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사키 다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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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야마사키 다케시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로, 1987년 주니치 드래건스에 입단하여 2013년 은퇴할 때까지 25년간 선수 생활을 했다. 1996년과 2007년 두 차례 홈런왕을 차지했으며, 2007년에는 타점왕과 베스트 나인에도 선정되었다. 2000년과 2008년 올스타전 MVP를 수상했고, 2011년에는 골든 스피릿 상을 받았다. 은퇴 당시 통산 403홈런으로 일본 프로 야구 역대 17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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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사키 다케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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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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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야마사키 다케시 |
본명 | 야마사키 다케시 |
출생일 | 1968년 11월 7일 |
출생지 | 아이치현 지타시 |
신장 | 182cm |
체중 | 110kg |
포지션 | 1루수, 외야수, 포수, 지명 타자 |
투구 | 우투 |
타석 | 우타 |
프로 입단 | 1986년 드래프트 2위 |
첫 출장 | 1989년 9월 7일 |
마지막 출장 | 2013년 10월 1일 (공식전), 2014년 3월 21일 (은퇴 경기) |
연봉 | 3,000만 엔+인센티브 (2012년) |
유튜브 채널명 | 야마사키 타케시 채널 |
유튜브 채널 URL | 야마사키 타케시 채널 |
유튜브 활동 시작일 | 2021년 1월 27일 |
선수 경력 | |
소속 팀 | 주니치 드래건스 (1987년 – 2002년, 2012년 – 2013년, 2014년) 오릭스 블루웨이브 (2003년 – 2004년)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2005년 – 2011년) |
개인 성적 (NPB) | |
타율 | 0.257 |
안타 | 1,834 |
홈런 | 403 |
타점 | 1,205 |
수상 경력 | |
올스타 선정 | 6회 (1996년, 2000년, 2007년, 2008년, 2010년, 2011년) |
홈런왕 | 2회 (1996년, 2007년) |
타점왕 | 1회 (2007년) |
베스트 나인 | 센트럴 리그 3회 (1996년, 2007년, 2009년) |
올스타전 MVP | 2회 (2000년, 2008년) |
2. 선수 경력
야마사키 다케시는 1987년 드래프트에서 주니치 드래건스에 2순위로 지명되어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오릭스 블루웨이브(2003~2004년),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2005~2011년)를 거쳐 2012년 주니치로 복귀하여 2013년 은퇴했다.
주요 선수 경력:
- 주니치 드래건스(1987년 ~ 2002년, 2012년 ~ 2013년)
- 1989년: 1군 데뷔, 20경기 출전
- 1996년: 39홈런으로 홈런왕 타이틀 획득, 베스트 나인 선정
- 1999년: 팀의 1999년 일본 시리즈 진출에 기여 (부상으로 일본 시리즈 출전은 불발)
- 2001년: FA 선언 후 주니치와 3년 재계약
- 2012년: 대타 요원으로 활약하며 팀에 공헌
- 2013년: 은퇴
- 오릭스 블루웨이브(2003년 ~ 2004년): 히라이 마사시와의 트레이드로 이적
-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2005년 ~ 2011년)
- 2007년: 퍼시픽 리그 홈런왕, 타점왕, 지명타자 부문 베스트 나인 선정
- 2008년: 올스타전 1차전 MVP
- 2009년: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 2홈런
- 2011년: 골든 스피릿 상 수상
통산 기록:야마사키는 NPB에서 27년간 선수 생활을 했으며, 통산 403개의 홈런을 기록하여 일본 프로 야구 역대 17위에 올랐다.[2]
2. 1. 프로 입단 전
야마사키 다케시는 유소년 시절부터 주니치 드래건스의 본거지인 나고야 돔에서 야구를 관람했지만, 주변 사람들이 대부분 주니치 팬이었던 것과는 달리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팬이었다.[4] 이는 규슈 출신 아버지의 영향과 더불어, "남들과 똑같은 것을 싫어하는" 성격과 "(당시 요미우리가 강했기 때문에) 강팀에 대한 동경"이 작용했기 때문이다.[4]지타 시립 사부리 초등학교[5] 4학년 때 외야수로 야구를 시작하여 주로 좌익수를 맡았다. 지타 시립 야와타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포수로 전향했다.
아이치현나고야시의 아이치 공업대학 명전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2학년 때부터 주전 포수로 활약했다.[4] 2학년 여름에는 아이치현 대회 결승전에서 도호 고등학교에 패했다. 2학년 가을, 나카무라 고 감독의 지휘 아래 신임 주장으로 임명되었다.[4] 당시 "체벌이 당연했던 시대"였지만, 나카무라 감독은 좀처럼 선수를 때리지 않았으나, 야마자키가 주장을 맡기 싫어하자 뺨을 때렸다.[4] 야마자키는 "나카무라 감독은 '야마자키는 틀에 가두면 성장하지 않는 타입이지만, 조직으로서의 규율을 알아주길 바란다'는 부모의 마음으로 자신을 주장으로 임명했을 것이다."라고 회상했다.[4] 3학년 여름까지 주장을 맡았으며, 고교 통산 56개의 홈런을 기록했지만 전국 대회 출전 경험은 없었다.
1986년 드래프트 회의를 앞두고 "지명 확실"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요미우리 입단을 원했던 반면 "주니치·난카이 호크스·히로시마 도요 카프에는 절대 가고 싶지 않다"라고 생각했다.[4] 요미우리 스카우트로부터 "절대 우리가 데려갈 테니 다른 구단과는 접촉하지 말아달라"는 연락을 받았지만,[8] 요미우리는 3개 구단 경합 끝에 아와노 히데유키를 놓치자 빗나간 1차로 키다 유후, 2차로 미즈사와 가오루를 지명했고, 팀 사정상 야마자키를 지명하지 못했다.[8] 야마자키는 "고향인 주니치에 입단하면 아는 사람도 많고, 마음껏 플레이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4] 드래프트 전 주니치 스카우트에게 "(지명되어도) 갈 생각은 없다"라고 말했지만,[9] 결국 주니치가 2차 지명으로 교섭권을 획득했다.[4] 야마자키는 "자신의 목표는 프로 야구 선수가 되는 것이었고, '최악의 경우 세 리그라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부득이 주니치 입단을 결심했다. 동시에 지명 약속을 어긴 요미우리에 대한 투지가 끓어올라 '요미우리 상대로 활약해서 자신의 이름을 전국에 알리고 싶다'라고 결심했다"라고 말했다.[4] 계약금 4000만엔, 연봉 400만엔(금액은 추정)으로 입단했다.[10](실제 계약금은 4300만엔이라고 본인 증언)[11] 등번호는 22번을 달았다.
2. 2. 주니치 드래건스 시절 (1987년 ~ 2002년)
야마사키 다케시는 1987년 드래프트에서 주니치 드래건스에 2순위로 지명되었다. 입단 초기에는 "어린 영감"이라고 불렸고, 선배들에게 혼나기도 했지만, 고마쓰 다쓰오 등에게는 귀여움을 받았다.1987년에는 1군 출전 없이 미국으로 야구 유학을 떠나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산하 루키 리그 팀에서 뛰었다. 1988년에도 1군 출전은 없었고, 2군에서 뛰었다.
1989년에는 2군에서 홈런왕과 타점왕을 차지했고, 1군에서도 20경기에 출전했다. 9월 7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전에서 1군 첫 출전을 했고, 9월 10일 야쿠르트 스왈로스전에서 첫 안타를 기록했다. 10월 15일 히로시마전에서는 포수로 선발 출전했지만, 쇼다 고조에게 5도루를 허용하며 "포수 실격"이라는 낙인이 찍혔고, 외야수로 전향하게 되었다.[13]
1990년에는 2군에서 2관왕을 차지했지만, 1군에서는 5경기 출전에 그쳤다. 12월에는 지인의 가게를 방문한 뒤 인근 정육점 화재 현장에서 일가족을 구출하여 표창을 받았다.[14]
1991년에는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전에서 프로 첫 홈런을 기록했지만, 타율 .140으로 저조했다.
1992년에는 감독이 다카기 모리미치로 교체되면서 40경기에 출전했고, 타율 .236, 4홈런으로 성적이 향상되었다. 8월 19일 히로시마전에서는 가와구치 가즈히사에게서 끝내기 홈런을 기록했다.[16]
1993년에는 77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270, 3홈런 17타점을 기록했다.
1994년에는 히코노 도시카쓰의 복귀 등으로 출전 기회가 줄었다.
1995년에는 프로 복서 야쿠시지 보에이에게 복싱 연습을 배웠다. 외야진과 멜 홀의 부진으로 출전 기회가 늘어, 16홈런을 기록했다. 시즌 후 호시노 센이치 감독의 지시로 22kg을 감량했다.[17]
1996년에는 감량 효과로 체질이 변하고, 타격 방법을 배우면서 홈런을 양산했다. 6월에는 월간 MVP로 선정되었고, 올스타전에도 출전했다. 최종적으로 39홈런으로 오토요, 마쓰이 히데키를 제치고 홈런왕을 차지했다. 타율 .322(리그 4위), 107타점을 기록하고, 리그 최고 장타율(.625)을 기록하며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5월 1일 요미우리전에서는 발비노 갈베스와의 난투극으로 퇴장당하기도 했다.
1997년에는 나고야 돔으로 홈구장이 이전되면서 수비 부담이 늘어 타격 성적이 하락했고, 팀은 리그 최하위에 머물렀다.
1998년에는 좌익수에서 1루수로 전향했다. 8월 18일 야쿠르트전에서 통산 100호 홈런을 기록했다. 27홈런으로 리그 3위를 기록했고, 최다 승리 타점(16타점)으로 표창받고, 최우수 JCB·MEP상을 수상했다.
1999년에는 주로 6번 타자로 출전했고, 5월 9일 히로시마전에서 3타석 연속 홈런을 기록했다. 9월 26일 한신전에서는 9회 말 후쿠하라 시노부에게서 역전 끝내기 3점 홈런을 쳤다.[26] 그러나 9월 30일 리그 우승 결정 경기에서 왼손목이 골절되어 일본 시리즈에는 출전하지 못했다.
2000년에는 오픈전에서 스파이크 슈즈를 잊어버려, 스파이크를 신지 않고 타석에 서는 스타일로 경기에 출전했다.[30] 7월 12일 한신전에서 통산 150호 홈런을 기록했다. 올스타전에서는 MVP로 선정되었다. 타율 .311(리그 7위)을 기록했지만,[31] 홈런은 18개로 적다는 지적을 받았다.
2001년에는 10월 6일 히로시마전에서 통산 1000경기 출전을 달성했다. 팀 최다인 25홈런을 기록했지만, 타율(.238)과 타점(51타점)이 낮다는 이유로 FA를 선언했다. 야마다 히사시 감독의 설득으로[32] 주니치와 3년 계약을 맺고 잔류했다.
2002년에는 부진으로 2군으로 강등되었고, 7월에 1군에 복귀했지만, 7월 26일 한신전에서 9회 초 1사 만루 찬스에서 삼진을 당했다. 야마다 감독은 "팀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선수가 있다"고 발언했고, 야마자키는 이에 불신감을 드러냈다.[33] 이후 출전 기회가 줄었고, 시즌 종료 후 구단에 트레이드를 요청했다. 2003년 1월 히라이 마사시와의 트레이드로 오릭스 블루웨이브로 이적했다.
2. 3. 오릭스 블루웨이브 / 오릭스 버펄로스 시절 (2003년 ~ 2004년)
1월 상순, 히라이 마사시와의 교환 트레이드로 오릭스 블루웨이브로 이적했다.[33] 이적 후 등번호는 '''5'''번을 받았다. 야마사키는 이적 당시 "슬픔보다는 오히려 '나를 내보낸 주니치를 되갚아주겠다'는 기세가 더 컸다"고 회고했다.[33]2. 4.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시절 (2005년 ~ 2011년)
연도 | 주요 내용 |
---|---|
2005년 | 오릭스에서 이적하여 팀의 중심 타자로 활약했다. |
2007년 | 4월 1일, 호세 페르난데스와 함께 한 이닝에 만루 홈런을 기록했다.[1] 퍼시픽 리그 홈런왕과 타점왕을 차지했으며, 지명타자 부문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
2008년 | 올스타전 1차전 MVP를 수상했다. |
2009년 |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 2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
2011년 | 언론 투표를 통해 "야구, 스포츠 정신, 지역 사회 참여, 그리고 팀 기여를 가장 잘 보여주는" NPB 선수에게 수여되는 골든 스피릿 상을 수상했다.[2] |
2. 5. 주니치 드래건스 복귀 (2012년 ~ 2013년)
山﨑 武司|야마사키 다케시일본어는 2011년 시즌 후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에서 주니치 드래건스로 복귀했다.2012년에는 대타 요원으로 활약하며, 5월 13일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전(세이부 돔)에서 9회초에 오카모토 아쓰시로부터 대타 결승 2점 홈런을 날렸다.[43] 7월 12일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전(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는 8회초에 야마구치 슌으로부터 대타 동점 2점 홈런을 날렸다.[44] 8월 16일 요미우리전(나고야 돔)에서는 3대 3으로 맞선 9회말 2사 1, 2루 상황에서 야마구치 데쓰야로부터 중견수 앞 끝내기 안타를 쳤다.[45]
2013년에는 6월 9일 지바 롯데 마린스전(QVC 마린필드)에서 8회초에 나카고 아키라로부터 대타 2점 홈런을 날렸다.[46] 8월 3일 요미우리전(나고야 돔)에서는 6회말에 스기우치 도시야로부터 대타 2점 홈런을 날려, 이것이 현역 마지막 홈런이 되었다.[47]
야마사키는 2013년 시즌을 끝으로 27년간의 현역 생활을 마감했다. 9월 28일 한신 타이거스전(나고야 돔)에서 은퇴 경기가 열렸고, 4번 지명타자로 선발 출전했다.[48] 1회말 2사 만루 상황에서 첫 타석에 들어섰지만, 랜디 메신저에게 2루 땅볼로 물러났다.[49] 3회말 두 번째 타석에서는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났다.[50] 6회초 수비부터 모리노 마사히코와 교체되어 벤치로 물러났다.[51] 8회말 2사 1루 상황에서 대타로 다시 타석에 들어섰지만, 가토 고스케에게 2루 땅볼로 물러났다.[52] 경기 후에는 은퇴식이 거행되었다.[53] 10월 4일에는 NPB에서 임의 은퇴가 공시되었다.[54]
2014년 3월 21일, 주니치는 라쿠텐과의 오픈전(나고야 돔)을 "야마사키 다케시 은퇴 경기"로 치르기 위해 그를 하루 한정으로 지배하 선수로 등록했다.[62] 3월 20일에 지배하 선수로 등록되었으며,[63] 프로 야구 최저 연봉인 420만 엔을 300일로 나눈 1만 4천 엔에 계약했다. 등번호는 20번으로 등록되었지만, 경기에서는 주니치 시절 사용했던 22번을 오노 유다이의 승인을 얻어 사용했다.[64] 4번 지명 타자로 출전하여[65] 1회 1사 1, 2루에서 노리모토 다카히로를 상대로 2루 땅볼 병살타로 물러났다. 3월 24일, 다시 임의 은퇴 공시가 이루어졌다.[66]
3. 은퇴 후
현역 시절부터 자동차 경주에 관심을 가졌으며, 아마추어 드라이버로서 Project μ와 INGING의 지원을 받아 토요타가 주최하는 GAZOO Racing 86/BRZ Race에 참전할 방침을 2014년 초에 밝혔다. 참전을 위해 모터스포츠 라이선스를 새롭게 취득해야 했으며, 프로 야구 시즌 중에는 해설자로서의 활동을 우선시해야 했기 때문에 같은 해 시리즈에는 스폿 참전(일부 경기만 참가)했다.[69] 7월 26일, 후지 스피드웨이에서 열린 제6전에 토요타 86으로 레이스에 데뷔, 예전 등번호에 해당하는 7번의 제킷을 입고 결승 B 레이스를 30위로 완주했다.[70][71] 이후에도 같은 레이스의 클럽맨 시리즈(아마추어 클래스)에 계속 참전하여, 2018년 개막전에서는 3위로 시상대에 올랐다.[72]
4. 선수로서의 특징
야마사키 다케시는 배트를 휘두르는 힘과 넓은 타격 범위를 가진 선수였다. 공을 최대한 몸쪽으로 끌어당겨 치는 독특한 타격 폼을 가졌으며, 이는 변화구에 대한 대처 능력을 높여주었다.[77]
노무라 가쓰야 감독의 지도는 야마사키의 선수 경력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삼진을 두려워하지 말고 과감하게 스윙하라"는 노무라 감독의 조언은 야마사키가 삼진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자신의 타격을 더욱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노무라 감독에게서 데이터 분석과 투구 예측을 배워 타격 능력을 한층 더 끌어올렸다.[76]
수비에서는 주로 1루수로 활약했지만, 통산 22경기에서 2루수로 출전하기도 했다.
5. 인물
야마자키 다케시는 성격이 급하고 싸움을 잘하며, 때로는 심판 판정에 격하게 반응하기도 했다. 로스앤젤레스 유학 시절에는 코치에게 반항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지만, 어머니의 꾸지람을 듣고 반성했다. 중학교 시절에는 야구부와 씨름부에서 모두 활약했으며, 특히 씨름에서는 아이치현 대회에서 우승하고 전국 대회에도 출전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82]
프로 야구 선수로 활동하면서 여러 별명을 얻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자이안'이다. 이는 외모와 성격, 그리고 이름('타케시')이 만화 도라에몽의 등장인물인 자이안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또한, 같은 팀에 나카무라 타케시가 있을 때는 둘을 구분하기 위해 '야마자키' 또는 '자이안'으로 불렸다.[47]
취미는 미니카와 RC카 수집이다. 특히 미니카는 5000대 이상을 소장하고 있으며, 전문 잡지에 소개되기도 했다. 야마모토 마사와 함께 RC카 레이스 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자동차에도 관심이 많아 페라리, 메르세데스-벤츠 등 다양한 차를 소유했으며, 은퇴 후에는 아마추어 레이싱 드라이버로 활동하기도 했다.[83]
좋아하는 음식은 새우튀김이며, 자신이 직접 프로듀스한 도시락과 카레, 닭날개 요리 등을 출시하기도 했다. 술은 전혀 마시지 못하지만, 주변에서는 술고래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84]
자원봉사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는데, 주니치 시절 아동 시설 방문을 계기로 매년 산타클로스 분장을 하고 시설을 방문하는 것이 연례행사가 되었다.
야구에서는 오른손잡이였지만, 식사할 때는 왼손으로 젓가락이나 스푼을 사용한다. 펜은 오른손으로 사용한다.[87][88]
1999년 5월 21일부터 등록명을 호적상의 표기인 '야마자키'에서 '야마자키'로 변경했다.
5. 1. 노무라 가쓰야와의 관계
야마자키 다케시는 라쿠텐 시절 노무라 가쓰야 감독 취임 소식을 듣고 자신과는 야구관이 맞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여 처음에는 야구 인생의 종말을 느꼈다고 한다.[73] 그러나 관계가 깊어지면서, 하기 싫다고 생각했던 야구를 다시 재미있다고 느끼게 해준 은인으로 여기게 되었고, 현역 시절부터 현재까지 노무라 감독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여러 방면에서 표현하고 있다.야마자키는 노무라 감독에 대해 "처음 이야기를 나눴을 때 완전히 부정당했었죠. 잘 해나갈 수 있을까, 그런 불안으로 시작했는데, 날마다 좋은 말씀을 듣고, 귀여움도 받았습니다. 노무라 감독님이 아니었다면 두 번째 홈런왕은 절대 없었을 겁니다. 발을 뻗고 잘 수가 없죠."라고 말했다. 또, "나이가 들면 파워도 스피드도 모든 면에서 쇠퇴합니다. '마지막에 쓰는 건 머리다, 머리를 써라'라고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어떻게 (머리를) 써야 할지 몰랐는데, 타이틀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라며 노무라 감독의 가르침을 회상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야구를 좋아하게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더욱더 야구를 좋아하라'고 하셨습니다."라고 덧붙였다.[74]
또한 "사실, 저는 어릴 때부터 '야구를 강요받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즐겁지 않았습니다. 정말 싫어했습니다. 현역을 27년 동안 했지만, 야구가 즐겁다고 생각한 것은 노무라 감독님과 함께한 4년뿐입니다."라며 "저에게 노무라 감독님은 아버지입니다. 야구 외에도 귀여움을 받았습니다. 계속 아버지라고 생각하고 은퇴 후에도 교류했습니다."라고 밝혔다.
야마자키는 "저는 이런 성격이라 '감독님을 헹가래 쳐주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자신을 위해, 가족을 위해 야구를 했습니다. 하지만 노무라 아버지(오야지)만은 달랐습니다. 유일하게 '헹가래를 쳐주고 싶다'고 생각한 감독님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75]
6. 수상·타이틀 경력
야마사키 다케시는 1996년과 2007년에 홈런왕을 차지했는데, 양대 리그에서 모두 홈런왕을 차지한 역대 3번째 선수였다.[92] 2007년에는 타점왕도 차지했고, 1998년에는 최다 결승타점을 기록하여 특별상을 받았다.
베스트 나인에는 세 차례(1996년 외야수 부문, 2007년과 2009년 지명 타자 부문) 선정되었다. 1996년과 1998년에는 각각 우수, 최우수 JCB·MEP상을 수상했고, 월간 MVP는 세 차례(1996년 6월, 2007년 5월, 2008년 3·4월) 수상했다.
올스타전에서는 두 차례(2000년 2차전, 2008년 1차전) MVP를 차지했고,[93] 2007년 2차전에서는 우수 선수상, 2010년 1차전에서는 베스트 플레이상을 받았다. 2007년에는 갈리버상을 수상했다.
이 외에도 2007년 호치 프로 스포츠 대상 (야구 부문 퍼시픽 리그), 2008년 베스트 파더 옐로 리본상 (프로 야구 부문), 2010년 「조지아 혼」상, 2011년 골든 스피릿 상[93]과 타니타 건강 대상을 수상했다.
6. 1. 타이틀
6. 2. 수상
수상 내용 | 연도 | 비고 |
---|---|---|
베스트 나인 (외야수 부문) | 1996년 | |
우수 JCB·MEP상 | 1996년 | |
월간 MVP (타자 부문) | 1996년 6월 | |
최우수 JCB·MEP상 | 1998년 | |
올스타전 MVP | 2000년 제2차전 | |
베스트 나인 (지명 타자 부문) | 2007년 | |
월간 MVP (타자 부문) | 2007년 5월 | |
올스타전 우수 선수상 | 2007년 제2차전 | |
호치 프로 스포츠 대상 (야구 부문 퍼시픽 리그) | 2007년 | |
갈리버상 | 2007년 | |
월간 MVP (타자 부문) | 2008년 3·4월 | |
올스타전 MVP | 2008년 제1차전 | |
베스트 파더 옐로 리본상 (프로 야구 부문) | 2008년 | |
베스트 나인 (지명 타자 부문) | 2009년 | |
올스타전 베스트 플레이상 | 2010년 제1차전 | |
「조지아 혼」상 | 2010년도 제9회 | |
골든 스피릿 상 | 2011년 | [93] |
타니타 건강 대상 | 2011년 |
7. 주요 기록
야마사키 다케시는 일본 프로 야구(NPB)에서 24년간 선수 생활을 하며 여러 기록을 세웠다. 주요 기록은 다음과 같다.
- 2007년 4월 1일, 호세 페르난데스와 함께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에서 한 이닝에 만루 홈런을 기록했다.
- 2007년 퍼시픽 리그 홈런, 타점 부문 1위, 지명 타자 베스트 나인 선정.
- 2008년 올스타전 1차전 MVP.
- 2009년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 2개의 홈런 기록.
- 2011년 골든 스피릿 상 수상.
- 통산 403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일본 프로 야구 역대 17위에 올랐다.
- 통산 350 2루타: 2012년 7월 26일, 대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전 (나고야 돔, 역대 34번째).
7. 1. 첫 기록
항목 | 내용 | 날짜 | 상대팀 | 구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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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출장 | 9회초 엔다 세이지의 대타로 출장 | 1989년 9월 7일 | 히로시마 도요 카프 | 히로시마 시민 구장 |
첫 타석·첫 삼진 | 9회초 가와바타 준에게 삼진 | 1989년 9월 7일 | 히로시마 도요 카프 | 히로시마 시민 구장 |
첫 안타 | 9회말 나이토 나오유키에게 좌전 안타 | 1989년 9월 10일 |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 나고야 구장 |
첫 타점 | 8회초 니시모토 세이의 대타로 출장, 마츠모토 유타카에게 타점 | 1989년 9월 13일 |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 | 요코하마 스타디움 |
첫 2루타 | 5회말 가와구치 가즈히사에게 2루타 | 1989년 9월 16일 | 히로시마 도요 카프 | 나고야 구장 |
첫 선발 출장 | 8번·포수로 선발 출장 | 1989년 10월 4일 | 히로시마 도요 카프 | 히로시마 시민 구장 |
첫 홈런 | 5회초 다나베 마나부에게 장외 솔로 홈런 | 1991년 5월 9일 |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 | 요코하마 스타디움 |
첫 도루 | 6회말 2루 도루 (투수: 이가라시 히데키, 포수: 아키모토 고사쿠) | 1995년 6월 1일 |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 | 나고야 구장 |
7. 2. 기록 달성 경력
달성 내용 | 달성일 | 상대팀 | 구장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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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산 100홈런 | 1998년 8월 18일 | 야쿠르트 스왈로스 | 메이지 진구 야구장 | 역대 198번째 |
통산 150홈런 | 2000년 7월 12일 | 한신 타이거스 | 나고야 돔 | 역대 114번째 |
통산 1000경기 출장 | 2001년 10월 6일 | 히로시마 도요 카프 | 히로시마 시민 구장 | 역대 376번째 |
통산 200홈런 | 2003년 8월 19일 |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 후쿠오카 돔 | 역대 77번째 |
통산 1000안타 | 2005년 7월 2일 |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 풀캐스트 스타디움 미야기 | 역대 234번째 |
통산 1000삼진 | 2006년 8월 1일 |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 후쿠오카 Yahoo! JAPAN 돔 | 역대 39번째 |
통산 250홈런 | 2006년 8월 5일 | 오릭스 버펄로스 | 풀캐스트 스타디움 미야기 | 역대 49번째 |
통산 1500경기 출장 | 2007년 6월 14일 | 주니치 드래건스 | 풀캐스트 스타디움 미야기 | 역대 152번째 |
통산 300홈런 | 2008년 4월 3일 | 지바 롯데 마린스 | 클리넥스 스타디움 미야기 | 역대 32번째 |
양대 리그 통산 150홈런 | 2009년 6월 14일 |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 클리넥스 스타디움 미야기 | 역대 5번째 |
통산 1500안타 | 2009년 7월 8일 | 지바 롯데 마린스 | 클리넥스 스타디움 미야기 | 역대 102번째 |
통산 1000타점 | 2009년 8월 13일 |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 클리넥스 스타디움 미야기 | 역대 35번째 |
통산 350홈런 | 2009년 8월 16일 | 지바 롯데 마린스 | 클리넥스 스타디움 미야기 | 역대 23번째 |
통산 300 2루타 | 2009년 9월 19일 | 지바 롯데 마린스 | 클리넥스 스타디움 미야기 | 역대 54번째 |
통산 3000루타 | 2010년 4월 8일 |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 삿포로 돔 | 역대 46번째 |
통산 1500삼진 | 2010년 7월 7일 | 지바 롯데 마린스 | 클리넥스 스타디움 미야기 | 역대 9번째 |
통산 2000경기 출장 | 2010년 9월 22일 |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 삿포로 돔 | 역대 42번째 |
40대 100홈런 | 2011년 6월 11일 | 주니치 드래건스 | 클리넥스 스타디움 미야기 | 역대 2번째 |
통산 400홈런 | 2011년 8월 18일 |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 | 세이부 돔 | 역대 17번째 |
7. 3. 기타
- 올스타전 출장 6회 (1996년, 2000년, 2007년, 2008년, 2010년, 2011년)
- 연령별 최다 홈런: 39세 43홈런, 41세 39홈런
- 최고령(41세) 시즌 100타점 도달
- 올스타전(2010년도)에서 40대로서는 최다인 2홈런 기록
- 대타 만루 홈런: 2010년 5월 14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2차전(MAZDA Zoom-Zoom 스타디움 히로시마)
- 센트럴 리그 최고령 2루타: 44세 6개월, 2013년 6월 1일, 대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4차전 (삿포로 돔)
- 센트럴 리그 최고령 3루타: 44세 6개월, 2013년 5월 14일, 대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1차전 (나고야 돔)
- 센트럴 리그 최고령 끝내기 타: 44세 6개월, 2013년 5월 17일, 대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1차전 (나고야 돔)
8. 등번호
9. 연도별 성적
실패
번트
플라이
사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