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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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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덕룡은 1960년대 학생운동 지도자 출신으로, 6.3 항쟁에 참여하여 서울대학교에서 제적되었다. 이후 김영삼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하여 민주자유당 사무총장, 정무1장관 등을 역임했다. 5선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한나라당 부총재와 원내대표를 역임했다. 이명박 정부에서 대통령 국민통합특별보좌관을 지냈으며, 문재인 정부에서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으로 내정되었다.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한 입장 변화와 부인 공천 비리 연루 등의 논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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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룡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김덕룡
출생일1941년 4월 6일
출생지일제강점기 전라북도 익산군
본관김녕(金寧)
직업정치가
종교개신교
정당무소속
의원 선수5
의원 대수13·14·15·16·17
지역구서울 서초구 을(13·14·15·16·17)
경력
경력신민당 김영삼 총재 보좌관 및 비서실장
민주화추진협의회 기획조정실장
13~17대 국회의원 (5선)
통일민주당 대변인
통일민주당 정무위원
통일민주당 중앙청년위원장
민주자유당 당무위원
민주자유당 서울특별시지부장
민주자유당 사무총장
제17대 정무제1장관
제22대 정무제1장관
한나라당 부총재
한나라당 대표권한대행
한나라당 원내대표
한나라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상임고문
대통령실 국민통합특별보좌관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대표상임의장
제17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
학력
학력서울대학교 사회학

2. 주요 이력

1964년 박정희 정권의 한일 국교 정상화에 반대하면서 대일굴욕외교 반대운동인 1965년 6.3 항쟁에 참여하여 '대일굴욕외교반대 서울대투쟁위원장'을 맡았다.[2] 1964년 3월 정부는 3월 5일 정부와 여당 연석회의를 열고 3월 10일부터 농상회담, 12일부터 본회담, 4월에 외상회담을 개최한다는 한일 협상 스케줄을 발표하였다.[3] 3월 6일 민정, 민주, 자민, 국민의 당 등 재야의 전 야당과 사회[3], 종교, 문화단체 대표 등 저명 인사 200명이 주축이 되어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 투쟁위원회를 결성하였다.[3] 3월 9일 서울 종로예식장에서는 각계 정치인, 재야 인사 등이 모여 구국선언을 채택하고 반대투쟁에 전심전력으로 총궐기할 것을 다짐했다. 대일굴욕외교투쟁위 의장의 책임을 맡은 윤보선은 구국선언문을 낭독하였다.[3] 장택상한일회담을 한·일 합방에 비유하였다. 장택상은 한·일 합방은 저들의 뜻대로 될 리가 없다.[4] 고 비판하였다.

5월 30일 서울대학교 문리대생들이 교정에서 자유쟁취궐기대회를 열어 한일회담 성토와 박정희 정권 성토식을 한 다음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이는 6.3 항쟁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5] 학생회장인 김덕룡은 '오늘의 단식투쟁은 내일의 피의 투쟁이 될 지도 모른다'는 선언문을 낭독하고 단식농성에 들어갔다.[5]

윤보선서울대 문리과 학생회장 김덕룡의 선언문을 비장한 선언문[3] 이라며 예찬하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단식농성에 참여하는 학생들 수가 점점 늘어갔다. 무저항적인 학생들의 농성 현장에는 교수들과 시민들이 줄을 이어 찾아와 그들을 격려하고 먹을 것을 놓고 갔다.[3] 윤보선함석헌은 함께 농성현장을 찾아갔다. 윤보선은 이를 두고 정치적인 목적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자식 같은 학생들의 애처로움을 위로해 주기 위한 마음이 더 컸던 것이다[5] 라고 하였다.

그 뒤 계엄령이 선포되고 학생회 간부들이 검거되면서 김덕룡도 〈6.3 항쟁〉을 주도한 혐의로 투옥당하였다. 김덕룡이 투옥된 후 그는 서울대학교에서 제적되었으며 이로 인해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3년 수료하고[6] 중퇴하게 되었다.[7]

이명박 등과 한·일 국교정상화 반대시위를 함께 하면서 교류하였다.[8] 당시 고려대 상대 학생회장이었던 이명박과 인연을 맺고 '6.3동지회' 모임을 조직하고 활동했다.[2] 나중에 미국 포틀랜드주립대학교에서 명예인문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2]

1970년에는 신민당 국회의원 김영삼의 비서로 발탁, 정계에 입문하였다.[7] 김영삼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한 그는 일명 "YS의 분신"이라는 애칭이 유명할 정도로 김영삼과의 오랫동안 측근으로 지내기도 하였다. 이후 김영삼신민당 총재가 되면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 비서실장을 지냈다.[7]

1990년 10월 4일 오후 6시 40분쯤 한국외국어대학교 재학 중 민학투련 출신이었던 탈영병 윤석양 이병의 폭로에 의해 국군보안사령부의 사찰 대상 중 한 사람이었음이 밝혀졌다.[14] 윤석양은 탈영 후 서울시 연지동 기독교회관 7층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사무실에서 「양심선언」을 통해 탈영 당시 보안사에서 갖고 나온 동향 파악 대상자 개인색인표 신상철, 이들 내용이 입력된 컴퓨터 디스킷을 공개했다.[14]

1992년 김영삼의 선거 캠프에서 활동하였다. 1992년 12월 김영삼이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후 김영삼 정부에서 1993년 정무1장관, 1995년 민주자유당 사무총장 등 요직을 두루 지냈다. 1996년 다시 정무장관으로 입각하였다. 1993년 세계한인상공인총연합회 이사장에 선출되고, 1994년 민주자유당 서울특별시지부장을 맡아보았다. 1995년에는 민주자유당 사무총장으로 임명되었으나 대한민국 제1회 지방 선거 참패로 물러났다. 1997년 신한국당 15대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하였으나[8] 민주계의 단합된 지원을 얻지 못하고 4위에 그쳤다.

1998년 이회창 전 총재가 한나라당의 당권을 잡고 민정당계가 유리해졌으나 그는 한나라당 안에서 민주계를 지켜왔고, 같은 해 한나라당 부총재가 되어 2년 동안 부총재직을 지냈다.[8]

1995년에는 국회과학기술연구회 회장으로 위촉되어 2002년까지 맡기도 했다. 1998년부터 2006년 3월까지는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 회장이었고, 1997년 21세기 국가경영연구회의 창립에 참여하고 회장에 선출되었다. 1999년 한나라당 당내 조직인 뉴밀레니엄위원회 위원장이 되었으며, 1999년에는 국회 대중문화&미디어특별연구회가 조직되어 회장으로 위촉되었다. 2000년부터 2002년까지는 한국 화훼협회 회장에 위촉되었다.

2001년 한양대학교 행정대학원 겸임교수로 출강하였고, 그해 한국인터넷PC문화협회 명예회장에 선임되었다. 2002년 한나라당 대통령선거대책본부 공동의장에 선출되고, 2002년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회장에 임명되었다. 2002년에는 평화와 번영을 위한 세계한민족공동체재단 총재에 선임되었다.

2. 1. 학생운동과 6.3 항쟁

1964년 박정희 정권의 한일 국교 정상화에 반대하면서 대일굴욕외교 반대운동인 1965년 6.3 항쟁에 참여하여 '대일굴욕외교반대 서울대투쟁위원장'을 맡았다.[2] 1964년 3월 정부는 3월 5일 정부와 여당 연석회의를 열고 3월 10일부터 농상회담, 12일부터 본회담, 4월에 외상회담을 개최한다는 한일 협상 스케줄을 발표하였다.[3] 3월 6일 민정, 민주, 자민, 국민의 당 등 재야의 전 야당과 사회[3], 종교, 문화단체 대표 등 저명 인사 200명이 주축이 되어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 투쟁위원회를 결성하였다.[3] 3월 9일 서울 종로예식장에서는 각계 정치인, 재야 인사 등이 모여 구국선언을 채택하고 반대투쟁에 전심전력으로 총궐기할 것을 다짐했다. 대일굴욕외교투쟁위 의장의 책임을 맡은 윤보선은 구국선언문을 낭독하였다.[3] 장택상한일회담을 한·일 합방에 비유하였다. 장택상은 한·일 합방은 저들의 뜻대로 될 리가 없다.[4] 고 비판하였다.

5월 30일 서울대학교 문리대생들이 교정에서 자유쟁취궐기대회를 열어 한일회담 성토와 박정희 정권 성토식을 한 다음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이는 6.3 항쟁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5] 학생회장인 김덕룡은 '오늘의 단식투쟁은 내일의 피의 투쟁이 될 지도 모른다'는 선언문을 낭독하고 단식농성에 들어갔다.[5]

윤보선서울대 문리과 학생회장 김덕룡의 선언문을 비장한 선언문[3] 이라며 예찬하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단식농성에 참여하는 학생들 수가 점점 늘어갔다. 무저항적인 학생들의 농성 현장에는 교수들과 시민들이 줄을 이어 찾아와 그들을 격려하고 먹을 것을 놓고 갔다.[3] 윤보선함석헌은 함께 농성현장을 찾아갔다. 윤보선은 이를 두고 정치적인 목적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자식 같은 학생들의 애처로움을 위로해 주기 위한 마음이 더 컸던 것이다[5] 라고 하였다.

그 뒤 계엄령이 선포되고 학생회 간부들이 검거되면서 김덕룡도 〈6.3 항쟁〉을 주도한 혐의로 투옥당하였다. 김덕룡이 투옥된 후 그는 서울대학교에서 제적되었으며 이로 인해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3년 수료하고[6] 중퇴하게 되었다.[7]

2. 2. 정계 입문과 야당 정치인

이명박 등과 한·일 국교정상화 반대시위를 함께 하면서 교류하였다.[8] 당시 고려대 상대 학생회장이었던 이명박과 인연을 맺고 '6.3동지회' 모임을 조직하고 활동했다.[2] 나중에 미국 포틀랜드주립대학교에서 명예인문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2]

1970년에는 신민당 국회의원 김영삼의 비서로 발탁, 정계에 입문하였다.[7] 김영삼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한 그는 일명 "YS의 분신"이라는 애칭이 유명할 정도로 김영삼과의 오랫동안 측근으로 지내기도 하였다. 이후 김영삼신민당 총재가 되면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 비서실장을 지냈다.[7]

2. 3. 5선 국회의원과 여당 정치인

1990년 10월 4일 오후 6시 40분쯤 한국외국어대학교 재학 중 민학투련 출신이었던 탈영병 윤석양 이병의 폭로에 의해 국군보안사령부의 사찰 대상 중 한 사람이었음이 밝혀졌다.[14] 윤석양은 탈영 후 서울시 연지동 기독교회관 7층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사무실에서 「양심선언」을 통해 탈영 당시 보안사에서 갖고 나온 동향 파악 대상자 개인색인표 신상철, 이들 내용이 입력된 컴퓨터 디스킷을 공개했다.[14]

1992년 김영삼의 선거 캠프에서 활동하였다. 1992년 12월 김영삼이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후 김영삼 정부에서 1993년 정무1장관, 1995년 민주자유당 사무총장 등 요직을 두루 지냈다. 1996년 다시 정무장관으로 입각하였다. 1993년 세계한인상공인총연합회 이사장에 선출되고, 1994년 민주자유당 서울특별시지부장을 맡아보았다. 1995년에는 민주자유당 사무총장으로 임명되었으나 대한민국 제1회 지방 선거 참패로 물러났다. 1997년 신한국당 15대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하였으나[8] 민주계의 단합된 지원을 얻지 못하고 4위에 그쳤다.

1998년 이회창 전 총재가 한나라당의 당권을 잡고 민정당계가 유리해졌으나 그는 한나라당 안에서 민주계를 지켜왔고, 같은 해 한나라당 부총재가 되어 2년 동안 부총재직을 지냈다.[8]

2. 4. 장관 및 기타 경력

1995년에는 국회과학기술연구회 회장으로 위촉되어 2002년까지 맡기도 했다. 1998년부터 2006년 3월까지는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 회장이었고, 1997년 21세기 국가경영연구회의 창립에 참여하고 회장에 선출되었다. 1999년 한나라당 당내 조직인 뉴밀레니엄위원회 위원장이 되었으며, 1999년에는 국회 대중문화&미디어특별연구회가 조직되어 회장으로 위촉되었다. 2000년부터 2002년까지는 한국 화훼협회 회장에 위촉되었다.

2001년 한양대학교 행정대학원 겸임교수로 출강하였고, 그해 한국인터넷PC문화협회 명예회장에 선임되었다. 2002년 한나라당 대통령선거대책본부 공동의장에 선출되고, 2002년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회장에 임명되었다. 2002년에는 평화와 번영을 위한 세계한민족공동체재단 총재에 선임되었다.

3. 생애와 정치 활동

3. 1. 초기 생애와 학생운동

김덕룡은 전북 익산군에서 태어나 1957년 이리시 남성중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경복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1960년 2월 경복고등학교를 졸업, 같은 해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회학과에 입학하였다. 이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총학생회 회장에 선출되었고 이어 서울대학교 전교 총학생회장에 선출되었다.[2]

그러나 1964년의 한일굴욕외교에 반대하여 6·3 사태에 참여, 결국 서울대학교를 중퇴하게 된다.

1964년 6월 박정희 정권의 한일 국교 정상화에 반대하면서 대일굴욕외교 반대운동인 1965년 6월 3일의 6.3 항쟁에 참여하여 '대일굴욕외교반대 서울대투쟁위원장'을 맡았다.[2] 1964년 3월 정부는 3월 5일 정부와 여당 연석회의를 열고 3월 10일부터 농상회담, 12일부터 본회담, 4월에 외상회담을 개최한다는 한일 협상 스케줄을 발표하였다.[3] 3월 6일 민정, 민주, 자민, 국민의 당 등 재야의 전 야당과 사회[3], 종교, 문화단체 대표 등 저명 인사 200명이 주축이 되어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 투쟁위원회를 결성하였다.[3] 3월 9일 서울 종로예식장에서는 각계 정치인, 재야 인사 등이 모여 구국선언을 채택하고 반대투쟁에 전심전력으로 총궐기할 것을 다짐했다. 대일굴욕외교투쟁위 의장의 책임을 맡은 윤보선은 구국선언문을 낭독하였다.[3] 장택상은 한일회담을 한·일 합방에 비유하였다. 장택상은 한·일 합방은 저들의 뜻대로 될 리가 없다.[4] 고 비판하였다.

5월 30일 서울대학교 문리대생들이 교정에서 자유쟁취궐기대회를 열어 한일회담 성토와 박정희 정권 성토식을 한 다음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이는 6.3사태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5] 학생회장인 김덕룡은 '오늘의 단식투쟁은 내일의 피의 투쟁이 될 지도 모른다'는 선언문을 낭독하고 단식농성에 들어갔다.[5]

윤보선서울대 문리과 학생회장 김덕룡의 선언문을 비장한 선언문[3] 이라며 예찬하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단식농성에 참여하는 학생들 수가 점점 늘어갔다. 무저항적인 학생들의 농성 현장에는 교수들과 시민들이 줄을 이어 찾아와 그들을 격려하고 먹을 것을 놓고 갔다.[3] 윤보선함석헌은 함께 농성현장을 찾아갔다. 윤보선은 이를 두고 정치적인 목적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자식 같은 학생들의 애처로움을 위로해 주기 위한 마음이 더 컸던 것이다[5] 라고 하였다.

그 뒤 계엄령이 선포되고 학생회 간부들이 검거되면서 김덕룡도 6.3 항쟁을 주도한 혐의로 투옥당하였다. 김덕룡이 투옥된 후 그는 서울대학교에서 제적되었으며 이로 인해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3년 수료하고[6] 중퇴하게 되었다.[7]

3. 1. 1. 6.3 항쟁 주도

1964년 6월 박정희 정권의 한일 국교 정상화에 반대하면서 대일굴욕외교 반대운동인 1965년 6월 3일의 6.3 항쟁에 참여하여 '대일굴욕외교반대 서울대투쟁위원장'을 맡았다.[2] 1964년 3월 정부는 3월 5일 정부와 여당 연석회의를 열고 3월 10일부터 농상회담, 12일부터 본회담, 4월에 외상회담을 개최한다는 한일 협상 스케줄을 발표하였다.[3] 3월 6일 민정, 민주, 자민, 국민의 당 등 재야의 전 야당과 사회[3], 종교, 문화단체 대표 등 저명 인사 200명이 주축이 되어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 투쟁위원회를 결성하였다.[3] 3월 9일 서울 종로예식장에서는 각계 정치인, 재야 인사 등이 모여 구국선언을 채택하고 반대투쟁에 전심전력으로 총궐기할 것을 다짐했다. 대일굴욕외교투쟁위 의장의 책임을 맡은 윤보선은 구국선언문을 낭독하였다.[3] 장택상은 한일회담을 한·일 합방에 비유하였다. 장택상은 한·일 합방은 저들의 뜻대로 될 리가 없다.[4] 고 비판하였다.

5월 30일 서울대학교 문리대생들이 교정에서 자유쟁취궐기대회를 열어 한일회담 성토와 박정희 정권 성토식을 한 다음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이는 6.3사태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5] 학생회장인 김덕룡은 '오늘의 단식투쟁은 내일의 피의 투쟁이 될 지도 모른다'는 선언문을 낭독하고 단식농성에 들어갔다.[5]

윤보선서울대 문리과 학생회장 김덕룡의 선언문을 비장한 선언문[3] 이라며 예찬하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단식농성에 참여하는 학생들 수가 점점 늘어갔다. 무저항적인 학생들의 농성 현장에는 교수들과 시민들이 줄을 이어 찾아와 그들을 격려하고 먹을 것을 놓고 갔다.[3] 윤보선함석헌은 함께 농성현장을 찾아갔다. 윤보선은 이를 두고 정치적인 목적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자식 같은 학생들의 애처로움을 위로해 주기 위한 마음이 더 컸던 것이다[5] 라고 하였다.

그 뒤 계엄령이 선포되고 학생회 간부들이 검거되면서 김덕룡도 6.3 항쟁을 주도한 혐의로 투옥당하였다. 김덕룡이 투옥된 후 그는 서울대학교에서 제적되었으며 이로 인해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3년 수료하고[6] 중퇴하게 되었다.[7]

3. 2. 야당 정치인 시절

1970년 신민당 국회의원 김영삼의 비서로 발탁되어 정계에 입문하였다.[7] 김영삼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한 그는 "YS의 분신"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김영삼의 측근으로 오랫동안 활동하였다. 이후 김영삼신민당 총재가 되면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 비서실장을 지냈다.[7] 한·일 국교정상화 반대 시위를 함께 하면서 이명박 등과도 교류하였다.[8] 당시 고려대 상대 학생회장이었던 이명박과 인연을 맺고 '6.3동지회' 모임을 조직하고 활동했다.[2] 나중에 미국 포틀랜드주립대학교에서 명예인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2]

3. 3. 여당 정치인과 5선 국회의원

한편 그는 국군보안사령부의 사찰대상 중 한사람이 되어 노태우 정부로부터 감시당하였는데, 1990년 10월 4일 오후6시40분쯤 외국어대 재학 중 민학투련 출신이었던, 탈영병 윤석양 이병의 폭로에 의해 밝혀졌다.[14] 윤석양은 탈영후 서울시 연지동 기독교회관 7층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사무실에서 「양심선언」을 통해 탈영당시 보안사에서 갖고나온 동향파악대상자 개인색인표 신상철,이들 내용이 입력된 컴퓨터디스킷을 공개했다.[14]

1992년 당시에는 김영삼의 선거 캠프에서 활동하였다. 1992년 12월 김영삼이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후 김영삼 정부에서 정무1장관, 1993년 정무장관, 1995년 민주자유당 사무총장 등 요직을 두루 지냈다. 1996년 다시 정무장관으로 입각하였다. 1993년 세계한인상공인총연합회 이사장에 선출되고, 1994년 민주자유당 서울특별시지부장을 맡아보았다. 또, 1995년에는 민주자유당 사무총장으로 임명되었으나 지방선거 참패로 물러났다. 1997년 신한국당 15대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하였으나[8] 민주계의 단합된 지원을 얻지 못하고 4위에 그쳤다.

1998년 이회창 전 총재가 한나라당의 당권을 잡고 민정당계가 유리해졌으나 그는 한나라당 안에서 민주계를 지켜왔고 1998년 한나라당 부총재가 되어 2년동안 부총재직을 지냈다.[8]

3. 3. 1. 한나라당 원내대표와 국가보안법

2004년 한나라당 원내대표로 선출되었으나, 2005년 행정도시 특별법 통과의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3. 4. 이명박, 문재인 정부 시절

2008년 3월 한나라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이 됐고 같은해 7월 7일, 대통령실 국민통합특별보좌관에 임명되었다.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에는 유력하게 거론됐으나 이명박 대통령의 국민통합특보에 임명되면서 이기택 해외한민족교육진흥회 이사장 수석부위장이 됐다.[18] 그해 4월의 국회의원 공천에서 낙천하였으나 그는 서운해하지 않고 다시 정계로 복귀하였다. 이명박은 그를 대통령 국민통합특별보좌관에 기용하였다.

2009년 1월 KBO총재 예비후보자로 거론되기도 했다.[19] 2009년 3월 19일 8명의 민화협 상임의장의 특별 호선으로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대표 상임의장에 당선되었다[7]

기타 사회 활동으로는 세계한인상공인단체총연합회 이사장, 6.3동지회 회장,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회장 등을 지냈다.[2]

2009년 12월 8일 부경대학교 대연캠퍼스로부터 한국정치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부경대학교 명예정치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20][21]

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였다.[22] 이후 19대 대통령 선거에서 문재인 후보 측의 거듭된 요청을 받고 대선 캠프에 '하나되는대한민국위원회'상임위원장으로 합류했다.[23]

2017년 6월 25일 문재인 정부의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으로 내정되었다.[24]

4. 논란과 비판

그가 투옥된 동안 그의 아들이 "아빠 어디 갔어?"라고 그의 아내에게 물어보자 아내는 아들에게 "아빠는 외국에 출장갔단다"라고 둘러댔다고 한다. 석방된 뒤 김덕룡은 아내에게 이야기를 들은 뒤 외국 출장인 것처럼 속이기 위해 시내의 백화점에서 장난감을 사들고 집에 들어갔다고 한다.

17대 국회 개원 이후 한나라당의 원내대표로서 열린우리당국가보안법 폐지안을 저지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하는 이미지가 젊은이들의 눈에 선하나, 그가 초선 국회의원이던 1989년에는 "국가보안법 폐지"를 강력하게 주장했고, 2001년도만 하더라도 국가보안법 현행유지가 당론인 한나라당의 부총재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집권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의 국가보안법 전면개정안에 대해서 찬성표를 던졌다고 한다.

4. 1. 부인 공천 비리 연루

그가 투옥된 동안 그의 아들이 "아빠 어디 갔어?"라고 그의 아내에게 물어보자 아내는 아들에게 "아빠는 외국에 출장갔단다"라고 둘러댔다고 한다. 석방된 뒤 김덕룡은 아내에게 이야기를 들은 뒤 외국 출장인 것처럼 속이기 위해 시내의 백화점에서 장난감을 사들고 집에 들어갔다고 한다.

17대 국회 개원 이후 한나라당의 원내대표로서 열린우리당국가보안법 폐지안을 저지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하는 이미지가 젊은이들의 눈에 선하나, 그가 초선 국회의원이던 1989년에는 "국가보안법 폐지"를 강력하게 주장했고, 2001년도만 하더라도 국가보안법 현행유지가 당론인 한나라당의 부총재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집권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의 국가보안법 전면개정안에 대해서 찬성표를 던졌다고 한다.

4. 2. 국가보안법 입장 변화

김덕룡은 초선 국회의원이던 1989년에는 "국가보안법 폐지"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2001년에도 국가보안법 현행유지가 당론인 한나라당의 부총재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집권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의 국가보안법 전면개정안에 대해서 찬성표를 던졌다. 그러나 17대 국회 개원 이후에는 한나라당의 원내대표로서 열린우리당국가보안법 폐지안을 저지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하는 모습을 보였다.

5. 평가

김덕룡은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해 상반된 입장을 보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1989년 초선 국회의원 시절에는 국가보안법 폐지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2001년에는 한나라당 부총재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새천년민주당의 국가보안법 전면 개정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그러나 17대 국회 개원 이후 한나라당 원내대표로서 열린우리당의 국가보안법 폐지안을 저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가 투옥되었을 때, 아들은 아내에게 "아빠 어디 갔어?"라고 물었고, 아내는 "아빠는 외국에 출장갔단다"라고 둘러댔다. 석방 후, 김덕룡은 아내에게 이 이야기를 듣고 외국 출장인 것처럼 속이기 위해 시내 백화점에서 장난감을 사들고 집에 들어갔다.

6. 학력

7. 저서


  • 새벽을 열며
  • 열린세상 열린정치
  • 머리가 하얀 남자
  • 우리, 멋진 야당 한번 해봅시다
  • 선명한 야당, 젊고 활기찬 민주정당

8. 역대 선거 결과

연도선거 종류소속 정당득표수 (득표율)순위당락비고
1988년총선통일민주당31,377표 (34.57%)1위당선초선
1992년총선민주자유당31,051표 (31.90%)1위당선재선
1996년총선신한국당40,530표 (44.68%)1위당선3선
2000년총선한나라당45,484표 (52.94%)1위당선4선
2004년총선한나라당53,537표 (54.23%)1위당선5선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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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뉴스 <프로필> 김덕룡 靑 국민통합특별보좌관 내정자 :: 네이버 뉴스 https://news.naver.c[...]
[3] 서적 외로운 선택의 나날들:윤보선회고록 동아일보사 1991
[4] 서적 대한민국 건국과 나:창랑 장택상 자서전 창랑장택상기념사업회 1992
[5] 서적 외로운 선택의 나날들:윤보선회고록 동아일보사 1991
[6] 뉴스 김덕룡 국민통합특보, 낙천충격 딛고 정치무대 복귀 :: 네이버 뉴스 https://news.naver.c[...]
[7] 웹사이트 맛있는 정보! 신선한 뉴스! - 서울신문 http://www.seoul.co.[...]
[8] 뉴스 [프로필] 김덕룡 청와대 국민통합특별보좌관 - 머니투데이:투자뉴스 http://www.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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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뉴스 [데스크 칼럼] 김덕룡, 민주투사로 시작해 비리 정치인으로 끝나는 비극 :: 네이버 뉴스 https://news.naver.c[...]
[11] 뉴스 donga.com[뉴스]-[책갈피 속의 오늘]1985년 3金연금 해제 http://www.donga.com[...]
[12] 웹사이트 인터넷 경향신문 - 경향닷컴 | Kyunghyang.com http://weekly.khan.c[...]
[13] 뉴스 김덕룡 의원, 李캠프 공동선대위장에 :: 네이버 뉴스 https://news.nave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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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웹인용 《세계일보》(2006.7.6.) https://news.naver.c[...] 2006-07-07
[16] 웹인용 세상을 밝히는 자유언론 - 프리존뉴스 http://www.freezonen[...] 2009-04-18
[17] 웹인용 세상을 밝히는 자유언론 - 프리존뉴스 http://www.freezonen[...] 2009-04-18
[18] 뉴스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에 이기택씨 :: 네이버 뉴스 https://news.naver.c[...]
[19] 웹사이트 ::: 스포츠조선 ::: http://sports.chosun[...]
[20] 웹사이트 Daum 미디어다음 - 뉴스 http://media.daum.ne[...]
[21] 웹사이트 First-Class경제신문 파이낸셜뉴스 http://www.fnnews.co[...]
[22] 뉴스 YS계 김덕룡 민화협 상임의장, 문재인 지지 선언 http://www.hani.co.k[...] 한겨레 2012-12-10
[23] 뉴스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에 YS계 김덕룡 내정 http://news.khan.co.[...]
[24] 뉴스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에 YS계 김덕룡 내정 http://news.khan.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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