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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혜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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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혜공주는 조선 문종과 현덕왕후의 딸로, 1436년에 태어났다. 1450년 정종과 혼인하여 공주로 책봉되었으나, 계유정난으로 남편이 유배되고 모반 혐의로 처형되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세조의 도움으로 재산을 돌려받고 말년을 보냈으며, 1473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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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혜공주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경혜공주
경혜공주
작위공주
본관전주 이씨 (출생)
성씨해주 정씨 (혼인)
출생1436년
출생 장소경복궁, 한성, 조선
사망1474년 1월 17일 (음력 1473년 12월 30일)
사망 장소조선
묘소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가족 관계
아버지문종
어머니현덕왕후 권씨
배우자정종
자녀1남 1녀
아들정미수
정씨 부인

2. 생애

1436년 아버지 문종과 어머니 현덕왕후 권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나 외가와 유모의 손에서 자랐으며, 이후 평창군주(平昌郡主)에 봉해졌다.[1][8]

1450년 15세의 나이로 정종과 혼인하였고,[3] 같은 해 아버지 문종이 즉위하면서 공주로 책봉되었다.[3] 1452년 문종이 승하하고 어린 동생 단종이 즉위하자, 김종서 등과 함께 어린 왕을 보필하려 했으나[7] 1453년 숙부인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난으로 인해 실패하였다.

1455년 남편 정종은 금성대군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고, 경혜공주는 병을 얻기도 했다.[6] 이후 정종은 1461년 모반 혐의로 능지형에 처해졌다.[7] 남편이 처형된 후 경혜공주 또한 연좌되어 순천의 관비가 되었다는 기록이 《연려실기술》 등에 전해지나,[14]실록》에는 관비가 되었다는 기록 대신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어 가난하게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15]

이후 세조는 이를 가엾게 여겨 집을 내려주고 몰수했던 재산과 노비를 돌려주었다.[15] 2012년 발견된 분재기(分財記)를 통해 사망 직전까지 공주의 신분을 유지했음이 확인되었다.[16] 1473년 12월 30일, 3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으며,[7] 죽기 사흘 전 외아들 정미수에게 재산을 상속하며 문종의 제사를 부탁하는 유언을 남겼다.[7] 묘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에 있다.

2. 1. 초기 생애 (1436년 ~ 1450년)

1436년 아버지 문종이 세자 시절 후궁이었던 현덕왕후 권씨에게서 태어났다. 당시 어머니 권씨의 품계는 종3품 양원(良媛)이었으므로 경혜공주는 '현주(縣主)'로 불렸다. 위로 언니가 있었으나 1433년에 태어난 지 1년도 못 되어 사망하였다. 이후 어머니 권씨가 세자빈으로 승격되면서 현주에서 군주(郡主)로 신분이 격상되었고, 세자빈의 거처인 자선당(資善堂)에서 살게 되었다.[8] 이때 받은 작호는 평창군주(平昌郡主)로, 정인지가 지은 영릉 묘지문에 작호명이 나타난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당시 관습에 따라 재액(災厄)을 피하기 위해 조유례(趙有禮)의 집에서 그의 부인과 외가의 여종이었던 유모 백씨(白氏)의 손에서 자랐다.[8] 문종은 훗날 경혜공주가 조유례를 양아버지처럼 여겼다고 언급하기도 했다.[2]

1450년(세종 32) 1월, 15세의 나이로 참판 정충경(鄭忠敬)의 아들 순의대부(順義大夫)[9] 정종(鄭悰)과의 혼인이 결정되었다. 당시 12~13세에 혼인하던 관습에 비해 비교적 늦은 혼인이었는데, 이는 홀로된 아버지 문종의 곁을 떠나기 싫었기 때문이라는 시각이 있다.[8] 또한 할아버지인 세종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혼인을 서두르게 된 측면도 있다. 세종이 승하하면 3년상을 치르는 동안 혼인할 수 없고, 상이 끝나면 경혜공주의 나이가 너무 많아지기 때문이었다.[8] 혼인 당시 경혜공주는 여전히 세자의 딸로서 평창군주(平昌郡主) 신분이었다. 군주로 봉해져야 궁 밖에서 생활하는 데 필요한 경비를 지급받을 수 있었으므로, 조유례의 집으로 나갈 때쯤 평창군주로 봉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8][10] 조선왕조실록에 평창군주라는 이름이 등장한 것은 1446년(세종 28)의 일이다.[1]

2. 2. 혼인과 공주 책봉 (1450년 ~ 1452년)

1450년 (세종 32년) 1월, 15세의 나이였던 경혜공주는 참판 정충경의 아들 순의대부(順義大夫)[9] 정종과 혼인이 결정되었다. 당시 12~13세에 혼인하던 관습에 비하면 비교적 늦은 혼인이었는데, 이는 아내 없이 홀로 지내던 아버지 문종의 곁을 떠나기 싫어했던 공주의 마음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다.[8] 또한, 할아버지인 세종의 건강이 나빠지면서 승하 후 3년상을 치르면 혼기가 너무 늦어질 것을 우려하여 혼인을 서두른 측면도 있었다.[8] 혼인 당시 아버지 문종은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이었기에, 경혜공주의 신분은 공주가 아닌 평창군주(平昌郡主)였다.[1][3]

같은 해 4월, 아버지 문종이 조선의 왕으로 즉위하면서 경혜공주는 군주에서 공주로 책봉되었다.[3] 문종은 딸을 위해 당시 부유한 지역이었던 양덕방(陽德坊) 향교동에 새로운 집을 마련해주었다.[8] 이 과정에서 사헌부 지평 윤면(尹沔)과 문여량(文汝良) 등은 새 집 공사로 인해 민가 30여 채가 철거되어야 하는 문제와 부마 정종에게 이미 집이 있다는 점을 들어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문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5][11] 경혜공주는 정종과의 사이에서 딸을 낳았으나, 요절하였다.

1452년 문종이 승하하고 어린 동생 단종이 즉위하였다. 단종은 자주 누나인 경혜공주의 향교동 집을 찾으며 의지했고[7], 경혜공주는 어린 왕의 후견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7]

2. 3. 계유정난과 시련 (1452년 ~ 1461년)

1452년 아버지 문종이 승하하고 어린 동생 단종이 즉위하였다. 단종은 자주 누나인 경혜공주의 사저가 있던 향교동을 찾았으며, 1453년 숙부인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키던 날 밤에도 경혜공주의 집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7] 계유정난으로 김종서 등 단종의 측근 세력이 제거되고 실권은 수양대군에게 넘어갔으며, 1455년 단종은 결국 왕위에서 물러나 상왕이 되었다.

계유정난 이후 경혜공주의 남편 정종금성대군 사건[12]에 연루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되었다가 경기도 양근으로 이배되었다. 이후 공주가 병이 들자 단종은 세조에게 정종을 잠시 한양으로 불러들여 간병하게 해달라고 청했고, 세조 또한 문종의 유일한 사위임을 감안하여 이를 허락했다.[12] 그러나 사간원의 상소로 정종은 공주의 병이 낫자마자 다시 유배길에 올라야 했다.[13]

경혜공주는 남편 정종의 유배지를 따라 수원으로 갔고, 이후 통진을 거쳐 전라도 광주(光州)까지 동행했다. 이 시기 경혜공주는 임신 중이었다.[8] 세조가 경혜공주가 아들을 낳으면 죽이겠다고 위협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나, 정희왕후가 개입하여 아이를 보호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설도 있다. 1456년경 공주는 광주 유배지에서 아들 정미수를 낳았고, 한 내시가 아이에게 여자 옷을 입혀 궁으로 데려가 정희왕후의 보호 아래 길렀다고도 한다.

1461년, 정종은 승려 성탄(性坦) 등과 함께 모반을 꾀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능지형을 당했다. 남편이 역모죄로 처형되면서 경혜공주 또한 연좌될 위기에 처했다. 《연려실기술》과 안정복의 《순암집》 등에는 경혜공주가 연좌되어 가산이 적몰되고 순천이나 장흥관비로 전락했다고 기록되어 있다.[14] 《연려실기술》에는 순천 부사 여자신(呂自新)이 공주에게 관비의 일을 시키려 하자, 공주가 "나는 왕의 딸이다. 죄가 있어 귀양 왔지만, 수령 따위가 어찌 나에게 천한 일을 시키려 하느냐"며 당당히 맞서 부사가 결국 일을 시키지 못했다는 일화가 실려 있다.

그러나 《실록》에는 경혜공주가 관비가 되었다는 기록은 없으며, 대신 정종 사후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어 매우 가난하게 살았다고 전한다.[15] 이후 세조는 이를 가엾게 여겨 공주에게 집을 하사하고 몰수했던 재산과 노비를 돌려주었다.[15] 정희왕후가 세조를 설득하여 공주의 신분과 재산을 회복시켜 주었다는 기록도 있다.

2. 4. 세조의 비호와 말년 (1461년 ~ 1474년)

1461년, 남편 정종은 승려들과 함께 세조에 대한 모반을 꾀했다는 혐의로 능지형에 처해졌다.[7] 경혜공주 또한 남편의 죄에 연좌되어 신분이 노비로 강등될 위기에 처했으나, 정희왕후의 반대로 모면했다는 기록과 함께,[7] 정식 왕실 사찰인 정업원으로 보내졌다는 기록도 있다.[7]

연려실기술》과 안정복의 《순암집》에는 경혜공주가 남편 사후 가산이 적몰되고 각각 순천과 장흥의 관비(관노)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14] 《연려실기술》에는 순천 부사 여자신(呂自新)이 공주에게 관비의 일을 시키려 하자, 공주가 "나는 왕의 딸이다. 죄가 있어 귀양은 왔지만, 수령이 어찌 감히 나에게 관비의 사역을 시킨단 말이냐."라고 호통쳐 결국 일을 시키지 못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러나 《실록》에는 경혜공주가 관노가 되었다는 기록은 없으며, 대신 정종 사후 머리를 깎고 비구니(여승)가 되었는데 매우 가난하게 살았다고 전한다.[15] 세조는 이를 가엾게 여겨 공주에게 한양에 집을 마련해주고 몰수했던 재산과 노비를 돌려주었는데,[15] 이는 정희왕후가 공주를 위해 세조를 설득한 결과이기도 하다.

2012년 공개된 해주 정씨 대종가 소장 고문서 중에는 경혜공주가 죽기 사흘 전인 1473년 음력 12월 27일에 아들 정미수에게 재산을 상속하며 작성한 분재기(分財記)가 있다. 이 문서에는 '경혜공주지인(敬惠公主之印)'이라는 인장이 찍혀 있어, 공주가 사망할 때까지 공주의 신분을 유지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여겨진다.[16] 예종 대에는 아들 정미수가 종친의 예에 따라 서용되기도 하였다.

1473년(성종 4년) 12월 30일, 경혜공주는 3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성종은 부의(賻儀)로 쌀과 콩 70석, 정포 50필, 종이 100권 등을 하사했다. 죽기 사흘 전 남긴 분재기에서 공주는 "내가 불행히 병이 들어 유일한 아들 미수가 아직 혼인도 못 했는데 지금 홀연히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고 하며, 한양 정선방(貞善坊)의 집과 통진(현 김포시)의 전답을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또한 자신이 죽은 뒤 사당을 세워 아버지 문종의 제사를 지내고 자손에게 이를 이어가도록 당부했다.[7] 공주의 묘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대자골에 있다.

3. 가족 관계

구분관계이름생몰년비고
왕가조부세종1397년 ~ 1450년조선 제4대 국왕
조모소헌왕후1395년 ~ 1446년
아버지문종1414년 ~ 1452년조선 제5대 국왕
언니이름 미상1434년 ~ 1438년요절
본인경혜공주1436년 ~ 1474년
남동생단종1441년 ~ 1457년조선 제6대 국왕
외가외조부권전1372년 ~ 1441년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외조모해주 최씨? ~ 1456년해령부부인(海寧府夫人)
어머니현덕왕후1418년 ~ 1441년문종의 정비
시가시아버지정충경? ~ 1443년형조판서
시어머니여흥 민씨민호덕(閔好德)의 딸
부마정종? ~ 1461년영양위(寧陽尉)
해주 정씨(海州 鄭氏)요절
아들정미수1456년 ~ 1512년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소평공(昭平公)
며느리전의 이씨이덕량(李德良)의 딸
손주손자정승림(鄭承林)1488년 ~ 1534년정미수의 양자 (7촌 조카)[7]


4. 경혜공주가 등장하는 작품

작품명방송사방영 연도배우
한명회KBS 2TV1994년전소희
왕과 비KBS 1TV1998년~2000년김미주
공주의 남자KBS 2TV2011년홍수현
장영실KBS 1TV2016년김보미
신비한 TV 서프라이즈MBC김하영


5. 기타


  • '''작호 변화'''

경혜공주는 아버지 문종이 세자이던 시절 종3품 후궁 소생이었으므로 처음에는 현주(縣主)로 불렸다. 어머니 현덕왕후 권씨가 세자빈으로 승격되면서 군주(郡主)로 승격되었고, 1446년(세종 28년) 정인지가 지은 영릉 묘지문과 조선왕조실록 기록을 통해 당시 작호가 정2품 '''평창군주'''(平昌郡主)였음을 알 수 있다.[8][10] 이후 1450년 아버지 문종이 즉위하면서 공주(公主)로 책봉되었다.

  • * 1436년? ~ 1450년 1월: 정2품 평창군주(平昌郡主) (정확한 책봉 시점은 불명확하나, 1446년 기록에 등장)
  • * 1450년 1월 ~ 1473년 12월 30일: 경혜공주(敬惠公主)

  • '''관비 전락 논란'''

남편 정종이 단종 복위 운동에 연루되어 능지처참된 후 경혜공주의 신분에 대해서는 기록이 엇갈린다. 《연려실기술》과 안정복의 《순암집》에는 공주가 연좌되어 가산이 적몰되고 순천(또는 장흥)의 관비(관노)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14] 특히 《연려실기술》에는 순천 부사 여자신(呂自新)이 공주에게 관비의 일을 시키려 하자, 공주가 대청에 교의를 놓고 앉아 "나는 왕의 딸이다. 죄가 있어 귀양은 왔지만, 수령 따위가 어찌 감히 나에게 관비의 사역을 시킨단 말이냐?"라고 호통쳐서 결국 일을 시키지 못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는 경혜공주가 관비가 되었다는 기록은 없으며, 대신 정종 사후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어 매우 가난하게 지냈다고만 기록되어 있다.[15] 세조가 이를 불쌍히 여겨 집을 하사하고 몰수했던 재산과 노비를 돌려주었다고 한다.[15]

2012년 7월,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기증된 해주 정씨 대종가 소장 고문서 가운데 경혜공주가 아들 정미수에게 재산을 상속한 분재기(分財記)가 공개되었다. 이 문서는 공주가 사망하기 사흘 전인 1473년(성종 4년) 12월 27일에 작성되었으며 (원본 소스에는 성종 5년(1474년)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공주의 사망일인 성종 4년 12월 30일과 비교하면 오류로 추정된다), 문서에 '경혜공주지인(敬惠公主之印)'이라는 공주의 도장이 찍혀 있어, 사망할 때까지 공주의 신분을 유지했다는 강력한 증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16]

  • '''분재기(分財記)'''

경혜공주는 사망하기 사흘 전인 1473년 12월 27일, 외아들 정미수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분재기(分財記)를 작성했다. 문서에는 "내가 불행히 병이 들어 유일한 아들 미수가 아직 혼인도 못 했는데 지금 홀연히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고 하며, 시간이 없어 노비 목록은 다 적지 못하고 우선 정선방(貞善坊)에 하사받은 집과 통진(현 김포시)의 전답을 상속한다고 기록했다. 또한 정선방의 가옥에 대해서는 자신이 죽은 뒤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고 자손 대대로 오래도록 보존하며 살아갈 것을 당부했다.

참조

[1] 역사기록 Veritable Records of Sejong Unknown
[2] 역사기록 Veritable Records of Munjong Unknown
[3] 역사기록 Veritable Records of Munjong Unknown
[4] 역사기록 Veritable Records of Sejong Unknown
[5] 역사기록 Veritable Records of Munjong Unknown
[6] 역사기록 Veritable Records of Sejo Unknown
[7] 웹사이트 Forgotten story of Princess Gyeonghye https://www.koreatim[...] 2014-04-04
[8] 서적 조선공주실록 역사의 아침 2009
[9] 문서 정종이 영양위로 책봉된 것은 단종 때의 일이다
[10] 역사기록 다만 조선왕조실록에 종실녀의 관제를 정해 빈(嬪)·잉(媵)·궁인(宮人)의 딸은 군주(郡主)라 칭하게 된 것은 [[1440년]]이다 1440
[11] 역사기록 조선왕조실록 문종 7권, 문종 1년(1451) 4월 1일 6번째 기사 1451-04-01
[12] 역사기록 조선왕조실록, 세조 1권, 세조1(1455) 윤6월 17일 1번째 기사 1455-07-17
[13] 역사기록 조선왕조실록, 세조 2권, 세조1(1455) 8월 7일 4번째 기사 1455-08-07
[14] 간행물 순암집
[15] 역사기록 조선왕조실록, 성종 38권, 성종5(1474) 1월 1일 4번째 기사 1474-01-01
[16] 역사기록 조선왕조실록, 세조 35권, 세조11(1465) 4월 1일 2번째 기사 1465-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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