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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미 고레치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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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나미 고레치카는 일본 제국 육군의 군인으로, 육군대신을 역임하며 태평양 전쟁 말기 일본의 항복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중일 전쟁, 태평양 전쟁 등에서 지휘관으로 활동했다. 1945년 스즈키 간타로 내각의 육군대신으로 임명되었으나, 포츠담 선언 수용과 무조건 항복에 반대하며 본토 결전을 주장했다. 결국, 쇼와 천황의 종전 결정에 따라 항복 문서에 서명한 후, 1945년 8월 15일 자결했다. 그의 죽음은 일본 군국주의의 종언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평가받으며, 그의 유서는 다양한 해석을 낳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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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미 고레치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아나미 고레치카 (1934년경)
원어 이름아나미 고레치카 (阿南 惟幾)
출생일1887년 2월 21일
사망일1945년 8월 15일
출생지일본 제국 오이타현 다케타시
사망지일본 제국 도쿄도 지요다구
별명해당사항 없음
경력
소속일본 제국 육군
복무 기간1906년 – 1945년
최종 계급[[파일:帝國陸軍の階級―襟章―大将.svg|35px]] 육군 대장
주요 지휘제109사단
제11군
제2방면군
참전 전투중일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
관직
직책육군대신
임기 시작1945년 4월 7일
임기 종료1945년 8월 14일
국왕쇼와
총리스즈키 간타로
이전스기야마 하지메
이후히가시쿠니 나루히코 왕
개인사
사망 원인포로가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할복 자살

2. 경력

오이타현 다케타시 다마라이 출신으로, 육군사관학교 (18기, 1905년)와 육군대학 (1918년)을 졸업했다. 1925년 프랑스 주재 무관을 지냈으며, 1929년에는 히로히토 천황의 시종무관으로 스즈키 간타로 시종장 밑에서 근무했다.

1935년 소장으로 진급, 1938년 제109사단장으로 중일 전쟁에 참전했다가 1939년 육군성으로 복귀했다. 1941년 제11군 사령관, 1942년 제2방면군 사령관을 거쳐 1943년 육군 대장으로 승진했다. 1944년 육군 항공총감을 역임하고, 1945년 스즈키 간타로 내각에서 육군대신에 임명되었다.[2]

2. 1. 초기 생애와 군 경력

아나미 고레치카는 1887년 2월 21일 오이타현 다케타시에서 내무성 관료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도쿄와 도쿠시마현에서 성장했으며, 어린 시절부터 검도, 궁도, 마술 등 무술을 배웠다.[1]

1900년 9월, 아나미는 히로시마 육군 지방 유년 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육군사관학교 18기로 1906년 12월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1] 1918년 11월에는 육군대학 30기를 졸업하고 대위 계급을 달았다.

1916년 아나미는 다케시타 헤이사쿠 육군 중장의 둘째 딸 아야코와 결혼하여 슬하에 5남 2녀를 두었다.

1919년 4월부터 일본 제국 육군 참모 본부에 근무했으며, 1923년부터는 시베리아 출병 당시 북부 사할린 섬 점령을 담당했던 사할린 파견군 참모로 배속되었다. 1925년 8월부터 12월까지는 프랑스 주재 무관으로 파견되었다가 귀국 후 제45보병연대에 배속되었고, 1928년 8월 연대장이 되었다.[1]

1929년 8월부터 1930년 8월까지는 히로히토 천황의 시종무관으로 근무했다.[1] 이후 대령으로 진급했다.

1933년 8월부터 1934년 8월까지 근위대의 제2근위연대 연대장으로 근무했다.[1] 이어서 도쿄 육군 예비학교 교관을 역임했다.[1]

1935년 3월 소장으로 진급했다.[1]

아나미의 성장 과정과 군 경력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연도사건
1900년히로시마 육군 지방 유년 학교 입교
1905년육군사관학교 졸업 (18기)
1906년육군 보병 소위 임관, 보병 제1연대 배속
1918년육군대학교 졸업 (30기)
1919년참모본부 근무
1923년사할린 파견군 참모
1925년프랑스 주재 무관
1927년제45보병연대 배속
1928년제45보병연대장
1929년히로히토 천황 시종무관
1933년근위대 제2근위연대장
1934년도쿄 육군 예비학교 교관
1935년육군 소장 진급


2. 2. 쇼와 천황과의 인연

1929년 8월 1일, 스즈키 간타로 시종장 밑에서 시종무관으로 근무하게 된 아나미는 쇼와 천황과 친분을 쌓았다. 승마가 특기였던 그는 쇼와 천황에게 직접 승마 지도를 요청받기도 했으며, 함께 승마를 즐기면서 쇼와 천황의 배려 깊은 모습에 감명을 받았다.[1] 1930년 8월, 대좌로 승진한 아나미는 쇼와 천황과 더욱 가까이에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많아졌다.[2]

1932년 1월 8일, 사쿠라다몬 사건 당시 아나미는 쇼와 천황의 차열에 동행하고 있었다. 이봉창이 던진 수류탄이 폭발하자, 그는 즉시 쇼와 천황의 마차로 달려가 무사함을 확인하고 안도했다.[3]

1933년 8월, 근위보병 제2연대장에 취임한 아나미는 5·15 사건 직후였기에 청년 장교들의 정신 교육에 힘썼다. 그는 청년 장교들과 격의 없이 소통하며, 군인칙유의 "정치 불관여" 신조를 강조하며 5·15 사건에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다.[4]

1934년 8월, 도쿄 육군 유년 학교장에 부임한 아나미는 학생들에게 군인의 도리와 천황에 대한 충성을 가르쳤다. 그는 학생들에게 평범하지만 중요한 가르침을 전하며, 쇼와 천황의 배려로 학생들이 천황을 가까이에서 알현할 기회를 마련하기도 했다.[5]

2. 3. 육군성 근무와 중일 전쟁 참전

1936년 8월, 아나미는 육군성 병무국장으로 취임하여 2·26 사건 이후 황도파 숙청에 관여했다.[1] 이때 "과학적 방첩 기관" 설치를 제안했는데, 이는 훗날 육군 나카노 학교로 이어진다. 1937년 3월에는 육군성 인사국장이 되었으며, 장교 부족 문제 해소를 위해 노력하여 800명 증원을 이루어냈다.

1938년 3월 1일, 중장으로 승진했다. 같은 해 7월, 이타가키 세이시로 육군대신의 지시로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참모총장 취임안을 검토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아나미는 황족이라도 계급을 순서대로 밟아야 한다며 특례 인사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며 거부했다.

1938년 11월 9일, 제109사단장에 임명되어 중일 전쟁에 참전했다. 산서군과 팔로군을 상대로 여러 작전을 지휘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1939년 3월의 N호 작전에서는 산서군과 팔로군의 중요 거점인 징뤄 현성을 공략했고, 4월의 3호 제2기 작전에서도 산서군 주력에 큰 타격을 주었다.[10] 같은 해 6월에는 산서군 주력 섬멸 작전을 통해 5개 대대 병력으로 4개 사단을 포위, 섬멸하는 전과를 올렸다.[11] 아나미는 포로들을 관대하게 대우하고 적군 전사자 위령탑을 세우는 등 "덕의(德義)는 전력이다"라는 신조를 실천했다.

1939년 10월, 육군 차관에 취임하여 노몬한 사건의 사후 처리에 관여했다. 이때, 아나미는 독일-이탈리아-일본 삼국 동맹에 대해서는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1940년 도조 히데키가 육군대신이 되자, 아나미는 그의 요청으로 육군 차관에 유임되었다. 그러나, 도조의 자의적인 인사 문제로 둘은 대립하게 되었다. 특히, 1941년 전진훈을 비판한 이시하라 간지의 예비역 편입 문제로 격렬하게 논쟁을 벌였다. 결국 아나미는 1941년 4월, 제11군 사령관으로 전출되며 육군성에서 물러났다.

2. 4. 태평양 전쟁과 제2방면군 사령관

1941년 4월, 아나미는 제11군 사령관으로 중국에 돌아가 중국 중부에서 진행 중인 작전을 지휘했다.[2] 그는 창사를 점령하고자 했다. 그러나 중국군의 철수는 "퇴각 공세" 작전이었고, 창사에는 30만 명의 중국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제11군은 급작스러운 작전 개시로 3개 사단의 연계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병참도 불충분하여 곤경에 처했다.[12]

아나미는 반전하여 적의 취약부를 돌파하여 철수를 명했다. 3개 사단은 압도적으로 많은 중국군을 상대로 전투를 하면서 철수를 강요당해 많은 손해를 입었다.[12]

1942년 7월, 제2방면군 사령관으로 치치하얼로 부임했다.[2]

1943년 5월 육군 대장으로 승진했으며, 제2방면군은 남방의 전황 부진으로 1943년 10월 30일, 오스트레일리아 북방(네덜란드령 동인도 동부)으로 전용되었다. 아나미는 서뉴기니와 할마헤라에서 작전을 지휘했다.

아나미는 요충지인 웨왁을 방어하기 위해 이동을 명령했지만, 더글러스 맥아더 대장이 이끄는 연합군은 섬 건너뛰기 작전으로 웨왁을 건너뛰어, 호란디아와 아이타페에 상륙하여 점령했다. 아나미는 여러 차례 뉴기니 전선에서 전력을 집중한 반격 작전을 제안했지만, 그때마다 대본영으로부터 제지당했다.

1944년 5월 27일 비악 섬 전투가 시작되었다. 아나미는 비악 섬 증원을 위해 해상기동 제2여단의 해상 수송을 해군에 요청했고, 해군도 혼 작전을 시작했다. 그러나 연합 함대 사령부는 1944년 6월 3일 밤에 작전을 중지하였다. 아나미는 갑작스러운 작전 중지 보고에 격분하였다. 이후 혼 작전은 규모가 축소된 끝에 수송에 실패했고, 아나미는 독자적으로 비악 섬에 1개 대대를 증원으로 보냈다.

2. 5. 육군 항공총감 및 스즈키 간타로 내각 육군대신

아나미는 1944년 12월 일본으로 돌아와 육군 항공총감 겸 육군 항공 본부 국장이 되었고, 동시에 최고 전쟁 회의 위원이 되었다.[2] 1945년 4월, 스즈키 간타로 내각에서 육군대신으로 임명되었다.[2]

3. 종전과 자결

1945년 스즈키 간타로 내각은 포츠담 선언 수용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지만, 아나미 고레치카는 군부를 대변하여 무조건 항복에 극렬히 반대했다. 원폭 투하와 소련의 대일 참전 이후에도 유리한 항복 조건을 얻기 위해 본토 결전을 주장했다.[5] 그러나 히로히토 천황이 무조건 항복에 동의하자, 아나미는 이에 따랐고 군부에도 천황의 뜻에 따를 것을 명령했다. 8월 14일, 천황의 서명이 담긴 항복 문서에 다른 각료들과 함께 서명했다.[7]

8월 15일 새벽, 아나미는 "천황 폐하께 죽음으로써 사죄한다"는 유언장을 쓰고 할복 자결했다.[7] 그가 자결할 때 입었던 제복과 유언장은 야스쿠니 신사 옆 유슈칸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7]

3. 1. 포츠담 선언 수용 반대와 본토 결전 주장

1945년 스즈키 간타로 수상이 포츠담 선언 수용이 불가피하다고 역설했지만, 아나미는 군부를 대변하여 무조건 항복에 극렬히 반대했다. 원폭 투하와 소련의 대일 참전 이후에도 유리한 항복 조건을 얻기 위한 본토 결전을 주장했다.[5]

아나미는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했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항복에 반대했다.[4]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 이후에도 포츠담 선언 수용에 반대하고 일본 본토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여 연합군에 큰 피해를 입힘으로써 일본이 완전 항복을 피하고 정복했던 일부 지역을 유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5]

히로히토 천황이 전쟁 종식을 명령하면서 아나미의 주장은 무너졌다. 아나미의 지지자들은 항복에 반대하거나 내각에서 사임해야 한다고 제안했지만, 그는 자신의 장교들에게 양보를 명령했고, "일본 군인으로서 나는 천황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고 말했다.[4] 그는 육군성 장교들에게 결정과 그것이 천황의 명령이기 때문에 복종해야 한다고 알렸다.[6]

8월 9일 최고 전쟁 지도 회의에서 아나미는 "국체 유지", "보장 점령", "일본 스스로의 무장 해제", "일본에 의한 전쟁 범죄 처리"의 4가지 조건을 강력히 주장하며, 도고 시게노리 등과 대립했다. 특히 황실 수호에 대해 "소련은 불신의 나라이고, 미국은 비인도적인 나라이다. 보장 없이 황실을 맡길 수는 절대 없다"고 주장했고, 요나이 미쓰마사와의 논쟁에서 본토 결전의 의지를 보였다.

회의가 결론 없이 길어지자, 쇼와 천황이 참석하는 어전 회의가 열렸다. 아나미는 사코미즈 히사쓰네에게 어전 회의 개최가 위법이 아닌지 따졌지만, 사코미즈는 실정을 그대로 천황에게 듣기 위한 것이라고 답했다. 어전 회의에서 아나미는 "본토 결전은 반드시 졌다고 할 수는 없으며, 만약 져서 1억 명이 옥쇄하더라도, 세계 역사에 일본 민족의 이름을 남길 수 있다면 그것으로 본뜻이 아니겠는가"라고 주장했지만, 쇼와 천황은 외무 대신의 의견에 동의하며 종전을 결정했다.

3. 2. 히로히토 천황의 성단과 쿠데타 진압

1945년 8월 9일, 소련의 대일 참전과 나가사키 원자 폭탄 투하 직후 열린 최고 전쟁 지도 회의에서 아나미는 다른 군부 대표들과 함께 "국체 유지", "보장 점령", "일본 스스로의 무장 해제", "일본에 의한 전쟁 범죄 처리"의 4가지 조건을 주장하며 포츠담 선언 수용에 반대했다. 특히 황실 수호에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13]

같은 날 오후 11시 50분에 열린 어전 회의에서 아나미는 "본토 결전은 반드시 졌다고 할 수는 없으며, 만약 져서 1억 명이 옥쇄하더라도, 세계 역사에 일본 민족의 이름을 남길 수 있다면 그것으로 본뜻이 아니겠는가"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러나 히로히토 천황은 "나는 외무 대신의 의견에 동의한다"며 종전을 결심하는 “성단”을 내렸다.[13]

성단이 내려진 후, 육군성 군무국 막료를 중심으로 한 강경파 청년 장교들은 쿠데타를 계획했다. 8월 13일, 이들은 아나미에게 계획을 제시하며 동참을 요구했지만, 아나미는 "천황의 의지에 반해서는 안 된다"며 거부 의사를 밝혔다. 그는 참모총장 우메즈 요시지로와 협의 후 쿠데타 계획을 중단시켰다.[13]

8월 14일 오전 11시, 다시 열린 어전 회의에서 아나미 등은 여전히 조건부 항복을 주장했지만, 히로히토 천황은 재차 종전 의사를 분명히 했다. 아나미는 통곡하며 천황에게 매달렸지만, 천황은 "아난, 아난, 네 마음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에게는 국체를 지킬 확신이 있다"며 그를 타이르고 달랬다.[16]

같은 날, 아나미는 육군 고관 회의에서 "황군은 끝까지 어성단에 따라 행동한다"는 방침을 확정하고, 전 육군에 히로히토 천황의 뜻에 따를 것을 명령하여 쿠데타 움직임을 억제했다.[16]

3. 3. 자결과 그 의미

1945년 8월 15일 새벽, 아나미 고레치카는 "천황 폐하께 죽음으로써 사죄한다"는 유언장을 남기고 할복 자결했다.[7] 그의 자결은 일본 군국주의의 종언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평가된다. 동시에, 전 육군에 종전의 현실을 받아들이게 하는 극적인 효과를 낳았다.[19]

아나미는 포츠담 선언 수용이 불가피하다는 스즈키 간타로 수상의 의견에 반대하며, 본토 결전을 통해 유리한 항복 조건을 얻어내려 했다. 그러나 히로히토 천황이 무조건 항복에 동의하자, 아나미는 이에 따랐다.[4] 그는 8월 14일 천황의 서명이 담긴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7]

아나미의 자결은 궁성 사건과 같은 군부 내 반발을 억누르고, 일본의 항복을 이끌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죽음은 일본 육군에게 "승조필근"(承詔必謹|쇼쇼힛킨일본어)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강력한 수단이 되었다.[16]

아나미가 자결 당시 입었던 제복과 유언장은 야스쿠니 신사 옆의 유슈칸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7] 그의 묘는 도쿄도 후추시에 있는 타마 묘지에 있다.

3. 4. 사후 평가와 논란

아나미 고레치카의 자결은 일본 군국주의의 종언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행동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7]

일부에서는 아나미가 종전을 바라는 쇼와 천황의 진심을 헤아려, 묵시적으로 스즈키 간타로 수상과 협력하여 종전 계획을 수행했다고 본다. 이 견해에 따르면, 항복에 반발하는 군의 폭발을 막기 위해 스스로는 강경한 언행을 하여 항전파를 가장했다는 것이다. 이를 腹芸설이라고 부른다.[7]

반면, 아나미가 내각 회의에서의 발언 그대로 항전하여 본토 결전에서 연합군에게 일격을 가하고, 국체 옹호 등 유리한 조건을 인정받은 후에 강화 조약을 체결하려 했다는 견해도 있다.

자결 직전 "요나이를 쳐라."라고 말한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17] 실제로는 최후까지 항전파였던 것이 아니냐는 논란도 있다.

4. 가족 관계

阿南 綾子|아나미 아야코일본어 (竹下 平作|다케시타 헤이사쿠일본어 육군 중장의 둘째 딸)와 결혼하여 슬하에 5남 2녀를 두었다.

아나미 고레치카의 가족 관계[22][23][24][25]
관계이름비고
부인阿南 綾子|아나미 아야코일본어竹下 平作|다케시타 헤이사쿠일본어 육군 중장의 둘째 딸
장남阿南 規高|아나미 노리타카일본어1921년 출생, 전 방위대학교 교수
차남阿南 惟敬|아나미 고레아키일본어1923년 출생, 육군 少尉|소위일본어, 1943년 전사
장녀아키토미 기미코1926년 출생, 秋富 政義|아키토미 마사요시일본어의 아내
삼남阿南 規正|아나미 노리마사일본어1933년 출생, 전 신일본제철 부사장, 야스쿠니 신사 氏子|씨족일본어 총대
차녀오쿠니 사토코1936년 출생, 大國 昌彦|오쿠니 마사히코일본어 전 오지 제지 사장의 아내
사남野間 惟道|노마 고레미치일본어1937년 출생, 野間|노마일본어가 양자, 전 고단샤 사장
오남阿南 惟茂|아나미 고레시게일본어1941년 출생, 전 주중 일본 대사



당시 군인 사회에서는 아내 외의 여성 관계를 무용담처럼 자랑하는 것이 흔했지만, 아나미는 염문에 전혀 흥미를 보이지 않고 아내 아야코와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겼다. 군내에서는 '一本槍居士|일혈거사일본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부부 사이가 좋았다.[9] 참모 본부 재직 시절, 출장지에서 부하들이 아나미를 꾀어 매춘부도 겸하는 여관 여종을 모아 성병 예방 도구를 나눠주었지만, 아나미는 "고맙습니다"라며 주머니에 넣었다. 다음 날, '일혈거사'라는 별명을 아는 부하가 여종에게 묻자, "차를 드시고 이야기를 나누고 바로 돌아가셨지만, 돈은 제대로 받았습니다"라고 답했다. 아나미는 남에게 설교하지 않고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들지 않으며, 유흥업소 여성에게 부끄러움도 주지 않는 처세로 부하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자식 사랑도 각별했다. 아이들과 자주 놀아주고, 휴일에는 피크닉, 백화점 쇼핑, 영화, 외식에 데려갔으며, 겨울에는 스키, 여름에는 해수욕 지도를 했다. 공부하라는 말도 하지 않고, 자신도 아이 옆에 누워 잡지 キング|킹일본어이나 少年倶楽部|소년 구락부일본어를 읽을 정도였다.[9]

아버지와 같은 군인의 길을 선택한 차남 노리마사가 상덕 소탕 작전에서 전사하자, 아나미는 전선에서도 노리마사의 사진을 걸고 명복을 빌었다. 유품인 군도를 받은 후에는 자신의 굵은 칼 대신 노리마사의 가느다란 칼로 바꾸어 차고 다녔다. 자결 시에는 벗어 놓은 군복 위에 노리마사의 사진을 놓고, "노리마사와 함께 가겠다"라고 말했다.[9]

육군과 가정에서 큰 소리를 지르거나 다른 사람을 꾸짖는 일이 거의 없었고, 아내 아야코는 이런 조용한 군인도 있다는 것을 신기하게 여길 정도였다. 가끔 하는 부부 싸움에서도 먼저 굽히는 쪽은 항상 아나미였다. 아나미가 아야코 앞에서 유일하게 목소리를 높여 화를 낸 것은, 아나미의 어머니가 운전수에게 무례한 말을 들었을 때뿐이었다. 아나미는 존경하던 어머니가 1943년 3월에 사망하자 금주를 시작했다.[9] 아야코는 "저는, 주인이 육군 대신의 직책은 너무 무거웠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수기에서 회고했다.[9]

장녀 키미코는 도쿄 대공습 이틀 후인 5월 27일에 결혼했다. 피로연은 제국 호텔을 예약했지만, 공습으로 영업을 중단하여 구단시타의 군인 회관에서 열렸다. 전기와 수도도 끊긴 상황에서, 신부 화장은 우물물을 길어 와서 하고, 조명은 양초로 대신했다. 공습 직후의 식전에 대한 비난도 있었지만, 아나미는 아버지로서의 책무를 다하고자 직접 회장과 신관 등을 섭외하여 식을 강행했다. 마지막에는 키미코에게 "다음에 만날 때는 전쟁에서 이기고 있을 거야"라고 말했지만, "내 자식의 결혼식에 나오는 것은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각오하고 있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아나미가 자결한 후, 아야코도 뒤따라 죽고 싶었지만, 막내가 어려 뜻을 이루지 못했다. 종전 직후, 남편 스기야마 겐 대장과 함께 자결한 스기야마 부인을 조문했을 때, "정말 부럽습니다. 저에게는 어린 아이도 있어서 주인의 곁에도 갈 수 없네요…"라고 말했다. 전후에는 다른 고급 군인의 유족과 마찬가지로 국가의 지원이 없어 경제적으로 곤궁해져, 아나미의 거택을 4개로 나눠 임대하고 그 임대료로 생활비를 충당하며, 자신들은 아나미의 본적지인 오이타현 다케다시로 이사하여 1951년까지 살았다.[9] 아야코는 아이를 키운 후에 출가하여, 나가노현 清光寺|세이코지일본어에서 남편, 아들을 시작으로 전몰자의 菩提|보제일본어를 지내다 1983년에 사망했다.[9]

참조

[1] 서적 Who's Who in Twentieth-century Warfare https://archive.org/[...] Routledge 2001
[2] 서적 The Generals of World War II
[3] 뉴스 DOOMSDAYS https://web.archive.[...] 1995-08-07
[4] 서적 Encyclopedia of World War II
[5] 서적 Behind Japan's Surrender
[6] 서적 The Rising Sun: The Decline and Fall of the Japanese Empire 1936–1945 Random House 1970
[7] 서적 Downfall
[8] 서적 Japan's Longest Day Pacific War Research Society
[9] 서적 コンサイス日本人名辞典 第5版 株式会社三省堂 2009
[10] 간행물 第109師団 状況報告の件 昭和14年9月20日前第109師団長参謀本部付阿南惟幾 アジア歴史センター
[11] 간행물 第109師団 状況報告の件 昭和14年9月20日前第109師団長参謀本部付阿南惟幾 アジア歴史センター
[12] 학술자료 第二次長沙作戦の敗北原因の検討―インパール作戦と比較して 日本現代中国学会第67回全国学術大会 2017-10-28
[13] 방송 ドキュメント太平洋戦争 「一億玉砕への道 〜日ソ終戦工作〜」 NHK 1993-08-15
[14] 서적 1996
[15] 보고서 太平洋戦争における日本の戦争指導-「世界情勢判断」を中心として- 防衛省防衛研究所
[16] 서적 気の剣 剣聖十段斎村五郎 スキージャーナル
[17] 위키소스 遺書 (阿南惟幾) 1945-08-14
[18] 서적 終戦クーデター 近衛師団長殺害事件の謎
[19] 뉴스 陸軍省葬で送る(昭和20年8月17日毎日新聞(東京)) 毎日新聞 1945-08-17
[20] 서적 新人物往来社 1995
[21] 뉴스 그 후 현직 각료가 자살한 예는, 2012년 9월 10일의 마쓰시타 타다히로 재무담당대신(당시)의 예가 있다. 2012-09-10
[22] 웹사이트 大衆人事録 第10版 https://dl.ndl.go.jp[...]
[23] 웹사이트 人事興信録 第17版 上 https://dl.ndl.go.jp[...]
[24] 웹사이트 人事興信録 第19版 上 https://dl.ndl.go.jp[...]
[25] 웹사이트 人事興信録 第14版 上 https://dl.ndl.go.jp[...]
[26] 서적 絵と俳句が語る三里塚 2019-10-15
[27] 웹사이트 官報 {{NDLDC|2960982/4}} 1941-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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