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모가와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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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모가와강은 사지키가타케산에서 발원하여 교토 분지를 지나 요도강으로 합류하는, 교토를 흐르는 강이다. 다카노강과 합류하는 지점은 타다스 강변으로 알려져 있으며, 시모가모 신사가 위치해 있다. 과거 가모가와강은 현재의 호리카와강을 따라 흐르던 지류였으나, 헤이안쿄 건설 시 강줄기가 변경되었다는 설이 있다. 가모가와강은 여러 지류와 수원을 가지며, 주요 지류로는 다카노 강 등이 있다. 가모가와강은 교토 시민들의 식수원이자, 가부키의 발상지이며, 다양한 문화와 자연 환경을 품고 있다. 1935년의 대규모 수해 이후 하천 개수 사업이 진행되었으며, 현재는 자전거 방치, 불꽃놀이 등을 금지하는 조례가 시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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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모가와강 | |
---|---|
지리 정보 | |
위치 | 교토부 교토시 |
수계 등급 | 일급 수계 |
수계 | 요도강 |
길이 | 31km |
유역 면적 | 210km2 |
발원지 | 사지키가타케(교토시 기타구) |
다른 발원지 | 우오다니산(교토시 기타구) |
하구 | 가쓰라강(교토시 후시미구) |
일반 정보 | |
이름 | 가모강 |
원어 이름 | 鴨川 (Kamo-gawa) |
별칭 | 오리가와 (鴨川, Kamo-gawa, 오리 강) |
![]() | |
수문학적 정보 | |
하천 체계 | 요도강 |
지리적 정보 | |
국가 | 일본 |
2. 지리
사지키가타케산 주변의 산에서 발원하는 가모가와강은 교토부 기타구 구모가하타 마을과 케이호쿠 마을 경계 부근에서 시작된다.[1] 교토 분지로 흘러 들어간 후 남동쪽으로 굽어져 가미교구 데마치 부근에서 북동쪽에서 흘러오는 다카노강과 합류한다. 이후 나카교구를 통과하여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고, 교토 중심부 시조 거리의 시조 다리 부근에서 시라카와강과 합류한다. 남쪽으로 더 내려가 호리카와강, 니시타카세강과 합류하고, 후시미구 시모토바 부근에서 가쓰라강과 합류하여 요도강의 지류가 된다.[1]
과거 가모가와강 본류는 미소노 다리에서 약 1km 북쪽의 호리카와강을 따라 흘렀으며, 헤이안쿄(현재의 교토) 건설 당시 현재의 경로로 변경되었다는 설이 있다.[2]
가모가와강과 다카노강이 합류하는 강둑은 타다스 강변(일본어: Tadasu-gawara 糺河原)으로 알려져 있으며, 시모가모 신사의 "강 합류점" 신사가 있고, 타다스노모리 숲으로 이어진다.[4]
가모가와강은 기타구 카미가모에서 교토 분지로 나와 가미가모 신사, 시모가모 신사 옆을 남남동으로 흐른다. 가모 대교 직전에서 타카노강과 합류하고, 교토 시내를 정남으로 흘러 시조 대교 상류에서 시라카와와 합류한 뒤 남서쪽으로 흐른다. 고조 대교에서 다시 남하, 구조 고가교를 넘어선 후 남서쪽으로 흐름을 바꾸어 후시미구 시모토바에서 니시타카세강과 합류하여 가쓰라강으로 흘러든다. 나카교구에서 서쪽으로 다카세강을 나누고, 이남에서 병행하여 구조 부근에서 다시 합류한다.
2. 1. 수원
사지키가타케산 주변의 산에서 발원하는 가모가와강은 교토부 기타구 구모가하타 지역에서 여러 지류와 합류하며 시작된다.[1]기타구 구모가하타의 사지키가타케 동부 계곡을 원천으로 하는 '''소후다니강'''과 사지키가타케 남부의 약사 고개를 수원으로 하는 '''구모가하타 이와야강'''이 구모가하타 이와야바시에서 합류하여 '''구모가하타강'''이 된다. 구모가하타에 위치한 긴코미네사 시메이인(이와야후도) 경내에 있는 동굴 (신코쿠츠)에서의 용수가 가모가와강의 시작, 최초의 한 방울로 여겨진다.[10]
구모가하타강은 구모가하타의 우오타니산 남부 계곡을 수원으로 하는 '''나카츠강'''과 데아이바시에서 합류하며, 이 지점부터 하천법에 따른 1급 하천 가모가와강이 된다.[1]
지류 | 수원 | 합류 지점 |
---|---|---|
소후다니강 | 사지키가타케 동부 계곡 | 구모가하타 이와야바시 |
구모가하타 이와야강 | 사지키가타케 남부 약사 고개 | 구모가하타 이와야바시 |
나카츠강 | 우오타니산 남부 계곡 | 데아이바시 |
이 외에도 교토시 우쿄구의 세리오 고개를 수원으로 하는 1급 하천 '''기부네강'''과 교토시 사쿄구의 하나세 고개를 수원으로 하는 1급 하천 '''구라마강'''이 있다. 이 두 하천은 기부네구치에서 합류하여 1급 하천 구라마강이 되고, 야마사치바시 부근에서 가모가와강과 합류한다.[1]
2. 2. 지류
- 쿠라마 강
- * 키부네 강
- 다카노 강
- * 다카타니 강
- * 료 강
- * 이와쿠라 강
- 琵琶湖疏水|비와코 소스이일본어
- 시라카와
- 호리카와
- 니시타카세 강
3. 명칭
가모가와 강(일본어: 鴨川)은 한자로 鴨川라고 쓰며, "야생 오리"를 뜻하는 '카모'(鴨)와 "강"을 뜻하는 '가와'(川)로 이루어져 있다. 賀茂川 또는 加茂川과 같이 다른 한자로 표기되기도 한다. 賀茂川은 《야마시로노쿠니 후도키》(山城国風土記)에 처음 등장하며, 《일본기략》(日本記略)의 815년 6월 19일 기록에는 鴨川로 언급되어 있다.[1] 현재 다카노 강(高野川) 합류점 북쪽은 주로 加茂川, 남쪽은 鴨川으로 구분하여 표기한다.[1]
가미가모(上賀茂)는 교토 분지로 이어지는 계곡 입구 주변 지역으로, 고대 가모(賀茂) 씨족의 근거지였다. 이 지역 이름 오타기 군 가모 블록(愛宕郡賀茂郷)에서 가모(賀茂)라는 지명이 유래되었고, 강 이름도 이 지명에서 비롯되었다.[1]
만남의 다리에서 이와야 다리 북쪽까지 구모가하타 마을을 통과하는 구간은 구모가하타가와(雲が畑川)로 불린다. 이와야 다리 북쪽 발원지까지는 오지타니가와(祖父谷川)로 알려져 있다.[1] 1964년(쇼와 39년) 하천법 시행으로 기점부터 '가모가와'로 표기가 통일되었으나, 관례상 다카노 강 합류점 상류는 '가모 강' 또는 '가모가와', 하류는 '가모가와'로 표기한다. 헤이안 시대에는 유역에 따른 표기 구분이 없었지만, 『일본기략』에는 '가모가와'와 '가모 강' 표기가 혼재되어 있다.[1]
헤이안쿄 동부를 흘러 옛날에는 '동하' 또는 '스자쿠 강'으로도 불렸다. 좌안 시조 하류 쪽 화가(花街) "미야가와초"는 가모가와를 '미야가와'라고 불렀던 것에서 유래한다.[1]
4. 역사
가모가와강은 사지키가타케산 주변 산에서 발원하여 교토 분지로 흘러 들어와 남쪽으로 흐르며, 다카노강, 시라카와강, 호리카와강, 서쪽 다카세강 등과 합류하여 가쓰라강과 합쳐지고, 최종적으로 요도강의 지류가 된다.[1]
과거에는 가모가와강의 본류가 현재의 호리카와강을 따라 흘렀으며, 헤이안쿄(현재의 교토) 건설 시 강을 현재의 경로로 변경했다는 설이 존재한다.[2] 이 강은 교토 주민들에게 중요한 식수원이었고, 교유젠 염색과 같은 공예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8] 또한, 전통 가부키의 발상지이기도 하다.[9]
시라카와 천황은 자신이 다스릴 수 없는 세 가지 중 하나로 가모가와강의 물을 언급할 정도로, 과거에는 잦은 홍수가 발생했다.[1] 하지만, 현재는 강둑이 콘크리트로 보강되고 배수 시스템도 개선되었다.
미나모토노 요시쓰네와 벤케이의 전설, 이즈모노 오쿠니와 가부키의 탄생, 스미노쿠라 료이와 다카세강 건설 등 가모가와강과 관련된 다양한 역사적 사건과 인물들이 있다.
가모가와강 유로 변경설은 1932년 츠카모토 츠네오가 제창한 학설로, 헤이안쿄 건설 당시 가모가와강의 본류가 현재와 달랐다는 주장이다. 이 학설은 오랫동안 주류 학설로 받아들여졌으나, 1988년 요코야마 타쿠오가 지질학적 증거를 통해 반박하면서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4. 1. 헤이안 시대
헤이안쿄(현재의 교토) 건설 당시, 가모가와강은 현재의 경로로 변경되었다는 설이 있다.[2] 역사가 허버트 E. 플루초우에 따르면, 강이 수도를 가로질러 흐르면 국가가 분열될 수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강을 돌리는 것이 새 수도 건설의 첫 번째 과제 중 하나였다.[3] 가모가와강은 원래 현재의 호리카와 거리를 통해 흘러 현재의 합류점 남쪽에서 다카노강과 만났으므로, 수도 부지 조성을 위해 대규모 공사가 필요했다.[3]헤이안쿄에서 가모가와강은 도읍의 동쪽 경계였다. 풍수의 사신상응 사상에 따라 동쪽의 신인 "청룡"에 비유되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지만, 이는 사서에서 확인되지 않으며 후세의 추론이 통설화된 것으로 보인다.
고대 鴨川(가모가와) 상류 유역은 가모노아타에씨의 본거지였다. 가미가모 신사와 시모가모 신사는 이 씨족의 신을 모신다.
4. 2. 중세 시대
8세기 말, 새로운 헤이안쿄(현재의 교토)에 궁궐이 건설되면서 가모가와 강의 흐름은 궁궐 동쪽으로 변경되었다.[7] 홍수는 종종 고대 수도를 위협했고, 시라카와 천황은 자신이 다스릴 수 없는 세 가지로 엔랴쿠지의 무장 승려인 소헤이, 주사위, 그리고 가모가와 강의 물을 언급하기도 했다.미나모토노 요시츠네와 벤케이가 강을 가로지르는 고조 다리(현재의 다리가 아니라 아마도 마쓰바라 다리)에서 만났다는 유명한 전설은 헤이안 시대 말기를 배경으로 한다.
중세에는 시조에서 고조의 강변이 환락가가 되어 많은 예능인들이 모여들었다. 그중 한 명이 이즈모노 오쿠니이다. 1603년 이즈모노 오쿠니는 여성 무용수들로 구성된 극단을 결성하여 강의 마른 강바닥에 임시 무대를 설치하고 공연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가부키의 발상지로 여겨진다.[9] 현재 시조 대교 동쪽에 있는 미나미자는 연말연시 가오미세로 유명한데, 이는 시조 강변이 예능의 땅이었음을 보여주는 흔적이다. 또한 기온, 폰토초, 미야가와초 등 하나마치가 펼쳐져 있는 것도 그 흔적이다.
4. 3. 근세 시대
1614년(게이초 19년) 스미노쿠라 료이·소안 부자에 의해 다카세가와가 개착되어 교토와 오사카를 잇는 수로로 이용되었다. 1890년(메이지 23년) 비와코 소스이에 의해 비와호와도 연결되었으나,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철도 개통으로 인해 수운은 쇠퇴했다.4. 4. 근대
1996년, 교토를 방문한 프랑스의 시라크 대통령(전 파리 시장)은 마스모토 요리카네 시장과의 회담에서 센 강의 퐁 데 자르(예술교)를 본뜬 다리를 가모가와강에 건설하는 것을 제안했다. 이는 1998년이 "일본에서의 프랑스 해"에 해당한다는 점과 교토시와 파리시의 우호 협약 체결 40주년에 해당한다는 점을 고려하여 기념 사업으로 구상되었지만, 이 계획이 발표되자 "새로운 명소가 될 것이다"라며 환영하는 의견과 "프랑스풍 디자인"이 경관을 해친다는 비판이 동시에 제기되어 여론이 양분되었다. 1997년에 실시된 도시 계획안 공고·열람에서는 계획에 찬성하는 의견서가 반대를 웃돌았지만, 계획에 반대하는 시민 단체는 "의견서의 내용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고 수치만을 비교하고 있다"며 비판했고, 계획 결정의 졸속성 또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프랑스의 르몽드지가 계획을 비판하는 기사를 게재하는 등, 교토 시외까지 논쟁이 확대되었고, 결국 1998년에 시는 예술교 계획을 백지 철회했다.4. 5. 치수
가모가와 강은 예로부터 잦은 범람을 일으키는 '폭군 하천'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는 대도시를 흐르는 하천임에도 경사가 급하고, 헤이안쿄 건설 당시 기타야마의 나무를 베어낸 것과 도시가 동쪽으로 확장되면서 강변이 시가지화된 것이 원인이었다.[1]824년 (덴초 원년)에는 치수를 담당하는 방압하사(防鴨河使)라는 관직이 설치되었지만, 홍수는 멈추지 않았다. 시라카와 법황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천하 삼대 불여의) 중 첫 번째로 "가모의 물"을 꼽을 정도였다.[1]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토이를 축조했는데, 이 오토이의 동쪽 부분은 가모가와 강을 따라 설치되어 제방 역할도 겸했다. 1670년 (간분 10년)에는 이마데가와 거리에서 고조 거리 구간에 간분 신제방을 설치하여 오토이와의 사이를 새로운 시가지로 개발하였다.
4. 5. 1. 쇼와의 가모가와 수해
1935년 (쇼와 10년) 6월 29일 새벽에 발생한 가모가와 강 수해로 사망자 12명, 부상자 71명, 가옥 전/반파 482호, 37.2km2가 침수되었다.[12] 가모가와 강에 걸린 26개의 다리 중 고조 대교 등 15개의 다리가 유실되었다. 같은 날 오전 중에 상류의 다리가 잇따라 유실되는 과정에서 다리 부재가 산조 대교나 당시 콘크리트 아치교였던 시조 대교에 걸려 강의 흐름을 막아 폰토초와 산조 이남의 키야마치 거리가 탁류에 잠기는 등 시내 침수에 박차가 가해졌다.게이한 본선 노반 유실, 역 및 승강장, 비와코 소수의 도토리 갑문이 파손되고 히가시야마구 측의 미야가와초도 침수되었으며, 아침에는 도토리 다리, 마쓰바라 다리, 고조 대교가 붕괴되어 쇼멘 다리를 막아 더욱 큰 피해를 입혔다.[12] 이 홍수로 다리 피해가 없었던 것은 기타오지, 가모, 시치조의 3개의 다리뿐이었다. 복구 공사 중인 같은 해 8월 10-11일에 걸쳐 재차 호우로 가모가와 강에 걸린 가교가 유실되는 등의 피해를 입었다. 산조 대교 좌안의 제방도 붕괴되었다.[13]
이를 계기로 비와코 소수의 암거화, 시오코지 다리 부근에 수력 발전소 건설, 게이한 선의 지하화를 포함한 대규모 하천 개수 사업이 계획되었으나, 전쟁으로 인한 중단과 게이한 선 지하화, 소수의 암거화, 발전소 건설은 중지되었다. 1947년 (쇼와 22년)에 가모가와 강의 개수 공사는 완성되었다.[14] 그때까지 서쪽에 남아 있는 수로 (미소소기 강)의 높이에서 2m 가까이 하도가 파이고, 고조 대교 - 시오코지 다리 사이의 게이한 선의 녹지대를 철거하여 강의 폭을 넓히고, 낙차 수십 cm의 댐을 많이 만들어 강의 유속을 억제하는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4. 5. 2. 가모가와 유로 변경설
가모가와강 유로 변경설은 1932년(쇼와 7년)에 자연과학자인 츠카모토 츠네오가 제창한 학설이다.[17] 츠카모토는 헤이안쿄 건설 당시 가모가와강의 본류가 미소노 다리에서 약 1km 북쪽의 호리카와를 따라 흘렀으며, 현재의 유로는 인공적으로 변경된 것이라고 주장했다.[2] 그는 지세·지형학적, 지질학적, 역사적 근거를 들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했다.츠카모토의 주장에 따르면, 카미가모 부근의 지형으로 보아 가모가와강이 남동쪽으로 흐르는 것은 부자연스러우며, 원래는 북쪽에서 선상지를 형성하며 남하하여 호리카와·니시노토인강 부근을 흘렀다고 한다. 따라서 카미가모에서 다카노강과의 합류 지점인 데마치까지는 인공 하천이라는 것이다. 또한, 현재 다카노강과 합류하는 지점부터 상류 약 3.3km와 하류 2.7km의 두 직선 부분[18]이 인공적으로 굴착된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츠카모토의 설은 지질 조사와 지형 관찰이라는 과학적 근거를 동반했기 때문에, 하야시야 타츠사부로와 같은 역사학자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져 1980년대까지 주류 학설로 자리 잡았다.[19] 그러나, 사서나 전승 등에서 가모가와강에 관한 대규모 공사가 있었다는 기록이 확인되지 않아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들도 있었다.
1988년, 도지샤 대학 교수였던 요코야마 타쿠오는 지질학적 관점에서 츠카모토 설을 부정했다.[19] 그는 지하철 카라스마선 공사 당시 카라스마 중학교 부근 굴착 결과 지하 5m에서 기반암이 발견된 것을 근거로, 지하 산맥이 옛 가모가와강의 흐름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현재의 가모가와강 흐름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주장했다.[19] 또한, 츠카모토가 제시한 "교토시 지질도"는 헤이안쿄 천도 직전의 선상지 지질이 아니라 3만 년 이상 전에 형성된 선상지의 것이라고 반박했다.
요코야마의 주장은 츠카모토 설을 지지하던 역사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쳐, "츠케카에는 없었다"라는 견해가 정설처럼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요코야마 설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타카하시 마나부[20], 코타니 신지로[21], 아라이 마사오[22], 우에무라 요시히로, 카토 시게오[23] 등 여러 분야의 연구자들이 요코야마 설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비판의 주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후나오카야마에서 쇼코쿠지로 이어지는 지하 산맥의 기반암(지하 5m에 존재)은 선상지대 형성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 능선 남쪽에 퇴적물로 남겨진 습지나 함몰 지형이 없다.
- 지하 기반암이 표고차 +20m 이상·4km 상류의 카미가모 부근에서 가모가와강의 진로 선택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자연지리학적 관점에서는, 3만 년 전 이후 가모가와강이 그전에 형성된 선상지를 하각(下刻)하고 단구화하면서 범람 범위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했으며, 헤이안쿄 조영 시에는 이마데가와 거리 부근에서는 어소의 중심, 마루타마치 거리 부근에서는 교토부청 동단보다 동쪽을 넓은 범위로 범람했고, 많은 일시적인 유로가 있었다는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또한, 남류하여 헤이안쿄 구역에 이르는 호리카와는 홍적세에 형성된 선상지대를 침식했을 때의 가모가와강의 하도 중 하나이지만, 조몬 시대 후기에는 대체로 지형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지형면에 위치하며, 헤이안쿄 조영 시에는 구하도가 되어 있었다는 지적이 있다.
결론적으로, 가모가와강의 지류가 호리카와 부근을 남류했다는 츠카모토의 주장은 부정되지만, 보다 현재의 가모가와강 쪽(동쪽)으로 치우쳐 있었다고 하더라도 선상지 위를 분기하며 지류를 이루었던 옛 가모가와강이 인위적으로 통합되어 현재에 가까운 유로로 변경되었을 가능성은 부정할 수 없다. 아라이·카토는 가모가와강의 츠케카에가 헤이안 건도 때가 아니라 6세기 이후 부근에 정주한 카모 씨에 의한 개발 도중에 이루어졌다는 가설을 제시하기도 했다.[22]
다카노강(가모가와)에 대해서도, 요코야마는 옛 다카노강이 데마치 부근에서 남서쪽으로 흘렀다는 츠카모토의 주장을 반박했지만, 가모가와 선상지의 형성 시기를 홍적세 이전으로 보는 요코야마나 이시다의 주장은 충적세로 보는 자연지리학의 지견에 의해 부정되고 있다.
카토는 고고학적 흔적으로부터 헤이안 시대에도 헤이안쿄 좌경 구역에 북동에서 남서로 향하는 물의 흐름이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는 점을 들어, 옛 타카노강의 세분류가 조영 시에 헤이안쿄 좌경을 관통하고 있었으며, 조도에 앞서 유로가 남쪽으로 변경된 것이 확실하다고 주장한다.
가모가와강 공사가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옛 유로를 이용했기 때문에 대규모 굴착이 필요하지 않았거나, 조도라는 대사업 중에서는 특기할 만한 공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다.
이처럼 츠카모토의 "가모가와 츠케카에설"을 부정하고 과거의 것으로 만든 요코야마 설이지만, 여러 학문 분야의 검토를 통해 헤이안쿄 조영 시에 "기타야마에서 정남쪽으로 향하여, 호리카와의 위치에 큰 하폭으로 관류[19]"하고 있었다는 이미지에 대해서는 다시 부정되는 한편, 원래부터 대체로 현재의 유로였다는 것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5. 문화
가모가와강은 교토 주민들에게 중요한 식수원이자, 교유젠 염색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과거에는 교토 유젠을 가모가와 강물에 말리는 "유젠 나가시"가 행해졌지만, 수질 악화 등의 문제로 1970년대에 중단되었다.
이 강은 전통적인 일본 라쿠 도자기 유약 재료인 돌의 원천이기도 하다.[8]
가부키는 1603년 이즈모노 오쿠니가 여성 무용수들로 구성된 극단을 결성하여 가모가와강의 마른 강바닥에 임시 무대를 설치하고 공연을 시작하면서 탄생했다.[9]
5. 1. 납량상
가와도코(ゆか일본어)라고도 한다. 니조 대교부터 고조 대교에 걸쳐 가모가와 서안의 요리점에서는 5월부터 9월에 걸쳐 강가에 설치된 나무로 된 상을 설치한다. 북쪽 구역(니조 거리부터 폰토초 공원의 가미키야마치, '''폰토초''' 북쪽)과 남쪽 구역(폰토초 공원에서 고조 거리의 '''폰토초''' 남쪽, 니시이시가키, 시모키야마치)에 위치해 관광객을 매료하고 있다.
5. 2. 가모가와 등간격의 법칙
산조 대교와 시조 대교 사이의 강가는 폰토초나 번화가에서 가깝기 때문에 주말 오후부터 밤에 걸쳐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이 때, 커플이나 그룹 간의 간격이 일정하게 유지되는 현상이 나타나는데, 이를 "가모가와 등간격의 법칙"이라고 부른다.[26]5. 3. 가모가와 델타
가모가와 강과 다카노강이 합류하는 지점의 삼각 지대를 통칭하여 가모가와 델타라고 부른다. 데마치마스 형 상점가와 인접해 있으며, 복잡한 관광 명소와는 거리를 둔 시민들의 휴식 공간이 되고 있다. 유정천 가족, 케이온! 등 유명 작품의 성지이기도 하며, 타마코 마켓의 무대가 된 데마치마스 형 상점가와 함께 다른 지역에서 방문하는 사람들도 많다.5. 4. 고전 문학
가모노 조메이가 신고킨와카슈에 "이시카와야 세미노코가와노 키요케레바 츠키모 나가레오 타즈네테조스무"라는 노래를 수록했다. 이 노래는 "가모가와의 흐름이 맑고 아름다워서 (사람뿐만 아니라) 달까지 세미(瀬見)를 보러 와서 강물에 머무른다"는 의미이다.[27]하지만 겐쇼는 "전혀 들어본 적이 없다."라고 평가를 유보했고, 가모노 스케카네는 "내부적인 아명을 함부로 퍼뜨리고, 상황(上皇)도 행차하시는 성지를 세속화시켰다"는 등 맹렬하게 비난했다.[28]
6. 자연
가모가와에는 다양한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일본장수도롱뇽은 가모가와 상류에 서식하며 특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붉은부리갈매기는 10월 하순부터 5월 상순까지 가모가와에서 겨울을 나는 철새이다. 은어는 과거 가모가와에서 자연적으로 산란했지만, 현재는 인공 방류에 의존하고 있다. 류몬 보 철거 이후 연어의 소상도 확인되었다.
6. 1. 일본장수도롱뇽
가모가와강 상류의 구모가타에는 특별 천연기념물인 일본장수도롱뇽이 서식하고 있다. 폭우 후에는 교토 시가지까지 떠내려오는 경우가 있다. 또한, 인위적으로 유입된 중국장수도롱뇽과의 교잡이 문제가 되고 있다[29]. 교토시가 허가를 받아 가모가와강 상류에서 포획하여 DNA 감정을 실시한 결과, 포획한 일본장수도롱뇽의 90% 이상이 교잡종이거나 중국장수도롱뇽이었다[30].6. 2. 붉은부리갈매기
붉은부리갈매기는 10월 하순부터 5월 상순까지 비와호에서 겨울을 나면서 매일 가모가와강까지 날아온다. 지금은 겨울철 풍물시가 되었지만, 가모가와강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의외로 최근의 일로, 1974년의 일이다. 이세 이야기에서는 '''미야코도리'''(붉은부리갈매기)를 '교토에서는 볼 수 없는 새'라고 기록하고 있다.6. 3. 은어
가모가와강의 은어는 전쟁 전까지 자연적으로 거슬러 올라왔으나, 1935년 두 차례의 수해에 대한 대책으로 하천 바닥을 굴착하고 여러 둑을 설치하면서 이동이 어려워졌다. 현재는 가모가와강 어업협동조합이 비와호산 은어를 방류하고 있다.2011년 5월, 교토시와 가모가와강 어업협동조합 등은 천연 은어의 부활을 목표로 '교토 강물의 은혜를 활용하는 모임'을 발족했다[31]. 이 모임은 2010년 교토시 조사에서 은어 이동을 방해하는 것으로 확인된 류몬 보에 대해, 가모가와강과 니시타카세 강 합류 지점 좌안에 삼나무 각재로 만든 가설 어도를 설치했다. 이후 정기 관측 결과 천연 은어의 이동이 확인되었다[32]. 2012년 5월 16일에는 시조 대교 하류의 보에도 대나무로 만든 가설 보가 설치되었는데, 이는 보 하류부 수심이 얕아 은어가 보를 넘기 위한 활주로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33]. 이후 류몬 보는 철거되었다.
6. 4. 연어
류몬 보가 철거됨에 따라 은어뿐만 아니라 연어의 소상도 확인되었다[34]。7. 수력 발전
가모가와강의 지류인 구라마강, 시즈하라강, 가모가와강에서 취수하여 수로식 수력 발전을 하고, 간사이 전력 라쿠호쿠 발전소에서 가모가와강으로 방류한다.[1] 1908년(메이지 41년) 라쿠호쿠 수력 전기 주식회사가 설치하였고, 1914년(다이쇼 3년)에 교토 전등의 발전소가 되었다.[1] 이후 1940년(쇼와 15년)에 교토시에 매각되어 교토시 전기국 소관의 시영 발전소가 되었다.[1] 1942년(쇼와 17년) 배전 통제령에 의해 간사이 배전에 현물 출자되었다.[1] 1951년(쇼와 26년), 전기 사업 재편성에 따라 간사이 배전에서 간사이 전력으로 이관되었다.[1] 출력은 1호기 200kW, 2호기 250kW로 총 450kW이며, 1기당 출력은 소수력 발전 발전소 수준이지만 현재도 가동 중이다.[1]
8. 주요 교량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대부터 공설교로 알려진 산조 대교와 고조 대교, 오타가키 렌게츠가 사재를 털어 만든 마루타마치 다리,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 만든 시조 대교 등 가모가와 강의 다리들은 각각 다양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36][37]
1935년(쇼와 10년) 6월 교토 수해로 인해 많은 다리가 붕괴되거나 교체되었으며, 전후 도로 확폭 및 노후화로 인해 1970년대 이후에도 여러 다리가 교체되었다.[36][37] 현존하는 다리 중 가장 오래된 다리는 1913년 봄에 준공된 시치조 대교이다.[36][37] 2017년 말 기준으로 가모 대교, 고진 다리, 니조 대교는 내진 보강 및 안전 기준에 맞춘 개수가 이루어지고 있다.[38]
가모가와 강의 주요 교량은 상류부터 다음과 같다.
- 이와야 다리
- 데아이 다리
- 야마유키 다리
- 주산 다리
- 다카하시
- 쇼타 다리
- 시쿠로 다리
- 가모가와 통학교
- 니시가모 다리
- 미소노 다리(미소노바시 거리)
- 가미가모 다리(겐이 거리)
- 기타야마 대교(기타야마 거리)
- 키타오지 다리(키타오지 거리)
- 이즈모지 다리(쿠라마구치 거리)
- 아오이 다리(시모가모 혼도리)
- 데마치 다리
- 가모 대교(이마데가와 거리)
- 고진 다리(고진구치 거리)
- 마루타마치 다리(마루타마치 거리)
- 니조 대교(니조 거리)
- 미이케 대교(미이케 거리)
- 산조 대교(산조 거리)
- 시조 대교(시조 거리)
- 돈구리 다리
- 마츠바라 다리(마츠바라 거리)
- 고조 대교
- 쇼멘 다리(쇼멘 거리)
- 시치조 대교(시치조 거리)
- 시오코지 다리(시오코지 거리)
- (JR도카이도 본선 가모가와 교량)
- (JR도카이도 신칸센 철교)
- (JR나라선 철교)
- 구조 육교(구조 거리)
- 히가시야마 다리
- 토카 다리(주조 거리)
- 칸신 다리(타케다 가이도)
- 미즈스 다리
- (긴키 일본 철도교토선 철교)
- 타케다 다리
- 교토 미나미 대교(아부라코지 거리)
- 오미야 대교(오미야 거리)
- 토바 대교(국도 1호선)
- 가모가와 대교(메이신 고속도로)
- 코에다 다리
- 쿄카와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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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条大橋昭和18年より74年ぶりに改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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