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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의 오 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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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의 오 정복은 280년 서진이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한 사건이다. 서진은 사마염의 지휘 아래 20만 대군을 동원하여 오나라를 공격했고, 손호가 다스리던 오나라는 장강을 방어선으로 삼았으나, 손호의 무능함과 백성들의 불만으로 인해 결국 멸망했다. 이 전투에서 서진은 두예, 왕준 등의 장수를 앞세워 승리했으며, 오나라는 장제, 심영 등의 장수를 잃었다. 이 사건으로 삼국 시대는 종말을 맞이하고 중국은 통일되었으며,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한반도의 고구려, 백제, 신라는 서진과 외교 관계를 맺고 새로운 국제 질서에 적응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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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의 오 정복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분쟁 명칭진의 오 정복
부분 전쟁삼국 시대의 전쟁
시기280년
장소오나라 전역
결과오나라 멸망, 서진의 천하통일
교전 세력
교전국 1서진
교전국 2오나라
지휘관
서진 지휘관두예, 왕준, 당빈, 왕혼, 양제, 사마주, 호분, 왕융
오나라 지휘관육경†, 오영†, 장제†, 심영†, 손흠†, 장상, 성기, 제갈정
병력 규모
서진 병력50만 명
오나라 병력20만 명
관련 이미지
진나라의 오나라 정복 지도
진나라의 오나라 정복 지도
기타 정보
관련 전투이릉 대전
조비의 남정
제갈량의 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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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차 합비신성 전투
이풍의 난
수춘삼반
사마소 시군
촉한의 멸망
종회의 난
교지의 난
제5차 합비신성 전투
서릉 전투
독발수기능의 난
진의 오 정벌

2. 배경

265년 사마염은 촉나라를 멸망시킨 위나라를 멸망시키고 황제 자리에 올라 서진을 세웠다. 오나라264년에 즉위한 손호가 다스리고 있었는데, 그는 폭정을 일삼아 민심을 잃고 있었다.[13]

276년 10월, 정남장군 양호는 오나라를 정벌하자는 상소문을 올렸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거절되었다.[19] 278년 오나라가 응작을 사령관으로 삼아 환성을 공격했지만, 왕혼의 활약으로 오군 5000명이 전사하고 전선 600척이 격침되는 참패를 겪었다.

279년 두예왕준이 상소를 올리고 왕혼의 설득으로 사마염의 마음을 움직여, 280년 오나라 정벌 명령이 떨어졌다. 사마염은 두예를 대도독으로 삼아 군사 10만을 주어 강릉으로 가게 했고, 사마주는 도중, 왕혼은 횡강, 왕융은 무창, 호분은 하구로 가 20만 군사를 주었다. 왕준당빈은 수군과 육군 20만 명과 전선 수만 척으로 장강을 따라 동쪽으로 가게 했으며, 양제는 양양에 주둔해 모든 군마를 통제하게 했다.

2. 1. 삼국 시대의 종말

263년, 위나라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사마소종회등애를 파견하여 촉한을 멸망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후 사마소는 오나라 제압까지 꾀했지만, 촉 땅에서 종회강유가 반란을 일으켜 등애를 포함한 많은 장수를 잃었다. 또한, 오나라를 멸망시킬 만큼 충분한 수군을 보유하지 못했고, 촉한 멸망 후 혼란을 틈타 영안으로 쳐들어온 오나라 군을 몰아내는 데 급급했다.[4] 한편, 오나라 교주에서 여흥이 반란을 일으켜 위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자, 위나라는 촉한 출신 장수 곽익을 파견했다. 여흥은 내부 갈등으로 살해되었지만, 곽익은 교지(交阯)에 태수를 파견했고, 교주는 위나라와 이후 진나라의 남방 교두보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마소는 즉시 전쟁을 시작하는 대신, 외교를 통해 오나라를 위협하려 했다. 264년 3월, 사마소는 진왕에 즉위했고, 10월에 오나라에 사자를 파견하여 촉한 멸망을 과시하며 오나라를 굴복시키려 했다. 265년 8월, 사마소가 병사하자, 아들 사마염상국 지위와 진왕 자리를 계승하여 위나라 조정의 실권을 장악했다. 같은 해 12월, 사마염은 원제에게서 선양을 받아 국호를 진(서진)으로 고쳤다.

한편, 오나라는 손권 통치 말년부터 후계자 다툼으로 국력이 쇠퇴했다. 제3대 황제 손휴 시대에 안정을 되찾는 듯했으나, 교주 이반과 촉한 멸망으로 궁지에 몰렸다. 264년 황제가 된 손호는 강대해진 위나라에 대한 대응을 강요받았다. 손호는 위나라 사자에게 황제를 칭하지 않고 몸을 낮춤으로써 위협을 피하려 했다.[82] 그러나 진나라가 성립되자, 손호는 사마소 조문 사자로 보낸 정충에게서 진나라를 공격할 기회를 얻었다는 말을 듣고, 일방적으로 외교를 끊었다.[83] 손호는 진나라를 공격하려 했으나, 향락에 빠져 술과 여자에 탐닉하고, 궁궐 건설 등 토목 공사를 벌이고 간언하는 충신들을 살해하여, 원망의 목소리가 조정 관료와 민중에게까지 널리 퍼졌다.

2. 2. 서진의 건국과 오나라 정복 준비

265년 사마염은 촉나라를 멸망시킨 위나라를 멸망시키고 황제 자리에 올라 서진을 세웠다. 264년에 즉위한 오나라 황제 손호는 폭정을 일삼아 민심을 잃고 있었다.[13]

269년 4월 29일, 사마염은 양호에게 상양에 주둔하며 형주 지역의 군사 업무를 감독하도록 명령했다. 양호는 사마염에게 익주의 지리적 이점을 활용, 양쯔강을 따라 해군 함대를 보내 오나라를 공격할 수 있다고 건의했다. 그는 왕준을 익주 자사(益州刺史)로 임명하여 해군 함대 건설을 감독하도록 건의했다.[16] 왕준은 농업 식민지에서 농사를 짓던 부대를 재배치하여 오나라 침공을 위한 선박 건조를 시작했다.[17]

왕준은 함수가 장착된 대형 선박을 많이 건조했다. 이 선박들 중 가장 큰 것은 길이가 120 보였으며, 최대 2,000명의 병력을 수용할 수 있었다. 또한, 전망대와 3층 높이의 튼튼한 나무로 만든 요새가 있었고, 병사들이 쉽게 승선하고 하선할 수 있도록 사방에 문이 있었다. 말들도 배 위에서 자유롭게 달릴 수 있었다.[18] 왕준은 해군 함대를 건설하는 데 총 7년이 걸렸다.

276년 10월, 양호는 사마염에게 오나라 정복 계획을 설명하는 상소를 올렸다.[19] 그는 익주에서 육지와 수로 모두로 공격하고, 형주에서는 강릉현을, 예주에서는 하구를, 서주, 양주, 청주, 연주에서는 말릉을 공격하는 등 여러 방향에서 공격하여 오나라 군대를 혼란시키고 사기를 떨어뜨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손호의 폭정으로 오나라 백성들이 진나라로 투항할 것이라고 예측했다.[19] 사마염은 양호의 견해에 동의했으나, 가충 등의 반대로 실행이 연기되었다.[20]

278년 양호는 사망하면서 두예를 후임으로 추천했다.[21] 한편, 건평군(建平郡; 현재 쯔구이 현 주변)에 주둔하던 오나라 장교 오언은 강을 따라 흘러 내려오는 나무 부스러기를 보고 진나라가 해군 함대를 건조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손호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건평군에 병력을 증강할 것을 요청했으나, 손호는 이를 무시했다.[22]

3. 전투 과정

279년 서진의 사마염은 오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해 대대적인 침공을 계획했다. 이 소식을 들은 오나라 황제 손호는 승상 장제, 사도 하식, 사공 등순 등과 대책을 논의했다. 그 결과, 거기장군 강릉독 오연을 도독으로 삼아 강릉으로 보내 두예에 맞서게 하고, 표기장군 손흠을 하구로 보내 적군을 막게 했다. 또한 장제, 좌장군 심영, 우장군 제갈정에게 10만 군사를 주어 우저에서 각 방면의 군사들을 지원하도록 했다.

진의 오 정복|진의 오 정복중국어의 상세한 전투 과정은 다음과 같다.

날짜위치오나라 병력진나라 병력출처
268강하, 상양, 합비 및 교지군손호, 사기, 정봉, 제갈정사마망, 호열, 사보, 사마준, 양직 (楊稷), 모경 (毛炅), ,
269고양, 교지군정봉, 유사, 설서, 도황양직 (楊稷), 모경 (毛炅), 동원 (董元), 맹간 (孟幹), 맹통 (孟通), 이송 (李松), 왕업 (王業), 찬능 (爨能),
270불명정봉전홍
271수춘손호사마망,
272서릉육항, 좌이, 오연, 채공 (蔡貢), 장함 (張咸), 손준 (孫遵), 유려 (留慮), 주완, 뇌담 (雷譚), 유찬 (俞贊), 주교 (朱喬)보찬, 보기 (步璣), 양호, 양조, 서윤 (徐胤),
273의양 및 여남설영, 노서왕혼
274강하손준 (孫遵), 이승 (李承)계희 (嵇喜)
275강하
277강하 및 여남손심
279년 12월 21일 – 280년 1월 18일여러 지역사마주는 도중을, 왕혼은 강서를, 왕융은 무창을, 호분하구를, 두예는 강릉을, 왕준과 당빈은 익주를 공격했다. 가충은 샹양에서 군사 작전을 조정했고, 양제는 부관, 장화는 물자와 병참을 감독했다.
280년 2월 18일 – 3월 17일여러 지역두예와 왕혼은 국경을 따라 오나라의 방어선을 돌파했다.
280년 3월 18–19일즈구이현, 후베이성왕준과 당빈은 성기를 격파했다.
서릉협, 후베이성왕준은 강에 설치된 오나라 군대의 방어선을 파괴했다.
280년 3월 20일이창시, 후베이성왕준은 서릉을 정복하고 유현을 죽였다.
280년 3월 22–24일징먼시이두, 후베이성왕준은 징먼과 이도를 정복하고 루옌을 죽였다.
쑹즈, 후베이성저우즈는 러 지구에서 손신을 격파하고 생포했다.
280년 3월 25일후베이성왕준은 루징을 격파하고 죽였다.
280년 4월 3일강릉현, 후베이성두예는 강릉을 정복하고 오언을 죽였다.
궁안현, 후베이성호분은 장안을 정복했다.
중국 남부원강상강 강 남쪽에 위치한 오나라 군사령관들이 진나라에 항복했다.
280년 4월 4일뤄양, 허난성사마염은 오나라 정복의 다음 단계를 설명하는 조서를 발표했다.
280년 4월 4–16일우한, 후베이성호분은 왕준의 지원을 받아 하구를 정복했다.
우한과 어저우, 후베이성왕융은 뤄상과 유교를 보내 왕준의 지원을 받아 무창을 공격하게 했다. 유랑과 우빙은 강하와 무창의 지배권을 포기했다.
치춘현황강, 후베이성멍타이는 치춘과 주현의 오나라 군대가 왕융에게 항복하도록 설득했다.
난징, 장쑤성손호장제, 선영, 손진과 제갈경에게 3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양쯔강을 건너 왕혼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280년 4월 17–30일허현, 안후이성저우준, 쉐성, 장반, 장차오가 이끄는 진나라 군대는 양허에서 전투에서 오나라 군대를 격파했다. 장제, 선영 및 손진은 전투에서 사망했다.
어저우, 후베이성왕준은 무창에서 군대를 이끌고 건업을 공격했다. 손호는 장상에게 1만 명의 해군을 이끌고 왕준을 저항하도록 명령했다. 장상은 왕준에게 항복했다.
난징, 장쑤성왕혼, 왕준과 사마주가 군대를 이끌고 건업으로 향하자 허지와 손연은 자발적으로 왕혼에게 항복했다.
난징, 장쑤성손호는 쉐잉과 후충의 조언을 받아 진나라에 항복했다. 그는 왕혼, 왕준과 사마주를 개별적으로 만나 항복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사절을 보냈다.
280년 5월 1일스토, 난징, 장쑤성왕준은 8만 명의 군대와 수백 척의 선박을 이끌고 손호의 항복을 받기 위해 스토로 향했다.



이후 과정은 하위 섹션에서 자세히 다루어진다.

3. 1. 서진의 공격

279년, 서진은 20만 대군을 동원하여 6개 방면에서 오나라를 공격하였다. 두예는 강릉을 공격해 아장 주지에게 수군 800명과 배들을 주어 몰래 장강을 건너 낙향 땅을 야습했다. 곧 오영과 육경, 손흠이 진군해오자 두예는 포성을 일으켜 오군을 섬멸하고 주지는 손흠을, 장상은 육경을 죽이고 오연도 복병에 걸려 붙잡혀 처형당했다.[38][39]

두예가 강릉을 함락시키고 형주 남부 지역으로 내려가자 원수와 상수 일대와 광주의 모든 고을이 인수를 바치며 서진에 항복해왔다. 두예는 형주 지역을 평정했고 이 과정에서 파죽지세라는 사자성어가 생겨났다.

한편 익주 자사 용양장군 왕준당빈과 함께 오나라 단양감 성기를 무찌르고 장강을 따라 진격했다. 이에 손호잠혼의 건의로 장강 바닥에 쇠사슬과 쇠송곳을 깔아두어 강을 따라 내려오는 진나라 전함들을 가라앉게 할 계획이었으나, 이를 알아챈 왕준이 큰 뗏목 수십 개를 떠내려 보내 쇠송곳과 쇠사슬을 치우고 진격하였다.

왕준은 안동장군 왕혼과 합류해 강서를 공격하고, 승상 장제와 좌장군 심영, 제갈정, 손진 등이 군사를 이끌고 마지막 결전을 벌였다.

심영은 왕혼의 부장 주준에 맞서 3차례나 공격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때 오군에 항복했던 서진의 장수 장교가 다시 배반해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혼란 속에서 장제가 전사하고 심영과 손진도 서진의 장수 주지에게 죽었으며 7800명이 전사했다. 제갈정만이 무사히 도주했다.[59][60][61]

왕준과 왕융은 무창을 함락시켰고, 석두성에서는 잠혼이 살해당했으며, 손호는 도준에게 남은 어림군과 장상에게 수군을 주어 보내 막게 했으나 오히려 장상은 서진 군대에게 항복했다.

3. 2. 오나라의 멸망

손호는 승상 장제와 사도 하식, 사공 등순 등을 불러 상의하고 거기장군 강릉독 오연을 도독으로 강릉으로 보내 두예와 싸우게 하고 표기장군 손흠을 보내 하구 등지의 적군을 물리치고 장제와 좌장군 심영, 우장군 제갈정에게 군사 10만을 주어 우저에서 여러 방면의 군사들을 후원하도록 했다.

두예는 강릉을 공격해 아장 주지에게 수군 800명과 배들을 주어 몰래 장강을 건너 낙향 땅을 야습했고 곧 오영과 육경, 손흠이 진군해오자 두예는 포성을 일으켜 오군을 섬멸하고 주지는 손흠을, 장상이 육경을 죽이고 오연도 복병에 걸려 붙잡혀 처형당한다.

두예가 강릉을 함락시키고 형주 남부 지역으로 내려가자 원수와 상수 일대와 광주의 모든 고을이 인수를 바치며 서진에 항복해왔다. 두예는 형주 지역을 평정했고 이 과정에서 파죽지세라는 사자성어가 생겨났다.

익주 자사 용양장군 왕준당빈과 함께 오나라 단양감 성기를 무찌르고 장강을 따라 진격했다. 이에 손호는 잠혼의 건의로 장강 바닥에 쇠사슬과 쇠송곳을 깔아두어 강을 따라 내려오는 진나라 전함들을 가라앉게 할 계획이었으나 이를 알아챈 왕준이 큰 뗏목 수십 개를 떠내려 보내 쇠송곳과 쇠사슬을 치우고 진격하였다.

왕준은 안동장군 왕혼과 합류해 강서를 공격하고 승상 장제와 좌장군 심영, 제갈정, 손진 등이 군사를 이끌고 마지막 결전을 벌였다.

심영은 왕혼의 부장 주준에 맞서 3차례나 공격했으나 별 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이때 오군에 항복했던 서진의 장수 장교가 다시 배반해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혼란 속에서 장제가 전사하고 심영과 손진도 서진의 장수 주지에게 죽었으며 7800명이 전사했고 제갈정만이 무사히 도주했다.

왕준과 왕융은 무창을 함락시켰고 석두성에서는 잠혼이 살해당했으며 손호는 도준에게 남은 어림군과 장상에게 수군을 주어 보내 막게 했으나 오히려 장상은 서진 군대에게 항복했다.

이로써 마침내 왕준이 오나라 수도 건업 석두성 앞까지 진격해 오나라 황제 손호의 항복을 받아 석두성에 입성하였고 오나라의 4주 43군 313현과 52만 3000호구, 3만 2000명의 관리, 군사 23만과 남녀노소 230만 명, 미곡 , 배 5000척, 궁녀 5000명이 모두 서진에게로 넘어갔다.[80]

4. 결과 및 영향

서진사마염은 오나라 황제 손호를 낙양으로 압송하여 귀명후에 봉했다. 손호는 그곳에서 살다가 죽었다.[84] 이로써 서진은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거의 100년에 걸친 분열 시대를 끝내고 중국을 통일했다.

이 원정에 참여한 진나라 지휘관들은 후한 보상을 받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원정에 반대했던 총사령관 가충이 8,000호의 세수를 받는 가장 큰 보상을 받았다. 왕혼은 왕준이 건업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듣고 격분하여 부하들에게 거의 백일 동안 손호를 감시했지만, 결국 왕준이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고 분노하며 선언했다. 왕혼은 조정에 상소를 올려 왕준이 명령을 어기고 전리품을 횡령했다고 주장했고, 왕준 또한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조정에 상소를 올려 왕혼의 말이 모함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왕혼은 진나라 조정에서 훨씬 더 강력하고 영향력이 있었기 때문에 우위를 점했고, 그의 추종자들은 왕준을 투옥할 것을 제안했다. 결국 사마염은 왕준에게 후한 보상을 내림으로써 갈등을 종식시켰다.

4. 1. 중국 통일

서진사마염280년 손호의 항복을 받아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했다. 이로써 후한 말기부터 이어져 온 혼란기가 종식되었다.[84]

사마소촉한을 멸망시킨 후 265년에 병사했고, 그의 아들 사마염이 권력을 계승했다. 사마염은 같은 해에 조환선양을 받아 황제에 즉위하여 진 왕조를 세웠다. 279년, 사마염은 6방향에서 오나라를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20만 진나라 군대는 파죽지세로 오나라 군대를 격파했고, 280년 3월 15일 손호가 항복했다.[84]

왕준(王濬)은 도독 익량 이주 제군사(都督益梁二州諸軍事)에 임명되어 당빈(唐彬)과 함께 동쪽으로 진군, 파추를 공략했다. 호분(胡奮)과 왕융(王戎)은 하구(夏口)·무창(武昌)에서 장강을 따라 내려와 건업(建業)을 공격했다. 두예(杜預)는 남하하여 영릉, 계양, 형양을 점령했다. 왕준은 하구를 공략한 후 왕융과 함께 무창을 탈취하여 장강 상류 지역을 완전히 제압했다.

3월, 왕준 군은 삼산(三山)에 도달했다. 손호는 장상에게 저항을 명했으나 오나라 병사들은 전투 의지가 없었다. 손호는 도준에게 2만 군사를 주었지만, 병사들은 도망갔다. 손호는 설영, 호충의 계략에 따라 투항 서신을 보냈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3월 15일, 손호는 항복했다.[84]

오나라의 멸망으로 후한 말기부터 이어진 군웅할거와 삼국 정립 시대가 끝나고, 중국은 다시 통일되었다.

사마염은 승전 소식에 눈물을 흘리며 양호의 공로를 치하했다. 오나라에서 투항한 손수는 남쪽을 보며 손책이 오나라를 세웠으나 손호가 강남을 버렸다고 탄식했다.[86]

1985년 남경시에서 "대세(大歳)경자[87] 진평오(晋平呉)천하대평"이라고 새겨진 묘의 이 발굴되었는데, 서진의 통일 직후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88]

4. 2. 동아시아 국제 질서 변화

사마염서진을 건국하고 손호가 이끄는 오나라를 멸망시켜 천하를 통일한 사건은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4. 3. 한국사에 미친 영향

서진오 정복 이후, 고구려, 백제, 신라는 서진과 교류하며 선진 문물을 수용하고 외교 관계를 통해 국가의 안정을 도모하려 했다. 특히, 백제는 서진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고구려의 남진을 견제하려 했다. 이는 한반도의 균형 외교와 평화 정책의 역사적 기원으로 볼 수 있다.[45]

5. 주요 인물

진의 오 정복 주요 인물 (오나라)
이름직책비고
손호황제왕준에게 투항
장제재상 겸 군사허현 전투에서 저우준에게 패배, 전사
심영단양태수장제와 함께 전사
손진대장군장제, 심영과 함께 전사
장상유격장군왕준에게 투항
도준진남대장군, 형주목
설영광록훈손호에게 항복 권유
호충중서령손호에게 항복 권유
하식사도
손안건위장군
오연강릉독두예에게 패배, 처형
손흠도독두예에게 패배, 주지에게 피살
육경중하독두예에게 패배, 장상에게 피살
제갈량대사마 부군사
도황무창독, 전장군, 교주목
오언건평태수손호에게 진나라 침공 가능성 경고, 병력 증강 요청 (무시됨)


5. 1. 서진

263년, 조위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사마소종회등애를 파견하여 촉한을 멸망시키는 데 성공했다. 사마소는 이 기회에 오나라의 제압까지 꾀했지만, 종회와 강유가 촉 땅에서 반란을 일으켜 등애를 포함한 수많은 장수를 잃었고, 오나라를 멸망시킬 만큼 충분히 강대한 수군을 보유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촉한 멸망 후의 혼란을 틈타 영안으로 쳐들어온 오나라 군을 몰아내는 데 급급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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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4년 3월, 사마소는 진왕으로 즉위했다. 265년 8월 병사했기 때문에, 아들인 사마염상국의 지위와 진왕의 자리를 계승했고, 아울러 위나라 조정의 실권을 장악했다. 같은 해 12월 원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국호를 진(서진)으로 고쳤다.

269년, 사마염은 양호를 도독 형주 제군사(都督荊州諸軍事)에 임명하여 양양에 주둔시키고, 위관을 도독 청주 제군사(都督青州諸軍事)에 임명하여 임치에 주둔시키고, 숙부 사마주를 도독 양주 제군사(都督揚州諸軍事)에 임명하여 하비에 주둔시켰다. 양호는 병사를 훈련시키고 식량을 비축했으며, 더 나아가 오(吳)의 민심을 사로잡는 데에도 성공했다. 그러나 270년, 량주에서 투발수기능 등 비한족(非漢民族)의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 당분간 대처에 쫓기게 되었다.

272년, 오의 서릉 독(督)인 보천손호에게 무창으로 소환될 것을 명받았다. 보천은 해를 입을 것을 두려워하여, 진에 항복했다. 그러나 보천은 오의 육항(육손의 차남)에 의해 공격받아 멸망했고, 진은 보천 구원에 실패했다.(서릉 전투) 같은 해 왕준을 익주 자사(益州刺史)에 임명하고, 대형 선박 건조와 수군 훈련의 밀명을 내려, 오 공략의 준비를 도모했다. 왕준이 건조한 대선은, 전장 120보, 수용 인원 2000명, 노와 사면에 대문을 배치하고, 말이 달릴 수도 있어, 마치 강 위의 성과 같았다고 한다.[18] 이러한 대선을 대량으로 만들어, 진은 강력한 수군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가충을 필두로 한 신중론도 뿌리 깊어, 개전은 연기되었다. 사마준이 투발(禿髮)의 세력을 크게 약화시키자, 278년, 양호는 오 공략을 유언하고 사망했다. 두예가 후임으로 취임하여, 다가올 전쟁의 준비를 진행해 갔다. 또한 279년에는 마륭이 투발수기능을 토벌하여, 비한족의 반란도 일단 수습되었다.

279년, 두예는 오나라의 서릉독인 장정과 교전하여 승리했다. 장정은 패전을 부끄럽게 여겨 보고하지 않았으므로, 두예는 일부러 손호에게 포로를 돌려보냈다. 과연 장정은 소환되었고, 손호는 수비를 맡은 장수를 무창감인 유헌으로 교체하고, 정남장군인 성구, 서릉감인 정광을 증원군으로 파견했다. 두예는 장정을 몰아내는 계략이 성공한 것을 보고, 오나라가 완전히 기울었다고 판단했다.

같은 해, 왕준과 두예는 사마염에게 오나라 토벌의 시기가 왔다고 상소했다. 두예의 상서가 도착했을 때, 사마염은 장화와 바둑을 두고 있었는데, 장화도 두예의 의견에 전적으로 찬성했다. 이로 인해 사마염은 마침내 정벌을 결심했다. 이 시점에서는 선비족의 족발수기능은 아직 건재했지만, 마침 오나라에서는 광주에서 곽마가 반란을 일으켰고, 반란군은 광주·교주로 확대되어, 오나라는 즉시 진압할 수 없었다.

12월, 사마염은 가충을 대도독으로, 양제를 부통령으로 임명하고, 각 군은 공세를 시작했다. 또한 장화에게는 병량의 수송과 군 전체의 진공을 통괄하게 했다. 가충은 여전히 신중론을 주장했지만, 사마염은 "그대가 가지 않겠다면, 내가 스스로 갈 뿐이다"라고 말하며, 가충에게 대도독을 받들게 했다. 양호가 생존 중에 수립한 작전 계획에 따라, 20만여의 군세가 6방향에서 오나라를 침공하기 시작하여, 신속하게 각지의 오나라 군대의 연계를 끊고, 각개 격파해 나갔다. 사마주는 하비에서 도중으로 향했고, 왕혼은 수춘(현재의 안휘성 육안시수현)으로 출격했다. 왕융은 항성에서 무창(현재의 호북성악주시악성구)으로 진공했고, 호분은 사선(현재의 호북성 무한시강하구)에서 하구(현재의 호북성 무한시 무창구)로 진격했다. 두예는 양양에서 강릉(현재의 호북성 형주시형주구)을 목표로 했고, 왕준과 당빈은 수군을 지휘하여, 촉에서 장강을 따라 내려갔다. 진나라 군대의 서부 방면으로부터의 군대가 주로 공격을 담당했고, 동부 방면으로부터의 군대는 오나라 군대의 주력을 견제하는 책임을 담당했다. 각 군은 협동 행동을 취했으며, 사마염은 건평에 있는 왕준의 군에게 두예의 감독을 받도록 명령하고, 건업(현재의 난징시) 공략은 왕혼이 지휘를 맡게 되었다. 또한, 마륭이 족발수기능을 토벌한 것도 이 무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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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9년 12월에는 왕준·당빈이 지휘하는 7만의 군세가 장강 연안을 공략했고, 280년 정월에는 왕혼 군은 이미 장강을 건너 건업 공략을 시작했다.

2월, 왕준·당빈이 지휘하는 군이 단양을 공격하고, 서릉 협곡으로 진출했다. 오나라 군은 장강에 쇠사슬을 설치하고, 또한 쇠로 된 뾰족한 것을 장강에 풀어놓아 진나라 군의 전진을 막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왕준은 미리, 대형 뗏목 수십 개를 만들어, 뗏목 위에 풀로 만든 인형을 배치하여 뗏목을 선행시키고, 쇠로 된 뾰족한 것을 제거하게 하고, 불을 사용하여 쇠사슬을 녹였다. 진나라 군은 장애물을 순조롭게 제거하고, 서릉·이도·낙향·강릉으로 진격했다. 게다가 호분도 공안을 공격했고, 대부분의 전투는 진나라 군의 승리로 돌아갔다. 유일하게 건평의 오언은 잘 지켰기 때문에, 진나라 군은 조기 공략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억제 병력을 남겨두고 그냥 지나쳤지만, 대세에 영향은 없었다.

한편, 손호는 승상 장제에게 침영·손진 등을 이끌고 3만의 군세로 진나라 군의 장강 도하를 요격하도록 명령했다. 장제 등은 왕혼 군을 목표로 했지만, 결과는 왕혼의 부하인 주준에 의해 진나라 군의 대승으로 끝났다. 이로 인해 장제·침영·손진과 같은 오나라 군의 장군과 병사 5,800명이 참살되었고, 오나라는 조정 내에서부터 민중까지 크게 동요했다. 왕혼 군은 건업에 접근했고, 부하 무장은 즉시 건업 공략을 왕혼에게 건의했다. 그러나 왕혼은 사마염의 장강 이북을 지키라는 명령에 따라, 부하 무장의 건의를 거부하고, 장강 이북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왕준 군을 기다리기로 했다. 또한 사마주 군은 장강 부근에 이르러, 건업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사마염은 왕준을 도독 익량 이주 제군사(都督益梁二州諸軍事)에 임명하고, 왕준과 당빈은 계속해서 동쪽으로 군대를 진격시켜 파추를 공략했으며, 또 호분과 왕융에게 함께 하구·무창에서 장강을 따라 내려와 건업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또한, 별동대로는 두예가 남하하여 영릉·계양·형양을 점령했다. 왕준은 이때 명령에 따라 하구를 공략한 후, 왕융과 함께 무창을 탈취했기에, 진군의 주력은 장강 상류 지역을 완전히 제압했다.

3월, 왕준 군은 삼산(三山)에 도달했다. 손호는 장상에게 군대를 이끌고 저항하게 했지만, 오의 장병들은 이미 전투 의지가 없어 깃발을 흔들며 진군에 투항했다. 이 때문에 손호는 다시 도준에게 2만의 군사를 이끌고 저항하려 했지만, 그 병사들 역시 출격 전에 거의 도망갔다. 이에 이르러 오에는 수비할 장병이 없어져 각 방면에서 진격한 진군은 건업에 도달했다. 손호는 설영·호충의 계략에 따라, 투항한다는 내용의 서신을 가지고 온 사자를 왕준·사마주·왕혼에게 파견하여 이간책을 시도했지만 헛수고로 끝났다. 3월 15일, 손호는 옷을 벗고 등을 드러낸 채 손을 뒤로 묶는 모습(육단면박, 肉袒面縛)[84]으로 투항했고, 왕준은 승전보를 상주했다.

오의 멸망으로 후한 말기부터 이어져 온 군웅할거·삼국 정립의 시대는 끝나고, 중국은 다시 통일 국가가 되었다.

진의 승리 정보가 사마염에게 전달되자, 사마염은 눈물을 흘리며 술잔을 나누고 "이는 양태부(羊祜)의 공로이니, 아쉽게도 그가 직접 보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此羊太傅之功也、惜其不親見之耳)"라고 말했다. 또한, 오에서 진으로 투항하여 표기장군에 임명된[85] 손수는 조정에서 돌아갈 때 장강이 있는 남쪽 방향을 바라보며 "옛날 토역장군(손책)이 젊은 시절에 일개 교위(校尉)로부터 오를 세웠다. 그러나 지금 손호가 항복함으로써 강남을 버리는구나! 유유한 하늘이여, 손호는 어찌 이런 암군인가!(昔討逆壮年、以一校尉創立基業;今孫晧挙江南而棄之!悠悠蒼天,此何人哉![86])"라고 울면서 말했다.

1985년, 남경시 (거의 건업에 해당)에서 "대세(大歳)경자[87] 진평오(晋平呉)천하대평"이라고 각인된 묘의 이 발굴되었다. 서진의 통일 직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88]

진의 오 정복 연표[23]
대략적인 날짜위치사건
279년 12월 21일 – 280년 1월 18일여러 지역진나라는 동오를 대대적으로 침공하기 위해 여러 방향에서 총 20만 명 이상의 군대를 파견했다. 사마주는 도중을, 왕혼은 강서 지역을, 왕융은 무창을, 호분하구를, 두예는 강릉을 공격하고, 왕준과 당빈은 익주에서 공격했다. 가충은 샹양에서 군사 작전을 조정하기 위해 대도독으로 자원하여 복무하기로 마지못해 동의했고, 양제는 그의 부관으로 복무했다. 장화는 이 작전을 위한 물자와 병참을 감독했다.
280년 2월 18일 – 3월 17일여러 지역두예와 왕혼은 국경을 따라 그들의 길을 막는 모든 오나라의 방어선을 돌파했다.
280년 3월 18–19일즈구이현, 후베이성왕준과 당빈은 전투에서 성기를 격파했다.
서릉협, 후베이성왕준은 강에 설치된 오나라 군대의 방어선을 파괴하고 해군 함대가 통과할 수 있도록 길을 열었다.
280년 3월 20일이창시, 후베이성왕준은 서릉을 정복하고 전투에서 유현을 죽였다.
280년 3월 22–24일징먼시이두, 후베이성왕준은 징먼과 이도를 정복하고 전투에서 루옌을 죽였다.
쑹즈, 후베이성저우즈는 러 지구에서 전투에서 손신을 격파하고 생포했다.
280년 3월 25일후베이성왕준은 전투에서 루징을 격파하고 죽였다.
280년 4월 3일강릉현, 후베이성두예는 강릉을 정복하고 오언을 죽였다.
궁안현, 후베이성호분은 장안을 정복했다.
중국 남부원강상강 강 남쪽에 위치한 오나라가 지배하는 군사령관들, 즉 교와 광 지방으로 확장되어 진나라에 자발적으로 항복했다.
280년 4월 4일뤄양, 허난성사마염은 오나라 정복의 다음 단계를 설명하는 조서를 발표했다. 왕준과 당빈은 호분과 왕융을 지원하여 하구와 무창을 정복하고 양쯔강을 따라 말릉으로 항해한다. 두예는 새로 정복한 징저우 남부의 오나라 영토를 평정하고 왕준과 당빈을 돕기 위해 증원을 보낸다. 가충상현에 주둔하여 작전을 감독한다.
280년 4월 4–16일우한, 후베이성호분은 왕준의 지원을 받아 하구를 정복했다.
우한과 어저우, 후베이성왕융은 뤄상과 유교를 보내 왕준의 지원을 받아 무창을 공격하게 했다. 유랑과 우빙은 강하와 무창의 지배권을 포기했다.
치춘현황강, 후베이성멍타이는 치춘과 주현의 오나라 군대가 왕융에게 항복하도록 설득했다.
난징, 장쑤성손호장제, 선영, 손진과 제갈경에게 3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양쯔강을 건너 왕혼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280년 4월 17–30일허현, 안후이성저우준, 쉐성, 장반, 장차오가 이끄는 진나라 군대는 양허에서 전투에서 오나라 군대를 격파했다. 장제, 선영 및 손진은 전투에서 사망했다.
어저우, 후베이성왕준은 무창에서 군대를 이끌고 건업을 공격했다. 손호는 장상에게 1만 명의 해군을 이끌고 왕준을 저항하도록 명령했다. 장상은 왕준에게 항복했다.
난징, 장쑤성왕혼, 왕준과 사마주가 군대를 이끌고 건업으로 향하자 허지와 손연은 자발적으로 왕혼에게 항복했다.
난징, 장쑤성손호는 쉐잉과 후충의 조언을 받아 진나라에 항복했다. 그는 왕혼, 왕준과 사마주를 개별적으로 만나 항복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사절을 보냈다.
280년 5월 1일스토, 난징, 장쑤성왕준은 8만 명의 군대와 수백 척의 선박을 이끌고 손호의 항복을 받기 위해 스토로 향했다.


5. 2. 오나라

263년, 조위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사마소종회등애를 파견하여 촉한을 멸망시키는 데 성공했다. 264년 황제가 된 손호는 더욱 강대해진 위나라에 대한 대응을 강요받았다. 손호는 위나라 사자에게 스스로 황제를 칭하지 않고 몸을 낮춤으로써 위협을 피하려 했다. 그러나 진나라가 성립하자, 손호는 사마소의 조문 명목으로 사자로 보낸 정충에게 진나라를 칠 기회를 얻었다는 진언을 받은 것을 계기로, 일방적으로 외교를 끊었다.[83] 손호는 진나라에 대한 북벌을 꾀하는 한편, 향락에 빠져 술과 여자에 탐닉했으며, 궁궐 건설 등의 토목 공사를 벌이고 간언하는 충신들을 살해했기 때문에, 원망의 목소리는 조정의 관료에서부터 민중에게까지 널리 퍼졌다.

264년 3월, 사마소는 진왕으로 즉위했다. 10월, 사마소는 오나라에 사자를 파견하여 촉한 멸망의 전과를 과시한 뒤, 그대로 오나라를 굴복시키려 했다. 265년 8월 병사했기 때문에, 아들인 사마염상국의 지위와 진왕의 자리를 계승했고, 위나라 조정의 실권을 장악했다. 같은 해 12월 원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국호를 진으로 고쳤다(역사상 서진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마소는 즉시 개전하는 대신, 우선 외교를 통해 오나라를 위협하려 했다. 그래서 먼저 국내를 위무하는 데 힘썼고, 국력을 축적했다. 더욱이, 항복한 촉한의 후주 유선을 안락공으로, 촉한에서 위나라에 항복한 중신들도 각각 제후로 봉하여 익주의 땅을 안정시킴으로써 오나라의 민심을 얻으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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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염은 이 같은 손호의 태도를 보고, 남정(南征)을 위한 장군 선발과 군대 출동을 준비했다. 269년, 사마염은 양호를 도독 형주 제군사(都督荊州諸軍事)에 임명하여 양양에 주둔시키고, 위관을 도독 청주 제군사(都督青州諸軍事)에 임명하여 임치에 주둔시키고, 숙부 사마주를 도독 양주 제군사(都督揚州諸軍事)에 임명하여 하비에 주둔시켰다.

271년, 진의 지배하에 있던 교주는 어사, 설서, 도황 등에 의해 오에 다시 제압되었다. 272년, 오의 서릉 독(督)인 보천은 손호에게 무창으로 소환될 것을 명받았다. 보천은 해를 입을 것을 두려워하여 진에 항복했다. 그러나 보천은 오의 육항(육손의 차남)에 의해 공격받아 멸망했고, 진은 보천 구원에 실패했다.(서릉 전투) 같은 해 왕준을 익주 자사(益州刺史)에 임명하고, 대형 선박 건조와 수군 훈련의 밀명을 내려 오 공략의 준비를 도모했다. 그러나 가충을 필두로 한 신중론도 뿌리 깊어, 개전은 연기되었다.

한편, 오의 황제 손호는 진의 전비에 대해 전혀 경계하지 않고, 장강의 천험을 믿고 방비를 증강하지 않았으며, 여러 번 진에 군대를 파견했다. 육항은 진이 오를 멸망시킬 준비를 하고 있음을 간파하고, 건평군·서릉군에 병력 증강을 요구했다. 또한 건평태수 오언도, 장강에 나무 부스러기가 흘러 들어오는 것을 보고, 왕준이 촉(蜀)에서 배를 건조하고 있다고 추측하며, 손호에게 "진은 반드시 오를 공격할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건평의 병력을 증강해야 합니다. 건평이 함락되지 않으면, (진군은) 장강을 건널 수 없습니다(晋必有攻呉之計、宜増建平兵。建平不下、終不敢渡)"라고 말했지만, 손호는 이러한 경고를 무시했다. 274년, 육항이 사망하자, 오 안에서 진에 대항할 수 있는 명장은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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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9년, 두예는 오나라의 서릉독인 장정과 교전하여 승리했다. 장정은 패전을 부끄럽게 여겨 보고하지 않았으므로, 두예는 일부러 손호에게 포로를 돌려보냈다. 장정은 소환되었고, 손호는 수비를 맡은 장수를 무창감인 유헌으로 교체하고, 정남장군인 성구, 서릉감인 정광을 증원군으로 파견했다. 두예는 장정을 몰아내는 계략이 성공한 것을 보고, 오나라가 완전히 기울었다고 판단했다.

같은 해, 왕준과 두예는 사마염에게 오나라 토벌의 시기가 왔다고 상소했다. 두예의 상서가 도착했을 때, 사마염은 장화와 바둑을 두고 있었는데, 장화도 두예의 의견에 찬성했다. 이로 인해 사마염은 정벌을 결심했다.

12월, 사마염은 가충을 대도독으로, 양제를 부통령으로 임명하고, 각 군은 공세를 시작했다. 또한 장화에게는 병량의 수송과 군 전체의 진공을 통괄하게 했다. 양호가 생존 중에 수립한 작전 계획에 따라, 20만여의 군세가 6방향에서 오나라를 침공하기 시작하여, 신속하게 각지의 오나라 군대의 연계를 끊고, 각개 격파해 나갔다. 사마주는 하비에서 도중으로 향했고, 왕혼은 수춘(현재의 안휘성 육안시수현)으로 출격했다. 왕융은 항성에서 무창(현재의 호북성악주시악성구)으로 진공했고, 호분은 사선(현재의 호북성 무한시강하구)에서 하구(현재의 호북성 무한시 무창구)로 진격했다. 두예는 양양에서 강릉(현재의 호북성 형주시형주구)을 목표로 했고, 왕준과 당빈은 수군을 지휘하여, 촉에서 장강을 따라 내려갔다. 진나라 군대의 서부 방면으로부터의 군대가 주로 공격을 담당했고, 동부 방면으로부터의 군대는 오나라 군대의 주력을 견제하는 책임을 담당했다. 각 군은 협동 행동을 취했으며, 사마염은 건평에 있는 왕준의 군에게 두예의 감독을 받도록 명령하고, 건업(현재의 난징시) 공략은 왕혼이 지휘를 맡게 되었다.

279년 12월에는 왕준·당빈이 지휘하는 7만의 군세가 장강 연안을 공략했고, 280년 정월에는 왕혼 군은 이미 장강을 건너 건업 공략을 시작했다.

2월, 왕준·당빈이 지휘하는 군이 단양을 공격하고, 서릉 협곡으로 진출했다. 오나라 군은 장강에 쇠사슬을 설치하고, 또한 쇠로 된 뾰족한 것을 장강에 풀어놓아 진나라 군의 전진을 막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왕준은 미리 대형 뗏목 수십 개를 만들어, 뗏목 위에 풀로 만든 인형을 배치하여 뗏목을 선행시키고, 쇠로 된 뾰족한 것을 제거하게 하고, 불을 사용하여 쇠사슬을 녹였다. 진나라 군은 장애물을 순조롭게 제거하고, 서릉·이도·낙향·강릉으로 진격했다. 게다가 호분도 공안을 공격했고, 대부분의 전투는 진나라 군의 승리로 돌아갔다. 유일하게 건평의 오언은 잘 지켰기 때문에, 진나라 군은 조기 공략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억제 병력을 남겨두고 그냥 지나쳤지만, 대세에 영향은 없었다.

한편, 손호는 승상 장제에게 심영·손진 등을 이끌고 3만의 군세로 진나라 군의 장강 도하를 요격하도록 명령했다. 장제 등은 왕혼 군을 목표로 했지만, 결과는 왕혼의 부하인 주준에 의해 진나라 군의 대승으로 끝났다. 이로 인해 장제·침영·손진과 같은 오나라 군의 장군과 병사 5,800명이 참살되었고, 오나라는 조정 내에서부터 민중까지 크게 동요했다. 왕혼 군은 건업에 접근했고, 부하 무장은 즉시 건업 공략을 왕혼에게 건의했다. 그러나 왕혼은 사마염의 장강 이북을 지키라는 명령에 따라, 부하 무장의 건의를 거부하고, 장강 이북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왕준 군을 기다리기로 했다. 또한 사마주 군은 장강 부근에 이르러, 건업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사마염은 왕준을 도독 익량 이주 제군사(都督益梁二州諸軍事)에 임명하고, 왕준과 당빈은 계속해서 동쪽으로 군대를 진격시켜 파추를 공략했으며, 호분과 왕융에게 함께 하구·무창에서 장강을 따라 내려와 건업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또한, 별동대로는 두예가 남하하여 영릉·계양·형양을 점령했다. 왕준은 이때 명령에 따라 하구를 공략한 후, 왕융과 함께 무창을 탈취했기에, 진군의 주력은 장강 상류 지역을 완전히 제압했다.

3월, 왕준 군은 삼산(三山)에 도달했다. 손호는 장상에게 군대를 이끌고 저항하게 했지만, 오의 장병들은 이미 전투 의지가 없어 깃발을 흔들며 진군에 투항했다. 이 때문에 손호는 다시 도준에게 2만의 군사를 이끌고 저항하려 했지만, 그 병사들 역시 출격 전에 거의 도망갔다. 이에 이르러 오에는 수비할 장병이 없어져 각 방면에서 진격한 진군은 건업에 도달했다. 손호는 설영·호충의 계략에 따라, 투항한다는 내용의 서신을 가지고 온 사자를 왕준·사마주·왕혼에게 파견하여 이간책을 시도했지만 헛수고로 끝났다. 3월 15일, 손호는 옷을 벗고 등을 드러낸 채 손을 뒤로 묶는 모습(육단면박, 肉袒面縛)[84]으로 투항했고, 왕준은 승전보를 상주했다.

왕준에게 항복한 손호가 있었던 현재 난징의 스토우 성(石頭城)의 석벽 잔해.
이 소식을 들은 손호는 승상 장제와 사도 하식, 사공 등순 등을 불러 상의하고 거기장군 강릉독 오연을 도독으로 강릉으로 보내 두예와 싸우게 하고 표기장군 손흠을 보내 하구 등지의 적군을 물리치고 장제와 좌장군 심영, 우장군 제갈정에게 군사 10만을 주어 우저에서 여러 방면의 군사들을 후원하도록 했다.

한편 두예는 강릉을 공격해 아장 주지에게 수군 800명과 배들을 주어 몰래 장강을 건너 낙향 땅을 야습했고 곧 오영과 육경, 손흠이 진군해오자 두예는 포성을 일으켜 오군을 섬멸하고 주지는 손흠을, 장상이 육경을 죽이고 오연도 복병에 걸려 붙잡혀 처형당한다.

두예가 강릉을 함락시키고 형주 남부 지역으로 내려가자 원수와 상수 일대와 광주의 모든 고을이 인수를 바치며 서진에 항복해왔다.

한편 익주 자사 용양장군 왕준당빈과 함께 오나라 단양감 성기를 무찌르고 장강을 따라 진격했다. 이에 손호는 잠혼의 건의로 장강 바닥에 쇠사슬과 쇠송곳을 깔아두어 강을 따라 내려오는 진나라 전함들을 가라앉게 할 계획이었으나 이를 알아챈 왕준이 큰 뗏목 수십 개를 떠내려 보내 쇠송곳과 쇠사슬을 치우고 진격하였다.

왕준은 안동장군 왕혼과 합류해 강서를 공격하고 승상 장제와 좌장군 심영, 제갈정, 손진 등이 군사를 이끌고 마지막 결전을 벌였다.

심영은 왕혼의 부장 주준에 맞서 3차례나 공격했으나 별 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이때 오군에 항복했던 서진의 장수 장교가 다시 배반해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혼란 속에서 장제가 전사하고 심영과 손진도 서진의 장수 주지에게 죽었으며 7800명이 전사했고 제갈정만이 무사히 도주했다.

왕준과 왕융은 무창을 함락시켰고 석두성에서는 잠혼이 살해당했으며 손호는 도준에게 남은 어림군과 장상에게 수군을 주어 보내 막게 했으나 오히려 장상은 서진 군대에게 항복했다.

이로써 마침내 왕준이 오나라 수도 건업 석두성 앞까지 진격해 오나라 황제 손호의 항복을 받아 석두성에 입성하였고 오나라의 4주 43군 313년과 52만 3000호구, 3만 2000명의 관리, 군사 23만과 남녀노소 230만 명, 미곡 280만 섬, 배 5000척, 궁녀 5000명이 모두 서진에게로 넘어갔다.

진의 오 정복 연표[81]
대략적인 날짜위치사건
279년 12월 21일 – 280년 1월 18일여러 지역진나라는 동오를 대대적으로 침공하기 위해 여러 방향에서 총 20만 명 이상의 군대를 파견했다. 사마주는 도중을 공격하고, 왕혼은 강서 지역을 공격하고, 왕융은 무창을 공격하고, 호분하구를 공격하고, 두예는 강릉을 공격하고, 왕준과 당빈은 익주에서 공격했다. 가충은 샹양에서 군사 작전을 조정하기 위해 대도독으로 자원하여 복무하기로 마지못해 동의했고, 양제는 그의 부관으로 복무했다. 장화는 이 작전을 위한 물자와 병참을 감독했다.
280년 2월 18일 – 3월 17일여러 지역두예와 왕혼은 국경을 따라 그들의 길을 막는 모든 오나라의 방어선을 돌파했다.
280년 3월 18–19일즈구이현, 후베이성왕준과 당빈은 전투에서 성기를 격파했다.
서릉협, 후베이성왕준은 강에 설치된 오나라 군대의 방어선을 파괴하고 해군 함대가 통과할 수 있도록 길을 열었다.
280년 3월 20일이창시, 후베이성왕준은 서릉을 정복하고 전투에서 유현을 죽였다.
280년 3월 22–24일징먼시이두, 후베이성왕준은 징먼과 이도를 정복하고 전투에서 루옌을 죽였다.
쑹즈, 후베이성저우즈는 러 지구에서 전투에서 손신을 격파하고 생포했다.
280년 4월 3일강릉현, 후베이성두예는 강릉을 정복하고 오언을 죽였다.
궁안현, 후베이성호분은 장안을 정복했다.
중국 남부원강상강 강 남쪽에 위치한 오나라가 지배하는 군사령관들, 즉 교와 광 지방으로 확장되어 진나라에 자발적으로 항복했다.
280년 4월 4일뤄양, 허난성사마염은 오나라 정복의 다음 단계를 설명하는 조서를 발표했다. 왕준과 당빈은 호분과 왕융을 지원하여 하구와 무창을 정복하고 양쯔강을 따라 말릉으로 항해한다. 두예는 새로 정복한 징저우 남부의 오나라 영토를 평정하고 왕준과 당빈을 돕기 위해 증원을 보낸다. 가충상현에 주둔하여 작전을 감독한다.
280년 4월 4–16일우한, 후베이성호분은 왕준의 지원을 받아 하구를 정복했다.
우한과 어저우, 후베이성왕융은 뤄상과 유교를 보내 왕준의 지원을 받아 무창을 공격하게 했다. 유랑과 우빙은 강하와 무창의 지배권을 포기했다.
치춘현황강, 후베이성멍타이는 치춘과 주현의 오나라 군대가 왕융에게 항복하도록 설득했다.
난징, 장쑤성손호장제, 선영, 손진과 제갈경에게 3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양쯔강을 건너 왕혼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280년 4월 17–30일허현, 안후이성저우준, 쉐성, 장반, 장차오가 이끄는 진나라 군대는 양허에서 전투에서 오나라 군대를 격파했다. 장제, 선영 및 손진은 전투에서 사망했다.
어저우, 후베이성왕준은 무창에서 군대를 이끌고 건업을 공격했다. 손호는 장상에게 1만 명의 해군을 이끌고 왕준을 저항하도록 명령했다. 장상은 왕준에게 항복했다.
난징, 장쑤성왕혼, 왕준과 사마주가 군대를 이끌고 건업으로 향하자 허지와 손연은 자발적으로 왕혼에게 항복했다.
난징, 장쑤성손호는 쉐잉과 후충의 조언을 받아 진나라에 항복했다. 그는 왕혼, 왕준과 사마주를 개별적으로 만나 항복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사절을 보냈다.
280년 5월 1일스토, 난징, 장쑤성왕준은 8만 명의 군대와 수백 척의 선박을 이끌고 손호의 항복을 받기 위해 스토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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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평가

진(晉)의 오(吳) 정복은 군사력을 이용한 강압적인 통일로, 많은 희생을 초래했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প্রায় 100년에 걸친 권력 투쟁, 전투, 그리고 불필요한 유혈 사태 끝에 중국은 통일되었지만, 통일 이후 서진은 사치와 향락에 빠져 국력이 쇠퇴하고, 결국 팔왕의 난과 같은 내분으로 이어졌다.[1] 이는 권력의 집중과 부패가 국가의 안정을 해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교훈이라고 할 수 있다.

6. 1. 부정적 평가

서진의 통일은 군사력에 의한 강압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희생이 발생하였다. 거의 100년에 걸친 권력 투쟁, 전투, 불필요한 유혈 사태 끝에 중국은 통일되었지만, 통일 이후 서진은 사치와 향락에 빠져 국력이 쇠퇴하고, 결국 팔왕의 난과 같은 내분으로 이어졌다.[1] 이는 권력의 집중과 부패가 국가의 안정을 해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교훈이라고 할 수 있다.

참조

[1] 서적 Zizhi Tongjian 1084
[2] 서적 Zizhi Tongjian 1084
[3] 문서 Bian Wang Lun (Part 2)
[4] 서적 Book of Jin 648
[5] 서적 Chen and Pei 429
[6] 서적 Book of Jin 648
[7] 서적 Chen and Pei 429
[8] 서적 Chen and Pei 429
[9] 서적 Chen and Pei 429
[10] 서적 Chen and Pei 429
[11] 서적 Chen and Pei 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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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서적 Chen and Pei 429
[14] 서적 Zizhi Tongjian 1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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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서적 Zizhi Tongjian 1084
[17] 서적 Zizhi Tongjian 1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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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서적 Zizhi Tongjian 1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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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서적 Book of Jin 648
[24] 서적 Book of Jin 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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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서적 Book of Jin 648
[27] 서적 Huayang Guo Zhi
[28] 서적 Book of Jin 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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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문서 a brother of Tao Hu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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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뉴스 フィクションじゃない リアルな三国志の世界、初来日へ https://www.asahi.co[...] 朝日新聞 2019-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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