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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주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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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엄주명은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 시기에 걸쳐 활동한 인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장교로 복무했다. 그는 중일 전쟁 당시 예비역 중위로 참전하여 일제에 협력한 행적으로 인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되었다. 광복 후에는 대한민국 육군 대령으로 한국 전쟁에 참전했으며, 예편 후 재향군인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로 선정되었고,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최종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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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주명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엄주명
한자 표기嚴柱明
로마자 표기Eom Ju-myeong
아명규성(圭成)
아호소석(小石)
규성(圭成)
출생일1896년 11월 19일
사망일1976년 2월 6일 (향년 79세)
출생지조선 한성부 서소문
사망지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1동
정당무소속
묘소알려진 바 없음
군사 경력
소속일본 제국 육군
대한민국 육군
복무 기간1930년 3월 ~ 1938년 2월 28일 (일본군)
1948년 ~ 1956년 6월 22일 (한국군)
최종 계급일본 제국 육군 중위
대한민국 육군 준장
부대중국 북부 천안 부대 (일본군)
대한민국 육군
지휘경기, 경남, 서울, 충북, 서울지구 병사구 사령관
주요 참전 전투/전쟁태평양 전쟁
한국 전쟁
기타 이력
기타 이력진명학원 교장, 이사장

2. 생애

1896년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으며, 순헌황귀비의 동생인 엄준원이다.

이은과 사촌 관계였던 인연으로, 1907년에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1908년 1월부터 도리이자카에 있는 이은 저택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 1학년 과정을 수료했다.

1911년 1월, 학습원 중등과 1학년에 입학했다.

1911년부터 1916년까지 육군중앙유년학교에 재학했다.

1916년 5월부터 11월까지 사관후보생으로 근위보병 제2연대에서 근무했다.

1916년 12월에 육군사관학교 제30기에 입학하여, 1918년 5월에 졸업했다.

견습사관을 거쳐 보병 소위로 임관하여 계속 근위 제2연대에서 근무했으며, 1923년 8월까지 현역 장교로 근무했다.

1924년 11월, 아버지가 교장이었던 진명여자고등학교에서 간사직을 맡았고, 1929년 5월에는 이사였다.

1937년 7월,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조선군 제20사단 보병 제78연대에 소집되어, 예비역 보병 중위로 중국 화북 지역에서 병참 및 선무 공작 등을 했다.

1938년 2월, 아버지가 사망하자,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이사장 겸 교장으로 취임했다.

1939년 5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국민총력조선연맹의 전신)에서 참사로 활동했고, 같은 해 11월에는 조선총독부가 전시 체제의 강화와 유교 황민화를 위해 전 조선의 유림을 동원하여 조직한 조선유도연합회의 참사를 맡았다.

1941년 8월, 훈6등 단광욱일장을 수훈했다.

1941년 8월, 조선임전보국단의 전신인 임전대책협의회 회의에 참석했고, 9월에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44년 8월부터 12월까지, 동화산업 주식회사 감사역을 맡았다.

1948년, 한국군에 입대(군번 15704번)하여 한국 전쟁 발발 중에는 육군 대령으로 진급하여, 육군 경기도지구 계엄 민사부장, 경기도지구 병사구 사령관 등을 역임했다. 1956년 6월, 육군 준장과 동시에 예비역 편입.

1956년 8월 18일 재향군인회 부회장, 1957년 대한상무회 부회장 등. 1959년 4월 24일, 대한상업은행 주주총회에서 이사 상무로 선임되었다. 또한, 같은 시기에는 진명염전 사장도 역임했다.

1961년, 일본에서 병으로 입원 중인 이은을 위문하기 위해, 김을한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그의 귀국을 추진했다.

1962년 4월 28일, 연합증권금융 주식회사 주주총회에서 전무로 선출되었다.

만년에는 병석에 누워, 1976년 2월 6일, 자택에서 노쇠로 사망했다.

2008년 4월 28일에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 대상자 군 부문에 기재되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보고서에서 "1918년 일본군 보병 소위로 임관하여 1920년대 후반까지 복무했고, 1937년 중일 전쟁 당시, 예비역 중위로 중국 화북 지역에서 일본의 전시 병참과 현지 선무 공작을 통해 일제의 침략 전쟁에 적극 협력했다", "중일 전쟁 당시의 업적으로부터 1941년에 일본 정부로부터 훈6등 단광 욱일장을 받았다"는 점을 근거로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0호 "일본 제국주의 군대의 소위 이상의 장교로서 침략 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 및 제19호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 통치와 침략 전쟁에 협력하여 포상 또는 훈공을 받은 자로서 일본 제국주의에 현저히 협력한 행위"에 해당한다고 하여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했다.

2. 1. 초기 활동

1896년 11월 19일(음력 10월 15일) 경성부 서소문에서 출생하였다. 진명여학교 초대 이사장이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낸 대한제국의 고위 무관 엄준원의 아들이며, 순헌황귀비 엄씨의 조카이다.[4][5] 영친왕 이은은 그의 고종사촌 동생이 된다. 그의 누이 엄채덕은 일제강점기의 관료, 언론인인 민원식과 결혼하였다. 처음 이름은 규성(圭成)이었다가 뒤에 주명으로 개명하였다.

사촌이자 나이가 비슷한 의민태자 이은과 어릴 때부터 덕수궁에서 함께 자란 절친한 사이였다. 1907년에 이은이 강제로 일본에 유학했을 때 순헌황귀비의 뜻에 따라 비공식 동행했다.[6] 의민태자가 일본에 볼모로 가기 전 그를 보고 "나는 규성이 하고 꼭 같이 갈 테야"하고 간절히 소원하여 같이 가게 됐다 한다.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놀고 있다가 영친왕의 눈에 띄게 되자, 곧바로 창덕궁에 들렸다가 집에 들리지 못하고 일본 도쿄로 함께 떠났다. 영친왕, 이토 히로부미 및 영친왕 수행원과 함께 선박으로 도쿄로 갔다. 1908년부터 1910년까지 도쿄시내 도리이사카의 영친왕의 관저에서 함께 생활하며, 소학교와 중학 제1학년 과정을 수학하였다. 1911년 1월 가쿠슈인 중등학과 1학년에 입학했으나 동년 9월 가쿠슈인학원 중등학과를 중퇴하고 육군중앙유년학교로 편입한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일본에서 영친왕이 엄귀비의 별세 소식을 듣고 의연하게 대응하였으나, 목욕탕에서 단 둘이 있을 때 "너도 어머니가 몹시 보고 싶지 않으냐?"면서 통곡했다 한다.

2. 2. 일제강점기 군인 및 교육 활동

엄주명은 육군중앙유년학교와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장교로 임관했다. 일본 제국 육군 보병 중위를 지냈으며, 1923년 진명 재단의 간사직에 취임하면서 진명학교 재단 평의원, 재단 이사에도 피선되었다.[7] 1916년 5월부터 11월까지 사관후보생으로 근위보병 제2연대에서 근무했다. 1916년 12월에는 육군사관학교 제30기에 입학하여, 1918년 5월에 졸업했다. 견습사관을 거쳐 보병 소위로 임관하여 계속 근위 제2연대에서 근무했으며, 1923년 8월까지 현역 장교로 근무했다.

1938년 아버지 엄준원이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재직 중 사망하자, 3월 1일 아버지의 뒤를 이어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교장이 되었다.[7] 그밖에 숙명재단의 재단 이사로도 임명되어 1965년까지 재직했다. 1940년 7월 2일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에서 협심증 판정을 받고 7월 30일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교장직을 사직하였다.

일제 강점기 말기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조선군 제20사단 보병 제78연대에 소집되어 예비역 보병 중위로 중국 화북 지역에서 병참 및 선무 공작 등을 했다. 1938년 3월중에 귀국하여 4월의 신학년도에 맞추도록 예편시키고, 군부촉탁을 해제하였다.[7] 태평양 전쟁 후반에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참사와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도 맡았다.[8] 1939년 5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국민총력조선연맹의 전신)에서 참사로 활동했고, 같은 해 11월에는 조선총독부가 전시 체제의 강화와 유교 황민화를 위해 전 조선의 유림을 동원하여 조직한 조선유도연합회의 참사를 맡았다. 1941년 8월, 훈6등 단광욱일장을 수훈했다. 1941년 8월, 조선임전보국단의 전신인 임전대책협의회 회의에 참석했고, 9월에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엄주명이 "1918년 일본군 보병 소위로 임관하여 1920년대 후반까지 복무했고, 1937년 중일 전쟁 당시, 예비역 중위로 중국 화북 지역에서 일본의 전시 병참과 현지 선무 공작을 통해 일제의 침략 전쟁에 적극 협력했다", "중일 전쟁 당시의 업적으로부터 1941년에 일본 정부로부터 훈6등 단광 욱일장을 받았다"는 점을 근거로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0호 및 제19호에 해당한다고 하여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했다.

2. 3. 광복 이후 군 복무 및 사회 활동

1948년 대한민국 육군에 입대(군번 15704번)하여 1950년 한국 전쟁 중에는 육군 대령으로 승진하여 경기도 계엄민사부장, 경기지구 병사구사령관과 위수사령관, 1952년 10월 경남지구 위수사령관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주머니 속의 먼지밖에 남기지 않고 다 남에게 주시는 성품이실 뿐만 아니라, 부하들의 실수 등을 완곡하게 타이르셨다." 한다. 한편 그는 부하들이 쓸 공문서의 오자(誤字)를 발견했을 때라도 즉석에서 나무라는 일 없이 "사전 좀 가져다 봅시다" 하며 고쳐주었고, 어려운 부하들에겐 봉급도 모두 주기도 했다. 또, 사병들이 머리를 짧게 깎도록 명해도 말을 잘 듣지 않을 때는 솔선하여 머리를 깎고 오셔서는 "내 머리가 짧으니 좋지? 어때?" 하시면서 재삼 삭발을 권고했다 한다.

1953년 5월 29일 서울지구 병사구사령관, 1953년 8월 20일 충북지구 병사구 사령관 등으로 활동하였다. 1955년 11월 14일 다시 서울지구 병사구사령관을 거쳐 1956년 6월 22일 임시 준장으로 특진과 동시에 다른 9명의 장성들과 함께 육군본부 광장에서 예편하였다.

예편 이후 1956년 8월 18일 재향군인회 부회장, 1957년 대한상무회(大韓尙武會) 부회장 등에 위촉되었다. 1959년 4월 24일 대한상업은행 주주총회에서 취체역 상무에 선임되었다. 1960년 8월 일본을 방문하여 영친왕을 면담하고 돌아왔으며 이듬해 8월에도 다시 일본을 방문하여 이은을 문병하고 돌아왔다. 5·16 군사정변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가 이은의 귀국을 추진했을 때 김을한과 함께 귀국특사로 임명되었다. 이때 일본에 파견되어 이은의 병세를 살펴보고 돌아왔다.

1962년 4월 28일 연합증권금융주식회사 주주총회에서 전무에 선출되었다. 1965년 12월에는 숙명재단의 재단 분규로 숙명재단 이사직을 사퇴했다. 1966년에는 숙명재단 재단 분규에 휘말리기도 하였다. 이후 대학교 설립을 계획하였으나 이루지 못했다. 1970년 5월 와병으로 영친왕의 빈소에는 불참하였으나 영친왕 사망 후 영친왕 장례위원회 부위원장에 피선되었다.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10번지의 자택에 있다가 만년에 정릉1동 5-50번지로 이사하였다. 이후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자택에서 병석에 누워 생활하던 중 1976년 2월 9일 협심증, 노환 등의 지병으로 사망하였다.[1] 2월 10일 진명 3.1강당에서 발인 후 양주군 미금면 금곡리(현, 남양주시 금곡동) 선영에 안장되었다.

2. 4. 사망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군 부문과 친일단체 부문에 선정되었다. 이 명단에는 아버지 엄준원도 포함되어 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3. 친일 행적 논란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군 부문과 친일단체 부문에 선정되었으며, 아버지 엄준원도 이 명단에 포함되었다.[2]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엄주명은 1937년 중일 전쟁 당시 조선군 제20사단 보병 제78연대에 소집되어 예비역 보병 중위로 중국 화북 지역에서 병참 및 선무 공작을 수행했다. 1941년에는 이러한 공로로 일본 정부로부터 훈6등 단광욱일장을 받았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엄주명이 일본군 보병 소위로 임관하여 1920년대 후반까지 복무했고, 중일 전쟁 당시 예비역 중위로서 일제의 침략 전쟁에 적극 협력한 점, 그리고 훈장을 받은 점 등을 들어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명시된 친일반민족행위에 해당한다고 결정했다.

4. 상훈 경력


  • 금성충무공훈장
  • 대통령 표창장
  • 진명재단 특별 연공상

5. 가계

증조부는 엄재우(嚴載祐)이다. 친할아버지는 엄진일(嚴鎭一)이고 친할머니는 양천 허씨이다. 양할아버지는 엄진삼(嚴鎭三, 1812년 10월 9일 ~ 1879년 7월 28일)이고 양할머니는 밀양박씨(1824년 ~ 1895년)이다. 양아버지 엄봉원(嚴鳳源)의 배우자는 이름이 전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엄준원(嚴俊源, 1855년 음력 3월 26일 ~ 1938년 양력 2월 13일)이고, 어머니는 인동 장씨이다. 8촌 종형으로 엄주익(嚴柱益, 1872년 6월 26일 ~ 1931년 4월 16일)이 있었다. 부인은 인동 장씨이다.

6. 기타

신용과 정직을 생활 신념으로 삼았으며, 평소 학생과 청년들에게 "사소한 약속을 하찮게 여기는 자와는 상종하지 말라", "작은 것을 하찮게 여기는 자를 경계하라"고 하였다. 또 "시간 약속을 안 지키는 사람과는 결코 상대하지 말라" 하였고, "언제나 남의 입장과 내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하라"고 하였다.

참조

[1] 뉴스 진명학원이사장 엄주명씨별세 https://www.mk.co.kr[...] 1976-02-09
[2] 뉴스 [명단] 친일인명사전 수록 대상자 4776명 http://www.ohmynews.[...] 2008-04-29
[3] 뉴스 진명학원이사장 嚴柱明씨 별세 조선일보 1976-02-08
[4] 서적 제국의 후예들 황소자리 2006-05-25
[5] 국사편찬위원회 인물 엄준원
[6] 서적 제국의 후예들 황소자리 2006-05-25
[7] 저널 戰勝 士官의 凱旋 手記
[8] 서적 일제협력단체사전 - 국내 중앙편 민족문제연구소 2004-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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