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 (북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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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식(蘇軾, 1037–1101)은 북송 시대의 문인이자 정치가로, 자는 자첨(子瞻), 호는 동파거사(東坡居士)이다. 시, 사, 부, 산문에 능했으며, 당송팔대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그는 뛰어난 서예가이자 화가이기도 했다. 소동파는 정치적 부침을 겪으며 여러 차례 유배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 그의 문학적 역량은 더욱 발전했다. 그는 유교, 불교, 도교 사상을 융합한 독특한 사상을 지녔으며, 자연을 사랑하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추구했다. 소식의 작품은 한국 문학에도 큰 영향을 미쳤으며, 동파육과 같은 음식 문화에도 그의 흔적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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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 (북송)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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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이름 | 소식 |
한자 표기 | 蘇軾 |
로마자 표기 | Su Si |
자 | 자첨 (子瞻) |
호 | 동파거사 (東坡居士) |
다른 이름 | 소동파 (蘇東坡) |
출생일 | 1037년 1월 8일 |
출생지 | 쓰촨성 메이산시 |
사망일 | 1101년 8월 24일 |
사망지 | 창저우 |
직업 | 시인, 문장가, 서예가, 화가, 학자, 정치가 |
아버지 | 소순 |
형제 | 소철 |
작품 | |
주요 작품 | 전 적벽부 (前赤壁賦) 후 적벽부 (後赤壁賦) 한식첩 (寒食帖) |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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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주요 이력
자(字)는 자첨(子瞻)이고 호는 동파거사(東坡居士)였다. 스스로 '''동파거사'''라고 칭했고, 흔히 '''소동파'''(蘇東坡)라고 부른다. 현 쓰촨성 미산(眉山)현에서 태어났다.
소식은 송나라 시대 저명한 문인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 소순과 동생 소철과 함께 '삼소(三蘇)'로 불리며 모두 당송팔대가에 속한다. 그는 당송팔대가 중 한 명인 구양수 문하에서 배웠으며, 1057년 22세의 나이에 동생과 함께 과거에 급제하여 일찍부터 문재를 알렸다.[45][44]
시(詩), 사(詞), 부(賦), 산문(散文) 등 여러 문학 분야에 모두 능통하여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다. 소동파는 송시의 성격을 확립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대시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대문장가였다. 또한 중국 문학사상 처음으로 호방사(豪放詞)를 개척하여 호방파를 대표하는 사인(詞人)으로 평가받는다.
문학 외에도 예술 다방면에 재능을 보였다. 북송 시대 4대 서예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유명 서예가였으며, 문호주죽파(文湖州竹派)의 주요 구성원으로서 중국 문인화풍을 확립한 뛰어난 화가이기도 했다. 이처럼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천재 예술가이자 팔방미인으로, 중국 문예사상 가장 걸출한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3. 생애
관직에 나아간 후, 당시 북송 조정의 주요 쟁점이었던 왕안석의 신법에 대해 사마광 등과 함께 반대하는 입장(구법당)을 취했다.[52] 이로 인해 그의 관직 생활은 순탄치 않았고 정치적인 부침을 거듭했다. 1079년에는 시문을 통해 국정을 비방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혹독한 조사를 받는 '오대시안' 사건을 겪었으며, 이로 인해 황주로 유배되었다.[45] 그는 이곳에서 스스로를 '동파거사(東坡居士)'라 칭하고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적벽부』와 같은 뛰어난 문학 작품을 남겼다.[45]
1085년 신종 사후 구법당이 잠시 세력을 회복하면서 소식은 복권되어 한림학사 등 중앙 관직에 올랐다.[53] 그러나 그는 신법의 전면 폐지를 주장하는 사마광 등 구법당 내 강경파와도 의견 충돌을 빚었으며, 이는 구법당 내부 분열의 한 원인이 되었다.[54]
1094년 신법당이 다시 정권을 잡자 소식은 또다시 좌천되어 혜주로 유배되었고, 3년 뒤인 1097년에는 더 남쪽인 하이난다오까지 보내졌다.[53][55] 당시 해남도는 미개척 섬이나 다름없었으나, 그는 이곳에서도 특유의 적응력과 긍정적인 태도로 현지 주민들과 어울려 지냈다.[81]
1100년 철종이 사망하고 휘종이 즉위하면서 정치적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자 마침내 사면되었다.[53] 그러나 오랜 유배 생활 끝에 건강이 악화되어, 1101년 귀양에서 돌아오는 도중 장쑤성 창저우에서 66세를 일기로 병사했다.[53] 그는 두 번 결혼하여 슬하에 네 아들을 두었다. 소식의 생애에 대한 가장 중요한 기록으로는 동생 소철이 쓴 묘지명과 이를 바탕으로 한 『송사』 열전이 있다.[46]
3. 1. 어린 시절과 교육
쓰촨 성 메이산 시 근처 어메이 산에서 태어났다.[45] 그의 출신지는 미주(眉州) 미산현(현재의 쓰촨성메이산시둥포구)이다.[45] 소식은 저명한 문인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 소순과 남동생 소철 역시 유명한 문인이었다. 이들 세 부자를 '삼소(三蘇)'라고 부르며, 모두 당송팔대가에 속한다. 소식의 이름 '시'(軾|시중국어)는 마차 앞부분의 가로대 난간을 뜻하는데, 아버지 소순은 이 이름에 '소박하지만 필수적인 역할을 하라'는 기대를 담았다고 설명했다. 소식은 동생 소철과 어린 시절부터 매우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9]
소식은 초기 교육을 지역 마을 학교의 도교 사제에게서 받았다.[8] 8세에는 도사 장사간의 서당에 들어가 학문을 배웠고,[46] 10세부터는 가정 교육을 받았다. 처음에는 어머니 청 부인이 가르쳤고, 이후에는 아버지 소순에게 직접 배웠다.[8] 아버지 소순은 10년 넘게 고전 문학, 철학, 역사서를 깊이 연구하는 동시에, 두 아들이 과거 시험을 준비하도록 가르쳤다.[8] 13세에는 동생 소철과 함께 류쥐라는 인물에게 시를 배웠으며,[46] 20세 무렵에는 경전에 통달했다. 그는 자이와 루즈의 글을 즐겨 읽었으며, 특히 『장자』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47][48] 17세에는 결혼했다.[9]
가우 2년(1057년), 22세에 동생 소철과 함께 진사 시험에 합격하여 일찍이 문재를 떨쳤다.[45] 당시 과거 시험은 구양수가 시험관을 맡았는데, 그는 당시 유행하던 문체를 배격하고 시류에 영합하지 않는 건실한 문장만을 뽑는 과감한 개혁을 단행했다. 이 시험에서 소식, 소철, 증공 세 사람만이 합격했다.[44] 이후 소식은 구양수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3. 2. 관직 생활과 정치적 유배
1057년, 22세의 나이에 동생 소철과 함께 과거에 진사로 급제하여[45][10]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시험관이었던 구양수는 당송팔대가 중 한 명으로, 소식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그의 후원자가 되었다.[10] 1061년에는 칙명 시험에서도 뛰어난 성적을 거두어 명성을 얻었다.[11]
1060년부터 20년간 항저우, 밀주(현대 산둥성 주청시), 서주, 호주 등 중국 각지에서 지방관을 역임했다.[10] 특히 항저우에서는 서호를 가로지르는 둑길 건설을 주도했는데, 이 둑길은 오늘날까지 그의 이름을 따 '수제'(蘇堤|수 제방zho)로 불린다.[10] 1078년 서주 지사로 재직할 당시에는 리고 공업 현의 불안정한 경제 상황과 무장 반란 가능성에 대해 우려하며 조정에 상주문을 올리기도 했다. 이 상소문에는 당시 철강 산업의 규모, 제조업체 간 경쟁, 지방 세력의 위협 등 11세기 후반 중국 철강 산업의 실태와 지방관으로서 중앙 정부와 협상해야 했던 어려움이 잘 드러나 있다.[12][13][33]
당시 북송 조정은 왕안석이 주도하는 신법 시행을 둘러싸고 정치적 갈등이 격화되던 시기였다. 소식은 스승 구양수, 사마광 등과 함께 신법에 반대하는 입장(구법당)을 취했으며[52], 이로 인해 정치적인 부침을 겪게 되었다. 그는 왕안석의 개혁 정책, 특히 정부의 소금 독점을 비판하는 시를 썼는데[14], 이는 훗날 그가 정치적으로 탄압받는 빌미가 되었다. 한편, 왕안석의 지지자였던 과학자 심괄은 소식과 개인적인 친분은 있었으나, 1073년에서 1075년 사이 절강 지역 감찰관으로 재직하며 소식의 시가 조정을 비방한다고 여겨 조정에 보고하기도 했다.[18]
1079년(원풍 2년), 소식이 44세 되던 해 호주 지사로 있을 때, 그의 시문이 황제를 비방했다는 모함을 받아 체포되었다. 이는 '오대시안'이라 불리는 필화 사건으로, 소식은 혹독한 조사를 받고 사형될 위기에 처했으나 송 신종의 배려로 황주로 유배되는 것으로 감형되었다.[45] 이것이 그의 첫 번째 유배였다(1080–1086). 황주에서의 유배 생활은 관직과 봉급이 없어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고, 직접 농사를 지어야 할 정도였다.[15][45] 그는 유배지 근처의 '동쪽 언덕'이라는 뜻의 '동파(東坡)'라는 작은 농장에서 지내며 스스로를 '동파거사(東坡居士)'라 칭했고, 이는 그의 유명한 호가 되었다.[16]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그는 불교 명상을 하고 문학 창작에 몰두하며 정신적으로 더욱 성숙해졌으며[15], 『적벽부』와 같은 걸작을 남겼다.[10][45]
1085년 신종이 사망하고 어린 철종이 즉위하자 할머니인 선인태후 고씨가 섭정을 시작했다. 고씨의 후원으로 구법당이 다시 세력을 얻으면서 1086년 소식은 50세의 나이로 복권되어 중앙 정계로 복귀했다.[17][53] 그는 한림학사, 예부상서 등 요직을 역임했다.[53] 그러나 재상이 된 사마광이 신법을 전면 폐지하려 하자, 소식은 모역법처럼 합리적인 부분은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사마광과 격렬하게 대립했다. 이는 구법당 내부의 분열을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54] 사마광 사후 구법당은 소식, 소철 형제를 중심으로 한 촉당(사천파), 정이, 정호 형제의 낙당(낙양파), 삭당(북방파) 등으로 나뉘어 당쟁을 벌였고, 소식은 보수파 내에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다 공격 대상이 되어 중앙과 지방을 오가며 불안정한 관직 생활을 이어갔다.[54]
1094년(소성 원년), 선인태후가 사망하고 철종이 친정을 시작하면서 신법당이 다시 득세하자 소식은 59세의 나이로 다시 좌천되었다. 그는 혜주로 유배되었고[53], 1097년에는 62세의 나이로 당시 미개척지였던 중국 최남단 해남도의 창화군까지 보내졌다.[53][55] 이는 황주 유배 때보다 더 가혹한 처벌이었다. 그는 셋째 아들 소과(蘇過)만을 데리고 척박한 환경에서 리족 등 소수민족과 함께 지내야 했다.[81][55] 해남도에서도 그는 특유의 적응력과 긍정적인 태도로 현지 주민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관사에서 쫓겨났을 때 주민들의 도움으로 오두막을 짓고 살았다.[81]
1100년, 철종이 사망하고 휘종이 즉위하면서 신구 당파 간의 화해가 모색되자 소식은 66세의 나이로 마침내 사면되었다.[53] 그는 명예직을 받고 수도로 돌아오던 중 1101년 창저우에서 병을 얻어 6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53] 두 번의 길고 혹독한 유배 생활에도 불구하고 그는 좌절하지 않고 뛰어난 문학적 업적을 남겼다.
3. 3. 복권과 죽음
1097년 중국 최남단 하이난다오까지 유배된 소식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뛰어난 적응력을 보여 려족을 포함한 현지 주민들의 인망을 얻었다.[81][55] 1100년, 신법당을 지지했던 철종이 사망하고 휘종이 즉위하면서 신구 양당의 융화를 도모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자, 소식은 마침내 오랜 유배 생활에서 벗어나 사면되었다.[53] 당시 66세였던 그는 제거옥국관이라는 명예직을 받고 청두로 부임하라는 명을 받았다.[10][53]
그러나 1101년, 새로운 임지로 가던 중 병을 얻어 장쑤성 창저우에서 66세(일설에는 64세[17])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10][53] 거듭된 정치적 탄압과 혹독한 유배 생활에도 불구하고 그의 낙천적인 성품과 뛰어난 문학적 업적은 사후에 더욱 높이 평가받았다. 사람들은 그의 서예 작품을 수집하고, 그의 삶을 기리는 그림을 그렸으며, 그가 머물렀던 여러 장소에 석비(石碑)와 사당을 세워 그의 명성을 기렸다.[10] 이송의 그림 "적벽의 수동파"는 그가 적벽대전에 대해 쓴 시에서 영감을 받아 배를 타고 여행하는 모습을 묘사한 대표적인 예이다.[10] 소식의 생애에 대한 가장 중요한 기록으로는 동생 소철이 직접 쓴 묘지명 "망형자첨단명묘지명"이 있으며, 『송사』 권338의 소식 열전 역시 이 묘지명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46]
4. 작품 활동
소식은 자(字)는 자첨(子瞻), 호는 동파거사(東坡居士)로, 흔히 '''소동파'''(蘇東坡)라고 불린다. 그는 시(詩), 사(詞), 부(賦), 산문(散文) 등 여러 문학 장르에 능통하여 구양수, 왕안석 등과 함께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특히 송시(宋詩)의 성격을 확립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으며, 중국 문학사상 처음으로 호방사(豪放詞)를 개척한 대표적인 사인(詞人)으로 평가받는다.
문학뿐만 아니라 예술 다방면에 걸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는 북송 시대의 대표적인 서예가 중 한 명으로 미불, 황정견, 채양과 더불어 '''송나라 사대가'''로 불리며, 그림에도 능하여 문인화(文人畫)풍을 확립하는 데 기여한 화가이기도 했다. 이처럼 다양한 분야에서 독보적인 성취를 이룬 천재 예술가이자 팔방미인으로, 중국 문예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오늘날까지 소식이 남긴 작품으로는 약 2,700편의 시와 800여 통의 편지가 전해진다.[10] 그의 예술 세계는 시, 사, 부와 같은 운문뿐만 아니라 산문, 서예, 그림 등 시각 예술까지 폭넓게 아우른다. 특히 약 350편에 달하는 사(詞) 작품은 그의 문학적 유산을 대표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그의 문학 작품과 시각 예술 작품 모두 자연 세계에 대한 세밀하고 생생한 묘사와 함께 즉흥성과 객관성을 조화롭게 담아내는 특징을 보인다.
대표적인 시문집으로는 동파칠집(東坡七集)이 있으며, 주요 작품으로는 전적벽부(前赤壁賦), 황주한식시첩(黃州寒食詩帖), 제서림벽(題西林壁), 염노교·적벽회고(念奴嬌·赤壁懷古), 수조가두(水調歌頭) 등이 유명하다. 또한 주역 해설서인 동파역전(東坡易傳)과 같은 저술도 남겼다. 그림으로는 《행목괴석도(枯木怪石圖)》, 《죽석도(竹石圖)》 등이 알려져 있다.
4. 1. 시(詩)
소식은 북송 시대 최고의 시인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 그의 시는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현재까지 약 2,700편의 시와 800통의 편지가 전해진다.[10] 그의 시, 사, 부, 산문, 서예, 그림 등 다방면에 걸친 예술적 재능 중에서도 특히 350여 편의 '사'는 그의 시적 유산을 확고히 했다. 그의 작품은 『소동파전집(蘇東坡全集)』과 주석이 충실한 『소식전집교주(蘇軾全集校注)』 등에 정리되어 있으며, 시문집으로는 동파칠집이 대표적이다.소식의 시는 송나라 때부터 중국 본토는 물론 고려나 요(遼) 등 주변국에도 널리 알려졌다. 특히 한국 문단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여, 고려의 문인 이규보는 과거 급제자들이 앞다투어 소식의 시를 읽어 매년 수십 명의 '소동파'가 새로 나온다고 평했으며, 조선의 김종직은 고려 중엽에는 오로지 소동파 시만 배웠다고 언급했다. 김부식과 그의 동생 김부철(金富轍)의 이름이 소식(蘇軾)과 그의 동생 소철(蘇轍)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사실은 당시 문인들의 소식에 대한 추앙심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소식은 종종 왕안석이 이끄는 신법당과 정치적으로 대립했다. 그는 왕안석의 개혁, 특히 정부의 소금 독점 정책을 비판하는 시를 썼고[14], 이로 인해 정치적 박해를 받았다. 조정에서 신법당이 우세해지면서 소식은 여러 차례 유배를 당했는데, 이는 그의 시 창작에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왕안석은 1076년 은퇴 후 소식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기에 1079년의 오대시 사건과 이후의 박해에는 직접적인 책임이 없다.[14] 그러나 소식의 정치적 시는 왕안석 지지자들의 분노를 샀고, 결국 오대시 사건으로 이어져 투옥되기도 했다.
소식의 첫 유배지(1080–1086)는 황저우(黃州, 현 후베이성)였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경제적으로 어려웠으나, 불교 명상을 시작하고 문학적으로는 매우 생산적인 시기였다. 그는 '동파(東坡)'라는 농장에 거주하며 스스로를 '동파거사(東坡居士)'라 칭했고, 이는 그의 유명한 호가 되었다.[16] 그의 최고작으로 평가받는 많은 시와 대표적인 서예 작품인 ''한식첩''(寒食帖|한식첩zho)이 이 시기에 창작되었다.[10] 이후 후이저우(惠州)와 하이난섬의 단저우(儋州) 등지로 다시 유배(1094–1100)되었는데,[10] 하이난의 동파 서원은 그가 유배 시절 머물던 곳에 세워졌다.

소식은 시의 호방파(豪放派) 창시자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시는 대담한 기상과 넓은 주제를 특징으로 한다. 특히 사 장르의 주제 범위를 넓혀 기존의 남녀 간 사랑 노래 위주에서 벗어나 노년, 죽음, 공직 생활의 어려움 등 깊이 있는 사색적 주제를 다루었다. 또한 사냥과 같은 남성적 활동, 불교 철학, 정치적 내용까지 사에 담아내며 장르의 외연을 확장했다. 그의 산문 역시 뛰어나 당송 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의 시는 자연에 대한 생생하고 세밀한 묘사와 함께 즉흥성과 객관성을 조화롭게 담아낸다. 특히 자연(조물)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는 의인법을 즐겨 사용했으며, 이는 송나라 시의 특징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57] 다음은 의인법이 사용된 예시이다.
신성도중이수(新城道中二首) 중 1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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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 풀이 | 통석 |
東風知我欲山行 | 동풍은 내가 산에 가려 함을 알고 | 봄바람은 내가 산행을 하려 함을 알고 |
吹斷簷間積雨聲 | 날려 끊네, 처마 사이의 쌓인 빗소리를 | 처마에 쌓인 가랑비 소리를, 오늘은 깨끗이 날려준다 |
소식의 대표적인 시 작품으로는 적벽부(赤壁賦, 전후 2편), 염노교·적벽회고(念奴嬌·赤壁懷古), 수조가두(水調歌頭) 등이 있다. 특히 적벽부는 삼국 시대의 유명한 적벽 대전에서 영감을 받아 황주 유배 시절에 쓰였다. 여산의 변화무쌍한 모습을 노래한 「제서림벽(題西林壁)」 역시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제서림벽(題西林壁) (서림의 벽에 제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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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 구어체 | 통석 |
橫看成嶺側成峰 | 가로로 보면 령(嶺)을 이루고, 곁에서 보면 봉(峰)을 이룬다 | 정면에서 바라보면 꼬리에 꼬리를 문 산등성이, 측면으로 돌아서 바라보면 잘린 봉우리가 된다 |
遠近高低各不同 | 원근(遠近)·고저(高低) 언제나 같지 않다 | 여산(廬山)은 바라보는 위치의 원근고저에 따라 각각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 |
不識廬山真面目 | 여산(廬山)의 진면목(真面目)을 알지 못하는 것은 | 여산 그 자체의 참된 모습이 어떠한지, 전혀 알 수 없는 것은 |
只縁身在此山中 | 다만 몸이 이 산중에 있기 때문이다 | 자신이 여산(廬山) 속에 몸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
황주 유배 시절 쓴 시 중에는 해학적이면서도 날카로운 시각을 보여주는 작품도 있다. 셋째 부인 조운(朝雲)이 낳은 아들의 첫 목욕을 보며 쓴 「세아희작(洗兒戲作)」은 그러한 예이다.
> '''세아희작(洗兒戲作)'''
>
> 人皆養子望聰明 (인개양자망총명) / 사람들은 모두 자녀가 총명하길 바라네
> 我被聰明誤一生 (아피총명오일생) / 나는 총명함 때문에 평생을 그르쳤네
> 惟願孩子愚且魯 (유원해자우차로) / 바라건대 아이는 어리석고 무지하길
> 無災無難到公卿 (무재무난도공경) / 재앙도 어려움도 없이 고위 관료가 되기를
1082년에 지은 「임강선·야귀임고(臨江仙·夜歸臨皋)」는 정치적 역경 속에서도 자연을 벗 삼아 달관하려는 그의 심경을 잘 보여준다.
> '''임강선·야귀임고(臨江仙·夜歸臨皋)'''
>
> 夜飲東坡醒復醉 (야음동파성복취) / 동파에서 밤에 술을 마시고 깨어나 다시 취했네
> 歸來彷彿三更 (귀래방불삼경) / 집에 돌아오니 새벽 3시쯤 되었네
> 家童鼻息已雷鳴 (가동비식이뢰명) / 하인은 이미 코 고는 소리가 천둥 같네
> 敲門都不應 (고문도불응) / 문을 두드려도 아무도 대답하지 않네
> 倚杖聽江聲 (의장청강성) / 지팡이에 의지하여 강 소리를 듣네
> 長恨此身非我有 (장한차신비아유) / 오래도록 이 몸이 내 것이 아님을 한탄하네
> 何時忘卻營營 (하시망각영영) / 언제 명예와 돈을 추구하는 것을 잊을 수 있을까
> 夜闌風靜縠紋平 (야란풍정곡문평) / 밤이 깊어지고 바람이 멈추고 물결이 잔잔하네
> 小舟從此逝 (소주종차서) / 작은 배를 타고 여기서 떠나리
> 江海寄餘生 (강해기여생) / 강과 바다에 여생을 맡기리
또 다른 유명한 사(詞) 작품인 「정풍파(定風波)」는 인생의 비바람 속에서도 초연하게 나아가려는 의지를 담고 있다.
> '''정풍파(定風波)'''
>
> 莫聽穿林打葉聲 (막청천림타엽성) / 숲을 뚫고 잎을 치는 소리에도 귀 기울이지 말라
> 何妨吟嘯且徐行 (하방음소차서행) / 어찌 휘파람을 불고 천천히 걸어가는 것을 방해하겠는가
> 竹杖芒鞋輕勝馬 (죽장망혜경승마) / 대나무 지팡이와 짚신은 말보다 가볍고
> 誰怕 (수파) / 누가 두려워하겠는가?
> 一簑湮雨任平生 (일사연우임평생) / 평생 동안 짚신을 신고 안개 낀 빗속에서 살아가리라
>
> 料峭春風吹酒醒 (료초춘풍취주성) / 봄바람의 매서움이 술을 깨우고
> 微冷 (미랭) / 조금 춥지만
> 山頭斜照卻相迎 (산두사조각상영) / 산꼭대기에 비스듬히 비치는 햇살이 나를 맞이하네
> 回首向來蕭瑟處 (회수향래소슬처) / 돌이켜보면 쓸쓸했던 곳으로
> 歸去 (귀거) / 돌아가면
> 也無風雨也無晴 (야무풍우야무청) / 바람도 비도 없고 맑은 하늘이 있네
정치적으로 대립했던 왕안석과도 시문을 통해 교류했다. 왕안석이 은퇴 후 소식에게 보낸 시 「북산(北山)」에 소식이 화답한 시 「차형공운(次荊公韻)」은 두 사람의 개인적인 관계를 보여준다.
- '''왕안석의 시: 북산(北山)'''
원문 | 번역문 | 통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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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山輸緑漲横陂 | 북산(北山)은 푸르름을 뿜어내고 둑에는 물이 넘실대네 | 북산은 녹색을 뿜어내어 밭에는 물이 넘실댄다 |
直塹回塘艶艶時 | 곧은 해자, 둥근 연못, 아름다운 시절이네 | 곧은 해자, 둥근 연못이 아름다운 계절이다 |
細數落花因坐久 | 떨어지는 꽃잎을 세는 것은 앉아있는 시간이 길어졌기 때문 | 낙화를 하나하나 세는 것은 그대와 오래 함께 했기 때문이다 |
緩尋芳草得歸遲 | 천천히 향기로운 풀을 찾아 돌아오는 길이 늦어지네 | 함께 늦도록 향기로운 풀을 찾아 걸었다네 |
- '''소식의 답시: 차형공운(次荊公韻, 형공의 운에 따르다)'''
원문 | 번역문 | 통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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騎驢渺渺入荒陂 | 나귀를 타고 아득하게 거친 둑에 들어서네 | 나귀를 타고 아득하게 거친 둑에 들어섰네 |
想見先生未病時 | 생각하건대 선생이 아직 병들기 전이네 | 문득, 그대의 병들기 전 건강한 모습이 떠오르네 |
勧我試求三畝宅 | 나에게 권하네, 3묘의 집을 구해보라고 | 그대는 나에게 이 땅에 3묘 정도의 집터를 찾아보라고 권하네 |
從公已覚十年遅 | 그대를 따르기엔 이미 십 년이나 늦었음을 깨닫네 | 그대를 따라 가르침을 받는 것이 이미 십 년이나 늦었음을 깨닫네 |
(※ "형공(荊公)"은 왕안석을 가리킨다.)
소식은 불교, 특히 선종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 관련 주제로 시를 쓰기도 했다. 그의 시 중 하나는 일본 소토종의 창시자 에이헤이 도겐이 그의 저서 정법안장의 "골짜기 시냇소리, 산의 모습" 장에서 중요하게 다루었다.
이 외에도 "일각천금(一刻千金)"이라는 성어의 유래가 된 시 춘야[60] 등 수많은 작품이 오늘날까지 애송되고 있다. 두 번의 유배를 겪는 등 정치적으로 힘든 삶을 살았지만, 그의 시는 유연하고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한 생명력과 삶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보여준다.[56]
4. 2. 사(詞)
오늘날까지 소식이 쓴 약 2,700편의 시와 800통의 편지가 보존되어 있다.[10] 그의 예술적 재능은 시(詩), 사(詞), 부(賦)뿐만 아니라 산문, 서예, 그림 등 다방면에 걸쳐 나타난다. 특히 그의 문학적 명성을 확고히 한 것은 350여 편에 달하는 사(詞) 작품이다.소식은 사(詞) 장르에서 호방파를 창시한 것으로 유명하며, 대담한 기상과 폭넓은 주제를 특징으로 한다. 그는 기존 사(詞)의 주제 범위를 넓혀 노화, 죽음, 관직 생활의 어려움 등 이전에는 잘 다루지 않았던 심오하고 사색적인 내용을 다루어 동시대 사람들의 깊은 공감을 얻었다. 또한, 사냥과 같은 남성적인 활동이나 불교 철학, 정치적 내용 등 이전에는 주로 시(詩)에서 다루던 소재들을 사(詞)에 과감하게 도입하여 장르의 혁신을 이끌었다.
그의 대표적인 사(詞) 작품으로는 적벽 대전의 역사를 노래한 염노교·적벽회고( )와 중추절에 동생 소철을 그리며 쓴 수조가두( ) 등이 유명하다.
황주 유배 시절은 소식에게 있어 창작열이 왕성했던 시기 중 하나였다. 이 시기에 쓰인 ''임강선·야귀임고''( , 1082년 작)는 정치적 어려움 속에서도 자연을 벗 삼아 은둔하고자 하는 그의 심경을 잘 보여준다.
:夜飲東坡醒復醉, (밤에 동파에서 술 마시고 깨었다 다시 취해)
:歸來彷彿三更。 (돌아오니 어느덧 깊은 밤이로구나)
:家童鼻息已雷鳴。 (집안 아이놈 코 고는 소리 천둥 같은데)
:敲門都不應, (문을 두드려도 아무 대답 없으니)
:倚杖聽江聲。 (지팡이에 기대어 강물 소리 듣는다)
:長恨此身非我有, (이 몸이 내 것 아님을 오래 한탄했으니)
:何時忘卻營營。 (언제나 명리(名利)를 좇는 마음 잊을 수 있을까)
:夜闌風靜縠紋平。 (밤 깊어 바람 자고 물결 잔잔해지니)
:小舟從此逝, (작은 배 타고 이대로 떠나가)
:江海寄餘生。 (남은 생 강과 바다에 맡기리라)
또 다른 유명한 작품인 ''정풍파''( )에서는 비바람 속에서도 초연하게 나아가는 달관의 경지를 노래했다.
:莫聽穿林打葉聲, (숲 뚫고 잎 치는 소리 듣지 말게나)
:何妨吟嘯且徐行。 (읊조리며 휘파람 불며 천천히 가면 어떠리)
:竹杖芒鞋輕勝馬, (대지팡이 짚신이 말보다 가벼우니)
:誰怕? (누가 두려울까?)
:一簑湮雨任平生。 (도롱이 하나로 평생 비바람 속에 살아도 좋으리)
:
:料峭春風吹酒醒, (쌀쌀한 봄바람에 술이 깨니)
:微冷, (조금 춥지만)
:山頭斜照卻相迎。 (산마루 비낀 햇살이 나를 반기네)
:回首向來蕭瑟處, (뒤돌아보니 방금 지나온 쓸쓸한 곳)
:歸去, (돌아가면)
:也無風雨也無晴。 (비바람도 없고 또한 맑지도 않으리)
그의 사(詞) 중에는 정치적인 내용을 담은 작품들도 있었는데, 이는 종종 왕안석을 지지하는 세력의 반감을 사기도 했으며, 결국 1079년 오대시 사건이라는 필화 사건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 외에도 갓 태어난 아들의 첫 목욕을 축하하며 쓴 해학적인 시 '아들을 낳고'(洗兒戲作)나 불교적인 내용을 담은 사(詞)도 남겼다. '아들을 낳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人皆養子望聰明, (사람들은 모두 자녀가 총명하길 바라네)
:我被聰明誤一生; (나는 총명함 때문에 평생을 그르쳤네)
:惟願孩子愚且魯, (바라건대 아이는 어리석고 무지하길)
:無災無難到公卿。 (재앙도 어려움도 없이 고위 관료가 되기를)
그의 불교 관련 시 중 하나는 일본 선종의 소토종 창시자인 에이헤이 도겐이 자신의 저서 정법안장의 "골짜기 시냇소리, 산의 모습" 장에서 깊이 있게 다루기도 했다.
4. 3. 문(文)
동파칠집(東坡七集)이라는 시문집이 전해지며,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다양한 글과 편지가 남아있다.- 답사민사논문첩(答謝民師論文帖)
- 제황기도문(祭黃幾道文)
- 전적벽부(前赤壁賦)
- 황주한식시첩(黃州寒食詩帖)
- 제서림벽(題西林壁)
- 음호상초청후우(飲湖上初晴後雨)
오늘날까지 소식이 쓴 약 2,700편의 시와 800통의 편지가 보존되어 있다.[10] 그의 예술적 재능은 시, 사, 부 형식의 시뿐만 아니라 산문, 서예, 그림 등 다방면에 걸쳐 뛰어났다. 그의 시 중 상당수는 전통적인 시 형식이지만, 특히 350여 편의 사(詞)는 그의 시적 명성을 확고히 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소식은 정치와 통치에 관한 여러 편의 수필도 남겼는데, 그중 하나가 《유후론》(留侯論)이다. 그는 당송 팔대가 중 한 명으로 꼽힐 만큼 뛰어난 산문가로 인정받았다. 그의 문학 및 시각 예술 작품들은 자연 세계에 대한 세밀하고 생생한 묘사와 함께 즉흥성과 객관성을 조화롭게 담아내는 특징을 보인다.
소식은 자신의 여행 경험을 바탕으로 '소품(小品) 에세이'를 쓰기도 했다.[30] 이는 서사, 일기, 산문 형식을 활용한 송나라 시대의 인기 있는 문학 장르인 '여행기 문학'(遊記文學|유기문학중국어)에 속한다.[31] 다른 중국 여행 문학 작품들이 문화, 지리, 지형, 기술 정보 등을 풍부하게 담고 있는 반면, 소품 에세이는 주로 철학적 또는 도덕적 주장을 전달하기 위해 배경과 사건을 활용하는 데 중점을 두었으며, 종종 설득력 있는 글쓰기 기법을 사용했다.[30] 예를 들어, 소식의 소품 에세이인 《석종산기》(石鐘山記)는 '돌 종(石鐘)'에 관한 고대 문헌 기록이 사실적으로 정확한지 조사하고 판단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32]
소식의 산문과 시는 유연하고 유려하면서도 강인한 특징을 지닌다. 이는 동시대 인물이자 정치적으로 대립했던 왕안석의 명쾌하고 다소 딱딱한 문체와는 대조적이다. 서로 다른 인생 경로와 문체적 특징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시문을 통해 교류하기도 했다. 관직에서 물러난 왕안석이 소식에게 보낸 칠언절구 시와 그에 대한 소식의 답시는 다음과 같다.
원문 | 번역문 | 통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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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山輸緑漲横陂 | 북산(北山)은 푸르름을 뿜어내고 둑에는 물이 넘실대네 | 북산은 녹색을 뿜어내어 밭에는 물이 넘실댄다 |
直塹回塘艶艶時 | 곧은 해자, 둥근 연못, 아름다운 시절이네 | 곧은 해자, 둥근 연못이 아름다운 계절이다 |
細數落花因坐久 | 떨어지는 꽃잎을 세는 것은 앉아있는 시간이 길어졌기 때문 | 낙화를 하나하나 세는 것은 그대와 오래 함께 했기 때문이다 |
緩尋芳草得歸遲 | 천천히 향기로운 풀을 찾아 돌아오는 길이 늦어지네 | 함께 늦도록 향기로운 풀을 찾아 걸었다네 |
원문 | 번역문 | 통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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騎驢渺渺入荒陂 | 나귀를 타고 아득하게 거친 둑에 들어서네 | 나귀를 타고 아득하게 거친 둑에 들어섰네 |
想見先生未病時 | 생각하건대 선생이 아직 병들기 전이네 | 문득, 그대의 병들기 전 건강한 모습이 떠오르네 |
勧我試求三畝宅 | 나에게 권하네, 3묘의 집을 구해보라고 | 그대는 나에게 이 땅에 3묘 정도의 집터를 찾아보라고 권하네 |
従公已覚十年遅 | 그대를 따르기엔 이미 십 년이나 늦었음을 깨닫네 | 그대를 따라 가르침을 받는 것이 이미 십 년이나 늦었음을 깨닫네 |
※ "형공(荊公)"은 왕안석을 가리킨다.
위에 언급된 시 외에도, 성어 "일각천금(一刻千金)"의 유래가 된 시 《춘야(春夜)》[60] 또한 널리 알려져 있다.
저술로는 주역을 해설한 《동파역전》(東坡易傳)이 있다.
4. 4. 서예와 그림
소식은 시, 사, 부, 산문 등 문학 분야뿐만 아니라 서예와 그림에서도 뛰어난 성취를 이룬 예술가였다. 오늘날까지 약 2,700편의 시와 800통의 편지가 전해진다.[10] 그의 문학 및 시각 예술 작품에는 즉흥성, 객관성, 자연 세계에 대한 생생한 묘사가 조화롭게 나타난다.[10]'''서예'''
소식은 미불, 황정견, 채양과 함께 '''송나라 사대가'''로 꼽히는 저명한 서예가였다. 처음에는 왕희지와 왕헌지(이왕, 二王)의 서체를 배웠고, 이후 안진경, 양응식, 이옹의 서풍을 익혔다. 대표작으로는 「적벽부」와 『황주한식시권』(『한식첩』이라고도 함) 등이 있다.
『황주한식시권』은 원풍 5년(1082년), 소식이 47세 때 황주에서의 생활 중 한식절(청명 전날)을 맞아 지은 자작시 2수를 행서로 쓴 회심의 작품이다. 세로 33cm 크기의 징심당지에 17행으로 쓰였으며, '年', '中', '葦', '帋' 등의 글자에서 마지막 획을 길게 빼는 등 필획의 변화가 두드러진다. 낙관은 없으나, 황정견이 쓴 발문(跋文, 『황주한식시권 발』)이 함께 전해져 두 서예 대가의 대표작을 함께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회화'''
소식은 사대부들이 인격 수양의 일환으로 그리는 문인화(사부화, 士夫画)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이론적으로 체계화하는 데 기여했으며, 스스로도 묵죽화(墨竹画)를 잘 그렸다. 현재 남아있는 그의 진품 그림은 드물지만, 그림에 대해 논한 글(화론, 畫論)이나 시(제화시, 題畫詩)를 많이 남겼다. 대표적인 화론으로는 『정인원화기(淨因院畫記)』, 『전신기(傳神記)』, 『균당곡언죽기(篔簹谷偃竹記)』 등이 있다.
그는 그림을 평가할 때 단순히 외형을 닮게 그리는 것("형사", 形似)보다 대상에 내재된 정신과 본질을 표현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서언릉왕주부소화절지이시(書鄢陵王主簿所畫折枝二詩)」에서 "그림을 논함에 형상만을 중시하는 것은 어린아이와 같다(論畫以形似, 見與兒童鄰zho)"고 말한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그의 회화 사상은 문동, 황정견, 미불, 화원 등 동시대 문인 화가들과 공유되었다.
특히 그의 사촌이자 묵죽화의 대가였던 문동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소식은 문동의 대나무 그림에 대해 "여가(與可, 문동의 자)가 대나무를 그릴 때, 대나무만 보고 사람을 보지 않는다(與可畵竹時, 不見其人zho)"라고 평하며, 대상과 혼연일체가 되는 창작 경지를 높이 평가했다. 또한 당나라 시인이자 화가인 왕유의 작품에 대해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詩中有畫, 畫中有詩zho)"라고 평가하여 시와 그림의 이상적인 결합을 강조했다.
5. 사상
소동파는 기본적으로 유교 사상에 뿌리를 둔 현실참여주의자로서,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구제해야 한다는 지식인의 사명감이 투철했다. 다정다감한 성격으로 백성에 대한 연민뿐 아니라 가족과 친구에 대한 인간적인 애정도 깊었다.
한편으로 그는 불교와 도교 사상의 영향으로 현실도피적인 사고방식도 지니고 있었다. 물질세계의 허무함을 간파하고 그 너머에서 노닐려는 초월적 인생관을 가졌으며, 자연을 사랑하고 스스로 자연의 일부가 되기를 원했다. 이러한 초연함 덕분에 그는 정치적 핍박 속에서 능력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일생 대부분을 유배와 지방관 생활로 보냈음에도 항상 긍정적인 태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의 회화론에서 "대나무를 그릴 때는 먼저 네 마음 속에 대나무가 있어야 한다"는 말은 각자의 마음속 대나무를 먼저 들여다봐야 한다는 뜻으로, 그의 예술관을 엿볼 수 있다.
소식은 종종 왕안석이 이끄는 정치적 파벌과 대립했다. 특히 정부가 소금 산업에 부과한 독점 등 왕안석의 개혁 정책을 비판하는 시를 썼다.[14] 이는 결국 개혁파에게 소식을 정치적으로 탄압할 빌미를 주었다. 소식이 황제를 비판했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왕안석의 개혁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왕안석 자신은 1076년 은퇴 후 소식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기에, 이후 소식에 대한 탄압에는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14]
소식의 첫 번째 유배(1080–1086)는 후베이성 황저우로 보내졌는데, 명목상 직함만 있고 봉급이 없어 빈곤하게 지냈다. 이 시기 그는 불교 명상을 시작했으며, 친구의 도움으로 1081년 '동파(東坡, 동쪽 언덕)'라는 농장에 작은 거처를 마련했다.[15] 그의 유명한 호인 '동파거사'는 여기서 유래했다.[16] 황저우 유배 시절은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그의 최고작으로 평가받는 많은 시와 가장 유명한 서예 작품인 ''한식첩''이 이때 탄생했다.[10] 1086년 잠시 수도로 복귀했으나,[17] 다시 후이저우와 하이난성 단저우로 유배(1094–1100)되었다.[10] 1098년 하이난 유배지에 동파 서원이 세워졌다.
정치적 대립 속에서도 교류는 있었다. 저명한 과학자이자 정치가인 심괄(1031–1095)은 왕안석의 가장 신뢰받는 동료 중 하나였지만, 소식과 친구 사이였다. 그러나 1073년경 심괄은 소식의 시가 조정을 비방한다고 우려하며 조정에 보고했고,[18] 이는 훗날 이정(Li Ding)과 서단(Shu Dan)이 소식을 탄핵하는 데 활용되었다. 그럼에도 소식은 심괄의 행동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고 전해진다.[18]
소식의 산문과 시는 유연하고 유려하면서도 강인한 특징을 지닌 반면, 정치적으로 대립했던 왕안석의 문체는 명쾌하고 딱딱하여 대조를 이루었다. 인생과 문체의 특징이 정반대인 두 사람이었지만, 시문을 통한 교류가 있었다. 요직에서 물러난 후의 왕안석은 소식에게 다음과 같은 칠언절구를 보냈다.
북산(北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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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 번역문 | 통석 |
北山輸緑漲横陂 | 북산(北山)은 푸르름을 뿜어내고 둑에는 물이 넘실대네 | 북산은 녹색을 뿜어내어 밭에는 물이 넘실댄다 |
直塹回塘艶艶時 | 곧은 해자, 둥근 연못, 아름다운 시절이네 | 곧은 해자, 둥근 연못이 아름다운 계절이다 |
細數落花因坐久 | 떨어지는 꽃잎을 세는 것은 앉아있는 시간이 길어졌기 때문 | 낙화를 하나하나 세는 것은 그대와 오래 함께 했기 때문이다 |
緩尋芳草得歸遲 | 천천히 향기로운 풀을 찾아 돌아오는 길이 늦어지네 | 함께 늦도록 향기로운 풀을 찾아 걸었다네 |
소식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화답했다. (※ "형공(荊公)"은 왕안석을 가리킨다.)
차형공운(次荊公韻, 형공의 운에 따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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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 번역문 | 통석 |
騎驢渺渺入荒陂 | 나귀를 타고 아득하게 거친 둑에 들어서네 | 나귀를 타고 아득하게 거친 둑에 들어섰네 |
想見先生未病時 | 생각하건대 선생이 아직 병들기 전이네 | 문득, 그대의 병들기 전 건강한 모습이 떠오르네 |
勧我試求三畝宅 | 나에게 권하네, 3묘의 집을 구해보라고 | 그대는 나에게 이 땅에 3묘 정도의 집터를 찾아보라고 권하네 |
従公已覚十年遅 | 그대를 따르기엔 이미 십 년이나 늦었음을 깨닫네 | 그대를 따라 가르침을 받는 것이 이미 십 년이나 늦었음을 깨닫네 |
이 외에도 성어 "일각천금(一刻千金)"의 유래가 된 시 춘야(春夜) 등이 유명하다.[60]
황주 유배 시절부터 '동파 거사'로 불리며 좌천과 파면이라는 고난 속에서 오히려 선(禪)적인 경지를 추구했다. 몽골 제국 칭기즈 칸의 재상 야율초재(담연거사)는 "동파를 진인(眞人) 중의 용"이라 칭했고,[65] 일본의 도겐 선사는 "필해(筆海)의 진룡(眞龍)"이라 평가했다.[66][67] 소식 자신도 여산의 계곡 물소리를 부처의 설법으로, 산의 모습을 청정한 법신으로 여기는 경지에 이르렀다("溪聲便是廣長舌 山色豈非清淨身"). 처음부터 불교에 통달했던 것은 아니나, 생사의 문제를 넘어서기 위해 세상 모든 것을 깨달음의 문으로 삼아 근심과 고통을 극복하려 했다. 때로는 불교에 깊이 침잠하여 "당나라에는 향산(백낙천)이 있었고, 송나라에는 자첨(소식)이 있었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68]
6. 영향
소식의 산문과 시는 유연하고 유려하면서도 강인한 특징을 지닌다. 이는 동시대에 활약하며 정치적으로 대립했던 왕안석의 명쾌하고 딱딱한 문체와는 대조적이다. 인생과 문체 모두 정반대의 특징을 가진 두 사람이지만, 시문을 통한 교류는 있었다. 왕안석이 요직에서 물러난 후 소식에게 보낸 시와 소식의 답시는 다음과 같다.
북산(北山) - 왕안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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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 번역문 | 통석 |
北山輸緑漲横陂 | 북산(北山)은 푸르름을 뿜어내고 둑에는 물이 넘실대네 | 북산은 녹색을 뿜어내어 밭에는 물이 넘실댄다 |
直塹回塘艶艶時 | 곧은 해자, 둥근 연못, 아름다운 시절이네 | 곧은 해자, 둥근 연못이 아름다운 계절이다 |
細數落花因坐久 | 떨어지는 꽃잎을 세는 것은 앉아있는 시간이 길어졌기 때문 | 낙화를 하나하나 세는 것은 그대와 오래 함께 했기 때문이다 |
緩尋芳草得歸遲 | 천천히 향기로운 풀을 찾아 돌아오는 길이 늦어지네 | 함께 늦도록 향기로운 풀을 찾아 걸었다네 |
차형공운(次荊公韻, 형공의 운에 따르다) - 소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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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 번역문 | 통석 |
騎驢渺渺入荒陂 | 나귀를 타고 아득하게 거친 둑에 들어서네 | 나귀를 타고 아득하게 거친 둑에 들어섰네 |
想見先生未病時 | 생각하건대 선생이 아직 병들기 전이네 | 문득, 그대의 병들기 전 건강한 모습이 떠오르네 |
勧我試求三畝宅 | 나에게 권하네, 3묘의 집을 구해보라고 | 그대는 나에게 이 땅에 3묘 정도의 집터를 찾아보라고 권하네 |
従公已覚十年遅 | 그대를 따르기엔 이미 십 년이나 늦었음을 깨닫네 | 그대를 따라 가르침을 받는 것이 이미 십 년이나 늦었음을 깨닫네 |
※ "형공(荊公)"은 왕안석을 가리킨다.
이 외에도, "일각천금(一刻千金)"이라는 성어는 소식의 시 춘야(春夜)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60]
6. 1. 한국 문학에 끼친 영향
소동파의 시는 송(宋)나라 때부터 중국은 물론 고려나 요(遼) 같은 이웃 나라에까지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독자의 수요에 부응하여 그의 시집 역시 송나라 때부터 줄곧 간행되었으며, 이 가운데는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도 많다.소동파(蘇東坡, 1036~1101)가 한국 문단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세상의 학자들이 처음에는 과거시험에 필요한 문체를 익히느라 풍월을 일삼을 겨를이 없다가 과거에 급제하고 나서 시 짓는 법을 배우기 시작하면 소동파 시 읽기를 무척이나 좋아하기 때문에 매년 과거의 방이 나붙은 뒤에 사람마다 금년에 또 서른 명의 소동파가 나왔다고 여긴다”라고 했고,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은 “신라 말에서 고려 초까지는 오로지 만당(晩唐) 시만 익혔고 고려 중엽에는 오로지 소동파 시만 배웠다”라고 했다. 김부식(金富軾, 1075~1151)과 동생 김부철(金富轍)의 이름이 소동파(본명 식)와 그의 동생 소철(蘇轍) 형제의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은 소동파에 대한 당시 문인들의 추앙심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한국의 선조들은 소동파 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6. 2. 음식 문화
소식은 중국 역사상 4대 미식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나머지 세 명은 니 찬(倪瓚, 1301–1374), 서위(徐渭, 1521–1593), 원매(袁枚, 1716–1797)이다.[39] 그는 특히 돼지고기 요리와 관련된 일화로 유명하며, 항저우의 명물 요리인 동파육(東坡肉)은 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져 있다. 거지닭(叫花鷄) 역시 동파육과 함께 항저우의 유명한 음식이다.
동파육의 탄생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전해진다. 소동파가 여가 시간에 돼지고기를 찌던 중, 오랜 친구가 찾아와 바둑을 두게 되었는데, 바둑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불 위에 올려둔 고기를 잊어버려 타는 냄새가 날 정도였다는 설이 있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친구와 중국 장기 시합에 열중하다가 졸이고 있던 돼지고기를 까맣게 잊었는데, 이것이 오히려 깊은 맛을 내는 계기가 되었다고도 한다. 황주로 좌천되었을 때 돼지고기 요리에 대해 읊은 시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들은 전설일 뿐, 소식이 직접 동파육을 발명했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다. 린 시앙 주(Lin Hsiang Jueng)와 린 추이펑(Lin Tsui Fengeng)은 그들의 저서 《중국 미식》(Chinese Gastronomy)에서 동파육 레시피를 소개하며 "이 돼지고기 요리(동파육)는 시인 소동파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지만,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아마도 그가 그것을 좋아했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언급하기도 했다.[40] 어떤 전설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소식을 기리기 위해 돼지고기 요리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고도 하지만, 이 역시 구체적인 증거는 부족하다.
한편, 소식은 미식가였지만 채식주의적인 성향도 보였다. 그는 식탁에 올릴 음식을 위해 동물을 죽이는 것을 불편하게 여겼으나, 조개와 같은 특정 음식에 대한 갈망 때문에 완전한 채식을 실천하지는 못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옥살이를 겪은 후 그의 생각은 크게 바뀌었다. 그는 "옥살이를 한 이후로 단 한 마리의 생물도 죽이지 않았다... 나 자신이 부엌에서 기다리는 닭처럼 걱정과 위험을 겪었기 때문에, 내 입맛을 만족시키기 위해 어떤 생물이든 헤아릴 수 없는 공포와 고통을 겪게 하는 것을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말했다.[41]
6. 3. 족보
오늘날까지 동양에서 이어지는 족보의 원형은 소순(蘇洵; 부)·소식(蘇軾)·소철(蘇轍; 제)이 정리한 보첩에서 비롯하였다.7. 가족 관계
송나라의 저명한 문인 가문 출신이다. 아버지는 당송팔대가 중 한 명인 소순(蘇洵)이며, 남동생 소철(蘇轍) 역시 유명한 문인이다. 이들 세 부자를 ''삼소(三蘇)''라 부르며 모두 당송팔대가로 꼽는다.
소식은 세 명의 부인을 두었다.
첫 번째 부인은 왕부(王弗, 1039–1065)로, 사천성 미산 출신이며 16세에 19세의 소식과 결혼했다. 결혼 11년 만인 1065년 6월 14일(음력 5월 2일)[81] 27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슬하에 아들 소매(蘇邁)를 두었다. 소식은 그녀를 기리는 묘지명(亡妻王氏墓志銘)에서 왕부가 훌륭한 아내였을 뿐 아니라 관료 생활 중 지인들의 청렴함에 대해 자주 조언했다고 기록했다. 왕부가 죽은 지 10년 후, 소식은 미주(密州)에서 그녀를 꿈에서 본 뒤 그녀를 추모하는 유명한 사인 "강성자·을묘정월이십일야기몽(江城子·乙卯正月二十日夜記夢)"을 지었다.[19]
1068년, 왕부가 사망한 지 3년 후, 소식은 왕부의 사촌 여동생이자 자신보다 11살 어린 왕윤지(王閏之, 1048–1093)와 결혼했다. 왕윤지는 이후 25년간 소식의 관직 생활과 정치적 유배의 고락을 함께했다. 소식은 왕윤지가 그의 세 아들(장남 소매는 왕부 소생)을 동등하게 대하는 이해심 많은 아내라고 칭찬했다. 왕윤지는 1093년 46세로 사망했으며, 두 아들 소대(蘇迨)와 소과(蘇過)를 낳았다. 소식은 그녀의 묘지명(祭亡妻同安郡君文)에서 그녀와 함께 묻히고 싶다는 소망을 밝혔다.
세 번째 부인 왕조운(王朝雲, 1062–1095)은 항저우의 가기(歌妓) 출신으로, 소식이 항저우에 있을 때 12세 정도의 그녀를 사들였다.[21] 왕조운은 소식의 집에서 글을 배웠으며, 소식은 그녀가 자신의 정신세계를 가장 잘 이해한다고 여겼다. 왕조운은 소식의 노년기 유배 생활에 동행했으며, 1095년 8월 13일(음력 7월 5일) 휘주에서 34세의 나이로 병사했다.[23] 왕조운은 1083년 11월 15일 아들 소둔(蘇遁)을 낳았으나 일찍 사망했다. 왕조운 사후 소식은 다시는 결혼하지 않았다.
소식과 동생 소철(蘇轍)은 형제애가 깊었다. 아버지 소순과 함께 과거에 급제하여 정계에 진출했으며, 정치적 부침을 함께 겪었다.[59] 소식은 동생을 그리워하는 시를 많이 남겼다. 다음은 동생과 처음 헤어졌을 때 지은 시이다.
신축(辛丑) 11월 19일, 자유(子由)와 정주(鄭州) 서문 밖에서 헤어져 말 위에서 시 한 수를 지어 부쳐 보낸다(辛丑十一月十九日 既與子由別於鄭州西門之外 馬上賦詩一篇寄之) | ||
---|---|---|
원문 | 번역문 | 풀이 |
不飲胡為醉兀兀 |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 어째서 이렇게 취한 듯 휘청거리는가 |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 어째서 이리도 몽롱한가 |
此心已逐歸鞍發 | 이 마음은 이미 돌아가는 안장을 따라 떠나갔네 | 내 마음은 이미 돌아가는 동생의 안장을 따라 떠나갔네 |
歸人猶自念庭闈 | 돌아가는 사람은 오히려 스스로 뜰과 집안을 생각하겠지 | 돌아가는 그대는 부모님 곁으로 돌아가 편안하겠지 |
今我何以慰寂寞 | 지금 나는 무엇으로 적막함을 위로할까 | 지금 나는 무엇으로 이 적막함을 위로할까 |
登高回首坡壟隔 | 높은 곳에 올라 머리 돌려보니 언덕이 막혀 있네 | 높은 곳에 올라 머리 돌려보니 언덕이 가로막고 있네 |
但見烏帽出復沒 | 다만 검은 모자가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을 보네 | 그저 동생의 검은 모자만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을 보네 |
苦寒念爾衣裘薄 | 추위에 너의 옷과 갖옷이 얇을까 걱정하네 | 추위에 너의 옷이 얇을까 걱정하네 |
獨騎瘦馬踏殘月 | 홀로 마른 말 타고 남은 달빛 밟네 | 홀로 여윈 말에 올라 새벽 달빛을 밟네 |
路人行歌居人樂 | 길 가는 사람은 노래하고, 집에 있는 사람은 즐거워하네 | 길 가는 사람은 노래하고, 집에 있는 사람은 즐거워하네 |
童僕怪我苦悽惻 | 하인들은 내가 괴로이 슬퍼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네 | 하인들은 내가 슬퍼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네 |
亦知人生要有別 | 또한 아네, 인생에 헤어짐이 있음을 | 또한 아네, 인생에 이별이 있음을 |
但恐歲月去飄忽 | 다만 두려워하네, 세월이 바람처럼 빨리 지나가는 것을 | 다만 두려워하네, 세월이 바람처럼 흘러가는 것을 |
寒燈相對記疇昔 | 차가운 등불 아래 서로 마주하며 지난밤을 기억하네 | 차가운 등불 아래 마주 앉아 지난밤을 기억하네 |
夜雨何時聽蕭瑟 | 밤비, 어느 때에야 소슬한 소리를 들을까 | 밤비, 어느 때에야 소슬한 소리를 함께 들을까 |
君知此意不可忘 | 그대 이 뜻을 잊지 못할 것을 안다면 | 그대여, 이 마음을 잊지 않기를 |
慎勿苦愛高官職 | 삼가 바라네, 높은 관직을 괴롭게 사랑하지 않기를 | 부디 높은 관직을 지나치게 탐하지 않기를 |
※ '자유(子由)'는 소철의 자이다.
'''직계 가족'''
- '''조부:''' 소서(蘇序)
- '''조모:''' 사씨(史氏)
- '''부친:''' 소순(蘇洵) - 당송팔대가 중 한 명.
- '''모친:''' 정부인(程夫人) - 미산 부호 정문응(程文應)의 딸. 18세에 소순에게 시집가 자녀 교육과 가사를 돌보며 소식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형제자매'''
소순과 정부인 사이에는 3남 3녀가 있었으나 장남과 세 딸은 요절했다.[69][70]
- 형: 소경선(蘇景先) - 요절.
- 누나 3명: 이름 미상, 모두 요절.
- 누나: 소팔낭(蘇八娘, 1035년–1052년) - 16세에 외사촌 정지재(程之才)에게 시집갔으나 2년 후 시가의 학대를 받아 사망했다.[71][72] 청나라 원매의 『수원시화(隨園詩話)』에는 소식의 여동생으로 잘못 기록되어 있다.[73]
- 남동생: 소철(蘇轍) - 당송팔대가 중 한 명.
※ 소소매(蘇小妹)라는 여동생이 진소유(秦少游)에게 시집갔다는 전설은 허구이다. 진소유의 아내는 서문미(徐文美)였으며, 진씨 족보에도 소씨 딸을 아내로 맞았다는 기록은 없다.[74][75]
'''처첩'''
- 정실: 왕부(王弗, 1039년–1065년) - 16세에 19세의 소식과 결혼하여 11년간 함께 살다 27세에 병사.
- 계실: 왕윤지(王閏之, 1048년–1093년) - 왕부의 사촌 여동생. 왕부 사후 3년 뒤 소식과 결혼하여 58세까지 살았다. 향년 46세.
- 첩: 왕조운(王朝雲, 1062년–1095년) - 원래 가기였으며 12세 때 38세의 소식에게 와서 시첩이 되었다. 소식의 유배 생활에 동행했으며, 소성 3년(1095년) 34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자녀'''
소식은 슬하에 네 아들을 두었으나, 성인으로 성장한 아들은 세 명이다.
- 장남: 소매(蘇邁) - 왕부 소생. 1084년까지 관료가 되었다.[24]
- 차남: 소대(蘇迨) - 왕윤지 소생.
- 삼남: 소과(蘇過) - 왕윤지 소생. 소식이 하이난다오로 유배갈 때 동행했다.[81]
- 사남: 소둔(蘇遁) - 왕조운 소생. 요절(1083년 11월 15일 출생, 1년 미만 생존).
이 외에 환관 양사성이 소식의 아들이라 자칭하거나, 한림학사 손적이 소식의 사생아가 있다고 주장했으나 소씨 가문은 이를 부인했다.
'''기타'''
8. 평가
쓰촨성 미산(眉山)현 출신으로, 자(字)는 자첨(子瞻)이고 호는 동파거사(東坡居士)이다. 스스로 '''동파거사'''라고 칭했으며, 흔히 '''소동파'''(蘇東坡)라고 불린다. 시(詩), 사(詞), 부(賦), 산문(散文) 등 여러 문학 장르에 능통하여 당송팔대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소동파는 송시(宋詩)의 성격을 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대시인이자 뛰어난 문장가였다. 특히 중국 문학사에서 처음으로 호방사(豪放詞)를 개척한 대표적인 사인(詞人)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북송 시대 4대 서예가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서예가였으며, 문호주죽파(文湖州竹派)의 주요 구성원으로서 중국 문인화풍을 확립한 화가이기도 했다. 이처럼 그는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인 인물로, 중국 문예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소식의 산문과 시는 유연하고 유려하면서도 강인한 특징을 지닌다. 이는 동시대에 활동하며 정치적으로 대립했던 왕안석의 명쾌하고 다소 딱딱한 문체와는 대조적이다. 서로 다른 문체와 인생 경로를 걸었지만, 두 사람은 시문을 통해 교류하기도 했다. 관직에서 물러난 왕안석이 소식에게 보낸 시와 소식의 답시는 다음과 같다.
왕안석이 보낸 시: 북산(北山) | ||
---|---|---|
원문 | 번역문 | 통석 |
北山輸緑漲横陂 | 북산(北山)은 푸르름을 뿜어내고 둑에는 물이 넘실대네 | 북산은 녹색을 뿜어내어 밭에는 물이 넘실댄다 |
直塹回塘艶艶時 | 곧은 해자, 둥근 연못, 아름다운 시절이네 | 곧은 해자, 둥근 연못이 아름다운 계절이다 |
細數落花因坐久 | 떨어지는 꽃잎을 세는 것은 앉아있는 시간이 길어졌기 때문 | 낙화를 하나하나 세는 것은 그대와 오래 함께 했기 때문이다 |
緩尋芳草得歸遲 | 천천히 향기로운 풀을 찾아 돌아오는 길이 늦어지네 | 함께 늦도록 향기로운 풀을 찾아 걸었다네 |
소식의 답시: 차형공운(次荊公韻, 형공의 운에 따르다) | ||
---|---|---|
원문 | 번역문 | 통석 |
騎驢渺渺入荒陂 | 나귀를 타고 아득하게 거친 둑에 들어서네 | 나귀를 타고 아득하게 거친 둑에 들어섰네 |
想見先生未病時 | 생각하건대 선생이 아직 병들기 전이네 | 문득, 그대의 병들기 전 건강한 모습이 떠오르네 |
勧我試求三畝宅 | 나에게 권하네, 3묘의 집을 구해보라고 | 그대는 나에게 이 땅에 3묘 정도의 집터를 찾아보라고 권하네 |
従公已覚十年遅 | 그대를 따르기엔 이미 십 년이나 늦었음을 깨닫네 | 그대를 따라 가르침을 받는 것이 이미 십 년이나 늦었음을 깨닫네 |
- 형공(荊公)은 왕안석을 가리킨다.
이 외에도 성어 "일각천금(一刻千金)"의 유래가 된 시 춘야(春夜)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60]
9. 전기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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