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엄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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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엄은 후한 말 영천군 출신으로, 신비, 진군, 두습과 함께 명성을 떨쳤다. 조조를 섬기며 낭릉 현령, 장릉 태수, 관중호군 등을 역임했고, 관우의 번성 포위 공격에서 조인과 서황을 지원했다. 조비, 조예, 조방 시대에도 중용되어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사공에 이르렀다. 사후에는 목후의 시호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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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엄 (삼국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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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이름 | 조엄 |
원어 이름 | 趙儼 |
로마자 표기 | Zhao Yan |
자 | 백연 (伯然) |
시호 | 목후 (穆侯) |
생애 | |
출생 | 171년 |
출생지 | 위나라예주영천군 양책현 |
사망 | 245년 7월 또는 8월 (향년 74세) |
관직 | |
시중 (侍中) | 220년 ~ ? |
도지중랑장 (度支中郎將) | 223년 |
전농중랑장 (典農中郎將) | ? ~ 222년 |
하동태수 (河東太守) | ? ~ ? |
부마도위 (駙馬都尉) | ? ~ ? |
상서 (尚書) | ? ~ ? |
대사마군사 (大司馬軍師) | ? ~ ? |
정동군사 (征東軍師) | 223년 ~ 226년 |
정촉장군 (征蜀將軍) | 239년 ~ ? |
정서장군 (征西將軍) | ? ~ 243년 |
표기장군 (驃騎將軍) | 243년 ~ 245년 8월 9일 |
대사농 (大司農) | ? ~ 239년 |
사공 (司空) | 245년 4월 9일 ~ 245년 7월 또는 8월 |
의랑 (議郎) | 219년 ~ 220년 |
관중호군 (關中護軍) | ? ~ 219년 |
부풍태수 (扶風太守) | 211년 ~ ? |
도향후 (都鄉侯) | ? |
가족 관계 | |
자녀 | 조정 |
소속 세력 | |
주요 섬긴 군주 | 조조, 조비, 조예, 조방 |
2. 초기 생애
영천군 양재현(현재 허난성 위저우 시) 출신으로,[1] 젊은 시절부터 같은 군 출신의 신비, 진군, 두습과 함께 명성을 떨쳐 '''신진두조'''(辛陳杜趙)라고 불렸다.[3] 후한 말의 혼란을 피해 남쪽 형주로 피난하여 두습, 파흠 등과 함께 지내며 교류했다.[2][69]
조조가 헌제를 맞이하여 허창에 도읍을 정하자, 조엄은 조조를 섬기기로 결심하고 건안 2년(197년), 27세의 나이로 조조에게 등용되어 낭릉현장으로 임명되었다.[69][63] 낭릉현장 시절, 현지의 호족들을 엄격히 다스리는 한편 은혜를 베풀어 민심을 안정시켰으며,[69] 상관인 이통과의 일화나[70] 원소 남침 시 예주 안정화에 기여하는 등 초기 관직 생활에서 능력을 보였다.[69]
2. 1. 출생과 성장
조엄은 영천군 潁川郡|영천군zho 양재현 陽翟縣|양재현zho (현재의 허난성 위저우 시) 출신이었다.[1] 젊은 시절부터 같은 군 출신인 신비, 진군, 두습과 함께 명성을 떨쳐, '''신진두조'''(辛陳杜趙)라고 불렸다.[3]후한 말의 혼란을 피해 남쪽 형주(현재의 후베이성과 후난성 포함 지역)로 피난했으며, 그곳에서 두습, 파흠(繁欽)과 만나 깊은 친구가 되었다. 세 사람은 재산을 합쳐 서로 도우며 함께 생활했다.[2]
조조가 헌제를 맞이하여 자신의 세력 중심지인 허창으로 도읍을 옮기자, 조엄은 조조야말로 중국을 구할 인물이라 여기고[69] 그를 섬기기로 결심했다. 건안 2년(197년), 27세의 나이로 허창으로 올라가 조조를 만나 그의 휘하에 들어갔으며, 낭릉현장(朗陵縣長)으로 임명되었다.[69][63]
낭릉현에서는 현지 호족들이 제멋대로 행동하며 통치에 쉽게 따르지 않았으나, 조엄은 그중 가장 행실이 나쁜 자들을 결박하고 조사하여 사형 판결을 내리는 단호함을 보였다. 동시에 이들을 잠시 잡아 가두는 한편, 표를 올려 사면을 청함으로써 위엄과 은혜를 동시에 보여주었다.[69] 당시 상관이던 양안도위(陽安都尉) 이통의 인척이 죄를 지었을 때도 조엄은 법에 따라 사형을 판결했다. 당시 사형 집행 권한은 주목이나 태수에게 있었음에도, 이통은 처자의 구명 요청을 물리치고 조엄의 공정한 처결을 기뻐하며 그와 깊은 친교를 맺었다.[70][64]
원소가 남쪽으로 공격해오자 원소의 고향인 예주의 여러 군이 원소에게 호응했다. 그러나 양안군(陽安郡)만이 동요하지 않았는데, 이때 이통은 조조에 대한 지지를 명확히 하고자 급하게 세금을 걷으려 했다. 조엄은 이러한 조치가 오히려 민심을 불안하게 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이통을 설득해 징세를 잠시 늦추도록 했고, 순욱에게 편지를 보내 상황을 자세히 알렸다. 순욱은 조조에게 이를 보고했고, 조조는 걷은 세금을 다시 백성들에게 돌려주라는 조치를 내렸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크게 기뻐했고, 군은 안정을 되찾았다.[69]
2. 2. 형주 피난
조엄은 영천군 양재현(현재 허난성 위저우 시) 출신이었다.[1] 젊은 시절부터 같은 군 출신인 신비, 진군, 두습과 함께 명성을 떨쳐 '''신진두조'''(辛陳杜趙)라고 불렸다.[3]후한 말, 중원에 전란이 발생하자 이를 피해 남쪽 형주(현재의 후베이성과 후난성 일대)로 피난하였다.[2] 형주에서 두습, 번흠과 만나 뜻을 같이하여 재산을 합치고 회계를 같이하며 한 집안처럼 지냈다.[2][63][69]
2. 3. 신비, 진군, 두습과의 관계
조엄은 젊은 시절부터 같은 영천군 출신인 신비, 진군, 두습과 함께 명성을 누렸으며, 이들을 함께 일컬어 '''신진두조'''(辛陳杜趙)라고 불렸다.[3] 후한 말의 혼란을 피해 남쪽 형주로 피난하여 두습, 파흠과 만나 함께 생활하며 재산을 공유하고 서로 도왔다.[2]3. 조조 휘하에서의 활약
건안 2년(197년) 조엄은 조조가 헌제를 허현(許縣, 현재의 허창시)으로 맞이했다는 소식을 듣고 27세의 나이로 조조에게 합류했다.[69][63][5] 조조는 그를 낭릉현장(朗陵縣長)으로 임명했고, 조엄은 그곳에서 능력을 발휘하여 치적을 쌓았다.[69][70][64] 특히 관도 전투를 앞두고는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다.[69][64]
이후 중앙으로 발탁되어 사공 조조의 주부(主簿)가 되었으며,[15] 우금, 악진, 장료 등 장수들 사이의 불화를 중재하기도 했다.[69][18] 건안 13년(208년) 형주 정벌 시에는 도독호군(都督護軍)으로서 여러 군을 통솔했다.[69][19]
이후 부풍태수와 관중 호군(關中護軍)을 역임하며 관중 지역의 군무를 총괄했다.[69][21] 이 시기 강족의 침입을 격퇴하고 내부 반란을 진압하며 지역 안정에 힘썼으며,[69][22][23] 징집병들의 반란 위기를 슬기롭게 대처하기도 했다.[29][31][35]
건안 24년(219년) 번성 전투에서는 서황과 함께 구원군으로 파견되어,[38][69] 신중한 전략을 제시하여 관우의 포위망을 푸는 데 기여했다.[40][41][69] 관우가 패퇴하자 손권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추격을 반대했는데, 이는 조조의 판단과 일치하는 것이었다.[44][45][69]
3. 1. 조조와의 만남과 낭릉 현장 임명
전쟁의 혼란을 피해 형주로 가서 두습, 파흠(繁欽)과 함께 지냈다. 이들은 재산을 합쳐 한 집안처럼 생활했다.[63][69] 196년, 조조는 후한 헌제를 자신의 근거지인 영천 허현(許縣, 현재의 허창시)으로 옮겨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4] 조엄은 조조가 혼란한 중국에 질서와 평화를 가져올 인물이라 생각하고,[4][69] 건안 2년(197년), 27세(만 26세)[5]의 나이로 허현으로 가 조조에게 합류했다. 조조는 그를 낭릉현(朗陵縣, 현재 허난성 퀘산현 남서쪽)[5]의 현장(縣長)으로 임명했다.[63][69][5]낭릉현에서는 지역 호족들이 조엄의 통치에 따르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했다. 조엄은 이들에게 단호하게 대처하여, 가장 문제가 심했던 자들을 체포하고 조사하여 사형 판결을 내렸다.[63][69] 동시에 조정에 표를 올려 죄인들을 사면해 줄 것을 청하여, 엄격함(위엄)과 너그러움(은혜)을 동시에 보여주었다.[63][69] 당시 조엄의 상관이었던 양안도위(陽安都尉) 이통의 처가 쪽 친척이 법을 어기자, 조엄은 그를 체포하여 사형 판결을 내렸다.[64] 당시 현장에게는 사형 집행 권한이 없었고, 주목이나 태수만이 그 권한을 가졌다.[70] 이통은 가족들의 구명 요청에도 불구하고 공적인 일을 우선시하여 이를 거절했고, 조엄이 법에 따라 엄정하게 처리한 것을 높이 평가하며 그와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70][64]
원소가 남쪽으로 공격해오자 그의 고향인 예주의 여러 군들이 원소에게 호응했다. 하지만 조엄과 이통이 있던 양안군(陽安郡)만은 조조에게 충성을 유지했다.[69][64] 이통은 조조에 대한 지지를 확실히 보여주기 위해 서둘러 세금(호조)을 징수하려 했다.[69][64] 그러나 조엄은 갑작스러운 세금 징수가 민심을 불안하게 만들 것을 우려하여 이통을 설득해 잠시 미루도록 했다. 동시에 순욱에게 편지를 보내 이러한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다.[69] 순욱은 조엄의 의견을 조조에게 전달했고, 조조는 이미 걷은 세금마저 백성들에게 돌려주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조치로 백성들은 크게 기뻐했고 양안군은 안정을 되찾았다.[69][64]
3. 2. 낭릉 현장 시절의 업적
전란을 피해 두습, 파흠과 함께 지내던 조엄은 조조가 헌제를 영천군 허현(許縣)으로 맞이하자, 건안 2년(197년) 27세의 나이로 조조를 찾아가 섬겼다. 조조는 그를 낭릉현장으로 임명했다.[69][63]낭릉현에는 법을 무시하는 호족들이 많았다. 조엄은 부임 후 이들 중 죄질이 나쁜 자들을 체포하여 조사하고 사형을 판결했다. 그러나 사형 판결 후에는 표를 올려 사면을 요청함으로써 위엄과 은혜를 동시에 보여주었다.[69][6] 그의 상관인 양안도위(陽安都尉) 이통의 인척이 죄를 짓자, 조엄은 법에 따라 사형을 판결했다. 당시 현장에게는 사형 집행 권한이 주목이나 태수에게 있었으나, 이통은 아내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조엄의 공정한 법 집행을 지지하며 그와 친교를 맺었다.[70][7][64]
원소가 남쪽으로 공격해오자 원소의 고향인 예주의 여러 군이 원소에게 호응했다. 양안군(陽安郡)만이 조조를 지지했는데, 이때 도위인 이통은 조조에 대한 충성심을 보이려 급히 세금을 걷으려 했다. 조엄은 민심이 동요할 것을 우려하여 이통을 설득해 징세를 늦추도록 하고, 순욱에게 편지를 보내 상황을 알렸다. 순욱이 조조에게 보고하여 걷은 세금을 백성들에게 돌려주도록 조치하자 사람들은 기뻐했고 군은 안정되었다.[69][64]
3. 3. 관도 대전 전후의 활약
젊은 시절 신비, 진군, 두습과 함께 명성을 떨쳐 '신진두조'로 불렸다.[63] 전란을 피해 형주로 피난했으며, 두습·번흠(繁欽)과 함께 재산을 공유하며 한 집안처럼 지냈다.[69] 조조가 헌제를 허창으로 맞이하자, 조조를 섬기기로 결심하고 건안 2년(197년) 27세의 나이로 허창으로 가 조조를 만났다. 조조는 그를 낭릉현장(朗陵縣長)으로 임명했다.[69][63]낭릉현의 많은 호족들이 법을 따르지 않자, 조엄은 가장 문제가 심한 자들을 잡아들여 조사하고 모두 사형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동시에 표를 올려 사면을 청하는 등 위엄과 은혜를 함께 보여주었다.[69] 당시 상관이던 양안도위(陽安都尉) 이통의 인척이 죄를 짓자 법에 따라 사형을 판결했다. 당시 사형 집행 권한은 주목이나 태수에게 있었으나, 이통은 가족의 구명 요청을 뿌리치고 조엄의 법 집행을 지지하며 그와 친교를 맺었다.[70][64]
관도 전투를 앞두고 원소가 남쪽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려 하자, 원소의 고향인 예주의 여러 군현이 원소에게 호응했다. 그러나 양안군만은 조조에게 충성을 지켰다.[8] 이통은 조조에 대한 지지를 분명히 하고자 서둘러 세금을 걷으려 했으나, 조엄은 민심이 동요할 것을 우려하여 이를 만류했다.[9][10] 조엄은 이통에게 세금 징수를 잠시 미루도록 설득하고,[12] 당시 수도 허창의 실무 책임자였던 순욱에게 편지를 보내 양안군의 어려운 사정과 백성들의 충성심을 설명하며 세금 면제를 건의했다.[13] 순욱은 조조에게 이를 보고했고, 조조는 양안군의 세금을 면제하고 이미 걷은 세금도 돌려주도록 조치했다. 이로 인해 백성들은 크게 기뻐하며 조조에 대한 충성을 유지했고 군은 안정되었다.[14]
이후 조엄은 중앙으로 불려가 사공 조조 밑에서 주부(主簿)로 일하게 되었다.[15] 당시 영천군 영음현(潁陰縣)에는 우금이, 양책현(陽翟縣)에는 악진이, 장사현(長社縣)에는 장료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들 사이에 불화가 잦았다. 조엄은 세 군대의 참군(參軍)을 겸임하며 이들을 중재하고 화합시켜 친목을 다지게 했다.[69]
《위략》(魏略)에는 관도 전투 당시 이통이 원소에게 투항하려 했으나 조엄의 설득으로 조조에게 충성을 지켰다는 기록이 있다. 관도 전투 후 조조가 원소 측과 내통한 자들의 문서를 발견했을 때, 이통의 이름이 없자 "이는 조보란(조엄의 자)의 공일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16] 그러나 역사가 배송지는 삼국지 본문에 조조가 해당 문서들을 보지 않고 모두 불태웠다고 기록된 점을 들어 《위략》의 이 기록이 사실과 다를 것이라고 지적했다.[17]
3. 4. 형주 정벌과 관중에서의 활약
건안 13년(208년), 조조가 형주(현재의 후베이성과 후난성 일대)를 정벌하기 위해 남하할 때, 조엄은 장릉태수(太守)를 겸임하게 되었다. 이후 적벽 대전 직전에는 도독호군(都督護軍)으로 임명되어 우금, 장료, 장합, 주령, 이전, 노초(路招), 풍해(馮楷) 등 일곱 장수가 지휘하는 부대의 군사 활동을 총괄 감독했다.[69][19]211년 동관 전투에서 조조가 서북 지역 군벌 연합군을 격파한 후[20], 조엄은 잠시 승상주부(主簿)로 복귀했다가 곧 부풍태수(扶風太守; 현재의 싱핑 시, 산시 성 일대)로 승진했다.[20] 조조는 한수와 마초 등 서북 군벌 휘하에 있던 옛 병사 약 5,000명을 평난장군(平難將軍) 은서(殷署) 등에게 지휘하게 했고, 조엄을 관중(關中) 호군(關中護軍)으로 삼아 이들을 포함한 관중 지역의 모든 군사 업무를 총괄하게 했다.[69][21]
이후 강족이 관중 지역을 침입하자, 조엄은 은서 등을 이끌고 신평(新平郡; 현재의 빈현, 산시 성 일대)까지 추격하여 그들을 격파했다.[69][22] 또한, 둔전객(屯田客) 여병(呂並)이 진창(陳倉; 현재의 바오지 시, 산시 성 동쪽)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조엄은 다시 은서 등을 지휘하여 이를 성공적으로 진압했다.[69][23]
얼마 후, 관중 지역에서 징집한 병사 1,200명을 한중으로 보내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조엄은 징집된 병사들이 가족과 헤어지며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불안감을 느껴, 이들을 인솔하여 사곡(斜谷)까지 동행하며 위로했다.[24][25] 그의 우려대로 40리쯤 행군했을 때 일부 신병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혼란 속에서 조엄은 잠시 행방불명되기도 했다.[26] 당시 함께 있던 옹주 자사 장기는 본영의 동요를 우려하며 조엄의 귀환을 만류했지만, 조엄은 지휘관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소수의 병력만 이끌고 반란 현장으로 돌아갔다.[28][29] 그는 병사들에게 연설하여 동요를 가라앉히고 충성심을 확인한 뒤[30], 반란 주동자만 처형하고 나머지 병사들은 사면하여 사태를 신속하게 수습했다. 흩어졌던 병사 800명 이상을 다시 모으는 데 성공했으며, 지역 관리들도 체포했던 탈영병들을 조엄에게 돌려보냈다.[31]
이 사건 이후 조엄은 관중 지역의 병력이 불안정하다고 판단하여, 비밀리에 중앙 정부에 숙련된 장교와 노련한 병사들을 보내 병력을 교체해 줄 것을 요청했다.[32] 조조는 이를 받아들여 장군 유주(劉柱)에게 정예병 2,000명을 이끌고 관중으로 가도록 명령했다.[33] 그러나 신병들은 자신들이 교체될 것이라는 소식에 다시 동요하기 시작했다.[33] 조엄은 장교들을 모아놓고 "증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반란이 재발하면 큰 재앙이 될 것이다. 그들이 망설이는 지금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말하며 기지를 발휘했다.[34] 그는 공개적으로 가장 충성스러운 신병 1,000명을 선발하여 관중에 남기고, 나머지는 동쪽으로 보내겠다고 발표했다. 선발된 1,000명은 안심했고, 다른 병사들도 감히 문제를 일으키지 못했다.[35] 조엄은 이들을 다음 날 동쪽으로 보냈다. 약 열흘 후 유주의 정예 부대가 도착하자, 조엄은 관중에 남겨두었던 1,000명의 신병들마저 설득하여 동쪽으로 보내고, 관중의 병력을 모두 새로운 정예병으로 교체하는 데 성공했다.[36]
훗날 역사가 손성은 조엄이 처음에는 1,000명의 신병을 관중에 남기겠다고 약속했다가 결국 모두 동쪽으로 보낸 것에 대해, 병사들의 신뢰를 배신한 행위라고 비판했다.[37]
3. 5. 번성 전투에서의 활약
219년,[65] 조조의 장수 조인이 북부 형주의 번성(현재의 샹양)에서 유비의 장수 관우에게 포위되었다. 이때 조엄은 의랑( 議郎|의랑zho )으로서 조인의 군무에 참여하여 서황과 함께 번성으로 파견되어 조인을 구원하도록 명령받았다.[38][69]번성에 도착했을 때, 관우의 포위망은 매우 견고했고 조인은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다른 구원군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며, 서황이 가진 병력만으로는 관우를 공격하여 포위를 풀기에 부족했다. 여러 장수들은 서황에게 빨리 공격해야 한다고 압박했지만,[39][69] 조엄은 신중한 접근을 주장했다. 그는 제장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적의 포위가 견고하고 현재 우리 군의 병력은 적으며, 조인 장군과도 연락이 끊어져 함께 움직일 수 없습니다. 지금 섣불리 공격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우선 선봉대를 포위망 가까이 보내고, 조인 장군에게 구원군이 도착했음을 알려 사기를 북돋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머지 구원군이 도착하면 안팎에서 협공하여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구원군이 늦어져 문제가 생긴다면 제가 모든 책임을 지겠습니다."[40][69]
모든 장수들이 조엄의 의견에 동의했고, 서황은 그의 제안에 따라 참호를 파고 화살에 서신을 묶어 성 안으로 쏘아 보내 조인에게 구원군 도착 소식을 알렸다. 이후 추가 구원군이 도착하자 서황의 군대와 조인의 수비군은 힘을 합쳐 관우를 공격했고, 마침내 번성의 포위를 푸는 데 성공했다.[41][69]
관우는 패배하여 물러났지만, 그의 수군은 여전히 면수( 沔水|면수zho )에 남아 번성과 양양 사이의 연락을 방해하고 있었다. 이때 유비의 동맹이었던 손권이 동맹을 깨고 관우의 근거지인 형주 남부를 기습 공격하여 점령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근거지를 잃은 관우는 남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42][69]
조인은 이 기회에 관우를 추격하여 사로잡자고 제장들과 논의했다.[43] 그러나 조엄은 다시 한번 반대하며 전략적인 관점을 제시했다. "손권은 관우가 돌아와 자신과 싸우게 될까 봐 두려워하면서도, 우리가 그 틈을 타 자신을 공격할까 봐 염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협력하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상황을 관망하고 있을 뿐입니다. 지금 고립된 관우를 살려두면 손권에게 계속 위협이 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관우를 추격하여 공격한다면, 손권은 우리가 관우를 물리친 뒤 자신을 공격할 것이라 걱정하여 오히려 우리에게 적대적으로 돌아설 수 있습니다. 아마 위왕(조조)께서도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계실 것입니다."[44][69]
조인은 조엄의 분석에 동의하고 관우 추격을 중단했다. 조엄의 예측대로, 조조는 제장들이 관우를 추격할 것을 염려하여 조인에게 추격을 금지하는 명령을 보냈다.[45][69]
4. 조비, 조예, 조방 시대의 활약
조엄은 조비, 조예, 조방 세 황제를 섬기며 조위의 주요 관직을 역임했다. 연강 원년(220년) 조비가 위왕(魏王)이 되자 시중에 임명되었고,[46][69] 이후 부마도위, 하동태수, 상서 등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두루 거쳤다.[69][47][51] 조예 시대에는 도향후로 봉작이 올랐으며 형주와 예주의 군사를 감독하는 임무를 맡았고 대사농까지 승진했다.[53][54][69] 조방 시대에는 옹주와 량주의 군사를 총괄하는 정서장군 겸 도독옹량(都督雍凉)에 이르렀다.[69][55] 정시 4년(243년) 노령을 이유로 중앙으로 돌아와 표기장군이 되었고,[69][56] 정시 6년(245년) 사공에 임명되었으나 같은 해 사망하였다.[68][59] 사후 목후(穆侯)라는 시호를 받았다.[69][58]
4. 1. 조비 시대
연강 원년(220년) 3월, 조조가 사망하고 아들 조비가 위왕(魏王)의 작위를 계승하자, 조엄은 시중(侍中)으로 임명되었다.[46][69][66] 같은 해 말, 조비가 후한의 헌제로부터 황제의 자리를 넘겨받아 조위를 건국하자, 조엄은 부마도위가 되었고, 하동태수와 전농중랑장을 겸임하게 되었다.[69][47][66]''위략''에 따르면, 당시 위나라 정부는 각 군의 태수들에게 관할 지역의 과부를 모아 인구가 부족한 지역으로 보내 재혼시켜 인구를 늘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전임 하동태수였던 두기는 규정을 엄격히 지켜 소수의 과부만을 보냈으나, 조엄이 후임으로 부임한 후에는 하동군에서 보내는 과부의 수가 크게 늘어났다. 조비가 두기에게 그 이유를 묻자, 두기는 "제가 보낸 여성들은 실제로 남편을 잃은 과부들이지만, 조엄이 보낸 여성들은 남편이 살아있는 아내들입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 대답에 조비와 주변 신하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71][48]
황초 3년(222년), 조엄은 관내후에 봉해졌다.[69][49] 같은 해[72] 말, 조비가 대대적으로 동오를 공격할 때 조휴가 군대를 이끌고 출진했는데, 조엄은 조휴의 군사(軍師)로 발탁되어 동구 전투에 참여했다.[50] 전투 후 공을 인정받아 의토정후(宜土亭侯)로 봉작이 올랐고, 탁지중랑장(度支中郎將)을 거쳐 중앙의 상서로 승진했다.[69][51]
황초 6년(225년), 조비는 다시 오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광릉까지 진군했다가 회군했는데, 이때 조엄을 정동사마(征東司馬)로 삼아 현지에 남겨두었다.[69][52]
4. 2. 조예 시대
황초 7년(226년), 조비의 뒤를 이어 조예가 위나라의 두 번째 황제로 즉위했다.[67] 조예는 즉위 후 조엄의 봉작을 도향후(都鄕侯)로 높이고 식읍 600호를 하사했으며,[53][69] 형주의 군사를 감독하는 감형주제군사(監荊州諸軍事)로 임명하고 가절(假節)을 내렸다.[53][69]그러나 조엄은 병으로 인해 형주에 부임하지 못했고,[69] 다시 중앙으로 돌아와 상서(尚書)로 임명되었다.[54][69] 이후 건강을 회복하여 외직으로 나가 예주의 군사를 감독하는 감예주제군사(監豫州諸軍事)가 되었으며,[69] 대사마 군사(大司馬軍師)로 전임했다.[54][69] 그 후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대사농(大司農)으로 승진했다.[54][69]
4. 3. 조방 시대
239년 조방이 조예의 뒤를 이어 즉위하자, 조엄은 옹주와 량주의 군사를 감독하는 감옹양제군사(監雍凉諸軍事) 임무를 맡았고, 황제의 권한을 대행하는 가절(假節)을 받았으며 정촉장군(征蜀將軍)에 임명되었다.[69] 이후 정서장군(征西將軍)으로 승진하고 옹주와 양주의 군대를 모두 지휘하는 도독옹량(都督雍凉)이 되었다.[69][55]정시 4년(243년), 조엄은 노령과 건강 악화를 이유로 중앙으로 돌아가기를 요청했고, 수도 낙양으로 소환되어 표기장군(驃騎將軍)을 역임하게 되었다.[69][56] 당시 정벌 장군들은 전임할 때 개인 가신들을 데려가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조엄은 옹주와 양주를 떠나며 가신들을 남겨두었다. 그가 패상(霸上, 현재 시안 산시 성 동남쪽)에 도착했을 때 약을 가져오는 것을 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호위병들이 즉시 옹주로 달려가 이전 거처에서 약 상자 여러 개를 가져왔으나, 조엄은 웃으며 "사람들이 '말이 쉽지'라고 하는데, 내가 약에 대해 가볍게 물었을 뿐인데 정말 이런 일까지 할 필요가 있나?"라고 말하며 약 복용을 거부하고 낙양으로 향했다.[57]
정시 6년(245년) 2월 병자일(4월 9일), 조엄은 사공(司空)으로 임명되었다.[59] 그러나 같은 해 6월(7월 12일 ~ 8월 9일 사이)에 사망하였다.[68][59] 위나라 조정은 그에게 목후(穆侯)라는 시호를 내렸으며,[69][58] 아들 조정(趙亭)이 뒤를 이어 후작이 되었다.[69][6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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