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프디트리히 빌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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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볼프디트리히 빌케는 독일 공군의 전투기 조종사로, 제2차 세계 대전 중 732번의 출격에서 162대의 적기를 격추하여 에이스 파일럿으로 활약했다. 1913년 프로이센에서 태어나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에는 폴란드, 프랑스, 영국 본토 항공전, 동부 전선, 북아프리카, 몰타 등에서 활약했다. 그는 동부 전선에서 100기 격추를 달성하여 기사 철십자 훈장과 참나무 잎을 수여받았으며,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뛰어난 지휘 능력을 발휘했다. 1944년 독일 본토 방어전 중 미국 전투기에 격추되어 사망했으며, 사후 대령으로 추서되었다. 그는 철십자 훈장, 독일 십자 훈장 금장 등을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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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디트리히 빌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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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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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칭 | 퓌르스트(Fürst) |
출생일 | 1913년 3월 11일 |
사망일 | 1944년 3월 23일 (31세) |
출생지 | 슈림, 프로이센 왕국, 독일 제국 |
사망 장소 | 쇠펜슈테트 근처, 브라운슈바이크 자유국, 나치 독일 |
안장 장소 | 묀헨글라트바흐-홀트 묘지 |
군사 경력 | |
소속 | Reichsheer(국방군 육군) (1934–35) Luftwaffe(공군) (1935–44) Condor Legion(콘도르 군단) (1939) |
복무 기간 | 1934–1944 |
최종 계급 | Oberst(대령) |
지휘 | III./JG 53(제53전투비행단) JG 3(제3전투비행단) |
부대 | J/88(제88전투비행단) JG 53(제53전투비행단) JG 3(제3전투비행단) |
주요 전투/전쟁 | 스페인 내전 제2차 세계 대전 프랑스 공방전 영국 본토 항공전 바르바로사 작전 북아프리카 전역 몰타 공방전 동부 전선 (제2차 세계 대전) Defense of the Reich(독일 본토 방공전) |
훈장 | 검付柏葉騎士鉄十字章(검이 달린 柏葉 기사 철십자 훈장) |
기타 정보 | |
가족 관계 | Friedrich von Scotti(프리드리히 폰 스코티) (계부) |
2. 초기 생애와 경력
볼프디트리히 빌케는 1913년 3월 11일 당시 프로이센 왕국 포젠 주의 Schrimm(현재 폴란드 비엘코폴스카 주 Śrem)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보병 연대의 하우프트만(대위)이었으나 빌케가 태어난 직후 사망했다.
1934년 4월 1일, 빌케는 ''아비투어''(대학 입학 자격 시험)를 마친 후 민덴의 제6 포병 연대에 ''파넨준커''(사관 후보생)로 입대하며 군 경력을 시작했다. 1935년 11월 1일, 그는 새로 창설된 Luftwaffe(공군)로 전속되어 ''오버패니히''(선임 사관 후보생) 계급을 받았다. 1936년 4월 20일 ''중위''로 진급하였고, 같은 해 10월 15일 제1차 세계 대전 에이스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의 이름을 딴 제132 전투비행단(JG 132)으로 배치되었다. 뛰어난 조종 실력과 리더십을 인정받아 1937년 후반에는 베르노이헨의 ''전투기 조종사 학교'' 교관으로 활동했다.
1939년 3월, 빌케는 스페인 내전에 참전 중인 콘도르 군단에 자원하여 야크트구룹페 88(J/88)의 제1 ''Staffel''(비행 중대)에서 복무했다. 비록 공중전 승리 기록은 없었으나, 스페인에서의 공로로 검이 포함된 청동 스페인 십자 훈장(Spanienkreuz in Bronze mit Schwerternde)을 받았다. 스페인에서 그는 유명한 에이스 베르너 묄더스와 인연을 맺었고, 묄더스가 새로 창설된 제53 전투비행단(JG 53)의 III. ''Gruppe''(제3 비행단) 지휘관(그룹 지휘관)으로 임명되면서 빌케를 예하 제7 ''Staffel''의 지휘관(비행대장)으로 발탁했다. 이는 그의 본격적인 전투 비행 경력의 시작이 되었다.
2. 1. 초기 생애
볼프디트리히 빌케는 1913년 3월 11일 당시 프로이센 왕국의 일부였던 포젠 주 Schrimm(현재 폴란드 비엘코폴스카 주 Śrem)에서 태어났다. 그는 제47 보병 연대 소속 하우프트만(대위) 한스 빌케의 아들이었으나, 아버지는 빌케가 태어난 지 4주 만에 폐렴으로 사망했다. 그의 어머니 헤르타 폰 슈크만은 1919년 6월 14일에 재혼했다.1931년, 빌케는 당시 불법이었던 시위 나치당 집회에 참석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는 나치에 대한 충성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고 알려졌으나, 전기 작가 프리엔과 슈테머에 따르면 그는 국가사회주의 정권에 단호히 반대했으며, 나중에 제53 전투비행단(JG 53—53rd Fighter Wing)의 III. Gruppe(제3 비행대) 지휘관을 맡았을 때는 한동안 부대 항공기에 그려진 만자를 덮어 칠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그는 ''아비투어''(대학 입학 자격 시험)를 통과한 후 ''국방군''에 자원했다. 1934년 4월 1일, 민덴의 제6 포병 연대에 ''파넨준커''(사관 후보생)로 입대했다. 그의 법정 후견인이자 계부인 프리드리히 폰 스코티도 이 연대에서 복무한 경력이 있다. ''패니히''(사관 후보생)로서 빌케는 1934년 10월 1일에 드레스덴의 ''육군 사관학교''(Kriegsschule)에 배치되었다. 1935년 11월 1일, 그는 새로 창설된 독일 공군(Luftwaffe)으로 전속되어 ''오버패니히''(선임 사관 후보생) 계급을 받았다. 1936년 4월 20일, 페를레베르크의 비행학교에서 근무하던 중 ''중위''(Leutnant)로 진급했다.
같은 해 10월 15일, 그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에이스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의 이름을 딴 제132 전투비행단 "리히트호펜"(JG 132—132nd Fighter Wing, 이후 제2 전투비행단 "리히트호펜"(JG 2—2nd Fighter Wing)의 전신)으로 전속되었다. 그는 뛰어난 조종 실력과 리더십을 인정받아 1937년 후반 베르노이헨의 ''전투기 조종사 학교''(Jagdfliegerschule) 교관으로 발령받았다.
1939년 3월, 빌케는 스페인 내전 중 콘도르 군단에 자원하여 복무했다. 그는 몇 주 동안 야크트구룹페 88(J/88—88th Fighter Group)의 1. Staffel(제1 비행중대) 소속으로 비행했으나, 공중전 승리 기록은 없었다. 스페인에서의 복무 공로로 검이 포함된 청동 스페인 십자 훈장(Spanienkreuz in Bronze mit Schwerternde)을 받았다. 스페인에서 그는 베르너 묄더스와 친분을 쌓았다. 묄더스가 새로 창설된 JG 53의 III. ''Gruppe''(제3 비행대)의 ''그룹 지휘관''(Gruppenkommandeur)으로 임명되자, 빌케를 JG 53 예하 7. ''Staffel''(제7 비행중대)의 ''비행대장''(Staffelkapitän)으로 임명했다.
2. 2. 군 경력
볼프디트리히 빌케는 1913년 3월 11일 당시 프로이센 왕국 포젠 주 쉬림(현재 폴란드 비엘코폴스카 주 시렘)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제47보병연대 소속의 ''하우프트만''(대위) 한스 빌케였으나, 빌케가 태어난 지 4주 만에 폐렴으로 사망했다. 1931년, 빌케는 당시 불법이었던 나치당 시위 집회에 참여했다가 체포된 적이 있다. 그는 나치에 대한 충성을 여러 차례 강조하기도 했으나, 전기 작가 프리엔과 슈테머에 따르면 국가사회주의 정권에 단호히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며, 훗날 제53 전투비행단(JG 53)의 III. ''Gruppe''(제3비행단) 지휘관을 맡았을 때는 부대 항공기의 만자 문양을 덮어 칠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아비투어''(대학 입학 자격 시험)를 통과한 후, 빌케는 ''국방군''에 자원하여 1934년 4월 1일 민덴의 제6포병연대에 ''파넨준커''(사관 후보생)로 입대했다. 그의 법정 후견인이자 계부인 프리드리히 폰 스코티 역시 이 연대에서 복무한 바 있다. ''패니히''(사관 후보생) 신분으로 1934년 10월 1일 드레스덴의 ''육군 사관학교''에 입교했다. 1935년 11월 1일, 그는 새로 창설된 Luftwaffe(공군)로 전속되어 ''오버패니히''(선임 사관 후보생) 계급을 받았다. 1936년 4월 20일, ''중위''로 진급하며 페를레베르크의 비행학교에서 근무했다. 같은 해 10월 15일에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에이스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의 이름을 딴 제132 전투비행단(JG 132, 이후 제2 전투비행단 '리히트호펜'으로 개칭)으로 전속되었다. 그는 뛰어난 조종 실력과 리더십을 인정받아 1937년 후반 베르노이헨의 ''전투기 조종사 학교'' 교관으로 발령받았다.
1939년 3월, 빌케는 스페인 내전에 참전 중인 콘도르 군단에 자원했다. 그는 야크트구룹페 88(J/88)의 제1 ''Staffel''(비행 중대) 소속으로 몇 주간 비행했으나, 공중전 전과는 기록하지 못했다. 스페인 내전 참전 공로로 Spanienkreuz in Bronze mit Schwerternde(검이 달린 청동 스페인 십자 훈장)을 받았다. 스페인에서 그는 베르너 묄더스와 친분을 쌓았고, 묄더스가 새로 창설된 JG 53의 III. ''Gruppe'' 지휘관(그룹 지휘관)으로 임명되자 빌케를 JG 53의 제7 ''Staffel'' 지휘관(비행대장)으로 발탁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후인 1939년 11월 7일, 빌케는 첫 공중전 격추를 기록했다. 1940년 5월 프랑스 공방전에 참전 중이던 5월 18일, 프랑스 공군의 호크 75에 격추되어 포로가 되었으나, 프랑스가 항복하면서 풀려났다. 이후 영국 본토 항공전 직전인 1940년 8월 11일, JG 53의 III. ''Gruppe'' 본부 부속으로 임명되었고,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영국 공군기 10기를 격추하며 에이스 파일럿이 되었다.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직전 대위로 진급한 빌케는 III./JG 53의 비행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독소전쟁 초기 독일 육군의 소비에트 연방 침공을 지원하며 모스크바 방면으로 진격했고, 작전 개시일인 6월 22일 하루에만 5기를 격추했다. 통산 25기 격추를 기록한 후 1941년 8월 6일 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1941년 12월, III./JG 53은 지중해 전선으로 이동하여 북아프리카와 몰타 섬 상공에서 전투를 벌였고, 빌케는 이곳에서 32기의 추가 격추를 기록했다.
1942년 5월 19일 소령으로 진급한 빌케는 제3 전투비행단(JG 3) '우데트'의 사령관 보좌로 임명되어 다시 동부 전선으로 복귀했다. 같은 해 8월 12일에는 JG 3의 사령관으로 취임했다. 9월 6일 개인 통산 100기 격추를 달성했고, 3일 뒤인 9월 9일 참나무 잎 기사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JG 3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지상군 지원 임무를 수행했으며, 빌케는 사령관임에도 직접 출격을 거듭하여 전과를 올렸다. 12월 17일에는 156기 격추를 기록하며 참나무 잎 검 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훈했다. 뛰어난 에이스 파일럿이자 지휘관이었던 빌케의 손실을 우려한 공군 상층부는 그의 실전 출격을 금지했으나, 그는 이 명령을 무시하고 계속 출격한 것으로 알려졌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전세가 독일에 불리해지자, 1943년 6월부터 JG 3은 독일 본토 방어 임무를 맡아 독일 및 이탈리아 상공에서 연합군과 교전했다. 1944년 3월 23일, 빌케는 Bf 109G-6 전투기를 타고 독일 북서부 브라운슈바이크 상공에서 미 공군 폭격기 요격 임무 중 P-51 머스탱 1기를 격추했으나, 다른 P-51 머스탱의 공격을 받아 격추되어 전사했다. 향년 31세였다. 사후 대령(Oberst)으로 추서되었다.
빌케의 총 전적은 732회 출격, 162기 격추이다.
3. 제2차 세계 대전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빌케는 제53전투비행단(JG 53) 소속으로 참전하며 전쟁 경력을 시작했다. 서부 전선에서 첫 공중전 승리를 기록하고 철십자 훈장 2급을 받았다.
1940년 프랑스 공방전에서는 중대장으로 참전했으나 격추되어 잠시 포로가 되기도 했다. 석방 후 영국 본토 항공전에 참전하여 10기 이상을 격추하며 에이스 파일럿이 되었다.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와 함께 독소전이 시작되자, 대위로 진급하여 제53전투비행단 제III 비행대(III./JG 53) 사령관으로 동부 전선에 투입되었다. 뛰어난 활약으로 같은 해 8월 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훈했다. 이후 지중해 전선으로 이동하여 북아프리카 전역과 몰타 공방전에도 참여했다.
1942년 5월 소령으로 진급, 제3전투비행단(JG 3) "우데트"의 사령관 보좌를 거쳐 8월에는 비행단장(게슈바더코모도어)이 되었다. JG 3을 이끌고 스탈린그라드 전투 등 동부 전선의 주요 전투에서 활약하며 격추 기록을 크게 늘렸다. 100기 격추로 참나무 잎 기사 철십자 훈장을, 150기 이상 격추로 참나무 잎 검 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훈했다. 뛰어난 전과로 인해 실전 출격 금지 명령을 받았으나, 계속 출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3년 6월 이후 JG 3이 독일 본토 방어 임무에 투입되면서 서부 연합군 공군과 교전했다. 1944년 3월 23일, 브라운슈바이크 상공에서 미국 육군 항공대 폭격기 요격 임무 중 P-51 머스탱 1기를 격추했으나, 다른 P-51에게 격추되어 전사했다. 당시 31세였으며, 사후 대령으로 추서되었다.
빌케는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총 732회 출격하여 162기의 적기를 격추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3. 1. 폴란드 침공과 서부 전선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1939년 9월 1일, 독일군의 폴란드 침공이 시작되자 당시 제53전투비행단(JG 53) 제3 비행중대(3. ''Staffel'') 소속이었던 빌케는 폴란드 상공에서 작전에 참여했다. 이후 서부 전선으로 배치되어 위장 전쟁 기간 중인 1939년 11월 7일, 뷜클링겐 인근 상공에서 프랑스 공군의 포테즈 630 쌍발 전투기를 격추하며 첫 공중전 승리를 기록했다. 이 공로로 같은 해 11월 25일 철십자 훈장 2급(Eisernes Kreuz 2. Klassede)을 수여받았다.1940년 1월 2일부터 16일까지는 제53전투비행단 제3 비행단(III./JG 53) 동료들과 함께 보랄베르크에서 스키 휴가를 보냈다. 휴가 복귀 후 전투에 다시 참여하여 1940년 3월 11일, 메츠 북쪽 삼국 접경지 근처 고도 7000m 상공에서 프랑스 공군의 포테즈 전투기를 추가로 격추했다. 같은 해 3월 25일 오후 2시 55분, 제7 비행중대(7. ''Staffel'') 소속으로 고도 4000m에서 모란-소르니에 M.S.406 편대와 교전하여 디덴호펜 상공에서 1기를 격추하며 세 번째 격추 기록을 세웠다.
1940년 5월, 프랑스 공방전이 시작되자 제53전투비행단 제3 비행단 제7 비행중대(7./JG 53)의 중대장으로 참전했다. 그러나 5월 18일 프랑스 공군의 호크 75 전투기에 의해 격추되어 포로가 되었다. 이후 프랑스가 항복하면서 석방되었다.
3. 2. 프랑스 공방전과 영국 본토 항공전
1939년 11월 7일, 서부 전선에서 위장 전쟁 기간 동안 뷜클링겐 근처 상공에서 프랑스 공군의 포테즈 630 쌍발 전투기를 격추하며 첫 공중전 승리를 기록했다.[1] 이 공로로 11월 25일 철십자 훈장 2급(Eisernes Kreuz 2. Klassede)을 수여받았다.[2]1940년 3월 11일, 메츠 북쪽 상공 7000m 고도에서 또 다른 포테즈기를 격추했고, 3월 25일에는 4000m 고도에서 디덴호펜 상공에서 모란-소르니에 M.S.406 전투기를 격추하며 세 번째 승리를 거두었다.[1]
프랑스 공방전이 시작된 후인 1940년 5월 18일, 8대의 프랑스 커티스 P-36 호크 전투기와 교전 중 레텔 서쪽에서 격추되었다.[1] 그는 낙하산으로 탈출했으나 프랑스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프랑스와의 휴전 이후, 6월 30일에 풀려나 부대로 복귀했다.[1] 다음 날인 7월 1일 ''하우프트만''으로 진급하여 제7 비행중대(7. ''슈타펠'') 지휘를 다시 맡았고, 7월 11일에는 철십자 훈장 1급(Eisernes Kreuz 1. Klassede)을 받았다.[2]

1940년 8월 13일, 영국 본토 항공전이 한창일 때, 작전 중 실종된 ''하우프트만'' 하로 하더의 뒤를 이어 제53전투항공단 제3 비행단(III./JG 53)의 지휘관(''Gruppenkommandeur'')이 되었다.[3] 임명 당일, 영국 해협 상공에서 엔진 고장으로 낙하산 탈출을 했으나 도르니에 Do 18 비행정에 의해 구조되었다.[1] 8월 30일, 런던 폭격기 호위 임무 중 오전에는 방공 기구를 파괴했고, 오후에는 도버 인근에서 슈퍼마린 스핏파이어를 격추하여 네 번째 승리를 기록했다.[1] 9월 1일에는 런던 남쪽에서 호커 허리케인을 격추하며 다섯 번째 승리를 달성했다.[1] 9월 11일에는 도버와 칼레 사이 해협에서 여섯 번째 승리를 거두었는데, 격추 기체는 페어리 소드피쉬 복엽기로 추정된다.[1]
1940년 9월 15일, 영국 본토 항공전의 날로 알려진 날에 런던 남쪽에서 영국 공군(RAF) 전투기 20~30대와 교전하여 허리케인 한 대를 격추했다고 주장했다(통산 7번째 승리). 이틀 뒤인 9월 17일 오후 임무에서는 또 다른 허리케인을 격추하여 아홉 번째 승리를 기록했다.[1] 9월 20일에는 런던 지역 임무 중 허리케인을 격추하며 10번째 승리를 거두었다.[1] 9월 30일에는 도르니에 Do 17 폭격기를 런던으로 호위하는 임무 중 2대의 적기를 추가로 격추하여 총 12대의 격추 기록을 세웠다.[1] 10월 10일 오전, RAF 스핏파이어와의 전투에서 스핏파이어 한 대를 격추하며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의 마지막이자 통산 13번째 승리를 기록했다.[1] 이러한 전공을 인정받아 1941년 4월 1일 공군 명예 컵(Ehrenpokal der Luftwaffe|에렌포칼 데어 루프트바페de)을 수여받았다.[2]
3. 3. 동부 전선 (독소전)
1941년 6월 8일, 빌케가 속한 제53전투비행단(JG 53)의 대부분 공중 전력은 독일 북부의 예버를 거쳐 만하임으로 이동하여 동부 전선 이동 전 정비를 받았다. 6월 12일, 제3비행대대(III. Gruppe)는 소보레보의 전방 비행장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6월 21일, JG 53의 비행단장(Geschwaderkommodore)과 비행대대장(Gruppenkommandeure)들은 수와우키로 소환되어 알베르트 케셀링 원수로부터 다가올 바르바로사 작전에 대한 최종 지침을 받았다. 빌케는 그날 저녁 조종사들에게 작전 내용을 브리핑했다.1941년 6월 22일, 대위로 진급하여 III./JG 53의 비행대대 사령관으로 취임한 빌케는 동부 전선을 연 바르바로사 작전에 참전하여 소련 영공으로 진입했다. III. Gruppe는 오전 3시 20분에 본부 부대(Gruppenstab)와 제7비행중대(7. Staffel)와 함께 알리투스와 오라니의 소련 비행장을 목표로 첫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이륙했다. 빌케는 이 첫날 폴리카르포프 I-15 복엽기 전투기 3대를 격추했다. III. Gruppe의 두 번째 임무는 오전 6시에 그로드노로 향하는 슈투카 호위 임무였으며, 이 임무 중 빌케는 또 다른 1기를 격추했다. 그는 오후 4시 10분에 또 다른 공격을 이끌었고, 비행장을 공격하는 동안 1기를 더 격추하여 하루 만에 5기를 격추하는 "하루 에이스"가 되었으며, 총 격추 기록은 18기가 되었다.
1941년 6월 25일, JG 53은 III. Gruppe와 함께 빌뉴스에 오전 8시 30분에 도착했다. 같은 날 빌케는 이륙 중 다른 항공기와 충돌하여 약간의 부상을 입었다. 그는 1941년 6월 30일 저녁, 바르시자우 지역으로 전투 초계 비행을 하면서 19번째 승리를 거두었다. 1941년 7월 1일, 빌케는 "빌케 전투단"(Gefechtsverband Wilckede)을 편성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제52전투비행단(JG 52)의 III. Gruppe와 II. Gruppe를 지휘하여 소련 폭격기에 대항했다. 7월 9일, 빌케는 페틀랴코프 Pe-2 지상 공격기를 파괴했다. 그는 뱌즈마 지역에서 전투기 호위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7월 25일에 승리를 거두었다. 1941년 7월 29일, III. Gruppe는 두호프시치나 지역에서 독일 기갑 선두 부대에 전투기 엄호를 제공했다. 이 임무 동안 빌케는 또 다른 승리를 거두었다. 다음 날, 야르체보-벨리에서 빌케는 폴리카르포프 I-180 전투기를 격추했다. 그는 1941년 8월 6일에 통산 25기 격추를 기록하여 철십자 기사 십자 훈장(Ritterkreuz des Eisernen Kreuzesde)을 수여받았다. 빌케와 헤르베르트 슈람 중위(Leutnant)는 1941년 8월 9일에 케셀링으로부터 직접 훈장을 받았다.
1941년 8월 23일, 독일 제9군은 벨리키예 루키 지역에서 소련군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빌케는 이 작전을 지원하는 동안 두 번의 공중전을 승리했다. III. Gruppe는 1941년 10월 초에 독일로 귀환하기 시작했다. 공중 전력은 10월 4일에 소련을 떠났고, 지상 부대는 10월 13일에 기차로 만하임으로 수송되었다. 1941년 6월 22일부터 동부 전선에서 철수할 때까지 III. Gruppe는 769번의 공중전을 승리했으며, 이 과정에서 조종사 6명이 사망하고 7명이 작전 중 실종되었으며, 2명이 포로가 되고 12명이 부상당했다.
1941년 12월, 빌케가 지휘하는 III./JG 53은 지중해 지역으로 이동하여 동부 전선에서 잠시 벗어났다.
1942년 5월 19일에 소령으로 진급한 후, 빌케는 제3전투비행단(JG 3) "우데트"의 사령관 보좌가 되어 동부 전선으로 복귀했다. 8월 12일에 JG 3의 비행단장(Geschwaderkommodore)으로 취임했다. 9월 6일에 100기 격추를 달성했으며, 3일 후인 9월 9일에는 참나무 잎 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이후 JG 3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지상 부대 지원 임무를 맡았다. 빌케는 사령관임에도 직접 출격을 반복하며 격추 기록을 계속 쌓아, 12월 17일에는 156기 격추에 도달하여 참나무 잎 검 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그의 뛰어난 전과와 지휘 능력 때문에 군 상층부는 그의 손실을 우려하여 실전 출격을 금지했으나, 빌케는 이 명령을 무시하고 계속 출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독일군에게 불리하게 전개되면서 JG 3는 1943년 6월 이후 본토 방어 임무를 위해 독일 본토와 이탈리아 방면으로 이동하게 된다.
3. 4. 북아프리카 전역과 몰타
1941년 12월, 빌케가 지휘하던 제53전투비행단 제3비행집단(III./JG53)은 독일 본토에서 지중해 전선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해당 부대의 지상 병력은 1941년 11월 28일 시칠리아의 카타니아에 도착했으며, 빌케와 그의 부관 위르겐 하르더는 12월 2일에, 나머지 부대원들은 다음 날 도착했다. 1941년 12월 6일, 제3비행집단은 북아프리카 전역의 일환으로 리비아의 티미미로 이동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북아프리카에서 빌케는 12월 11일, 비르 하케임 인근에서 융커스 Ju 88 폭격기 편대를 호위하는 임무 중 영국 공군 전투기를 격추하며 통산 34번째 공중전 승리를 기록했다.얼마 지나지 않은 1941년 12월 17일, 제3비행집단은 몰타 공방전 작전을 위해 다시 시칠리아로 이동했다. 몰타 섬은 지중해에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북아프리카 전역이 개시된 이후, 몰타에 주둔한 영국 공군 및 해군 부대는 유럽 본토에서 북아프리카로 향하는 추축국의 보급선과 증원 병력 수송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이러한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독일 공군과 이탈리아 왕립 공군은 몰타의 영국 공군 방어 시설과 항구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대대적인 폭격 작전을 개시했다. 이 포위전 기간 동안 빌케는 1942년 4월부터 5월 사이에 영국 공군 전투기를 상대로 4번의 추가 승리를 거두었다. 그의 첫 몰타 상공 승리이자 통산 35번째 격추는 1942년 4월 2일 스핏파이어 전투기를 상대로 기록되었다. 4월 22일에 기록한 36번째 공중전 승리는 영국 공군 제185 비행대대 소속 파일럿 장교 "소니" 오름로드 중위가 조종하던 허리케인 (기체 번호 Z4011) "B" 기였을 가능성이 있으며, 오름로드 중위는 이 교전에서 전사했다. 1942년 5월 12일에는 제3비행집단 전체가 스핏파이어 9대를 격추하는 전과를 올렸는데, 이 중 한 대는 빌케가 격추한 것이었다. 빌케는 지중해 전선(북아프리카 및 몰타)에서 총 32기의 격추를 기록했다.
3. 5. 제3 전투비행단 "우데트" 사령관
1942년 5월 19일 소령으로 진급한 빌케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에이스 전투기 조종사인 에른스트 우데트의 이름을 딴 제3 전투비행단 "우데트"(JG 3)의 사령관 보좌로 임명되어 동부 전선으로 복귀했다. 8월 11일, 빌케는 동부 전선 주간 전투기 감찰관으로 자리를 옮긴 귄터 뤼초프 대령의 뒤를 이어 JG 3의 비행단장(Geschwaderkommodorede)이 되었다.JG 3은 추후이우 비행장을 거점으로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에 참여했다. 1942년 6월 26일, JG 3은 여름 공세를 준비하며 슈치그리에 집결하여 베르마흐트의 스탈린그라드 진격을 지원했다. 이후 몇 달간 JG 3은 고르셰치노예, 올코바트카, 밀레로보, 노비-홀란, 프로로보, 투조프, 피톰니크 등지의 비행장에 주둔하며 작전을 수행했다.
빌케는 1942년 6월 13일 JG 3 소속으로 첫 공중전 승리를 기록했는데, LaGG-3 전투기를 격추하며 개인 통산 39번째 격추 기록을 세웠다. 그는 계속해서 전과를 쌓아나갔다. 6월 22일에는 LaGG-3를 또 격추했으며, 6월 24일에는 LaGG-3와 R-5 정찰 폭격기를 격추했다. 7월 3일에는 더글러스 보스턴 중폭격기 3대를 격추했으며, 다음 날에는 LaGG-3 2대와 보스턴 1대를 격추했다. 특히 7월 6일에는 P-39 에어라코브라, LaGG-3, R-5, 허리케인 3대를 포함해 총 6기를 격추하여 '하루 에이스'가 되었다. 이후 7월 한 달간 Il-2 슈투르모비크, 보스턴, R-5, MiG-1, LaGG-3, I-153, Pe-2 등을 격추하며 빠르게 격추 수를 늘려나갔다.
8월에도 빌케의 활약은 계속되어 Su-2, LaGG-3 등 다수의 소련군 항공기를 격추했다. 8월 11일 비행단장으로 취임한 이후에도 직접 출격을 계속하여 8월 말까지 총 96기의 공중 승리를 기록했다. 마침내 9월 6일, 빌케는 Il-2 2기를 격추하며 개인 통산 100기 격추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이는 루프트바페 조종사 중 20번째 기록이었다. 사흘 뒤인 9월 9일, 그는 이 공로를 인정받아 기사십자 철십자훈장에 백엽(Ritterkreuz des Eisernen Kreuzes mit Eichenlaubde)이 추가 수여되었다. 이는 베르마흐트 전체에서 122번째 수훈자였다.
이후 JG 3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투입되어 지상군 지원 임무를 수행했다. 빌케는 비행단장임에도 직접 출격을 거듭하며 격추 기록을 늘려나갔고, 12월 17일에는 통산 156기 격추를 달성하여 백엽 검 기사십자 철십자훈장(Ritterkreuz des Eisernen Kreuzes mit Eichenlaub und Schwerternde)을 수여받았다. 빌케는 뛰어난 에이스 파일럿이자 유능한 지휘관이었기에, 독일 공군 수뇌부는 그의 손실을 우려하여 실전 출격을 금지했다. 그러나 빌케는 이 명령을 따르지 않고 계속해서 출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전세가 독일에 불리하게 돌아가자, 1943년 6월부터 JG 3은 독일 본토 방어 임무를 맡아 독일과 이탈리아 등지에서 미국 및 영국 공군과 교전했다. 1944년 3월 23일, 빌케는 Bf 109 G-6를 타고 독일 북서부 브라운슈바이크 상공에서 미군 폭격기 요격 임무 중 P-51 머스탱 1기를 격추했으나, 다른 P-51에게 격추되어 전사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31세였다. 사후 대령으로 추서되었다.
빌케의 총 출격 횟수는 732회이며, 최종 격추 기록에 대해서는 자료마다 차이가 있다. 미국 역사가 데이비드 T. 자베키는 162기 격추를 기록했다고 주장하는 반면, 매튜스와 포어먼은 독일 연방 기록 보관소 자료를 근거로 공식 확인된 기록은 155기(동부 전선 138기, 서부 전선 17기)이며, 추가로 확인되지 않은 9건의 주장이 있다고 본다.
3. 6. 스탈린그라드 전투
1942년 5월 19일에 소령으로 진급한 빌케는 제3전투비행단 "우데트"(JG 3 "Udet")의 사령관 보좌관이 되어 동부 전선으로 복귀했고, 다시 소련군과 교전하게 되었다. 8월 12일에는 JG 3의 비행단장(Geschwaderkommodore)으로 취임했다.1942년 9월 10일부터 19일까지 빌케는 다시 한번 연속 격추를 기록했다. 9월 10일 1대, 12일 1대, 18일 4대, 19일 2대를 격추하는 등 정체를 알 수 없는 항공기 격추를 이어갔다. 9월 6일에 개인 통산 100기 격추를 달성했으며, 3일 후인 9월 9일에는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에 떡갈나무 잎 장식이 추가 수여되었다.
1942년 9월 16일,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 북쪽에서 공세를 시작했다. 빌케는 스탈린그라드 상공에서 소련군 제8공군(8 VA—8 공군), 제16공군(16 VA—16 공군) 및 제102 전투기 항공 사단 방공군(102 IAD PVO—국내 방공 전투기 항공 사단)에 맞서 약 40대의 가동 가능한 독일 전투기를 이끌었다. 당시 빌케는 종종 그의 윙맨으로 발터 달(Walther Dahl) 대위와 함께 비행했다. 1942년 9월 20일, 빌케는 LaGG-3 2대를 격추했다. 이틀 후인 9월 22일, 그는 스탈린그라드 상공에서 6대의 야코블레프 Yak-1 전투기를 격추하여 세 번째 "하루 에이스" 기록을 세웠고, 총 격추 수를 116대로 늘렸다. 그의 상대 중 한 명은 제434 전투기 항공 연대(434 IAP—434th Fighter Aviation Regiment) 소속 레이다넌트(소위) 니콜라이 카르나초노크(Nikolai Karnachyonok)였을 가능성이 있는데, 그는 이날 작전 중 사망하고 사후 소련 영웅 칭호를 받았다.[4]
''Geschwaderstab''(사령부 부대)는 1942년 9월 23일부터 11월 21일까지 피토므니크 비행장에 주둔했다. 그곳에서 빌케는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위한 전투기 작전을 지휘했다. 이전 스탈린그라드 공세 동안, JG 3 "Udet"의 ''Geschwaderstab''은 137대의 격추를 기록했으며, 그중 97대가 빌케의 공적으로 인정되었다. 피토므니크 주둔 중 빌케는 9월 24일 4대, 9월 25일 1대, 9월 28일 3대, 9월 29일 4대, 10월 3일 1대, 10월 24일 2대를 격추했다. 10월 25일과 26일에는 매일 1대씩 격추했고, 피토므니크 주둔 기간 중 마지막으로 1942년 11월 1일에 2대를 격추하여 개인 격추 수를 135대로 늘렸다. 이러한 공로로 그는 1942년 11월 3일 독일 황금 십자 훈장( Deutsches Kreuz in Gold|도이체스 크로이츠 인 골트de )을 수여받았다.
1942년 11월 23일 제6군의 포위 이후, ''Geschwaderstab''는 스탈린그라드 포위망 밖의 모로조프스크야-서부로 이동했다. 빌케는 제6군에 물자를 수송하는 수송기를 위한 전투기 호위 임무를 조직했다. 진격하는 소련 기갑 부대에 의해 압박을 받은 모로조프스크야-서부는 12월 23일 ''Geschwaderstab''에 의해 포기되었고, 항공기는 아직 소련군의 위협을 받지 않던 모로조프스크야-남부로 이동했다. 1943년 1월 3일, 이 비행장 역시 포기해야 했고 ''Geschwaderstab''는 타친스카야로 이전했으며, 스탈린그라드 포위망 전투가 끝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이 기간 동안 ''Geschwaderstab''은 25대의 격추를 기록했으며, 빌케가 21대, 달이 4대를 기록했고, 두 명의 조종사가 작전 중 손실되었다.
빌케는 1942년 11월 24일에 일류신 Il-2 슈투르모비크 1대와 Yak-1 1대를 격추하여 스탈린그라드 포위망 지원을 위한 첫 격추를 기록했다. 11월 30일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항공기 3대를 파괴했고, 12월 2일에는 1대, 12월 8일에는 3대를 파괴했다고 주장했다. 12월 12일에 4대(라보츠킨 La-5 1대와 Yak-1 3대)를 격추하여 총 격추수를 148대로 늘렸다. 빌케는 전투에서 150대의 항공기를 격추한 네 번째 독일 전투기 조종사가 되었다. 그는 1942년 12월 17일에 149~151번째 격추를 기록하며 이 기록을 달성했다. 다음 날 그는 3대의 항공기를 더 격추했다고 주장했다. 이 154번째 격추 이후, 그는 1943년 12월 23일에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에 떡갈나무 잎과 검 장식( Ritterkreuz des Eisernen Kreuzes mit Eichenlaub und Schwertern|리터크로이츠 데스 아이제르넨 크로이체스 미트 아이헨라웁 운트 슈베르테른de )을 수여받았으며, 이는 국방군 23번째 수훈자였다. 검과 함께 추가적인 작전 전투 임무 비행 금지령이 내려졌다. 비행 금지에도 불구하고, 그는 1943년 1월 28일 동부 전선에서 Yak-1 1대와 정체불명의 항공기 1대를 더 격추한 것으로 인정받았다.
1943년 3월, 빌케는 IV. ''플리거코르프''(제4 항공군)의 일환으로 쿠반 교두보에 대한 작전 중 ''Geschwaderstab''와 II. 및 III. ''그루페''를 이끌었다. 1943년 5월 초, ''Geschwaderstab''은 작전에서 해제되어 묀헨글라트바흐로 복귀했다. 빌케는 ''Geschwaderstab''와 I. ''그루페''만 실질적으로 지휘했으며 1943년 10월까지 더 이상의 전투 임무는 수행되지 않았다.
3. 7. 독일 본토 방어전과 전사
1943년 6월 이후 JG3 "우데트"는 본토 방어를 위해 독일 본토와 이탈리아 주변에 전개하여 미국 육군 항공대 및 영국 공군과 교전했다. 빌케는 1943년 12월 1일에 Oberst|오버스트de(대령)로 진급했고, 작전 비행 허가를 요청하여 공중에서 자신의 Geschwader|게슈바더de(비행단)를 직접 지휘하고자 했다. 군 상층부는 그의 손실을 우려하여 실전 출격을 금지했지만, 빌케는 이 명령을 무시하고 독일 본토 방어전 임무에서 그의 Stabsschwarm|슈타브슈바르de(참모 비행대)를 이끌고 여러 차례 비행했다. 그는 1944년 2월 10일, 록히드 P-38 라이트닝을 격추하여 157번째 승리를, 2월 24일에는 컨솔리데이티드 B-24 리버레이터를 격추하여 158번째 승리를 거두었다. 1944년 3월 4일, 그는 두 대의 보잉 B-17 플라잉 포트리스 폭격기를 격추하여 159번째와 160번째 공중전 승리를 기록했다.1944년 3월 6일, 그의 Bf 109 G-6가 공중전 중 손상을 입어 노이루핀에 비상 착륙했다. 이날의 전투는 양측 모두에게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 제8공군은 75대의 4발 폭격기와 14대의 호위 전투기를 잃었고, 루프트바페는 65대의 항공기를 잃었다. 독일 조종사 36명이 사망하고 27명이 부상당했다.

1944년 3월 23일, 빌케는 브라운슈바이크 근처에서 미국 육군 항공대 폭격기 편대에 맞서 JG 3 "우데트"를 이끌고 마지막 출격에 나섰다. 이날 미국 육군 항공대는 브라운슈바이크의 항공기 공장과 뮌스터, 오스나브뤼크, 아흐머의 비행장을 포함한 여러 목표물을 공격했다. 총 768대의 B-17과 B-24 폭격기가 841대의 장거리 전투기의 호위를 받으며 공격에 투입되었다. 루프트바페는 이에 맞서 13개 주간 전투기 Gruppen|그루펜de(비행대) 소속 259대의 전투기를 출격시켰다. 전투 후 루프트바페는 44대의 4발 폭격기를 포함하여 총 51대의 적기를 격추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루프트바페는 조종사 16명이 사망하고 6명이 부상했으며 33대의 항공기를 잃었다. 미국 육군 항공대는 29대의 폭격기와 5대의 호위 전투기를 잃었으며, 독일 항공기 62대를 공중에서 격추하고 2대를 지상에서 파괴했다고 주장했다.
이 교전 중 빌케는 B-17 플라잉 포트리스 폭격기 한 대와 노스아메리칸 P-51 머스탱 전투기 한 대를 격추하여 개인 통산 162번째 격추를 기록했다. 그러나 직후 그의 Bf 109 G-6 (Werknummer|베르크누머de 160 613—공장 번호)가 쉔페슈테트 근처 상공에서 제4 전투 비행단 소속 돈 젠틸 대위와 존 T. 고드프리 대위가 조종하는 P-51 머스탱에 의해 격추되어 전사했다. 향년 31세였다.
빌케는 총 732회의 전투 임무에 출격하여 162대의 적 항공기를 격추했다. 그는 부하들에 대한 태도와 아버지 같은 책임감 때문에 동료들로부터 "Fürst|퓌르스트de"(왕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또한 자신의 스타일과 외모에 신경을 많이 썼으며, 매우 비싸고 맞춤 제작된 가죽 코트를 즐겨 입었는데, 이는 그의 별명을 더욱 굳히는 데 기여했다. 그의 장례식은 묀헨글라트바흐 (당시 "뮌헨 글라트바흐")의 비행장에서 거행되었으며, 의붓아버지도 참석했다. 빌케는 클라우스 크베트-파슬렘의 묘 옆, 묀헨글라트바흐-홀트 묘지의 명예 구역에 묻혔다. 그의 뒤를 이어 프리드리히-카를 "투티" 뮐러 소령이 JG 3의 사령관이 되었다.
4. 서훈 내역
- 무공 십자장 검 부착, 청동
- 부상장 흑색
- 공군 전선 비행 훈장 금장, "700" 휘장
- 조종사-관측사 통합장
- 철십자 훈장 (1939)
- * 2급 (1939년 11월 25일)
- * 1급 (1940년 7월 11일)
- 공군 명예 잔 (1941년 4월 1일)
- 독일 십자 훈장 금장, 1942년 11월 3일, ''소령''으로 제3''전투항공단'' 소속
- 철십자 기사 십자 훈장, 오크 잎, 검
- * 기사 십자 훈장, 1941년 8월 6일, ''대위'' 및 제53''전투항공단'' III./''집단 지휘관''으로 수여
- * 122번째 오크 잎, 1942년 9월 9일, ''대위'' 및 제3 "우데트" ''전투항공단장''으로 수여
- * 23번째 검, 1942년 12월 23일, ''소령'' 및 제3 "우데트" ''전투항공단장''으로 수여
참조
[1]
웹사이트
Proklamation der Reichsregierung an das deutsche Volk bezüglich der Einführung der allgemeinen Wehrpflicht
http://www.documenta[...]
2015-04-19
[2]
문서
For an explanation of Luftwaffe unit designations see [[Organization of the Luftwaffe (1933–1945)|Organization of the Luftwaffe during World War II]].
[3]
문서
Harro Harder was the brother of [[Jürgen Harder]].
[4]
문서
IAP—Istrebitelny Aviatsionny Polk (Fighter Aviation Regiment—Истребительный Авиационный Пол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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