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혁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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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혁로는 1851년 충청남도 아산에서 태어나 무과에 급제하고, 개화 사상에 영향을 받아 갑신정변에 참여했다. 정변 실패 후 일본으로 망명하여 김옥균 등을 도왔고,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 육군 부령과 포병국장을 역임했다. 1895년 명성황후 암살 미수 사건과 을미사변에 연루되어 비판을 받았으며,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관여하기도 했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관료로 활동하다가, 한일 병합 후 경기도 참여관, 충청북도 지사 등을 지냈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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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혁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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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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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류혁로 |
한자 | 柳赫魯 |
로마자 표기 | Yu Hyeokro |
별명 | 호는 설악(說嶽), 설강(雪岡), 설강산인(雪岡山人), 일본 이름은 야마다 유이이치 |
출생 | 1851년 3월 9일 |
출생지 | 조선 충청남도 홍주 |
사망 | 1945년 5월 15일 |
사망지 | 일제강점기 조선 경성부 |
경력 | |
복무 | 조선 오위도총부 |
복무 기간 | 1873년 ~ 1884년 12월 12일 |
최종 계급 | 오위장 |
근무 | 오위도총부, 병조 조련국, 대한제국 육군 |
지휘 | 오위도총부, 병조 조련국, 대한제국 육군 포공국장 |
관료 경력 | |
군사 경력 | |
소속 | 대한제국 육군 |
복무 기간 | 1894년-1907년 |
최종 계급 | 육군 부령 |
충성 | 대한제국 |
참전 | 갑신정변 |
기타 정보 | |
직업 | 관료, 장교 |
2. 생애
조선의 군인 가문에서 태어난 유혁로는 1876년 무과에 급제하였다.[1] 김옥균 등 개화파 인사들과 교류하며 아버지 유상오와 함께 개화 사상에 동조하기 시작했다.[2] 1882년에는 박영효가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될 때 수행원으로 동행하여 일본의 발전상을 접했다.[1] 청나라의 조선 내정 간섭에 비판적인 입장을 가졌으며, 이는 1884년 갑신정변에 참여하는 주요 동기가 되었다.[1] 그는 정변 과정에서 동지들 사이의 정찰 및 연락 임무를 수행했으나, 정변이 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실패하자 김옥균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1][3] 일본 체류 중에는 山田唯一|야마다 유이치일본어라는 일본 이름을 사용했다.[3]
1894년 박영효와 함께 귀국하여[3] 1895년 군부 초대 포병국장에 임명되었으나,[1][4] 친러 내각이 수립되자 신변의 위협을 느껴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3] 두 차례에 걸친 일본 망명 기간 동안 유혁로는 군사 및 군사 기술에 큰 관심을 보였다.[1] 이후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도 잠시 참여하였다.[5]
1907년 다른 갑신정변 생존자들과 함께 귀국하여 서북영림창 관리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12월에는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추천으로 평안북도 관찰사가 되었다. 1908년에는 친일 단체인 대동학회에 가입하며 본격적인 친일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1]
1910년 한일 병합 이후에는 조선총독부 체제 하에서 경기도 참여관으로 임명되었고,[1] 1914년부터 1916년까지는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이 주도한 토지 조사 사업에 협력했다.[3] 1916년 3월에는 충청북도 지사로 임명되어 식민 통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17년 6월 관직에서 물러나 사업가로 활동하는 한편,[1] 1921년부터 1940년까지 중추원 참의를 여러 차례 역임하며 식민 통치 기구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특히 1926년에는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조직된 친일 단체 동민회의 회원이 되기도 했다.[3][6]
사후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일제강점기 행적을 근거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했다.[1]
2. 1. 생애 초반
조선 군인의 아들로 태어난 유혁로는 1876년 무과에 급제하였다.[1] 김옥균 등의 개화파 인사들과 교류하며 그의 영향을 받아 아버지 유상오와 함께 개화 사상에 동조하기 시작했다.[2] 1882년에는 박영효가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될 때 수행원으로 동행하여 일본의 발전상을 접했다.[1] 당시 청나라의 조선 내정 간섭에 비판적인 입장을 가졌으며, 이는 1884년 갑신정변에 참여하는 주요 동기가 되었다.[1] 그는 정변 과정에서 개화당 동지들 사이의 정찰 및 연락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정변이 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하자, 김옥균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1][3] 일본 체류 중 유혁로는 야마다 유이치(山田唯一|야마다 유이치일본어)라는 일본 이름을 사용했다.[3]2. 1. 1. 초기 활동
1851년 3월 9일 충청남도 아산군 온양읍 송하리(현재의 아산시 온양동)에서 식송만호(植松萬戶) 등을 지낸 무관 유상오(柳相五)와 목천 상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적지는 아산군 영인면이었다. 그의 집안은 본래 한성의 양반 가문이었으나 고조부 유흡(柳潝) 이후 관직에 오르지 못해 몰락했다가, 아버지 유상오가 무관이 되면서 다시 가세를 일으켰다. 아버지 유상오는 하급 무관이었으며 초기 개화당 형성에 참여한 인물이었다. 일설에는 유혁로가 개화당에 가담하면서 아버지 유상오가 은퇴했다고도 전해진다.[8] 유혁로의 정확한 출생 연도에 대해서는 1851년생 설 외에도 1852년생, 1853년생, 1855년생, 1862년생, 1863년생 등 여러 주장이 있다.어린 시절 한성으로 이주하여 역관인 오경석의 문하에서 공부했으며, 이후 박규수의 문하에도 출입하며 어윤중, 김윤식, 김홍집, 유길준, 윤웅렬 등 당대의 개화 지식인들과 교류했다. 나중에는 박규수 문하에 새로 들어온 박영효, 김옥균, 서광범, 서재필, 윤치호 등 젊은 개화파 인물들과도 만나 관계를 맺었다. 아버지 유상오 역시 박규수, 오경석 등과 교류하며 개화당에 참여했기에, 유혁로는 자연스럽게 개화파의 일원이 되었다. 김옥균의 활동은 유혁로와 그의 부친이 개화 사상에 더욱 동조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2]
초기에는 문과에 여러 차례 응시했으나 낙방하였다. 이후 무관의 길을 선택하여 1873년(고종 10년) 3월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는 기록[8]과 1876년에 무과에 급제했다는 기록[1]이 있다. 1879년(고종 16년) 8월에는 개성에 있는 후릉의 능을 보수하는 공사에 감관(監官)으로 참여하여 공로를 인정받아 6품으로 승진했다. 그해 11월에는 장위영의 영관(領官)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훈련원 부봉사를 지냈다.
1882년(고종 19년) 7월부터 8월까지 수신사(修身使)로 임명된 박영효와 어윤중의 수행원 자격으로 윤웅렬 등과 함께 일본으로 파견되었다.[1] 이들은 그해 9월 도쿄를 방문하며 일본의 발전상을 직접 목격했다. 이는 유혁로가 개화 사상을 더욱 심화시키는 중요한 경험이 되었다. 청나라의 조선 간섭에 반대하며 개화 사상을 더욱 발전시켰다.[1]
2. 1. 2. 관료 생활 초반
1851년 3월 9일 충청남도 아산군 읍내면 송하리(현재의 아산시 온양동)에서 식송만호(植松萬戶) 등을 지낸 무관 유상오(柳相五)와 목천 상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1] 그의 출생 연도에 대해서는 1851년 외에도 1852년, 1853년, 1855년, 1862년, 1863년 등 여러 설이 있다. 본래 한성의 양반 가문이었으나 고조부 유흡(柳潝) 이후 관직에 오르지 못해 가세가 기울었다가, 아버지 유상오가 무관이 되면서 다시 집안을 일으켰다. 아버지 유상오는 하급 무관이었지만 초기 개화당 형성에 참여한 인물이었다.[2] 일설에는 유혁로가 개화당에 가담하면서 아버지 유상오가 은퇴했다고도 한다.[8]어려서 한성으로 올라와 역관 오경석의 문하에서 공부했으며, 나중에는 박규수의 문하에도 드나들며 어윤중, 김윤식, 김홍집, 유길준, 윤웅렬 등과 교류했다. 이후 박규수의 문하에 새로 들어온 박영효, 김옥균, 서광범, 서재필, 윤치호 등 젊은 개화파 인물들과도 만나 관계를 맺었다. 아버지 유상오 역시 박규수, 오경석 등과 교류하며 개화당에 참여했기에, 유혁로도 자연스럽게 개화파의 일원이 되었다.
글을 배워 문과에 여러 차례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1873년(고종 10년) 3월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1] 1879년(고종 16년) 8월, 개성에 있는 후릉 보수 공사에 감관(監官)으로 참여하여 6품으로 승진했다. 그해 11월에는 장위영 영관이 되었고, 이후 훈련원 부봉사를 거쳤다. 1880년(고종 17년) 12월 19일 오위장에 임명되었으나, 열흘 뒤인 12월 29일 병을 이유로 체직되어 첨지중추부사로 자리를 옮겼다.
1880년 무렵 개화당이 조직될 때 유대치,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그리고 그의 아버지 유상오 등이 중심인물이었다.[9] 유혁로는 처음에는 개화파 인사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었으나, 갑신정변 무렵에는 오위장(五衛將) 신분으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개화당에 본격적으로 참여하여 활동했다.[10] 당시 개화당의 핵심 인사는 김옥균을 중심으로 박영효, 서광범, 아버지 유상오, 유대치 등이었다.[11] 집안의 세력은 크지 않았지만, 유혁로는 김옥균과 가깝게 지냈다.
1882년 박영효가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될 때, 유혁로는 어윤중, 윤웅렬 등과 함께 수행원으로 선발되어 동행했다.[1] 그해 8월 9일 한성을 출발하여 9월 2일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했고, 도쿄 방문 등을 통해 일본의 발전된 문물을 접한 뒤 1883년 초에 귀국했다.
1883년(고종 20년) 4월, 그는 관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다시 일본으로 가게 되었다. 나이가 많고 유력 가문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제외될 뻔했으나, 신식 군대를 양성하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을 설득하여 기회를 얻었다. 김옥균에게서 학비를 지원받아 서재필, 서재창 등 61명의 유학생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1883년 5월, 유혁로는 서재창, 신응희, 정행징, 임은명, 신중모, 윤영관, 하응선 등과 함께 일본 토야마 육군하사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 지식과 기술을 배웠다.[17] 1884년 1월에는 게이오 의숙을 수료한 서재필과 이규완 등도 이 학교에 합류했다. 그러나 유학생들은 학자금 부족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1884년 5월 귀국하게 되었다.[17] 당시 광주유수로 있던 박영효는 일본에 유학 중이던 신복모, 이규완, 유혁로, 정난교 등 사관생도들을 귀국시켜 600명 규모의 신식 군대 양성에 착수했고,[15] 유혁로는 병조 조련국 교관으로서 이 과정에 참여했다.
1884년 7월부터 유혁로는 김옥균, 박영효 등과 함께 갑신정변 준비에 가담했다. 그는 청나라의 간섭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1] 정변 계획이 수립될 당시, 그는 고용된 일본인 자객 쇼시마(小心和) 등과 함께 통신 연락 및 정찰 임무를 맡았다. 김옥균은 고영석과 유혁로를 정보 담당으로 지정하여 청나라 군대와 민씨 세력의 동향뿐 아니라 일본 공사관과 영사관 군대의 움직임까지 면밀히 살피도록 했다.[16] 그는 정변 당시 정란교, 이주회, 이규완 등과 함께 박영효와 서광범 계열 인물로 분류되었다.[14]
2. 1. 3. 일본 유학 생활
1882년(고종 19년) 7월부터 8월까지 수신사(修身使) 박영효, 어윤중 등의 수행원으로 윤웅렬 등과 함께 처음 일본을 방문하였고, 그해 9월 도쿄 방문에 동행하였다.[1]1884년 청나라의 조선 간섭에 반대하며 갑신정변에 참여하였으나[1], 정변이 청나라 군대에 의해 3일 만에 진압되자 김옥균, 박영효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일본 체류 중에는 야마다 유이치(山田唯一일본어)라는 일본어 이름을 사용하였다.[3] 그는 1894년 박영효와 함께 귀국할 때까지 일본에 머물렀다.[3]
귀국 후 1895년 군부 초대 포병국장에 임명되었으나,[1][4] 친러 내각이 수립되자 신변의 위협을 느껴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3] 두 차례에 걸친 일본 망명 및 체류 기간 동안 유혁로는 군사 및 군사 기술에 큰 관심을 보였다.[1] 이후 1907년 갑신정변 생존자들과 함께 다시 귀국하였다.
2. 2. 갑신정변
유혁로는 1884년 갑신정변에 참여한 개화파 인물이다. 청나라의 조선 간섭에 반대하여[1] 정변 계획 단계에서 고영석과 함께 정찰 및 통신 연락 임무를 맡았다.[18] 12월 4일 우정국 낙성식 축하연을 계기로 정변이 발발하자, 부대를 이끌고 궁궐로 진입하여 다른 개화파 부대들과 합류해 작전을 수행했다. 그러나 정변은 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로 돌아갔고, 유혁로는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 다른 주도 인물들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다.[3][26] 일본 망명 중에는 山田唯一|야마다 유이치jpn라는 일본식 이름을 사용했다.[3]2. 2. 1. 갑신정변 전야
1884년 12월 2일 새벽 2시, 유혁로는 박영효의 집을 방문하여 다른 개화파 인사들과 함께 갑신정변 실행을 위한 사전 준비 모임에 참여했다. 이 자리에서 거사 당일 각 부문의 담당자와 임무가 최종 결정되었는데, 유혁로는 고영석과 함께 정찰 및 통신 임무를 맡았다.[18]12월 4일 오후 6시, 우정국 낙성식 축하연 직후 갑신정변이 시작되자 유혁로는 미리 대기하고 있던 장사들로 부대를 조직하여 궐 안으로 진입했다. 그의 부대는 병력이 많지 않아 일본인 쇼시마가 이끄는 무사들과 합세하여 하나의 부대를 이루었다. 궐 안에서는 서재필, 서재창, 이규완 등이 이끄는 부대들과 합류하여 길을 나누어 기존 조선 관군을 제압하는 작전을 수행했다. 우정국에 민영익이 나타나자, 유혁로는 서재필, 서재창, 윤경순, 윤경완, 이규완 등과 함께 자신이 이끌던 부대에서 일부 병력을 차출하여 우정국 입구 주변과 나무 위 등에 매복시켰다.

(홍영식과 박영효가 중앙, 그밖에 좌우로 좌측은 김홍집, 스커더 홍콩영사, 전승균, 이조연, 목인덕, 담경지 청국공사, 민영익, 한규직, 우측으로는 푸트 공사, 윤치호, 스기무라 일본공사, 김옥균, 일본 통역, 민병석, 진수당 청국공사, 아주돈 영국영사 순)
오후 8시경, 별궁 방화를 담당했던 이규완, 윤경순 등이 방화에 실패하자 통신 담당이었던 유혁로는 이 사실을 우정국 연회장에 있던 김옥균에게 급히 보고했다.[19] 보고 내용은 "별궁 방화가 발각된 까닭인지 포졸들의 경계가 삼엄하여 초가의 방화도 어렵다"는 것이었다.[20] 보고를 받은 김옥균은 당황했으나 이내 별궁 대신 이웃집에 불을 지르라고 지시했다.[19] 이때 유혁로는 "이웃집에 불을 지르는 것도 좋으나, 우리들이 연회석상에 들어가 간당(수구파 요인을 지칭)들에게 손을 대는 것은 어떻습니까?"라고 제안했다.[19] 그러나 김옥균은 연회장에는 조선 사람뿐 아니라 외국 사신들도 섞여 있어, 혼란 중에 외국 사신을 다치게 하면 일이 실패할 수 있다며 유혁로의 제안을 거절하고 원래 지시대로 다른 곳에 불을 지르라고 명령하였다.[19]
이에 유혁로는 돌아가 김옥균의 지시를 전달했고, 장사들은 이웃집에 불을 지를 준비를 하였다.[19] 일부는 우정국 앞 개천에 몸을 숨기고 요인이 나오기를 기다렸다.[21] 이규완, 윤경순 등은 윤치호의 집 이웃과 별궁 건너편 서광범의 집 이웃에 방화했다.
한편, 윤치호의 집 근처에 아버지 민태호의 집이 있던 민영익은 화재 소식을 듣고 우정국을 나섰다가 서재창이 이끄는 분견대와 이규완, 윤경순 등에게 습격당했다. 부상을 입고 우정국으로 되돌아간 민영익은 묄렌도르프 등의 부축을 받고 다시 우정국을 나섰는데, 이때 유혁로는 쇼시마가 이끄는 무사들과 함께 다시 민영익을 습격했으나 이번에도 제거에 실패했다.
이후 유혁로는 이규완, 윤경수, 최은종, 고영석, 황용택, 이인종 등 다른 개화파 동지들과 함께 박영효의 집에 모여 다음 지휘 명령을 기다렸다.[22]
2. 2. 2. 별궁 방화 활동
1884년(고종 20년) 12월 2일 새벽, 유혁로는 박영효의 집에 모여 갑신정변 거사를 위한 최종 준비에 참여했다. 이때 유혁로는 고영석과 함께 정찰 및 통신 임무를 담당하기로 결정되었다.[18]12월 4일 오후 6시 우정국 낙성식 직후 갑신정변이 시작되자 유혁로는 별궁 일대에서 대기하던 장사들을 이끌고 궁궐 안으로 진입했다. 유혁로 부대는 수가 적었기 때문에 일본인 쇼시마가 이끄는 무사들과 합세하여 1개 부대를 이루었다. 이들은 서재필 부대, 서재창 부대, 이규완 부대 등과 함께 궁궐 내 관군을 제거하는 작전을 수행했다. 우정국에 민영익이 나타나자, 유혁로는 서재필, 서재창, 윤경순, 윤경완, 이규완 등과 함께 각 부대에서 소규모 분견대를 차출하여 우정국 입구 주변과 나무 위에 매복하기도 했다.
(홍영식과 박영효가 중앙, 그밖에 좌우로 좌측은 김홍집, 스커더 홍콩영사, 전승균, 이조연, 목인덕, 담경지 청국공사, 민영익, 한규직, 우측으로는 푸트 공사, 윤치호, 스기무라 일본공사, 김옥균, 일본 통역, 민병석, 진수당 청국공사, 아주돈 영국영사 순)]]
오후 8시경, 별궁에 불을 지르기로 계획했던 이규완, 윤경순 등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다. 통신 담당이었던 유혁로는 이 실패 소식을 우정국 연회장에 있던 김옥균에게 급히 보고했다.[19] 보고를 받은 김옥균은 당황했으나, 별궁 대신 이웃집에 불을 지르라고 지시했다.[19] 이때 유혁로는 "이웃집에 불을 지르는 것도 좋으나, 우리들이 연회석상에 들어가 간당들에게 손을 대는 것은 어떻습니까?"라며 연회장에 직접 들어가 사대당 요인들을 공격하는 방안을 제안했다.[19]
그러나 김옥균은 "그것은 그렇지 않아. 이 연석에는 조선 사람만이 아니요, 외국 사람들이 섞여 있으므로 만약 혼잡한 가운데 잘못하여 외국사신을 다치게 한다면 우리 일은 그만 실패하고 말 것이다. 내 말대로 빨리 딴 곳에 불을 지르라"고 말하며 유혁로의 제안을 반대하고, 다시 이웃집 방화를 명령하였다.[19]
유혁로는 돌아가 김옥균의 명령을 전달했고, 장사들은 이웃집에 불을 지를 준비를 하였다.[19] 이규완, 윤경순 등은 윤치호의 집 이웃과 별궁 건너편 서광범의 집 이웃에 방화했다. 일부 병력은 우정국 앞 개천 가운데에 몸을 숨기고 요인이 나오기를 기다렸다.[21]
방화로 인한 혼란 중에 우정국을 나서던 민영익은 아버지 민태호의 집 근처에서 서재창의 분견대와 이규완, 윤경순의 습격을 당해 부상을 입고 우정국으로 되돌아갔다. 이후 묄렌도르프 일행의 부축을 받고 우정국을 나섰다. 유혁로는 쇼시마가 이끄는 무사들과 함께 민영익을 습격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이후 유혁로는 이규완, 윤경수, 최은종, 고영석, 황용택, 이인종 등과 함께 박영효의 집에 모여 다음 지휘 명령을 기다렸다.[22]
2. 2. 3. 정변의 실패
1884년 12월 4일 오후 6시 우정국 낙성식 직후 갑신정변이 발발하자, 유혁로는 별궁 일대에 모인 장사들로 부대를 조직하여 이끌고 궁궐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부대는 수가 적었기 때문에 일본인 쇼시마가 이끄는 무사들과 합세하여 하나의 부대를 이루었다. 궁궐 내에서는 서재필 부대, 서재창 부대, 이규완 부대와 함께 길을 나누어 관군을 제거하는 작전을 수행했다. 우정국에 민영익이 나타나자 유혁로는 서재필, 서재창, 윤경순, 윤경완, 이규완 등과 함께 각자 이끄는 부대에서 소규모 분견대를 차출하여 우정국 입구 주변과 나무 위에 매복시키기도 했다.국왕 내외가 다른 곳으로 피신한 이후, 그는 고영석(高永錫)이 이끄는 부대 및 일본인 자객 쇼시마 등과 함께 덕수궁, 창덕궁 등의 정찰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민씨 일족이 청나라 측과 연락하여 군대를 끌어들이면서 정변은 실패로 돌아갔다. 12월 7일 청나라 군대가 한성부에 도착하여 국왕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자, 홍영식과 박영교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자신들이 국왕 내외를 모실 테니 다른 동지들에게 피신하라고 권고했다.
국왕을 보낸 후, 일본군 무라카미 중대장은 퇴각 대형을 편성했다. 일개 소대를 선두에 세우고 다케조에 신이치로 공사,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이규완, 유혁로, 정란교, 신응희, 변수 등을 중앙에 위치시켜 행진을 시작하였다.[23] 유혁로는 일행과 함께 창덕궁 북관왕묘를 거쳐 북문에서 변장하고 빠져나와 일본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 개화당 핵심 인물 4명과 변수, 유혁로, 이규완, 신응희, 정란교 등 5명은 다케조에 공사를 따라 이날 오후 9시경 일본 공사관에 도착했다.[24] 피신 과정에서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신응희, 이규완, 정란교, 유혁로, 변수 등 살아남은 개화파 인사들은 몸에 맞지 않는 서양식 옷을 입어야 했다.[25]
1884년 12월 12일, 일본 공사 다케조에의 주선으로 유혁로와 일행은 인천에 주재하던 조선 주재 일본 영사관 직원 고바야시의 도움을 받아 제일은행 지점장 기노시타의 집에 숨었다. 그러나 묄렌도르프가 이끄는 추격대가 다가오자, 기노시타의 도움으로 일본 옷으로 갈아입고 같은 날 인천으로 다시 피신했다.
결국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유혁로, 변수 등 생존자들은 여러 어려움 끝에 인천에서 일본 상선 치도세마루(千歲丸)를 타고 일본으로 망명했다.[26] 이들의 망명 이야기는 훗날 1942년 7월 조용만의 단편 소설 배 안에서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2. 3. 일본 망명 생활
갑신정변이 청나라 군대에 의해 진압되자 유혁로는 김옥균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다.[1] 일본 체류 중 유혁로는 야마다 유이치(山田唯一|야마다 유이치일본어)라는 일본 이름을 사용했으며,[3] 망명 생활 동안 조선 정부가 보낸 자객들의 위협에 직면하기도 했다. 그는 1894년 박영효와 함께 귀국했으나,[3] 1895년 친러 내각이 수립되자 다시 일본으로 망명길에 올랐다.[3] 두 번째 망명 기간 동안 유혁로는 군사 및 군사 기술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다.[1] 1907년, 그는 1884년 갑신정변의 다른 생존자들과 함께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2. 3. 1. 피신과 일본 망명
갑신정변 실패 후, 유혁로는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의 도움을 받아 일본 공사관에 피신했다가 쓰기무라의 집에 은신했다. 이후 정란교, 이규완, 서재필, 신응희 등과 함께 인천에서 스치 가츠자부노우(十勝三郞)가 선장으로 있는 배 천세환(千歲丸) 호를 타고 일본으로 망명길에 올랐다.망명 도중인 12월 13일, 일행은 묄렌도르프의 추격을 받았다. 묄렌도르프는 외무독판 조병호(趙秉鎬)와 인천감리 홍순학(洪淳學)을 대동하고 나타나 '국적'(國敵, 갑신정변 주동자들을 지칭)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이때 배에 함께 타고 있던 다케조에 신이치로는 김옥균, 서재필, 박영효, 이규완 외 다른 일행에게 배에서 내리라고 요구했다. 절체절명의 순간이었으나, 천세환 선장 스치 가츠자부노우가 다케조에의 무책임함을 꾸짖고 일행을 배 밑 석탄실에 숨겨준 뒤 추격자들에게 그런 사람이 없다고 말하여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일본에 도착한 뒤 유혁로는 이규완, 서재필 등과 함께 자객들의 위협에 노출된 박영효와 김옥균을 경호하는 역할을 맡았다.
일본에서 망명 생활을 시작한 갑신정변 주도 세력은 신변 보호를 위해 일본식 이름을 사용했다. 유혁로는 야마다 유이이치(山田唯一)라는 이름을 썼다. 일본의 이노우에 가오루는 자서전에서 배의 선원 쓰지 후치주로(十藤十郞)가 나가사키에서 김옥균 일행과 헤어질 때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회상했다.[7] 스치 후치주로는 이들이 조선 이름으로 생활하다가 자객에게 발각될 것을 우려하여 "당신들이 일본에서 망명 생활을 하게 되면 조선 이름을 가지고는 살기가 불편할 것이오. 그러니 내가 기념으로 이름을 지어 주고 싶소."[7]라며 일본식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당시 망명자들이 사용한 일본식 이름은 다음과 같다.[27][7]
이러한 개명 과정과 이름들은 이노우에 가오루의 자서전에도 기록되어 있다.[7]
2. 3. 2. 일본 망명 생활 초기
일본 망명 생활 중 그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하생이며 게이오 의숙 출신인 스나가(1868~1942)의 후원을 받았다. 게이오 의숙을 졸업한 스나가는 낭인 조직 현양사에 들어가 활동하면서, 김옥균, 박영효, 신응희, 정난교, 유혁로, 우범선, 이두황 등 조선인 망명객들과 두터운 교류를 가졌고, 그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28] 사노에 있는 그의 대저택에는 조선에서 온 망명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28]한편 갑신정변 참여자의 가족과 측근들에게는 연좌제가 적용되어 대대적인 체포와 고문, 처단이 자행되었다.[26] 일본 체류 중 가족과 친구들이 연좌제로 단죄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유혁로는 조선 정부 타도를 다짐한다. 일본에 망명한 이들 중 김옥균의 시중은 유혁로가, 박영효는 이규완이, 서광범의 시중은 그의 13촌 조카 서재필이 각각 들었다. 유혁로는 김옥균의 수발을 들었으나, 이규완의 심한 반발로 각자 자기 방에서 따로 생활하게 되었다.
그 뒤 조선 정부에서는 이들의 소환 문제를 일본 측에 수차례 제기했다. 그러나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장갑복과 지운영 등 자객을 파견해 김옥균과 박영효를 살해하고자 했다.[26]
2. 3. 3. 1차 김옥균 암살 미수범 격퇴

1885년 6월, 조선의 고종과 명성황후는 김옥균 암살을 위해 장은규(일명 장갑복)에게 밀명을 내려 일본으로 보냈다. 장은규는 의친왕의 생모인 귀인 장씨의 친정오빠였다. 유혁로는 장은규가 귀인 장씨의 오빠라는 사실을 알고 김옥균에게 그를 경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옥균은 유혁로의 말을 듣고 장은규를 피했고, 이로써 첫 번째 암살 시도는 미수에 그쳤다.
이에 조선 조정은 다시 역관 출신의 온건 개화인사였던 지운영을 자객으로 파견했다. 통리기무아문 주사로 일하던 중 밀지를 받은 지운영은 1886년 2월 23일 인천을 떠나 나가사키를 거쳐 고베에 도착했다.[29] 하지만 김옥균은 지운영 역시 자객임을 간파하고 당시 고베를 떠나 도쿄에 숨어 지내고 있었다. 도쿄에 도착한 지운영은 이세강(ja) 여관에 머물며 근처에 살던 김옥균에게 편지를 보내 만나자고 요청했다.[30] 과거 함께 일했던 사이였기에 김옥균이 응할 수도 있었지만, 장은규 사건을 겪었던 유혁로는 지운영 역시 자객일 가능성을 의심하고 이를 김옥균과 박영효에게 알렸다. 김옥균 역시 지운영의 정체에 의문을 품고 서신을 보내 면담을 거절했다.[30][31]
: "나는 국사범이므로 만나면 도리어 귀찮아질 것이네."[32]
김옥균은 유혁로, 신응희, 정난교 등 함께 망명 중이던 동지들에게 지운영에게 접근하여 그가 공작금으로 가져온 5만엔을 빼앗자고 제안했다.[32] 세 사람은 지운영을 찾아가 김옥균에 대한 불만을 늘어놓으며 이국땅을 떠도는 신세를 한탄하는 척 연기했다.[30][32] 지운영은 2~3개월 이상 이들과 만나며 점차 신뢰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운영은 유혁로 일행에게 김옥균을 처치하면 망명자 신세에서 벗어날 수 있다며 자신은 국왕의 밀명을 받고 김옥균을 죽이러 왔으니 도와달라고 본색을 드러냈다. 그는 증거로 고종의 칙서를 보여주었다.[33]
: 명여로 특차도해포적사(特差渡海捕賊使)인 바 임시계획을 일임 편의요, 위국사무(爲國事務)도 역위전권(亦爲全權)하니 물핍거행(勿乏擧行)할 사
: (이 사람은 명을 받은 특차도해포적사이니 임시계획은 편의로 일임하며 나라를 위하는 일 역시 전권을 위임하니, 조선의 신민이라면 핍박하지 않고 거행하도록 하라.)
: — 대군주모(大君主募)
이 칙서는 발행 일자가 1885년 5월로 되어 있고 국왕의 옥새(대군주모)까지 찍혀 있었으나, 그 진위는 확실하지 않다. 내용은 "바다 건너의 역적을 체포하는 특명을 부여한다"는 것이었다.[33] 또한 지운영은 김옥균 살해 성공 시 5천엔을 주겠다는 지불보증서와 한성에서 가져온 비수도 보여주었다.[33]
유혁로, 신응희, 정난교 세 사람은 즉시 지운영을 붙잡아 구타하고 위협하여 칙서와 비수 등을 빼앗았다.[33] 유혁로는 이 증거물들을 가지고 지운영을 일본 경시청에 고발하여 체포되게 만들었다.
2. 3. 4. 2차 김옥균 암살 미수범 격퇴
1885년 6월 고종과 명성황후의 밀명을 받은 장은규가 김옥균 암살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왔다. 유혁로는 의친왕의 생모 귀인 장씨의 친정오빠인 장은규를 경계할 것을 김옥균에게 제안했고, 김옥균이 이를 받아들여 장은규를 피하면서 1차 암살 시도는 미수에 그쳤다.
이후 조선 조정은 역관 출신의 온건 개화인사였던 지운영을 다시 자객으로 파견했다. 통리기무아문 주사로 근무 중 밀지를 받은 지운영은 1886년 2월 23일 인천을 출발하여 나가사키를 거쳐 고베에 도착했다.[29] 그러나 당시 김옥균은 고베를 떠나 도쿄에 은거 중이었다. 도쿄에 도착한 지운영은 이세강(伊勢勘) 여관에 머물며 근처에 살던 김옥균에게 편지를 보내 만나자고 요청했다.[30] 과거 함께 근무한 인연이 있었지만, 앞서 장은규 사건을 겪었던 유혁로는 지운영 역시 자객일 것으로 의심하고 이 사실을 김옥균과 박영효에게 알렸다.
김옥균은 지운영의 정체에 의혹을 느끼고 "나는 국사범이므로 만나면 도리어 귀찮아질 것이네."[32]라는 내용의 서신을 보내 면담 제의를 거절했다.[31] 나아가 김옥균은 동지인 유혁로, 신응희, 정난교 등에게 지운영에게 접근하여 그가 공작금으로 가져온 5만엔을 빼앗자고 제안했다.[32]
김옥균의 지시에 따라 유혁로, 정난교, 신응희 등은 지운영에게 다가가 그가 자객이라는 증거를 잡으려 했다.[30] 이들은 지운영을 만나 일본에서 망명 생활을 하는 자신들의 처지를 한탄하며 김옥균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등, 김옥균과 사이가 좋지 않은 것처럼 위장했다.[30] 또한 지운영에게 불평을 늘어놓기도 했다.[32] 지운영은 유혁로 일행과 2~3개월 이상 교류하며 그들을 신뢰하게 되었고,[30] 결국 2차 암살 시도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2. 3. 5. 망명 생활
1885년 6월, 고종과 명성황후의 밀명을 받은 장은규(일명 장갑복)가 일본으로 건너왔다. 장은규는 의친왕의 생모 귀인 장씨의 친정오빠였는데, 유혁로는 이 사실을 알고 그를 경계할 것을 김옥균에게 제안했다. 김옥균이 장은규를 피하면서 1차 암살 기도는 미수에 그쳤다. 이후 조선 조정은 역관 출신의 온건 개화인사 지운영을 다음 자객으로 파견했다.
통리기무아문 주사로 근무 중 밀지를 받은 지운영은 1886년 2월 23일 인천을 출발, 나가사키를 거쳐 고베에 도착했다.[29] 그러나 김옥균은 이미 고베를 떠나 도쿄에 은거 중이었으며, 지운영이 자객임을 간파했다. 도쿄에 도착한 지운영은 이세강(伊勢勘) 여관에 머물며 근처에 사는 김옥균에게 편지로 면담을 요청했다.[30] 과거 함께 근무한 적이 있어 김옥균이 응할 법도 했지만, 앞서 장은규를 상대했던 유혁로가 지운영도 자객으로 의심하고 이를 김옥균과 박영효에게 알렸기에 김옥균은 서신으로 면담을 거절했다.[30][31] 김옥균은 "나는 국사범이므로 만나면 도리어 귀찮아질 것이네."[32]라며 거절 의사를 밝혔다.
김옥균은 유혁로, 신응희, 정난교 등 함께 망명 중이던 동지들에게 지운영에게 접근하여 그가 공작금으로 가져온 5만엔을 빼앗자고 제안했다.[32] 또한 지운영이 자객임을 증명할 증거를 잡도록 했다.[30] 유혁로 등은 지운영을 만나 일본에서 떠도는 신세를 한탄하며 김옥균에게 큰 불만이 있는 것처럼 위장하여 접근했다.[30][32] 이들은 2~3개월간 지운영과 만나며 그의 신뢰를 얻었다.
1892년 4월에는 민씨 척족인 민영소의 밀명을 받은 이일직이 무역상으로 위장해 일본으로 들어왔다. 그는 김옥균, 박영효, 정난교, 이규완, 유혁로 등 갑신정변 이후 망명한 인사들에게 정치 자금을 제공하며 접근했다.[35] 이일직의 최종 목표는 망명객의 지도자인 김옥균과 박영효 살해였다.[35] 이들의 은신처가 발각되어 자객들이 침투했을 때, 유혁로는 이규완, 정난교 등과 함께 조선인 자객들을 직접 상대하기도 했다.
1894년 3월, 조선 정부가 보낸 자객 홍종우가 상하이에서 김옥균을 암살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홍종우의 일행이었던 이일직은 무사 권동수(權東壽), 권재수(權在壽) 형제와 일본인 가와쿠보 주네기치(川久保常吉)를 매수하여 박영효 암살을 시도했다. 이들은 박영효가 서예를 즐긴다는 점을 이용해 휘호를 쓰게 한 뒤 품평하는 사이 저격하거나, 호텔로 유인해 살해하려 했다.[36] 그러나 이규완이 자객 파견을 예상하고 경계했으며, 다른 일본인이 가와쿠보 주네키치와 이일직의 접촉을 알리면서 계획은 누설되었다.[37][36] 이규완과 정난교가 권동수 형제를 붙잡아 친린의숙에 감금하고 감시하면서 암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37] 자객들은 곧 도쿄지방법원으로 넘겨져 재판을 받고 조선으로 추방되었다.
당시 유혁로 역시 이일직의 주요 암살 대상 중 한 명이었다.[38] 지지신보 1894년 6월 20일자 기사에 실린 이일직의 심문 기록에 따르면, 그는 "머리를 깎고 4월 24일 도쿄에 온 것은 박영효, 정난교, 유혁로, 이규완, 이선호 등 5인의 목과 손을 잘라 그것을 가방에 넣어 권동수, 권재수에게 들려서 귀국시키고, 나는 상하이 쪽으로 갈 목적으로 그랬다"고 진술했다.[39]
2. 3. 6. 조선 정부 자객 격퇴
1885년 6월, 고종과 명성황후의 밀명을 받은 장은규(일명 장갑복)가 일본으로 건너왔다. 장은규는 의친왕의 생모 귀인 장씨의 친정오빠였다. 유혁로는 장은규가 귀인 장씨의 오빠라는 점을 파악하고 그를 경계해야 한다고 김옥균에게 조언했다. 김옥균이 유혁로의 조언에 따라 장은규를 피하면서 첫 번째 암살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장은규를 통한 암살 시도가 실패하자 조선 조정은 역관 출신의 온건 개화인사였던 지운영을 새로운 자객으로 파견했다. 통리기무아문 주사로 근무하던 중 밀지를 받은 지운영은 1886년 2월 23일 인천을 출발하여 나가사키를 거쳐 고베에 도착했다.[29] 그러나 김옥균은 지운영 역시 자신을 해치러 온 자객임을 간파하고 당시 머물던 고베를 떠나 도쿄에 은신했다. 도쿄에 도착한 지운영은 이세강(伊勢勘) 여관에 머물며 근처에 살고 있는 김옥균에게 편지를 보내 만남을 요청했다.[30] 과거 함께 일했던 인연을 내세워 접근하려 했지만, 김옥균은 "나는 국사범이므로 만나면 도리어 귀찮아질 것이네."[32]라며 서신으로 면담을 거절했다.[30][31]
앞서 장은규의 정체를 간파했던 유혁로는 지운영 역시 자객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고 이 사실을 김옥균과 박영효에게 알렸다. 김옥균은 유혁로, 신응희, 정난교 등 함께 망명 중이던 동지들에게 지운영에게 접근하여 그가 자객이라는 증거를 확보하고, 암살 공작금으로 가져온 5만엔을 빼앗자고 제안했다.[32] 이에 유혁로 등 세 사람은 지운영을 찾아가 망명 생활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김옥균에 대한 불만을 늘어놓으며[32] 김옥균과 사이가 틀어진 것처럼 위장했다.[30] 유혁로 일행은 2~3개월 이상 지운영과 만나면서 점차 그의 신뢰를 얻는 데 성공했다.[30]
2. 4. 귀국과 재 망명
1894년 박영효와 함께 귀국하였으나,[3] 1895년 친러 내각이 수립되면서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3] 일본 망명 중에는 군사 및 군사 기술에 관심을 가졌다.[1]2. 4. 1. 귀국과 2차 망명


갑오경장으로 개화파가 복권되면서 유혁로는 1894년 8월 장위영 영관(壯衛營 領官)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말, 그는 비밀리에 조선으로 돌아왔다. 1894년 12월 20일 군무아문참의(軍務衙門參議)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1895년 4월 1일에는 탁지부 부령(副令)이 되었다. 제1차 갑오 개혁 시기 그는 박영효, 서광범 계열의 개혁 관료로 활동했다.[40] 1895년 4월 육군 부령을 거쳐 육군 포공국장에 임명되었다.
1895년 5월, 유혁로는 박영효 등과 함께 명성황후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같은 해 10월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이 발생했을 때, 그는 조선인 안내자들과 일본인 낭인들을 이끌고 경복궁을 침범하는 등 사건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그는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 살해를 위해 움직인 조선인 행동대 중 한 명이었다. 권동진은 당시 자신과 형 권형진 외에 정난교, 조희문, 이주회, 유혁로 등이 왕비 암살에 직접 가담한 행동파였다고 증언했다.[41]
> "이 음모에 간여한 사람은 일본 사람 오카모토 류노스케 외 일본인 30여 명이 있었으며, 우리 사람으로는 개혁파의 관계자는 무조건 참가하였지. 우리 정부 대신을 비롯하여 훈련대 제1대대 제2중대장 내 백형(맏형) 권형진(사변 후 경무사로 임명) 등도 획책에 가담하였으며, 직접파로는 훈련대 외에 일본사관학교생도이던 우리 여덟 명이 활동하였는데 그 성명은 정난교, 조희문, 이주회, 유혁로, 구연수 외 김모였다."[41]
그러나 오카모토 류노스케가 이끌던 다른 일본 낭인들이 먼저 명성황후를 발견하여 살해했다. 을미사변 후 친일 내각이 무너지자 유혁로는 다시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후 그는 자금을 마련하고 유학생을 포섭하여 박영효, 유길준 등과 쿠데타를 모의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1895년 5월의 명성황후 암살 미수 사건과 8월의 을미사변(음력 기준)에 가담한 사실로 인해 그는 사회적 규탄의 대상이 되었고, 그를 탄핵하는 상소가 이어졌다. 그는 본래 박영효의 명성황후 암살 계획에 참여했다가 실패한 후 을미사변에 가담했지만, 당시 사람들은 박영효의 암살 미수 계획과 흥선대원군, 유길준 등이 연루된 을미사변을 동일 세력이 일으킨 사건으로 보았다.
> "8월 사변(을미사변) 때 대궐 안에 뛰어들어 흉악한 반역행위를 마구 한 것은 바로 박영효와 생사를 같이 하는 무리인 이주회, 유혁로, 정난교였습니다. 더없이 흉악한 음모가 자라오다가 이에 이르러 터졌으니, 저들이 5월에 시행하려던 것(박영효 음모 사건)을 8월에 미루어 시행했다는 것을 정확히 말할 수 있습니다. (중략) 김홍집, 유길준, 조희연의 무리들은 박영효의 패거리와는 다르지만 그 흉악한 반역 심보는 박영효의 무리와 같습니다."[42] (1896년 6월 17일 이승구의 상소)
결국 유혁로는 1895년 11월 휴직을 청원하여 포공국장직에서 물러나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그는 박영효 등과 함께 일본 외무성에 망명을 신청하고 신변 보호를 요청하여 허락받았다. 이후 일본에 머물며 군사 및 산업 시설 등을 시찰했다. 1896년 6월 17일에는 4품 관리 이승구(李承九)가 상소를 올려 유길준, 조희연, 박영효, 정난교 등과 함께 유혁로의 처벌을 요구하기도 했다.
2. 4. 2. 대한제국기 활동
1898년에는 한때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활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1899년 만민공동회 등이 강제로 해산되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훗날 권동진은 잡지 삼천리에서 당시 망명 중이던 자신의 옛 동지들을 소개하며 유혁로를 언급하기도 했다. 권동진은 당시 동경 망명 인물들로 박영효, 조희연, 장석주, 유길준, 권영진, 유세남, 김옥균 등을 언급하고, 자신과 비슷한 연배의 동지들로 조희문, 이범래, 우범선, 이두황, 유혁로, 신응희, 정난교, 윤효정, 오세창 등을, 그리고 조금 늦게 합류한 소장파로 이신(李申), 유동렬, 권석하, 이동휘 등을 열거하였다.[43]고종은 일본 정부에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유혁로를 비롯하여 이준용, 이규완, 정난교, 유길준 등의 국내 송환을 요구하였으나, 일본 정부는 이를 거절하였다. 1905년 4월 1일, 유혁로는 일본에 체류하던 중 특별히 육군 부령(副令)에 임명되었고, 군무부 포공국장(軍務部砲工局長) 직책에도 다시 임명되었다.
1907년 3월에는 대동학회에 가입하여 평의원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5월 11일에는 서북영림창 사무관(西北營林廠事務官)에 임명되었다. 1907년 7월, 헤이그 밀사 사건의 여파로 고종이 강제로 퇴위하고 순종이 즉위하자, 이준용, 박영효, 정난교, 이규완 등 정치범들에 대한 사면령이 내려졌다. 이로 인해 일본에 망명 중이던 개화파 인사들이 대거 복권되어 관료로 기용되었으며, 유혁로 역시 이때 복권되었다.
복권 이후, 1907년 9월 19일 육군 부령 직에서 면직되었고, 12월 20일에는 서북영림창 사무관 직을 사임하였다. 그러나 11월 7일 대한제국 중추원 부찬의를 거쳐 12월 21일에는 가선대부로 승진하며 평안북도 관찰사(平安北道觀察使) 겸 칙임관 3등(勅任官三等)에 임명되었다. 동시에 평안북도재판소 판사직도 겸임하였다.
순종 재위 기간 동안에는 과거 독립협회 간부를 지냈으나 이후 일진회를 이끌었던 윤갑병(전 만민공동회장), 최정덕 등과 함께 일진회를 지도하였다.[44]
2. 5. 생애 후반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김옥균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으며, 야마다 유이치(山田唯一)라는 일본 이름을 사용했다.[3] 1894년 박영효와 함께 귀국하여[3] 이듬해 박영효의 추천으로 군부 초대 포병국장에 임명되었다.[1][4] 이후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참여했으나,[5] 친러 내각이 들어서자 다시 일본으로 망명했다.[3] 일본 체류 중에는 군사 및 군사 기술에 관심을 보였다.[1]1907년 다른 갑신정변 생존자들과 함께 귀국하여 서북영림창 관리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12월에는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추천으로 평안북도 관찰사가 되었다. 1908년에는 친일 단체인 대동학회에 가입하며 본격적인 친일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1]
한일 병합 이후에는 조선총독부 체제 하에서 경기도 참여관으로 임명되었고,[1] 1914년부터 1916년까지는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이 주도한 토지 조사 사업에 협력했다.[3] 1916년 3월에는 충청북도 지사로 임명되어 식민 통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17년 6월 관직에서 물러나 사업가로 활동하는 한편,[1] 1921년부터 1940년까지 중추원 참의를 여러 차례 역임하며 식민 통치 기구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특히 1926년에는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조직된 친일 단체 동민회의 회원이 되기도 했다.[3][6]
사후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일제강점기 행적을 근거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했다.[1]
2. 5. 1. 한일 합방 전후

1910년 10월 1일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이후, 유혁로는 조선총독부 고등관에 임용되어 경기도청 참여관으로 발령받았다.[1] 같은 해 10월 2일, 한일합방 은사금으로 5000KRW을 받았으나 수령하지는 않았다. 또한 남작 작위를 제안받았으나 거절했고, 합병 기념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총독부의 지시에 따라 경기도 참여관으로 부임하였다.
관료로서 다양한 활동에 참여했다. 1912년 8월 15일에는 장헌식, 정란교 등과 함께 임시문관보통시험 출제위원으로 임명되었고,[45] 같은 해 각 도의 농산물 품평회 심사관으로도 활동했다. 1914년부터는 경기도 지방토지조사위원회 임시위원으로 위촉되어 1916년 3월까지 재직하며 데라우치 총독이 주도한 토지 조사 사업에 협력했다.[3]
1916년 3월 9일에는 전라북도 장관, 같은 달 3월 28일에는 충청북도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충청북도 장관 재직 시에는 충청북도토지조사위원회 임시위원으로서 토지 조사 사업에 계속 관여했으며, 그해 4월부터는 충청북도 소작인 품평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또한 1916년 4월 일본적십자사 청주지부장과 충주지부 고문을 겸임했고, 애국부인회 조선본부 청주지부 고문에도 선임되었다.
1917년 6월 13일, 유혁로는 도장관 직을 사퇴하고 곧바로 중추원 참의로 자리를 옮겼다.[1] 1919년 잠시 전라북도지사로 부임했으나 곧 사퇴하였다. 이후 일제강점기 동안 그는 대지주로서 풍족한 생활을 누렸다. 1925년 9월 전국적인 수해 당시 동아일보에 수해 구호금으로 20KRW을 기부하기도 했다.[46] 한편, 공무 출장 시 관사에서 제공되는 물품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개인 수건, 치약, 칫솔, 비누 등을 직접 준비해 다녔다고 전해진다.
1920년에는 비누 생산 공장인 조일석감주식회사(후에 조일비누주식회사로 명칭 변경) 설립에 참여하여 주주가 되었고, 곧 이사로 선임되었다가 같은 해 감사가 되어 사망 시까지 그 직을 유지했다. 1920년 6월부터는 중추원 참의로 활동하며 1940년까지 여러 차례 중임되었다.[1] 1920년 11월 13일에는 중추원 시찰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하여[47] 이듬해 1월 귀국했다. 1921년 4월에는 중추원 칙임대우 참의로 위촉되었다.
사업가로서의 활동도 이어갔다. 1922년 4월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 창립 발기식에 참여하고, 같은 해 8월 주주가 되었으며 이사로 선임되어 사망 시까지 재직했다. 또한 1922년부터 1927년까지 한성투자신탁주식회사 감사를 역임했다. 1927년 3월 10일부터는 해동은행의 주주가 되었다.
1926년에는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을 탄압할 목적으로 조직된 친일 단체 동민회의 평의원으로 위촉되었다.[3][6] 1930년 6월 5일에는 중추원 칙임관 대우 참의인 칙임참의에 임명되었고, 1932년 7월 중추원 시정조사연구회가 조직되자 위원이 되었으며 사회부 위원을 겸임했다. 이후 1933년, 1936년 6월 3일, 1939년 6월 4일에 중추원 참의로 재임명되며 식민 통치 기구에서 장기간 활동했다. 1936년 11월 10일에는 조선총독부가 주최한 80세 이상 고령자 초청 특별 양로연에 초대받기도 했다.[48]
말년에는 불필요한 만남을 줄이고 독서, 바둑, 작문, 시 짓기, 서예 등을 즐기며 홀로 술을 마셨다고 한다.
사망 시기에 대해서는 기록이 엇갈린다. 매일신보는 유혁로가 1940년 5월 15일 오전 9시경 경성부 종로방 가회동 자택에서 노환과 뇌일혈로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다른 기록에는 1940년 5월 종4위 훈3등으로 사망했다고 되어 있다.[13] 그러나 이후에도 생존했다는 설도 있어 정확한 사망 시점은 불분명하다. 다만, 1945년 8월 15일 광복 시점에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49]
사후 대한민국 정부는 유혁로의 일제강점기 행적을 근거로 그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했다.[1]
2. 5. 2. 일제강점기 활동
1910년 10월 1일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이후 조선총독부 고등관으로 임용되어 경기도청 참여관에 임명되었다. 비록 한일 병합 조약 당시 남작 작위를 거절하고 합병식에도 불참하였으나, 조선총독부의 지시로 경기도 참여관에 임명되자 부임하였다. 한일합방 직후인 10월 2일에는 은사금 5000원을 받았으나 수령하지는 않았다.
1912년 8월 15일 장헌식, 정란교 등과 함께 임시문관보통시험 출제위원 중 한 명으로 임명되었고,[45] 같은 해 각 도의 농산물품평회에 심사관으로 참여했다. 1914년에는 경기도 지방토지조사위원회 임시위원으로 위촉되어 일본 식민 당국의 토지 조사 사업에 협력했으며, 1916년 3월까지 재직했다.[3]
1916년 고위 관료로 승진하여 3월 9일 전라북도 장관, 3월 28일 충청북도 장관에 임명되었다. 충청북도 장관 재직 시에는 충청북도토지조사위원회 임시위원으로서 토지 조사 사업에 계속 참여하였고, 그해 4월부터는 충청북도 소작인 품평회를 개최하였다. 또한 4월 일본적십자사 청주지부장과 충주지부 고문을 겸임했으며, 애국부인회 조선본부 청주지부 고문에도 선임되었다.
1917년 6월 13일 도장관직을 사퇴하고, 곧바로 중추원 참의로 자리를 옮겼다. 1919년 잠시 전라북도지사로 부임했으나 곧 사퇴했다. 이후 그는 대지주로서 풍족한 생활을 유지했다. 1925년 9월 전국적인 수해 당시 동아일보에 수해 기탁금 20원을 기부하기도 했다.[46] 공무 출장 시 숙소가 제공되었음에도 개인 세면도구를 지참하여 사용하는 등 검소한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관직에서 물러난 후 사업가로도 활동했다. 1920년 비누 생산 공장인 조일석감주식회사(후에 조일비누주식회사로 명칭 변경) 설립에 참여하여 주주이자 이사가 되었고, 같은 해 감사가 되어 사망 시까지 재직했다. 1922년 4월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 창립 발기식에 참여했으며, 8월에는 주주이자 이사로 선임되어 사망 시까지 재직했다. 또한 1922년부터 1927년까지 한성투자신탁주식회사 감사를 역임했고, 1927년 3월 10일부터는 해동은행의 주주가 되었다.
1920년 6월 중추원 참의로 임명된 이후 여러 차례 중임되어 1940년까지 재직했다. 1920년 11월 13일에는 중추원 시찰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47]하여 이듬해 1월 귀국했다. 1921년 4월 중추원 칙임대우 참의로 위촉되었고, 1930년 6월 5일 중추원 칙임관 대우 참의인 칙임참의에 임명되었다. 1932년 7월 중추원 시정조사연구회가 조직되자 위원이 되었고, 사회부 위원을 겸임했다. 1933년, 1936년, 1939년에 각각 중추원 참의로 재임명되었다. 1926년에는 사회주의 독립운동 탄압을 목적으로 한 친일 단체 동민회의 평의원으로 위촉되기도 했다.[3][6]
1936년 11월 10일 조선총독부 총독이 주최한 80세 이상 고령자 초청 특별 양로연에 초대받았다.[48] 말년에는 불필요한 만남을 줄이고 독서, 바둑, 작문, 시 짓기, 서예 등을 즐기며 홀로 술을 마셨다고 전해진다.
매일신보의 1940년 5월 15일자 보도에 따르면 이날 오전 9시경 종로 가회동 자택에서 사망했다고 하나, 이후에도 생존했다는 설이 있어 사망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1945년 8월 15일 일본 패망 시점에는 이미 사망[49]한 상태였다. 1940년 5월 종 4위 훈 3등으로 사망했다는 기록도 있다.[13] 사망 장소는 경성부 종로방 가회동 자택이었으며, 사망 원인은 노환과 뇌일혈이었다.
사후 대한민국 정부는 유혁로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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