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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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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인은 《고사기》, 《일본서기》 등 일본의 역사서에 등장하는 백제의 학자로,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오진 천황의 초대를 받아 일본으로 건너가 학문을 가르쳤으며, 후미노오비토 씨족의 시조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왕인의 실존 여부와 출신, 《천자문》 전래 시기에 대한 논란이 있으며, 한국과 중국의 역사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고대 일본에 문물을 전파한 인물로 숭상받으며, 전라남도 영암군에 왕인 박사 유적지가 조성되어 있다. 일본에서는 오사카부 히라카타시에 왕인의 묘가 있다고 전해지며, 한일 관계에서 문화적 상징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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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왕인
원어 이름王仁
초등대한국사(1908)에 실린, 왕인의 삽화
초등대한국사(1908)에 실린, 왕인의 삽화
별명와니기시(和邇吉師)
직업학자
국적백제
분야유학
기타 정보
다른 이름와니기시 (和邇吉師/わにきし)
왕인
출신 민족한족
종교유교
사상유학
가르침을 준 대상우지노와기 이라쓰코(菟道稚郞子)

2. 역사 기록

왕인에 대한 기록은 주로 일본 역사서인 《고사기》, 《일본서기》, 《속일본기》에 나타난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따르면 왕인은 백제의 학자로, 아직기의 추천을 받아 오진 천황의 초대를 받아 일본에 논어천자문을 전했다고 한다. 그러나 천자문의 성립 연대가 왕인의 일본 방문보다 후대라는 점 때문에 왕인의 실존에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도 있다.

속일본기》에는 왕인의 자손들이 자신들의 선조가 한나라 황제의 먼 후손이라고 간무 천황에게 주상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왕인은 한 고제 유방의 후손으로, 고구려낙랑군을 멸망시킨 뒤 백제로 망명한 중국계 학자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은 한국과 중국의 기록에는 전혀 없으며, 왕인의 이름 표기에 대한 문제점 등으로 인해 왕인이 실존 인물이 아니라 당시 고훈 시대를 상징하는 가상의 인물로 보는 시각도 있다.[179][180][181][182]

왕인은 일본 역사서에만 언급되어 있으며, 한국이나 중국 사료에는 기록이 없다.[1]

2. 1. 고사기

왕인은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현자로 여겨진다.[1]고사기》에 따르면, 오진 천황이 백제에 현자를 보내라고 명하자, 백제는 근초고왕의 명에 따라 와니키시(和邇吉師일본어)라는 인물을 보냈다.[2] 와니키시는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 총 11권을 일본에 전하였다.[1] 이 와니키시는 후미노 후비토(文首)의 시조가 되었다.[1]

와니키시가 가져온 《천자문》은 와니키시의 생존 당시에는 아직 편집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기록을 근거로 와니키시의 실존에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64]

2. 2. 일본서기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 왕인은 백제의 학자 아직기(阿直岐)의 추천을 받아 오진 천황의 초대를 받아 일본에 건너와 훗날 야마토에 귀화한 학자이다. 왕인이 논어천자문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 학자 중에는 천자문의 성립 연대가 왕인의 일본 방문보다 후대임을 들어 왕인의 실존에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도 있다. 또는 일본서기를 편찬했을 때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귀화했던 여러 명의 도래인 학자를 상징적으로 정리한 인물이라는 설도 있다.[1]

일본서기에는 왕인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있으며, 백제 사신 아직기를 통해 일본에 왔다고 한다.

2. 3. 속일본기

《속일본기》에는 왕인의 자손이라는 좌대사(左大史) · 정6위상(上) 후미노이미키 모오토(文忌寸最弟) 등이 자신들의 선조 왕인이 옛 한나라 황제의 먼 후손이라고 간무 천황(桓武天皇)에게 주상한 기록이 있다.[67]

이 기술에 따르면 한나라 고제 즉 유방의 자손으로 「앵(鸞)」이라는 인물이 있었고 그의 자손 「왕구(王狗)」가 백제로 건너와 살았으며 그 손자인 왕인이 왜로 도래하여 후미 씨(文氏)와 무생 씨(武生氏) 등의 선조가 되었다는 것이다. 《신찬성씨록》에도 이와 비슷한 기술이 보인다. 왕인은 고구려낙랑군을 멸망시킨 뒤 백제에 망명한 중국계 학자가 된다.

다만, 위에 언급된 것들은 한국과 중국의 기록에는 전혀 없는 내용들이며, 왕인이 처음으로 등장했던 이름은 한국어로 「화이(和邇)」였다.[179] 문제는 "화이"는 일본어로 "와니(わに)"로 읽을 수 있지만 "왕인"은 "오오진 (おうじん)" 또는 "오오닌 (おうにん)"으로 밖에 읽을 수 없으며, 고대 일본사에 등장하는 "왕인"을 제외하면 한자인 「왕인(王仁)」을 "와니"로 절대 발음할 수 없다.[180][181] 즉, "화이"나 "왕인"은 그의 본래 이름이 아니며 이는 "와니"라는 이름을 한자로 재해석한 것으로 추정된다.[182] 이에 따라 시간이 지나면서 본래 "와니"였던 그가 "화이"를 거쳐 "왕인"이 된 후 마치 중국의 왕씨인 것처럼 해석되어 《속일본기》에 그의 배경 이야기까지 주어진 듯하다. 물론, 이는 왕인이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로 가정했을 때이며, 현대 일본 학자들 사이에서는 「궁월군(弓月君)」, 「아지사주(阿知使主)」를 포함해 당시 고훈 시대를 상징하는 하나의 가상의 인물로 인식된다.

3. 한국과 일본에서의 왕인

백제 근구수왕 때의 학자로 여겨지는 왕인은 일본에서 학자와 서적을 요청하자 왕명으로 일본에 건너갔다. 경서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그는 일본 오진 천황(応神天皇일본어))의 신임을 얻어 태자의 스승이 되었고, 그의 자손들도 대대로 일본에서 학문에 종사하며 일본 문화 발전에 기여했다.[177]

일본서기속일본기에는 왕인이 "할아버지 때에 귀화한 중국인"[178]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고사기에는 그러한 내용이 없다. 『신찬성씨록』에는 왕인의 조상이 한나라 황실 출신인 "난왕"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손자의 이름은 "아랑고수"로 나타나 있다.

일본서기신찬성씨록에는 왕인이 한인이라는 기록은 없지만, 백제에서 왔다는 기록만 존재한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왕인이 백제에 도래한 한인이라고 보기도 한다.[31][33][34][35][38][39][41][42][43][45][40][46][32][36][37][44][47][48] 고금와가집의 가나 서문에 나오는 '''난파진의 노래'''는 왕인의 작품으로 여겨지며, 경기 가루타의 시작 노래로 지정되어 있다.[78]

하지만 쓰다 소키치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은 왕인의 실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75][76][49][50][51][52][53][54][56][57]

3. 1. 한국에서의 왕인

백제 근구수왕 때의 학자로 여겨진다. 일본에서 아라타와케(荒田別일본어) 등을 보내어 학자와 서적을 청하자 근구수왕의 명을 받들고 왕의 손자 진손왕[176]과 함께 《논어》 10권, 《천자문》 1권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갔다. 해박한 경서의 지식으로 일본 오진 천황(応神天皇일본어))의 신임을 얻어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일본의 문화를 깨우친 그는 물론 그의 자손도 대대로 일본의 서부 고치(河內)에 살면서 학문에 관한 일을 맡아보았다. 왕인은 일본의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177]

일본서기속일본기에 의하면 그는 "할아버지 때에 귀화한 중국인"[178]이라 하지만 왕인이 처음으로 등장한 고사기에는 전혀 없는 내용이다.

대한민국에서 왕인은 고대 일본에 선진 문물을 전수한 백제의 학자로서 중학교 역사 교과서에는 ‘왕인 박사가 일본에 문화를 전해 주었다’라고 기술되고 있다. 전라남도 영암군에서는 왕인이 태어났다는 집의 터(구림면)를 왕인 박사 유적으로 복원하고 매년 왕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왕인문화축제를 열고 있다.

2017 영암 왕인 문화 축제 입구


다만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포함한 한국의 역사서에는 왕인에 해당하는 인물에 대한 기술이 보이지 않고 왕인에 대한 기록은 전적으로 일본의 사서에 의존하므로 왕인 박사 유적지가 왕인의 실제 출생지임을 뒷받침하는 유적이나 추가 사료가 없다는 지적이 있다.

이근우는 6세기 초 일본으로 건너간 왕진이라는 인물을 기초로 2세기 정도 앞선 인물 왕인이 창작되었다는 추정을 하고 있으며, 이런 조작에는 문자 전래시기를 최대한 끌어올리기 위한 고대 일본인들의 의도가 있다는 설을 사료 비판을 통해 제시했다.[183]

한국에는 왕인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없지만, 오늘날 "왕인 박사 유적지" ('''왕인'''은 왕인의 한국식 표현이다.)는 전라남도 영암군 구림마을에 위치해 있다. 이것은 20세기 초에 시작된 새로운 신화에 근거하고 있다.[29]

『택리지』(1751)를 포함한 초기 지리서에는 왕인을 영암과 연결하는 내용이 전혀 없다. 왕인을 영암과 연관 짓는 최초의 기록은 이병연의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覧; 1922–37)이다. 이 책은 아무런 증거도 제시하지 않고 왕인이 영남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한다.[30] 비슷한 시기에 아오키 케이쇼(Aoki Keishō)라는 일본 승려가 "구전"을 근거로 영암이 왕인의 고향이라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2년 그는 영암에 왕인의 동상을 세우는 데 실패했다.

왕인에 대한 새로운 신화는 1970년대에 대한민국에서 널리 알려졌다. 1972년 사회운동가 김창수는 "일본에 담긴 한국 정신"이라는 제목의 일련의 에세이를 발표했다. 한국 민족사의 틀 안에서 왕인은 한국인으로 여겨졌다. 영암 출신 독자로부터 정보를 얻은 김창수는 이듬해 영암을 왕인의 출생지로 특정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증거의 미약함에도 불구하고, 왕인의 "유적지"는 1976년 전라남도 문화재 제20호로 지정되었다.[29]

왕인의 "유적지" 개발은 전라남도와 영암군 정부가 주도했다. 전라남도 도지사는 영암군 출신이었다.[28] 1985년부터 1987년까지 공사가 진행되어 왕인이 공부했다고 전해지는 "출생지", 학교 등이 "복원"되었다. 1990년 지방 자치제의 도입으로 지방 정부가 자체 수입원을 찾아야 했기 때문에 영암군은 오래된 것처럼 보이는 새로운 테마파크를 관광 명소로 본격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영암군은 이전에 지역 주민들이 "벚꽃 축제"라는 이름으로 주최했던 연례 "왕인 문화 축제"를 1997년부터 개최하기 시작했다. 이 개발은 반대 없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사실, 이는 승려 도선 (827–898)을 영암의 주요 관광 자원으로 사용하려는 측으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다.[28]

신찬성씨록』에는 "제번"의 "한" 구분에 왕인의 자손에 관한 기술이 있다. 문숙네(좌경)에는 "출한 고황제의 후손 난왕", 문기촌(좌경)에는 "문숙네와 동조, 우이고수 이후", 무생숙네(좌경)에는 "문숙네와 동조, 왕인의 손자 아랑고수 이후", 앵야수(좌경)에는 "무생숙네와 동조, 아랑고수 이후", 율서수(우경)와 고지련(가와치국과 이즈미국)에는 각각 "문숙네와 동조, 왕인 이후"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상이 한의 황실 출신인 "난왕"이라는 점 등이 『속일본기』와 대응된다. 또한 손자의 이름으로 "아랑고수"가 기록되어 있다.

일본서기』나 『신찬성씨록』에는 한인이라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고, 백제에서 왔다는 기록만 존재하지만, 백제에 도래한 한인이라고 보는 학자의 견해도 있다.[31][33][34][35][38][39][41][42][43][45][40][46][32][36][37][44][47][48]

1968년에 농협 시찰을 위해 방일한 김창수는 왕인 전승을 알게 되었고, 1970년에 다시 방일하여 왕인의 자료를 수집했다. 김창수는 민족사관을 위한 왕인연구소를 설립하고, 1972년 8월, 중앙일보에 『백제 현인 박사 왕인 일본에 심어준 한국 혼』을 15회 연재했다. 같은 해 10월에 영암군의 청년회의소 회장 강신원으로부터 무당의 증언으로 현지에 기도의 전설이 있다는 정보를 제공받았다. 김창수는 현지를 왕인의 출생지로 인정하고, 1973년 2월, "왕인 출생지 영암군" 설을 발표했으며, 더 나아가 사단법인 왕인박사 현창협회를 창립했다. 1975년 6월, 『박사 왕인 일본에 심어준 한국 문화』를 출판. 1975년, 전라남도지사가 박사 왕인 탄생지 성역화 사업 계획을 발표하고, 김창수는 전라남도교육위원회에서 "왕인박사 유적 학술 세미나"를 개최했다. 1976년에는 전라남도가 영암군 구림면 성기동 일대를 "왕인박사 탄생지 유적"으로 전라남도 지방 문화재로 지정하고, 유적공원으로 관광지로 만들었다.[154] 1984년에는 왕인제가 개최되었고, 매년 11월 3일에 연중 행사화되었다. 1985년에는 지역에 "왕인총의 환경을 지키는 모임"이 발족, 묘역 청소, 무궁화 식수, 사천왕사 왓소에 참가, 한국과의 친선 교류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1987년에는 왕인묘가 준공되었다.[155] 1992년에는 오사카부와 히라카타시가 묘역을 정비하여, 한글 통행 안내판·휴게소(선린우호관)·화장실·기념비 등이 건설되었다. 1992년, 한국 전라남도 영암군이 히라카타시에 우호도시 제휴를 신청했지만, 히라카타시는 거절했다.

김영달은 “선의”를 가진 일본인 협력자의 도움으로 역사 검증 없이 한국인의 일본에 대한 문화 우월 사관 - 실제로는 문화적 콤플렉스의 이면 - , 한국인의 민족 의식을 자극하는 한일 우호 친선 운동에 왕인이 이용되고 있다고 보면서, 이러한 역사 이미지의 정치적 이용·시대적 풍조에 편승하여 다양한 역사 위조가 이루어졌다고 지적한다. 구체적으로는, 오사카부 히라카타시에 있는 왕인의 분묘로 알려진 왕인총, 그리고 한국 전라남도 영암군을 왕인의 출생지로 주장하는 왕인묘를 예로 들며, 과학적 실증성이 전혀 없는 역사 날조이며, 고즈시마의 줄리아 오타아의 묘를 날조하고 한국 기독교 그룹이 "줄리아제"를 개최한 것, 북한의 단군의 유골을 날조하고 단군릉을 건설한 것과 같다고 비판한다. “한 학자의 소망·생각·공명심에 의한 역사 날조”, "김창수의 망상이 계기가 되어, 영암이 출생지라고 여겨지게 되었다. 그 근거는, 영암에 왕인에 관한 전설이 있다는 것뿐이지만, 과학적 실증성이 전혀 없다. 도선국사(신라 말의 명승) 등의 전설과 지역 유적을 억지로 꿰맞춘 것으로, 히라카타의 왕인총을 훨씬 능가하는 대대적인 역사 날조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어쨌든, 일본의 기기와 고사기의 기술에 근거하여, 일본의 문화를 개명한 인물이 바로 한국인이었다는 민족주의적 사고가 앞서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기까지 오면, 더 이상 왕인묘가 날조되었다고 말하려 해도 매도당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 "한국 측 주도의 왕인 현창 그룹은, 왕인의 히라카타 분묘설·영암 출생설에 대한 학문적 비판에 대해, 한일 우호의 역사 모뉴먼트를 부정하는 '좌익 소아병'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실증 없이 역사를 날조하고, 좋은 쪽으로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측이야말로, 민족주의·국가주의적 편향에 의해 이성에 동맥경화를 일으키는 '우익 성인병'이다", "역사 위조의 패턴을 분석해보면, 우선, 어떤 학자(일정의 정치력이 있는 자칭 학자)의 생각, 공명심과 열정이 있고, 이어서 그것을 지지하는 시대적 풍조와 운동이나 사업에 이용하려는 정치 세력의 존재, 그리고 어쨌든 비나 건물을 짓고, 행사를 거행하여 기정사실화한다"고 분석하고 있다.

한국 및 재일 한국인 사회에서도, 왕인은 일본의 문화를 키우고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취급되어, 한일 양국에서 왕인에 관한 행사가 열리고 있다.[156][157]

한국 초등학교 사회과 교과서에는 왕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158][159]

  • 백제의 문화를 일본에 전해주신 왕인
  • 왕인은 백제의 문화를 일본에 가르쳐 준 학자이다. 그는 『천자문』과 『논어』 등의 책을 일본에 전해주고, 일본에 오래 살면서, 일본 국왕과 왕자의 스승이 되어 학문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하여, 일본 사람들에게 한문과 유학을 알 수 있도록 노력했다. 지금도 일본 사람들은 왕인을 일본 문화의 스승으로 숭배하고 있으며, 그의 공적을 기리는 유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한국에서 왕인은 일본에 문화를 전한 한국인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민족사관을 신봉하는 운동가 김창수는 왕인을 "일본에 심은 한국 혼"으로 칭찬하고 있다.[166]

한국에서는 민족사관에 의해 "왕인은 일본에 발전된 문화를 전했다"고 가르치고 있다. 홍윤기는 왕인이 만엽가나를 만들었고, 그 자손이 히라가나를 만들었다고 한국 기원설을 주장하고 있다.[167] 왕인이 일본에 유교와 한자를 전했다고 여겨지지만, 정확하지 않다. 『고사기』에 따르면 왕인은 《논어》와 《천자문》을 가져왔을 뿐이며, 『일본서기』에 왕인이 도래하기 이전에 아치기가 유교 경전을 잘 읽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왕인이 왔을 당시의 일본에는 이미 유교와 한자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왕인은 《논어》와 《천자문》이라는 중국 서적을 가져왔을 뿐이며, 당시 한반도의 "문화"를 전했다고는 어디에도 쓰여 있지 않다. 또한, 왕인은 일본 측 자료에만 등장하는 인물이지만, 한국은 『고사기』의 "응신 천황의 명령을 받아 백제가 헌상한 인물"이라는 기술이나 『일본서기』 등 일본의 대국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는 기술에 대해서는 "날조"라고 격렬하게 부정하며, 자료의 유리한 부분만 채택하고 그 외는 무시하는 "골라먹기(체리 피킹)"를 하며 이중 기준을 보이고 있다. 한국의 역사 해석에 대해 오선화와 이자와 모토히코 등은, 일본에 "전해주었다"는 한국의 역사 해석은 일본의 역사 사료를 이용한 것이지만, 같은 사료(『일본서기』 등)에 있는 자국에 불리한 부분(임나일본부, 삼한 정벌 등)은 부정한다는 객관성 없는 유리한 역사관이며, 그 모순을 지적하고 있다.[168]

『대조선제국사』의 작가 김산호는 화집 『한국 105대 천황 존영집』에서, 응신 천황을 "왜(나라 백제)국 시조 응신 왕인"으로 소개하고 있다.[169] 고구려의 침공 때문에 백제에서 일본 열도로 도망친 응신 천황은, 그곳에서 나라 백제=왜국을 건국하고, 거기서 대백제제국을 지배했다고 주장하며, "응신 왕인"이란, 일본에 "천자문"을 전한 왕인 박사의 "왕인"과 응신 천황의 "응신"은, 둘 다 일본어로 "오진"으로 읽을 수 있기 때문에 동일 인물임에 틀림없다고 주장하고 있다.[169]

황우석이 복제 기술로 제작한 "광우병에 내성을 갖는"다고 칭하는 소를 일본의 검증 시설에 보냈다는 보고(실제로 일본에 보내진 흔적은 없다)에 있어서도, 황우석 팀의 일원이 "선진 문화를 전한 왕인이 일본에 건너간 것과 같은 일"이라고 발언하고 있다.[170]

3. 2. 일본에서의 왕인

왕인은 백제 근구수왕 때의 학자로 여겨진다. 일본에서 아라타와케(荒田別일본어) 등을 보내어 학자와 서적을 청하자, 근구수왕의 명을 받들어 왕의 손자 진손왕[176]과 함께 《논어》 10권, 《천자문》 1권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갔다. 해박한 경서 지식으로 일본 오진 천황(応神天皇일본어))의 신임을 얻어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일본 문화를 깨우친 그는 물론 그의 자손도 대대로 일본의 서부 고치(河內)에 살면서 학문에 관한 일을 맡아보았다. 왕인은 일본의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177]

일본서기속일본기에 의하면 그는 "할아버지 때에 귀화한 중국인"[178]이라 하지만, 왕인이 처음으로 등장한 고지키에는 전혀 없는 내용이다.

와니의 후손들, 좀 더 정확히는 와니를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통칭하여 가와치노후미 씨족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분가들과 함께 가와치국 기사이치에 거주했다. 종가는 서기라는 직무에 따라 씨(氏) "후미"[문학]를 사용했고, 이와 유사하게 분가들은 카바네(姓) "후히토"[서기]를 받았다.

와니가 학자로서 명성을 떨쳤음에도 불구하고, 가와치노후미 씨족은 행정 서기로서 그다지 활발하게 활동하지 않았다. 드문 예외는 후미노 네마로(文禰麻呂; ?-707)였다. 그는 일반 행정에서 활동하기보다는 진신 전쟁 (672)에서의 군사적 공적으로 중간급 관료로서는 이례적으로 높은 지위에 올랐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것이 와니의 전설이 ''고지키''와 ''니혼쇼키''에 기록된 이유라고 본다. 외국 출신 서기들이 그들의 창시자에 대해 유사하고 상호 모순된 전설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그들의 이야기에서 공통적인 특징으로는 오진 천황 재위 시대에 도착, 중국 문학 및/또는 유교의 도입, 그리고 왕(王)씨 성을 사용한다는 점 등이 있다. 와니의 전설은 가와치노후미 씨족이 역사서를 편찬할 당시 비교적 강력했기 때문에 다른 전설들을 무시하고 선택되었다.[6]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사는 전통적으로 유교 및/또는 중국 문학의 도입으로 해석되었지만, 역사서에는 명확히 언급되어 있지 않다.

고금와카집(古今和歌集)(905)의 서문에 따르면, "나니와즈(難波津)"로 시작하는 유명한 와카 시는 전통적으로 왕인에게 귀속되었다.[25] 당시 미래의 닌토쿠 천황(仁德天皇)(오진 천황의 후계자)과 그의 형제인 우지노와키이라쓰코 황태자가 서로에게 왕위를 양보하여 3년 동안 천황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역사학자들과 언어학자들은 이 시가 왕인에게 귀속되었다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이전 자료에서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10세기 초부터 이 시는 닌토쿠 천황을 찬양하는 합창곡으로 여겨졌다. 그 결과, 왕인은 천황의 덕에 순종하는 현자로 묘사되었다.

헤이안 시대 이후, 왕인에 대한 언급은 주로 "나니와즈" 시와 관련되었다. 와카 시에 대한 일부 해설에서는 왕인을 한국 동남부에 위치한 신라(新羅) 출신으로 묘사한다. 비록 이 오류는 후지와라노 노리카네(藤原範兼)의 『와카동모쇼』(和歌童蒙抄)(1145–53)와 겐쇼(顕昭)의 『고킨슈 조추』(古今集序註)(1183)에서 『일본서기』를 참조하여 수정되었지만,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레이제이 타메스케(冷泉為相)는 1297년에 왕인이 백제에서 신라로, 그리고 신라에서 일본으로 이주했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이 오류가 발생한 가능한 이유는 왕인의 일본 도착이 『일본서기』에 기록된 진구 황후의 신라 정벌의 결과로 해석되었기 때문이다.[26]

일반적인 합의는 왕인이 당시 외래 출신 일본 씨족에게 정치적 권한을 부여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물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그가 일본 기록 외에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이유이다. 또한 여러 자료에서 여러 이름(발음은 같지만)으로 기록되었으며, 그중 많은 자료가 그의 업적의 상징성에 중점을 두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신찬성씨록』에는 "제번"의 "한" 구분에 왕인의 자손에 관한 기술이 있다.

조상이 한의 황실 출신인 "난왕"이라는 점 등이 『속일본기』와 대응된다. 또한 손자의 이름으로 "아랑고수"가 기록되어 있다.

고금와가집의 가나 서문에 보이는 왕인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난파진의 노래'''는 백인일수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전일본 가루타 협회가 경기 가루타의 시작 노래로 지정하여, 대회 때 첫 번째로 불리는 노래이다. 시인 사사키 노부츠나가 시작 노래로 선정했다고 전해진다. 대회에서는 "이마오하루베토(이제 봄이 오니)"로 가사를 바꿔 부른다.[78]

1731년 (교호 16년) 박사 왕인의 묘가 건립되었다고 "河内国交野郡藤坂村旧記"(1791년, 서법사 소장)에 기록되어 있다.

1895년 11월 23일·26일 오사카 아사히 신문에 게재된 전 내각부 서기관장 다카하시 겐조(별호: 긴엔)가 나이토 도라지로와 왕인의 묘를 방문했을 때 촌장에게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나미카와 세이쇼가 방문했을 때 황폐함을 슬퍼하며 그것을 들은 영주 구가이 야에몬이 박사 왕인의 묘를 건립했다.

1731년경의 영주는 구가이 야에몬의 양자, 미토 가문의 가신·구가이 타로베에 마사타케의 친아들인 구가이 마사노리[110]이다.

역사학자 김연달은 『고킨나이지』를 편찬하던 나미카와의 공명심에 의한 역사의 날조라고 보고 있다.

4. 왕인의 출신과 실존에 대한 논란

왕인은 일본의 역사서에만 등장하며, 한국이나 중국의 사료에는 그의 존재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1] 왕인의 생애에 대한 주요 자료는 《고지키》(680)와 《일본서기》(720)이다.

《고지키》와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 왕인은 백제 근구수왕 때 일본에 건너가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오진 천황에게 바치고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는 여러 가지 의문점을 낳는다. 예를 들어, 왕인이 일본에 가져갔다는 《천자문》은 왕인이 일본에 도착했다고 추정되는 시기보다 훨씬 늦은 6세기 초에 편찬되었다는 점이 문제점으로 지적된다.[4]

왕인의 도래 시기를 추정하는 것 또한 쉽지 않다. 전통적인 연대에 따르면 285년이지만, 역사가들은 이 시기가 너무 이르다고 판단한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오진 천황 재위 16년에 사망한 백제의 아신왕(아쿠에왕)의 재위를 기준으로 하면 405년이 된다.[5] 그러나 이 이론은 왕인의 도착이 백제의 근초고왕(쇼코왕, 재위 346-375) 재위 기간이었다고 말하는 《고지키》의 묘사와 모순된다. 《고지키》는 왕인이 372년 이후에 도착했음을 시사한다.[4]

이러한 기록의 특이성과 모순점 때문에 왕인의 실존 여부와 그 기원에 대한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19세기 일본 그림에서 상상된 왕인

4. 1. 출신에 대한 논란

일본서기속일본기에 따르면 왕인은 "할아버지 때에 귀화한 중국인"[178]이라고 하지만, 왕인이 처음 등장한 고사기에는 이러한 내용이 전혀 없다. 《속일본기》에는 왕인의 자손이라는 좌대사(左大史) · 정6위상(上) 후미노이미키 모오토(文忌寸最弟) 등이 자신들의 선조 왕인이 옛 한나라 황제의 먼 후손이라고 간무 천황에게 상주한 기록이 있다.

이에 따르면 한 고제, 즉 유방의 자손으로 「앵(鸞)」이라는 인물이 있었고 그의 자손 「왕구(王狗)」가 백제로 건너와 살았으며, 그 손자인 왕인이 왜로 도래하여 후미 씨(文氏)와 무생 씨(武生氏) 등의 선조가 되었다는 것이다. 《신찬성씨록》에도 이와 비슷한 기술이 보인다. 즉, 왕인은 고구려낙랑군을 멸망시킨 뒤 백제에 망명한 중국계 학자가 된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들은 한국과 중국의 기록에는 전혀 없으며, 왕인이 처음 등장했을 때 이름은 한국어로 「화이(和邇)」였다.[179] "화이"는 일본어로 "와니(わに)"로 읽을 수 있지만, "왕인"은 "오오진(おうじん)" 또는 "오오닌(おうにん)"으로 밖에 읽을 수 없다. 고대 일본사에 등장하는 "왕인"을 제외하면 한자인 「왕인(王仁)」을 "와니"로 절대 발음할 수 없다. 즉, "화이"나 "왕인"은 그의 본래 이름이 아니며, 이는 "와니"라는 이름을 한자로 재해석한 것으로 추정된다.[180][181] 이에 따라 시간이 지나면서 본래 "와니"였던 그가 "화이"를 거쳐 "왕인"이 된 후 마치 중국의 왕씨인 것처럼 해석되어 《속일본기》에 그의 배경 이야기까지 주어진 듯하다.[182]

이는 왕인이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로 가정했을 때이며, 현대 일본 학자들 사이에서는 「궁월군(弓月君)」, 「아지사주(阿知使主)」를 포함해 당시 고훈 시대를 상징하는 하나의 가상의 인물로 인식된다.

왕인의 기원은 기록의 특이성 때문에 종종 의문이 제기되며, 그의 정체성에 대한 몇 가지 이론이 제기되고 있다.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이론은 왕인이 (다른 많은 씨족 창시자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움직임의 부산물이라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외래 출신의 씨족에게 정치적 안정과 협력의 대가로 전설적인 자질을 부여했다.[7][8] 또한, 출신 왕국(각각 신라백제)에 대한 기록이 없는 유즈키노 키미와 아치노 오미와 마찬가지로,[9] 왕인의 기원은 최근에 역사적 정확성보다는 상징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덜 대중적인 또 다른 이론은 왕인이 한사군의 멸망 이후 백제로 귀화한 중국인이었다는 것이다.[10][11] 이 이론에 따르면 왕인의 성은 "王 (Ō)"이었는데, 이 문자는 중국인들이 널리 사용하므로 중국 기원을 암시한다.

791년에 왕인의 후손인 후미노 모오토(文最弟)와 타케후노 마카타(武生真象)는 그들의 ''카바네'' 또는 가문의 지위를 높이는 데 성공했다. ''속일본기''(797)에 따르면 그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 루안(鸞)은 한 고조의 후손이었다. 루안의 후손 왕구(王狗)는 백제로 이주했다. 백제 구수왕 때 조정에서 문인들을 소환하기 위해 사신을 보냈다. 구수왕은 구의 손자 왕인(Wani)을 공물로 바쳤다. 그는 후미, 타케후, 그리고 다른 씨족의 창시자였다.[12]

비슷한 이야기는 ''신찬성씨록''(815)의 후미노 스쿠네(文宿禰) 씨족에 대한 설명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 이야기는 앞서 언급한 이야기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외래 출신의 유력 씨족의 다른 창시자들과 마찬가지로, 왕인이 중국 황실 출신이라는 주장은 그들의 후손이 지위를 높이기 위해 만들어낸 허구적인 이야기로 간주되며, 유즈키노 키미와 아치노 오미의 이야기(둘 다 각각 진시황과 한 령제의 후손이라고 주장함)에서도 유사한 시도가 발견된다. 현대 일본 역사학자들은 고고학적, 계보학적, 역사적 증거를 통해 이들이 사실 한국 출신이라는 것을 추론했으며,[13][14][15][16][17][18][19] 그들의 이야기(사실은 오래된 자료에 처음 언급된 후 훨씬 나중에 추가된 것)는 단순히 정치적 지배를 위한 수단이었다고 결론지었다.

일부 학자들은 이 주장에 대해 비판적인데, 그 이유는 이 문자가 ''일본서기''에 처음 등장하고[20] 훨씬 오래된 ''고사기''에서는 그의 이름을 나타내기 위해 완전히 다른 문자 "和 (Wa)"가 사용되기 때문이다.[21] 회의론자들은 두 문자가 단순히 음성적인 이유(훈독)로 사용되었으며, "王仁"의 정확한 음독 발음은 사실 "Ō Jin" 또는 "Ō Nin"이지 "Wani"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왕인이 처음 기록된 본래 이름인 와니키시는 "Kishi (吉師)"라는 접미사를 포함하는데, 이는 백제 왕족에게서 발견되는 칭호에서 "Gilji (吉支)"로 기록되어 고대 한국어로 "Kichi"로 발음되는 백제 출신으로 여겨진다.[22] 동료 백제 이민자 아치노 오미의 다른 이름인 "Achikishi (阿知吉師)"도 "Kishi"라는 접미사와 함께 기록되어 있어 해당 인물 간의 공통점을 나타낸다. 또한, 원래 문자 "和邇"는 실제로 Wani로 발음되므로,[23] 그의 이름은 한자에 관계없이 "Wani"로 발음되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和邇"에서 "王仁"으로의 변화는 당시 "王 (중국어에서는 Wang)"이라는 성을 가진 많은 중국 유교 신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며,[24] 그의 이름이 그의 민족성에 기반하기보다는 그가 "유교도"라는 생각에 더 부합하도록 변경되었다고 강조한다.

노 "난파(難波, 고명(古名): 난파매(難波梅))"에서는 왕인(王仁)은 "오닌"이라고 읽힌다.[79]

4. 2. 실존에 대한 논란

왕인은 일본 역사서에만 언급되며, 한국이나 중국 사료에는 기록이 없다.[1] 왕인의 생애에 대한 주요 자료는 ''고지키''(680)와 ''일본 서기''(720)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오랫동안 학자들로부터 의문을 받아왔다. ''논어'' 10권은 너무 많고, 더 중요한 것은 왕인의 도래 시기가 ''천자문'' 편찬(6세기 초)보다 앞선다는 점이다.[4]

왕인의 도래 시기를 추정하는 것은 초기 사건에 대한 자료의 정확성에 대한 오랜 분쟁 때문에 다소 어렵다. 전통적인 연대에 따르면 285년이지만, 역사가들은 너무 이르다고 생각한다. ''일본 서기''에 따르면 오진 천황 재위 16년에 사망한 백제의 아신왕(아쿠에왕)의 재위를 기준으로 하면 405년이 된다.[5] 그러나 이 이론은 왕인의 도착이 백제의 근초고왕(쇼코왕, 재위 346-375) 재위 기간이었다고 말하는 ''고지키''의 묘사와 모순된다. ''고지키''는 왕인이 372년 이후에 도착했음을 시사한다.[4]

왕인의 기원은 기록의 특이성 때문에 종종 의문이 제기되며, 그의 정체성에 대한 몇 가지 이론이 제기되고 있다.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이론은 왕인(다른 많은 씨족 창시자들과 마찬가지로)이 정치적 움직임의 부산물이라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외래 출신 씨족에게 정치적 안정과 협력의 대가로 전설적인 자질을 부여했다.[7][8] 또한, 출신 왕국(각각 신라백제)에 대한 기록이 없는 유즈키노 키미와 아치노 오미와 마찬가지로,[9] 왕인의 기원은 최근에 역사적 정확성보다는 상징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덜 대중적인 또 다른 이론은 왕인이 한사군의 멸망 이후 백제로 귀화한 중국인이었다는 것이다.[10][11]

791년에 왕인의 후손인 후미노 모오토(文最弟)와 타케후노 마카타(武生真象)는 그들의 ''카바네'' 또는 가문의 지위를 높이는 데 성공했다. ''속일본기''(797)에 따르면 그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 루안(鸞)은 한 고조의 후손이었다. 루안의 후손 왕구(王狗)는 백제로 이주했다. 백제 구수왕 때 조정에서 문인들을 소환하기 위해 사신을 보냈다. 구수왕은 왕구(王狗)의 손자 왕인(Wani)을 공물로 바쳤다. 그는 후미, 타케후, 그리고 다른 씨족의 창시자였다.[12]

비슷한 이야기는 ''신찬성씨록''(815)의 후미노 스쿠네(文宿禰) 씨족에 대한 설명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 이야기는 앞서 언급한 이야기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외래 출신의 유력 씨족의 다른 창시자들과 마찬가지로, 왕인이 중국 황실 출신이라는 주장은 그들의 후손이 지위를 높이기 위해 만들어낸 허구적인 이야기로 간주되며, 유즈키노 키미와 아치노 오미의 이야기(둘 다 각각 진시황과 한 령제의 후손이라고 주장함)에서도 유사한 시도가 발견된다. 현대 일본 역사학자들은 고고학적, 계보학적, 역사적 증거를 통해 이들이 사실 한국 출신이라는 것을 추론했으며,[13][14][15][16][17][18][19] 그들의 이야기(사실은 오래된 자료에 처음 언급된 후 훨씬 나중에 추가된 것)는 단순히 정치적 지배를 위한 수단이었다고 결론지었다.

일부 학자들은 이 주장에 대해 비판적인데, 그 이유는 이 문자가 ''일본서기''에 처음 등장하고[20] 훨씬 오래된 ''고사기''에서는 그의 이름을 나타내기 위해 완전히 다른 문자 "和 (Wa)"가 사용되기 때문이다.[21] 회의론자들은 두 문자가 단순히 음성적인 이유(훈독)로 사용되었으며, "王仁"의 정확한 음독 발음은 "Ō Jin" 또는 "Ō Nin"이지 "Wani"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왕인이 처음 기록된 본래 이름인 와니키시는 "Kishi (吉師)"라는 접미사를 포함하는데, 이는 백제 왕족에게서 발견되는 칭호에서 "Gilji (吉支)"로 기록되어 고대 한국어로 "Kichi"로 발음되는 백제 출신으로 여겨진다.[22] 또한, 동료 백제 이민자 아치노 오미의 다른 이름인 "Achikishi (阿知吉師)"도 "Kishi"라는 접미사와 함께 기록되어 있어 해당 인물 간의 공통점을 나타낸다. 원래 문자 "和邇"는 실제로 Wani로 발음되므로,[23] 그의 이름은 한자에 관계없이 "Wani"로 발음되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일반적인 합의는 왕인이 당시 외래 출신 일본 씨족에게 정치적 권한을 부여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물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그가 일본 기록 외에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이유이다. 또한 여러 자료에서 여러 이름(발음은 같지만)으로 기록되었으며, 그중 많은 자료가 그의 업적의 상징성에 중점을 두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5. 왕인의 업적과 영향

왕인은 백제 근구수왕 때의 학자로 여겨진다. 일본에서 아라타와케(荒田別일본어) 등을 보내 학자와 서적을 요청하자, 근구수왕은 왕인에게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가도록 명하였다.[177] 왕인은 해박한 경서 지식을 바탕으로 일본 오진 천황(応神天皇일본어)의 신임을 얻어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그는 일본 문화를 깨우치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며,[177] 그의 자손들은 대대로 일본 서부 고치(河內)에 살면서 학문에 관한 일을 맡아보았다.

일본서기속일본기에는 왕인이 "할아버지 때에 귀화한 중국인"[178]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고지키에는 이러한 내용이 없다.

1616년(겐나 2년) 정월, 후지사카 마을 묘지골의 왕인 묘(어니의 묘)에 관해 쓰여진 키노무라 와덴지 도슌의 『왕인 분묘 내조기』, 『왕인 후손 및 계보기』가 1939년 10월 10일 아사히 신문에 보도되었다.[172][92]

1682년(덴와 2년)에 쓰여진 오사카부 히라카타시 구 츠다촌 손코지 소장 『당향 구적 명승지』에는 백제 왕씨의 무덤이라고 전해지는 곳에 대한 기록과 함께, 왕인의 무덤과 저자가 후대에 세워졌다고 추정한 탑석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1689년 (겐로쿠 2년) 가이바라 에키켄의 조카이자 양자인 가이바라 코코는 츠다의 신덴에 있는 왕인의 묘에 대해 기록하였다.

5. 1. 논어와 천자문 전래

왕인은 백제 근구수왕 때의 학자로 여겨진다. 일본에서 아라타와케(荒田別일본어) 등을 보내어 학자와 서적을 청하자, 근구수왕의 명을 받들고 왕의 손자 진손왕[176]과 함께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갔다고 한다. 해박한 경서 지식을 바탕으로 일본 오진 천황(応神天皇일본어)의 신임을 얻어 태자의 스승이 되었으며, 일본 문화를 깨우치는 데 기여하였다.[177] 그의 자손들은 대대로 일본 서부 고치(河內)에 살면서 학문에 관한 일을 맡아보았다.

왕인에 대한 기록은 주로 ''고지키''(680)와 ''일본 서기''(720)에 나타나며, 한국이나 중국 사료에는 기록이 없다.[1]

''고지키''에 따르면, 오진 천황백제 근초고왕에게 현자를 조공으로 바치라고 명하자, 왕인이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가지고 일본에 왔다고 한다.[2]

''일본 서기''에서는 오진 천황 재위 15년(284년)에 백제 왕이 아치키(아치노오미)를 파견하여 좋은 말 두 마리를 조공으로 바쳤고, 아치키가 유교 경전에 능통하여 황태자의 스승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오진 천황이 아치키에게 뛰어난 학자가 있는지 묻자, 아치키는 왕인을 추천하였고, 오진 천황은 아라타와케와 가무나기와케를 백제에 보내 왕인을 데려왔다. 왕인은 황태자에게 다양한 경전을 가르쳤으며, 후미노오비토 씨족의 시조가 되었다.[3]

178px

하지만 이러한 기록은 학자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의문의 대상이었다. ''논어'' 10권은 너무 많고, ''천자문''은 왕인의 도착 시기보다 늦은 6세기 초에 편찬되었기 때문이다.[4] 아라이 하쿠세키는 왕인이 ''천자문''과 혼동된 초학 서적을 가져왔다고 보았고,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천자문''이 초학 서적의 대표로 언급된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다른 버전의 ''천자문''이 전래되었다는 추정도 있지만, 명확한 근거는 없다.[4]

왕인의 도착 시기에 대해서는 자료의 정확성 문제로 논쟁이 있다. 전통적인 연대에 따르면 285년이지만, 역사가들은 너무 이르다고 본다. ''일본 서기''에 따르면 오진 천황 16년에 사망한 백제 아신왕의 재위를 기준으로 하면 405년이 된다.[5] 그러나 ''고지키''는 왕인의 도착이 백제 근초고왕 재위 기간(346-375)이었다고 하여, 372년 이후에 도착했음을 시사한다.[4]

''일본서기''의 기사는 유교 및 중국 문학의 도입으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역사서에는 명확히 언급되지 않았다.

고금와카집(905) 서문에 따르면, "나니와즈(難波津)"로 시작하는 와카 시는 왕인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25] 그러나 이 시는 이전 자료에서 발견되지 않아, 학자들은 왕인의 작품이라는 것에 회의적이다. 10세기 초부터 이 시는 닌토쿠 천황을 찬양하는 노래로 여겨졌고, 왕인은 천황에게 순종하는 현자로 묘사되었다.

헤이안 시대 이후 왕인에 대한 언급은 주로 "나니와즈" 시와 관련되었다. 일부 와카 시 해설에서는 왕인을 신라 출신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레이제이 타메스케는 왕인이 백제에서 신라를 거쳐 일본으로 이주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오류는 왕인의 도착이 진구 황후신라 정벌의 결과로 해석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26]

일반적으로 왕인은 외래 출신 일본 씨족에게 정치적 권한을 부여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물이라는 견해가 있다. 이는 그가 일본 기록 외에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로 여겨진다.

『일본 서기』에는 왕인이 백제 사신 아직기를 통해 일본에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59] 가사하라 가즈오는 유교가 『일본 서기』에 5세기 전반 오진 천황 시대에 백제로부터 전해졌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한자는 이미 노국왕 금인에서도 알려져 있고, 5세기에는 도검명문에도 사용되었으므로, 이 기사는 왕인을 시조로 하는 서문씨의 기원 전승으로 보아야 한다고 지적했다.[59]

왕인에 의해 『논어』와 『천자문』, 즉 유교한자가 전해졌다고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천자문』은 왕인의 생존 당시에는 아직 편집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기록을 통해 왕인의 실존에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64]

고어습유』에는 왕인이 가와치노후미노오비토(하내문수)의 시조라고 기록되어 있다.[65],[66]

5. 2. 일본 학문과 교육에 대한 영향

왕인은 백제 근구수왕 때의 학자로, 일본에 학문과 교육을 전파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일본에서 학자와 서적을 요청하자, 근구수왕은 왕인에게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가지고 일본으로 가도록 명하였다.[177] 왕인은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오진 천황의 신임을 얻어 태자의 스승이 되었으며, 그의 자손들도 대대로 일본에서 학문을 담당하였다.[177]

왕인의 후손들은 가와치노후미 씨족이라 불렸으며, 이들은 가와치국 기사이치를 중심으로 거주하며 서기(書記) 직무를 맡았다.[6] 이들은 '후미'(문학)라는 씨(氏)와 '후히토'(서기)라는 카바네(姓)를 사용했다.[6] 가와치노후미 씨족은 행정 서기로서 활발하게 활동하지는 않았으나, 예외적으로 후미노 네마로(文禰麻呂)는 진신 전쟁 (672)에서의 군사적 공로로 높은 관직에 오르기도 했다.[6]

일본서기속일본기에는 왕인이 "할아버지 때에 귀화한 중국인"[178]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고지키에는 이러한 내용이 없다.

고금와카집(古今和歌集) 서문에 따르면, "나니와즈(難波津)"로 시작하는 유명한 와카 시는 왕인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25] 그러나 이 시가 왕인의 작품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도 존재한다.

헤이안 시대 이후 왕인에 대한 언급은 주로 "나니와즈" 시와 관련되어 나타난다. 일부에서는 왕인을 신라 출신으로 묘사하기도 했지만, 이는 오류로 밝혀졌다.[26]

일반적으로 왕인은 외래 출신 일본 씨족에게 정치적 권한을 부여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물이라는 견해가 있다.

6. 왕인을 기리는 유적과 기념물

대한민국일본 양국에는 왕인을 기리는 다양한 유적과 기념물이 존재한다.

대한민국 전라남도 영암군에는 왕인이 태어났다는 집터(구림면)가 왕인 박사 유적지로 복원되어 있으며, 매년 왕인문화축제가 열린다. 그러나 이 유적지가 실제 왕인의 출생지인지는 불분명하며, 역사학계에서는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183]

일본 오사카부 히라카타시에는 왕인의 묘라고 전해지는 곳이 있으나, 18세기에 확인된 이 묘는 왕인과 관련이 없을 가능성이 높다.[27] 그 외에도 다카이시 신사, 호치가이 신사 등 여러 곳에 왕인 관련 유적이 남아있다.

다음은 일본 내 왕인 관련 유적 및 기록에 대한 연표이다.

연도사건
1698년마츠시타 겐린의 "본조학원 난화초"에 츠다의 신덴에 있는 왕인의 묘에 대한 기록.[107]
1731년"河内国交野郡藤坂村旧記"(1791년, 서법사 소장)에 박사 왕인의 묘 건립.[109] 나미카와 세이쇼가 방문했을 때 황폐함을 슬퍼하며 영주 구가이 야에몬이 박사 왕인의 묘를 건립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짐.[111][112][113]
1756년타니가와 코레키요의 「일본서기통증」에서 후지사카 촌의 동북 묘지 골짜기에 있는 왕인 묘(오니 묘)와 이즈미 국 오토리 군의 히가시하라 다이묘진이 기록됨.[120][121]
1757년고지 시겐의 『전계상지』에 이즈미 국의 "백제 왕인 묘" 게재.[122]
1772년이누이 테이조・기카안 닌의 저서 요곡습엽초에 이즈미노쿠니의 사당과 츠다의 신덴에 있는 왕인의 묘가 기록됨.[123]
1796년아키사토 리시마의 "이즈미 명소 도회" 제4권에 왕인을 모시는 히가시하라 덴노와 그 후지사카의 "묘"가, "가와치 명소 도회"에 후지사카 촌 동북 묘곡의 왕인 묘의 석표가 기록됨.[124][125][126]
1814년『갑주국지』 48권에 왕인의 묘(와니즈카) 기재.[118] 네기시 진에이는 이노(귀의 주머니) 권 10에서 박사 왕인의 묘의 탁본에 대해 기록.[119]
1824년하마마츠 가코쿠의 「신불령험기 그림회」에 우메다의 왕인의 사당에 대해 기술.[128]
1827년황폐해진 묘를 재건하기 위해 자금을 모아 아리스가와노미야 하타히토 친왕의 친필을 받아 박사 왕인 묘의 석비를 세움.[111][112][129]
1892년스가와라 촌이 오사카부에 정비를 신청, 주변 사유지를 매입하여 분묘지로 기증.[130] 아리스가와노미야 하타히토 친왕을 섬기던 간베노 고묘는 친왕으로부터 어염필을 받아 석비를 건립하고 기부를 모았다고 함.[95]
1894년스가와라 촌은 오사카부로부터 기부금 모집 허가를 받아 기공식을 거행, 청일 전쟁으로 인해 공사 중단.[130]
1895년전 내각부 서기관장 다카하시 겐조가 나이토 도지로와 함께 오진의 묘를 방문했을 때 촌장으로부터 들은 오진의 묘의 유래가 오사카 아사히 신문에 보도됨.[113]
1897년오사카시 고쓰 신사에서 닌토쿠 천황 1500년 기념제에서 기부를 모금, 러일 전쟁으로 중단.[131][132][95]
1900년요시다 도고가 「대일본지명사전」에서 후지사카 묘곡의 어니묘는 대묘공 아테리이와 반구공 모레이의 묘, 후지사카의 귀묘는 이추의 무덤일지도 모른다고 기록.[133]
1908년『박사 오진: 문학 시조』 출판.[134]
1909년오사카 육군 병기 지창 기노 탄약고 폭발로 인해 후지사카 촌의 박사 오진의 묘 훼손.[135]
1927년신사 창립을 오사카부에 출원.[95]
1930년만주 사변으로 인해 봉고제와 지진제 연기.[95]
1934년스가와라 촌이 오진 분묘와 박사 오진 고분묘의 사적 신청.[136]
1938년오사카부의 사적으로 지정.
1939년나카야마 규시로가 중요 자료로 인정한 『오진 분묘 내조기』 『오진 후손 및 계보기』가 오사카 아사히 신문에 보도됨.[92]
1940년옥울 완성. 오진 신사 건립은 전쟁으로 무산.[138] 4월 28일 도쿄 우에노 공원에 박사 오진 기념비 건립.[139]
1955년가타야마 조조가 왕인총에 대해 기록.[95]
1956년후지사카 미야마 고분 발굴 (출토품은 오사카 시립 박물관 소장).[99][100]
1965년다케시마 쇼도,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공과 관련된 매화, 비매 백홍 기증 (현존하지 않음).[140]
1966년오사카 대학 개덕당 동우회 하시모토 도시마사 씨와 메타세쿼이아 식수 (현존하지 않음).[140]
1970년이와테현 하나마키 문화재 보호 위원 야마모토 겐조는 쇼와 8년 당시 왕인 묘는 귀신 묘로 지역 주민들에게 불렸다고 말함.[141]
1978년쓰지무라 아키라가 왕인총의 황폐에 대해 언급, 왕인공원 정비 시작.[142] [143]
1979년춘추 위령제를 재일대한민국거류민단이 이어받음.[140]
1983년박사 왕인회 "왕인" 출판.
1984년춘추 위령제 한일 합동 개최. 한국에서 무궁화 묘목 250본 기증 (현존).[140] 11월 3일 제1회 박사 왕인 축제에 한국 영사 참가.
1985년3월 왕인총의 환경을 지키는 모임 발족. 11월, 한국 영암의 왕인묘 준공식 초청.[140]
1987년왕인공원에 [https://www.city.hirakata.osaka.jp/0000003340.html 평화의 상 "항구적 평화"] 건립.
1988년사적 지정 50주년 기념 축하식. 한일 문화 친선 협회로부터 한국 석조 제단 기증.[140]
1998년김대중 대한민국 대통령으로부터 친서.[145]
2006년백제문 준공. 일본・한국의 기부금으로 오사카부에 기증.[145]
2008년전라남도 영암군히라카타시가 우호 도시 제휴 조인.[146][147][148] 전 왕인 묘에서 "박사 왕인 축제"와 "납량 무궁화 축제" 개최.[149][150][151][152]



일본 내 주요 왕인 관련 유적은 다음과 같다.



전라남도 영암군에서는 1976년 이후 왕인 박사제가 개최되고 있으며, 오사카부 히라카타시 후지사카에 있는 전 왕인 묘에서는 "박사 왕인 축제"가 개최되고 있다.[171] 2008년 히라카타시영암군은 우호 도시 제휴를 맺었다.[172]

6. 1. 한국

대한민국에서 왕인은 고대 일본에 선진 문물을 전수한 백제의 학자로서 중학교 역사 교과서에는 ‘왕인 박사가 일본에 문화를 전해 주었다’라고 기술되고 있다.[183] 전라남도 영암군에서는 왕인이 태어났다는 집터(구림면)를 왕인 박사 유적으로 복원하고 매년 왕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왕인문화축제를 열고 있다.

다만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포함한 한국의 역사서에는 왕인에 해당하는 인물에 대한 기술이 보이지 않고 왕인에 대한 기록은 전적으로 일본의 사서에 의존하므로 왕인 박사 유적지가 왕인의 실제 출생지임을 뒷받침하는 유적이나 추가 사료가 없다는 지적이 있다.[183]

이근우는 6세기 초 일본으로 건너간 왕진이라는 인물을 기초로 2세기 정도 앞선 인물 왕인이 창작되었다는 추정을 하고 있으며, 이런 조작에는 문자 전래 시기를 최대한 끌어올리기 위한 고대 일본인들의 의도가 있다는 설을 사료 비판을 통해 제시했다.[183]

1970년대에 한국의 농업운동가이자 민족사관을 신봉하는 김창수[153] 등의 현창 운동을 통해 왕인이 알려지게 되었다. 1968년에 농협 시찰을 위해 방일한 김창수는 왕인 전승을 알게 되었고, 1970년에 다시 방일하여 왕인의 자료를 수집했다. 김창수는 민족사관을 위한 왕인연구소를 설립하고, 1972년 8월, 중앙일보에 『백제 현인 박사 왕인 일본에 심어준 한국 혼』을 15회 연재했다. 같은 해 10월에 영암군의 청년회의소 회장 강신원으로부터 무당의 증언으로 현지에 기도의 전설이 있다는 정보를 제공받았다. 김창수는 현지를 왕인의 출생지로 인정하고, 1973년 2월, "왕인 출생지 영암군" 설을 발표했으며, 더 나아가 사단법인 왕인박사 현창협회를 창립했다. 1975년 6월, 『박사 왕인 일본에 심어준 한국 문화』를 출판했다. 1975년, 전라남도지사가 박사 왕인 탄생지 성역화 사업 계획을 발표하고, 김창수는 전라남도교육위원회에서 "왕인박사 유적 학술 세미나"를 개최했다. 1976년에는 전라남도가 영암군 구림면 성기동 일대를 "왕인박사 탄생지 유적"으로 전라남도 지방 문화재로 지정하고, 유적공원으로 관광지로 만들었다.[154] 1984년에는 왕인제가 개최되었고, 매년 11월 3일에 연중 행사화되었다. 1985년에는 지역에 "왕인총의 환경을 지키는 모임"이 발족, 묘역 청소, 무궁화 식수, 사천왕사 왓소에 참가, 한국과의 친선 교류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1987년에는 왕인묘가 준공되었다.[155] 1992년에는 오사카부와 히라카타시가 묘역을 정비하여, 한글 통행 안내판·휴게소(선린우호관)·화장실·기념비 등이 건설되었다. 같은 해, 한국 전라남도 영암군이 히라카타시에 우호도시 제휴를 신청했지만, 히라카타시는 거절했다.

일본 제국의 붕괴와 함께 왕인의 정치적 역할은 사라졌다. 대신 왕인은 한국의 정치적 이용 대상이 되었다. 한국인들은 왕인을 일본에 대한 고대 한국의 "문화적 우월성"의 상징으로 사용했다. 1980년대 이후, 일본 내 한국인들은 왕인의 일본 도착을 시각화하는 다양한 행사를 주도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1998년 묘에서 열린 행사에 친서를 보냈고, 김종필 총리는 1999년에 이곳을 방문했다.[28]

한국에는 왕인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없지만, 오늘날 "왕인 박사 유적지" ('''왕인'''은 왕인의 한국식 표현이다.)는 전라남도 영암군 구림마을에 위치해 있다. 이것은 20세기 초에 시작된 새로운 신화에 근거하고 있다.[29]

택리지』(1751년)를 포함한 초기 지리서에는 왕인을 영암과 연결하는 내용이 전혀 없다. 왕인을 영암과 연관 짓는 최초의 기록은 이병연의 『조선환여승람』(1922년–37)이다. 이 책은 아무런 증거도 제시하지 않고 왕인이 영남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한다.[30] 비슷한 시기에 아오키 케이쇼(Aoki Keishō)라는 일본 승려가 "구전"을 근거로 영암이 왕인의 고향이라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2년 그는 영암에 왕인의 동상을 세우는 데 실패했다.

왕인에 대한 새로운 신화는 1970년대에 대한민국에서 널리 알려졌다. 1972년 사회운동가 김창수는 "일본에 담긴 한국 정신"이라는 제목의 일련의 에세이를 발표했다. 한국 민족사의 틀 안에서 왕인은 한국인으로 여겨졌다. 영암 출신 독자로부터 정보를 얻은 김창수는 이듬해 영암을 왕인의 출생지로 특정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증거의 미약함에도 불구하고, 왕인의 "유적지"는 1976년 전라남도 문화재 제20호로 지정되었다.[29]

왕인의 "유적지" 개발은 전라남도와 영암군 정부가 주도했다. 전라남도 도지사는 영암군 출신이었다.[28] 1985년부터 1987년까지 공사가 진행되어 왕인이 공부했다고 전해지는 "출생지", 학교 등이 "복원"되었다. 1990년 지방 자치제의 도입으로 지방 정부가 자체 수입원을 찾아야 했기 때문에 영암군은 오래된 것처럼 보이는 새로운 테마파크를 관광 명소로 본격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영암군은 이전에 지역 주민들이 "벚꽃 축제"라는 이름으로 주최했던 연례 "왕인 문화 축제"를 1997년부터 개최하기 시작했다. 이 개발은 반대 없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사실, 이는 승려 도선 (827–898)을 영암의 주요 관광 자원으로 사용하려는 측으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다.[28]

일본서기』나 『신찬성씨록』에는 한인이라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고, 백제에서 왔다는 기록만 존재하지만, 백제에 도래한 한인이라고 보는 학자의 견해도 있다.[31][33][34][35][38][39][41][42][43][45][40][46][32][36][37][44][47][48]

김영달은 “선의”를 가진 일본인 협력자의 도움으로 역사 검증 없이 한국인의 일본에 대한 문화 우월 사관 - 실제로는 문화적 콤플렉스의 이면 - , 한국인의 민족 의식을 자극하는 한일 우호 친선 운동에 왕인이 이용되고 있다고 보면서, 이러한 역사 이미지의 정치적 이용·시대적 풍조에 편승하여 다양한 역사 위조가 이루어졌다고 지적한다. 구체적으로는, 오사카부 히라카타시에 있는 왕인의 분묘로 알려진 왕인총, 그리고 한국 전라남도 영암군을 왕인의 출생지로 주장하는 왕인묘를 예로 들며, 과학적 실증성이 전혀 없는 역사 날조이며, 고즈시마의 줄리아 오타아의 묘를 날조하고 한국 기독교 그룹이 "줄리아제"를 개최한 것, 북한의 단군의 유골을 날조하고 단군릉을 건설한 것과 같다고 비판한다.

한국 및 재일 한국인 사회에서도, 왕인은 일본의 문화를 키우고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취급되어, 한일 양국에서 왕인에 관한 행사가 열리고 있다.[156][157]

한국 초등학교 사회과 교과서에는 왕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158][159]

  • 「백제의 문화를 일본에 전해주신 왕인」
  • 「왕인은 백제의 문화를 일본에 가르쳐 준 학자이다. 그는 『천자문』과 『논어』 등의 책을 일본에 전해주고, 일본에 오래 살면서, 일본 국왕과 왕자의 스승이 되어 학문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하여, 일본 사람들에게 한문과 유학을 알 수 있도록 노력했다. 지금도 일본 사람들은 왕인을 일본 문화의 스승으로 숭배하고 있으며, 그의 공적을 기리는 유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동구림리 산에, 한국의 농업 운동가 김창수가 『박사 왕인, 일본에 심은 한국 문화』(1975년)에 발표한 설에 기반하여 1976년에 전라남도가 문화재로 지정한 유적이 있다.[165]

전라남도영암군에서는 1976년 이후 왕인 박사제가 개최되고 있다.

2008년 3월 1일에는 히라카타시전라남도영암군이 우호 도시 제휴를 맺었다.[172] 한국에서 수학여행 학생들이 방문하기도 한다.[172]

6. 2. 일본

오사카부 히라카타시에는 왕인의 묘라고 전해지는 곳이 있다. 그러나 18세기에 확인된 이 묘는 왕인과 아무런 관련이 없을 가능성이 높다.[27]

원래 "오니 묘"(於爾墓)라고 불리던 두 개의 돌이었던 이 "묘"는, 1731년 유학자 나미카와 세이쇼(並河誠所)가 《고키나이시》(五畿内志)를 편찬하면서 "와니 묘"의 변질된 형태라고 주장하며 석묘를 세웠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히라카타의 "묘"는 나미카와가 조작한 것으로 여겨지며, 왕인의 매장지를 언급하는 고대 기록은 없다.[27]

국학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왕인은 고대 천황의 충신으로 칭송받았다. 1827년에는 왕인을 기리는 기념비가 묘 근처에 세워졌고,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닌토쿠 천황의 서거 1500주년 기념 행사가 열렸다.[27]

일제강점기에는 한국 병합을 위한 유화적 접근 방식의 일환으로, 왕인은 일본인이 아님에도 천황에게 충성한 역사적 선례로 활용되었다. 1927년에는 흑룡회의 우치다 료헤이 등이 왕인 신사 건립을 위해 모임을 결성했고, 1930년에는 왕인 묘 부지에 신사 건설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1932년에는 왕인 도래 1650주년을 기념했고, 1940년 왕인 신사 건설이 시작되었지만 완공되지 못했다. 1939년에는 도쿄 우에노 공원에 왕인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졌다.[27]

태평양 전쟁 종전 후, 왕인의 정치적 역할은 사라지고, 한국에서는 일본에 대한 고대 한국의 "문화적 우월성"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1980년대 이후, 일본 내 한국인들은 왕인의 일본 도착을 시각화하는 행사를 주도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1998년 묘에서 열린 행사에 친서를 보냈고, 김종필 총리는 1999년에 이곳을 방문했다.[28]

고금와가집의 가나 서문에 보이는 왕인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난파진의 노래'''는 백인일수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전일본 가루타 협회가 경기 가루타의 시작 노래로 지정하여, 대회 때 첫 번째로 불리는 노래이다. 대회에서는 "이마오하루베토(이제 봄이 오니)"로 가사를 바꿔 부른다.[78]

다음은 일본 내 왕인 관련 유적 및 기록에 대한 연표이다.

연도사건
1698년마츠시타 겐린의 "본조학원 난화초"에 츠다의 신덴에 있는 왕인의 묘에 대한 기록.[107]
1731년"河内国交野郡藤坂村旧記"(1791년, 서법사 소장)에 박사 왕인의 묘가 건립되었다는 기록.[109] 나미카와 세이쇼가 방문했을 때 황폐함을 슬퍼하며 영주 구가이 야에몬이 박사 왕인의 묘를 건립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짐.[111][112][113]
1756년타니가와 코레키요의 「일본서기통증」에서 후지사카 촌의 동북 묘지 골짜기에 있는 왕인 묘(오니 묘)와 이즈미 국 오토리 군의 히가시하라 다이묘진이 기록됨.[120][121]
1757년고지 시겐의 『전계상지』에 이즈미 국의 "백제 왕인 묘"가 게재됨.[122]
1772년이누이 테이조・기카안 닌의 저서 요곡습엽초에 이즈미노쿠니의 사당과 츠다의 신덴에 있는 왕인의 묘가 기록됨.[123]
1796년아키사토 리시마의 "이즈미 명소 도회" 제4권에 왕인을 모시는 히가시하라 덴노와 그 후지사카의 "묘"가, "가와치 명소 도회"에 후지사카 촌 동북 묘곡의 왕인 묘의 석표가 기록됨.[124][125][126]
1814년『갑주국지』 48권에 왕인의 묘(와니즈카)에 대한 내용이 기재됨.[118] 네기시 진에이는 이노(귀의 주머니) 권 10에서 박사 왕인의 묘의 탁본에 대해 기록함.[119]
1824년하마마츠 가코쿠의 「신불령험기 그림회」에 우메다의 왕인의 사당에 대해 기술됨.[128]
1827년황폐해진 묘를 재건하기 위해 자금을 모아 아리스가와노미야 하타히토 친왕의 친필을 받아 박사 왕인 묘의 석비를 세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짐.[111][112][129]
1892년스가와라 촌이 오사카부에 정비를 신청하여 허가를 받아 주변 사유지를 매입하여 분묘지로 기증.[130] 아리스가와노미야 하타히토 친왕을 섬기던 간베노 고묘는 친왕으로부터 어염필을 받아 석비를 건립하고 기부를 모았다고 함.[95]
1894년스가와라 촌은 오사카부로부터 기부금 모집 허가를 받아 기공식을 거행하였으나, 청일 전쟁으로 인해 공사가 중단됨.[130]
1895년전 내각부 서기관장 다카하시 겐조가 나이토 도지로와 함께 오진의 묘를 방문했을 때 촌장으로부터 들은 오진의 묘의 유래가 오사카 아사히 신문에 보도됨.[113]
1897년오사카시 고쓰 신사에서 닌토쿠 천황 1500년 기념제에서 기부를 모금하였으나 러일 전쟁으로 중단됨.[131][132][95]
1900년요시다 도고가 「대일본지명사전」에서 후지사카 묘곡의 어니묘는 대묘공 아테리이와 반구공 모레이의 묘, 후지사카의 귀묘는 이추의 무덤일지도 모른다고 기록함.[133]
1908년『박사 오진: 문학 시조』가 출판됨.[134]
1909년오사카 육군 병기 지창 기노 탄약고 폭발로 인해 후지사카 촌의 박사 오진의 묘가 훼손됨.[135]
1927년신사 창립을 오사카부에 출원.[95]
1930년만주 사변으로 인해 봉고제와 지진제가 연기됨.[95]
1934년스가와라 촌이 오진 분묘와 박사 오진 고분묘의 사적 신청을 함.[136]
1938년오사카부의 사적으로 지정됨.
1939년도쿄도 시부야구 아오바초 오진 신사 찬성회 이사 나카야마 규시로가 중요 자료로 인정한 『오진 분묘 내조기』 『오진 후손 및 계보기』가 오사카 아사히 신문에 보도됨.[92]
1940년옥울이 완성됨. 오진 신사 건립은 전쟁으로 무산됨.[138] 4월 28일 도쿄 우에노 공원에 박사 오진 기념비가 건립됨.[139]
1955년가타야마 조조가 왕인총에 대해 기록함.[95]
1956년후지사카 미야마 고분 발굴 (출토품은 오사카 시립 박물관 소장).[99][100]
1965년다케시마 쇼도,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공과 관련된 매화, 비매 백홍 기증 (현존하지 않음).[140]
1966년오사카 대학 개덕당 동우회 하시모토 도시마사 씨와 메타세쿼이아 식수 (현존하지 않음).[140]
1970년이와테현 하나마키 문화재 보호 위원 야마모토 겐조는 쇼와 8년 당시 왕인 묘는 귀신 묘로 지역 주민들에게 불렸다고 말함.[141]
1978년도쿄 대학 교수 쓰지무라 아키라가 왕인총의 황폐에 대해 언급하고, 왕인공원의 정비가 시작됨.[142] [143]
1979년춘추 위령제를 재일대한민국거류민단이 이어받음.[140]
1983년박사 왕인회 "왕인" 출판.
1984년춘추 위령제 한일 합동 개최. 한국에서 무궁화 묘목 250본 기증 (현존).[140] 11월 3일 제1회 박사 왕인 축제에 한국 영사도 참가.
1985년3월 왕인총의 환경을 지키는 모임 발족. 11월, 한국 영암의 왕인묘 준공식 초청을 받아 참석.[140]
1987년왕인공원에 [https://www.city.hirakata.osaka.jp/0000003340.html 평화의 상 "항구적 평화"]가 세워짐.
1988년사적 지정 50주년 기념 축하식. 한일 문화 친선 협회로부터 한국 석조 제단을 기증받음.[140]
1998년김대중 대한민국 대통령으로부터 친서.[145]
2006년백제문 준공. 일본・한국의 기부금으로 오사카부에 기증됨.[145]
2008년대한민국 전라남도 영암군히라카타시가 우호 도시 제휴를 조인.[146][147][148] 전 왕인 묘에서 "박사 왕인 축제"와 "납량 무궁화 축제"가 열림.[149][150][151][152]



일본 내 왕인 관련 유적은 다음과 같다.


  • 전 왕인 묘 - 오사카부 히라카타시 후지사카히가시마치 2초메[160]
  • 다카이시 신사 - 오사카부 다카이시시. 다카이시 씨의 시조인 왕인을 모셨다고 이즈미 명소 그림에 있다.[161]
  • 호치가이 신사 - 오사카부 사카이시 사카이구 키타미쿠니가오카초 2초메. 히가시하라 다이묘진은 박사 왕인이라고 전해지고 있다.[162]
  • 데오카 벤자이텐 - 오사카부 마쓰바라시 오카 1초메에 왕인의 성당 터 전승이 있다.[163]
  • 왕인 다이묘진 - 오사카부 오사카시 기타구 오요도나카 3초메 (구 오요도구 다이닌초)에 있는 잇폰마쓰 이나리 다이묘진 (야사카 신사)
  • 나가야마 고분 - 오사카부 사카이시 사카이구 히가시나가야마엔에 소재하는 전방후원분으로, 모즈 고분군을 구성하는 고분 중 하나이다. 왕인의 묘로 하는 전승이 있었다.[164]


전라남도영암군에서는 1976년 이후 왕인 박사제가 개최되고 있다. 오사카부 히라카타시 후지사카에 있는 전 왕인 묘에서는 "박사 왕인 축제"가 개최되고 있다.[171] 2008년 3월 1일에는 히라카타시전라남도영암군이 우호 도시 제휴를 맺었다.[172]

7. 왕인 관련 작품

참조

[1] 논문 (Kim:2001)
[2] 인용문 Original text: 又,科賜百濟國,若有賢人者,貢上。故受命以貢上人名,和邇吉師。即論語十卷・千字文一卷,并十一卷,付是人即貢進。此和邇吉師者,文首等祖。
[3] 인용문 Original text: 十五年秋八月壬戌朔丁卯,百濟王遣阿直岐,貢良馬二匹。即養於輕阪上廄、因以阿直岐令掌飼。故號其養馬之處曰廄阪也。阿直岐亦能讀經典。及太子菟道稚郎子師焉。於是天皇問阿直岐曰,如勝汝博士亦有耶。對曰,有王仁者。是秀也。時遣上毛野君祖荒田別・巫別於百濟,仍徵王仁也。其阿直岐者阿直岐史之始祖也。十六年春二月、王仁來之。則太子菟道稚郎子師之,習諸典籍於王仁莫不通達。所謂王仁者,是書首等始祖也。
[4] 서적 Kodai no kikajin 古代の帰化人 1996
[5] 논문 王仁事蹟與世系考 2001
[6] 서적 Fuhito shūdan no ichi kōsatsu フヒト集団の一考察 1988
[7] 문서 Shinsen Shōjirok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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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 문서 「길사(吉師)」는 칭호여서 제외.
[180] 문서 발음은 그대로이지만 한자만 달라진 것이 가장 큰 요소.
[181] 문서 "화이"에서 굳이 "왕인"으로 바뀐 이유에 대해서는 아마도 중국의 [[유교]]를 공부하는 이로서 조금 더 중국풍의 이름으로 바꾼 듯하다.
[182] 문서 가장 오래된 고사기부터 일본서기, 그리고 가장 최근인 속일본기까지 그에 대한 이야기가 차차 더해진 것. 다만, 모두 한국이나 중국에서는 나오지 않는 내용들이다.
[183] 논문 "[역비논단]왕인의 『천자문』·『논어』 일본전수설 재검토" http://www.dbpia.co.[...] 역사비평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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