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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동사령부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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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극동사령부는 1947년 1월 1일, 연합군 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를 초대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일본 도쿄에 설치되었다. 극동 육군, 제8군, 마리아나-보닌 사령부, 필리핀-류큐 사령부 등을 예하에 두었으며, 초기에는 일본 주둔 미군 및 한반도 군정 임무를 수행했다. 한국 전쟁 발발 후 유엔군 사령부 역할을 겸임하며, 인천 상륙 작전을 지휘했다. 1950년대 냉전 시기 동안 일본, 한국 등 극동 지역의 미군을 통제하다가, 1957년 태평양 사령부에 통합되어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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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동사령부 (미국)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GHQ 빌딩 1950년경
다이이치 빌딩
명칭 (영어)Far East Command (FECOM)
명칭 (한국어)극동사령부 (FECOM)
존속 기간1947년 1월 1일 – 1957년 7월 1일
국가미국
소속미국 국방부
종류통합전투사령부
역할극동 전구 대응
본부 (1947년 - 1952년)다이이치 빌딩, 도쿄도지요다구유라쿠초
본부 (1952년 - 1957년)퍼싱 하이츠, 도쿄도신주쿠구이치가야
별칭극동군
지휘부
주요 지휘관더글러스 맥아더
매튜 B. 리지웨이
마크 W. 클라크
전투
참전한국 전쟁

2. 역사

극동사령부(Far East Command|FECeng)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미군을 지휘하기 위해 1947년 1월 1일 일본 도쿄의 다이이치 빌딩에 창설되었다.[2][11] 초대 사령관은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의 연합군 최고사령관을 겸임하고 있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었다. 초기 극동사령부는 일본 점령 관리 임무와 함께 미국 극동 육군, 미국 극동 공군, 미국 극동 해군을 총괄 지휘하는 구조였으며, 특히 맥아더 사령관은 육군 부대에 대한 직접적인 지휘권을 유지하며 극동 육군 사령관(CG AFFE)을 겸임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극동사령부는 전쟁 수행의 중심 역할을 맡게 되었다. 7월 14일부로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관은 대한민국 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이양받았으며, 신설된 유엔군사령부(UNC)의 초대 사령관을 겸직하게 되었다. 전쟁 중이던 1951년 4월 11일, 맥아더 장군은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해임되었고, 후임으로 매슈 리지웨이 장군이 임명되었다. 이후 마크 웨인 클라크 장군 등이 사령관직을 이어받았다.

1952년 4월 2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로 연합군 최고사령부(GHQ)가 해체되면서 극동사령관의 GHQ 최고사령관 겸직은 종료되었고, 사령부 본부도 도쿄 이치가야의 퍼싱 헤이츠로 이전했다. 또한 맥아더 해임 이후 극동사령부의 지휘 구조는 점차 합동 참모 체제로 정비되었다.

한국 전쟁 휴전 이후 냉전 체제가 고착화되면서, 미군의 전 세계적인 전략 재편 과정 속에서 극동사령부의 역할과 위상에 대한 재검토가 이루어졌다. 1956년 합동참모본부 내 논의 끝에 극동사령부를 해체하고 그 기능을 태평양 사령부로 통합하기로 결정되었다.

결국 1957년 7월 1일,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주한 미군이 창설되어 한반도 주둔군 통제권이 이관됨과 동시에 극동사령부는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22] 사령부의 기능과 책임은 하와이주 호놀룰루에 본부를 둔 미국 태평양 사령부(PACOM, 현 인도-태평양 사령부)로 통합되었다.[2][23] 역대 극동사령관으로는 초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에 이어 매슈 리지웨이, 마크 웨인 클라크, 존 E. 헐, 맥스웰 D. 테일러, 그리고 마지막 사령관인 레이먼 렘니체르 장군 등이 있었다.

2. 1. 군정기 (1947년 ~ 1950년)

1947년 1월 1일,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의 연합군 최고사령관이었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초대 극동사령관(CINCFE)으로 임명되면서 극동사령부가 창설되었다. 본부는 일본 도쿄의 다이이치 빌딩에 설치되었다.[2][11] 맥아더 사령관은 극동 육군 사령관(CG AFFE)을 겸임하며 육군 부대에 대한 직접적인 지휘권을 가졌고, 그의 참모진 역시 공군 및 해군 대표가 포함된 합동 전략 계획 및 작전 그룹(JSPOG)을 제외하면 대부분 육군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극동 공군 사령관(CG FEAF)과 극동 해군 사령관(COMNAVFE)도 극동사령관에게 직접 보고하는 체계였다.[3]

창설 당시 극동사령부 예하의 주요 육군 부대 및 관할 지역은 다음과 같다.

부대주요 주둔지/관할 지역비고
극동 육군 예하 제8군일본제1군단, 제9군단, 제24군단을 지휘
제24군단 / 주한 미 육군한반도 남부한국의 군정기 담당
마리아나-보닌 사령부(MARBO)마리아나 제도, 오가사와라 제도(보닌 제도)1947년 1월 설립[4], 1948년 8월 8일 어깨소매표장 인가[21][13]
필리핀-류큐 사령부(PHILRYCOM)필리핀, 류큐 열도1946년 12월 1일 ~ 1948년 7월 31일[16]



초기에는 육군 부대에 대한 총괄 사령부 없이 각 부대가 극동사령관에게 직접 보고하는 방식이었으며, 극동 공군과 극동 해군을 포함하여 맥아더는 총 7개의 하위 군사 사령부를 지휘했다.[3][12]

마리아나-보닌 제도(MARBO)의 관할권은 해군(태평양 전역 통합 관리 주장)과 육군(극동사령부의 유사시 자원 활용 주장) 간의 논쟁 대상이었다. 결국 섬 내의 현지 병력과 시설은 극동사령부가 통제하고, 해군 행정 및 물류는 태평양 사령부가 담당하게 되었다.

류큐 열도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미 해군이 관리하다가 1946년 7월 1일부로 미 육군으로 관리 책임이 이관되었다.[5][6][14][15] 이후 류큐 사령부, 필리핀-류큐 사령부(PHILRYCOM)를 거쳐 관리되었다. PHILRYCOM은 1948년 8월 1일부로 다시 필리핀 사령부(PHILCOM)와 류큐사령부(RYCOM)로 분리되었다.[20][7][16]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 수립되면서 한국의 군정기 임무가 종료되었다. 이에 따라 주한 미군(USFIK, United States Forces in Korea)은 한반도에서 철수하기 시작했고, 군정을 담당했던 제24군단1949년 1월 25일 해체되었다.

1950년 3월 28일, 군비 축소 계획에 따라 일본 교토 지역의 제1군단센다이 지역의 제9군단이 해체되었다. 이로 인해 제8군은 도쿄의 제1기병사단, 센다이의 제7보병사단, 규슈의 제24보병사단, 오사카의 제25보병사단 등 예하 사단들을 직접 지휘하게 되었다.

1950년 6월 당시 극동사령부 본부는 여전히 도쿄 다이이치 빌딩에 있었으며, 참모장은 에드워드 M. 알몬드 소장, 부참모장은 도일 오버턴 히키 소장이었다. 주요 하위 육군 사령부로는 월턴 H. 워커 중장이 지휘하는 제8군, 월터 L. 와이블 소장이 지휘하는 GHQ 참모 및 지원 그룹, 요제프 R. 시츠 소장이 지휘하는 류큐 사령부(RYCOM), 로버트 S. 베이트러 소장이 지휘하는 마리아나-보닌 사령부(MARBO)가 있었다. 필리핀에서는 제13공군이 하워드 M. 터너 소장이 지휘하는 필리핀 사령부(PHILCOM(AF))를 통해 미군 시설을 관리하고 있었다.[8][17]

2. 2. 한국 전쟁 (1950년 ~ 1953년)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한국 전쟁이 발발했다. 이틀 뒤인 6월 27일, 극동사령부는 경기도 수원에 Advance Command and Liason Group in Korea|전방사령부/한국연락반eng (ADCOM)을 설치하여 초기 대응에 나섰다. 선발대로 파견된 제24보병사단이 북한군의 T-34 전차에 큰 피해를 입었다는 보고를 받자, 7월 3일 더글러스 맥아더 극동사령관은 T-34에 대응하기 위해 M20 "수퍼 바주카"의 긴급 보급을 요청하였다.

7월 14일, 맥아더는 대통령 이승만으로부터 대한민국 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이양받았으며, 이는 다시 미 제8군사령관에게 위임되었다. 또한 J. 로턴 콜린스 미 육군참모총장으로부터 유엔기를 전달받아, 신설된 유엔군사령부(UNC)의 초대 사령관을 겸직하게 되었다. 이로써 극동사령관은 유엔군사령관의 지위를 함께 갖게 되었다.

전쟁 초기 미 제8군이 많은 예하 사단을 통제하는 데 어려움을 겪자, 8월 10일 맥아더는 3개 군단의 증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제1군단제9군단이 재소집되어 각각 9월 13일과 23일에 한반도에 전개하였고, 제8군 예하의 사단들을 배속받아 지휘하였다. 제10(X)군단은 8월 26일 유엔군사령부 직속 상륙부대로 일본에서 재창설되었다. 맥아더는 극동사령부 참모장인 에드워드 M. 알몬드 소장을 제10군단장으로 임명(참모장 겸직)했으며, 제10군단은 X Force|엑스 포스eng라는 이름으로 인천 상륙 작전을 성공시켜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951년 4월, 예비 전력 확보를 위해 제16(XVI)군단이 센다이의 캠프 쉼멜페니그에서 재소집되어 제1기병사단, 제24사단, 제40보병사단의 3개 사단을 배속받았다. 그러나 같은 해 4월 11일,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더글러스 맥아더를 극동사령관 직에서 해임했고, 후임으로 매슈 리지웨이 대장이 임명되었다. 이 지휘관 교체와 함께 제10군단은 극동사령부 직할에서 제8군 예하로 배속 변경되었고, 합동참모본부는 보닌-마리아나 제도, 필리핀, 대만에 대한 작전 책임 지역을 극동사령부에서 태평양 사령부(PACOM)로 이관했다.

1952년, 극동사령부 본부는 도쿄 이치가야의 퍼싱 헤이츠로 이전했다. 같은 해 4월 2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됨에 따라 연합군 최고사령부(SCAP)가 해체되면서, 극동사령관이 겸직하던 연합군 최고사령관 직책도 폐지되었다. 5월 12일에는 마크 웨인 클라크 대장이 제3대 극동사령관으로 부임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 체결로 전투 행위가 중단되었으며, 같은 해 10월 7일 존 E. 홀 대장이 제4대 극동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전쟁 중 예비대로 편성되었던 제16(XVI)군단은 1954년 11월 20일 임무를 마치고 해산하였다.

2. 3. 냉전 시기 (1953년 ~ 1957년)

1953년 10월 7일, 존 E. 헐 장군이 네 번째 극동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한국 전쟁 휴전 이후 극동사령부의 역할과 구조에도 변화가 생겼다.

1954년 1월 1일, 제8군 소속이었던 제9(IX)군단극동 육군으로 예속되었다. 이후 1957년 1월 1일에는 미국 류큐 열도 육군과 병합하여 류큐사령부 본부/제9(IX)군단이 되었고, 같은 해 11월에는 오키나와현의 캠프 버크너로 이전했다. 한편, 1954년 11월 20일에는 남북 휴전 협정에 따라 예비대 임무를 수행하던 제16(XVI)군단이 해산되었다.

1955년 4월 1일, 레이먼 렘니체르 장군이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극동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956년, 극동사령부의 존속 여부를 두고 합동참모본부 내에서 논쟁이 벌어졌으며, 최종 결정은 국방장관에게 위임되었다. 합동참모본부 위원 4명은 극동사령부를 폐지하고 그 기능을 태평양 사령부(CINCPAC)로 이관할 것을 권고했다. 이들은 서태평양-극동 지역 사령부의 분할 운영에 따른 비효율성을 지적했고, 특히 일본한국 주둔 미군 규모가 축소되는 상황에서 별도의 극동사령부를 유지할 필요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나 육군참모총장은 이에 반대했다. 그는 극동 사령관(CINCFE)이 미군 사령관, 한국의 유엔군(UNC) 사령관, 류큐 열도 군정관으로서 수행하는 여러 역할을 분리하면 비효율과 비용 증가를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오히려 극동사령부의 역할을 확대하여 동남아시아, 대만,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공산주의 위협이 증가하는 지역에 대한 책임을 맡기고, 해당 지역의 군사 원조 감독 기능까지 부여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국방장관은 1956년 6월 21일, 극동사령부 폐지를 포함한 새로운 통합 지휘 계획(UCP)을 승인했고, 이는 대통령의 승인을 거쳐 1956년 7월 3일에 공식화되었다.

결국 1957년 7월 1일,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의거하여 주한 미군이 창설되면서 한반도 주둔군에 대한 통제권이 이관되었다.[22] 같은 날 극동사령부는 공식적으로 해체되었고, 그 기능은 하와이주 호놀룰루의 태평양 사령부에 통합되었다.[2] 유엔사령부는 일본 캠프 자마에 후방사령부를 설치하고 주둔하다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용산구의 용산 기지로 이전했다. 극동 육군은 캠프 자마에서 주일 육군으로, 극동 공군은 요코타 비행장을 거점으로 태평양 공군으로 각각 재편성되었다.[23]

3. 지휘 구조

극동사령부의 최고 지휘관은 Commander-in-Chief, Far East Commandeng를 줄여 CINCFE라고 불렸다. 역대 사령관에 대한 상세 정보는 하위 섹션에서 다룬다.

극동사령부는 예하에 육군, 해군, 공군 및 기타 다양한 부대를 두어 지휘했으며, 각 조직의 극동사령부 배속 기간은 다음과 같다.


  • 유엔사령부: 1950년 7월 14일 ~ 1957년 7월 1일 (이후 주한 미군으로 전속)
  • 극동 육군 (AFFE): 1947년 1월 1일 ~ 1957년 7월 1일 (이후 주일 미국 육군으로 재편성)
  • 미국 제8군 (EUSA): 1947년 1월 1일 ~ 1957년 7월 1일 (극동 육군 예하, 이후 주한 미군으로 전속)
  • KCOMZ: 1952년 6월 11일 ~ 1953년 1월 16일 (제8군 예하)
  • 주일 군수사령부 (JLC/JAPLOGCOM): 1950년 8월 25일 ~ 1952년 10월 1일 (극동 육군에 기능 통합)
  • 극동 공군 (FEAF)
  • 극동 해군 (NAVFE): ~ 1957년 7월 1일 (이후 주일 미국 해군으로 재편성)
  • 미국 제7함대: ~ 1957년 7월 1일 (극동 해군 예하, 이후 미국 태평양 함대로 전속)
  • 제10(X)군단: 1950년 8월 26일 ~ 1951년 4월 (이후 제8군으로 전속)
  • 제16(XVI)군단: 1951년 4월 ~ 1954년 11월 20일 (해산)
  • 극동전략작전군: 1954년 6월 8일 ~ 1957년 7월 1일 (해체)
  • 마리아나-보닌 사령부 (MARBO): 1947년 1월 1일 ~ 1951년 (이후 태평양 사령부(USPACOM)로 전속, 1958년 해체)
  • 필리핀-류큐 사령부 (PHILRYCOM): 1946년 12월 1일 ~ 1948년 8월 1일 (분리)
  • 필리핀 사령부 (PHILCOM): 1948년 8월 1일 ~ 1951년 (분리 후, 이후 태평양 사령부(USPACOM)로 전속)
  • 제8116부대/류큐사령부 (RYCOM): 1948년 8월 1일 ~ 1957년 6월 30일 (분리 후, 이후 태평양 사령부(USPACOM)로 전속)
  • 류큐 열도 미국군정부 (USMGR): 1947년 1월 1일 ~ 1950년 12월 15일 (RYCOM 예하, USCAR로 재조직)
  • 류큐 열도 미국민정부 (USCAR): 1950년 12월 16일 ~ 1957년 7월 1일 (RYCOM 예하)
  • 제8087부대/극동 육군 협조파견대: 1953년 ~ ?
  • 제8177부대/연합사령부 극동정찰처
  • 제8201부대/한국민간원조사령부 (KCAC): 1953년 7월 1일 ~ ?
  • 제8240부대
  • 극동사령부 연락단: ~ 1952년 12월 10일 (제8177부대/연합사령부 극동정찰처로 재편성)
  • 주한 유엔 유격군 (UNPIK): 1951년 ~ 1954년 4월 30일
  • 제8242부대/연합사령부 주한 정찰활동처 (CCRAK): 1951년 ~ 1953년

3. 1. 역대 극동사령관

wikitext

번호초상화계급이름취임일퇴임일소속 군
1--원수더글러스 맥아더1947년 1월 1일1951년 4월 11일미국 육군
2--대장매슈 리지웨이1951년 4월 11일1952년 5월 12일미국 육군
3--대장마크 웨인 클라크1952년 5월 12일1953년 10월 7일미국 육군
4--대장존 E. 헐1953년 10월 7일1955년 4월 1일미국 육군
5--대장맥스웰 D. 테일러1955년 4월 1일1955년 6월 5일미국 육군
6--대장라이먼 레민처1955년 6월 5일1957년 7월 1일미국 육군


4. 예하 부대

극동사령부는 예하에 다양한 육군, 해군, 공군 부대 및 특수 임무 부대들을 두었다. 주요 구성군으로는 극동 육군(AFFE), 극동 공군(FEAF), 극동 해군(NAVFE)이 있었다. 극동 육군은 제8군을 핵심으로 하여 한국 전쟁 이전부터 활동했으며, 전쟁 중에는 KCOMZ, 주일 군수사령부 등의 지원 부대도 운용했다. 극동 해군은 제7함대를 주력으로 활동했다.

한국 전쟁 발발 후 유엔사령부가 창설되어 극동사령관의 지휘 아래 놓였으며, 전쟁 수행을 위해 제10군단, 제16군단 등이 임시로 편성되거나 배속되었다.

또한, 필리핀, 류큐 열도, 마리아나-보닌 제도 등 특정 지역의 방위와 군정을 담당하는 지역 사령부들도 극동사령부 예하에 있었으나, 일부는 이후 태평양 사령부로 이관되었다. 류큐 지역 통치를 위해 류큐 열도 미국군정부류큐 열도 미국민정부가 운영되기도 했다.

이 외에도 정보 수집, 민사 작전, 특수전 등을 담당하는 다양한 번호 부대(예: 제8087, 8177, 8201, 8240, 8242부대)와 주한 유엔 유격군(UNPIK), 한국민간원조사령부(KCAC) 등이 극동사령부의 지휘를 받았다. 각 부대의 구체적인 배속 기간과 활동 내역은 시기별로 변동이 있었다.

4. 1. 한국 전쟁 시기 주요 부대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한국 전쟁이 발발했다. 이틀 뒤인 6월 27일, 극동사령부는 전방사령부/한국연락반(ADCOM, Advance Command and Liason Group in Korea)을 경기도 수원에 설치하며 전쟁 개입을 시작했다. 선발대로 파견된 제24보병사단이 북한군의 T-34 전차에 의해 큰 피해를 입자, 7월 3일 더글러스 맥아더 극동사령관은 T-34 전차를 효과적으로 격파할 수 있는 M20 "수퍼 바주카"의 긴급 보급을 요청했다.

7월 14일, 이승만 대통령대한민국 국군작전지휘권을 맥아더 사령관에게 이양하였고, 맥아더는 이를 다시 제8군에게 위임했다. 같은 날, J. 로턴 콜린스 미 육군 참모총장으로부터 UN 깃발을 전달받으면서 극동사령관은 신설된 유엔군사령관을 겸직하게 되었다.

전쟁 초기, 제8군이 예하의 많은 사단을 효율적으로 통제하는 데 어려움을 겪자, 8월 10일 맥아더는 3개 군단의 증원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제1군단제9군단이 재소집되어 각각 9월 13일과 23일에 한반도에 전개하였고, 이들은 제8군으로부터 사단들을 배속받아 지휘했다. 제10군단은 8월 26일 유엔사령부 예하에서 상륙작전을 위한 특수임무부대로 재창설되었다. 맥아더는 자신의 참모장인 에드워드 M. 알몬드 소장을 제10군단장으로 임명하면서 참모장 직책을 겸임하게 했다. 제10군단은 'X Force'로서 인천 상륙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전세를 역전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50년 12월 15일, 류큐사령부는 제9군단과 통합되어 "류큐 열도 사령부/제9(IX)군단, 연합본부"로 개편되었고, 오키나와와 류큐 열도의 장기적인 통치를 위해 류큐 열도 미국군정부류큐 열도 미국민정부(USCAR)로 대체되었다.

1951년 4월, 제16군단이 예비 부대로 지정되어 캠프 쉼멜페니그에 사령부를 재소집했다. 제16군단은 제1기병사단, 제24보병사단, 제40보병사단 등 3개 사단을 예하에 두었다. 같은 해 4월 11일,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맥아더 사령관을 해임하고 매슈 리지웨이 대장을 후임으로 임명했다. 이와 함께 제10군단은 극동사령부 직할에서 제8군 예하로 편입되었다. 또한, 보닌-마리아나 사령부, 필리핀 사령부, 대만에 대한 책임 권한은 태평양 사령부로 이관되었다.

1952년, 극동사령부 본부는 도쿄의 퍼싱 헤이츠로 이전했다. 같은 해 4월 2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되면서 연합군 최고사령부(SCAP)가 해체되었고, 극동사령관의 연합군 최고사령관 겸직도 종료되었다. 5월 12일에는 마크 웨인 클라크 대장이 세 번째 극동사령관으로 부임했다.

한국 전쟁 기간 동안 극동사령부에 배속되었던 주요 부대 및 조직은 다음과 같다. (각 조직 옆의 기간은 극동사령부 배속 기간)

조직배속 기간비고
유엔사령부1950년 7월 14일 ~ 1957년 7월 1일주한 미군으로 전속
극동 육군 (AFFE)1947년 1월 1일 ~ 1957년 7월 1일주일 미국 육군으로 재편성
제8군 (EUSA)1947년 1월 1일 ~ 1957년 7월 1일주한 미군으로 전속
KCOMZ1952년 6월 11일 ~ 1953년 1월 16일제8군 예하
주일 군수사령부 (JLC/JAPLOGCOM)1950년 8월 25일 ~ 1952년 10월 1일극동 육군에 기능 병합
극동 공군 (FEAF)--
극동 해군 (NAVFE)- ~ 1957년 7월 1일주일 미국 해군으로 재편성
제7함대- ~ 1957년 7월 1일미국 태평양 함대로 전속
제10군단1950년 8월 26일 ~ 1951년 4월제8군으로 전속
제16군단1951년 4월 ~ 1954년 11월 20일해산
극동전략작전군1954년 6월 8일 ~ 1957년 7월 1일해체
마리아나-보닌 사령부 (MARBO)1947년 1월 1일 ~ 1951년태평양 사령부(USPACOM)로 전속 (1958년 해체)
필리핀-류큐 사령부 (PHILRYCOM)1946년 12월 1일 ~ 1948년 8월 1일분리됨
필리핀 사령부 (PHILCOM)1948년 8월 1일 ~ 1951년태평양 사령부(USPACOM)로 전속
제8116부대/류큐사령부 (RYCOM)1948년 8월 1일 ~ 1957년 6월 30일태평양 사령부(USPACOM)로 전속
류큐 열도 미국군정부 (USMGR)1947년 1월 1일 ~ 1950년 12월 15일USCAR로 재조직
류큐 열도 미국민정부 (USCAR)1950년 12월 16일 ~ 1957년 7월 1일-
제8087부대/극동 육군 협조파견대1953년 ~ ?-
제8177부대/연합사령부 극동정찰처--
제8201부대/한국민간원조사령부 (KCAC)1953년 7월 1일 ~ ?-
제8240부대--
극동사령부 연락단- ~ 1952년 12월 10일제8177부대/연합사령부 극동정찰처로 재편성
주한 유엔 유격군 (UNPIK)1951년 ~ 1954년 4월 30일제8240부대 예하
제8242부대/연합사령부 주한 정찰활동처 (CCRAK)1951년 ~ 1953년-


5. 주요 사건 및 작전

1947년 1월 1일 창설된 극동사령부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미군 조직 개편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초대 사령관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었으며, 그는 육군 극동군 사령관(CG AFFE)을 겸임하며 육군 부대를 직접 지휘했다. 그의 참모진은 공군 및 해군 대표가 있는 합동 전략 계획 및 작전 그룹(JSPOG)을 제외하고는 본질적으로 육군 참모였다. 창설 당시 예하 부대로는 제8군, 제24군단/주한 미 육군, 류큐 사령부, 필리핀 사령부, 마리아나-보닌 사령부(MARBO) 등이 있었다.[3] 극동 공군과 극동 해군 역시 극동사령부의 지휘를 받았다.

창설 초기, 마리아나-보닌 제도의 관할권을 태평양 사령부와 극동사령부 중 어디에 둘 것인지를 두고 논쟁이 있었다. 해군은 태평양 섬 전체를 단일 전략 단위로 보았으나, 육군은 유사시 극동사령부가 해당 지역 자원을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극동사령관이 섬 내 병력과 시설 통제권을 갖고, 해군 행정 및 군수는 태평양 사령관에게 귀속되었다.[4]

류큐 열도는 일본 항복 이후 해군부에서 관리하다가 1946년 7월 1일 육군부로 이관되어 류큐 사령부가 관리하게 되었다.[5][6] 이후 필리핀 사령부와 통합되어 필리핀-류큐 사령부(PHILRYCOM)로 운영되기도 했으나, 1948년 8월 1일 다시 필리핀 사령부(PHILCOM)와 류큐 사령부(RYCOM)로 분리되었다.[7] 1950년 12월 15일에는 극동사령부 지침에 따라 미국 류큐 열도 민정청(USCAR)이 설립되어 류큐 열도에 대한 민정을 담당하게 되었다.[5]

한국 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6월, 극동사령부 본부는 일본 도쿄 다이이치 빌딩에 위치했으며, 에드워드 M. 아몬드 소장이 참모장, 도일 O. 히키 소장이 부참모장을 맡고 있었다. 주요 예하 육군 사령부로는 월턴 H. 워커 중장의 제8군, 요제프 R. 시츠 소장의 류큐 사령부(RYCOM), 로버트 S. 베이트러 소장의 마리아나-보닌 사령부(MARBO) 등이 있었다.[8]

1952년 맥아더 장군이 해임된 후, 육군 극동군 본부가 다른 구성 사령부와 동등한 지위로 조정되고 극동사령부에 진정한 합동 참모 조직이 갖추어졌다.

1956년 극동사령부의 존속 여부가 논의되었다. 합참 위원 대다수는 일본과 한국의 미군 감축 등을 이유로 사령부를 폐지하고 기능을 태평양 사령부로 이관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육군 참모총장은 극동사령관의 다양한 역할(미군 사령관, 유엔군 사령관, 류큐 열도 군정관) 분담의 비효율성을 지적하며 반대했고, 오히려 동남아시아 등으로 책임 범위를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국방장관은 사령부 해체를 결정했고, 1957년 7월 1일부로 극동사령부는 공식적으로 폐지되고 그 기능은 태평양 사령부로 통합되었다.[2]

5. 1. 인천 상륙 작전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한국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 초기 대한민국 국군주한 미군은 북한군에 밀려 후퇴를 거듭했다. 이러한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극동사령부는 반격 작전을 구상했다.

7월 14일, 극동사령부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대한민국의 대통령 이승만으로부터 대한민국 국군작전지휘권을 이양받았다. 이는 유엔군사령관을 겸하게 된 맥아더에게 한국 전쟁 전반에 대한 지휘 권한을 부여한 조치였다.

맥아더는 전세를 뒤집기 위한 결정적인 작전으로 인천 상륙 작전을 계획했다. 이 작전을 위해 8월 26일, 극동사령부 예하에 상륙 작전을 전담할 제10(X)군단이 재창설되었다. 맥아더는 자신의 참모장이었던 에드워드 M. 알몬드 소장을 제10군단장으로 임명하여 작전을 지휘하도록 했다. 제10군단은 X Force|엑스 포스영어로서 인천 상륙 작전을 통해 전세를 역전시키는 역할을 수행했다.

5. 2. 중공군 개입

1951년 4월 11일, 더글러스 맥아더 극동 사령관은 트루먼 미국 대통령에 의해 해임되었다. 이는 한국 전쟁 중 중공군 개입 이후 전황 변화와 맥아더의 전략 및 지휘 방식에 대한 논란 속에서 이루어진 결정이었다. 맥아더의 후임으로는 매슈 리지웨이 대장이 임명되었다.

맥아더 해임 이후 극동사령부의 지휘 체계에도 변화가 있었다. 이전까지 극동 사령부 직할 부대였던 제10(X)군단제8군 예하로 편입되었다. 또한, 합동참모본부는 기존에 극동사령부가 가지고 있던 보닌-마리아나 사령부, 필리핀 사령부, 대만에 대한 책임 권한을 태평양 사령부로 이관하였다.

6. 한국과의 관계

1947년 1월 1일 창설된 극동사령부는 초기부터 한반도와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 창설 당시 예하 부대에는 주한 미 육군을 담당하던 제24군단이 포함되어 있어, 미군정 시기 한반도 상황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3]

1950년 6월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극동사령부는 즉각 개입하여 전쟁 수행의 중심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 사령관이었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의 결의에 따라 창설된 유엔군 사령관을 겸직하게 되었으며,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 국군작전지휘권을 맥아더 사령관에게 이양했다. 이로써 극동사령부는 한국 전쟁에서 한국군을 포함한 유엔군 전체를 지휘하는 통합 사령부 역할을 수행했다.

전쟁 중 사령관이 매슈 리지웨이, 마크 웨인 클라크, 존 E. 홀 등으로 교체되었으며,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로 연합군 최고사령부(GHQ)가 해체되면서 극동사령관이 겸직하던 연합군 최고사령관 직책은 폐지되었다.

1956년 극동사령부의 존치 여부가 논의될 당시, 합동참모본부 내에서는 한국에서의 UNC 사령관 역할과 류큐 열도 군정관 역할 등 극동사령관의 복합적인 기능을 분리하는 것의 비효율성을 지적하는 의견도 있었으나, 결국 사령부 해체가 결정되었다.

1957년 7월 1일, 극동사령부는 공식적으로 해체되어 그 기능이 태평양 사령부로 통합되었다.[2] 같은 날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주한 미군 사령부가 창설되었고, 유엔군사령부는 일본에서 대한민국 서울특별시로 이전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6. 1. 군사적 관계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극동사령부는 즉각 개입했다. 전쟁 발발 이틀 뒤인 6월 27일, 경기도 수원에 '전방사령부/한국연락반'(Advance Command and Liason Group in Korea|ADCOM영어)을 설치하여 한국 내 작전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초기 전투에서 선발대로 파견된 미국 제24보병사단이 북한군의 T-34 전차에 큰 피해를 입자, 7월 3일 더글러스 맥아더 극동사령관은 T-34 전차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신형 M20 "수퍼 바주카"의 긴급 보급을 요청했다.

전쟁 발발 약 3주 후인 7월 14일, 이승만 대한민국의 대통령대한민국 국군작전지휘권을 맥아더 사령관에게 이양했다. 맥아더는 이 권한을 다시 미국 제8군 사령관에게 넘겨, 국군과 미군 및 유엔군이 통합된 지휘체계 하에 놓였다. 같은 날 맥아더는 J. 로턴 콜린스 미국 육군 참모총장으로부터 유엔(UN) 깃발을 전달받아, 새로 창설된 유엔군 사령관 직책도 겸하게 되었다. 이로써 극동사령관은 한국 전쟁에서 유엔군 전체를 지휘하는 최고 사령관이 되었다.

전황이 악화되자 8월 10일, 제8군이 늘어난 예하 부대 지휘에 어려움을 겪자 맥아더는 3개 군단의 추가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제1군단제9군단이 재소집되어 9월 중 한반도에 전개되었고, 이들은 제8군 예하의 사단들을 지휘했다. 한편, 제10군단은 8월 26일 유엔사령부 직할 부대로 재창설되어 상륙작전 임무를 부여받았다. 맥아더는 자신의 참모장인 에드워드 M. 알몬드 소장을 제10군단장으로 임명(참모장 겸직)하였고, 제10군단은 X Force영어로서 인천 상륙 작전을 성공시켜 전쟁의 국면을 전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51년 4월 11일,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전쟁 확대 문제 등으로 갈등을 빚던 맥아더 사령관을 해임하고, 매슈 리지웨이 장군을 후임 극동사령관 겸 유엔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이와 함께 제10군단은 극동사령부 직할에서 제8군 예하로 편입되었다. 또한 합동참모본부는 보닌-마리아나 사령부, 필리핀 사령부, 대만에 대한 책임 권한을 태평양 사령부로 이관했다. 1952년 사령부 본부는 퍼싱 헤이츠로 이전했다.

1952년 4월 2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되면서 연합군 최고사령부(GHQ)가 해체되었고, 극동사령관이 겸직하던 연합군 최고사령관 직책은 폐지되었다. 5월 12일에는 마크 웨인 클라크 장군이 세 번째 극동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953년 10월 7일에는 존 E. 홀 장군이 네 번째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체결된 후, 1954년 11월 20일 예비대로 지정되었던 제16군단은 임무를 마치고 해산했다. 1955년 4월 1일에는 레이먼 렘니체르 장군이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극동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957년 7월 1일,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주한 미군 사령부가 공식 창설되면서 한반도에 주둔하는 미군 부대에 대한 지휘권이 주한 미군 사령관에게 넘어갔다.[22] 같은 날, 극동사령부는 해체되어 하와이주 호놀룰루의 태평양 사령부에 통합되었다. 유엔사령부는 일본 캠프 자마에 후방사령부를 남겨둔 채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용산구의 용산 기지로 이전했다. 기존의 극동 육군은 캠프 자마에서 주일 육군으로, 극동 공군은 요코타 비행장에서 태평양 공군으로 각각 재편성되었다.[23]

7. 평가 및 유산

극동사령부의 활동과 폐지를 둘러싼 평가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창설 초기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지휘 하에서는 사령관이 육군 극동군 사령관을 겸직하며 육군 중심의 지휘 체계를 보였고, 참모진 역시 합동 전략 계획 및 작전 그룹(JSPOG)의 일부 인원을 제외하면 대부분 육군 참모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구조는 맥아더 장군이 물러난 1952년 이후에야 육군 극동군 본부가 다른 구성 사령부와 동등한 위상으로 조정되고 실질적인 합동 참모가 구성되면서 개선되었다.

1956년에는 극동사령부의 존폐를 두고 합동 참모 본부 내에서 격론이 벌어졌다. 육군 참모총장을 제외한 합참 위원들은 서태평양과 극동 지역의 지휘 체계가 분산되어 비효율적이며, 특히 일본한국에 주둔한 미군 병력이 감소하는 상황에서 별도의 극동사령부를 유지할 필요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폐지를 권고했다. 이들은 극동사령부의 기능을 태평양 사령부(CINCPAC)로 통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육군 참모총장은 극동사령부 폐지에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그는 극동사령관이 수행하던 다양한 역할, 즉 미군 사령관, 한국에서의 UNC 사령관, 류큐 열도 군정관 등의 임무를 분리할 경우 오히려 비효율과 비용 증가를 야기할 것이라고 반박했다. 나아가 그는 당시 공산주의 세력의 위협이 커지고 있다고 판단한 동남아시아, 대만, 인도네시아, 필리핀 지역까지 극동사령부의 책임 범위를 확대하고, 해당 지역에 대한 군사 원조 감독 역할까지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론적으로 국방 장관은 1956년 6월 21일, 합참 다수의 의견을 받아들여 새로운 통합 지휘 계획(UCP)을 승인했다. 이 결정에 따라 극동사령부는 1957년 7월 1일부로 해체되었고, 그 기능은 태평양 사령부로 이관되었다. 이 계획은 대통령의 최종 승인을 거쳐 1956년 7월 3일에 확정되었다.[2] 비록 극동사령부는 해체되었으나, 사령부가 담당했던 기능 중 일부, 특히 한국에서의 유엔군사령관 역할 등은 이후 다른 조직과 형태로 계승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유산을 찾을 수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https://history.army[...] 2021-03-27
[2] 웹사이트 Records of Joint Commands https://www.archives[...] 2017-08-27
[3] 웹사이트 Chapter 3: The Command Structure: AFPAC, FEC and SCAP http://www.history.a[...] 2013-09-13
[4] 서적 Aleck's Authorized Shoulder Sleeve Insignia of the U.S. Army, Ed. 2010
[5] 웹사이트 Records of U.S. Occupation Headquarters, World War II https://www.archives[...]
[6] 문서 JCS 819/11, 5 March 1946, with added proviso of JCS 819/12, 22 March 1946
[7] 웹사이트 Establishment and Missions of FEC Far East Command, Reports of General MacArthur http://www.history.a[...]
[8] 서적 UNITED STATES ARMY IN THE KOREAN WAR POLICY AND DIRECTION: THE FIRST YEAR
[9] 뉴스 Stars and Stripes
[10] 웹사이트 CHAPTER III THE COMMAND STRUCTURE: AFPAC, FEC AND SCAP https://history.army[...] 2021-03-27
[11] 웹사이트 Records of Joint Commands https://www.archives[...] 2017-08-27
[12] 웹사이트 Chapter 3: The Command Structure: AFPAC, FEC and SCAP http://www.history.a[...] 2013-09-13
[13] 서적 Aleck's Authorized Shoulder Sleeve Insignia of the U.S. Army, Ed. 2010
[14] 웹사이트 Records of U.S. Occupation Headquarters, World War II https://www.archives[...]
[15] 문서 JCS 819/11, 5 March 1946, with added proviso of JCS 819/12, 22 March 1946
[16] 웹사이트 Establishment and Missions of FEC Far East Command, Reports of General MacArthur http://www.history.a[...]
[17] 서적 UNITED STATES ARMY IN THE KOREAN WAR POLICY AND DIRECTION: THE FIRST YEAR
[18] 뉴스 Stars and Stripes
[19] 문서 1947년 1월 1일에 설립하고 1958년에 해체되었다.
[20] 문서 1946년 12월 1일에 설립되어 1948년 8월 1일에 별개 지역사령부로 분할되었다.
[21] 웹인용 Marianas Bonins Command https://tioh.army.mi[...] The Institute of Heraldry 2020-01-16
[22] 웹인용 349.5.2 Records of Headquarters United States Forces, Korea http://www.archives.[...]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2014-06-11
[23] 웹인용 Pacific Air Forces https://www.afhra.af[...] Air Force Historical Research Agency 2013-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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