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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해군육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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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제국 해군 육전대는 러일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중일 전쟁, 태평양 전쟁 등에서 육상 전투를 위해 운용된 부대이다. 해전에서 적 함선 제압을 위해 설치된 해병대가 1876년 폐지된 후, 수병을 무장시켜 육상 전투에 투입하는 방식으로 운용되었으며, 1886년 '해군 육전대 개칙'을 통해 규정이 마련되었다. 함정 승무원으로 임시 편성되거나, 진수부의 육상 부대 인원으로 구성된 특별 육전대가 존재했다. 육전대는 세이난 전쟁, 러일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중일 전쟁 등에서 활약했으며, 특히 제1차 상하이 사변을 계기로 상설 부대인 상하이 해군 특별 육전대가 창설되었다. 태평양 전쟁 중에는 경비대, 방위대 등 다양한 부대가 편성되었으며, 해군 공정 부대와 전차 부대도 운용했다. 육전대는 다양한 장비를 사용했으며, 훈련은 해병단 기초 교육, 해군 포술 학교 교육 등을 통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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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해군육전대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개요
일본 제국 해군 깃발, IJN 육상 부대에서도 사용
일본 제국 해군 깃발, IJN 육상 부대에서도 사용
원어 명칭大日本帝國海軍陸戦隊
로마자 표기Dai-Nippon Teikoku Kaigun Rikusentai
한국어 명칭대일본제국 해군 육전대
활동 기간1876년—1945년
소속일본 제국 해군
유형해안 기반 해군 인력
역할상륙 작전
원정 전쟁
공수 작전 (SNLF 부대)
정글전
군사 경찰 (Tokkeitai 부대)
방어 작전
시설 보안
대공 방어
해군 교육 및 훈련
지휘
기타 정보
전투 및 작전
주요 전투청일 전쟁
러일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니항 사건
중일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주요 지휘관
주요 지휘관오카와치 덴시치 중장
오타 미노루 중장
야스다 요시타츠 중장
기념일

2. 역사

일본 제국 해군은 러일 전쟁제1차 세계 대전, 중일 전쟁, 태평양 전쟁 등 여러 전쟁에서 육상 전투를 위해 해군 육전대를 운용했다.


  • 초기 역사 (메이지 시대)


일본 제국 해군은 서양 제국의 해군처럼 군함 조작을 담당하는 수병과는 별도로 전투를 담당하는 해병대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해전에서 적 함선에 강행 접현 후 제압을 수행하는 부대로, 육상 전투 부대로도 사용되었다. 일본은 영국 해군을 따라 해군에 해병대를 설치했으나, 1876년(메이지 9년)에 폐지되었다.

해병대 폐지 이후, 일본 해군은 필요에 따라 일반 수병을 무장시켜 육상 전투에 투입하는 해군 육전대를 운용했다. 1886년(메이지 19년) 11월 5일에는 "해군 육전대 개칙"이 제정되어 해군 육전대의 일반 규정이 마련되었다. 해군 육전대는 상설이 아니었고, 함정 승무원 중에서 필요에 따라 임시로 편성되었다. 진수부 등의 육상 부대 인원으로 구성된 '''특별 육전대'''도 있었다.

해군 육전대는 1877년(메이지 10년) 세이난 전쟁 등에서 기동력을 발휘하여 진압에 공헌했다. 러일 전쟁에서는 인천 상륙 작전 등 상륙 작전에서 육군을 지원했고, 여순항 포위전에는 '''해군 육전 중포대'''가 참가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때에는 칭다오 공략전에 중포대를 참가시켰고, 함선 육전대와 6개 특별 육전대에 의한 독일령 남양 군도 점령 등에 종사했다. 2·26 사건 당시에는 요코스카 진수부 및 함정 승무원으로 편성된 육전대가 반란군에 대항하기 위해 동원되기도 했다.

의화단 운동에서는 포함 아타고에서 파견된 25명의 육전대가 농성전에서 활약했다. 1920년의 니콜라예프스크 사건에서는 전멸할 때까지 싸워 재류 일본인과 운명을 함께 했다. 제1차 상하이 사변에서는 상하이 육전대가 편성되어 대규모 전투에 투입되었다. 1932년에는 "해군 특별 육전대령"이 제정되어 상하이 해군 특별 육전대는 정식 상설 부대가 되었다.

  • 러일 전쟁과 제1차 세계 대전


러일 전쟁에서 일본 제국 해군은 인천 상륙 작전 등 상륙 작전에서 육군을 지원했고, 여순항 포위전에는 '해군 육전 중포대'가 참가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때에는 칭다오 공략전에 중포대를 투입하고, 함선 육전대와 6개 특별 육전대로 독일령 남양 군도를 점령했다. 또한, 싱가포르에서 발생한 영국군 인도인 병사의 반란 진압에도 참여했다. 의화단 운동에서는 포함 아타고에서 파견된 25명의 육전대가 농성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920년의 니콜라옙스크 사건(니항 사건)에서는 육전대가 전멸할 때까지 싸워 재류 일본인과 운명을 함께 했다.

  • 전간기 (1918년 ~ 1937년)


일본 제국 해군은 서양 제국의 해군 제도와 달리, 함선 조작을 담당하는 수병과 전투를 담당하는 해병대를 분리하지 않고, 필요에 따라 수병을 무장시켜 육상 전투에 투입하는 해군 육전대를 운용했다. 1876년 해병대가 폐지된 후, 1886년 "해군 육전대 개칙" 제정으로 해군 육전대가 육상 전투를 전담하게 되었다. 해군 육전대는 함정 승무원 중에서 임시로 편성되었으며, 진수부 등 육상 부대 인원으로 구성된 '''특별 육전대'''도 있었다.

해군 육전대는 세이난 전쟁에서 기동성을 발휘하여 진압에 공헌했고, 러일 전쟁에서는 인천 상륙 작전 등 육군을 지원했다. 여순 공성전에는 '''해군 육전 중포대'''가 참가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칭다오 공략전에 중포대를 투입하고, 남양 군도 점령과 싱가포르 반란 진압 등에 참여했다. 2·26 사건 당시에는 요코스카 진수부 및 함정 승무원으로 편성된 육전대가 반란군 진압을 위해 동원될 계획이었다.

의화단의 난 당시 포함 아타고에서 파견된 육전대가 농성전에 참여했고, 1920년 니콜라예프스크 사건에서는 전멸할 때까지 싸웠다. 제1차 상하이 사변에서는 상하이 육전대가 편성되어 대규모 전투에 투입되었고, 이를 계기로 1932년 "해군 특별 육전대령"이 제정되어 상설 부대가 되었다. 제2차 상하이 사변에서도 상하이 해군 특별 육전대를 중심으로 다수의 육전대가 전투를 벌였다.

  •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


일본 제국 해군은 중일 전쟁태평양 전쟁에서 육상 전투를 담당하는 해군 육전대를 운용했다. 제1차 상하이 사변에서는 상하이 육전대가 편성되어 전투를 치렀고, 1932년에는 상설 부대가 되었다. 제2차 상하이 사변에서도 상하이 해군 특별 육전대를 중심으로 다수의 육전대가 전투에 참여했다.

태평양 전쟁에서는 도서 및 국지 방위의 필요성으로 인해 특별 육전대 외에 '''경비대'''와 '''방위대''' 등의 육전대가 편성되었다. 해군 독자적인 공정 부대(낙하산 부대)와 전차 부대도 보유했다. 공정 부대는 1942년 1월 셀레베스 섬 메나도에서 일본 최초의 강하 작전을 실시했다. 종전 전에는 본토 결전을 위해 함정 부대 등의 대부분이 육전대로 개편되어 총 병력은 10만 명에 달했다.

태평양 전쟁에서 육전대의 주요 전투는 다음과 같다:

  • 여순 공방전 - 러일 전쟁. 해군 육전 중포대가 참가.
  • 니항 사건 - 러시아 내전. 교민 보호를 위해 전멸할 때까지 싸웠다.
  • 제1차 상하이 사변 / 제2차 상하이 사변 - 상하이 해군 육전대가 적은 병력으로 방어전에 성공했다.
  • 웨이크섬 전투 - 마이즈루 제2 특별 육전대 등이 해군 단독으로 상륙 작전을 실시, 점령에 성공했지만 큰 손해를 입었다.
  • 라비 전투(밀른 만 전투) - 구레 제3 및 제5 특별 육전대와 사세보 제5 특별 육전대 등이 투입되었으나, 오스트레일리아군・미군과의 교전 결과 큰 손해를 입고 패퇴했다.
  • 부나-고나 전투 - 요코스카 제5 특별 육전대를 중심으로 900명이 부나 방어전에 참가, 육군 부대와 함께 장기간 저항 끝에 전멸.
  • 라에-살라모아 전투 - 최종적으로 사라와켓 고개라고 불리는 철수전을 벌였다.
  • 뉴 조지아 섬 전투 - 훗날 철수에 성공.
  • 핀슈하펜 전투 - 해군 제85 경비대가 본래의 육전대 요원 없이 전투를 벌였다.
  • 타라와 전투 / 마킨 전투 - 제3 특별 근거지대와 사세보 제7 특별 육전대가 전멸.
  • 티니안 전투 - 제56 경비대가 전투를 전개.
  • 마닐라 전투 (1945년) - 마닐라 해군 방위대가 시가전을 전개.
  • 올목 만 강행 상륙(1944년) - 요코스카 해군 육전대의 특2식 내화정 10척과 육전병 약 400명이 상륙했지만, 큰 손해를 입었다.
  • 이오지마 전투 - 이오지마 경비대 외 항공대와 설영대를 개편하여 전투.
  • 오키나와 전투 - 오키나와 방면 근거지대 지휘 하의 육전대가 참가. 소총이 부족한 상황에서 전투했다.
  • 가라후토 전투
  • 슈무슈 섬 전투 - 제51, 제52 경비대가 특2식 내화정을 포함한 병력으로 소련군에 맞섰다.

  • 종전과 해체


일본 제국 해군은 해전에서 적 함선에 대한 강행 이승 및 제압을 위해 해병대를 설치했으나 1876년에 폐지되었다. 이후 필요에 따라 일반 수병을 무장시켜 육상 전투에 투입하는 해군 육전대가 이를 대체했다. 1886년에는 "해군 육전대 개칙"이 제정되어 해군 육전대의 일반 규정이 마련되었다.

해군 육전대는 세이난 전쟁에서 기동력을 발휘하여 진압에 공헌했고, 러일 전쟁에서는 인천 상륙 작전 등에서 육군을 지원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칭다오 공략전에 참가하고, 독일령 남양 군도 점령 등에 종사했다. 2·26 사건 당시에는 요코스카 진수부 및 함정 승무원으로 편성된 육전대가 동원되어 반란군에 대응했다.

국제적으로 재외 공관 경비 및 자국민 보호에 해병대가 사용되었고, 일본은 의화단의 난, 니콜라예프스크 사건, 상하이 사변 등에서 해군 육전대가 활약했다. 특히, 제1차 상하이 사변을 계기로 1932년에는 "해군 특별 육전대령"이 제정되어 상하이 해군 특별 육전대가 정식 상설 부대가 되었다.

태평양 전쟁에서 전역이 확대됨에 따라, 도서 및 국지 방위의 필요성으로, 특별 육전대 외에 '''경비대'''와 '''방위대''' 등의 명칭으로 육전대가 잇따라 편성되었다. 또한, 해군 독자적인 공정 부대(낙하산 부대)와 전차 부대도 보유했다. 1942년 1월 셀레베스 섬 메나도에서 일본 최초의 강하 작전을 실시했다. 종전 전에는 본토 결전을 위해 함정 부대 등의 대부분이 육전대로 개편되었고, 총 병력은 10만 명에 달했다.

일본 해군의 육전대는 확충을 계속했지만, 미국 해병대처럼 육·해군으로부터 독립한 군종이 되지는 않았다. 태평양 전쟁 전에 해병대 부활 등이 제안되었지만 채택되지 않았고, 해군 내에서 육전대는 부차적인 임무로 여겨졌다.

2. 1. 초기 역사 (메이지 시대)

일본 제국 해군은 서양 제국의 해군처럼 군함 조작을 담당하는 수병과는 별도로 전투를 담당하는 해병대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해전에서 적 함선에 강행 접현 후 제압을 수행하는 부대로, 육상 전투 부대로도 사용되었다. 일본은 영국 해군을 따라 해군에 해병대를 설치했으나, 1876년(메이지 9년)에 폐지되었다.

해병대 폐지 이후, 일본 해군은 필요에 따라 일반 수병을 무장시켜 육상 전투에 투입하는 해군 육전대를 운용했다. 1886년(메이지 19년) 11월 5일에는 "해군 육전대 개칙"이 제정되어 해군 육전대의 일반 규정이 마련되었다. 해군 육전대는 상설이 아니었고, 함정 승무원 중에서 필요에 따라 임시로 편성되었다. 진수부 등의 육상 부대 인원으로 구성된 '''특별 육전대'''도 있었다.

해군 육전대는 1877년(메이지 10년) 세이난 전쟁 등에서 기동력을 발휘하여 진압에 공헌했다. 러일 전쟁에서는 인천 상륙 작전 등 상륙 작전에서 육군을 지원했고, 여순항 포위전에는 '''해군 육전 중포대'''가 참가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때에는 칭다오 공략전에 중포대를 참가시켰고, 함선 육전대와 6개 특별 육전대에 의한 독일령 남양 군도 점령 등에 종사했다. 2·26 사건 당시에는 요코스카 진수부 및 함정 승무원으로 편성된 육전대가 반란군에 대항하기 위해 동원되기도 했다.

의화단 운동에서는 포함 아타고에서 파견된 25명의 육전대가 농성전에서 활약했다. 1920년의 니콜라예프스크 사건에서는 전멸할 때까지 싸워 재류 일본인과 운명을 함께 했다. 제1차 상하이 사변에서는 상하이 육전대가 편성되어 대규모 전투에 투입되었다. 1932년에는 "해군 특별 육전대령"이 제정되어 상하이 해군 특별 육전대는 정식 상설 부대가 되었다.

2. 2. 러일 전쟁과 제1차 세계 대전

러일 전쟁에서 일본 제국 해군은 인천 상륙 작전 등 상륙 작전에서 육군을 지원했고, 여순항 포위전에는 '해군 육전 중포대'가 참가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때에는 칭다오 공략전에 중포대를 투입하고, 함선 육전대와 6개 특별 육전대로 독일령 남양 군도를 점령했다. 또한, 싱가포르에서 발생한 영국군 인도인 병사의 반란 진압에도 참여했다. 의화단 운동에서는 포함 아타고에서 파견된 25명의 육전대가 농성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920년의 니콜라옙스크 사건(니항 사건)에서는 육전대가 전멸할 때까지 싸워 재류 일본인과 운명을 함께 했다.

2. 3. 전간기 (1918년 ~ 1937년)

일본 제국 해군은 서양 제국의 해군 제도와 달리, 함선 조작을 담당하는 수병과 전투를 담당하는 해병대를 분리하지 않고, 필요에 따라 수병을 무장시켜 육상 전투에 투입하는 해군 육전대를 운용했다. 1876년 해병대가 폐지된 후, 1886년 "해군 육전대 개칙" 제정으로 해군 육전대가 육상 전투를 전담하게 되었다. 해군 육전대는 함정 승무원 중에서 임시로 편성되었으며, 진수부 등 육상 부대 인원으로 구성된 '''특별 육전대'''도 있었다.

해군 육전대는 세이난 전쟁에서 기동성을 발휘하여 진압에 공헌했고, 러일 전쟁에서는 인천 상륙 작전 등 육군을 지원했다. 여순 공성전에는 '''해군 육전 중포대'''가 참가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칭다오 공략전에 중포대를 투입하고, 남양 군도 점령과 싱가포르 반란 진압 등에 참여했다. 2·26 사건 당시에는 요코스카 진수부 및 함정 승무원으로 편성된 육전대가 반란군 진압을 위해 동원될 계획이었다.

의화단의 난 당시 포함 아타고에서 파견된 육전대가 농성전에 참여했고, 1920년 니콜라예프스크 사건에서는 전멸할 때까지 싸웠다. 제1차 상하이 사변에서는 상하이 육전대가 편성되어 대규모 전투에 투입되었고, 이를 계기로 1932년 "해군 특별 육전대령"이 제정되어 상설 부대가 되었다. 제2차 상하이 사변에서도 상하이 해군 특별 육전대를 중심으로 다수의 육전대가 전투를 벌였다.

2. 4.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

일본 제국 해군은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에서 육상 전투를 담당하는 해군 육전대를 운용했다. 제1차 상하이 사변에서는 상하이 육전대가 편성되어 전투를 치렀고, 1932년에는 상설 부대가 되었다. 제2차 상하이 사변에서도 상하이 해군 특별 육전대를 중심으로 다수의 육전대가 전투에 참여했다.

태평양 전쟁에서는 도서 및 국지 방위의 필요성으로 인해 특별 육전대 외에 '''경비대'''와 '''방위대''' 등의 육전대가 편성되었다. 해군 독자적인 공정 부대(낙하산 부대)와 전차 부대도 보유했다. 공정 부대는 1942년 1월 셀레베스 섬 메나도에서 일본 최초의 강하 작전을 실시했다. 종전 전에는 본토 결전을 위해 함정 부대 등의 대부분이 육전대로 개편되어 총 병력은 10만 명에 달했다.

태평양 전쟁에서 육전대의 주요 전투는 다음과 같다:

  • 여순 공방전 - 러일 전쟁. 해군 육전 중포대가 참가.
  • 니항 사건 - 러시아 내전. 교민 보호를 위해 전멸할 때까지 싸웠다.
  • 제1차 상하이 사변 / 제2차 상하이 사변 - 상하이 해군 육전대가 적은 병력으로 방어전에 성공했다.
  • 웨이크섬 전투 - 마이즈루 제2 특별 육전대 등이 해군 단독으로 상륙 작전을 실시, 점령에 성공했지만 큰 손해를 입었다.
  • 라비 전투(밀른 만 전투) - 구레 제3 및 제5 특별 육전대와 사세보 제5 특별 육전대 등이 투입되었으나, 오스트레일리아군・미군과의 교전 결과 큰 손해를 입고 패퇴했다.
  • 부나-고나 전투 - 요코스카 제5 특별 육전대를 중심으로 900명이 부나 방어전에 참가, 육군 부대와 함께 장기간 저항 끝에 전멸.
  • 라에-살라모아 전투 - 최종적으로 사라와켓 고개라고 불리는 철수전을 벌였다.
  • 뉴 조지아 섬 전투 - 훗날 철수에 성공.
  • 핀슈하펜 전투 - 해군 제85 경비대가 본래의 육전대 요원 없이 전투를 벌였다.
  • 타라와 전투 / 마킨 전투 - 제3 특별 근거지대와 사세보 제7 특별 육전대가 전멸.
  • 티니안 전투 - 제56 경비대가 전투를 전개.
  • 마닐라 전투 (1945년) - 마닐라 해군 방위대가 시가전을 전개.
  • 올목 만 강행 상륙(1944년) - 요코스카 해군 육전대의 특2식 내화정 10척과 육전병 약 400명이 상륙했지만, 큰 손해를 입었다.
  • 이오지마 전투 - 이오지마 경비대 외 항공대와 설영대를 개편하여 전투.
  • 오키나와 전투 - 오키나와 방면 근거지대 지휘 하의 육전대가 참가. 소총이 부족한 상황에서 전투했다.
  • 가라후토 전투
  • 슈무슈 섬 전투 - 제51, 제52 경비대가 특2식 내화정을 포함한 병력으로 소련군에 맞섰다.

2. 5. 종전과 해체

일본 제국 해군은 해전에서 적 함선에 대한 강행 이승 및 제압을 위해 해병대를 설치했으나 1876년에 폐지되었다. 이후 필요에 따라 일반 수병을 무장시켜 육상 전투에 투입하는 해군 육전대가 이를 대체했다. 1886년에는 "해군 육전대 개칙"이 제정되어 해군 육전대의 일반 규정이 마련되었다.

해군 육전대는 세이난 전쟁에서 기동력을 발휘하여 진압에 공헌했고, 러일 전쟁에서는 인천 상륙 작전 등에서 육군을 지원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칭다오 공략전에 참가하고, 독일령 남양 군도 점령 등에 종사했다. 2·26 사건 당시에는 요코스카 진수부 및 함정 승무원으로 편성된 육전대가 동원되어 반란군에 대응했다.

국제적으로 재외 공관 경비 및 자국민 보호에 해병대가 사용되었고, 일본은 의화단의 난, 니콜라예프스크 사건, 상하이 사변 등에서 해군 육전대가 활약했다. 특히, 제1차 상하이 사변을 계기로 1932년에는 "해군 특별 육전대령"이 제정되어 상하이 해군 특별 육전대가 정식 상설 부대가 되었다.

태평양 전쟁에서 전역이 확대됨에 따라, 도서 및 국지 방위의 필요성으로, 특별 육전대 외에 '''경비대'''와 '''방위대''' 등의 명칭으로 육전대가 잇따라 편성되었다. 또한, 해군 독자적인 공정 부대(낙하산 부대)와 전차 부대도 보유했다. 1942년 1월 셀레베스 섬 메나도에서 일본 최초의 강하 작전을 실시했다. 종전 전에는 본토 결전을 위해 함정 부대 등의 대부분이 육전대로 개편되었고, 총 병력은 10만 명에 달했다.

일본 해군의 육전대는 확충을 계속했지만, 미국 해병대처럼 육·해군으로부터 독립한 군종이 되지는 않았다. 태평양 전쟁 전에 해병대 부활 등이 제안되었지만 채택되지 않았고, 해군 내에서 육전대는 부차적인 임무로 여겨졌다.

3. 편제 및 부대

함정승무원인 수병을 중심으로 편성된 애드혹 부대이다.[4] 함, 전대, 함대마다 편성 계획을 정해두었으며, 1935년 경의 연합함대 소속 함의 예로 들면 구축함의 경우 각 함 1개 분대(10명 미만), 순양함에서 1~2개 소대(4~8개 분대=40~80명), 전함에서 1개 중대(4개 소대=약 160명)가 표준적인 편성이었다.[4] 이들을 묶어 전대에서 1개 대대, 함대에서 수 개 대대로 이루어진 연대급의 "연합 육전대"를 편성했다. 편성 규모는 상황에 따라 변경되었으며, 1943년 경의 제2함대 산하의 수뢰전대에서는, 제1편성(528명)부터 제3편성(1268명)까지 3가지 패턴의 연합 육전대가 규정되어 있었다.[4] 단함 단위의 부대는 함명을 붙여 "군함 나가토 육전대", 연합 육전대의 경우 "제1함대 연합 육전대"와 같은 호칭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초기 해군 육전대는 총대와 포대로 구성되며, 보병에 해당하는 총대가 기간이었다. 중기관총 장비의 기총대가 상황에 따라 편성되었고, 부속대라고 총칭되는 공작대·통신대·의무대·주계대 등의 지원 조직이 수반되었다. 총대·기총대는 전문적인 육전 훈련을 받은 포술과 인원을 중핵으로, 부속대는 공작병·통신병 등의 각 전문 병과 인원으로 구성되었다.[4]

함대와 함께 신속하게 파견되어 경비 임무를 수행하는 데 적합했지만, 본격적인 지상 전투 훈련을 받지 않아 전력이 강력하다고 보기 어려웠다. 또한, 육전대 상륙 중에는 함내 배치 인원이 부족하여 함의 작전 행동에 지장이 생길 우려가 있었고, 함선 승무원으로서 고도의 기술을 습득한 수병을 소모할 우려도 있었다.[5]

태평양 전쟁 중에는, 침몰한 함의 승무원이 재편성되어 육전대로서 지상전에 투입된 경우가 있는데, 구 승함마다 소대·중대를 조직하는 경우가 많았다.

의화단 사건에 출동한 육전대


=== 특별 육전대 (상설 부대) ===

일본 제국 해군의 육상 부대는 여러 부대로 구성되었는데, 그중 특별육전대는 함선 승무원이 아닌 진수부의 해병단 등 육상 부문의 인원을 기반으로 편성된 육전대를 말한다.[5] 함선 육전대를 장기간 운용하는 데에는 지장이 있기 때문에, 보다 장기간의 육상 전투에 대처하기 위해 편성되었다.[5]

특별육전대는 진수부의 해병단에서 훈련된 전투부대로 각 부대는 진수부 소속이었다. 이따금 2개 이상의 특별육전대를 묶어 여단급 부대인 連合特別陸戦隊일본어를 편성하였다. 중일 전쟁부터 태평양 전쟁(대동아 전쟁)에 걸쳐, 후술할 상하이 해군 특별육전대를 제외하고는 "특설 함선 부대령"(1936년 개정)에 의거하여 편성되었으며, 정식 명칭은 '''특설 진수부 특별육전대'''라고 불렀다. 임시로 편성되는 특설 부대의 명목이었지만, 중국 정세의 긴박함으로 육전대의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사실상의 상설 부대로서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기에는 상륙 작전이나 점령지의 수비를 담당하는 전문 육전대로 운용되었다. 태평양 전쟁 중에는 목표 지점 점령 후, 고정적인 경비대나 근거지대로 개편된 경우도 많다.

특설 진수부 특별육전대는 소속된 진수부 등의 명칭과 번호를 조합하여 "요코스카 진수부 제3특별육전대"(요코3특) 등의 부대명으로 불린다. 사령관은 중좌가 많다. 특설 함선 부대 정원령에 따른 모식적인 편성은 본부 중대와 총대 2개 중대(각 소총 4개 소대와 기관총 소대) 및 특과대로 구성된 보병 대대에 해당하는 편성이지만, 실제 편성은 상당히 다양하다. 태평양 전쟁 초기에는 2~3개 소총 중대와 1~2개 기관총 중대, 포대를 갖춘 1000~1500명 규모의 예가 많았다. 그 중에는 포병대나 전차대, 해군 공정부대로서의 편성을 갖는 것도 있었다. 구레 진수부 제101특별육전대로 대표되는 "S특별육전대"라는 비밀 명칭을 부여받은 특수 부대도 만들어졌다. 특별육전대의 경우에도, 여러 부대가 모이거나, 또는 방공대 등과 조합되어 "연합 특별육전대"가 되는 경우가 있다.

특별육전대는 전문 지상 전투 부대로서 전차나 기관단총 등 충실한 장비를 보유하고 있으며, 육전대 중에서도 높은 숙련도를 자랑하는 정예 부대로 여겨졌다. 다만, 젊고 건강한 현역병과 지원병은 함선 및 항공대에 우선 배분되었기 때문에, 특별육전대 배속은 예비역 등 고령자나 신체 능력이 떨어지는 자가 중심이 되었으며, 인원의 소질 면에서는 우수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예를 들어, 중일 전쟁 중에 편성되어 태평양 전쟁에서도 암본 전투 등에 참가한 구레 제1특별육전대의 경우, 나이 37세의 다이쇼 12년 징병자까지 섞여 있었다.[6] 라비 전투에 참가한 특별육전대도 30세 이상의 노병이 많았다.

상하이 해군 특별육전대는 진수부 소속이 아닌 상하이에 주둔하기 위해 편성된 관아인 상설 부대이다. 1927년부터 상하이에 주둔하고 있던 육전대(진수부에서 파견된 특별육전대 2개 대대 및 전차대 등)를, 제1차 상하이 사변이 발발한 1932년에 독립된 특별육전대로 정리했다. 사령관은 소장 또는 대좌이며, 여러 대대 편성으로 특별육전대에 비해 대규모이다. 인원은 각 진수부에서 파견되었다.

=== 기타 부대 ===

함정승무원인 수병을 중심으로 편성된 애드혹 부대인 '''해군육전대'''(海軍陸戦隊 ( *Kaigun-rikusen-tai* ))가 있었다. 해안 경비대라고도 불렸으며, 해군 보병으로 육상에서 임시로 사용되었다.

'''일본 해군 특별 육전대'''(海軍特別陸戦隊 ( *Kaigun-tokubetsu-rikusen-tai* ))는 함정승무원을 중심으로 편성되는 해군육전대와는 달리, 진수부의 해병단에서 훈련된 전투부대로 각 부대는 진수부 소속이었다. 이따금 2개 이상의 특별육전대를 묶어 여단급 부대인 '''연합특별육전대'''(連合特別陸戦隊 ( *Rengō-tokubetsu-rikusen-tai* ))를 편성하였다.

'''설영대'''(設営隊 ( *Setsuei-tai* ))는 해군이 주둔하고 있는 점령지에 설치한 기지에서 기반 시설인 막사, 벙커, 활주로, 보급창을 건설하거나 수리하는 공병부대였다. 대부분의 대원은 고용된 민간이거나 비무장이었다. 설영대는 종종 현지 노동력을 활용했으며, 이들의 복무는 의무였다.

'''근거지대'''(根拠地隊 ( *Konkyochi-tai* ))는 일본 내지가 아닌 외지로 분류되는 식민지나 점령지에서의 행정 및 전술 대응을 맡고 있다. 근거지대는 지역이나 부여된 기능에 따라 총원 250~1천5백명의 부대로 편성되는데, 해상부대를 포함할 수 있다. 근거지를 임시 해군 기지로 삼아 방어, 관리, 운영하는 조직이다. 근거지대는 정식 명칭이 특설 근거지대이며, 특설 함선 부대령에 의거하여 편성된다. 한편, 특별 근거지대는 특별 근거지대령에 의거한 것으로, 특근(特根)으로 약칭된다. 임무는 유사하지만 편성이 다르며, 전자는 사령관 아래 참모장·참모·부관 등이 배치된 함대 사령부와 유사하고, 후자는 사령관 아래 부장·과장·분대장 등이 배치된 군함과 유사한 조직 형태이다.

'''경비대'''(警備隊 ( *Keibi-tai* ))는 일본 제국 해군의 육상시설을 파괴공작에서 지키기 위한 총원 1백~1천5백명의 수비대이다. 부대는 근거지대와 특별근거지대 양쪽에 편성되었다. 전쟁 말기에 해병단에서 편성한 경비대는 육상경비대로 구분하였다. 경비대는 점령지의 방위 및 치안 임무를 위해 편성된 전문 육상 부대이다. 특별 육전대와 달리 기동적인 운용은 상정되지 않았다. 순수한 육전대인 육상경비과(육경과)와 연안용 소형정을 보유한 수상경비과(수경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규모는 중대에서 대대 상당으로 다양했고, 사령관은 중좌 또는 대좌가 일반적이었다. 태평양 전쟁(대동아 전쟁) 중에는 특별 육전대를 개편하는 등 다수가 편성되었으며, 근거지대(후술) 및 각 함대의 지휘를 받았다. 경우에 따라서는 약간의 함정 부대가 부속되거나, 항무 관리를 담당하여 소규모 근거지대와 같은 기능을 수행하기도 했다.

'''방비대'''(防備隊 ( *Bōbi-tai* ))는 경비대에 좀더 많은 총원 250~2천명의 수비대로 중요도가 높은 해군의 전략 시설을 지킨다. 일부 방비대는 포대와 일본 해역에 뿌려진 기뢰밭을 통제한다.

1941년 캄란 만에서 상륙 훈련을 실시하는 제81경비대


'''방공대'''(防空隊 ( *Bōkū-tai* ))는 방공부대로, 고사포 8문을 가진 갑(甲)편제, 대공기총 24문을 가진 을(乙)편제, 고사포 4문 대공기총 12문을 쓰는 병(丙)편제로 3종류로 나뉘었다. 근거지대, 특별근거지대, 특별육전대, 경비대에 편성되었다. 지상 전투가 아닌 기지의 방공을 임무로 하는 고사포 병부대이다.

괌 섬에 배치되었던 해군 25mm 대공 기총


'''고사포중대'''(高射砲中隊 ( *Koshaho Chutai* ))는 주요시설을 방어하기 위해 고사포를 운용하는 40~50명의 소규모로 방비대에 편성되는 방공작전부대이다.

'''통신대'''(通信隊 ( *Tsūshin-tai* ))는 통신부대로, 총원 100~2천명 사이에 편성되며, 점령지의 기지와 해군 함대 간의 통신망을 설립하고 유지한다.

'''특경대'''( *Tokkeitai* )는 해군 헌병 부대로 해군 시설 및 점령 지역에서 일반적인 헌병 기능을 수행했으며, 보안, 정보 수집 및 방첩과 관련하여 일본 제국 육군의 헌병대, 경시청 민간 경찰 및 특고 비밀 부대와 협력했다.

'''해병단'''(해병단/海兵団일본어)은 진수부에서 창설하여 운영하였던 해군의 사병, 하사관, 사관 신병훈련부대였다. 해군육전대의 수륙양용전 훈련도 도맡았었고, 각 진수부에 창설되었다.

3. 1. 해군 육전대 (임시 편성)

함정승무원인 수병을 중심으로 편성된 애드혹 부대이다.[4] 함, 전대, 함대마다 편성 계획을 정해두었으며, 1935년 경의 연합함대 소속 함의 예로 들면 구축함의 경우 각 함 1개 분대(10명 미만), 순양함에서 1-2개 소대(4-8개 분대=40-80명), 전함에서 1개 중대(4개 소대=약 160명)가 표준적인 편성이었다.[4] 이들을 묶어 전대에서 1개 대대, 함대에서 수 개 대대로 이루어진 연대급의 "연합 육전대"를 편성했다. 편성 규모는 상황에 따라 변경되었으며, 1943년 경의 제2함대 산하의 수뢰전대에서는, 제1편성(528명)부터 제3편성(1268명)까지 3가지 패턴의 연합 육전대가 규정되어 있었다.[4] 단함 단위의 부대는 함명을 붙여 "군함 나가토 육전대", 연합 육전대의 경우 "제1함대 연합 육전대"와 같은 호칭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초기 해군 육전대는 총대와 포대로 구성되며, 보병에 해당하는 총대가 기간이었다. 중기관총 장비의 기총대가 상황에 따라 편성되었고, 부속대라고 총칭되는 공작대·통신대·의무대·주계대 등의 지원 조직이 수반되었다. 총대·기총대는 전문적인 육전 훈련을 받은 포술과 인원을 중핵으로, 부속대는 공작병·통신병 등의 각 전문 병과 인원으로 구성되었다.[4]

함대와 함께 신속하게 파견되어 경비 임무를 수행하는 데 적합했지만, 본격적인 지상 전투 훈련을 받지 않아 전력이 강력하다고 보기 어려웠다. 또한, 육전대 상륙 중에는 함내 배치 인원이 부족하여 함의 작전 행동에 지장이 생길 우려가 있었고, 함선 승무원으로서 고도의 기술을 습득한 수병을 소모할 우려도 있었다.[5]

태평양 전쟁 중에는, 침몰한 함의 승무원이 재편성되어 육전대로서 지상전에 투입된 경우가 있는데, 구 승함마다 소대·중대를 조직하는 경우가 많았다.

3. 2. 특별 육전대 (상설 부대)

일본 제국 해군의 육상 부대는 여러 부대로 구성되었는데, 그중 특별육전대는 함선 승무원이 아닌 진수부의 해병단 등 육상 부문의 인원을 기반으로 편성된 육전대를 말한다.[5] 함선 육전대를 장기간 운용하는 데에는 지장이 있기 때문에, 보다 장기간의 육상 전투에 대처하기 위해 편성되었다.[5]

특별육전대는 진수부의 해병단에서 훈련된 전투부대로 각 부대는 진수부 소속이었다. 이따금 2개 이상의 특별육전대를 묶어 여단급 부대인 連合特別陸戦隊일본어를 편성하였다. 중일 전쟁부터 태평양 전쟁(대동아 전쟁)에 걸쳐, 후술할 상하이 해군 특별육전대를 제외하고는 "특설 함선 부대령"(1936년 개정)에 의거하여 편성되었으며, 정식 명칭은 '''특설 진수부 특별육전대'''라고 불렀다. 임시로 편성되는 특설 부대의 명목이었지만, 중국 정세의 긴박함으로 육전대의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사실상의 상설 부대로서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기에는 상륙 작전이나 점령지의 수비를 담당하는 전문 육전대로 운용되었다. 태평양 전쟁 중에는 목표 지점 점령 후, 고정적인 경비대나 근거지대로 개편된 경우도 많다.

특설 진수부 특별육전대는 소속된 진수부 등의 명칭과 번호를 조합하여 "요코스카 진수부 제3특별육전대"(요코3특) 등의 부대명으로 불린다. 사령관은 중좌가 많다. 특설 함선 부대 정원령에 따른 모식적인 편성은 본부 중대와 총대 2개 중대(각 소총 4개 소대와 기관총 소대) 및 특과대로 구성된 보병 대대에 해당하는 편성이지만, 실제 편성은 상당히 다양하다. 태평양 전쟁 초기에는 2~3개 소총 중대와 1~2개 기관총 중대, 포대를 갖춘 1000~1500명 규모의 예가 많았다. 그 중에는 포병대나 전차대, 해군 공정부대로서의 편성을 갖는 것도 있었다. 구레 진수부 제101특별육전대로 대표되는 "S특별육전대"라는 비밀 명칭을 부여받은 특수 부대도 만들어졌다. 특별육전대의 경우에도, 여러 부대가 모이거나, 또는 방공대 등과 조합되어 "연합 특별육전대"가 되는 경우가 있다.

특별육전대는 전문 지상 전투 부대로서 전차나 기관단총 등 충실한 장비를 보유하고 있으며, 육전대 중에서도 높은 숙련도를 자랑하는 정예 부대로 여겨졌다. 다만, 젊고 건강한 현역병과 지원병은 함선 및 항공대에 우선 배분되었기 때문에, 특별육전대 배속은 예비역 등 고령자나 신체 능력이 떨어지는 자가 중심이 되었으며, 인원의 소질 면에서는 우수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예를 들어, 중일 전쟁 중에 편성되어 태평양 전쟁에서도 암본 전투 등에 참가한 구레 제1특별육전대의 경우, 나이 37세의 다이쇼 12년 징병자까지 섞여 있었다.[6] 라비 전투에 참가한 특별육전대도 30세 이상의 노병이 많았다.

상하이 해군 특별육전대는 진수부 소속이 아닌 상하이에 주둔하기 위해 편성된 관아인 상설 부대이다. 1927년부터 상하이에 주둔하고 있던 육전대(진수부에서 파견된 특별육전대 2개 대대 및 전차대 등)를, 제1차 상하이 사변이 발발한 1932년에 독립된 특별육전대로 정리했다. 사령관은 소장 또는 대좌이며, 여러 대대 편성으로 특별육전대에 비해 대규모이다. 인원은 각 진수부에서 파견되었다.

3. 3. 기타 부대

함정승무원인 수병을 중심으로 편성된 애드혹 부대인 '''해군육전대'''(海軍陸戦隊 ( *Kaigun-rikusen-tai* )가 있었다. 해안 경비대라고도 불렸으며, 해군 보병으로 육상에서 임시로 사용되었다.

'''일본 해군 특별 육전대'''(海軍特別陸戦隊 ( *Kaigun-tokubetsu-rikusen-tai* ))는 함정승무원을 중심으로 편성되는 해군육전대와는 달리, 진수부의 해병단에서 훈련된 전투부대로 각 부대는 진수부 소속이었다. 이따금 2개 이상의 특별육전대를 묶어 여단급 부대인 '''연합특별육전대'''(連合特別陸戦隊 ( *Rengō-tokubetsu-rikusen-tai* ))를 편성하였다.

'''설영대'''(設営隊 ( *Setsuei-tai* ))는 해군이 주둔하고 있는 점령지에 설치한 기지에서 기반 시설인 막사, 벙커, 활주로, 보급창을 건설하거나 수리하는 공병부대였다. 대부분의 대원은 고용된 민간이거나 비무장이었다. 설영대는 종종 현지 노동력을 활용했으며, 이들의 복무는 의무였다.

'''근거지대'''(根拠地隊 ( *Konkyochi-tai* ))는 일본 내지가 아닌 외지로 분류되는 식민지나 점령지에서의 행정 및 전술 대응을 맡고 있다. 근거지대는 지역이나 부여된 기능에 따라 총원 250~1천5백명의 부대로 편성되는데, 해상부대를 포함할 수 있다. 근거지를 임시 해군 기지로 삼아 방어, 관리, 운영하는 조직이다. 근거지대는 정식 명칭이 특설 근거지대이며, 특설 함선 부대령에 의거하여 편성된다. 한편, 특별 근거지대는 특별 근거지대령에 의거한 것으로, 특근(特根)으로 약칭된다. 임무는 유사하지만 편성이 다르며, 전자는 사령관 아래 참모장·참모·부관 등이 배치된 함대 사령부와 유사하고, 후자는 사령관 아래 부장·과장·분대장 등이 배치된 군함과 유사한 조직 형태이다.

'''경비대'''(警備隊 ( *Keibi-tai* ))는 일본 제국 해군의 육상시설을 파괴공작에서 지키기 위한 총원 1백~1천5백명의 수비대이다. 부대는 근거지대와 특별근거지대 양쪽에 편성되었다. 전쟁 말기에 해병단에서 편성한 경비대는 육상경비대로 구분하였다. 경비대는 점령지의 방위 및 치안 임무를 위해 편성된 전문 육상 부대이다. 특별 육전대와 달리 기동적인 운용은 상정되지 않았다. 순수한 육전대인 육상경비과(육경과)와 연안용 소형정을 보유한 수상경비과(수경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규모는 중대에서 대대 상당으로 다양했고, 사령관은 중좌 또는 대좌가 일반적이었다. 태평양 전쟁(대동아 전쟁) 중에는 특별 육전대를 개편하는 등 다수가 편성되었으며, 근거지대(후술) 및 각 함대의 지휘를 받았다. 경우에 따라서는 약간의 함정 부대가 부속되거나, 항무 관리를 담당하여 소규모 근거지대와 같은 기능을 수행하기도 했다.

'''방비대'''(防備隊 ( *Bōbi-tai* ))는 경비대에 좀더 많은 총원 250~2천명의 수비대로 중요도가 높은 해군의 전략 시설을 지킨다. 일부 방비대는 포대와 일본 해역에 뿌려진 기뢰밭을 통제한다.

'''방공대'''(防空隊 ( *Bōkū-tai* ))는 방공부대로, 고사포 8문을 가진 갑(甲)편제, 대공기총 24문을 가진 을(乙)편제, 고사포 4문 대공기총 12문을 쓰는 병(丙)편제로 3종류로 나뉘었다. 근거지대, 특별근거지대, 특별육전대, 경비대에 편성되었다. 지상 전투가 아닌 기지의 방공을 임무로 하는 고사포 병부대이다.

'''고사포중대'''(高射砲中隊 ( *Koshaho Chutai* ))는 주요시설을 방어하기 위해 고사포를 운용하는 40~50명의 소규모로 방비대에 편성되는 방공작전부대이다.

'''통신대'''(通信隊 ( *Tsūshin-tai* ))는 통신부대로, 총원 100~2천명 사이에 편성되며, 점령지의 기지와 해군 함대 간의 통신망을 설립하고 유지한다.

'''특경대'''( *Tokkeitai* )는 해군 헌병 부대로 해군 시설 및 점령 지역에서 일반적인 헌병 기능을 수행했으며, 보안, 정보 수집 및 방첩과 관련하여 일본 제국 육군의 헌병대, 경시청 민간 경찰 및 특고 비밀 부대와 협력했다.

'''해병단'''(해병단/海兵団일본어)은 진수부에서 창설하여 운영하였던 해군의 사병, 하사관, 사관 신병훈련부대였다. 해군육전대의 수륙양용전 훈련도 도맡았었고, 각 진수부에 창설되었다.

4. 장비

일본 제국 해군은 장갑 부대를 운용하여 비커스 크로슬리 장갑차, 스미다 P형 장갑차, 93식 장갑차, 94식 전차, 97식 Te-Ke 전차, 95식 경전차, 89식 중전차, 97식 중전차, 97식 신호토 치하 중전차, 2식 Ka-Mi 수륙양용 전차 등을 특별 육전대에 종속시켰다.

사이판의 요코스카 제1 특별육전대 2식 Ka-Mi


93식 장갑차


소총이나 기관총, 척탄통, 94식 37mm포 등의 주요 화기는 육군과 공통이었다. 95식 경전차 등의 장갑 전투 차량도 육군과 공용으로 사용했다. 사양을 변경한 35년식 해군총(육군 30년식 보병총을 개량), 단 12cm 자주포(97식 중전차를 개량)와 같은 예도 있다. 해군 독자적인 병기로는 베르그만 기관단총(정식 명칭은 "자동 권총")이나 93식 장갑 자동차 등의 차륜 장갑차와 같이 중국 방면에서 열세한 병력으로 시가지전에 대비한 것이 특징적이며, 2식 내화정 이하의 수륙양용 전차를 개발했고, 또한 96식 25mm 기총 등 육상에 양륙한 함재 화기를 장비하는 경우도 많았다. 특별 육전대의 장비 화기를 일본 육군의 동 규모 부대와 비교하면, 대구경 기관포나 장갑 전투 차량 등이 비교적 충실했다. 반면, 정작 중요한 소총이나 경·중기관총은 만성적으로 부족하여 육군에서 이식 소총 등의 잉여 장비를 제공받거나, 라바울 요새에서는 현지의 제8방면군 사령관(당시)이마무라 히토시 대장의 배려로 육군 재고의 신품 소총을 다수 마련했다.

병의 복장은 함상 근무와 같은 세일러복이었지만, 야전용으로는 색채가 너무 눈에 띄었기 때문에, 러일 전쟁 시나 상하이 사변 시에는 사관 하사관과 함께 임시로 카키색으로 염색하는 등의 조치가 취해졌다. 그 후, 1933년에 갈청색이라고 칭하는 녹색의 육전대용 피복이 채용되었다. 1942년에는 육전복과 유사한 갈청색 피복이 약장으로 육전대 이외의 해군 부대에서도 널리 사용되게 되었고, 1944년 8월에는 제3종 군장이라고 칭하며 상용화, 대전 말기인 1945년에는 해군 전체의 육전대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육전복을 통합하게 되었다. 제1차 상하이 사변 이후 사용하게 된 헬멧 (90식 철모)은 기본적으로 육군과 같았지만, 물통 등 기타 장비는 해군 독자적인 것이 많다. 다만, 장비의 대부분은 육군과 같은 장거리 행군 등의 본격적인 야전을 상정한 설계가 아니었던 데다, 본격적인 훈련이 충분하지 않은 대원도 많았기 때문에, 전투에서는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고 한다.

특별 육전대의 일부로 설치된 공정 부대용으로는, 무기나 복장에서 특수한 것이 있다 (일본 해군 공정 부대#장비 참조).

상륙정으로는, 제2차 세계 대전기에는 육군이 개발한 대발이나 소발을 특형 운화선이라 칭하며 장비한 부대가 있었다. 태평양 전쟁 중에는 미 해병대의 LVT에 해당하는 수륙양용차인 2식 내화정이 소수 배치되었다. 또한, 해군 육전대의 편제 내는 아니지만, 보다 대형인 양륙함으로, 태평양 전쟁 직전에 초계정 (구식 구축함)을 개조하여 대발 발진용 슬로프 등을 추가한 외에, 전차 양륙함형의 제101호형 수송함을 건조했다.

식별 마크로서는 "닻"의 의장이 헬멧(철모)의 모장 등 각소에 사용되었으며, 차량에는 군함기와 같은 욱일기가 그려져 있는 경우가 많다. 부대기로는 군함기를 사용한다.

5. 교육

일본 제국 해군에서 하사관과 사병에 대한 육전 교육은 해병단 기초 교육으로 실시되었으나, 소총 사격과 행군 등 초보적인 수준이었다. 졸업 즈음에는 츠지도 연병장 등에서 3일간 야외 육전 훈련이 있었지만[9], 실전 기술보다는 조직 규율 및 정신 훈련에 중점을 두었다. 본격적인 육전 교육은 해군 포술 학교의 보통과 및 고등과 연습생 과정에서 이루어졌으며, 보통과 연습생은 교과 시수의 1/3 정도를 육전에 할당받았다. 고등과 연습생은 준사관인 병조장 양성 과정으로서 소대장급 육전 지휘까지 교육받았다[10]。 포술 학교 졸업 즈음에는 약 1주일간 육전 훈련이 실시되었다. 1941년에는 육전·대공 전문 학교인 타테야마 포술 학교가 설치되었다[11]

사관의 경우, 해군 병학교와 포술 학교에서 중대 이하 소부대 운용을 배웠다. 해군 병학교 62기(1934년 11월 졸업)까지는 포술 학교에서 하사관과 사병을 교도 부대로 활용하여 실전 지휘 훈련을 실시했다[12]。 포술 학교 고등과 학생은 대수상·대공 포술과 함께 육전 전문 교육을 받고 대대급 육전 지휘를 배웠다. 1918년 이후에는 고등과 졸업생을 대상으로 육전 전공도 설치되어 소수지만 육전 전공 학생이 존재했다. 1942년에는 일본 해군 전체에서 7명이 육전 전공 수료자였다. 태평양 전쟁 중에는 타테야마 포술 학교에서 병과 예비 학생 대상 육전·육상 대공 전수자 대량 양성이 이루어졌다. 포술 학교 육전술 담당 교관과 육전 전공 학생은 육군 보병 학교 등에 파견되어 교육을 받기도 했다. 마츠모토 타다스케(해병 32기), 오타 미노루(해병 41기), 야스다 요시타츠(해병 46기) 등 육전대 전문가로 여겨진 해군 사관도 있었다[13]

특별 육전대 요원은 소총에서 전차까지 각종 무기 취급 교육을 받았다. 대발을 이용한 상륙 작전 훈련도 실시되었으나, 각 특별 육전대(대대 규모)별 운용 훈련에 그쳤고, 대규모 부대 행동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훈련 기간은 태평양 전쟁 초기의 부대에서는 1개월 정도의 즉성 교육이었다[6]

타테야마 포술 학교에는 화학 무기과도 설치되어 화학전 교육도 실시되었다.

6. 한국과의 관계

7. 등장 작품


  • 상하이 육전대: 상하이 특별 육전대를 무대로 한 전쟁 영화이다.
  • 애니멘터리 결단: 제10화 「해군 낙하산 부대」가 메나도 강하 작전을 소재로 하고 있다.
  • 콕피트 레전드 - 「HARD METAL」: 「더 콕피트」 시리즈, 「전장 만화 시리즈」 속편인 마츠모토 레이지의 작품이다. 100식 기관단총을 장비한 해군 육전대의 가공의 비닉 부대 (해군 코만도)가 등장한다.
  • 타이거 육전대: 해군 육전대 타이거 별동대, 통칭 「타이거 육전대」가 전쟁 말기의 중국 대륙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그린 모치즈키 미키야의 액션 만화이다.
  • 모모타로 바다의 신병: 해군 육전대 낙하산 부대의 메나도 강하 작전을 소재로 한 해군성 제작의 국책 애니메이션 영화이다.
  • 유령 함장 - 「하얀 깃발」: 미즈키 시게루의 만화 작품이다.(4480027572/ISBN2일본어 978-4480027573/ISBN2일본어
  • 오키나와현에 실재하는 아투크 섬과는 다른 가공의 섬이다./The Zombie Survival Guide}}: 좀비가 존재하는 세계에서 쓰여진 좀비 대책 매뉴얼이라는 설정의 책이다. 제7장 「좀비 습격 기록」에 등장한다. 1942년에 캐롤라인 제도 아투크 섬{{Efn2영어으로 상륙한 제국 해군 육전대와 동 섬에서 육전대가 조우한 좀비와의 가공의 전투가 기록되어 있다.
  • 내지로 잘 부탁해: 구쇼 주란에 의한 1944년의 작품이다.(4309413854/ISBN2일본어 978-4309413853/ISBN2일본어

참조

[1] 웹사이트 HyperWar: Japanese Naval Ground Forces (Know Your Enemy) https://www.ibiblio.[...]
[2] 간행물 日本海軍100のトリビア 海人社 2013
[3] 문서 『海軍 第12巻』、161頁
[4] 문서 雨倉(2008年)、281-283頁
[5] 문서 雨倉(2008年)、284頁
[6] 문서 雨倉(2008年)、288-289頁
[7] 서적 海軍軍戦備(2)開戦以後 朝雲新聞社 1975
[8] 뉴스 豊岡・城崎は焦土と化す、救援隊続々と到着 大阪毎日新聞 1925-05-24
[9] 문서 雨倉(2008年)、19頁
[10] 문서 雨倉(2008年)、286頁
[11] 문서 雨倉(2008年)、102頁
[12] 문서 雨倉(2007年)、33-34頁
[13] 문서 雨倉(2007年)、85-89頁
[14] 서적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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