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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스기 신사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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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카스기 신사쿠는 1839년 조슈번의 무사로 태어나, 메이지 유신 시기 존왕양이 운동과 막부 타도에 기여한 인물이다. 그는 요시다 쇼인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유학을 통해 서양의 문물을 접하며 개혁적 사상을 키웠다. 기병대를 창설하여 막부군과의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으나, 메이지 유신을 1년 앞둔 1867년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그는 군사적 재능뿐 아니라 정치가로서의 능력으로도 평가받으며, 그의 고향인 야마구치현 하기에서는 근대화, 서구화, 개혁의 길을 연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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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스기 신사쿠
기본 정보
다카스기 신사쿠
다카스기 신사쿠
본명다카스기 신사쿠
다른 이름다니 센조
다니 우메노스케
빈고야 스케이시로
미타니 와스케
호리 타로
시시도 교마
니시우라 마쓰스케
별명도교
출생일1839년 9월 27일
출생지하기, 조슈 번, 일본
사망일1867년 5월 17일
사망지신치초, 시모노세키, 조슈 번, 일본
묘소도교안, 시모노세키, 조슈 번, 일본
배우자고스기 마사코 (1860년 결혼, 1867년 사망)
오우노 (1863년 - 1867년)
자녀다카스기 도이치 (아들)
가족다카스기 고추타 (아버지)
미치 (어머니)
다카스기 도모 (누나)
다카스기 사치 (누나)
다카스기 메이 (누나)
추가 정보다카스기 신사쿠 노래 (미나미 하루오)
관직 및 군사 정보
소속조슈 번
계급정사위
지휘 부대기헤이타이
참전 전투시모노세키 전쟁
제1차 조슈 정벌
제2차 조슈 정벌
학력
모교메이린칸
쇼카손주쿠
추모
추모 장소야스쿠니 신사
도교안
기타 정보
로마자 표기Takasugi Shinsaku
한자 표기高杉 晋作
가나 표기たかすぎ しんさく
한국어 표기다카스기 신사쿠

2. 초기 생애

조슈번(현재의 야마구치현 하기시)에서 태어난 다카스기 신사쿠는 메이린칸(明倫館)에서 한학과 검술을 배웠고, 1857년 요시다 쇼인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서 수학하며 그의 총애를 받는 제자가 되었다. 1858년 막부 군사교육 기관인 쇼헤이코에 들어갔으나, 1860년 번의 명령으로 귀향하여 마사와 결혼했다.

1861년 해군 수련차 헤에신마루(丙辰丸)를 타고 에도로 가 신도무념류 연병관에서 검술을 익혔고, 도호쿠 지방을 여행하며 사쿠마 쇼잔, 요코이 쇼난 등과 교류했다.

1862년 막부 명령으로 고다이 도모아쓰 등과 청나라 상하이로 건너가 서양 열강의 식민지배와 태평천국의 난을 목격하고 귀국했다. 이 경험은 《유청오록》(遊清五録)에 기록되었으며, 존왕양이 운동의 논리적 기반이 되어 조슈번에 큰 영향을 주었다.

'''신사쿠(晋作)'''는 통칭이며, 휘(諱)는 '''춘풍(春風)'''(하루카제)이다. 동일(東一), 와스케(和助) 등의 통칭과 '''창부(暢夫)'''(초우후)라는 자(字)를 사용했다. 호는 난주소사(楠樹小史), '''동행(東行)'''(토우굥) 외 다수가 있으며, 변명(変名)으로는 다니센조(谷潜蔵) 등이 있고, 후에 '''다니 센조(谷 潜蔵)'''로 개명했다.

2. 1. 탄생과 성장

조슈번(현재의 야마구치현 하기시)의 중류계급 사무라이 집안에서 태어난 다카스기 신사쿠는 1852년 번교였던 메이린칸에 입학하여 한학과 검술을 배웠다. 1857년 요시다 쇼인이 세운 사립학교인 쇼카손주쿠에서 공부하였으며, 이후 요시다의 가장 총애하는 제자가 되었다. 1858년 막부의 군사교육 기관인 쇼헤이코에 들어갔다.[1]

다카스기 신사쿠의 갑옷을 입고 검술 훈련을 하는 모습


다카스기 신사쿠는 나가토국 하기성 아래 키쿠야요코초(현재 야마구치현 하기시)에서 장주번 무사인 다카스기 코타로(대조, 200석)와 미치(도코, 오니시 쇼소의 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스기 씨(高杉氏)는 전국 시대 이래로 대대로 모리 씨(毛利氏)를 섬기며 번정(藩政)에 관계되는 요직을 역임한 가문이다. 신사쿠에게는 세 명의 여동생이 있었지만, 남자 형제는 신사쿠뿐이었기에 후계자로서 귀하게 길러졌다.[5]

열 살 무렵 천연두를 앓았다. 조부모를 비롯한 가족들의 헌신적인 간호로 목숨을 건졌지만, 흉터가 남아 "아즈키모치(팥떡)"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한학 서당(기츠마쓰 서당)을 거쳐, 가에이 5년(1852년)에 번교인 메이린칸에 입학했다. 류생신음류 검술도 배우고, 나중에 사범 면허를 모두 전수받았다. 안세이 4년(1857년)에는 요시다 쇼인이 주재했던 쇼카손주쿠에 들어가, 쿠사카 겐즈이, 요시다 토시마로, 이리에 규이치와 함께 쇼카손주쿠 사천왕으로 불렸다. 안세이 5년(1858년)에는 번의 명령으로 에도로 유학을 가서, 쇼헤이자카 학문소와 오하시 도시안의 오하시 서당 등에서 수학했다.[5]

만엔 원년(1860년) 11월에 귀향 후, 방장 제일의 미인이라고 일컬어졌던 야마구치 마치부교 이노우에 헤이에몬(대조, 250석)의 차녀인 마사와 결혼했다.[1][5]

2. 2. 유학

1861년, 다카스기 신사쿠는 해군 훈련을 위해 번의 군함 헤이신마루(丙辰丸)를 타고 에도로 갔다. 신도무념류 연병관 도장에서 검술을 익혔다. 같은 해 8월에는 도호쿠 지방을 여행하며 사쿠마 쇼잔, 요코이 쇼난 등과 교류했다.

1862년에는 막부의 명령으로 고다이 도모아쓰 등과 함께 막부 사절 수행원으로 나가사키에서 청나라 상하이로 갔다.[9] 그곳에서 청나라가 서양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해 가는 현실과 태평천국의 난을 직접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9] 약 2개월 후 귀국하였으며, 이때의 경험은 《유청오록》(遊清五録)에 기록되어 있다.[9] 다카스기는 중국과 같은 수난을 겪지 않으려면 국력을 키워 서양 열강의 침략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는 존왕양이 운동의 논리가 되어 조슈번에 큰 영향을 주었다.

3. 존왕양이 운동과 정치 활동

조슈 번은 신사쿠가 해외에 나가 있는 동안 나가이 우타가 실각하고, 존왕양이파가 대두하였다. 신사쿠는 기도 다카요시(가쓰라 고고로)와 구사카 겐즈이(구사카 요시스케) 등과 함께 존왕양이 운동에 참여하여 에도, 교토에서 근황, 파약, 양이의 선전 활동을 펼쳐 각 번의 지사들과 교류하였다.

1862년에는 막부 명령으로 나가사키시에서 중국 상하이시로 가게 되었다. 나가사키에서는 미국 선교사 채닝 윌리엄스(릿쿄 대학 창설자)와 구이도 풀베키로부터 미국 내전과 청나라 내란 등 세계 정세의 최신 정보를 얻었다.[5] 신사쿠는 나가사키에서 영어 회화를 배우고, 미국, 프랑스, 포르투갈의 영사를 방문했다.[5]

1862년 12월 12일에는 막부의 칙령에 항의하기 위해 동지들과 함께 시나가와 고텐야마에 건설 중인 영국공사관을 방화하기도 하였다.[11]

조슈 번은 시모노세키 해협에서 서양 군함을 공격했다가 서양 세력의 반격을 받아 시모노세키가 포격당했다. 이후 프랑스 해군 육전대가 상륙하여 조슈번의 사무라이들이 맞섰으나 패퇴하였다. 번의 군사력이 열세임을 깨달은 조슈 번은 다카스기를 석방시켜 서양 세력과의 평화 교섭을 맡기는 동시에 번 군사 감독으로 번 군제를 개혁하도록 하였다. 그때 다카스기의 나이는 겨우 25살이었다.[12]

다카스기는 서구 열강을 바로 맞서는 것은 무모하다고 생각하고, 서구 열강의 군사 기술을 습득한 후 맞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기헤이타이를 최신식 소총(rifle)을 갖춘 부대로 개편하였다. 또한 서구 배척에 중점을 둔 존왕양이 운동의 방향을 막부 타도로 변경하였다.

1864년 9월,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미국 해군의 함대가 다시 시모노세키를 공격하여 포대를 점령했다. 이어 프랑스 해병대가 상륙했다. 조슈 번은 다카스기를 다시 불렀고, 다카스기는 강화 협상을 담당하게 되었다. 조슈 번 정부는 그에게 '군사 담당관'으로서 개혁을 수행할 것을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25세의 나이에 4개 서구 열강과의 강화 협상도 맡겼다.[12]

막부는 조슈 번이 교토를 점거한 것을 응징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해 조슈 번을 침공했다. 조슈 번은 서양 세력에 의해 군사력이 붕괴되었기 때문에, 막부의 원정군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조슈 번은 막부와 타협하기 위해 다카스기를 번에서 내보냈다. 다카스기는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 등 10여 명의 추종자들과 함께 규슈로 갔다. 여기에서 다카스기는 조슈에 주둔한 막부군을 타도하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 이후 1865년 1월 13일 이들과 막부군이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막부의 제1차 장주정벌이 임박하자, 조슈 번에서는 막부에 순응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보수파가 대두하여 10월에는 후쿠오카로 도망쳤다. 히라오야마소에 숨어 있었지만, 보수파에 의한 정의파 가로의 처형 소식을 듣고 다시 시모노세키로 귀환한다. 12월 15일 자정, 이토 슌스케(히로부미)가 이끄는 역사대 등 조슈 번 제대를 이끌고 공산사에서 거병한다. 후에 기병대 등 여러 부대도 합류하여, 겐지 2년(1865년) 3월에는 보수파를 축출하고 번의 실권을 장악한다.

3. 1. 존왕양이 운동 참여

조슈번은 신사쿠가 해외에 나가 있는 동안 나가이 우타가 실각하고, 존왕양이파가 대두하였다. 신사쿠는 기도 다카요시(가쓰라 고고로)와 구사카 겐즈이(구사카 요시스케) 등과 함께 존왕양이 운동에 참여하여 에도, 교토에서 근황, 파약, 양이의 선전 활동을 펼쳐 각 번의 지사들과 교류하였다.

1862년, 신사쿠는 "사쓰마 번은 나마무기에 있는 오랑캐를 척살하고, 양이의 열매를 거뒀는데, 우리 번은 또 공무합체를 말하고 있다. 뭐든 양이의 결과를 거두어야 한다. 번 정부에서 이를 단행할 수 없다면"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1862년 12월 12일에는 막부의 칙령에 항의하기 위해 동지들과 함께 시나가와 고텐야마에 건설 중인 영국공사관을 방화하기도 하였다.[11]

이러한 과격한 행동은 막부를 자극할 수 있었기에, 번에서는 신사쿠를 에도에서 소환했다. 이후 요시다 쇼인의 탄생지인 마쓰모토 마을에서 초가집을 짓고, 동행(東行)이라고 자칭하며 십년의 은둔에 들어간다고 말했다.

신사쿠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번에서 영향력 있는 인사였는데, 당시 그는 양이운동의 선봉에 서서 극단적으로 서양 세력의 배척을 주장하였다. 일본의 쇄국 정책에도 불구하고, 1862년 신사쿠는 조슈번의 명을 받아 청나라 상하이로 파견되어 서양 열강의 상황과 실력을 조사했다. 신사쿠의 방문은 태평천국 운동과 겹쳤고, 그는 유럽의 제국주의가 중국에도 미치는 영향에 충격을 받았다. 신사쿠는 서양 열강에게 식민지화되거나 청나라와 같은 운명을 맞지 않으려면 일본이 강해져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일본으로 돌아왔다.

1861년 3월, 해군 수련을 위해 막부 군함 병진환(丙辰丸)에 승선하여 에도로 갔다. 신도무념류(神道無念流) 연병관(練兵館) 도장에서 검술 수련을 했다. 8월에는 동북지방(東北地方)을 유학하며 가토 사쿠로(加藤桜老), 사쿠마 조잔, 요코이 쇼난과 교류했다.

1862년에는 막부 명령으로 나가사키시에서 중국 상하이시로 가게 되어, 같은 해 1월 2일 나가사키를 출발했다.[4] 나가사키에서는 미국 선교사 채닝 윌리엄스(릿쿄 대학 창설자)와 구이도 풀베키로부터 미국 내전과 청나라 내란 등 세계 정세의 최신 정보를 얻었다.[5] 신사쿠의 수기 『유청오록』의 「나가사키 엄류잡록」에는 윌리엄스로부터 대통령제 등 정치 제도에 대해서도 배운 것이 기록되어 있다.[6][7][8] 또한 나가사키에서는 영어 회화를 배우고, 미국, 프랑스, 포르투갈의 영사를 방문했다.[5]

같은 해 4월 29일, 고다이 토모아쓰, 나카무타 쿠라노스케, 나구라 쇼소 등과 함께 막부 사절 수행원으로서 막부의 센다이마루(千歳丸) (에도 막부)를 타고 나가사키를 출발하여 5월 6일에 상하이에 입항했다.[9][10] 청이 구미(欧米)의 식민지가 되어 가는 현실과 태평천국의 난을 목격하고 약 2개월간의 체류를 마치고, 7월 5일에 귀국을 위해 상하이를 출발하여 7월 14일에 나가사키에 귀환했다.[9]

이 과정에서 조슈 번과 조정 및 다른 번과의 제휴 협상은 주로 기도 다카요시구사카 겐즈이가 담당하게 되었다. 신사쿠는 그대로 에도에 머물러 조슈인(松陰) 개장 등을 마쳤지만, 교토에 있는 세자의 명을 받은 시오 미타가 신사쿠를 맞으러 와 함께 교토로 향하였다. 교토로 불려온 신사쿠는 번에서 신사쿠에게 맡기려고 생각했던 조정 측과의 협상 역할인 학습원 용걸(用掛)의 직책을 사퇴하고, 갑자기 10년의 휴가를 청하였다. 그것이 허락되자 다음 날에는 머리를 깎고 승려의 모습이 되었다. 이때 신사쿠는 “서쪽으로 가는 사람을 시샘하여 동쪽으로 가는 나의 마음을 신이 알리라”라고 읊으며, 동행(東行)이라고 호를 지었다. 이후 하기로 돌아와 요시다 쇼인의 생가가 있는 마쓰모토무라에 있는 작은 임대 주택으로 아내와 여종 한 명을 데리고 이사하였다.

3. 2. 기병대 창설

다카스기 신사쿠는 조슈 번의 근대적 군대 창설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863년에는 사무라이뿐만 아니라 농민, 상인 등 다양한 계층으로 구성된 기헤이타이(奇兵隊)를 창설했다.[6] 이는 봉건 제도 하에서 사무라이 계급만이 무기를 소유할 수 있다는 전통적인 관념을 깨뜨린 혁신적인 조치였다.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는 기병대(奇兵隊)를 창설하여 막부(幕府)에 대항하는 제2차 조슈 정벌(第二次長州征伐)과 보신 전쟁(戊辰戦争)에서 싸웠다.


기병대는 300명의 병사로 구성되었으며, 이 중 절반은 사무라이 출신이었다. 다카스기는 중산층 상인과 농민의 재력을 활용하여 번의 재정을 악화시키지 않으면서 군사력을 강화하고자 했다. 이러한 부대에서는 사회적 지위와 관계없이 모집이나 승진이 이루어졌다.

1863년, 조슈 번은 시모노세키 해협에서 외국 선박을 포격했다가 미국과 프랑스로부터 보복 공격을 받고 (시모노세키 전쟁) 큰 피해를 입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다카스기는 시모노세키에서 신분에 관계없이 자원병을 모집하여 기병대를 결성하고, 아미타사(아카마 신궁 옆)를 본거지로 삼았다.

3. 3. 정치적 격변과 역할

조슈 번은 시모노세키 앞바다의 서양 군함을 공격했다가 서양 세력의 반격을 받아 도리어 시모노세키가 포격당했다. 이후 프랑스 해군 육전대가 상륙하여 조슈번의 사무라이들이 맞섰으나 패퇴하였다. 번의 군사력이 열세임을 깨달은 조슈 번은 다카스기를 석방시켜 서양세력과의 평화교섭을 맡기는 동시에 번 군사감독으로 번 군제를 개혁하도록 하였다. 그때 다카스기의 나이는 겨우 25살이었다.[12]

다카스기는 침략해 오는 서구 열강을 바로 맞서는 것은 무모하다고 생각하고, 서구 열강의 군사기술을 습득한 후 맞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다카스기는 기헤이타이를 최신식 소총(rifle)을 갖춘 부대로 개편하였다. 또한 서구 배척에 중점을 둔 존왕양이 운동의 방향을 막부 타도로 변경하였다.

1864년 9월,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미국 해군의 함대가 다시 시모노세키를 공격하여 포대를 점령했다. 이어 프랑스 해병대가 상륙했다. 장주 부대와의 전투는 전통적인 일본군이 서구 군대에 비해 열세임을 보여주었고, 장주 번 지도자들에게 철저한 군사 개혁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인식시켰다. 장주는 다카스기를 다시 불렀고, 다카스기는 강화 협상을 담당하게 되었다. 장주 번 정부는 그에게 '군사 담당관'으로서 개혁을 수행할 것을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25세의 나이에 4개 서구 열강과의 강화 협상도 맡겼다.[12]

막부는 조슈 번이 교토를 점거한 것을 응징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해 조슈 번을 침공했다. 조슈 번은 서양세력에 의해 군사력이 붕괴되었기 때문에, 막부의 원정군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조슈 번은 막부와 타협하기 위해 다카스기를 번에서 내보냈다. 다카스기는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 등 10여 명의 추종자들과 함께 규슈로 갔다. 여기에서 다카스기는 조슈에 주둔한 막부군을 타도하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 이후 1865년 1월 13일 이들과 막부군이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막부의 제1차 장주정벌이 임박하자, 장주번에서는 막부에 순응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보수파(신사쿠는 “속론파”라고 불렀고, 자신을 “정의파”라고 칭했다)가 대두하여 10월에는 후쿠오카로 도망쳤다. 히라오야마소에 숨어 있었지만, 속론파에 의한 정의파 가로의 처형 소식을 듣고 다시 시모노세키로 귀환한다. 12월 15일 자정, 이토 슌스케(히로부미)가 이끄는 역사대, 이시카와 고로가 이끄는 유격대 등 장주번 제대를 이끌고 공산사에서 거병한다. 후에 기병대 등 여러 부대도 합류하여, 겐지 2년(1865년) 3월에는 속론파의 수괴인 무쿠리 토우타 등을 배척하고 번의 실권을 장악한다.

1865년 3월, 다카스기 신사쿠와 이토 슌스케(히로부미)는 장주번 번주의 명을 받아 시모노세키 개항 협상을 성사시키기 위해 영국 여행을 허가받고, 시모노세키에 기항한 영국 상선 유니온호에 편승하여 나가사키로 향했다. 두 사람은 1865년 4월 16일(원치 2년 3월 21일) 영국 나가사키 영사 대리 에이벌 가우어를 방문하여 6일간 그의 저택에 머물며 협상을 진행했다. 다카스기는 당초 즉시 영국으로 건너가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14][15] 이어 다카스기와 이토는 토마스 글래버와 글래버의 저택에서 접촉하여 영국으로의 여행을 부탁했지만, 여행 준비가 완료될 때까지 나가사키 영국 영사관 사관이었던 존 F. 라우더가 두 사람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자택에서 돌보았다. 다카스기, 이토와 라우더는 이미 전년도 시모노세키 전쟁의 강화 협상에서도 안면이 있었다. 라우더는 "장주가 어려울 때, 해외 여행을 해서는 안 된다"며 두 사람의 여행을 만류했고, 글래버도 동의하여 여행을 단념하게 되었다.[14][16] 또한 라우더는 이때 "시세는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고 있으며, 이미 쇄국이 아닌 개국의 시대이며, 마관(시모노세키)을 개항하여 부국강병을 도모하고 장주번의 독립에 한 걸음을 내딛을 때이다. 마관(시모노세키)의 개항은 장주에게 막대한 이익이 될 것이다."라고 시모노세키 개항을 권했다. 영국에서는 신공사로 해리 파크스가 부임 예정이었고, 그는 각국으로부터 신망이 두터운 유능한 인물이라며 두 사람에게 소개하기로 이야기하고, 시모노세키 개항에 대해 파크스에게 이야기하도록 전했다.[17] 이렇게 다카스기와 이토 두 사람은 그 의견에 동의하여 파크스에게 보낼 서한을 글래버에게 맡기고, 라우더가 준비한 무역 관련 서류를 가지고 시모노세키로 돌아왔다.[16][14][18]

4. 막부와의 전쟁과 사망

1866년(게이오 2년), 다카스기 신사쿠는 사쓰마-조슈 동맹에 가입할 목적으로 나가사키를 방문했다.[19] 같은 해 1월 21일(일설에는 1월 22일) 사쓰마-조슈 동맹 약조가 체결되었다. 5월에는 증기선 「헤이인마루」를 구입했다.

6월의 제2차 조슈 정벌(사경 전쟁)에서는 해군 총독으로서 「헤이인마루」에 승선하여 전투 지휘를 맡았다. 오시마구치 전투에서는 막부 측 군함을 기습했지만, 눈에 띄는 전과는 없었다.[20] 고쿠라 방면에서는 함포 사격의 지원 아래 기헤이타이 등을 상륙시켜 막부군을 패주시켰다. 고쿠라 성 근처까지 진격했지만, 히고 번호소카와 가의 군세에 격퇴되어 전황은 정체되었다.

그러나 7월 20일에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사망하자, 7월 30일에는 여러 번이 철병하고, 막부군 총독도 고쿠라에서 이탈했으며, 남은 고쿠라 번이 8월 1일 고쿠라 성에 불을 지르고 도주했기 때문에 막부군의 패배가 결정적이 되었다. 막부의 권위는 현저히 실추되었고, 이듬해 대정봉환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다카스기 신사쿠는 1866년 10월 결핵이 악화되어 요양 생활을 하였다. 1867년 2월경, 그의 아내와 아들이 방문하기도 했으나, 3월에 병세가 악화되어 가족들은 하기로 돌아갔다.[2]

다카스기 신사쿠의 묘


다카스기 신사쿠의 묘(클로즈업)


결국 다카스기는 1867년 5월 17일 폐결핵으로 사망하였다. 이때 나이 겨우 28세였다. 그의 유언에 따라 기헤이타이 진영 근처에 매장되었으며, 1년 후 메이지 유신으로 그의 꿈은 실현되었다. 이후 기헤이타이는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지휘하였고, 1868년 막부 타도가 이루어졌다. 1870년 기헤이타이는 해체되었다.[2] 1884년 그의 친구들과 동료들은 묘소 근처에 암자를 짓고 그의 넋을 기렸다.[2] 1934년 그의 무덤은 일본의 사적으로 지정되었다.[3]

4. 1. 조슈 번 내전과 막부군 격파

조슈 번은 시모노세키 앞바다에서 서양 군함을 공격했다가 서양 세력의 반격을 받아 도리어 시모노세키가 포격당했다. 이후 프랑스 해군 육전대가 상륙하여 조슈 번 사무라이들이 맞서 싸웠으나 패배했다. 조슈 번은 군사력이 약하다는 것을 깨닫고 다카스기 신사쿠를 석방하여 서양 세력과의 평화 교섭을 맡기는 동시에 번 군사감독으로 번 군제를 개혁하도록 하였다. 당시 다카스기의 나이는 겨우 25살이었다.

다카스기는 서구 열강에 맞서기 위해서는 서구의 군사 기술 습득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기헤이타이를 최신식 소총으로 무장한 부대로 개편하고, 존왕양이 운동의 방향을 막부 타도로 변경하였다.

막부는 조슈 번이 교토를 점거한 것을 응징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해 조슈 번을 침공했다. 조슈 번은 서양 세력에 의해 군사력이 약화된 상태였기 때문에 막부군을 당해낼 수 없었다. 조슈 번은 막부와 타협하기 위해 다카스기를 번에서 내보냈다. 다카스기는 추종자 10여 명(훗날 일본의 지도자가 되는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 등)과 함께 규슈로 갔다. 그는 조슈에 주둔한 막부군을 타도하기 위한 준비를 하였고, 1865년 1월 13일 막부군과 전투를 벌였다.

1865년 3월, 다카스기는 그동안 키워온 기헤이타이를 동원하여 사무라이로만 이루어진 막부군을 격파하였다. 이 승리로 그는 조슈 번의 주요 정치, 군사 지도자가 되었다. 다음 해 막부는 다시 군대를 보내 조슈를 정벌하려 했지만, 다카스기가 지휘하는 조슈 번 병력은 이를 다시 격파하였다. (제2차 조슈 정벌). 이 패배로 막부의 권위는 실추되었고, 사쓰마 번은 그동안 반목했던 조슈와 손을 잡고 막부 타도에 힘을 보태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켰다.

분큐 3년(1863년) 5월 10일(음력), 막부가 조정으로부터 요청받아 제정한 척양 기한이 지나자, 조슈 번은 관문해협에서 외국 선박을 포격했지만, 미국과 프랑스의 보복을 받고 참패한다(시모노세키 전쟁). 다카스기 신사쿠는 시모노세키 방위를 맡게 되고, 6월(음력)에는 기헤이타이를 결성하여 아카마 신궁 옆을 본거지로 삼지만, 9월(음력)에는 교법사 사건의 책임을 물어 총감직에서 파면된다. 11월, 막부 관리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번주로부터 "동일"이라는 이름을 받고 개명한다.

교토에서는 사쓰마 번과 아이즈 번이 결탁한 쿠데타인 8월 18일의 정변으로 조슈 번이 추방되고, 분큐 4년(1864년) 1월(음력), 다카스기 신사쿠는 탈번하여 교토에 잠복한다. 가쓰라 고고로의 설득으로 2월(음력)에는 귀향하지만, 탈번 죄로 노야마 감옥에 투옥되고(이때 동일이라는 이름을 몰수당하고 "와조"로 개명), 겐지 원년(1864년) 6월에는 출옥하여 징계 처분을 받는다. 7월(음력), 조슈 번은 금문의 변에서 패배하여 조적이 되고, 구사카 겐즈이는 자결한다.

8월(음력), 영국, 프랑스, 미국, 네덜란드 4개국 연합 함대가 시모노세키를 포격하여 포대가 점령당하자, 다카스기 신사쿠는 사면되어 강화 협상을 맡게 된다. 다카스기 신사쿠가 24세 때였다. 협상 자리에서 통역을 맡았던 이토 히로부미는 후에 이 강화 회의에서 연합국은 배상금 지불 등 여러 가지 조건과 함께 히코시마의 임차(租借)를 요구했다고 회상하고 있다.[12] 다카스기 신사쿠는 "배상금"과 "히코시마 임차"에 대해서는 응하지 않고, 전자는 막부에 대신 협상하게 함으로써 합의하고, 후자는 거절을 관철하여 철회시키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고사기를 암송하여 유야무야하게 했다고도 한다[13]).

에도 막부의 제1차 조슈 정벌이 임박하자, 조슈 번에서는 막부에 순응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보수파(다카스기 신사쿠는 “속론파”라고 불렀고, 자신을 “정의파”라고 칭했다)가 대두하여 10월에는 후쿠오카로 도망친다. 12월 15일 자정, 이토 히로부미가 이끄는 역사대, 이시카와 고로가 이끄는 유격대 등 조슈 번 제대를 이끌고 공산사에서 거병한다. 후에 기병대 등 여러 부대도 합류하여, 겐지 2년(1865년) 3월에는 속론파의 수괴인 무쿠리 토우타 등을 배척하고 번의 실권을 장악한다.

1865년 3월, 다카스기 신사쿠와 이토 히로부미는 조슈 번 번주의 명을 받아 시모노세키 개항 협상을 성사시키기 위해 영국 여행을 허가받고, 시모노세키에 기항한 영국 상선 유니온호에 편승하여 나가사키로 향했다. 두 사람은 1865년 4월 16일(겐지 2년 3월 21일) 영국 나가사키 영사 대리 에이벌 가우어를 방문하여 6일간 그의 저택에 머물며 협상을 진행했다. 다카스기는 당초 즉시 영국으로 건너가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14][15] 이어 다카스기와 이토는 토마스 블레이크 글래버와 글래버의 저택에서 접촉하여 영국으로의 여행을 부탁했지만, 여행 준비가 완료될 때까지 나가사키 영국 영사관 사관이었던 존 F. 라우더가 두 사람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자택에서 돌보았다. 다카스기, 이토와 라우더는 이미 전년도 시모노세키 전쟁의 강화 협상에서도 안면이 있었다. 라우더는 "조슈가 어려울 때, 해외 여행을 해서는 안 된다"며 두 사람의 여행을 만류했고, 글래버도 동의하여 여행을 단념하게 되었다.[14][16] 또한 라우더는 이때 "시세는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고 있으며, 이미 쇄국이 아닌 개국의 시대이며, 마관(시모노세키)을 개항하여 부국강병을 도모하고 조슈 번의 독립에 한 걸음을 내딛을 때이다. 마관(시모노세키)의 개항은 조슈에게 막대한 이익이 될 것이다."라고 시모노세키 개항을 권했다. 영국에서는 신공사로 해리 파크스가 부임 예정이었고, 그는 각국으로부터 신망이 두터운 유능한 인물이라며 두 사람에게 소개하기로 이야기하고, 시모노세키 개항에 대해 파크스에게 이야기하도록 전했다.[17] 이렇게 다카스기와 이토 두 사람은 그 의견에 동의하여 파크스에게 보낼 서한을 글래버에게 맡기고, 라우더가 준비한 무역 관련 서류를 가지고 시모노세키로 돌아왔다.[16][14][18]

4월에는 시모노세키 개항을 추진한 결과 攘夷(정이)·속론 양 파에게 목숨을 노린다는 이유로, 애첩인 오우노와 함께 시코쿠로 피신하여 히나야나 엔세키를 의지했다. 6월에 가쓰라 고고로의 주선으로 귀향했다.

겐지 2년(1865년) 1월 11일부로 다카스기 신사쿠는 다카스기 가에서 폐적되어 "하구쿠미" 취급을 받았고, 같은 해 9월 29일, 막부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번명에 따라 '''타니 센조'''로 개명했다. 게이오 3년(1867년) 3월 29일에는 신지 100이 주어졌고, 타니 가를 창설하여 초대 당주가 되었다. 다카스기 본가의 가독은 여동생인 미츠코의 사위인 하루키가 이었다.

다카스기 신사쿠는 재차의 조슈 정벌에 대비하여 방어 태세 강화에 힘썼다. 1866년(게이오 2년), 다카스기 신사쿠는 사쓰마-조슈 동맹에 가입할 목적으로 세 번째로 나가사키로 향하여 동좌정의 사쓰마 저택을 방문했다.[19] 게이오 2년(1866년) 1월 21일(일설에는 1월 22일)에, 그가 가쓰라 고고로(후의 기도 다카요시), 이노우에 가오루, 이토 히로부미 등과 함께 추진해 온 사쓰마-조슈 동맹 약조가 도사 번의 사카모토 료마, 나카오카 신타로의 중개로 교토 사쓰마 번 저택에서 체결되었다.

5월,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사쓰마로 향하는 명령을 받고, 그 도중 나가사키에서 증기선 「헤이인마루」(오텐토사마마루)를 구입했다.

6월의 제2차 조슈 정벌(즉, 사경 전쟁)에서는 해군 총독으로서 「헤이인마루」에 승선하여 전투 지휘를 맡았다. 오시마구치 전투에서는 「헤이인마루」이 막부 측의 「아사히마루」과 「야쿠모마루」을 기습했지만, 눈에 띄는 전과는 없었다.[20] 고쿠라 방면에서는 함포 사격의 지원 아래 기병대·보국대를 모지, 다노우라에 상륙시켜 막부군을 패주시켰다. 그 후 고쿠라 성 근처까지 진격했지만, 히고 번호소카와 가의 군세에 격퇴되어 전황은 정체되었다.

그러나 7월 20일에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사망하자, 7월 30일에는 히고 번·구루메 번·야나가와 번·가라쓰 번·나카쓰 번이 철병하고, 막부군 총독 오가사와라 나가유키도 해로로 고쿠라에서 이탈했으며, 남은 고쿠라 번이 8월 1일 고쿠라 성에 불을 지르고 도주했기 때문에, 막부군의 패배가 결정적이 되었다. 막부의 권위는 현저히 실추되었고, 이듬해인 게이오 3년(1867년) 11월의 대정봉환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4. 2. 사망

다카스기 신사쿠는 1866년 10월 결핵이 악화되어 주점 주인 하야시 산쿠로(林三九郎)의 거처로 옮겨졌다. 그의 애첩 오우노(お宇野)와 불교 비구니이자 시인인 노무라 보토(野村望東尼)가 그를 간호했다.[2]

1867년 2월경, 그의 아내 마사(まさ)와 세 살 된 아들 다카스기 토이치(高杉東一)(다카스기 우메노신(梅之助)으로도 알려짐, 1864~1913)가 하기(萩, 야마구치현)에서 그를 방문하기 위해 왔다. 아내가 있는 상황에서 다카스기의 명예를 더럽히고 싶지 않아 오우노는 타니 바이쇼(谷梅笑)라는 이름으로 불교 비구니가 되었지만, 나중에 마사에 의해 다시 불려와 그를 돌보았다. 그러나 1867년 3월 다카스기의 병세가 다시 악화되어 마사와 토이치는 하기로 돌아갔고, 바이쇼와 노무라는 1867년 5월 17일 그의 죽음까지 그와 함께 있었다.[2]

다카스기는 1867년 5월 17일 폐결핵으로 사망하였다. 이때 나이 겨우 28세였다. 이후 기헤이타이는 그의 부하였던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지휘하였고, 1868년 막부 타도가 이루어졌다. 신정부가 수립되고, 일본 제국 육군이 설립됨에 따라 1870년 기헤이타이는 해체되었다.[2]

유언에 따라 다카스기는 기헤이타이(奇兵隊) 진영 근처 요시다(吉田)의 기요미즈산(清清水山)에 매장되었다. 1년 후, 그의 별명 東行|l=동방으로일본어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는 막부 타도라는 다카스기의 꿈은 메이지 유신으로 실현되었다. 1869년 유럽으로 떠나기 전,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기요미즈산에 있는 그의 초가집 무린안(無鄰庵)을 다카스기의 전 애첩이자 비구니인 바이쇼에게 주어 그곳에 살면서 그의 무덤을 돌보도록 했다. 기도 다카요시(가쓰라 고고로)와 그의 아내 기도 마쓰코는 1871년 그의 어린 아들 토이치를 거두었다.[2]

1884년, 야마가타 아리토모, 야마다 아키요시,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 등 다카스기의 친구들과 동료들은 그의 별명을 딴 동행안(東行庵)이라는 암자를 그의 묘소 근처에 짓기 위해 자금을 모았다. 타니 바이쇼는 1909년 죽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며 그의 무덤을 돌보았다.[2] 그 무덤 자체는 1934년 일본의 사적으로 지정되었다.[3]

그 후, 시모노세키시(下関市) 사쿠라야마(桜山)에서 폐결핵 요양 중, 1867년 4월 13일 심야에 사망했다. 향년 29세(만 27세 8개월). 묘비명 등에서 기일이 14일로 되어 있는 것은 장남인 우메노신(梅之進)에게 다니가(谷家)를 상속시키기 위해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21] 임종에는 아버지・어머니・아내와 아들이 달려왔고, 노무라 보토니・야마가타 아리토모(야마가타 교스케)・다나카 미쓰아키라(다나카 겐스케)가 함께 했다고 전해진다(단, 다나카 자신은 그날은 교토에 있었다고 일기에 기록하고 있다).[21]

훈장은 추서 정4위(1891년 4월 8일).[21]

5. 유산 및 평가

다카스기 신사쿠는 메이지 유신 초기의 주역이었다. 그러나 사카모토 료마와 비슷하게 성공을 앞두고 요절하는 바람에 이후 신정부의 지도자가 되지는 못하였다. 반면 그의 부하였던 야마가타와 이토, 기도 다카요시 등은 이후 신정부에서 수상 등의 고위직에 진출하였다. 그의 고향인 하기시에서는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초기 메이지 유신의 중심 인물인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는 군사적 재능뿐 아니라 정치가로서의 능력으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28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여 메이지 시대 이후 일본의 유명한 지도자 반열에 오르지는 못했다. 그의 고향인 일본 남서부 야마구치현(山口県) 하기(萩) 성곽 도시에서는 여전히 군사 문제뿐 아니라 정치 및 사회 문제에 있어서도 근대화, 서구화, 개혁의 길을 여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인 신비롭고 활기찬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다.

묘소는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시 요시다의 동행암에 있다. 2016년 4월에 신사쿠의 생전 유언을 새긴 "묘지비"가 건립되었다.[22]

또한 기도 다카요시, 오무라 마스지로 등에 의해 도쿄 쇼콘샤(현재의 야스쿠니 신사)에 요시다 쇼인, 쿠사카 겐즈이, 사카모토 료마, 나카오카 신타로 등과 함께 합사되었다.

6. 인물 및 일화


  • 이른바 사세구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존재한다.
  • * 재미있는 일이라곤 없는 세상을 재미있게(おもしろきこともなき世'''を'''おもしろく)
  • * 재미있는 일이라곤 없는 세상에 재미있게(おもしろきこともなき世'''に'''おもしろく)

: 호후텐만구의 가비는 "を"를, 이치사카 다로는 "に"를 채용하며 "'を'는 후년의 개작일 것이다"고 말한다. 다카스기 가문에 전해지는 《동행유고》에는 "こともなき世に"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신사쿠의 자필은 아니지만 원본과 교합한 것으로 사료되는 주필이 남아 있으므로 신사쿠 직필본을 베낀 것이 거의 확실하다.[41]

: 한때는 신사쿠가 죽을병으로 읊고, 노무라 모토니가 "사는 것은 마음이러라(すみなすものは心なりけり)"라는 구절을 덧붙였다고 알려졌으나, 근년의 연구에 따르면 이 노래는 죽기 전년에 이미 읊었다는 기록이 있어 사세구가 아니라는 설이 유력하다.

  • 도도이쓰 "삼천세계의 까마귀를 죽이고, 임의 곁에서 잠을 청하고 싶어라(三千世界の鴉を殺し、主と添寝がしてみたい, 添寝를 '늦잠(朝寝)'으로 표기하는 경우도 있다)"는 일반적으로 신사쿠의 작품으로 전해진다. (기도 다카요시의 작품이라는 설도 존재). 이 도도이쓰는 오늘날에도 하기의 민요인 〈남자라면〉이나 〈요기쇼코쇼부시〉의 가사로 불려지고 있다.
  • 스승인 요시다 쇼인은 신사쿠의 비범함을 간파하고, 검술에만 집중하며 학업에 힘쓰지 않는 신사쿠를 분발시키기 위해 일부러 동문이자 친구인 쿠사카만을 칭찬했다. 신사쿠는 분함을 발판 삼아 비범함을 발휘, 겐즈이와 함께 실력을 갈고 닦았다.
  • 공금과 사금을 구별하지 않는 인물로, 번의 돈으로 군함을 두 번이나 구입하려 했다.
  • 영국인 병사가 무사의 영혼인 칼을 신기하다며 여러 번 보여달라고 하자, 유감스럽게 생각한 신사쿠는 그 이후 결코 보여주지 않았다.
  • 신사쿠가 상하이에서 구입한 스미스 & 웨슨 모델 2 아미 33구경 6연발을 사카모토 료마에게 선물했다는 일화가 있다. 료마의 편지에 "그 다카스기로부터 보내주신 권총으로 쳐부수고"라는 내용이 있어, 권총을 선물한 것은 확실하나, 이것이 상하이에서 구입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잇사카 다로는 신사쿠가 상하이에서 권총을 구입하고 료마에게 선물하기까지 약 2년 반 동안 조슈 번에서 무기 밀수가 이루어졌고, 신사쿠도 밀수 권총을 개인적으로 구입했으므로, 료마에게 선물한 권총은 "상하이 기념품"이 아니라 이때 입수한 것일 가능성도 있다고 말한다.
  • 이토 히로부미는 히코시마 앞을 배로 통과할 때, "다카스기가 문제를 흐지부지하게 하지 않았다면, 히코시마는 홍콩섬이 되고, 시모노세키는 구룡이 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 제14대 장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양이 실행을 약속하며 교토에 올라, 도쿠가와 막부 최초로 천황과 함께 가모 신사에 기원했다. 이때 신사쿠는 행렬을 향해 "어이! 정이대장군!"이라고 외쳤다. 민중은 창백해졌지만 신사쿠는 벌을 받지 않았고, 이는 막부의 약화를 보여주는 일화이다.
  • 다카스기 신사쿠는 만화 및 애니메이션 『るろうに剣心』, OVA 『Samurai X: Trust & Betrayal』에 조연으로 등장, 병에 걸린 모습으로 묘사된다. 히무라 켄신기병대에 영입하고, 가쓰라 고고로가 그를 "발도제 힛토키리"로 만들도록 허락한다. 과감하고 무자비한 전사로 묘사되지만, 자신의 행동을 경계하고 가쓰라가 켄신의 영혼을 "타락시키는" 것을 막으려 하지만 소용없었다. 일본어 성우는 다카기 와타루, 영어 성우는 제이슨 필립스이다.
  • 다카스기는 만화 『銀魂』의 주요 등장인물이자 초기 악역 중 한 명인 다카스기 신스케의 모티브가 되었다.
  • 다카스기의 각색된 모습은 PSP 게임 『幕末Rock』과 애니메이션에 등장한다. 바쿠마츠 시대 배경의 음악 테마 게임에서 그는 사카모토 료마가 이끄는 록 밴드의 베이시스트로 묘사된다.
  • 다카스기 신사쿠는 메이지 유신을 다룬 NHK 대하드라마에 등장한다.
  • * 『료마전』 (이세야 유스케 분)
  • * 『하나 모유』 (고라 켄고 분)
  • 1957년 영화 『幕末の太陽』에서 이시하라 유지로가 다카스기 신사쿠를 연기했다.
  • 만화 『ナツユキ Rendezvous』에서 "불쾌한 세상에서 즐거운 삶을 살아라"라는 격언을 남긴 것으로 언급된다.
  • 애니메이션 "바쿠마츠"의 주인공으로, 일본어 성우는 中村悠一이다.
  • 모바일 게임 『Fate/Grand Order』에 아처 클래스 서번트로 등장한다.
  • 쓰토무 타카시의 만화 "시도"의 주인공이다.
  • 전략 게임 쇼군 2: 몰락하는 사무라이에서 조슈 씨족의 시작 장군이며, 기병대도 등장한다.

참조

[1] 뉴스 The Togyoan Hermitage & Memorial Museum (gravesite of Takasugi Shinsaku)(Yamaguchi) JAPAN TIMELINE ~See what is happening in Japan now~ https://www.japantim[...] 2018-07-19
[2] 웹사이트 Tougyou-an YAMAGUCHI JAPAN TRAVEL GUIDE https://www.visit-jy[...] 2021-07-20
[3] 웹사이트 高杉晋作墓 https://bunka.nii.ac[...] Agency for Cultural Affairs 2022-08-20
[4] 웹사이트 丸山の料亭・花月 https://shinsaku-m.c[...] 2020-12-11
[5] 웹사이트 崇福寺 https://shinsaku-m.c[...]
[6] 간행물 幕末における長州藩部落民諸隊の活動 https://blhrri.org/o[...] 1984
[7] 논문 明治維新のリーダーシップ:「日本人の心を見にゆこう」続篇 https://doi.org/10.1[...] 法政大学社会学部学会 2016-07
[8] 간행물 ウィリアムズ主教の生涯と同師をめぐる人々 https://web.archive.[...] 2019-11-28
[9] 논문 文久二年幕府派遣「千歳丸」随員の中国観 https://hdl.handle.n[...] 県立長崎シーボルト大学 2002-12
[10] 논문 『上海新報』に見る幕末官船千歳丸の上海来航 http://www2.ipcku.ka[...] 2002
[11] 문서 御楯組結成の血盟書に署名のある11名
[12] 서적 高杉晋作 少年園 1897
[13] 서적 幕末長州の攘夷戦争 中央公論社 1996
[14] 웹사이트 グラバー邸 https://shinsaku-m.c[...]
[15] 논문 森有礼研究(第二)森有礼とキリスト教 http://hdl.handle.ne[...] 東北大学教育学部 1968
[16] 간행물 世外井上公伝 https://dl.ndl.go.jp[...] 井上馨侯伝記編纂会 1933
[17] 뉴스 雷電篇 回天(一) https://www.sankei.c[...] 2013-05-08
[18] 웹사이트 江戸時代(18),1865 http://www.f-makuram[...]
[19] 웹사이트 江戸時代(18),1865 http://www.f-makuram[...]
[20] 서적 幕府海軍の興亡 幕末期における日本の海軍建設 慶應義塾大学出版会 2017
[21] 서적 高杉晋作 情熱と挑戦の生涯 角川ソフィア文庫 2014
[22] 뉴스 高杉晋作の墓誌碑建立 東行庵、生前託した遺言刻む http://www.nishinipp[...] 2016-07-20
[23] 문서 東行庵だより 1990
[24] 서적 維新夜話
[25] 서적 松陰とその門下
[26] 문서 佐久間象山への書簡
[27] 서적 高杉晋作 1916
[28] 서적 英雄を語る
[29] 서적 伊藤公直話
[30] 서적 山県有朋 今世人物評伝叢書 第1編 1924
[31] 서적 東行遺稿
[32] 서적 海舟言行録
[33] 서적 維新夜話
[34] 서적 海援隊長坂本竜馬
[35] 서적 観樹将軍縦横談
[36] 서적 観樹将軍豪快録 近代デジタルライブラリー
[37] 간행물 日本及日本人 1916-04
[38] 서적 吉田松陰全集 第12巻
[39] 서적 逸話文庫 通俗教育 志士の巻 近代デジタルライブラリー
[40] 서적 奥村五百子言行録 近代デジタルライブラリー
[41] 간행물 東行庵だより 199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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