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타임라인 바로가기

오긍선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타임라인 바로가기

1. 개요

오긍선은 1878년 충청남도 공주에서 태어난 한국의 의사이자 교육자, 사회 사업가이다. 배재학당과 미국 유학을 거쳐 센트럴 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미국 의사 면허를 취득한 후, 1907년 귀국하여 의료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군산, 목포 등지에서 의료 선교사로 활동하며,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를 역임하며 한국 의학 발전에 기여했다. 또한, 경성보육원과 경성양로원을 설립하여 사회 봉사에도 헌신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친일 행적을 보였으나, 해방 후에는 한국민주당에 참여하고 사회 사업에 전념했다. 그는 사회 사업 공로와 의학교육 공로를 인정받아 포상되었으며,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선정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켄터키 주립 대학교 동문 - 잉락 친나왓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여동생인 잉락 친나왓은 2011년 푸어타이당의 승리로 태국 총리가 되어 최저임금 인상, 쌀 수매 정책 등의 경제 정책과 무료 태블릿 PC 보급 등의 사회 정책을 추진했으나 2014년 탄핵 후 해외로 도피한 정치인이다.
  • 켄터키 주립 대학교 동문 - 조정환 (외교관)
    대한민국의 외교관인 조정환은 켄터키 주립대학교에서 역사학 학사, 비리야 대학교에서 정치학 석사, 미시간 주립 대학교에서 외교학 사회과학 석사, 연희대학교 대학원에서 행정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 루이빌 대학교 동문 - 테리 비슨
    테리 비슨은 미국의 과학 소설 및 판타지 소설 작가이자 평화 운동가로, 학생 평화 운동 참여 후 전업 작가로 활동하며 다양한 작품 활동을 펼쳤고, 여러 권위 있는 상을 수상했다.
  • 루이빌 대학교 동문 - 지나 해스펠
    지나 해스펠은 미국의 정보기관 관리로서 CIA에서 33년간 근무하며 다양한 요직을 거쳐, 2018년 CIA 최초의 여성 국장이 되었으나 과거 고문 의혹으로 논란이 되었고 2021년 은퇴 후 킹 & 스팔딩 법률 회사의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 대한민국의 자유주의자 - 문재인
    대한민국의 제19대 대통령인 문재인은 인권 변호사 출신으로 노무현 정부의 핵심 측근을 지냈으며, 2017년 대통령에 당선되어 국민 통합, 남북 관계 개선, 검찰 개혁 등을 추진했으나 부동산 정책 실패와 코로나19 팬데믹, 재보궐선거 참패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퇴임 후 양산 평산마을에서 생활하고 있다.
  • 대한민국의 자유주의자 - 마광수
    마광수는 대한민국의 국문학자이자 작가, 대학교수로, 시인과 소설가로 활동하며 성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문학관으로 기성 문단과 갈등을 빚었고, 소설 《즐거운 사라》로 외설 논란에 휩싸인 인물이다.
오긍선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오긍선
그림
출생일1878년 10월 4일
출생지조선 충청도 공주목
필명자(字)는 중극(重克)
호(號)는 해관(海觀)
국적대한민국
사망지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사망일1963년 5월 18일
장르피부과의학교육 저술
내과의학교육 저술
사회복지사업학교육 저술
종교유교(성리학) → 개신교(장로회)
학력
학력일본 도쿄 제국대학교 의과대학원 의학박사
가족
부모아버지 오인묵(吳仁默)
어머니 한산 이씨 부인(韓山 李氏 夫人)
배우자밀양 박씨 부인(密陽 朴氏 夫人)
자녀오한영(장남), 오진영(차남)
친척오현주(누이동생)
강낙원(매제)
윤의경(차자부)
윤보선(사돈)
경력
직업의학자
경력前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장
前 서울대 의과대학 대우교수
前 고려대 의과대학 대우교수
연세대 의과대학 명예교수
활동 기간1896년 ~ 1963년
수상
수상문화훈장
사용 언어
사용 언어한국어, 영어, 일본어, 중국어, 러시아어

2. 생애

오긍선은 1878년 10월 4일 충청남도 공주군 사곡면 운암리에서 사헌부 감찰을 지낸 아버지 오인묵(吳仁默)과 어머니 한산 이씨(韓山李氏)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영의정 오윤겸의 9세손이다. 9세 때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고 15세 때부터 과거 시험을 준비했으나 갑오개혁으로 과거제가 폐지되자, 1896년 스승의 추천을 받아 내부 주사로 근무했다.

1897년 배재학당 학생으로서 독립협회에 가입했고, 배재학당 안에 조직된 학생단체인 협성회의 간사로 활동했다.[1] 이승만과 함께 협성회 간부로서 청년 계몽사상가를 길러내고 지도하는데 노력하였다. 이승만 등과 협성회, 만민공동회 간부로 활동하던 중 척족파와 대한제국 정부에 날조된 만민공동회 사건으로 체포령이 내려지자 공주에서 포교활동을 하던 침례교 선교사 스테드만(Steadman)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사태가 곧 진정되자 상경하여 1900년 배재학당을 졸업한 그는 스테드만의 한글 교사, 동역자로 활동하였다.[1] 이후 스테드만이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 소개해 준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사 불(Bull, 부위렴)의 한글교사와 조사로 활동하였다. 1902년 12월부터는 군산야소병원으로 부임한 의료선교사 알렉산더(A. J. A. Alexander)의 어학교사를 겸하였다.[1]

1907년 10월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부로부터 한국 파견 선교사 자격을 얻어 귀국하였다. 1913년 세브란스병원장 에비슨(Avison)의 추천으로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최초의 조선인 교수가 되었고, 1916년 4월 도쿄제국대학 의학부에서 피부비뇨기과학을 전공했다. 1917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피부과교실을 신설하고 과장 겸 주임교수로 취임했다. 1918년 토요구락부를 조직하여 시국문제를 토론했고, 1920년 1월 경성고아구제회에 참여했으며, 1922년부터 재단법인 경성보육원 이사로 활동했다.[1]

1931년 경성양로원을 설립, 윤치호를 원장으로 추대하였으나 오긍선 자신이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수직과 함께 양로원의 실질적인 업무를 총괄하였다. 1936년부터는 양로원의 제2대 원장으로 취임하였다. 1920년대부터 유행하던 청소년과 미성년자의 음주담배, 대마초 흡연의 유해성을 알리고 이를 금지, 자제할 것을 촉구하였다. 또한 공창제폐지기성회에 참여하여 창녀촌과 매춘업 금지와 폐지를 촉구하였다. 한편 조선총독부 학무국을 상대로도 청소년과 미성년자의 흡연음주 금지 법안을 제정할 것을 요구하였다. 1934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제2대 교장에 올랐다.

1945년 광복 직후, 오긍선은 한민당계에 합류하였고, 9월 9일 미군 24군단이 입성했을 때 미군정 장관 등을 만나 인공과 건준은 "일본과 협력한 한인 집단"에 의해 조직되었으며, 여운형은 "한인들에게 잘 알려진 부일 협력 정치인"이라고 왜곡하여 주장하였다.[4][5] 또한 해방 직후에 출범한 조선피부비뇨기과학회 명예회장에 추대되었다.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그에게 친서를 보내 미군정 민정장관을 권하였지만 사양하였다. 1946년 전국사회사업연맹 이사장에 추대되었다. 1948년에는 대한기독교서회 이사로 참여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관계에 진출하라는 주변의 권유를 뿌리치고 안양기독보육원장으로서만 진력하였는데, 한때 불우한 처지에 빠진 나혜석을 돌보는 한편 일본에서 불우한 생활을 하던 김명순을 국내로 데려오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제1공화국 초반 이승만의 거듭된 출사 요구로 구 황실 재산관리총국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이후 대한성서공회 이사장, 기독교청년회 이사, 서울여자의과대학 재단이사 등을 지냈다. 이승만 대통령은 사회부장관을 제의했으나 모두 거절했다.

1950년 대한기독교성서공회 이사장이 되고, 그해 YMCA의 이사를 겸임했으나 곧 사퇴했다. 1950년부터 1951년 다시 부산 피란 시절에 구 황실재산관리총국 국장직을 맡았으나 이승만과의 불화로 그만두었다. 그가 잠시나마 공직을 맡은 이유는 비록 주사였지만 한때 황실의 은혜를 입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구황실에 대한 이승만의 태도와 정부의 처사가 너무 야박하다고 생각하여 이를 따졌다가 이승만 대통령과 갈등했고, 결국 총국장 직을 사직했다. 이후 사회사업에 전념하였다. 1952년 한국사회사업연합회 회장에 추대되었다. 그밖에 중앙노동위원회 대표위원을 맡기도 했다.

1963년 5월 18일 서울 서대문구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한편 그는 운명할 때 '이제 여관에 있다가 이제 내 집으로 돌아간다'는 유언을 남겼다 한다. 5월 22일 신문내예배당에서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의해 의과대학장으로 장례식을 거행한 뒤 경기도 양주 망우리에 장사하였다.

2. 1. 초기 생애 (1878년 ~ 1907년)

오긍선은 1878년 10월 4일 충청남도 공주군 사곡면 운암리에서 사헌부 감찰을 지낸 아버지 오인묵(吳仁默)과 어머니 한산 이씨(韓山李氏)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영의정 오윤겸의 9세손이다. 9세 때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고 15세 때부터 과거 시험을 준비했으나 갑오개혁으로 과거제가 폐지되자, 1896년 스승의 추천을 받아 내부 주사로 근무했다.

1897년 배재학당 학생으로서 독립협회에 가입했고, 배재학당 안에 조직된 학생단체인 협성회의 간사로 활동했다.[1] 이승만과 함께 협성회 간부로서 청년 계몽사상가를 길러내고 지도하는데 노력하였다.

이승만 등과 협성회, 만민공동회 간부로 활동하던 중 척족파와 대한제국 정부에 날조된 만민공동회 사건으로 체포령이 내려지자 공주에서 포교활동을 하던 침례교 선교사 스테드만(Steadman)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사태가 곧 진정되자 상경하여 1900년 배재학당을 졸업한 그는 스테드만의 한글 교사, 동역자로 활동하였다.[1] 이후 스테드만이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 소개해 준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사 불(Bull, 부위렴)의 한글교사와 조사로 활동하였다. 1902년 12월부터는 군산야소병원으로 부임한 의료선교사 알렉산더(A. J. A. Alexander)의 어학교사를 겸하였다.[1]

1907년 10월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부로부터 한국 파견 선교사 자격을 얻어 귀국하였다.

2. 1. 1. 출생과 가계

해관 오긍선은 1878년 10월 4일 충청남도 공주군 사곡면 운암리에서 사헌부 감찰을 지낸 아버지 오인묵(吳仁默)과 어머니 한산 이씨(韓山李氏)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영의정 오윤겸의 9세손이다. 9세 때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고 15세 때부터 과거 시험을 준비했으나 갑오개혁으로 과거제가 폐지되자, 1896년 스승의 추천을 받아 내부 주사로 근무했다.

2. 1. 2. 배재학당 수학과 계몽 운동

배재학당 학생으로서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했고, 배재학당 안에 조직된 학생단체인 협성회의 간사로 활동했다.[1] 이승만과 함께 협성회 간부로서 청년 계몽사상가를 길러내고 지도하는데 노력하였다.

그 뒤 이승만 등과 협성회, 만민공동회 간부로 활동하던 중 척족파와 대한제국 정부에 날조된 만민공동회 사건으로 체포령이 내려지자 공주에서 포교활동을 하던 침례교 선교사 스테드만(Steadman)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사태가 곧 진정되자 상경하여 1900년 배재학당을 졸업한 그는 스테드만의 한글 교사, 동역자로 활동하였다.[1]

2. 1. 3. 만민공동회 사건과 피신

배재학당 학생으로서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했고, 배재학당 안에 조직된 학생단체인 협성회의 간사로 활동했다.[1] 이승만과 함께 협성회의 간부로 청년 계몽사상가를 길러내고 지도하는데 노력하였다.

이후 이승만 등과 협성회, 만민공동회의 간부로 활동하던 중 척족파와 대한제국 정부에 의해 날조된 만민공동회 사건으로 체포령이 내려지자 공주에서 포교활동을 하던 침례교 선교사 스테드만(Steadman)의 집으로 피신하였다.[1] 사태가 곧 진정되자 상경하여 1900년 배재학당을 졸업한 그는 스테드만의 한글 교사, 동역자로 활동하던 중, 스테드만이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 소개해 준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사 불(Bull, 부위렴)의 한글교사와 조사로 활동하였다. 이후 1902년 12월부터는 군산야소병원으로 부임한 의료선교사 알렉산더(A. J. A. Alexander)의 어학교사를 겸하였다.[1]

2. 1. 4. 미국 유학과 의학 공부

1907년 10월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부로부터 한국 파견 선교사 자격을 얻어 귀국하였다. 그해 9월 전라북도 옥구군 군산에 세워진 야소병원에서 다니엘의 조수로 근무를 시작하였다. 한편 자신의 사재와 월급 등을 기부하여 1909년 옥구군의 구암교회 예배당을 설립, 헌당하였다. 또한 교육선교사업에도 관심을 쏟아 군산에 안락학교와 영명학교를 세웠다.[4]

1908년 11월, 선교부의 지시로 군산을 떠나 전라남도 목포로 가서 목포진료소장으로 취임하였고, 1909년 5월에 군산야소병원장으로 부임하였다. 그리고 1911년 9월에 목포 앳킨슨병원장으로 부임하였다. 그곳에 있는 영흥학교 교장직을 수행하며 교육 사업에 힘쓰던 중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부 대표 자격으로 세브란스의학교 조교수 겸 진료의사로 전임하였다.[4]

2. 2. 의사 및 교육 활동 (1907년 ~ 1942년)

1913년 세브란스병원장 에비슨(Avison)의 추천으로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최초의 조선인 교수가 되었고, 1916년 4월 도쿄제국대학 의학부에서 피부비뇨기과학을 전공했다. 1917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피부과교실을 신설하고 과장 겸 주임교수로 취임했다. 1918년 토요구락부를 조직하여 시국문제를 토론했고, 1920년 1월 경성고아구제회에 참여했으며, 1922년부터 재단법인 경성보육원 이사로 활동했다.[1]

경성보육원은 김병찬 장로가 거지 아이들을 돌보던 고아원에서 시작되어 법인화되면서 윤치호가 원장에 추대되었다.[1] 오긍선은 보육원의 실질적인 업무를 관장하다가 원장이 되었으며, 경성양로원을 인수하여 운영하기도 했다.[1] 또한 미국 남장로교회를 설득하여 고아원과 장애 아동, 소외 계층을 돕는 일의 필요성을 역설했다.[1]

1931년 경성양로원을 설립, 윤치호를 원장으로 추대하였으나 오긍선 자신이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수직과 함께 양로원의 실질적인 업무를 총괄하였다. 1936년부터는 양로원의 제2대 원장으로 취임하였다.

2. 2. 1. 귀국과 초기 의료 활동

1907년 10월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부로부터 한국 파견 선교사 자격을 얻어 귀국하였다. 그해 9월 전라북도 옥구군 군산에 세워진 야소병원에서 다니엘의 조수로 근무를 시작하였다. 한편 자신의 사재와 월급 등을 기부하여 1909년 옥구군의 구암교회 예배당을 설립, 헌당하였다. 또한 교육선교사업에도 관심을 쏟아 군산에 안락학교와 영명학교를 세웠다.

1908년 11월, 선교부의 지시로 군산을 떠나 전라남도 목포로 가서 목포진료소장으로 취임하였고, 1909년 5월에는 군산야소병원장으로 부임하였다. 1911년 9월에는 목포 앳킨슨병원장으로 부임하여 그곳에 있는 영흥학교 교장직을 수행하며 교육 사업에 힘썼다. 이후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부 대표 자격으로 세브란스의학교 조교수 겸 진료의사로 전임하였다.

2. 2. 2.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 활동

1913년 세브란스병원장 에비슨(Avison)의 추천으로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최초의 조선인 교수가 되었고, 일본 정부의 주선으로 1916년 4월 도쿄제국대학 의학부에서 피부비뇨기과학을 전공, 수학하였다. 1917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피부과교실을 신설하고 과장 겸 주임교수로 취임했다. 1920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감이 되었다.

1920년대부터 유행하던 청소년과 미성년자의 음주담배, 대마초 흡연의 유해성을 알리고 이를 금지, 자제할 것을 촉구하였다. 또한 공창제폐지기성회에 참여하여 창녀촌과 매춘업 금지와 폐지를 촉구하였다. 한편 조선총독부 학무국을 상대로도 청소년과 미성년자의 흡연음주 금지 법안을 제정할 것을 요구하였다.

1929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부교장이 되었다. 1934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제2대 교장에 올랐다.

2. 2. 3. 사회 운동과 계몽 활동

1913년 세브란스병원장 에비슨(Avison)의 추천으로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최초의 조선인 교수가 되었고, 1917년에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피부과교실을 신설하고 과장 겸 주임교수로 취임했다.[1] 1918년 뜻 있는 사람들과 토요구락부를 조직하여 시국문제를 토론하기도 했고, 1920년 1월에는 경성고아구제회에 참여하였으며, 1922년부터 재단법인 경성보육원의 이사로 활동하였다.[1]

경성보육원은 김병찬 장로가 거지 아이들을 데려다 보살펴 준 고아원에서 시작된 것으로 법인화되면서 윤치호를 원장에 추대하였다.[1] 이후 보육원의 실질적인 업무를 관장하던 중 원장이 되었으며, 경성양로원을 인수하여 운영하기도 했다.[1] 또한 미국 남장로교회를 설득하여 고아원과 장애 아동, 소외 계층을 돌보는 일의 필요성을 역설하기도 했다.[1] 1920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감이 되었다.[1]

1920년대부터 유행하는 청소년과 미성년자의 음주담배, 대마초 흡연의 유해성을 알리고 이를 금지, 자제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1] 또한 공창제폐지기성회에 참여하여 창녀촌과 매춘업 금지와 폐지를 촉구하였다.[1] 한편 조선총독부 학무국을 상대로도 청소년과 미성년자의 흡연음주 금지 법안을 제정할 것을 요구하였다.[1]

2. 2. 4. 일제 강점기 후반의 친일 행적

오긍선은 일제 강점기에 친일 행적을 보였다는 비판을 받는다.

1934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제2대 교장에 올랐다.[1]

2. 2. 5. 총독부와의 갈등과 사임

1920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감이 되었다.

1920년대부터 청소년과 미성년자의 음주, 담배, 대마초 흡연의 유해성을 알리고 이를 금지, 자제할 것을 촉구했다. 공창제폐지기성회에 참여하여 창녀촌과 매춘업 금지와 폐지를 촉구하였다. 조선총독부 학무국을 상대로 청소년과 미성년자의 흡연음주 금지 법안을 제정할 것을 요구하였다.

1929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부교장이 되었다.

2. 3. 해방 이후 활동 (1945년 ~ 1963년)

1945년 광복 직후, 오긍선은 한민당계에 합류하였고, 9월 9일 미군 24군단이 입성했을 때 미군정 장관 등을 만나 인공과 건준은 "일본과 협력한 한인 집단"에 의해 조직되었으며, 여운형은 "한인들에게 잘 알려진 부일 협력 정치인"이라고 왜곡하여 주장하였다.[4][5] 또한 해방 직후에 출범한 조선피부비뇨기과학회 명예회장에 추대되었다.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그에게 친서를 보내 미군정 민정장관을 권하였지만 사양하였다. 조선인 민정장관을 내세우려던 미군정은 실패 후 1946년까지 한동안 군정 체제를 유지하였다. 1946년 전국사회사업연맹 이사장에 추대되었다. 1948년에는 대한기독교서회 이사로 참여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관계에 진출하라는 주변의 권유를 뿌리치고 안양기독보육원장으로서만 진력하였는데, 한때 불우한 처지에 빠진 나혜석을 돌보는 한편 일본에서 불우한 생활을 하던 김명순을 국내로 데려오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제1공화국 초반 이승만의 거듭된 출사 요구로 구 황실 재산관리총국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이후 대한성서공회 이사장, 기독교청년회 이사, 서울여자의과대학 재단이사 등을 지냈다. 이승만 대통령은 사회부장관을 제의했으나 모두 거절했다.

1950년 대한기독교성서공회 이사장이 되고, 그해 YMCA의 이사를 겸임했으나 곧 사퇴했다. 1950년부터 1951년 다시 부산 피란 시절에 구 황실재산관리총국 국장직을 맡았으나 이승만과의 불화로 그만두었다. 그가 잠시나마 공직을 맡은 이유는 비록 주사였지만 한때 황실의 은혜를 입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구황실에 대한 이승만의 태도와 정부의 처사가 너무 야박하다고 생각하여 이를 따졌다가 이승만 대통령과 갈등했고, 결국 총국장 직을 사직했다. 이후 사회사업에 전념하였다. 1952년 한국사회사업연합회 회장에 추대되었다. 그밖에 중앙노동위원회 대표위원을 맡기도 했다.

1963년 5월 18일 서울 서대문구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한편 그는 운명할 때 '이제 여관에 있다가 이제 내 집으로 돌아간다'는 유언을 남겼다 한다.

5월 22일 신문내예배당에서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의해 의과대학장으로 장례식을 거행한 뒤 경기도 양주 망우리에 장사하였다.

2. 3. 1. 미군정 시기 활동

1945년 광복 직후, 오긍선은 한민당계에 합류하였고, 9월 9일 미군 24군단이 입성했을 때 미군정 장관 등을 만나 인공과 건준은 "일본과 협력한 한인 집단"에 의해 조직되었으며, 여운형은 "한인들에게 잘 알려진 부일 협력 정치인"이라고 왜곡하여 주장하였다.[4][5] 또한 해방 직후에 출범한 조선피부비뇨기과학회 명예회장에 추대되었다.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그에게 친서를 보내 미군정 민정장관을 권하였지만 사양하였다. 조선인 민정장관을 내세우려던 미군정은 실패 후 1946년까지 한동안 군정 체제를 유지하였다. 1946년 전국사회사업연맹 이사장에 추대되었다.

2. 3. 2.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945년 광복 직후, 오긍선은 한민당 계열에 합류하였고, 9월 9일 미군 24군단이 입성했을 때 미군정장관 등을 만나 인공과 건준은 "일본과 협력한 한인집단"에 의해 조직되었으며, 여운형은 "한인들에게 잘 알려진 부일협력 정치인"이라고 왜곡하여 주장하였다.[4][5] 또한 해방 직후에 출범한 조선피부비뇨기과학회 명예회장에 추대되었다.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그에게 친서를 보내 미군정 민정장관을 권하였지만 사양하였다. 조선인 민정장관을 내세우려던 미군정은 실패 후 1946년까지 한동안 군정 체제를 유지하였다. 1946년 전국사회사업연맹 이사장에 추대되었다. 1948년에는 대한기독교서회 이사로 참여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관계에 진출하라는 주변의 권유를 뿌리치고 안양기독보육원장으로서만 진력하였는데, 한때 불우한 처지에 빠진 나혜석을 돌보는 한편 일본에서 불우한 생활을 하던 김명순을 국내로 데려오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제1공화국 초반 이승만의 거듭된 출사 요구로 구황실 재산관리총국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이후 대한성서공회 이사장, 기독교청년회 이사, 서울여자의과대학 재단이사 등을 지냈다. 이승만 대통령은 사회부장관을 제의했으나 모두 거절했다.

1950년 대한기독교성서공회 이사장이 되고, 그해 YMCA의 이사를 겸임했으나 곧 사퇴했다. 1950년부터 1951년 다시 부산 피란 시절에 구황실재산관리총국 국장직을 맡았으나 이승만과의 불화로 그만두었다. 그가 잠시나마 공직을 맡은 이유는 비록 주사였지만 한때 황실의 은혜를 입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구황실에 대한 이승만의 태도와 정부의 처사가 너무 야박하다고 생각하여 이를 따졌다가 이승만 대통령과 갈등했고, 결국 총국장 직을 사직했다. 이후 사회사업에 전념하였다. 1952년 한국사회사업연합회 회장에 추대되었다. 그밖에 중앙노동위원회 대표위원을 맡기도 했다. 1963년 5월 18일 서울 서대문구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한편 그는 운명할 때 '이제 여관에 있다가 이제 내 집으로 돌아간다'는 유언을 남겼다 한다.

5월 22일 신문내예배당에서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의해 의과대학장으로 장례식을 거행한 뒤 경기도 양주 망우리에 장사하였다.

2. 3. 3. 사망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주변에서 관계 진출을 권유했으나 안양기독보육원장으로서만 힘썼다. 한때 불우한 처지에 있던 나혜석을 돌보았고, 일본에서 어렵게 생활하던 김명순을 국내로 데려오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제1공화국 초반 이승만의 거듭된 요청으로 구 황실 재산관리총국장을 잠시 맡기도 했다. 이후 대한성서공회 이사장, 기독교청년회 이사, 서울여자의과대학 재단 이사 등을 역임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사회부장관 직을 제의했으나 모두 거절했다.[1]

1950년 대한기독교성서공회 이사장이 되고, 그해 YMCA 이사를 겸임했으나 곧 사퇴했다. 1950년부터 1951년 다시 부산 피란 시절에 구 황실재산관리총국 국장직을 맡았으나 이승만과의 불화로 그만두었다. 그가 잠시나마 공직을 맡은 이유는 비록 주사였지만 한때 황실의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구황실에 대한 이승만의 태도와 정부의 처사가 너무 야박하다고 생각하여 이를 따졌다가 이승만 대통령과 갈등했고, 결국 총국장 직을 사직했다. 이후 사회사업에 전념하였다. 1952년 한국사회사업연합회 회장에 추대되었다. 그밖에 중앙노동위원회 대표위원을 맡기도 했다.[1]

1963년 5월 18일 서울 서대문구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운명할 때 '이제 여관에 있다가 이제 내 집으로 돌아간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1]

5월 22일 신문내예배당에서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의해 의과대학장으로 장례식을 거행한 뒤 경기도 양주 망우리에 장사하였다.[1]

3. 사후

오긍선은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망우리 산 57(현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동 산 57) 봉화중학교와 용마공원 뒷편 망우리 공동묘지에 부모 한산 이씨 내외, 자녀 등과 함께 안장되었다. 묘지 번호는 203636번이고, 가족 묘지 입구에는 오긍선 연보비가 세워져 있으며, 연보비를 따라 올라가면 동락천약수터가 있고, 박승빈과 이영준의 묘소가 묘지로 올라오는 길 좌측에 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과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선정되었다. 2005년 연세대학교 민주노동당 학생위원회가 발표한 '연세대 친일파 명단' 7인 중에도 들어 있다.[6]

3. 1. 매장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망우리 산 57(현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동 산 57) 봉화중학교와 용마공원 뒷편 망우리 공동묘지에 부모 한산 이씨 내외와 자녀 등과 함께 안장되었다. 묘지 번호는 No.203636번이고, 가족 묘지 입구에는 오긍선 연보비가 세워졌으며, 연보비를 따라 올라오면 동락천약수터가 있고, 박승빈의 묘와 이영준의 묘소가 묘지로 올라오는 길 좌측에 있다.

3. 2. 친일반민족행위자 지정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선정되었다. 연세대학교의 교내 단체인 민주노동당 학생위원회가 2005년 발표한 '연세대 친일파 명단' 7인 중에도 들어 있다.[6]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4. 사상과 신념

오긍선은 1920년대부터 공창제 금지 운동과 미성년자, 청소년의 음주흡연 반대 운동을 추진하였다. 1920년대 초부터 미국과 서구에 유학을 다녀온 학생들에 의해 담배 문화가 확산되면서 청소년들도 담배대마초 흡연을 마시기 시작했기 때문이다.[1]

1923년 세브란스병원 내에 공창(公娼) 폐지운동기성회를 조직하고, 1932년 미성년자음주흡연금지법 실시촉성회에 참여하는 등 사회 정화 운동에 힘썼다. 조선총독부와 해방 후 미군정에 청소년 음주, 흡연 금지 법안 제정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1]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지만 담배는 개인의 취향이라며 금연, 금주를 거부하였다.

4. 1. 엄격한 자기 관리

오긍선은 평소 자신에게 엄격하였고 가족들에게도 매우 엄격하였다. 그는 아들 오한영이 개인 병원을 설립하려 하자 의사는 이익을 취해서는 안 된다며 반대하였다.

한편 당대의 지식인들과 사대부들이 첩을 두고, 기생첩과 내연녀를 두는 것에 대해서도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또한 자신보다 나이가 5세 연상에다가 마마를 앓다가 얼굴이 곰보가 된 아내 밀양 박씨와 평생 해로하였고, 다른 여자들의 유혹을 모두 물리쳤다. 또한 그는 자식들에게도 평생에 이혼이란 있을 수 없다고 선언하고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엄격한 태도 중간중간 그는 농담을 즐기기도 하였다. 하루는 그의 한 외손녀가 서양인들은 왜 털이 많으냐고 묻자 그는 그래서 전털맨(全)이라 하지 않느냐고 하였다. 젠틀맨을 한국어화한 농담이었다.

4. 2. 사회 정화 운동

그는 1920년대부터 공창제 금지 운동을 벌였다. 또한 미성년자와 청소년의 음주담배 흡연을 반대하는 운동도 추진하였다. 1920년대 초부터 미국과 서구에 유학을 다녀온 학생들에 의해 담배 문화가 확산되면서 청소년들도 담배대마초 흡연을 마시기 시작했다.

오긍선은 공창제 폐지운동기성회에 참여하는 한편 1923년 세브란스병원 내에도 공창(公娼) 폐지운동기성회를 조직했고, 1932년에는 미성년자음주흡연금지법 실시촉성회에 참여하는 등 사회 각 분야의 정화를 위해서도 노력했다.[1] 또한 조선총독부와 해방 후 미군정에 청소년의 음주, 흡연 금지 법안을 제정할 것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4. 3. 자유주의적 가치관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지만 도 마시고, 담배도 피웠다. 초기의 장로교 선교사들은 담배를 엄격하게 금지했지만 담배는 하나의 취향이라며 금연, 금주를 거부하였다.

5. 가족 관계

관계이름출생사망
아버지오인묵1850년1933년
어머니한산 이씨(韓山李氏)
여동생오정선
여동생오현관1889년1987년
여동생오현주1894년1989년
부인밀양 박씨(密陽 朴氏)1872년1945년
아들오진영1911년?
며느리윤의경
손자오태근
아들오한영1898년 5월 11일1952년 4월 14일
며느리함종어씨(咸從魚氏)1898년?
손자오중근1923년1983년 7월 30일
손자오장근1927년 9월 26일2009년 5월 18일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을 지낸 윤보선은 오긍선의 며느리 윤의경의 오빠였다. 또한 윤치호, 윤치소와 사돈간이었다.

6. 평가와 비판

의학 교육과 선교, 보육, 사회봉사사업에 헌신하였고 사심 없이 사회환원을 하였다는 평가가 있다. 한편으로는 권위주의적이고 자존심이 강하다는 시각도 있다. 윤치호는 그가 외국인 선교사들을 너무 고압적으로 대하였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오긍선의 생애에 대해서는 한국 최초의 양의사로서 서양의학의 선구자이며 기독교적 양심을 지닌 사회사업가라는 평가와, 기독교와 의술을 출세에 이용한 기회주의적 친일인사라는 상반된 평가가 공존하고 있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후신인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은 해관 오긍선 기념사업회와 함께 매년 기념 학술대회를 열고 있다.

7. 학력

8. 상훈 경력

연도수상 내역
1949년사회사업공로표창
1949년대한의학협회 의학교육공로표창
1962년정부 공익포장
1962년11월 새싹회 소파상
1963년문화훈장


참조

[1] 간행물 신교회인물열전 / (36) 오긍선 박사 http://pckworld.com/[...] 기독공보 2003-11-29
[2] 웹인용 제1장 호남 최초의 교회를 세우다 3 - 3 http://www.i-seomoon[...] 2012-11-21
[3] 서적 해방전후사의 인식 (1) 한길사 2004-05-20
[4] 서적 여운형 평전 실천문학사
[5] 서적 박헌영 평전 실천문학사
[6] 뉴스 민노당 연대 학생위, 학내 친일인사 7명 명단 발표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8-04-11

관련 사건 타임라인

( 최근 20개의 뉴스만 표기 됩니다. )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