return''' 연작을 포함하여 문학 잡지를 위한 삽화 작업을 하기도 했다.1956년 9월 6일, 간염으로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행려사망인으로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13] 그의 친구들은 시신을 화장하여 유해 일부를 일본에 있는 야마모토 호코(이남덕)에게 보냈고, 망우리 공원묘지에 그의 묘비를 세웠다.[13]
2. 7. 기념
1951년 이중섭 가족이 살던 집을 개조해 제주도 서귀포시에 이중섭 미술관을 운영하고 있으며, 그 주변으로 이중섭 거리가 조성되었다.[4] 매년 9월에는 이 거리에서 이중섭 예술제가 개최된다.1995년에는 서귀포시의 "이중섭 거리"(올레길 6코스 일부) 중심부에 이중섭 미술관이 건립되었다.[4] 미술관에는 이중섭의 원본 작품 11점, 복제품 한 층 전체, 그리고 그의 아내에게 보낸 많은 친필 편지가 소장되어 있다.
2016년 9월 1일에는 이중섭 탄생 100주년 기념 우표가 발행되었다. 2007년 3월 6일에는 이중섭을 추모하는 음반인 《그 사내 이중섭》이 발매되었다.
2. 8. 서훈
1978년 은관문화훈장(2등급)이 추서되었다.[14][15]3. 작품 세계
이중섭의 작품에는 유화 외에도 은박지에 그린 그림, 그림 편지 등이 있으며, 소, 닭, 어린이, 가족 등이 자주 등장하며 향토적, 동화적인 요소가 특징이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싸우는 소》, 《흰 소》, 《움직이는 흰 소》, 《소와 아이》, 《황소》, 《투계》, 《닭과 가족》, 《남자들과 아이들》, 《떠나는 가족》 등이 있다.[16]
이중섭은 한국의 대표적인 국민 화가로, 그의 작품은 높은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 그러나 2000년대 후반 한국 아트 버블 시기에는 대량의 위작이 유통되기도 했다. 조사 결과, 미술 시장에서 거래되는 이중섭 작품의 약 80%가 위작으로 판명되었다.[17][18][19]
3. 1. 주요 소재
이중섭의 작품에는 소, 닭, 어린이, 가족 등이 자주 등장한다.- 소: 이중섭에게 소는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한국인의 강인함과 민족정신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특히, 흰 소는 백의민족으로 불리는 한국인을 상징했다.[7] 일제강점기에는 소 그림을 통해 억압에 대한 저항 의지를 표현했다.[1] 오산학교 시절, 이중섭은 민족 정기를 교육받고 일본 미술전에 황소 그림을 출품했다. 당시 일본은 한국을 대표하는 동물로 황소를 인식하고 소와 관련된 표현을 금지하는 분위기였지만, 이중섭은 손바닥만 한 크기에 강렬한 눈빛을 가진 소 그림을 그려냈다.[7]
- 어린이: 어린이는 순수함과 희망의 상징이며, 이중섭 자신의 유년 시절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투영하는 대상이었다. 특히, 첫 아이를 잃은 슬픔을 겪은 후,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그림으로써 사후 세계에서라도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했다.[6]
- 가족: 이중섭에게 가족은 삶의 중심이자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었다. 전쟁과 가난으로 인해 가족과 떨어져 지내야 했던 이중섭은 그림을 통해 가족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표현했다.
이중섭은 가족과 헤어진 후, 일본에 있는 아내와 자녀들에게 정기적으로 편지를 보냈다. 초기 편지들은 애정과 기쁨으로 가득했으며, 곧 재회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넘쳐났다. 많은 편지에는 가족들을 위한 자유로운 필체와 즐거운 삽화들이 있었으며, 이는 가족에 대한 그의 깊은 사랑을 반영했다. 1955년 중반부터 이중섭은 절망에 빠져 거의 가족에게 편지를 쓰지 않게 되었고, 아내가 보낸 편지를 읽는 것조차 멈췄다고 한다.[3] 약 60통의 편지가 남아있으며, 그 분량은 약 150페이지에 달한다. 이러한 편지들, 예를 들어 《가족을 그리는 화가》(1953-54)는 중요한 기록적 가치를 지니며, 이중섭의 일상생활과 그의 예술 간의 관계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 자체로 독립적인 예술 작품으로서도 중요하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닭과 가족》(1954-55), 《쌍둥이》(1950), 《해와 아이들》(1950년대), 《복숭아밭에서 노는 아이들》(1954) 등이 있다.
3. 2. 표현 기법
이중섭은 오산학교에서 미술 수업을 시작했으며, 시카고 미술학교(1923-26)와 예일 미술학교(1926-29)에서 드로잉, 유화, 역사 벽화를 공부한 임용련 선생의 지도를 받았다.[1] 고구려 고분 벽화와 회화에 대한 애정을 물려받았으며, 이는 그의 활발한 선, 짙은 색감, 원형 구도, 동물 상징 모티프에서 드러났다. 서양화는 일본의 도쿄 미술학교에서 돌아온 화가들에 의해 평양에 적극적으로 소개되었다. 이때 이중섭은 수채화, 데생, 유화와 같은 현대 회화 기법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임용련 선생의 지도 아래 한글 사용에 대한 식민지 규제를 피하면서 한국어로 작품에 서명하는 법을 배웠다.[1]도쿄에서 이중섭의 스타일은 야수파와 표현주의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의 주제는 매우 독특하고 토착적이었다. 그의 작품은 한국의 일상생활을 자주 묘사했으며, 시골 풍경, 가족의 마을과 섬 생활, 한국 전통 의상 등이 포함되었다. 그는 한국에 서양 양식을 소개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의 영감의 원천에는 조르주 루오(1871-1958)와 파블로 피카소(1881-1973)가 있다.
이중섭은 일반적인 미술 재료를 구할 수 없었기에, 담배갑에서 얻은 얇은 석판 조각에 선을 그리는 혁신적인 기법을 창안했다. 그는 송곳을 사용하여 석판에 선을 새기고, 그 위에 물감을 칠한 다음 물감을 닦아내어 새겨진 선만 색이 입혀지도록 했다. 평면적인 이미지였지만, 깊이 새겨진 선들은 여러 겹의 층을 이루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석판의 반짝이는 금속 표면은 더욱 미적인 효과를 더했다. 이 특유의 기법은 고려청자나 은으로 상감된 금속 공예의 전통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이중섭이 한국 전통에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중섭은 약 300점의 석판화를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그림들은 가난과 사회적 역경의 장면에서부터 서귀포에서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의 장면까지 다양하며, 일반적으로 그가 간절히 그리워했던 가족이 게, 물고기, 꽃과 함께 행복하게 노는 모습을 묘사했다. 석판화는 그가 꿈꾸었던 대형 벽화를 위한 대략적인 스케치로 사용될 의도였다. 이는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유형이며, 이 작품들 중 3점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고, 다른 3점은 서귀포 이중섭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의 석판화에는 《쌍둥이》(1950)와 《복숭아밭 아이들》(1954) 등이 있다.
3. 3. 예술적 의의
이중섭은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예술가이다. 그는 서양화 기법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도, 한국적인 정체성을 뚜렷하게 드러낸 작품을 통해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했다. 특히 일제강점기와 한국 전쟁이라는 시대적 아픔과 가난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예술혼을 불태웠으며, 그의 작품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있다.[16]이중섭은 평안남도 평원군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평양에서 성장했다. 정주시 오산학교에서 미술 교사 임용련에게 서양화를 배우며 예술가의 꿈을 키웠다. 임용련은 시카고 미술학교와 예일 미술학교에서 공부한 선구적인 미술 교육자로, 이중섭에게 서양화 기법뿐만 아니라 고구려 고분 벽화와 같은 한국 전통 미술에 대한 애정을 심어주었다.[1]
1936년 일본으로 건너간 이중섭은 제국미술학교(현 무사시노 미술대학)에서 서양 미술을 공부했지만, 이듬해 더 자유로운 학풍의 문화학원으로 옮겨 야수파와 표현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작품 주제는 한국의 일상생활, 시골 풍경, 가족, 전통 의상 등 매우 독특하고 토착적인 것이었다.[16] 그는 조르주 루오와 파블로 피카소에게서 영감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이중섭은 1941년 조선 출신 화가들과 함께 조선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고, 1943년 자유미술가협회 특별상인 태양상을 수상하며 주목받는 신진 작가로 떠올랐다.[13] 1945년 원산에서 문화학원에서 만난 야마모토 마사코(한국명 이남덕)와 결혼했다. 한국 전쟁 이후 월남하여 부산광역시와 제주특별자치도서귀포시 등지에서 피난 생활을 하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13]
1952년 극심한 가난으로 인해 아내와 두 아들은 일본으로 떠나고, 이중섭은 홀로 남아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생활고 속에서 조현병을 앓기도 했다. 1955년 미도파백화점에서 열린 개인전은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은 계속되었다. 결국 1956년 간염으로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40세의 젊은 나이로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13]
이중섭은 소, 닭, 아이와 가족 등을 소재로 한 작품을 많이 남겼는데, 이는 향토적이면서도 동화적인 요소가 강하게 드러나는 것이 특징이다. 대표작으로는 《싸우는 소》, 《흰 소》, 《움직이는 흰 소》, 《소와 아이》, 《황소》, 《투계》, 《닭과 가족》, 《남자들과 아이들》, 《떠나는 가족》 등이 있다.[16] 특히, 은박지에 그린 그림들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예술혼을 놓지 않았던 그의 열정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중섭은 한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국민 화가 중 한 명으로, 그의 작품은 높은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 1978년에는 은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으며, 뉴욕 현대 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된 최초의 한국 작가가 되었다.[13] 2012년에는 구글에서 그의 탄생 96주년을 기념하여 대표작 중 하나인 "황소" 그림을 구글 두들로 선보이기도 했다.[8]
하지만 2000년대 후반 한국 미술 시장의 과열 속에서 이중섭 작품의 위작이 대량으로 유통되기도 했다. 조사 결과, 미술 시장에서 거래되는 이중섭 작품의 약 80%가 위작으로 판명되어 충격을 주기도 했다.[17][18][19]
4. 위작 논란
2005년 이중섭의 둘째 아들 이태성(야마모토 야스나리)이 공개한 그림이 위작으로 판명되면서, 대한민국 미술계에 큰 파장이 일었다. 이 사건은 미술 시장의 신뢰도에 큰 영향을 미쳤다.[1]
4. 1. 위작 사건 개요
2005년 3월 16일 이중섭의 둘째 아들 이태성(야마모토 야스나리)이 처음 공개하여 경매에 내놓은 그림 8점이 2005년 10월에 위작으로 밝혀졌다.[1] 이 사건으로 인해 한국 미술 시장이 냉각되기도 했다.[1]4. 2. 위작 유통 문제
2005년 3월 16일 이중섭의 둘째 아들 이태성(야마모토 야스나리)이 처음 공개하여 경매에 내놓은 그림 8점이 2005년 10월에 가짜로 밝혀지면서 대한민국 미술 시장이 냉각되기도 했다.[1]5. 가족 관계
6. 이중섭과 관련된 문화 콘텐츠
1951년 이중섭 가족이 살던 집은 제주도 서귀포시에서 이중섭 미술관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그 주변으로 이중섭 거리가 조성되었다. 매년 9월에는 이 거리에서 이중섭 예술제가 개최된다.
2016년 9월 1일에는 이중섭 탄생 100주년 기념 우표가 발행되었다. 2007년 3월 6일에는 이중섭을 추모하는 음반인 《그 사내 이중섭》이 발매되었다.[20]
6. 1. 연극
김의경(1936년 - 2016년)이 쓴 희곡 "떠나는 가족"(번역 이혜정)은 서울시립극단이 공연했으며, 2001년 제8회 BeSeTo 연극제에서 신리가산방에서 상연되었다.[20][21] 신주쿠 료잔바쿠의 김수진이 극단 문화좌에서 각색·연출을 맡아 2014년에 초연되었다. 전국에서 상연을 거듭하여 총 100회 이상 공연되었다. 초연부터 출연한 사사키 아이는 각색을 담당했다.[22]6. 2. 기타
2007년 3월 6일에는 이중섭을 추모하는 음반인 《그 사내 이중섭》이 발매되었다.참조
[1]
논문
Excavating the Mural of Paradise by Lee Jung-Seob
2020
[2]
웹사이트
A Story of an Artist
https://www.lewrockw[...]
2023-12-09
[3]
간행물
Lee Jung Seob Brochure in English
https://www.mmca.go.[...]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MMCA), Deoksugung
2016
[4]
뉴스
Story of well-loved artist is bittersweet - JEJU WEEKLY
https://www.jejuweek[...]
JEJU WEEKLY
2023-12-09
[5]
웹사이트
Book review: Community, collaboration between poets, artists forged during dark colonial times
https://www.koreatim[...]
2023-12-09
[6]
뉴스
Naive Lee Jung-Seob
Dong-A ilbo
1976-10-06
[7]
웹사이트
Lee Jung Seob 이중섭 : Bull - GALLERY HYUNDAI
https://www.galleryh[...]
2023-12-09
[8]
뉴스
10 April: Remembering Lee Jung-seob on Birthday
Observer Voice
2023-04-09
[9]
웹사이트
Lee Jung-seop, Artistic Genius of Korean Modern Art
http://rki.kbs.co.kr[...]
2020-08-22
[10]
웹사이트
이중섭 부부
https://www.mmca.go.[...]
국립현대미술관
[11]
뉴스
이중섭 탄생 100년...일본인 아내 이 이남덕 여사 인터뷰 남편의 편지 한 장 내 손에 없어…
http://pub.chosun.co[...]
조선일보
[12]
간행물
위작과 졸작 사이-이중섭작 <부부>
http://www.imagian.n[...]
아트인컬쳐11월호
2008-02-21
[13]
뉴스
国交なく生き別れた韓国「国民的画家」と日本人妻 手紙に紡いだ家族への愛惜
https://www.sankei.c[...]
産経新聞
2015-06-07
[14]
뉴스
享年101歳、山本方子(李南徳)さんが韓国に伝えた言葉
https://www.chosunon[...]
朝鮮日報
2022-08-31
[15]
뉴스
【萬物相】イ・ジュンソプの妻・山本方子(李南徳)さん
https://www.chosunon[...]
朝鮮日報
2022-09-04
[16]
뉴스
'[이철환의 예술가 이야기] 가족과 소를 사랑한 화가,이중섭'
뉴스핌
2017-12-21
[17]
뉴스
【噴水台】 ニセ美術館
https://s.japanese.j[...]
中央日報
2005-10-09
[18]
뉴스
偽作騒ぎの李仲燮—朴壽根の58点、偽物判定
https://www.donga.co[...]
東亜日報
2005-10-08
[19]
뉴스
ニセモノを競売へ・・・李仲燮画伯次男に4億賠償請求
https://s.japanese.j[...]
中央日報
2008-01-18
[20]
웹사이트
日韓交流センター(韓国演劇交流センター・韓国現代戯曲集Vol.4)
https://tckj.org/cat[...]
[21]
웹사이트
のんちゃんのつれづれ(2019年8月23日)
http://naginon.seesa[...]
2019-08-23
[22]
웹사이트
劇団文化座ホームページ
http://www.bunkaza.c[...]
[23]
웹사이트
이중섭 부부
https://www.mmca.go.[...]
국립현대미술관
[24]
뉴스
이중섭 탄생 100년...일본인 아내 이 이남덕 여사 인터뷰 남편의 편지 한 장 내 손에 없어…
http://pub.chosun.co[...]
조선일보
[25]
간행물
위작과 졸작 사이-이중섭작 <부부>
http://www.imagian.n[...]
아트인컬쳐11월호
2008-02-21
[26]
뉴스
'[이철환의 예술가 이야기] 가족과 소를 사랑한 화가,이중섭'
뉴스핌
2017-12-21
[27]
보고서
서울 종로 통의동 20-5번지 근린생활시설부지 내 문화재 시굴조사 약보고서
http://gyeore.or.kr/[...]
2013-09-00
[28]
문서
2022년 8월 30일 미술계에 밝혔다.
관련 사건 타임라인
( 최근 20개의 뉴스만 표기 됩니다. )
박수근·이중섭·천경자 등 한국 근현대 걸작 한번에 만난다[서울25]
업비트 NFT, 미술작품 실물 연계 경매 진행
“세필 끝으로 끝없이 점을 찍으면, 부처가 웃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조망하는 한국 근·현대미술
한국 근현대미술 100년 담은 명작 잔치 풍성
4월 18일 문학 새 책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