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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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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수군은 한반도와 주변 해역에서 활동한 군사 세력을 의미하며, 한국과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각국에서 해상 교통과 국방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국에서는 고대부터 수군이 발달하여 발해, 신라, 고려, 조선 시대에 걸쳐 해상 방어와 무역을 담당했다. 특히 이순신은 임진왜란에서 거북선을 활용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다. 중국 수군은 양쯔강을 중심으로 발전했으며, 남북조 시대와 원, 명, 청 시대를 거치며 해상 세력과의 경쟁과 무역, 해적 방어 등에 기여했다. 일본 수군은 고대부터 해안 거주민을 중심으로 성장했으며, 헤이안 시대에는 해적 집단이 등장하여 중세 시대에는 수군으로 발전했다. 센고쿠 시대에는 각 다이묘의 수군이 활약했으며, 에도 시대에는 막부와 다이묘의 수군이 해상 치안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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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군
수군
한산도 대첩
한산도 대첩
다른 이름선당 (船黨)
경고중 (警固衆)
해적중 (海賊衆)
주요 활동해상 전투 및 연안 방어
역사
기원고대 부족 사회의 해상 활동
발전삼국시대부터 본격적인 수군 체계 발전
전성기고려 및 조선 시대
주요 전투한산도 대첩
명량 해전
노량 해전
조직
지휘 체계최고 지휘관: 수군 도독 또는 수군 통제사
각 함대 및 기지 지휘관
함선판옥선
거북선
각종 병선 및 지원선
병력 구성수군 병사
수군 장교
수군 특수 부대
역할
전투 임무해상 전투 수행 및 적 함대 격파
방어 임무연안 방어 및 해상 경비
지원 임무해상 수송
해상 정찰
해상 연락
기타
특징특수한 해상 전투 기술 및 전략
뛰어난 조선술
해상 환경에 대한 전문 지식
현대적 의미현대 해군의 기원 및 해양 안보 중요성 강조

2. 한국의 수군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반도에서는 해상 교통과 수군의 역할이 중요했다. 발해의 무왕은 732년 9월에 육군으로 당의 요서 지방을 공격하면서 장문휴가 이끄는 수군을 파견해 당의 등주(登州)를 공격하였으며, 신라는 문무왕 18년(678년) 병부(兵部)의 대감(大監)과 제감(弟監)이 맡아보던 선박 관련 업무를 분리시켜 따로 선부(船部)를 설치했다. 9세기 해적을 토벌하기 위한 목적으로 신라 정부에 의해 청해진 대사(淸海鎭大使)로 임명된 장보고(張保皐)가 청해진(淸海鎭, 지금의 완도)을 중심으로 한반도와 중국 ・ 일본에 걸치는 동아시아 규모의 대(大)해상세력을 구축하기도 했다.

두 번째 통일 왕조인 고려는 반도 남북에서 거둬들인 조세의 곡물을 수도인 개경으로 운송하기 위해 해상 루트를 이용했고, 북방 세력의 공격을 받을 때에도 바다를 활용했다. 13세기에는 고려가 몽골 제국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수도를 강화도로 옮겨 수십 년간 항전을 이어갔다. 몽골의 원나라에 복속된 후에는 숙종으로서 그들의 일본 정벌에 많은 부담을 지고 수군의 장병과 선박을 제공하라는 명령을 받아 많은 것을 잃었다. 일본 연안에서 발견된 원나라 군대의 배 대부분은 고려의 배였다.

14세기 후반이 되자 고려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왜구의 침입을 받게 되어 자주 큰 피해를 입었다. 왜구는 수백 척의 선단을 이끌고 반도 연안의 여러 도시를 불태우고 고려의 배를 습격하여 사람과 곡식을 약탈했다. 왜구는 고려 정규군과 거의 맞먹는 전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고려는 중국으로부터 받은 화약을 사용하여 왜구를 몰아붙였고, 이성계가 왜구 두목 아지발도를 토벌함으로써 전기 왜구는 궤멸되었다.[17]

고려는 수군의 병력을 유지하기 위해 원의 천호제·명의 위소제를 본받아 연해의 여러 주군의 수상 생활에 익숙한 주민을 3호 중 1호의 비율로 수군에 편입시켜 수병을 충당했고, 수병을 내지 않은 호에는 면세 대신 군인 가족의 부양을 의무화하는 수군 만호의 제도를 시행했다. 고려를 대신한 조선도 이 제도를 계승하여 연안에 수군 만호를 설치하고, 그것을 통제하는 관청으로 수군 만호부를 두었다. 또한 조선은 행정 구역인 도마다 수사(수군절도사)를 두어 각 도의 수군을 통괄하게 했다. 특히 일본에 인접한 남쪽에 위치하고 도내에 복잡한 다도해 지역을 가진 전라도경상도 두 도에는 각각 좌우 2원의 수사를 두었다. 도내 수군 만호는 각각 15만 호로 많았지만, 해상 교통의 치안 유지를 목적으로 했고, 일본 무로마치 막부의 쇠퇴로 다시 활발해진 후기 왜구(주로 중국인으로 구성)에 대처하는 것만을 염두에 두었다.

1592년에 시작된 일본군의 침략(임진왜란)에서 조선 수군은 처음에는 궤멸 직전에 놓였으나,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직접 건조를 명령했다고 전해지는 거북선을 2, 3척 포함한 수십 척의 함선을 이끌고 반격하여 일본군에 큰 피해를 입혔다.

2. 1.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시대의 수군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큰 강이 없는 한반도에서는 예로부터 해상 교통이 중요했고, 연안 지역에서는 바다 생활에 익숙한 해민들이 활동했다. 최초의 통일 왕조인 신라 시대에는 청해진 대사 장보고가 중국과 일본까지 아우르는 동아시아의 대 해상 세력을 구축했다.[17]

2. 2. 고려 시대의 수군

고려는 한국사에서 유일하게 해양 세력이 주도하여 건국한 국가였다. 궁예(弓裔)에 의해 백선장군(百船將軍)으로 임명된 왕건은 전형적인 수군 장군으로 903년 3월에 수군을 거느리고 서해(西海)를 돌아 후백제(後百濟)의 대외 교역 거점이었던 영산강(榮山江) 하구 금성군(지금의 나주) 주변 10여 군현을 평정했다. 909년에도 해군장군으로서 나주를 지키며 후백제가 오월(吳越)에 보내려던 사신의 배를 해상에서 나포하거나 진도(珍島), 고이도(古耳島) 등 서남해 지역의 해상 호족들을 소탕하기도 했다. 한편, 후백제 또한 932년에 예성강(禮成江)까지 올라와 고려의 선박 1백 척을 불사르고 저산도(猪山島)에 방목된 말 3백 필을 약취하는가 하면, 대우도(大牛島) 등을 공략해 고려의 바닷길을 6년간 끊어 놓기도 했다.

고려는 조세를 개경(開京)으로 운반하기 위해 해상 루트를 이용했고, 북방 세력의 공격에 맞서 바다를 활용했다. 11세기여진(女眞) 해적(일본 역사에 등장하는 도이의 입구 사건에 등장하는 도이가 여진 해적으로 여겨진다)이 고려와 일본의 해안을 침범해 피해를 입히는 상황 속에서 고려는 수군 활동을 강화하여, 함경도 정평의 원흥진(元興鎭)과 원산의 진명진(鎭明鎭)에 선병도부서를 설치하고, 예하 부대로서 진(鎭)과 수(戍)에 수군을 두어 여진 해적을 진압하였다.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왕건이 초기에 연안에서 사용하던 전선은 약 30여 명이 승선할 수 있었는데, 그 가운데 큰 배 10여 척은 사방이 16보(약 20m)로 배 위에 다락을 세웠고 갑판에서 을 달릴 수도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북송(北宋)의 사신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고려의 배에 순찰용 배인 순선과 관선, 소나무로 만든 송방(松舫), 배 위에 장막을 친 막선(幕船) 등의 배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고려에는 과선(戈船)이라는 전함이 있었는데, 선체에 창을 꽂아 근접전에 유리하게 만들었고 뱃머리에 쇠로 충각을 달아서 적선과 충돌해 부술 수 있도록 했다.

13세기 몽골 제국의 공격을 피해 고려가 수도를 강화도(江華島)로 옮기고 수십년에 걸친 항쟁을 지속한 것도 북방 유목민 세력인 몽골이 상대적으로 수전에 약하다는 점을 이용한 것이었다. 몽골과의 화의가 이루어지고 개경으로 환도한 뒤에는 다시 쿠빌라이 칸(원 세조)의 일본 원정을 위한 선박 제조와 병력 징발이 모두 고려에 부담되어 상당한 손실을 입기도 하였다. 1274년 1차 일본 원정을 위해 고려에서 동원된 9백 척의 전함은 모두 4개월 만에 건조되었는데, 일본 연안에서 발견된 일본원정 당시 몽골군의 배는 고려에서 제조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일본원정 이후 쿠빌라이 칸에 의해 고려의 선병은 해산되었다.

14세기 후반에 고려는 왜구의 침략에 시달렸고, 해안 지역이 완전히 공지화될 정도의 피해를 입었다. 수백 척에 달하는 선단을 거느린 왜구는 한반도 연안의 여러 도시를 불사르고, 바다와 강을 통해 조세를 운반하던 배를 습격해 쌀을 빼앗았다. 왜구를 진압하기 위해 고려 왕조는 우왕(禑王) 2년(1375년)경부터 새로이 강력한 전함을 건조하고 수군의 증강을 꾀하여, 진포와 황산에서 벌어진 왜구 토벌전에서는 수군의 활약이 고려군의 승리에 큰 역할을 했다. 창왕(昌王)대에 쓰시마를 정벌하고, 공양왕(恭讓王)조에 수군을 정비한 것은 조선왕조 수군의 기틀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2. 3. 조선 시대의 수군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큰 강이 없는 한반도에서는 예로부터 해상 교통이 중요했고, 연안 지역에서는 바다 생활에 익숙한 해민들이 활동했다.[17] 신라 시대에는 청해진 대사 장보고가 동아시아 해상 세력을 구축했다.[17]

고려는 조세 곡물을 수도 개경으로 운송하기 위해 해상 루트를 이용했고, 북방 세력의 공격에도 바다를 활용했다.[17] 13세기 몽골 제국의 침입 때는 강화도로 수도를 옮겨 항전했다.[17] 몽골의 원나라에 복속된 후에는 일본 정벌에 동원되어 많은 수군 장병과 선박을 잃었다.[17] 일본 연안에서 발견된 원나라 군대의 배 대부분은 고려의 배였다.[17]

14세기 후반, 왜구의 침입으로 큰 피해를 입었으나, 화약을 사용하여 왜구를 몰아붙였고, 이성계가 왜구 두목 아지발도를 토벌하여 전기 왜구는 궤멸되었다.[17]

고려는 수군 유지를 위해 원의 천호제·명의 위소제를 본받아 연해 주민을 수군으로 편입시켰고, 수군 만호 제도를 시행했다.[17] 조선은 이 제도를 계승하여 연안에 수군 만호를 설치하고, 수군 만호부를 두었다.[17] 또한, 도마다 수사(수군절도사)를 두어 각 도의 수군을 통괄하게 했다.[17] 특히 전라도경상도에는 좌우 2원의 수사를 두었다.[17] 이 수군들은 해상 치안 유지와 후기 왜구에 대처하는 것을 염두에 두었다.

1592년 임진왜란에서 조선 수군은 초기에는 궤멸 직전에 놓였으나,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건조한 거북선을 포함한 함선으로 반격하여 일본군에 큰 피해를 입혔다.[17]

3. 중국의 수군

중국은 '남선북마(南船北馬)'라는 말처럼, 장강을 중심으로 남방에서 수군이 발전했다.

무경총요》(武經總要)에 그려진 송대(宋代)의 누선(樓船)


== 남북조 시대와 수, 당 시대의 수군 ==

위진남북조 시대, 오대십국 시대, 남송 시대처럼 중국이 남북의 세력으로 분열되었을 때, 수로가 복잡한 남쪽 강남의 여러 나라는 수로를 천험의 요새로 삼고 강력한 수군을 양성하여 북방의 기병력을 가진 화북 여러 나라의 군대를 여러 차례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양자강을 중심으로 수로가 복잡하게 얽힌 남쪽 지역에서 수군이 발전했기 때문이다.

이후, 점차 남쪽 연안에 해외에서 무역을 위해 방문하는 외국의 해상 세력이 증가함에 따라 중국에서도 바다의 경제적 중요성이 상승했다.

== 원, 명 시대의 수군 ==

양자강을 중심으로 수로가 복잡하게 얽힌 남쪽 지역에서 수군이 발전하였다. 원 시대에는 남송 시대 강남에서 양성된 수군을 활용하여 일본동남아시아에 대한 적극적인 원정이 실시되었다. 강남에서 하북으로의 물자 해상 수송이 대대적으로 시작된 것도 원나라 시대였다.

14세기에 원을 멸망시킨 나라에서는 당시 중국 연안에서 활개 치던 왜구라고 불리는 해적 세력을 몰아낼 필요가 있었기에, 왕조를 위협할 수 있는 해상 세력의 금압책이 실시되었다. 민간의 해외 진출을 금지하고, 공적으로는 무역 루트를 조공으로만 제한하는 해금 정책을 지키고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명나라에서는 강력한 수군이 양성되었다. 명나라 제3대 영락제정화가 이끄는 대규모 해상 함대를 편성하여 동남아시아에서 인도양, 아라비아해까지 파견했지만, 이러한 국가 수군의 적극적인 해상 진출은 명청 시대를 통해 오히려 예외에 속한다.

== 청 시대의 수군 ==

청나라는 민간의 해외 진출을 금지하고, 공적으로는 무역 루트를 조공으로만 제한하는 해금 정책을 유지하였으며,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수군을 해적 방어에 활용했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 1840년의 아편전쟁에서 서구 열강의 발전된 해군력에 대패하면서 개국을 강요당했다.

태평천국의 난 진압에 강력한 수상 병력이 필요하게 되면서 청나라는 수군 재편에 대한 위기감을 느꼈지만, 영국 군인을 사령관으로 하는 함대를 청나라 해군으로 하자는 영국의 제안을 거부하고 근대 해군 설립은 연기되었다. 이후 일본의 대만 출병으로 인해 굴욕적인 강화를 맺을 수밖에 없었던 1874년에 청나라는 해양 수사 창설을 선포, 근대 해군 창설을 결정하면서 전통 수군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3. 1. 남북조 시대와 수, 당 시대의 수군

위진남북조 시대, 오대십국 시대, 남송 시대처럼 중국이 남북의 세력으로 분열되었을 때, 수로가 복잡한 남쪽 강남의 여러 나라는 수로를 천험의 요새로 삼고 강력한 수군을 양성하여 북방의 기병력을 가진 화북 여러 나라의 군대를 여러 차례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양자강을 중심으로 수로가 복잡하게 얽힌 남쪽 지역에서 수군이 발전했기 때문이다.

이후, 점차 남쪽 연안에 해외에서 무역을 위해 방문하는 외국의 해상 세력이 증가함에 따라 중국에서도 바다의 경제적 중요성이 상승했다.

3. 2. 원, 명 시대의 수군

양자강을 중심으로 수로가 복잡하게 얽힌 남쪽 지역에서 수군이 발전하였다. 원 시대에는 남송 시대 강남에서 양성된 수군을 활용하여 일본동남아시아에 대한 적극적인 원정이 실시되었다. 강남에서 하북으로의 물자 해상 수송이 대대적으로 시작된 것도 원나라 시대였다.

14세기에 원을 멸망시킨 나라에서는 당시 중국 연안에서 활개 치던 왜구라고 불리는 해적 세력을 몰아낼 필요가 있었기에, 왕조를 위협할 수 있는 해상 세력의 금압책이 실시되었다. 민간의 해외 진출을 금지하고, 공적으로는 무역 루트를 조공으로만 제한하는 해금 정책을 지키고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명나라에서는 강력한 수군이 양성되었다. 명나라 제3대 영락제정화가 이끄는 대규모 해상 함대를 편성하여 동남아시아에서 인도양, 아라비아해까지 파견했지만, 이러한 국가 수군의 적극적인 해상 진출은 명청 시대를 통해 오히려 예외에 속한다.

3. 3. 청 시대의 수군

청나라는 민간의 해외 진출을 금지하고, 공적으로는 무역 루트를 조공으로만 제한하는 해금 정책을 유지하였으며,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수군을 해적 방어에 활용했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 1840년의 아편전쟁에서 서구 열강의 발전된 해군력에 대패하면서 개국을 강요당했다.

태평천국의 난 진압에 강력한 수상 병력이 필요하게 되면서 청나라는 수군 재편에 대한 위기감을 느꼈지만, 영국 군인을 사령관으로 하는 함대를 청나라 해군으로 하자는 영국의 제안을 거부하고 근대 해군 설립은 연기되었다. 이후 일본의 대만 출병으로 인해 굴욕적인 강화를 맺을 수밖에 없었던 1874년에 청나라는 해양 수사 창설을 선포, 근대 해군 창설을 결정하면서 전통 수군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4. 일본의 수군

섬나라인 일본에서는 이웃한 한국과 마찬가지로 고대부터 연해 지역에 거주하는 아마비토(海民)라 불리던 바닷가 주민들이 수상 병력으로써 활약하였다. 고대 야마토 정권에서 일본의 수군은 아즈미베(安曇部)나 아마베(海人部), 쓰마모리 씨(津守氏) 같은 해상 씨족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국가의 배후에 오사카 만(大阪灣)이나 세토 내해(瀬戸內海)가 있었고, 기 강(紀ノ川) 유역의 기 씨(紀氏)처럼 세토 내해로 나가는 천연 항구를 가지고 배후에는 선박을 제조할 수 있는 목재 산지를 확보한 대호족들이 독자적인 수군을 편성하여 활약하기도 하였다.

헤이안 시대(平安時代)에 이르러 세토 내해에서 수상으로 운송되는 관물을 강탈하는 「해적」의 존재가 일본 역사에 등장하는데, 초기에는 해상에서의 약탈 행위를 주체로 하는 소규모 집단의 수준을 넘지 못했지만, 헤이안 시대 후기에 이르면 현지 유력자가 힘을 키워 육지에서 장원(莊園)을 개발한 영주가 무예를 가지고 가업으로 물려주며 무사 조직으로 성장한 것처럼, 해상에서도 수상 무장력을 불려 대물림하는 형태로 무사 조직이 성장했고 이들은 훗날 수군이라 불리게 되었다. 셋쓰국 와타나베쓰(渡邊津)을 본거지로 세토 내해 수군계 씨족의 도료(棟梁)가 되었던 와타나베토(渡邊党)와 그 일족으로 13세기 여몽연합군에 맞선 규슈(九州)의 마쓰라토(松浦党), 10세기 후지와라노 스미토모(藤原純友) 추토에 이요(伊予) 수군을 거느리고 활약했던 다치바나노 도야스(橘遠保), 호겐의 난 이후 센고쿠 시대까지 동쪽의 시와쿠(塩飽) 제도에서 서쪽으로는 호슈(防州) 가미노세키(上關)까지 장악한 무라카미 씨(村上氏)의 무라카미 수군이 대표적인 수군으로 알려져 있으며, 기슈(紀州) 방면에서는 벳토 씨(別當氏)로 대표되는 구마노 수군(熊野水軍)이 있어 단노우라 전투에서 활약하였고 이후 이들은 구키 수군(九鬼水軍)으로 이어졌다. 이밖에 아키(安藝)의 고바야카와 씨(小早川氏), 이요의 오치 씨(越智氏)와 고노 씨(河野氏), 미우라반도(三浦半島)의 미우라 씨(三浦氏), 쓰가루(津輕)의 안도 씨(安東氏) 등이 육지에서 무사들이 등장한 것과 동시대에 연해 토호로서 수군을 끼고 가이조쿠추(海賊衆), 즉 해적으로서 활약하게 된다.

중세 일본 해변의 소규모 토호들이 결합된 군사력이 가이조쿠추로 성장한 것은 규슈나 세토 내해, 기이반도, 이세만(伊勢灣), 도쿄만(東京灣) 등 일본 각지에 보인다. 육지의 악당(惡党)처럼 무리를 지어 약탈 행위를 벌이고, 바다를 오가는 여러 해상세력을 상대로 주요 관문을 점거하고 통행세를 걷으며 막부(幕府) 등의 공권력의 통제도 무시한 채 해상에서 독립된 군사력을 행사했으며, 14세기에 남북조 동란에도 이들은 각기 남조와 북조의 편에 서서 대립하였다.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의 슈고 다이묘(守護大名)는 주변의 가이조쿠추를 영내의 전답을 경고료(警固料) 명목으로 지급하고 그들을 끌어들여 게고추(警固衆)로 편성해 해상 군사력으로 이용했다. 센고쿠 시대에는 군사력 등의 관점에서 센고쿠 다이묘(戰國大名)의 편에 서서 적극적인 수군 편성에 나서서 게고추를 육상의 토호나 고쿠진(國人)처럼 가신 집단으로 끌어들이기도 했다. 또한 농촌 지역에서도 수군을 동원했는데, 오다와라고호조 씨(後北條氏)는 사가미 다우라(田浦)나 무사시 혼모쿠(本牧)의 어민에 대해서 가쓰후네(葛船)라 불리는 대형 고깃배로 조업하는 것을 허가하여 어업상 특권을 주는 대신 유사시 그들을 수군으로 동원하였다. 이들은 평소에는 어업에 종사하다가 고호조 씨의 필요에 응하여 수산물을 상납할 의무가 있었고, 어민과 수군이라는 양면성을 지녔다. 당시 대량의 해산물은 신선한 상태로 유지하기 곤란했는데 고호조 씨는 가신단이나 타국에서 온 사자나 객인에게 상납된 수산물로 향응했고, 그 가공품은 외교상의 증정품으로서 정치력 확대를 꾀했다.

구키 수군의 본거지였던 도바 성(鳥羽城).


아타케부네(安宅船)


센고쿠 시대 말기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세력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시마(志摩)의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를 신속시키고 구키 수군을 주체로 하는 수군을 편성했다. 이들은 나가시마(長島)에서 일어난 잇코잇키(一向一揆) 정벌이나 이시야마 전투에서 활약하고 노부나가 사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아래에 들어갔으며, 아와지(淡路)나 시코쿠(四國)를 영유하고 그 연해 영주로서 센고쿠 히데히사(仙石秀久),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등의 무장을 파견해 다스리게 했으며, 규슈 정벌이나 오다와라 공격에도 참가하였다. 센고쿠 시대 후기부터 에도 시대(江戸時代) 초기에 걸쳐 안택선(安宅船)이라 불리는 수십인에서 수백인을 태울 수 있는 대규모 전함을 보유하고 대규모 해전을 행했다. 규슈 정벌 이듬해인 덴쇼(天正) 16년(1588년) 7월 8일(양력 8월 29일), 히데요시는 도검 수거령과 함께 해상 적선 금지령(海上賊船禁止令)을 내리고 가이조쿠추의 재원이 되던 해상 관문에 대한 해상 호족들의 통행세 징수나 히데요시의 허가가 없는 해외 무역 활동을 금지하였으며, 무라카미 수군의 노토 씨(能島氏)는 모리 씨(毛利氏)의 가신이 되어 모리 수군을 이끌게 되었고 히데요시에게 직접 복속된 구루지마 씨(來島氏)는 히데요시 직속의 다이묘로서 도요토미 씨를 위한 수군을 부담할 것을 명받는 등 가이조쿠추는 도요토미 씨를 정점으로 하는 다이묘 권력의 수군 재편성을 강제당했다. 이렇게 편성된 도요토미 수군은 1592년 조선 침략(임진왜란)에 대규모 투입되기에 이른다.

에도 막부에서는 막부나 해변에 영지를 거느린 다이묘들이 후네데구미(船手組), 후네데가타(船手方), 후네데추(船手衆)라 불리는 수군을 보유했고, 막부에는 무카이 씨(向井氏), 조슈번(長州藩)의 노지마 씨(能島氏), 오와리번(尾張藩)의 지카 씨(千賀氏)처럼 가이조쿠추의 먼 후예들이 세습을 유지했다. 그러나 전쟁이 사라지고 오랜 평화 시대가 계속되면서 영내의 해상교통을 관리하고 영내 순찰이나 산킨코타이(參勤交代) 등 다이묘의 선박을 이용한 여행에서 배를 내는 정도의 역할에 그쳤다. 도요토미 씨와는 달리 해외 진출에 소극적이었던 도쿠가와 씨(德川氏)는 대형 선박 건조를 금지하고 여러 다이묘에게도 군함을 만들지 못하게 하였으며, 구루지마 씨(來島氏)를 분고 모리(豊後森), 구키 씨(九鬼氏)를 셋쓰 미다(攝津三田)로 옮기는 등 수군계 다이묘들을 차차 내륙으로 이주시켜 바다와 단절시켰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자신은 다섯 개 구니를 영유하던 시대부터 이마가와 씨(今川氏), 다케다 씨(武田氏)의 수군을 이어받은 무카이 씨(向井氏)나 고하마 씨(小浜氏), 지카 씨(千賀氏), 나카미야 씨(間宮氏) 등의 도쿠가와 수군을 편성했고 이들은 에도에 거점이 마련된 뒤부터 간토(關東)로 옮겨 그대로 에도 막부의 수군이 되었다. 막부 수군의 거점은 미우라 반도의 우라가(浦賀)와 에도의 니혼바시(日本橋)에 설치되었고, 1631년에 건조된 쇼군(將軍)의 어좌선(御座船) 아타케마루(安宅丸)를 비롯한 대형 선박을 보유하였다. 그러나 쇄국정책과 함께 막부 함대도 축소되고 노령화를 이유로 아타케마루도 해체, 본격적인 수군은 일본에서 소멸하였다.

막부 말기에 이르면 서구 열강을 본떠 막부나 여러 번에서 근대적인 함대 창설을 추진했으며, 이때에 이르러 일본에서 처음 해군(海軍)이라는 용어가 쓰이게 되어 수군이라는 이름은 과거로 사라진다. 그러나 막부 말기의 해군 창설기에는 수부(水夫)를 편성할 인원은 과거 수군이 존재하던 지방 출신이 차지하였다.

「수군(水軍)」이라는 명칭은 에도 시대 이후에 사용되기 시작한 표기이며, 그 이전의 고문서에서는 「'''해적'''」이라고 불렸다.[1] 해적이라는 명칭에는 바다의 도적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하지만, 육지에서 무력을 가진 무사(武士)들이 정권(政權)(무가정권(武家政權))의 성립에 이른 것에 대하여, 바다의 무사 집단인 해적들은 권력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해적이라는 명칭은 무법자라는 의미가 그대로 정착되었다고도 한다.[2]

따라서 해적은 권력에 편입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독자성이 강한 입장이었지만, 전국 시대가 되어 등장한 센고쿠 다이묘(戰國大名)에 대해 수군력(바다의 치안 유지 및 무력)을 제공할 수 있을 정도로 조직화된 해적들이 「'''수군(水軍)'''」이라고 불리게 되었다.[2][3] 참고로, 역사학자(歴史学者) 우타가와 다케히사(宇田川武久)는 전국 다이묘에 속한 수군에 대해 「다이묘의 직할지에서 활동 근거지가 되는 땅을 받은 군사 집단」이라고 정의하고 있다.[4] 또한, 견명선(遣明船)을 해적의 피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가 다른 해적들에게 경호의 역할을 맡긴 데서 유래하여,[5] 전국 다이묘의 수군력으로 그 가신에까지 편입된 해적들을 「'''경고중(警固衆)'''」이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6]

또한, 「'''센테구미(船手組)'''」(센테슈, 센테가타)는 에도 막부(江戸幕府)의 직제(職制)로서의 수군을 가리키며, 동시대의 여러 번의 수군도 마찬가지로 불렸다.[7]

4. 1. 고대 시대의 수군

섬나라 일본은 이웃나라 조선과 마찬가지로 고대부터 해안가에 거주하는 해민(海民)들이 수군(水軍)으로 활약했다. 고대 야마토 왕권 시대에는 안즈미베(安曇部), 아마베(海人部), 쓰모우지(津守氏)와 같은 해안 지방의 여러 부족들이 일본 수군을 떠받쳤다. 고대 일본에서 국가의 중추는 오사카 만(大阪湾)과 세토 내해(瀬戸内海)에 있었고, 기노가와(紀ノ川) 유역의 기 씨(紀氏)처럼 세토 내해에 접한 천혜의 좋은 항구를 가지고 배후에 목재 생산지를 확보한 대호족(豪族)들도 독자적인 수군을 거느리고 활약했다.

4. 2. 중세 시대의 수군

헤이안 시대에는 수상 운송되는 관물을 강탈하는 "해적"이 역사에 등장한다. 세토내해의 해적 진압 명령이 내려졌으며, 이들은 초기에는 소규모 집단이었지만, 헤이안 후기에 각지에서 지방 유력자들이 힘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해상에서도 바다 무사들이 등장했다.[1]

사쿠라이 에이지와 아미노 요시히코는 중세의 해적이 신인을 자칭하며 신역을 통행하는 배에서 초보료나 상분을 징수하는 것을 명목으로 산복이나 악당과 유사한 성격을 가진 무력 집단이었다고 설명한다.[8] 이들은 협상이 결렬될 경우 무력을 행사했으며, 상선 측도 해적의 관문을 통과할 때 예법을 취하는 등, 중세의 해적 행위는 「경고중(경호중)」이라고 불리며, 일정한 사회적 이해 하에 행해졌다.[9]

세토내해 지방에서는 셋쓰국와타나베쓰(현・오사카시추오구)의 와타나베당, 규슈의 마쓰우라당, 무라카미씨(무라카미 수군)이 대표적이었다. 기슈 지방에서는 벳토씨를 대표로 하는 구마노 수군이 대표적이며, 단노우라 등에서 활약하고 있다. 이들은 후에 구키 수군으로 이어진다. 아키의 코바야카와씨, 이요오치씨나 코노씨, 미우라 반도의 미우라씨, 쓰가루의 안도씨[10][11][12][13][14][15] 등은 육지의 무사이면서 동시에 수군을 거느린 해적중이기도 했다.

중세의 해변의 작은 토호가 결합하여 군사력을 가지게 된 해상 세력을 해적중이라고 하며, 일본 각지에서 볼 수 있었다. 해적중은 약탈 행위를 한 외에, 해상 관을 설치하여 통행료 징수나 선박 항해의 경호를 행하여, 막부 등의 공권력의 통제를 무시하고 해상에서 독립된 군사력으로 활동했다.

14세기에 해적중의 활동이 활발해져, 남북조의 혼란에는 남북 각각의 편에 나뉘어 싸웠다. 무로마치 시대가 되면서 수호 대명은 주변의 해적중을 경고중에 편성하여 해상 군사력에 이용했다.

전국 시대에는 전국 다이묘(戰國大名) 측에서 수군 편성에 대한 노력을 하고, 경고중을 가신단에 편입시켰다. 또한, 어촌에 대한 수군 동원도 실시되었다. 후호죠씨에서는 어민에게 어업상의 특권을 주는 대신 유사시에 수군으로서의 동원이 실시되었다.[16]

이와 같이 중세 말기부터 근세 초두에 걸쳐 일본의 해상 세력은 자립한 해적중에서 다이묘의 통제에 복종하는 수군으로 변화되어 간다.

4. 3. 근세 시대의 수군

오다 노부나가는 구키 요리타카를 가신으로 삼고, 구키 수군을 중심으로 수군을 편성했다. 오다씨의 수군은 장도일향일기 정벌과 이시야마 전투에 참가하여 활약했다. 노부나가의 사후, 수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계승되었다. 히데요시는 센고쿠 히데히사,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요시아키, 와키사카 야스하루 등을 파견하여 수군을 편성, 규슈 정벌오다와라 정벌에 참전시켰다.

전국 시대 후기부터 에도 시대 초기, 다이묘가 편성한 수군에는 수십 명에서 수백 명이 승선하는 거대한 배인 安宅船이 배치되었고, 거대한 배들끼리의 대규모 해전도 벌어졌다. 용골이 없는 和船의 일종이었지만, 방패판으로 방비하고 대철포와 대포 등 강력한 무장을 장착했다. 오다 노부나가가 명령하고 구키 요리타카가 건조한 철갑선이 대표적이다.

1588년 8월 29일(덴쇼 16년 7월 8일) 히데요시는 해상적선 금지령을 발포하여 해적들의 활동을 금지하고, 해상 토호들에게 영주의 지배에 복종할 것을 명령했다. 무라카미 수군의 노시마씨는 모리씨의 가신이 되어 모리 수군을 이끌었고, 도요토미씨 직속 다이묘로 승격된 라이시마씨는 도요토미씨를 위한 수군을 부담했다. 옛 해적들은 도요토미씨를 정점으로 하는 다이묘 권력의 수군으로 재편되었고, 1592년 조선 출병(분로쿠·게이초의 역)에 투입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대형 선박 건조 금지령을 발하여 500석 적재량보다 큰 군선 건조를 금지하고, 라이시마씨를 분고 모리로, 구키씨를 셋쓰 미타로 옮겨 해사에서 분리시켰다. 무카이씨, 고하마씨, 센가씨, 마미야씨로 구성된 도쿠가와 수군은 에도로 이봉 후 에도 막부의 수군이 되었다. 막부 수군의 거점은 우라가와 에도의 니혼바시에 설치되었고, 1631년 건조된 쇼군의 어좌선 安宅丸을 비롯한 거대한 배들을 보유했다. 그러나 국내 안정화에 따라 막부 함대는 축소되었고 안타쿠마루도 해체되어 본격적인 수군은 소멸한다.

에도 시대에는 막부와 다이묘가 선수구, 선수방, 선수중 등으로 불리는 수군을 가졌지만, 평화 시대에는 역할이 제한되었다. 시오사키 제도를 근거지로 한 시오사키 슈는 「인명」이라는 지위·신분을 얻어 막부로부터 보호받았고, 고도의 항해 기술을 바탕으로 막말에는 간린마루의 선원으로도 활약했다.

막말에 이르러 구미 열강을 본받아 막부와 유력 번은 근대적인 함대 창설을 추진했고, '수군'이라는 명칭은 '해군'으로 대체되었다.

4. 4. 주요 수군

일본 각지의 주요 수군은 다음과 같다.

  • 안동 수군(능대 수군) - 십삼항(十三湊), 능대, 미나토, 가시와자키(북일본해(日本海), 사도(佐渡) 해협)
  • 탄고 수군(丹後水軍)( 오키 수군(隠岐水軍) 니고 수군) - 마이즈루, 미호세키(와카사만(若狭湾), 산인(山陰) 앞바다)
  • 보소 수군(房総水軍)( 백수 수군(百首水軍) 사토미 수군) - 오카모토, 가나야(보소(房総) 앞바다)
  • 사가미 수군(相模水軍)( 미사키 수군(三崎水軍) ) - 미사키(사가미만(相模湾))
  • 스루가 수군(駿河水軍)( 에지리 수군(江尻水軍), 시미즈 수군(清水水軍) 이마가와 수군, 다케다 수군(武田水軍)) - 시미즈, 에지리, 오오하마 (엔슈나다(遠州灘))
  • 이즈 수군(伊豆水軍)( 호죠 수군(北条水軍)) - 이즈국(伊豆国), 나가하마성, 시모다성(下田城)
  • 쿠마노 수군(熊野水軍)( 쿠키 수군(九鬼水軍), 토바 수군(鳥羽水軍)) - 토바(쿠마노나다(熊野灘))
  • 아와지 수군(淡路水軍)( 나야 수군(撫養水軍), 아와 수군(阿波水軍)) - 스모토, 나야(키담 해협(紀淡海峡))
  • 시오사키 수군(塩飽水軍)( 우타즈 수군(宇多津水軍)) - 시오사키 제도(塩飽諸島), 우타즈(하리마나다(播磨灘))
  • 무라카미 수군(村上水軍)( 노시마 수군(能島水軍), 미시마 수군(三島水軍)) - 노시마(能島), 이노시마(因島), 라이시마(来島)(세토 내해(瀬戸内海))
  • 토사 수군(土佐水軍)( 토이치 수군(十市水軍), 나가소네베 수군(長宗我部水軍)) - 토이치(十市)(토사만(土佐湾))
  • 분고 수군(豊後水軍)( 사가세키 수군(佐賀関水軍), 사이키 수군(佐伯水軍), 쿠니토 수군(国東水軍) 오토모 수군) - 잇치야, 사가세키(佐賀関), 사이키(분고 수도(豊後水道)), 마다마, 타케다쓰(竹田津)
  • 고토 수군(五島水軍)( 히라도 수군(平戸水軍) 마쓰우라 수군) - 에가와(江川), 히라도(平戸), 고토 열도(五島列島)(겐카이나다(玄界灘))
  • 보쓰 수군(坊津水軍)( 시마즈 수군) - 보쓰(坊津)(오스미 해협(大隅海峡))
  • 에도 수군(덕川 수군) - 미사키(사가미, 엔슈, 산리쿠, 사도)
  • 하코다테 수군(가키자키 수군) - 하코다테
  • 기센누마 수군(카사이 수군) - 기센누마
  • 오오하마 수군(마쓰다이라 수군) - 오오하마
  • 시마 수군 - 시마
  • 와지마 수군(요시미·하타케야마 수군) - 와지마
  • 오쓰 수군(키쓰 수군) - 키쓰, 오쓰
  • 시모쓰이 수군(우라가미 수군) - 시모쓰이
  • 모리 수군(일부 무라카미 수군·코바야카와 수군) - 세토 내해
  • 아카마가세키 수군(야시로지마 수군·도 수군) - 야시로지마, 칸몬 해협
  • 이마바리 수군(코노 수군, 라이시마 무라카미 수군) - 이마바리, 라이시마
  • 이타지마 수군(코노 수군) - 이타지마
  • 모지 수군 - 모지, 칸몬 해협
  • 마나베 수군 - 카사오카 제도(세토 내해)
  • 모리사키 수군
  • 도요토미 수군

4. 5. 해적 출신 인물

일본의 해적 출신 주요 인물로는 구키 요시타카, 무라카미 다케요시,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이 있다.

  • 쿠키 요시타카는 구키 조우류(????-1560)의 아들로 1542년에 태어나 1600년에 사망했다.
  • 무라카미 다케요시는 무라카미 수군의 주요 인물이다.
  • 무라카미 모리키요는 미시마 무라카미 수군 출신이다.
  • 무라카미 요시아키는 노시마 무라카미 수군 출신이다.
  • 무라카미 아키타다와 무라카미 스에야스는 이노시마 무라카미 수군 출신이다.
  • 무라카미 아키나가와 무라카미 미치야스(1519-1567)는 라이지마 무라카미 수군 출신이다.
  • 무라카미 요시타다, 무라카미 무네키(1533-1604), 무라카미 모토요시(????-1600), 무라카미 다카시게는 노시마 무라카미 수군 출신이다.
  • 이노시마 요시미쓰(무라카미 요시미쓰)는 이노시마 무라카미 수군 출신이다.
  • 라이지마 미치쓰네(1561-1597)와 토케이 미치유키(1557-1594)는 라이지마 무라카미 수군 출신이다.
  • 라이지마 나가치카는 라이지마 무라카미 수군 출신이다.
  • 코다마 나리카타(1513-1586)와 코다마 나리히데는 모리 수군 출신이다.
  • 노미 무네카쓰(1527-1592)는 고바야카와 수군 출신이다.
  • 시마 요시토모는 노시마 무라카미 수군 출신이다.
  • 이소카네 가게미치와 토리이 스케나가는 이노시마 무라카미 수군 출신이다.
  • 와키자카 야스하루에 대한 정보는 제공되지 않았다.

4. 6. 수군, 해적과 관련된 인물

후지와라노 스미토모(藤原純友)는 헤이안 시대의 귀족으로 해적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던 인물이다. 941년에 사망하였다. 구마노 탐마스(熊野湛増)는 헤이안 시대 말기부터 가마쿠라 시대 초기의 수군 지휘관으로, 1130년에 태어나 1198년에 사망하였다. 왕직(王直)은 명나라 시대의 밀무역 상인이자 해적으로, ?년에 태어나 1559년에 사망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으로, 수군을 이끌고 임진왜란에 참전했다. 1555년에 태어나 1600년에 사망하였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는 센고쿠 시대부터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무장으로, 모리 수군을 이끌었다. 1533년에 태어나 1597년에 사망하였다.

참조

[1] 간행물 "日本最大の海賊"能島村上氏 今治市村上水軍博物館
[2] 웹사이트 わがふるさとと愛媛学V ~平成9年度 愛媛学セミナー集録~ 日本史の中の水軍 http://www.i-manabi.[...]
[3] 웹사이트 水軍 https://kotobank.jp/[...]
[4] 서적 "厳島"を制した毛利直轄水軍 学習研究社 1988
[5] 웹사이트 海上警固役 https://kotobank.jp/[...]
[6] 웹사이트 海賊衆 https://kotobank.jp/[...]
[7] 웹사이트 船手組 https://kotobank.jp/[...]
[8] 서적 職人と芸能 吉川弘文館 1994
[9] 서적 海賊たちの中世 吉川弘文館 1998
[10] 서적 エゾの歴史 講談社学術文庫 2006
[11] 서적 道南十二館の謎 北海道出版企画センター 2017
[12] 웹사이트 函館市史 通説編1 通説編第1巻 第3編 古代・中世・近世 第1章 安東氏及び蠣崎氏 第3節 中世期の商品流通 https://adeac.jp/hak[...]
[13] 웹사이트 五所川原市の地域経済循環分析 https://www.chisou.g[...]
[14] 웹사이트 十三湊遺跡 http://www.go-kankou[...] 五所川原観光協会 2018-06-10
[15] 웹사이트 日持上人開教の事績-津軽十三湊をめぐって https://genshu.nichi[...]
[16] 서적 日本中世の贈与と負担 校倉出版
[17] 논문 東アジア海域と倭寇 9 世紀末の新羅海賊との比較史的考察を通して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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