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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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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방훈은 당나라 말기 서주에서 일어난 군인 반란의 지도자이다. 서주 군인들은 864년 남조 공격을 위한 징발에 불만을 품고 봉기를 일으켰으며, 867년 허길과 조가립에 의해 왕중보가 살해되고 방훈이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방훈은 서주를 점령하고, 조정에 임명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독립을 선언했다. 이후 강승훈이 이끄는 토벌군과의 전투에서 여러 차례 승리했으나, 내부 배신과 사타족 군대의 공격으로 869년 사망하며 반란은 진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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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훈
기본 정보
간체자庞勋
병음Páng Xūn
로마자 표기Pang Xun
한국어 이름방훈
한자龐勛
인물 정보
성별남자
생몰년도? ~ 869년
시대당나라
출신지산동성
직업군인, 염상
생애
주요 활동868년 계추지역 반란

2. 역사적 배경

방훈의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출신 배경에 대해서는 서주 출신이라는 것과 아버지 방거직(龐擧直)이 반란 당시에도 살아 있었다는 것 외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5]

서주는 당나라 중후반기에 오랜 군사적 전통을 가지고 있었으며, 당시 반항적인 번진(藩鎭) 세력이었던 평로군(平盧軍, 본부는 지금의 산둥성 타이안시)과 창의군(彰義軍, 본부는 지금의 허난성 주마뎬시) 사이의 연락을 통제하고 차단하기 위해 신설된 무녕군(武寧軍) 번진의 수도였다. 그러나 서주 출신 장병들은 절도사 왕지흥 때부터 교만해지고 기강이 해이해져 당나라 조정에서 파견한 절도사에 대한 반란을 자주 일으켰다. 862년 무녕군의 정예 친위 군단인 은도도(銀刀都)의 장병들이 반란을 일으켜 조정에서 임명한 절도사 온장(溫璋)을 내쫓자, 당나라 조정에서는 절동도 관찰사(浙東道觀察使. 본부는 지금의 저장성 사오싱시) 왕식을 후임으로 임명하였다. 서주에 도착한 왕식은 충무군(忠武軍, 본부는 지금의 허난성 쉬창시)과 의성군(義成軍, 본부는 지금의 허난성 안양시)에서 데려온 병사들을 시켜 수천 명의 은도도 장병들을 학살하였다. 당의종은 백성들을 질책하고 무녕군 번진을 해체하는 칙령을 발표하였다. 서주는 연해도(兗海道, 본부는 지금의 산둥성 지닝시) 관할하에 편입되었고, 무녕군 관하의 다른 들인 호주(濠州, 지금의 안후이성 추저우시)는 회남도(淮南道, 본부는 지금의 장쑤성 양저우시) 관할, 숙주(宿州, 지금의 안후이성 쑤저우시)와 사주(泗州, 지금의 장쑤성 화이안시)는 신설된 숙사도(宿泗道)로 개편되어 그 수도를 숙주에 두었다. 다만, 이전과 달리 절도사가 아닌 관찰사를 두었다.[6]

863년 서주에 침입한 도적들이 자사 조경(曹慶)에 의해 격퇴되기 전, 많은 관리들이 살해되는 폭동이 일어났다. 이후 숙사도의 본부는 다시 서주로 이전되었고, 서주·호주·숙주·사주를 관할하는 서사도(徐泗道)로 개편되어 예전의 무녕군 관할구역을 되찾았으나, 여전히 절도사보다 직급이 낮은 관찰사가 통치하였다.[6]

864년 남조의 잦은 공격에 시달리던 당나라는 서주의 군사적 전통을 고려하여 3천 명의 병력을 옹주(邕州, 지금의 광시성 난닝시)에 배치하여 남조의 공격에 대비할 것을 명령하는 칙령을 발표하였다. 칙령은 남조와의 분쟁이 끝나면 병사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한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2천 명만 모집되었고, 그중 8백 명은 3년 후 귀향 약속과 함께 계주(桂州, 지금의 광시성 구이린시)로 파견되었다. 방훈은 이들 중 한 명으로, 양료판관(糧料判官, 식량 공급 담당 지휘관 보좌관)으로 있었다. 3년 후, 병사들은 귀향을 희망했으나 서사도 관찰사 최언증(崔彦曾)은 도압아(都押牙) 윤감(尹戡)의 권고에 따라 신병 모집 비용을 이유로 1년 더 주둔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이 명령에 서주 병사들은 격분하였다.[5]

2. 1. 서주 군인들의 불만

방훈은 서주 출신으로,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 서주는 당나라 중후반기 군사적 요충지로, 무녕군(武寧軍) 번진(藩鎭)의 수도였다. 서주 군인들은 왕지흥 절도사 시기부터 교만해지고 기강이 해이해졌으며, 중앙 정부에서 파견한 절도사에 대한 반란을 자주 일으켰다.[5] 862년 은도도(銀刀都) 군단 병사들의 반란 이후, 당의종은 무녕군 번진을 해체하고 서주를 연해도(兗海道) 관할하에 편입시켰다.[6]

864년, 남조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서주에서 3천 명의 병력을 징발하여 옹주(邕州)에 배치하라는 칙령이 내려졌다. 실제로 모집된 병력은 2천 명이었고, 그중 800명은 계주(桂州)로 파견되었다. 방훈은 이들 중 한 명으로, 양료판관(糧料判官)으로 복무했다. 3년의 복무 기간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서사도(徐泗道) 관찰사 최언증은 병사들의 귀향을 허락하지 않고 1년 더 주둔시키기로 결정했다. 이에 서주 병사들은 크게 분노했다.[5]

2. 2. 한국사의 맥락에서 본 방훈의 난

방훈의 난은 당나라 말기 혼란한 상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당나라는 안사의 난 이후 지방 군벌 세력인 절도사(節度使)의 발호와 환관의 발호, 그리고 백성들에 대한 과도한 세금 수탈로 인해 국가적 기강과 질서가 무너져가고 있었다.[5] 잦은 외침과 더불어 과도한 세금, 부역에 시달린 백성들과 군인들은 결국 봉기를 일으켰다.[5]

방훈의 난이 일어날 당시, 한반도에서는 통일신라가 쇠퇴하고 후삼국 시대의 혼란이 시작되고 있었다. 신라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각지에서 호족 세력들이 성장하고, 농민 봉기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3. 봉기의 전개

당시 계관관찰사(桂管觀察使, 본부는 계주) 이총(李叢)은 호남도 관찰사(湖南道觀察使, 본부는 지금의 후난성 창사시)로 이동하여 자리를 비웠고, 신임 계관관찰사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867년 가을, 서주 장교 도우후(都虞候) 허길(許佶)·군교(軍校) 조가립(趙可立)·요주(姚周)·장행실(張行實) 등은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과거 도적이었으나 장교 임명장을 받고 조정에 항복한 자들이었다. 반란군은 지휘관 왕중보(王仲甫)를 죽이고 방훈을 수령으로 추대하였다. 이들은 무기고를 약탈하고 무기를 탈취하여 귀향길에 올랐으며, 지나가는 곳마다 약탈을 일삼았다. 당나라 조정은 이들을 막을 수 없었다.[5]

당 의종은 고위급 환관 장경사(張敬思)를 파견하여 방훈과 병사들을 사면하고 서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한다는 칙서를 전달하게 하였다. 이에 서주 병사들은 약탈을 중단하고 호남에 도착하여 무기와 갑옷을 반납한 후, 배를 타고 장강 동쪽으로 향하였다. 한편, 당 의종은 최언증에게 반란군을 자극하지 말라고 명령하였고, 최언증은 방훈의 병사들을 위로하기 위해 온화한 어조로 지시를 내렸다. 방훈 역시 공손한 어조로 쓴 보고서를 최언증에게 올렸다.[5]

하지만 서주 병사들은 장강을 따라 내려가면서 자신들의 상황을 고려한 결과, 조정의 사면령은 더 이상의 약탈을 막기 위한 조치일 뿐이며, 서주로 돌아가면 처형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특히 허길은 이러한 생각을 강하게 가졌다.[5]

이에 서주 병사들은 재산을 털어 갑옷과 무기로 무장하였다. 회남절도사 영호도는 그의 장수 이상(李湘)이 서주 병사들이 더 큰 난동을 일으킬 것이라고 경고했음에도, 회남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그들에게 식량을 제공하였다. 한편, 방훈은 학살을 피해 도망친 은도도의 병사들과 다른 도적들을 모아 병력을 1천 명 규모로 불렸다.[5]

10월 22일,[4] 방훈은 사주에 도착하였다. 자사 두도(杜慆)는 병사들을 잔치에 초대하고 연극을 펼쳐 환대했다. 연극이 시작되기 전, 배우들의 지휘자가 관례대로 손님들에게 연설을 했는데, 서주 병사들은 그가 자신들을 놀리고 있다고 생각하여 그를 붙잡아 죽이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두도는 이를 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소동 외에 다른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5]

10월 23일,[4] 방훈은 서주 근처 서성(徐城)에 도착하였다. 방훈과 허길은 병사들에게 서주에 도착하면 학살되거나 추방될 것이라고 확신시켰다. 그들은 서주를 공격하고 점령하여 조정에 자신들이 서주를 지킬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아내는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병사들은 대체로 동의하였고, 방훈은 동의하지 않은 12명을 처형하였다. 방훈은 12명의 머리와 함께 전령들을 보내 그 12명이 반란을 선동하였으며, 자신이 항복의 표시로 그들의 머리를 제시하였다고 보고하였다. 한편, 방훈은 또다른 청원서를 제출하여 최언증이 도압아 윤감뿐만 아니라 교련사(敎練使) 두장(杜璋)과 병마사(兵馬使) 서행검(徐行儉)을 해임하고, 귀환병들은 본대와 별도로 주둔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최언증은 장수들을 모아 대응을 논의했고, 대부분의 장수들은 방훈의 의도를 깨닫고 공격을 주장하였다. 이에 최언증은 장수 도우후 원밀(元密)에게 3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방훈을 공격하게 하고, 숙주와 사주에도 방훈의 길을 차단하라고 명령하였다.[5]

원밀이 오고 있다는 소식은 곧 방훈의 병사들에게 전해졌다. 그들은 재빨리 숙주를 공격하여 11월 4일에 함락시켰다. 그들은 성안의 재산을 모두 모아 누구나 가져갈 수 있다고 발표하여 주변 지역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방훈의 병사들은 이들 중 힘센 젊은이들을 붙잡아 군단에 합류하도록 강요하고, 거부하는 사람들은 처형하였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추가되었다. 11월 6일 원밀이 도착하여 공격하였을 때, 숙주를 빠르게 점령하지 못했으나 반란군 역시 원밀을 두려워하였다. 그들은 장경사를 석방하고 11월 6일 밤 숙주를 버리고 변수(汴水)로 도망칠 계획이었다. 11월 7일 아침, 원밀은 반란군이 달아났다는 것을 깨닫고 추격하였다. 반란군은 배를 방어수단으로 사용하고 지대의 지형을 이용하여 원밀을 기습했다. 원밀과 병사들 대부분은 죽임을 당했고, 생존자들은 방훈에게 항복하였다. 생존자들은 방훈에게 서주는 사실상 방어선이 없다는 것을 알렸고, 방훈은 이후 서주를 공격하기로 결심하였다.[4][5]

11월 8일, 방훈은 서주로 빠르게 진군하기 시작하였다. 그날 밤이 되어서야 최언증은 원밀의 군대가 전멸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인근 번진에 지원군을 요청하였다. 11월 9일, 서성의 성문은 폐쇄되었고, 번진 측에서는 수비를 강화하기 위해 건장한 청년들을 징집하였으나, 서성은 저항할 의지가 부족하였다. 최언증은 연해도의 수도인 연주(兗州)로 도망치라는 요구를 거절하고 요구한 사람을 그 자리에서 베어버렸다. 11월 10일, 방훈의 병사들은 서주에 도착하여 주변 지역 사람들을 위로하였고, 그들도 반란군에 대거 합류하였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나성(羅城, 외성(外城))은 반란군에게 함락되었고, 곧이어 자성(子城, 내성(內城))도 함락되었다. 반란군들은 최언증을 체포하여 대팽관(大彭館)에 감금시키고, 윤감·두장·서행검을 처형하였다. 그날 1만 명이 반란군에 합류하였다고 한다.[4][5]

3. 1. 봉기의 시작과 서주 점령

867년 가을, 서주 출신 장교 허길(許佶), 조가립(趙可立) 등이 반란을 일으켜 지휘관 왕중보(王仲甫)를 살해하고 방훈을 지도자로 추대했다. 이들은 무기고를 약탈하고 귀향길에 오르며 약탈을 일삼았다. 당 의종은 환관 장경사(張敬思)를 파견하여 방훈과 병사들을 사면하고 귀향을 허락했다. 그러나 허길 등은 서주로 돌아가면 학살당할 것을 우려하여 다시 무장했다.[5]우리들의 죄는 은도도의 죄보다 훨씬 더 컸다. 조정에서 사면령을 내린 이유는 단 하나, 우리들이 더 이상 약탈하거나 도적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들은 서주로 돌아가자마자 도살될 것이다.|우리들의 죄는 은도(殷道)의 죄보다 훨씬 더 컸다. 조정에서 사면령을 내린 이유는 단 하나, 우리들이 더 이상 약탈하거나 도적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들은 서주로 돌아가자마자 도살될 것이다.중국어

868년 10월 22일,[4] 방훈은 사주(泗州)에 도착하여 자사 두도(杜慆)가 베푼 연회에 참석했다. 10월 23일,[4] 방훈은 서성(徐城)에 도착하여 최언증에게 윤감(尹戡) 등 3명의 장수를 해임할 것을 요구하는 한편, 병사들에게 서주에 도착하면 학살될 것이라고 선동했다. 방훈은 숙주(宿州)를 함락시키고(11월 4일[4]) 주변 지역 사람들을 강제로 군대에 합류시켰다. 11월 6일[4] 원밀(元密)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가 숙주를 공격했으나, 방훈은 이들을 격파하고 서주로 진격했다.

868년 11월 8일,[4] 방훈은 서주로 빠르게 진군하기 시작했다. 11월 10일,[4] 방훈의 병사들은 서주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최언증을 체포하고 윤감 등을 처형했다.[5]

3. 2. 조정과의 대립

방훈은 병마유후(兵馬留後)를 자칭하고 조정에 정식 임명을 요청하였다. 그는 참모 주중(周重)을 시켜 조정에 오만한 내용의 표문을 올리게 하였는데, 이는 조정에서 임명하지 않으면 추가적인 군사 행동을 하겠다는 위협이었다.[4] 하지만 서주와 주변 지역 사람들은 조정에서 방훈을 임명할 것이라 믿었고, 이에 따라 농민 반란군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서주 군대에 합류하였다. 방훈은 장수 유행급(劉行及)을 호주(濠州)에, 이원(李圓)을 사주(泗州)에, 양비(梁丕)를 숙주(宿州)에 보내 성을 장악하게 하였다. 유행급과 양비는 성공했으나, 도두(都頭)는 이원을 습격하여 저항하고 방어선을 구축하였다.[5]

12월,[4] 조정에서 방훈을 달래기 위해 파견한 환관 강도위(康道偉)가 팽성에 도착하자, 방훈은 군대의 무력을 과시하며 강도위를 통해 정식 절도사 임명을 요청하는 표문을 다시 올렸다. 그러나 그는 인근 성들을 공격하여 여러 현(縣)들을 점령하였다.[5]

하지만 조정은 방훈의 제의를 거부했다. 칙서는 최언증과 감군(監軍) 환관 장도근(張道謹)의 잘못과 그들의 좌천, 강등만을 선포했다. 이에 실망한 방훈은 칙령을 전달한 환관을 체포하였다. 한편, 의종은 우금오위(右金吾衛) 대장군 강승훈을 서주행영도초토사(徐州行營都招討使)로 삼아 방훈 진압 작전을 주관하게 했다. 신무군(神武軍) 대장군 왕안권(王晏權)을 서주북면행영초토사(徐州北面行營招討使)로, 우림군(羽林軍) 대장군 대가사(戴可師)를 서주남면행영초토사(徐州南面行營招討使)로 삼아 전국 각지의 병력을 동원하여 방훈을 진압하게 했다. 강승훈은 사타족 추장 주야적심과 토욕혼, 달단, 글필(契苾) 부족 추장들의 도움을 받았다.[5]

방훈의 군대는 사주를 포위하여 거의 점령할 뻔했다. 진해군(鎭海軍, 현대 진강시, 장쑤성에 본부) 절도사 두신전과 영호도(令狐綯)는 사주 포위를 풀기 위해 군대를 보냈지만, 채행약(翟行約)과 이상(李湘)이 지휘하는 두 회로의 군대는 방훈의 군대에 격파되어 전멸당했다. 방훈의 군대는 사주를 점령하지 못했지만, 초주(滁洲, 현대 추저우)와 화주(和州, 현대 차오후, 안후이성)를 포함한 여러 주를 점령했다. 대가사는 사주 포위를 풀기 전, 반란군이 회남 군대를 격파한 두량(都梁, 현대 화이안)을 탈환하려 했다. 두량의 반란군은 항복하는 척하다가 대가사를 매복 공격했고, 대가사의 군대는 격파되고 대가사는 사망했다. 영호도는 반란군이 회남을 공격할 것을 우려하여 방훈에게 사신을 보내 황제에게 임명을 요청하겠다고 제안했다. 방훈은 회남 진격을 중단했지만 사주 포위는 계속했다.[2]

북쪽에서도 왕안권은 반란군에게 거듭 패배했고, 태녕군(泰寧軍, 연주(兗州)의 새 이름) 절도사 조상(曹翔)으로 교체되었다. 황제 정부로부터 반독립적으로 통치해 온 위박(魏博, 현대 한단시, 허베이성에 본부) 절도사 하권호도 조상을 돕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2]

869년 봄, 강승훈은 약 7만 명의 병력으로 서주에 접근, 반란군의 요새인 유자(柳子, 현대 쑤저우) 근처에 주둔했다. 방훈은 황제 군대의 규모와 병사들이 분산된 상황에 두려움을 느꼈고, 사람들은 더 이상 그에게 합류하지 않았다. 그의 군대가 해주(海州, 현대 롄윈강시, 장쑤성)와 수주(壽州, 현대 루안시, 안후이성)를 공격했지만, 황제 정부에 충성하는 군대에 격퇴되어 큰 손실을 입었다. 한편, 주야적심은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두량에서 승리에 중요한 역할을 한 반란군 장교 왕홍립(王弘立)이 룻탕(鹿塘, 현대 상추시, 허난성)에서 황실 군대를 공격했을 때, 주야적심의 사타 군대가 반격하여 왕홍립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강승훈의 주력군은 유자를 공격했고, 요주(姚周)가 유자를 구원하려 했을 때 강승훈은 그를 격파했다. 요주가 숙주로 도망치자 양비는 이전의 갈등 때문에 그를 죽였다.[2]

4. 자립 선언과 최후

869년, 방훈은 당나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고 최언증 등을 처형했다.[1] 그는 천책장군(天冊將軍)을 자칭했다.[2] 이후 방훈은 강승훈의 주력 부대를 공격했으나 패배하여 서주로 도망쳤다.[1]

한편, 강승훈은 수주(宿州)를 포위했고, 방훈의 부하 장현인(張玄稔)이 배신하여 수주를 함락시켰다.[2] 방훈은 서주로 돌아가려 했으나, 기현(蘄縣)에서 장곤(張袞)에게 저지당하고 전투 중 사망했다.

방훈의 잔당들은 오경(吳迥)의 지휘 아래 호주(濠州)에서 저항했으나,[2] 결국 진압되었다.

5. 봉기의 영향

방훈의 난은 당나라의 통치 기반을 더욱 약화시켰다. 이 봉기는 황소의 난과 같은 더 큰 규모의 농민 봉기로 이어지는 전조가 되었다. 방훈의 난은 진압되었지만, 당나라는 이로 인해 경제적, 군사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6. 평가

방훈의 난은 당나라 말기 사회적, 경제적 모순이 폭발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방훈은 개인적인 야망보다는 당시 사회의 부조리와 군인들의 불만을 대변하여 봉기를 일으킨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진보적인 관점에서는 방훈의 난을 지배층의 억압에 맞선 민중 봉기로 해석할 수 있다.

7. 대중문화 속 방훈

로리에가 1972년 홍콩 무협 영화 ''검객의 삼부작''에서 방훈을 연기했다.[1]

참조

[1] 웹사이트 Chinese-Western Calendar Converter http://db1x.sinica.e[...] 2010-05-22
[2] 서적 Zizhi Tongjian
[3] 서적 Zizhi Tongjian
[4] 웹사이트 중화민국 중앙연구원 2000년 중국력(中國曆) ↔ 서력(西曆) 변환기 http://sinocal.sinic[...]
[5] 서적 자치통감
[6] 서적 자치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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