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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숙 (출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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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진숙은 1912년생으로, 한국 출판계의 1세대 출판인이다. 그는 1945년 을유문화사를 창립하여 사장으로 취임, 어려운 시기에도 한국 문학 발전에 기여했다. 특히, 한글 학회와 협력하여 10년 만에 '조선말 큰사전'을 완간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1961년 서울시문화상, 1970년 국민훈장 동백장, 1997년 금관문화훈장 등을 수훈했으며, 60여 년간 출판 외길을 걸으며 한국 출판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2008년 9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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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숙 (출판인)
기본 정보
정진숙 사진
정진숙
출생1931년 6월 20일
사망2023년 12월 24일 (92세)
직업출판인
기업인
학력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
배우자장충식
자녀3남
부모아버지 정재호, 어머니 김유순
경력
주요 경력계몽사 사장
대한출판문화협회 회장
한국출판연구소 이사장
학교법인 단국대학 이사장
천안 단국대학교 이사장
수상
수상 내역보관문화훈장
은관문화훈장

2. 생애

정진숙은 1912년 11월 5일(음력 9월 27일) 경기도 화성군 팔탄면 월문리 갈곡부락에서 태어났으며, 원적지는 충청남도 천안군이었다.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 정현모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고려 보윤 정지원의 후손으로, 17대조 정난종세조 때 출세하여 집안을 일으켰다. 16대조 정광필은 중종 때 의정부영의정을 지냈고, 14대조 정유길의정부좌의정을 지냈다.

1920년 반월보통학교에 입학, 1921년 천원군 목천공립보통학교로 전학했다가 화성군 무천소학교로 다시 전학했다. 1929년 무천소학교 졸업 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응시했으나 불합격, 중동고등학교에 진학했다가 1개월 만에 중퇴하고 1930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1930년 휘문고등학교 2학년 재학 중 집안의 강요로 천안군수 딸 조신숙과 결혼했다. 아내를 경성으로 데려와 근화학교에 보내고 학비를 댔다.

1934년 휘문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보성전문학교 이재학과에 진학했다. 1935년 경성제국대학 시험을 준비했으나 건강 악화로 실패하고, 10월 자퇴 후 고향에서 요양했다.

1945년 8월 해방 후 1945년 12월 1일 민병도, 조풍연, 윤석중과 함께 을유문화사를 창립하였다. 초대 사장은 민병도에게 양보하고 정진숙은 을유문화사 전무이사가 되었다. 출판업에 뛰어든 계기는 친족이었던 학자 위당 정인보의 권고 때문이었다.[3] 1947년 4월부터 1972년 3월까지는 휘문의숙 재단 이사를 겸임하였다.

1950년 6.25 전쟁으로 동인들이 실종되거나 월북한 뒤 을유문화사의 내분을 수습하고 대표직을 맡아서 회사를 경영하게 되었다. 정인보가 강조한 “우리말과 우리글을 소생시키고 부흥시켜 우리 고유의 민족문화를 꽃피우자”는 창립 취지에 따라, 해방 직후 열악한 출판 환경 속에서도 책을 꾸준히 펴냈다.[3]

1952년 10월 을유문화사 대표이사 겸 사장에 취임하였다. 이후 문교부의 정책 자문위원회 자문위원, 1956년 8월 한국검인정교과서 사장에 선임되었다. 1955년부터 을유문화사에 외국 영업부를 신설하여 외국 서적의 국내 번역과 국내 서적의 외국어 번역 작업을 추진하였다. 그는 <조선문화총서>, <대학총서>, <박물관총서> 등 인문학, 사회과학 계열 총서와 <큰사전>, <한국학 대백과사전> 등 사전류 발간을 추진하였다. 을유문고를 발행하여 대한민국 건국 이후 현암사의 현암문고와 함께 문고판 서적의 확산과 인문학 등의 국내 소개에도 기여했다.

1959년 미국 국무성 초청으로 미국과 유럽을 시찰하고 귀국하였다. 1960년 3월 한국검인정교과서 발행인협회 이사, 1961년 8월 국정교과서주식회사 사장에 취임하였다. 1961년부터 1965년까지 사단법인 대한출판문화협회 회장을 겸임하였다.

1972년 2월부터 사단법인 한국출판금고 이사장을 맡아보았다. 1974년 2월 사단법인 대한출판문화협회 명예회장에 선출되었다.

1998년 2월 정진숙은 출판저널 발행인직과 한국출판금고 이사장직에서 물러났다.[6] 2005년 12월 1일 파주시 산남동에 파주출판단지가 개설되자, 파주출판도시에서 을유문화사 창사 60주년 기념 전시회를 개최하였다. 이때 그를 기념하여 파주출판문화산업단지 입구에 정진숙의 아호를 딴 은석교(隱石橋)가 건립되었다.

한국출판연구소 재단 이사, 1999년 7월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이사, 1999년 9월 한국박물관회 상임고문을 역임했다. 2008년 8월 22일 서울 평창동 자택에서 노환과 위암으로 사망했다.[2]

2. 1. 생애 초반 (1912년 ~ 1945년)

정진숙은 1912년 11월 5일(음력 9월 27일) 경기도 화성군 팔탄면 월문리 갈곡부락에서 태어났으며, 원적지는 충청남도 천안군이었다. 아버지는 정순모, 어머니는 풍양 조씨였다. 어려서 화성군 매송면 야목리 외가에서 성장하였으나,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 정현모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고려 보윤 정지원의 후손으로, 17대조 정난종세조 때 출세하여 집안을 일으켰다. 16대조 정광필은 중종 때 의정부영의정을 지냈고, 14대조 정유길의정부좌의정을 지냈다.

생부에게서는 4남 2녀, 양부에게서는 3남이 태어났다.

1920년 반월보통학교에 입학, 1921년 큰아버지 댁으로 가면서 천원군 목천공립보통학교로 전학했다가 화성군 무천소학교로 다시 전학했다. 1929년 무천소학교 졸업 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응시했으나 불합격, 중동고등학교에 진학했다가 1개월 만에 중퇴하고 1930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1930년 휘문고등학교 2학년 재학 중 집안의 강요로 천안군수 딸 조신숙과 결혼했다. 아내를 경성으로 데려와 근화학교에 보내고 학비를 댔다.

1934년 휘문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보성전문학교 이재학과에 진학했다. 1935년 경성제국대학 시험을 준비했으나 건강 악화로 실패하고, 10월 자퇴 후 고향에서 요양했다.

2. 1. 1. 출생과 가계

은석 정진숙은 1912년 11월 5일(음력 9월 27일) 경기도 화성군 팔탄면 월문리 갈곡부락에서 정순모(鄭順謨)와 풍양 조씨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원적지는 충청남도 천안군이었다. 어려서 화성군 매송면 야목리 외가에서 성장하였다. 그러나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 정현모(鄭顯謨)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고려 시대에 보윤을 지낸 정지원의 후손으로, 조선 시대에 와서는 정진숙의 17대조 허백당 정난종(1433~1489)이 세조 때 출세하여 집안을 일으켰다. 16대조는 문익공 정광필(1462~1538)로 중종 때 의정부영의정을 지냈다. 정광필의 손자 중 한 사람인 의정부좌의정 임당 정유길(1515~1588)이 그의 14대조가 된다.

생부 정순모에게서는 4명의 남동생과 2명의 여동생이 태어났고, 뒤늦게 양아버지가 된 큰아버지에게서도 3명의 남동생이 태어나게 되었다.

뒤에 고등학교 진학 때 경성으로 유학한 뒤 경성부 수송정 46-1번지(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송동 46-1번지)에 집을 얻어 정착하였다. 1920년 화성군 반월면의 반월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1921년 천안군 북면 오곡리 큰아버지 집에 양자로 가게 되어 1921년 3월 천원군 목천공립보통학교에 전학하였다가 뒤에 화성군 무천소학교로 전학하였다.

2. 1. 2. 학창 시절

1929년 2월 화성 무천소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의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경기고등학교의 전신)에 응시했으나 불합격하였다. 중동고등학교에 진학했으나 1개월만에 중퇴하고 다시 고등학교 입학 시험에 응시하여 1930년 3월 휘문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하였다.

1930년 3월 휘문고등학교 2학년 재학 중, 할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천안군 북면 고향으로 내려갔으나 이는 집안 어른들의 거짓말이었다. 그는 곧 집안의 강요로 18세에 천안군수를 역임한 관료의 딸 조신숙(趙辛淑)과 결혼하였다.

아내 조신숙을 천안군 고향에 두고 다시 경성부로 올라와 휘문고등학교를 다녔다. 집안에서는 아내가 독수공방으로 병에 걸렸다면서 자퇴하고 내려올 것을 여러번 권고하였다. 그러나 정진숙은 학구열을 버리지 않고 거절하였다. 그는 부인 조신숙을 경성으로 데려와 근화학교에 보냈고, 고등학생 신분이던 자신이 학비를 조달하여 부인의 학비를 댔다.

1934년 3월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보성전문학교로 진학하였다. 보성전문학교 상과에 원서를 넣었다가 보전 이재학과로 학과를 변경하였다. 1935년 보성전문학교 이재학과 2학년 재학 중, 다시 경성제국대학에 응시하기 위해 공부하였으나 병으로 실패하였다. 그해 10월 건강 악화로 자퇴하고 고향에 내려가 요양하였다.

2. 2. 광복 직후와 을유문화사 창립 (1945년 ~ 1952년)

1945년 8월 해방 후 은행원을 그만두었다. 1945년 12월 1일 민병도, 조풍연, 윤석중과 함께 출판사를 창립하였으며, 을유년의 '을유(乙酉)'에서 따서 을유문화사라고 정하였다. 초대 사장은 민병도에게 양보하고 정진숙은 을유문화사 전무이사가 되었다.

정진숙이 출판업에 뛰어든 계기는 그의 친족이었던 학자 위당 정인보의 권고 때문이었다. 집안 어른인 위당 정인보 선생이 “우리말, 우리글, 우리 민족의 혼을 되살리는 유일한 문화적인 사업이 출판”이라고 충고한 데 따른 것이었다.[3] 1947년 4월부터 1972년 3월까지는 휘문의숙 재단 이사를 겸임하였다.

그의 호는 ‘은석’(隱石)이다. 두계 이병도서울대 역사학 교수가 지어줬다.[5] 하는 일 자체가 은인자중 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훗날 그는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다이아몬드도 숨은 돌이 아니냐”고 하였다.[5]

그는 <조선문화총서>, <대학총서>, <박물관총서> 등의 인문학, 사회과학 계열의 총서류의 발간 사업과 <큰사전>, <한국학 대백과사전> 등의 사전류 발간을 추진하였다. 첫 책은 1946년 출간된 26쪽짜리 한글 연습책 『가정 글씨 체첩』이었다. 정지용 시인의 『지용시선』, 박목월·조지훈·박두진의 『청록집』 등 훗날 한국현대문학사의 대표작들로 평가받는 시집들도 그 해 나왔다.[3]

해방 직후 출판 환경은 극도로 열악했다. 종이를 구하지 못해 책을 만들어내지 못한 경우도 종종 있었다. 출판물 유통 구조가 취약해 판매대금을 수금하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물가 때문에 책값을 정하기도 어려웠다.[3] 하지만 그는 정인보의 충고인 “우리말과 우리글을 소생시키고 부흥시켜 우리 고유의 민족문화를 꽃피우자”는 창립 취지에 따라 부지런히 책을 만들었다.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0월에도 주요섭의 '사랑손님과 어머니'를 펴냈으며, 1953년 7월 종전 때까지 10권의 책을 더 냈다.[3] 1955년부터는 을유문화사의 외국 영업부를 신설하여 외국 서적의 국내 번역과 국내 서적의 외국어 번역 작업을 추진하기도 했다.

1950년 6.25 전쟁으로 동인들이 실종되거나 월북한 뒤 을유문화사의 내분을 수습하고 대표직을 맡아서 회사를 경영하게 되었다.

2. 3. 을유문화사 사장 취임과 출판 활동 (1952년 ~ 1998년)

1950년 6.25 전쟁으로 동인들이 실종되거나 월북한 뒤 을유문화사의 내분을 수습하고 대표직을 맡아 회사를 경영하게 되었다.[3] 정인보가 강조한 “우리말과 우리글을 소생시키고 부흥시켜 우리 고유의 민족문화를 꽃피우자”는 창립 취지에 따라, 해방 직후 열악한 출판 환경 속에서도 책을 꾸준히 펴냈다.[3] 한국 전쟁 중에도 주요섭의 '사랑손님과 어머니'를 출간했고, 1953년 종전 때까지 10권의 책을 더 냈다.[3]

1955년부터는 을유문화사에 외국 영업부를 신설하여 외국 서적의 국내 번역과 국내 서적의 외국어 번역 작업을 추진하였다. 그는 <조선문화총서>, <대학총서>, <박물관총서> 등 인문학, 사회과학 계열 총서와 <큰사전>, <한국학 대백과사전> 등 사전류 발간을 추진하였다.

2. 3. 1. 한글 사전 출판

1945년 9월 광복 후 조선어학회 학자들이 일제강점기 조선어학회 사건 때 법정 증거물로 압수당한 원고를 9월 초 서울역 운송회사의 한 창고에서 발견했다.[5] 처음에는 종이의 질이 좋지 않고 쉽게 찢어져 리극로의 요청을 조용히 거절했다.

당시 한글학회 이사장이었던 리극로는 "누구 하나 '큰 사전'에 관심을 보이지 않으니 우리나라가 광복된 의의가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이 원고를 가지고 일본 놈들한테 가서 사정해야 된다는 말인가"라며 흥분했다. 당시는 종이 사정이 어려워 신문도 마분지 비슷한 종이에 인쇄해야 할 정도여서 거부 의사를 밝혔다.[5]

리극로가 '물불'이라는 별명에 어울리게 원고 뭉치를 던지는 등 크게 흥분하자,[5] 그의 열정에 감동해 정진숙은 일단 사전 한 권만이라도 내기로 했다. 장안의 모조지를 거의 긁어모았지만 부족했다. 결국 정진숙은 문교부 고문으로 와 있던 미국인 앤더슨에게 부탁했다.[5] 앤더슨은 처음에 거절했지만 정진숙의 거듭된 부탁과 간청으로 미국에 가서 알아보겠다고 허락했다. 하버드 대학교 언어학 박사인 그는 한글 체계를 보더니 놀라며 록펠러 재단에 연결해 주었다. 록펠러 재단은 45000USD 어치의 종이를 보내왔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한글학회로 이어져 10년 만인 1957년 6권으로 완간했다.[5]

2. 3. 2. 교과서 발행 및 문고판 출간

1952년 10월 을유문화사 대표이사 겸 사장에 취임하였다. 이후 문교부의 정책 자문위원회 자문위원에 위촉되고 1956년 8월에는 한국검인정교과서 사장에 선임되었다. 1956년 무렵부터는 문교부의 국민학교, 중등, 고등학교의 표준교과서 제작에도 참여하여 교과서 발간과 교정, 편찬을 맡아보았다. 을유문고를 발행하여 대한민국 건국 이후 현암사의 현암문고와 함께 문고판 서적의 확산과 인문학, 한국 고전, 동양 고전, 서양 고전 등의 국내 소개에도 기여했다.

1959년 미국 국무성 초청으로 4개월간 미국과 유럽을 시찰하고 귀국하였다.[5] 그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열심히 책을 읽는 그곳 사람들을 보고 ‘이래서 선진국이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큰 책은 가지고 다니기 어려워 문고판 소책자를 발행하겠다고 결심했다 한다.[5] 1960년 3월 한국검인정교과서 발행인협회 이사에 위촉된 뒤 1961년 8월 다시 국정교과서주식회사 사장에 취임하였다. 그는 교과서 편찬 사업에도 참여하였으며, 세계문학전집의 한글 번역 외에 을유문고를 개설하여 국내외 전기류, 고전 작품의 현대 한글어 번역본으로 내놓았다.

2. 3. 3. 사회 활동 및 출판단체 활동

1952년 10월 을유문화사 대표이사 겸 사장에 취임하였다. 이후 문교부의 정책 자문위원회 자문위원에 위촉되고 1956년 8월에는 한국검인정교과서 사장에 선임되었다. 1956년 무렵부터는 문교부의 국민학교, 중등, 고등학교의 표준교과서 제작에도 참여하여 교과서 발간과 교정, 편찬을 맡아보았다. 을유문고를 발행하여 대한민국 건국 이후 현암사의 현암문고와 함께 문고판 서적의 확산과 인문학, 한국 고전, 동양 고전, 서양 고전 등의 국내 소개에도 일익을 담당했다.[5]

1957년 10월 문교부장관으로부터 '한글 큰사전' 전6권 완간에 대해 문화, 언어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감사장을 받았다. 1957년 12월 문교부장관으로부터 우량도서출판 및 견실한 운영에 대한 표창장을 받고, 아시아재단 한국지부장으로부터 우량도서출판 및 교육문화계 공헌에 대한 표창장을 받았다. 1958년 1월 제1회 일본 도쿄국제도서전시회 참가차 일본 도쿄로 건너가 회의에 참석하고 귀국하였으며, 1959년 5월 미국 국무성 초청으로 4개월간 구미출판계를 시찰하였다. 미국 현지에서, 그 해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개최되는 제15차 국제출판협회 총회에 한국대표의 한 사람으로 임명되어 참석하고 1960년에 귀국하였다.

1959년 미국 국무성 초청으로 4개월간 미국과 유럽을 돌아보고 귀국하였다. 그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열심히 책을 읽는 그곳 사람들을 보고 ‘이래서 선진국이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큰 책은 가지고 다니기 어려워 문고판 소책자를 발행하겠다고 결심했다 한다.[5] 1960년 3월 한국검인정교과서 발행인협회 이사에 위촉된 뒤 1961년 8월 다시 국정교과서주식회사 사장에 취임하였다. 그는 교과서 편찬 사업에도 참여하였으며, 세계문학전집의 한글 번역, 을유문고를 개설하여 국내외 전기류, 고전 작품의 현대 한글어 번역본으로 내놓았다.

1961년 서울시 문화위원회 위원에 위촉되고, 10월 문교부 정책자문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961년부터 1965년까지 사단법인 대한출판문화협회 회장을 겸임하였다. 이후 1962년 11월, 1963년에 대한출판문화협회 회장에 재선되었으며, 1965년~1973년까지 회장을 연임하고, 1979년에 다시 출판문화협회 회장으로 재선되었다.

1962년 11월 한국출판문화협회 회장에 재선된 뒤 1963년 8월 유네스코재단 한국분과위원회 위원에 위촉되고, 9월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위원에 재선임되었다. 1964년 한국검인정교과서 사장에 재선되었다. 1965년 대한출판문화협회 회장에 재선되어 1974년까지 재직했다. 1964년 10월 일본도서관협회 초청으로 도쿄에서 개최된 전일본국 도서관회의에 참석하고 12월 귀국하였으며, 같은 해 12월 서울특별시문화위원회 위원에 선임되어 1967년까지 재직했다.

1968년 6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개최된 국제출판협회 총회에 대한민국대표단의 한 사람으로 참석한 후 유럽과 미국의 출판, 인쇄업계를 시찰하고 11월에 귀국했다. 같은 해 11월 귀국 직후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출판인협동과 양서출판으로써 출판문화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표창장을 받았다. 1969년 3월 한국도서잡지간행윤리위원회 위원, 7월 사단법인 한국출판금고재단 이사를 지내고, 10월 문교부장관으로부터 한글문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장관 표창장을 받았다. 1970년 한국출판금고 재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같은 해 10월 독서신문사 회장을 역임했다. 1970년 12월 서울시 문화위원회 위원에 재위촉되었다. 1971년 한국검인정교과서 사장에 선임되고, 12월 한글반포 525돌 기념행사에서 유공자로 표창장을 받았다. 같은 해 12월 출판, 인쇄, 한글 보급 등 인문사회 분야 발전에 기여함으로써 국민복지 향상에 공헌하였다 하여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1972년 2월부터 사단법인 한국출판금고 이사장을 맡아보았다. 7월에는 일본 도쿄에서 개최된 유네스코 주최 유네스코 아시아지역도서개발전문가회의에 대한민국측 대표단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고 1972년 1월에 귀국하였다. 1972년 10월 동래정씨임당공파 종친회 회장에 취임하였다. 1974년 2월 사단법인 대한출판문화협회 명예회장에 선출되었다. 1974년 4월 동래정씨대종회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2. 4. 은퇴와 최후 (1998년 ~ 2008년)

1998년 2월 정진숙은 출판저널 발행인직과 한국출판금고 이사장직에서 물러났다.[6] 1999년 3월에는 중앙박물관회 회장직을 사퇴하였다.[7] 2005년 12월 1일 경기도 파주군 교하면(현 파주시 산남동)에 파주출판단지가 개설되자, 파주출판도시에서 을유문화사 창사 60주년 기념 전시회를 개최하였다. 이때 그를 기념하여 파주출판문화산업단지 입구에 정진숙의 아호를 딴 은석교(隱石橋)가 건립되었다. 은석교는 교하출판단지 입구, 다산북스와 푸른숲, 롯데프리미엄아울렛 파주점 근처에 있다.

정진숙은 1961년 12월 서울시문화상을 받은 이후 출판 유공과 교과서 편찬 공로로 1968년 11월 대통령 표창장, 1969년 10월 문교부장관 표창장, 1970년 12월 국민훈장 동백장 등을 수상했다. 1997년 10월 20일에는 문화체육부로부터 금관문화훈장을 받았고, 그밖에 제8회 간행물윤리상(공로부문, 1997.10), 1999년 12월 한국출판인회의 선정 20세기 한국의 출판인상, 2007년 1월 15일 유한재단 제7회 유일한상 등을 받았다.

한국출판연구소 재단 이사에 선출된 뒤 1999년 7월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이사가 되고, 1999년 9월 한국박물관회 상임고문으로 전임되었다. 그는 병석에 눕기 전인 2007년 7월까지 서울 종로구 수송동 사옥으로 매일 오전 9시 출근하였다.[3] 2008년 8월 22일 오후 3시 3분 서울 평창동 자택에서 노환과 위암으로 사망했다.[2] 사망 당시 그의 나이는 96세였다.

3. 사상과 신념

그는 출판을 천직으로 여겼다.[3] 해방 직후 만난 친족 위당 정인보는 그에게 자기 직업에 충실할 것, 문화를 육성하고 말과 글을 다시 살릴 것을 주문했다. 정인보에 의하면 정치에 뛰어드는 것은 가짜 애국이라며 작은 것, 사소한 것부터 살피라고 권고하였다.[5] 정인보는 작은 일이라 해도, 자기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진정한 애국이라 했고 정진숙은 그의 충고를 신념으로 삼았다.[5]

정인보로부터 '민족 문화의 밑거름'이라는 말을 듣고 출판업에 종사하기로 결심했다.[5] 정인보가 "우리말, 우리글, 우리 민족의 혼을 되살리는 유일한 문화적인 사업이 출판"이라고 충고한 데 따른 것이었다.[3] 그는 출판을 천직으로 삼게 된 것은 더할 나위 없는 좋은 운명이고 축복이었다고 평하기도 했다.[3]

1959년 미 국무성 초청으로 4개월간 미국과 유럽을 방문했다. 장소를 가리지 않고 열심히 책을 읽는 사람들을 보고 '이래서 선진국이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큰 책은 가지고 다니기 어려워 문고판 소책자를 발행하겠다고 결심했다. 독서를 장려하려면 문고판이 많아야겠다는 것이다.[5] 그는 독서가 곧 나라와 사회를 세우는 길이라 확신하여, 회사를 개방하기도 했다. 회사는 곧 이내 교수들과 지식인들의 모임이 되기도 했다.

4.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아버지정순모(鄭順謨)
어머니풍양 조씨
양아버지정현모(鄭顯謨)
부인조신숙(趙辛淑, 1911년 4월 2일 ~ 1996년 3월 17일)조행숙(趙幸淑)으로도 불림[9][10]
아들정낙영(鄭洛泳, 1934년 6월 21일 ~ 2022년 9월 14일)기업인·출판인, 미국 이민, 미국 랜덤하우스사 부사장 역임
아들정운영(鄭芸泳, ? ~ 1996년 5월 31일)산부인과 의사, 태백 장성병원 산부인과 과장[12], 진료담당 부원장 역임[13]
며느리이름 미상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철학자 좌옹 윤치호의 외손녀
손자정상준(鄭相俊, 1974년 ~ )출판인, 금강기획 근무, 을유문화사 기획실장·상무·대표이사 역임, 도서출판 "그 책" 대표이사
정지영(鄭芝泳, 1939년 9월 1일 ~ )인테리어 디자이너, 을유문화사 대표이사 역임
아들정필영(鄭苾泳, 1942년 4월 29일 ~ 2011년 2월 21일)출판인, 을유문화사 전무이사·대표이사 역임
아들정무영(鄭茂泳, 1944년 9월 1일 ~ )기업인, 삼신FA 전무·보스 전무이사, 을유문화사 대표이사·회장 역임
아들정해영(鄭海泳)기업인, 기아자동차 영업소장 역임, 개인사업
사돈윤치호(尹致昊, 1865년 1월 26일 ~ 1945년 12월 9일)


5. 평가

60여 년간 외길을 걸어온 한국 출판계의 1세대이다.[3] 그는 10년간의 노력 끝에 조선말 큰사전을 1957년 완간하는 등 어려운 출판 현실을 헤쳐왔다는 평가를 받는다.[15]

6. 수상

수상 연도내용
1957년 10월문교부 장관 감사장, 한글 큰사전 전6권 완간 유공
1957년 12월문교부 장관 표창장, 우량도서출판 및 견실한 운영 공로
1957년아시아재단 한국지부장 표창장, 우량도서출판 및 교육문화계 발전 유공
1961년 12월서울시문화상
1968년 11월대통령표창
1969년 10월문교부장관 표창
1970년 12월국민훈장 동백장
1971년 12월한글반포 525돌 기념 표창장
1997년 3월 15일대한출판문화협회 공로패
1997년 10월 20일금관문화훈장
1997년 10월 29일제8회 간행물윤리상(공로부문)
1999년 12월한국출판인회의 선정 20세기 한국의 출판인
2005년한국출판인협회 선정 아름다운 출판인
2007년 1월 15일유한재단 제7회 유일한상


참조

[1] 뉴스 한국출판계 거목, 정진숙 을유문화사 회장 별세 http://news.empas.co[...]
[2] 뉴스 을유문화사 정진숙 회장 별세 http://article.joins[...] 중앙일보 2008-08-23
[3] 뉴스 "[삶과 추억] “책과 하는 인생처럼 좋은 게 어딨나”" http://article.joins[...] 중앙일보 2008-08-23
[4] 문서 후에 [[조흥은행]]에 합병됨, 현 [[조흥은행]]
[5] 뉴스 "[한국 초대석] 정진숙 을유문화사 회장" http://weekly.hankoo[...] 한국일보 2005-06-02
[6] 문서 또는 파주군 교하면 문발리 497-1
[7] 문서 또는 파주시 문발동 497-1
[8] 뉴스 출판계 거목 정진숙 을유문화사 회장 별세 http://www.seoul.co.[...] 서울신문 2008-08-23
[9] 부음 부음 매일경제 1996-03-19
[10] 부음 부음 동아일보 1996-03-19
[11] 부음 訃音 경향신문 1996-06-01
[12] 부음 부음 동아일보 1996-06-01
[13] 뉴스 인사(人事) (근로복지공사) https://news.v.daum.[...] 연합뉴스 1992-12-31
[14] 뉴스 정필영 을유문화사대표이사 별세 外 http://www.munhwa.co[...]
[15] 뉴스 "[2008 사라진 얼굴들] 영원한 '토지' 찾아 잠들고 '당신들의 천국'으로 떠나고" http://news.hankooki[...] 한국일보 2008-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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