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곡집 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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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곡집 권상은 성석린의 문집인 《독곡집》의 권상 1책으로, 1456년 평안감사 손서와 김연지가 평양에서 초간본을 간행하고, 1460년 김연지가 진주에서 중간본을 간행했다. 조선 초기 문집 간행 양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며, 상권의 선사자는 조근이다. 1919년에는 창녕에서 부록을 추가하여 활자본으로 삼간본이 간행되었다. 현재 국내에는 초간본 완질이 없고 일본 봉좌문고에 소장되어 있으며, 조선 초기 간행 문집으로서 학술적,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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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곡집 권상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
독곡집 권상 | |
이름 | 독곡집 권상 (獨谷集 卷上) |
국가 | 대한민국 |
위치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은동 포방터 4안길 |
유형 | 유형문화재 |
지정 번호 | 395 |
지정일 | 2016년 10월 6일 |
시대 | 조선시대 (1456년) |
소유자 | 김보경 |
참고 사항 | 규격(cm) : 22.6×15.7 |
2. 성석린의 생애와 활동
성석린(1338년 ~ 1423년)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본관은 창녕, 자는 자수(自修), 호는 독곡(獨谷)이다. 고려 말 과거에 급제하여 조선 개국에 참여한 공신이다.[1]
시기 | 주요 활동 |
---|---|
고려 말 | 1357년(공민왕 6) 과거 급제, 사관(史官),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 정당문학(政堂文學), 지공거(知貢擧) 등 역임. |
조선 초 | 조선 건국 참여, 단성보절찬화공신(端誠保節贊化功臣) 책록, 창성군(昌成郡) 충의군(忠義君) 봉해짐. 태조 즉위 후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1393년(태조 2) 개성부판사, 1398년 문하시랑찬성사 · 판호조사(判戶曹事) 역임. 정종 즉위 후 서북면도순찰사(西北面都巡察使) · 도절제사(都節制使)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익대공신(翊戴功臣) 책록, 좌정승(左政丞) 역임. 태종 즉위 후 좌명공신(佐命功臣), 1402년(태종 2)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1403년 우의정(右議政), 1407년 좌의정(左議政), 1415년 영의정(領議政) 역임. |
2. 1. 고려 시대
성석린(成石璘, 1338년 ~ 1423년)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1357년(공민왕 6) 과거에 급제한 이후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 정당문학(政堂文學) 등 文翰|문한중국어[1]을 역임하였다.文翰|문한중국어은 글과 관련된 직책을 의미한다.
2. 2. 조선 개국과 활동
성석린은 조선 건국에 참여하여 단성보절찬화공신(端誠保節贊化功臣)에 책록되었고 창성군(昌成郡)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졌다.[1] 태조가 즉위하자 문하시랑찬성사가 되었고, 1393년(태조 2) 개성부판사, 1398년 문하시랑찬성사, 판호조사 등을 역임하였다.[1] 정종이 즉위하자 서북면도순찰사, 도절제사, 문하시랑찬성사가 되었으며, 익대공신(翊戴功臣)에 책록되고 좌정승이 되었다.[1] 태종이 즉위한 후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고 1402년(태종 2) 영의정부사를 거쳐, 이듬해 우의정, 1407년에 좌의정을 지냈고, 1415년 영의정이 되었다.[1] 시호는 문경(文景)이다.[1]2. 3. 평가
성석린은 이백의 시풍을 따랐으며, 글씨에도 능하여 태조의 건원릉 비문을 썼다. 특히 초서에 뛰어났다고 전해진다.[1]3. 『독곡집』의 구성과 내용
『독곡집』은 성석린의 문집으로, 2권 2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1442년(세종 24) 왕명으로 경연에서 정리 편집되었고, 1456년(세조 2) 평양에서 초간본이 간행되었다.[1] 이후 1460년(세조 4) 진주에서 중간본이 간행되었으며, 1919년 창녕 학포에서 부록을 넣어 활자로 삼간본이 간행되었다.[1]
『독곡집』의 간행 일지는 다음과 같다.
연도 | 내용 | 비고 |
---|---|---|
1442년 (세종 24) | 왕명으로 경연에서 정리 편집 | 편찬자 진술 |
1456년 (세조 2) | 손서와 김연지가 평양에서 간행 (초간본) | 일본 봉좌문고 |
1460년 (세조 4) | 김연지가 진주에서 간행 (중간본) | 고려대학교 만송문고 |
1919년 | 창녕 학포에서 부록을 넣어 활자로 간행 (삼간본) |
발문에 의하면 상권의 선사자(繕寫者)는 조말생의 아들 조근(1417~1475)이며, 하권의 선사자는 당시 평양판관이었던 송수중이다.[1] 초간본 간행 후 14년 만에 중간본을 간행한 것은 널리 보급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1]
3. 1. 구성
권상과 권하에는 詩중국어가 수록되어 있고, 권미에는 발문과 간기가 있다. 초간본에는 행장이 권미에 있으나, 중간본에는 권수에 수록되어 있다.[1]3. 2. 내용 특징
『독곡집』은 산문(散文) 없이 운문(韻文)만으로 구성되어 있다.[1] 이는 권근의 『양촌집』처럼 운문과 산문을 모두 수록하고 40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문집도 있었지만, 한수의 『유항시집(柳巷詩集)』(불분권 1책, 1400년 간행), 정몽주의 『포은시고(圃隱詩藁)』(2권 1책, 1439년), 김구용의 『척약재학음집(惕若齋學吟集)』(2권 1책, 1400년 간행)처럼 운문만을 편집하여 1책 정도의 문집으로 간행하는 것이 조선 초기 문집의 일반적인 경향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당대 문인들의 문집과는 다른 특징을 보인다.[1]4. 『독곡집』의 간행과 전래
『독곡집』은 조선 초기의 문신 성석린의 문집으로, 1456년(세조 2) 평양에서 처음 간행되었고, 1460년(세조 6) 진주에서 중간되었다.[1] 초간본은 현재 일본 봉좌문고에 완질이 보관되어 있으며, 국내에는 권상 1책만이 유일본으로 전해진다.[1] 두 판본을 비교하면 복각본으로 보이는데, 초간본은 "사주쌍변"인 반면 중간본은 "사주단변"이다.[1]
4. 1. 간행 과정
은 1442년(세종 24) 왕명으로 경연에서 정리 편집되었다.[1] 1456년(세조 2) 평안감사 손서와 김연지가 평양에서 초간본을 간행하였다(일본 봉좌문고 소장).[1] 1460년(세조 4) 김연지가 경상감사로 나가 진주에서 중간본을 간행하였다(고려대학교 만송문고 소장).[1] 1919년 창녕 학포에서 부록을 넣어 활자로 삼간본을 간행하였다.[1]의 간행 과정은 다음과 같다.[1]
연도 | 내용 | 비고 |
---|---|---|
1442년 (세종 24) | 왕명으로 경연에서 정리 편집 | 편찬자 진술 |
1456년 (세조 2) | 평안감사 손서, 김연지가 평양에서 간행 (초간본) | 일본 봉좌문고 |
1460년 (세조 4) | 김연지가 경상감사로 나가 진주에서 간행 (중간본) | 고려대학교 만송문고 |
1919년 | 창녕 학포에서 부록을 넣어 활자로 간행 (삼간본) |
초간본을 평양에서 간행한 후 14년 만에 중간본을 진주에서 다시 간행한 것은 널리 보급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1]
4. 2. 서사자(書寫者)
발문에 의하면 상권의 선사자(繕寫者)는 조근(1417~1475)으로, 조말생의 아들이다. 조근은 예조와 형조의 참의를 지냈고, 해서(楷書)에 능하여 외교 문서 등을 많이 썼다고 한다.[1] 하권의 선사자는 당시 평양판관이었던 송수중이다.[1]4. 3. 전래 현황
成石璘|성석린중국어의 문집인 《독곡집》은 1456년(세조 2) 평안감사 孫壻|손서중국어 金連枝|김연지중국어가 평양에서 목판으로 간행한 초간본이 현재 일본 봉좌문고에 완질이 소장되어 있다.[1] 국내에는 유일본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 문서는 국내 유일본을 대상으로 작성되었다.[1]『독곡집』의 간행 일지는 다음과 같다.
연도 | 내용 | 비고 |
---|---|---|
1442년 (세종 24) | 왕명으로 경연에서 정리 편집 | 편찬자 진술 |
1456년 (세조 2) | 평안감사 孫壻|손서중국어 金連枝|김연지중국어가 평양에서 간행 (초간본) | 일본 봉좌문고 |
1460년 (세조 4) | 김연지가 경상감사로 나가 진주에서 간행 (중간본) | 고대 만송문고 |
1919년 | 창녕 학포에서 부록을 넣어 활자로 간행 (삼간본) |
초간본을 평양에서 간행한 후 14년 만에 중간본을 진주에서 다시 간행한 것은 널리 보급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1] 두 판본을 비교하면 복각본으로 보이는데, 초간본은 "사주쌍변"인 반면 중간본은 "사주단변"이다.[1]
본서는 평양에서 간행된 초간본으로, 비록 보존 상태가 좋지 않지만 중간에 누락된 장이 없고 글자 획의 결손이 거의 없어 인출 시기가 비교적 이른 것으로 보인다.[1] 현재 일본 봉좌문고에 완질이 있으며, 국내에는 유일본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크다.[1]
5. 『독곡집』의 가치와 의의
『독곡집』은 조선 초기 문신 성석린의 문집으로, 희귀성과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 1456년(세조 2)에 목판으로 간행된 초간본 권상 1책은 국내 유일본으로, 서문과 일부 페이지가 훼손되었지만 보존 상태는 비교적 양호하다.
『독곡집』은 권근의 『양촌집』처럼 운문과 산문을 모두 수록한 방대한 분량의 문집이 아니라, 한수의 『유항시집』, 정몽주의 『포은시고』, 김구용의 『척약재학음집』과 같이 운문만을 편집하여 1책 정도로 간행한 조선 초기 문집의 일반적인 형태를 따른다.[1]
초간본 간행 후 14년 만에 중간본이 간행된 것은 널리 보급하기 위한 목적으로 보인다. 두 판본을 비교하면 복각본으로 보이나, 초간본은 "사주쌍변"인데 비해 중간본은 "사주단변"으로 차이가 있다.[1]
본서는 전체 2권 2책 중 권상 1책으로, 중간본 기준 내용 분포는 다음과 같다.[1]
구분/내역 | 권수 | 권상 | 권하 | 권미 | 비고 |
---|---|---|---|---|---|
내용 | 서문/ 행장 | 시 | 시 | 발문/ 간기 | |
장수 | 3 / 9 | 56 | 55 | 2 / 1 | 126장 |
본서 | / 9 | 56 | (행장) | 65장 |
전체 126장 중 현재 남은 것은 권수의 행장 9장과 권상 시 56장 도합 65장으로, 전체의 반 정도가 남아있다. 서문은 완전히 누락되었고, 권상의 첫 번째 장도 8할 정도가 훼손되었으며 행장의 맨 뒷장도 훼손이 심하다.[1]
행장은 중간본에는 권수에 수록되어 있으나, 본서에는 권미에 수록되어 있다. 당시 편집 관행상 행장과 같은 문집 저자의 전기 자료는 권수에 수록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권상과 권하 사이에 행장을 편집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따라서 본서는 한 번 이상 다시 편집된 것으로 보인다.[1]
5. 1. 학술적 가치
조선 초기에 간행된 문집으로, 당시 문집 간행 양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1456년(세조 2) 평안감사 손서(孫壻) 김연지(金連枝)가 평양에서 간행한 초간본으로, 현재 국내에는 유일본이 없고, 일본 봉좌문고에 완질이 소장되어 있다.[1]독곡집의 간행 일지는 다음과 같다.[1]
연도 | 내용 | 비고 |
---|---|---|
1442년 (세종 24) | 왕명으로 경연에서 정리 편집 | 편찬자 진술 |
1456년 (세조 2) | 평양에서 간행, 초간본 | 일본 봉좌문고 |
1460년 (세조 4) | 진주에서 간행, 중간본 | 고려대학교 만송문고 |
1919년 | 창녕 학포에서 부록을 넣어 활자로 간행, 삼간본 |
발문에 의하면 상권의 선사자(繕寫者)는 조근(趙瑾)(1417~1475)으로, 조말생의 아들이다. 조근은 예조와 형조의 참의를 지냈고, 해서(楷書)에 능하여 외교 문서 등을 많이 선사하였다고 한다. 하권의 선사자는 당시 평양판관이었던 송수중(宋守中)이다.[1]
이처럼 서사자가 명기되어 있어 조선 초기 서예사 연구에도 기여하는 바가 크다.[1]
5. 2. 문화재적 가치
성석린의 문집인 《독곡집》은 1456년에 목판으로 간행된 초간본으로, 현재 국내에는 유일본이다. 서문은 완전히 누락되었고, 권상의 첫 번째 장과 행장의 맨 뒷장이 훼손되었으나, 중간에 누락된 장이 없고 글자 획의 결손이 거의 없어 인출 시기가 비교적 이른 것으로 보인다.조선 초기 문집의 형태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며, 특히 저본(底本)의 서사자(書寫者)가 명기되어 있고, 현재까지 알려진 국내 유일본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매우 크다. 따라서 유형문화재로 지정하여 보호할 가치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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