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이호성 (1967년)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이호성(1967년)은 전 야구 선수로, 해태 타이거즈와 KIA 타이거즈에서 1990년부터 2002년까지 프로 선수로 활동했다. 1991년 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을 수상하고 20-20 클럽에 가입하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쳤으며, 선수협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은퇴 후 사업 실패와 잇따른 사기 혐의로 어려움을 겪었고, 2008년 내연녀와 그의 세 딸을 살해한 혐의로 지명 수배된 후 한강에서 익사한 채 발견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대한민국의 살해 후 자살 사건 - 이기붕
    이기붕은 이승만 정권에서 요직을 두루 거치며 권력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으나,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으로 몰락하여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 대한민국의 살해 후 자살 사건 - 우범곤
    1982년 경상남도 의령군에서 동거녀와의 다툼 후 격분한 경찰관 우범곤이 총기를 탈취하여 62명을 살해하고 33명에게 중경상을 입힌 사건으로, 경찰의 초동 대처 미흡과 경찰관의 범행이라는 점에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어 내무부 장관 사임과 경찰 관련 규정 강화의 계기가 되었다.
  • 자살한 야구 선수 - 조성민 (야구인)
    조성민은 일본 프로 야구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투수로 활동했으나 부상 후 한국 프로 야구 한화 이글스에서 선수 생활을 했고, 은퇴 후 야구 해설가와 코치로 활동했으며, 배우 최진실과의 결혼과 이혼, 사망 후 사회적 논란을 겪다 사망했다.
  • 자살한 야구 선수 - 마이크 플래너건 (야구인)
    마이크 플래너건은 197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MLB에서 투수로 활동하며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토론토 블루제이스에서 뛰었고, 1979년 아메리칸 리그 사이 영 상을 수상했으나 은퇴 후 우울증과 재정적 어려움으로 2011년 자살로 생을 마감한 미국의 프로 야구 선수이다.
  • 자살한 살인자 - 크리스 벤와
    크리스 벤와는 캐나다 출신의 프로레슬러로, 다양한 단체에서 활동하며 월드 챔피언십을 2회,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챔피언십을 5회 획득하는 등 여러 타이틀을 차지했으나, 2007년 아내와 아들을 살해하고 자살한 사건 이후 WWE에서 그의 업적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 자살한 살인자 - 조승희
    조승희는 한국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민 간 버지니아 공대 학생으로, 2007년 버지니아 공대 총기 난사 사건을 일으켜 32명을 살해하고 자살했으며, 어릴 적 선택적 함묵증 진단을 받았고 정신 건강 문제와 불안정한 행동으로 우려를 샀으며, 사건 전 NBC 뉴스에 자신의 동기와 심경을 담은 소포를 보냈다.
이호성 (1967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호성 선수 사진
한글 이름이호성
한자 이름李昊星
로마자 표기I Hoseong
한국어 로마자 표기I Ho-seong
출생일1967년 7월 17일
사망일2008년 3월 10일
출생지전라남도 순천시
사망지서울특별시
국적대한민국
신장180 cm
체중80 kg
혈액형A형
포지션외야수
투구
타석
선수 경력
고등학교광주제일고등학교
대학교연세대학교
프로 입단1990년
드래프트 순위1990년 1차 2순위
소속 구단해태 타이거즈 (1990년 ~ 2001년)
첫 출장KBO / 1990년
마지막 경기KBO / 2001년 4월 15일 청주 대 한화전
주요 수상1990년 골든글러브
1991년 골든글러브

2. 선수 경력

해태 타이거즈(현 KIA 타이거즈)에서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하여 1990년부터 2001년까지 활동했다. KBO 리그 통산 타율 0.272, 홈런 102개를 기록하며 팀의 주축 선수로 활약했다. 1999년2000년에는 팀 주장을 맡았고, 2001년에는 프로야구선수협의회 회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했다.[1][2][3][4][5][6]

2. 1. 유년 시절 및 아마추어 야구

전라남도 순천시 출신으로, 어린 시절 광주광역시로 이주하여 성장했다. 광주서석초등학교, 광주충장중학교, 광주제일고등학교를 거쳐 연세대학교 신학과(86학번)를 졸업했다.

광주서석초등학교 4학년 때, 그의 체력을 눈여겨본 체육 교사의 권유로 야구를 시작했다.[19] 광주제일고등학교 재학 시절부터 타격과 주루 능력을 겸비한 '호타준족'의 강타자로 명성을 얻었다.[18] 1983년에는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 봉황대기 전국고등학교 야구대회에 출전하여 팀의 우승을 이끌었다.

연세대학교에서는 야구부 주전 선수로 활약하며 대학 야구 타격상을 두 번 수상했다. 또한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으로 선발되어 여러 국제 대회에서 활동했다.[20] 특히 1989년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는 대한민국의 우승에 기여했으며, 이 공로로 체육훈장 팔봉장을 받았다.[12]

연세대학교 졸업을 앞둔 1990년 1월 19일, 해태 타이거즈(현 KIA 타이거즈)에 입단하며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2. 2. 프로 야구 선수 시절 (해태/KIA 타이거즈)

1990년 광주서석초등학교, 광주충장중학교, 광주제일고등학교,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하여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계약 조건은 계약금 2700만, 연봉 1200만였으며, 등번호는 27번을 사용했다.[20] 데뷔 첫 해부터 주전 자리를 차지했으며, 1991년에는 21개의 홈런과 25개의 도루를 기록하며 20-20 클럽에 가입하는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12] 이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1990년1991년 2년 연속 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을 수상했다.[18][20]

대학 시절인 1989년 제15회 아시아선수권대회 참가를 시작으로, 프로 입단 후에는 1991년 제1회 한일 슈퍼게임, 1993년 한일 프로친선대회, 1997년 한일 프로골든시리즈 등 다수의 국제 대회에 국가대표 선수로 출전했다.[18] 1991년에는 한일 친선 야구 대표로 일본을 방문하기도 했다.[13]

소속팀 해태 타이거즈가 한국시리즈에서 네 차례 우승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특히 1993년 한국시리즈에서는 삼성 라이온즈를 상대로 팀의 우승을 이끄는 결정적인 활약을 펼쳤다.[20] 1990년대 후반에는 팀의 4번 타자를 맡아 중심 타선을 이끌었다.[20] 팬들 사이에서는 그가 더그아웃에서 손으로 못을 박았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 엄청난 힘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었다.[20][12]

1999년2000년에는 팀의 주장을 역임했으며,[1][2][3][4][5][6] 2001년에는 제2대 프로야구선수협의회 회장으로 선출되어 선수들의 권익 보호에 앞장섰다.[1][2][3][4][5][6][12] 같은 해 시즌 종료 후 구단으로부터 방출 통보를 받고 현역에서 은퇴했다.[12] 팀이 기아에 인수되어 KIA 타이거즈로 변경된 이후에도 2002년까지 팀에 남아 활동했으며,[18] 은퇴식은 2002년에 치러졌다.

KBO 리그 통산 12시즌 동안 타율 0.272, 102개의 홈런을 기록했다.[1][2][3][4][5][6]

2. 3. 선수협 회장 활동

프로야구선수협의회의 주력 선수들이 퇴출당하는 어려움 속에서, 이호성은 협의회 재건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 결과 2001년 1월, 송진우의 뒤를 이어 제3기 선수협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21][1][2][3][4][5][6]

3. 은퇴 이후

2001년 1월, 송진우의 뒤를 이어 제3기 프로야구선수협의회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21] 같은 해 4월 20일부터 2002년까지는 KIA 타이거즈의 플레잉 코치로 활동했다.

2002년 현역에서 은퇴한 후, 프로야구 코치 제의를 거절하고 사업가로 전향했다.[18] 광주광역시에서 예식장 사업을 시작으로 스크린 경마장 사업 등을 시도했으나, 경영난과 사기 피해, 법적 문제 등이 겹치며 연이어 실패를 겪었다.[18][21] 특히 2003년에는 부동산 투자 사기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기도 했다.[21]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야구계 선후배들과도 대부분 연락을 끊고 지냈다.[21]

3. 1. 사업 실패와 몰락

2002년 현역에서 은퇴한 후, 프로야구 코치 제의를 거절하고 사업가로 전향했다.[18] 광주광역시에서 ‘호성 웨딩플라자’라는 예식장을 개업하여 운영했으나, 한때 사업을 크게 확장했음에도 사기를 당해 막대한 빚에 시달렸고[18], 결국 경영난으로 2003년에 폐업했다.[21]

예식장 사업 실패 후, 2003년 투자자를 모아 40억을 마련하고[21] 가족을 보증인으로 10억의 대출을 받아 전라남도 순천시 덕암동에 오피스텔을 짓고 스크린 경마장 사업을 시작했다.[21] 그해 10월 한국마사회로부터 경마장 허가를 받았지만, 시민단체의 반발로 인해 농림부의 최종 허가가 늦어졌다.[21] 결국 사업은 지연되었고, 이듬해인 2004년 7월 100억대의 부도를 맞으며 도산했다.[21]

같은 해 2003년 12월에는 부동산 투자 사기 사건에 연루되어 2개월 동안 구속되기도 했다.[21] 공인중개사 박모 씨 등이 신행정수도 건설 지역 투자를 미끼로 투자자들에게서 37억을 받아 챙긴 사건에 그가 연루된 것이었다.[21] 당시 이호성은 경찰 조사에서 기자들과 만나 "운동선수만 하다 사회 물정을 너무 몰라 벌어진 일이다. 사회 경험이 없어 아무나 쉽게 믿었던 것이 큰 화근이었다."고 해명하며 고개를 숙였다.[21]

그를 오랫동안 지켜본 지인은 "너무 성급하게 욕심을 부린 것이 탈이었다. 나중에는 투자를 받으려고 조직폭력배와도 관계를 맺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21] 구속에서 풀려난 뒤 그는 광주를 떠나 주로 서울에 머물렀으며, 야구계 선후배들과도 대부분 연락을 끊었다.[21]

3. 2. 몰락 과정

2001년 1월, 송진우의 뒤를 이어 제3기 프로야구선수협의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21] 같은 해 4월 20일부터 2002년까지는 KIA의 플레잉 코치로 활동했다.

2002년 현역에서 은퇴한 후 사업가로 변신했다. 광주광역시에서 '호성 웨딩플라자'라는 예식장을 개업하여 한때 문전성시를 이루기도 했으나, 경영난을 겪으며 2003년 폐업했다.[18][21] 이후 가족을 보증인으로 세워 10억의 대출을 받아 전라남도 순천시에서 스크린 경마장 사업을 새로 시작했다. 2003년 투자자들을 모아 40억을 마련하고 순천시 덕암동에 오피스텔을 지었으며, 같은 해 10월 한국마사회로부터 경마장 허가를 받았으나 시민단체의 반발로 농림부의 최종 허가가 늦어졌다.[21] 결국 이듬해인 2004년 7월, 100억대의 부도를 맞으며 사업은 실패로 돌아갔다.[21]

사업 실패 과정에서 법적인 문제에도 휘말렸다. 2003년 12월, 부동산 투자 사기 사건에 연루되어 2개월간 구속되기도 했다. 공인중개사 등이 신행정수도 건설 지역 투자 명목으로 투자자들에게서 37억을 받아 가로챈 사건에 그가 연루된 것이었다.[21] 당시 그는 경찰 조사 중 기자들에게 "운동선수만 하다 사회 물정을 너무 몰라 벌어진 일이다. 사회 경험이 없어 아무나 쉽게 믿었던 것이 큰 화근이었다."고 말하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21]

한 지인은 그의 실패 원인에 대해 "너무 성급하게 욕심을 부린 것이 탈이었다. 나중에는 투자를 받으려고 조직폭력배와도 관계를 맺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21] 구속에서 풀려난 뒤 그는 광주를 떠나 주로 서울에 머물렀으며, 야구계 선후배들과도 대부분 연락을 끊었다.[21]

4. 마포 일가족 살인 사건

2003년 웨딩 사업 실패 후 스크린 경마 사업에 뛰어들었으나 35억의 은행 담보와 부족한 자본금, 시민단체의 반대 등으로 인해 10억의 빚 독촉에 시달렸다.[22] 2005년에는 사기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보석으로 풀려났지만, 이후에도 빚 문제와 여러 기소 중지 건으로 인해 부인과 별거하며 도피 생활을 이어갔다.[22][12] 이 시기 이혼 후 만난 4살 연상의 식당 운영자 김연숙 씨(당시 46세)와 내연 관계를 맺었다.

2008년 2월 18일, 이호성은 내연녀 김씨와 그녀의 세 딸을 살해하고, 시신을 전라남도 화순군에 위치한 자신의 아버지가 묻힌 공동묘지에 암매장한 혐의를 받았다.[23] 김씨 가족의 실종 신고 이후 경찰 수사가 진행되었고, 이호성이 유력한 용의자로 특정되어 3월 10일 지명수배되었다.[14]

그러나 지명수배 당일, 이호성은 서울 한강에서 익사한 시신으로 발견되었고,[14] 경찰은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추정했다.[15][16] 같은 날 밤, 화순군 공동묘지에서 실종되었던 김씨와 세 딸의 시신이 암매장된 상태로 발견되었다.[15] 경찰은 이호성이 김씨에게 빌린 돈(약 25만달러 추정[7]) 문제 등 금전적 갈등[7][8][9][10][11]으로 인해 네 모녀를 살해한 뒤 자살한 것으로 잠정 결론 내렸다.[15][16] 이호성의 사망으로 사건은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되었다.

4. 1. 사건 개요

2003년 웨딩 사업을 그만둔 뒤, 가족들을 보증인으로 세워 10억을 빌려 순천에서 스크린 경마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부지 건물에 설정된 은행 담보 35억을 떠안고 시작했으나, 자본금이 부족했고 시민단체의 반대로 건축이 계속 지연되면서 빚 독촉에 시달렸다. 이후 다른 사람 명의의 상가에서 건물주 행세를 하며 투자금을 모으려다 2005년 사기 혐의로 구속되었고, 두 달 뒤 보석으로 풀려났다.[12] 그는 사기 등 총 7건의 혐의로 기소 중지 상태였으며, 이 문제 등으로 부인과도 별거 중이었다.[22] 이혼 후에는 우연히 만난 4살 연상의 식당 운영자 김 씨(당시 45세)와 내연 관계를 맺었다.

2008년 2월 18일, 이호성은 내연녀 김 씨와 그녀의 두 딸을 목 졸라 살해하고, 같은 날 밤 김 씨의 휴대전화로 큰딸을 유인해 둔기로 살해했다. 그는 네 모녀의 시신을 자신의 아버지가 묻힌 전라남도 화순군 동면 청궁리의 한 교회 공동묘지 입구 왼쪽에 암매장했다.[23] 암매장 사실은 성묘객의 제보 등으로 밝혀졌다.

같은 해 2월 하순, 김 씨와 세 딸, 총 네 명의 일가족이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3월 10일, 경찰은 이호성을 일가족 실종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지명수배했다. 그러나 이호성은 같은 날 서울 한강에서 익사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14] 같은 날 밤, 화순군 공동묘지에서 실종되었던 네 모녀의 시신이 암매장된 상태로 발견되었다.

경찰은 이호성이 김 씨에게 빌린 돈(약 25만달러 추정[7]) 문제 등 금전적 갈등으로[7][8][9][10][11] 2월 18일 네 모녀를 단독으로 살해하고, 3월 10일 새벽 한강에 투신하여 자살한 것으로 추정했다.[15][16] 이호성의 유서가 발견되지 않아 정확한 범행 동기나 경위는 불분명하다고 밝혔으나, 사건 당일 밤 이호성이 김 씨의 아파트에서 큰 가방 4개를 옮기는 모습이 CCTV에 포착되었고,[7][8][9][10][11] 김 씨 모녀가 실종된 시각에 이호성이 현장 근처에 있었다는 목격자 증언도 확보되었다.[7][8][9][10][11]

4. 2. 범행 과정

2003년 웨딩 사업을 접은 이호성은 가족들을 보증인으로 세워 10억을 빌려 순천에서 스크린 경마 사업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부지 건물에 설정된 은행 담보 35억를 안고 시작했으며, 부족한 자본금과 시민단체의 반발로 인한 건축 지연으로 결국 빚 독촉에 시달리게 되었다.[22] 이후 다른 사람 명의의 상가에서 건물주 행세를 하며 투자금을 모으려다 2005년 사기 혐의로 구속되었고, 두 달 뒤 보석으로 풀려났다. 그는 사기 혐의 등으로 총 7건이 기소 중지된 상태였으며, 부인과도 별거 중이었다.[22][12] 이혼 후 이 시기에 우연히 만난 4년 연상의 김연숙(당시 46세)과 내연 관계를 맺게 되었다.

2008년 2월 18일, 이호성은 내연녀 김씨와 그녀의 두 딸을 목 졸라 살해했다. 같은 날 밤, 김씨의 휴대전화를 이용해 큰딸을 유인한 뒤 둔기로 살해했다. 이후 네 명의 시신을 전라남도 화순군 동면 청궁리에 있는 자신의 아버지가 묻힌 모 교회 공동묘지 입구 좌측에 암매장했다.[23] 이 사실은 성묘객들의 제보로 밝혀졌다.

2008년 2월 하순, 김씨와 세 딸, 일가족 4명이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은 3월 10일 이호성을 유력한 용의자로 지명수배했다. 같은 날, 이호성은 서울 한강에서 익사한 채 시신으로 발견되었다.[14] 경찰은 이호성이 김씨에게 빌린 25만달러 상당의 돈을 갚지 못해 범행을 저질렀을 것으로 추정했다.[7][8][9][10][11] 김씨의 아파트 보안 영상에는 이호성이 사건 당일 밤 큰 검은색 더플백 네 개를 옮기는 모습이 찍혔고, 김씨 가족 실종 시각에 경찰 주차장에서 이호성을 봤다는 목격자도 있었다.[7][8][9][10][11] 같은 날 밤, 화순군 공동묘지에서 실종된 김씨와 세 딸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경찰은 이호성이 2월 18일 네 모녀를 살해하고 3월 10일 새벽 한강에 투신 자살한 것으로 결론 내렸다.[15][16]

4. 3. 수사 및 이호성의 죽음

2008년 2월 18일, 이호성은 서울특별시 마포구 창전동의 한 아파트에서 내연 관계[22]였던 김씨(당시 46세)와 그녀의 세 딸을 살해했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이호성은 먼저 김씨와 두 딸을 목 졸라 살해한 뒤, 김씨 휴대전화로 큰딸을 유인해 둔기로 살해하였다.[23] 이후 이호성은 시신들을 자신의 차량 트렁크에 싣고 전라남도 화순군 동면 청궁리에 위치한 아버지 묘소가 있는 교회 공동묘지로 운반하여 공동묘지 입구 좌측에 암매장했다.[23] 암매장 장소는 길 옆의 이상한 점을 수상히 여긴 성묘객 등의 신고와 제보로 밝혀졌다.[23]

김씨 가족이 실종되자 경찰은 수사에 착수했고, 이호성의 또 다른 내연녀였던 차모 씨의 증언[24], 이호성이 사건 당일 밤 큰 가방 4개를 옮기는 모습이 찍힌 아파트 보안 영상, 김씨 가족 실종 시각에 경찰 주차장에서 이호성을 목격했다는 증언[7][8][9][10][11] 등을 토대로 이호성을 유력한 용의자로 특정했다. 당시 이호성은 2005년 부동산 투자 관련 사기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보석으로 풀려난 상태였으며, 사기 혐의 등으로 총 7건이 기소 중지된 상태로 도피 중이었다.[22][12]

2008년 3월 10일, 경찰은 마포 일가족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이호성을 지명수배했다.[14] 같은 날 오후 3시경, 서울 한강한남대교반포대교 사이에서 남성 익사체가 발견되었고, 지문 감식 결과 이호성으로 신원이 확인되었다.[14]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부검을 통해 이호성의 사인이 익사라고 발표했으며, 경찰은 그가 자살한 것으로 추정했다.[15][16] 이호성의 시신이 발견된 날 밤, 화순군 공동묘지에서 실종되었던 김씨와 세 딸의 시신이 암매장된 상태로 발견되었다.[15]

경찰은 이호성이 김씨에게 빌린 약 25만달러 상당의 빚[7]을 갚지 못하게 되자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추정했다.[7][15] 이호성이 사망함에 따라 사건은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되었다.

4. 4. 사건의 종결

2008년 2월 하순, 이호성과 사실혼 관계로 알려진 45세 여성 및 그의 세 딸, 일가족 4명이 실종되었다. 경찰은 수사를 진행하던 중 3월 10일 이호성을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지명수배했다. 그러나 같은 날 이호성은 서울 한강에서 익사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14] 경찰은 이호성이 이날 새벽 3시경 스스로 한강에 투신하여 자살한 것으로 추정했다.[15][16]

같은 날 밤, 실종되었던 일가족 4명의 시신이 화순군의 한 공동묘지에서 암매장된 상태로 발견되었다. 경찰은 이호성이 금전적인 문제로 인해 2월 18일경 이들 4명을 단독으로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한 것으로 결론 내렸다.[15][16] 이호성은 피해 여성에게 25만달러 상당의 빚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었으며, 경찰은 이를 범행의 주요 동기로 추정했다.[7][8][9][10][11] 앞서 이호성은 2005년 부동산 투자 관련 사기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보석으로 풀려난 뒤 빚 독촉에 시달려온 정황도 있었다.[12]

경찰은 이호성이 늦은 밤 피해 여성의 아파트에서 큰 검은색 가방 4개를 옮기는 모습이 담긴 CCTV 영상과, 일가족 실종 시점 현장 인근에서 이호성을 목격했다는 증언 등을 확보했다.[7][8][9][10][11] 하지만 이호성이 유서를 남기지 않고 사망함에 따라 사건의 정확한 동기나 구체적인 범행 과정 등 세부적인 내용은 여전히 불명확한 부분으로 남게 되었다.[7][8][9][10][11]

5. 사후

이호성이 사망한 이후, 그의 살인 행각으로 인해 디시인사이드 등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이호성을 이용한 드립이 유행했다. 주로 '나랑께 빨리 문 좀 열어보랑께'[25], 한자 죽을 사(死)를 이용한 드립, 야구 방망이를 뜻하는 속어인 '빠따' 드립 등이 퍼졌다. 이 때문에 이호성과 관련된 내용을 작성할 때 숫자 4를 일부러 한자 死로 바꾸어 쓰는 경우도 있었다.

6. 통산 기록

wikitext

연도구단경기타수득점안타2루타3루타홈런타점도루희생타4구사구삼진병살타실책타율출루율장타율OPS
1990해태99313579516674816104184945.304.396.460.856
199112143498125127218425767126563.288.394.493.887
199211037478104163145225470375132.278.392.449.841
19937521035651413221024222781.310.427.429.856
199410537463991029492195256365.265.358.374.732
199555185244692522641242861.249.307.400.707
1996105357389290963161328166115.258.310.359.669
199711038051105130156320554474101.276.370.429.799
19988325028691614305827145106.276.348.396.744
199910127343681706351043906260.249.342.377.719
2000117397529625085713265410283.242.353.365.718
20019162420110010310.250.294.563.857
통산: 12년109035635699681592210252616768498446598932.272.368.415.783

참조

[1] 뉴스 Ex-baseball star named a suspect, then found dead https://koreajoongan[...] 2024-09-16
[2] 뉴스 Murder suspect won 4 baseball titles https://koreajoongan[...] 2024-09-16
[3] 뉴스 '실종 네 모녀' 숨진 채 발견… 수배자 前프로야구 선수 이호성 자살 https://www.donga.co[...] 2024-09-16
[4] 뉴스 '천하무적' 해태타이거즈 '올드보이'들의 현주소|신동아 https://shindonga.do[...] 2024-09-16
[5] 뉴스 ::::::데일리뉴스::::: http://www.idailynew[...] 2024-09-16
[6] 뉴스 막가파식 인생 이호성 네 모녀 살해사건 풀스토리재구성 - 라이프 - 스포츠서울닷컴 http://news.sportsse[...] 2024-09-16
[7] 뉴스 'Debt Drove Murder of Family https://www.koreatim[...] 2024-09-16
[8] 뉴스 야구선수 이호성 '네 모녀 살인 사건'…투신이 남긴 의문들[그해 오늘] https://m.edaily.co.[...] 2024-09-16
[9] 뉴스 Ex-Baseball Star Murder Mystery Baffles Nation http://english.chosu[...] 2024-09-16
[10] 뉴스 이호성 사망 전 벌어진 일... SBS가 말하지 않은 사실 https://star.ohmynew[...] 2024-09-16
[11] 뉴스 前 야구선수 이호성, 내연녀와 세 딸 살해이유...참담한 결말 https://www.gukjenew[...] 2024-09-16
[12] 뉴스 <母娘失踪事件>李昊星元選手とは?…90年代‘怪力の4番打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