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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모토 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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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카모토 고조는 일본 적군파의 일원으로, 1972년 텔아비브 공항 난사 사건에 연루되어 26명을 살해하고 체포되었다. 그는 가고시마 대학 농학부 재학 중 공산주의자 동맹 적군파에 가입했으며, 레바논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1972년 텔아비브 공항 테러 당시 24세였다. 그는 이스라엘 군사 법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1985년 지브릴 협정에 따라 석방되어 레바논으로 망명했다. 이후 레바논에서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았지만, 정치적 망명을 인정받아 현재까지 베이루트에서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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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모토 고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오카모토 고조 (왼쪽)와 일본 적군 지도자 시게노부 후사코의 기자 회견
오카모토 고조 (왼쪽)와 시게노부 후사코, 일본 적군 지도자의 기자 회견
출생 이름오카모토 고조
출생일1947년 12월 7일
출생지구마모토, 일본
국적일본
알려진 이유일본 적군
개인 정보
이름오카모토 고조 (岡本公三)
출생 연도1947년 12월 7일
출생지구마모토 현 아시키타 군 아시키타 정 (일본)
사상마르크스주의
활동텔아비브 공항 난사 사건
소속공산주의자 동맹 적군파 → 일본 적군
종교이슬람교

2. 생애 및 배경

그는 나중에 레바논에서 구금되었으며, 레바논에 머무는 동안 이슬람교로 개종했다.[2] 이후 이스라엘 감옥에 수감되었을 때는 유대교로 개종할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3]

2. 1. 초기 생애

구마모토현 아시키타군 아시키타정에서 초등학교 교장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17][1] 그의 형 오카모토 다케시는 적군파의 일원으로, 1970년 3월 일본항공 351편을 납치하여 북한으로 망명했다.[1]

구마모토 마리스트 학원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형들이 다녔던 교토 대학에 두 번 지원했으나 실패했다. 1968년 가고시마 대학 농학부에 입학했다.[18] 대학 재학 중이던 1971년, 가고시마 대학을 방문한 와카마츠 코지와 아다치 마사오 감독의 영화 《적군-PFLP·세계 전쟁 선언》에 영향을 받아, 이 영화의 상영 운동을 벌이는 '적 버스대'에 참여했다.[19] 이를 계기로 1972년 3월, 공산주의자 동맹 적군파에 가입했다.[20] 당시 그는 24세의 식물학 전공 학생이었다.[1]

2. 2. 일본 적군 가담

구마모토현 아시키타군 아시키타정에서 초등학교 교장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17] 그의 형 오카모토 다케시는 적군파의 일원으로, 1970년 3월 일본항공 351편을 납치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망명했다.

오카모토 고조는 구마모토 마리스트 학원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형들이 다녔던 교토 대학에 두 번 응시했으나 실패했다. 1968년 가고시마 대학 농학부에 입학했다.[18]

1971년, 가고시마 대학에 방문한 와카마츠 코지·아다치 마사오 감독의 영화 『적군-PFLP·세계 전쟁 선언』에 감명받아, 이 영화의 상영 운동을 펼치는 "적 버스대"에 참가했다.[19] 이를 계기로 1972년 3월, 공산주의자 동맹 적군파에 가입했다.[20] 당시 그는 24세의 대학생이었다.[1]

3. 로드 공항 테러 사건 (텔아비브 공항 난사 사건)

1972년 5월 30일, 오카모토 고조는 일본 적군 동료인 야스다 야스유키, 오쿠다이라 쓰요시와 함께 이스라엘의 로도 공항에서 자동 소총을 이용한 무차별 총기 난사 사건을 일으켰다. 이 공격은 팔레스타인 해방 인민 전선 - 국외 작전(PFLP-EO)과 일본 적군이 공동으로 계획하고 실행한 작전이었다.

이 테러로 인해 총 26명이 사망하고 8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다. 사망자 중 17명은 푸에르토리코에서 온 기독교 순례자들이었다.[6] 사건 현장에서 야스다 야스유키와 오쿠다이라 쓰요시는 사망했으며, 오카모토 고조는 유일하게 생존하여 탈출을 시도하다 부상을 입고 이스라엘 보안군에게 체포되었다.[22]

3. 1. 사건 배경 및 준비

로도 공항 학살 사건은 팔레스타인 해방 인민 전선 - 국외 작전 (PFLP-EO)과 일본 적군이 함께 계획한 작전이었다. 두 단체는 서로 상대방을 위해 공격을 실행함으로써 의심을 피하고자 했다. 즉, 일본 적군이 PFLP를 위해, PFLP가 일본 적군을 위해 공격하는 방식이었다. 이 계획은 효과적이어서 오카모토 고조와 동료들은 실제 공격 전까지 거의 주목받지 않았다.

작전 실행을 위해 오카모토 고조, 야스다 야스유키, 오쿠다이라 쓰요시는 1972년 5월 30일, 로마에서 출발하는 에어 프랑스 132편 비행기를 타고 이스라엘의 로도 공항(현 벤구리온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오카모토는 히로히토 암살 미수 사건의 범인인 난바 다이스케라는 이름으로 위조된 여권을 사용했다.[4] 공항에 도착한 이들은 수하물을 찾는 곳으로 이동하여 가방에 숨겨둔 자동 소총을 꺼낼 준비를 마쳤다.

3. 2. 사건 실행

1972년 2월 29일, 오카모토 고조는 일본을 출국하여 베이루트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3주 동안 PFLP 시설에 머물며 자동 소총 사격 훈련을 받았다. 이후 독일 프랑크푸르트 등 유럽 각지에 잠복해 있다가 로마로 이동했다. 당시 그는 PFLP 지도자의 이름이나 소재, 이스라엘의 상황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으며, 단지 세계 혁명론에 입각한 상부의 지시에 따라 움직인 것으로 알려졌다.[21]

1972년 5월 30일, 오카모토는 오쿠다이라 쓰요시, 야스다 야스유키와 함께 로마에서 출발한 에어 프랑스 132편 여객기를 타고 이스라엘 로도 공항(현 벤 구리온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오카모토가 사용한 위조 여권에는 히로히토 암살 미수 사건의 범인인 난바 다이스케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었다.[4] 비행기에서 내린 세 사람은 수하물 찾는 곳으로 이동하여 가방 안에 숨겨둔 자동 소총을 꺼내 그곳에 있던 승객들을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이 사건은 팔레스타인 해방 인민 전선 - 국외 작전(PFLP-EO)과 일본 적군이 사전에 계획한 합동 작전이었다. 두 조직이 서로 상대방을 위해 공격을 대신 수행함으로써 수사망의 의심을 피하려는 의도였으며, 실제로 오카모토 일행은 범행 직전까지 거의 주목받지 않았다. 이 텔아비브 공항 난사 사건으로 인해 총 26명이 사망하고 8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다. 사망자 중 17명은 푸에르토리코에서 온 기독교 순례자들이었다.[6]

총격전 도중 야스다 야스유키는 다른 공격자가 쏜 총에 맞아 사망했고, 오쿠다이라 쓰요시는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가지고 있던 수류탄이 폭발하여 사망했다. 오카모토 고조는 유일하게 생존하여 공항 터미널에서 탈출을 시도하다가 부상을 입고 이스라엘 보안군에게 체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그는 가고시마 대학에서 퇴학 처분을 받았다.[22]

같은 해 7월 13일, 오카모토는 이스라엘 재판에 회부되었다. 법정에서 그는 자신의 직업을 "적군 병사"라고 밝혔으며, 민간인을 살해한 것에 대해 사죄의 뜻을 보이지 않았다. 또한 그는 "원래 이 작전은 마루오카 오사무를 포함한 4명이 수행할 예정이었으나, 마루오카가 다른 임무를 맡게 되면서 3명이 실행하게 되었다"고 진술했다.[23]

3. 3. 재판 및 수감 생활

1972년 5월 30일 텔아비브 공항 난사 사건을 오쿠다이라 쓰요시, 야스다 야스유키와 함께 실행한 후 유일하게 체포되었다.[22]

같은 해 7월 13일, 오카모토는 이스라엘 군사 법원에서 1948년 비상 규정에 따라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의 국선 변호인은 맥스 크리츠만과 데이비드 로트레비였으며, 크리츠만은 비상 규정으로 기소된 이스라엘인을 변호한 경험이 있는 수석 변호사였다. 크리츠만은 오카모토에 대해 "이 사람은 협조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불평하기도 했다.[5] 오카모토는 유죄를 인정했으며, 변호인들이 정신 감정을 요청하는 것에도 항의했다. 재판 진술 중 그는 자신의 직업을 "적군 병사"라고 자칭했으며, 민간인 살해에 대해 사죄하지 않았다. 또한 "사건은 당초 3명이 아닌 마루오카 오사무를 포함한 4명으로 할 예정이었으나, 마루오카가 도중에 다른 행동을 취했기 때문에 3명으로 습격했다"고 진술했다.[23] 그의 최종 진술은 "어렸을 때 사람들은 죽으면 별이 된다고 들었습니다... 우리 3명의 적군 병사는 죽으면 오리온이 되고 싶었습니다"였다.[6]

이스라엘 정부는 처음에는 사형 구형을 검토했으나, 최종적으로 종신형을 구형했고, 오카모토는 유죄 판결을 받고 종신형을 선고받아 복역했다. 수감 중 그는 유대교로 개종을 요청했고, 손톱깎이로 포경 수술을 하려 시도하기도 했다.[7] 그는 수감 기간 동안 고문을 당했으며, "개처럼 먹도록 강요"받았고 석방 당시 쇠약한 모습이었다고 주장했다.[8]

1973년 7월 20일, PFLP와 JRA 요원들이 일본항공 404편을 납치하여[9] 기내 인질과의 교환 조건으로 오카모토의 석방을 요구했지만, 이스라엘 정부는 이를 거부했다.

1985년 5월, 오카모토는 13년간의 수감 생활 끝에 이스라엘과 PFLP-GC 간의 포로 교환 협정인 지브릴 협정의 일환으로 석방되었다. 석방 후 그는 리비아, 시리아를 거쳐 일본 적군의 근거지였던 레바논으로 이주하여 다른 조직원들과 합류했다.

일본 경찰은 오카모토가 석방된 직후인 1985년 5월 21일 그의 체포영장을 발부했고, 5월 23일에는 인터폴을 통해 국제 수배했다.[24] 일본 형법 제5조는 외국에서 복역 등의 처분을 받은 경우에도 일본에서 추가 처벌하는 것을 인정하지만, 형 집행을 감경하거나 면제하도록 규정하고 있어, 13년간 복역한 오카모토에 대한 일본에서의 처벌 여부가 쟁점이 되었다.[25]

이후 1997년, 레바논에 잠복해 있던 오카모토를 포함한 일본 적군 멤버 5명이 검거되어 금고 3년형을 선고받았다. 2000년 3월 출소 후, 오카모토를 제외한 4명은 형 집행이 끝나고 일본으로 송환되었다. 그러나 레바논 정부는 이스라엘과 대립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오카모토의 정치망명을 인정했다. 2012년 기준으로 오카모토는 레바논에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10]

4. 석방 및 망명

1985년 5월 이스라엘과 PFLP-GC 간의 포로 교환으로 석방된 후, 리비아, 시리아를 거쳐 일본 적군의 본거지였던 레바논으로 돌아가 합류했다. 이후 레바논에서 활동하다 1997년 다른 일본 적군 멤버들과 함께 체포되었으나, 2000년 형기 만료 후 레바논 정부로부터 정치 망명을 인정받았다.

4. 1. 석방

이스라엘 정부는 처음에는 사형 구형을 검토했지만, 최종적으로 종신형을 선고했고, 오카모토는 종신형 판결 확정 후 복역했다. 1985년 5월, 이스라엘과 PFLP-GC 사이의 포로 교환으로 석방되었다. 이후 리비아시리아를 거쳐, 당시 일본 적군의 본거지였던 레바논으로 돌아가 합류했다.

일본 경찰은 오카모토가 석방된 직후인 1985년 5월 21일부터 체포영장을 발부했으며, 같은 해 5월 23일에는 국제 형사 경찰 기구를 통해 국제 수배했다[24]。 일본 형법 제5조는 외국에서 이미 처벌받은 경우에도 일본에서 추가 처벌하는 것을 허용하지만, 이 경우 형을 감경하거나 면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13년간 이스라엘에서 복역한 오카모토를 일본에서 처벌할 경우 이를 어떻게 적용할지가 쟁점이 되었다[25]

그 후, 1997년 레바논에 잠복해 있던 오카모토를 포함한 일본 적군 멤버 5명이 체포되었다. 이들은 금고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으며, 2000년 3월에 출소했다. 오카모토를 제외한 4명은 형 집행 후 일본으로 송환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대립 관계에 있는 레바논 정부는 오카모토의 정치망명 신청을 받아들였다.

4. 2. 레바논 망명

1985년 5월, 이스라엘과 PFLP-GC 간의 포로 교환으로 석방되었다. 이후 리비아시리아를 거쳐 일본 적군의 본거지였던 레바논으로 돌아가 합류했다. 일본 경찰은 석방 직후인 5월 21일 오카모토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했고, 5월 23일 국제 형사 경찰 기구(인터폴)를 통해 국제 수배했다.[24] 일본 형법 제5조에 따르면 외국에서 복역 등의 처분을 이미 받은 경우에도 일본에서 추가 처벌이 가능하지만, 외국에서의 복역 기간을 고려하여 일본에서의 형 집행을 감형하거나 면제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13년간 복역한 오카모토가 일본에서 처벌받을 경우 이를 어떻게 적용할지가 쟁점이 되었다.[25]

1997년 2월 15일, 레바논에 잠복해 있던 오카모토를 포함한 일본 적군 멤버 5명(와코 하루오, 아다치 마사오, 야마모토 마리코, 토히라 카즈오)이 위조 여권 사용 및 비자 위반 혐의로 레바논 당국에 구금되었다. 1997년 7월 31일, 소힐 압둘-샴스 판사는 이들에게 금고 3년형을 선고했다.

2000년 3월, 3년의 형기를 마치고 출소했을 때, 오카모토를 제외한 다른 네 명의 멤버는 요르단으로 강제 추방되어 암만에서 전세기를 통해 일본으로 송환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대립 관계에 있는 레바논 정부는 오카모토에게 정치망명을 인정했다. 레바논 정부는 그가 "이스라엘에 대한 저항 작전에 참여했고 이스라엘 감옥에서 고문을 받았다"는 점을 망명 허가 사유로 밝혔다.[11]

오카모토는 여전히 일본 경찰의 수배 대상이며, 일본 정부는 그의 범죄인 인도를 요청하고 있다.[12] 2016년 기준으로, 그는 베이루트 근처 난민 캠프에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13] 2017년 5월, 오카모토는 베이루트에서 ''마이니치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언젠가는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14] 2022년 5월 30일, 로드 공항 사건 50주년을 맞아 베이루트에서 열린 추모식에 참석하여 동료 적군파 대원들의 묘에 헌화하고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PFLP) 지지자들과 사진을 찍는 모습이 포착되었다.[15]

5. 망명 이후의 삶과 현재

1997년 레바논에서 다른 일본 적군 멤버들과 함께 체포되었으나, 동료들과 달리 오카모토는 이스라엘에 대한 저항 활동과 수감 중 고문을 당했다는 이유로 레바논 정부로부터 정치적 망명을 허가받았다.[11] 이후 2000년에는 이슬람교개종했으며[26], 현재까지 베이루트 인근에서 PFLP나 헤즈볼라 등 반이스라엘 세력의 보호 아래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13][27]

일본 정부는 지속적으로 그의 범죄인 인도를 요구하고 있으며, 일본 경찰의 수배 명단에도 올라 있다.[12] 오카모토는 이스라엘 감옥에서의 고문 후유증으로 정신 질환을 앓고 있다고 전해지며[32], 레바논 정부로부터 정치 활동에 제약을 받아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는 드물다.[31]

그는 언론 인터뷰를 통해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소망을 밝히기도 했으나[14][34], 동시에 텔아비브 공항 난사 사건을 '테러'가 아닌 '무장 투쟁'으로 정당화하는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34] 2016년에는 사건 희생자들에게 애도를 표하기도 했으며[33], 2022년에는 사건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는 등[15][31][37]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5. 1. 근황

1997년 2월 15일, 레바논 당국은 위조 여권 사용 및 비자 위반 혐의로 오카모토를 포함한 일본 적군 멤버 다섯 명(와코 하루오, 아다치 마사오, 야마모토 마리코, 토히라 카즈오)을 구금했다. 이들은 3년 형을 선고받았고, 형기가 만료된 후 다른 네 명은 요르단을 거쳐 일본으로 강제 추방되었다. 그러나 레바논 정부는 오카모토에게 정치적 망명을 허가했는데, 이는 그가 "이스라엘에 대한 저항 작전에 참여했고 이스라엘 감옥에서 고문을 받았다"는 이유였다.[11] 2000년 3월 2일에는 언론 앞에서 이슬람교개종했음을 밝혔다.[26]

오카모토는 여전히 일본 경찰의 수배를 받고 있으며, 일본 정부는 그의 범죄인 인도를 요청하고 있다.[12] 2016년 기준으로, 그는 PFLP, 헤즈볼라[27] 등 이스라엘과 적대하는 세력의 보호 아래 레바논 베이루트 교외아파트에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13] 레바논 정부로부터 정치 활동 등을 제한받아 공공장소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드물다.[31]

2002년, TV 아사히의 보도 프로그램 "더 스쿠프"는 레바논에 잠복 중이던 오카모토를 독점 인터뷰했다. 그는 피해자에게 사과하는 듯한 말을 하면서도, 2001년에 해체된 일본 적군이 아직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는 파악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아직 사건 당시 24세의 마음 그대로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2003년 교도 통신과의 인터뷰에서는 "일본에 돌아가 예전 친구들을 만나고 싶다"며 망향의 감정을 드러냈다. 당시 그는 동작이 느리고 건강에 문제가 있는 모습이었는데, 레바논 정부는 이를 이스라엘 감옥에서의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정신 질환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한때 당뇨병을 앓았으나 건강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스라엘에서의 고문으로 인한 정신 분열증에 대해서는 현지 전문의로부터 완치가 어렵다는 진단을 받았다.[32]

2010년 4월 28일, 베이루트의 오쿠다이라 타케시 묘소에서 열린 일본 록 밴드 두뇌경찰의 멤버 PANTA의 추도 라이브에 모습을 드러냈다.[28][29] 2011년에는 일본의 지지자들과 Skype로 정기적으로 연락하며 건강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30]

2016년 5월 14일, 베이루트에서 교도 통신과의 인터뷰에 응해 팔레스타인에 묻히고 싶다는 소망을 밝히고, 텔아비브 공항 난사 사건 희생자 중 다수가 푸에르토리코인이었던 점을 언급하며 "희생자들에게 애도를 표하고 싶다"고 사죄의 말을 전했다.[33]

2017년 4월 하순, 마이니치 신문과의 인터뷰에서는 "한 번은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평범하게는 살 수 없을 테니 귀국에는 연연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사건을 테러가 아닌 PFLP와 공동으로 일으킨 무장 투쟁이라고 주장하며 "무장 투쟁은 지금도 옛날에도 최고의 선전이 된다"고 말했다. 자신의 테러 행위에 대한 반성이나 사죄, 그리고 세계 동시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현실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는 답하지 않았다. 오카모토를 보호하는 PFLP 측은 이것이 일본 언론과의 마지막 인터뷰가 될 것이라고 밝혔으며[34], 팔레스타인 측 지원 조직은 "오카모토가 죽을 때까지 돌볼 것"이라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같은 해 11월 21일, 오카모토가 사용하도록 할 목적으로 현금 카드를 부정 발급받은 혐의(사기죄)로 좌익 계열 신문 인민신문의 사장이 체포되어[35], 이후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의 유죄 판결을 받았다.[36]

2022년 5월 30일, 베이루트에서 열린 텔아비브 공항 난사 사건 50주년 기념 집회에 지지자들의 부축을 받으며 참석하여 동료들의 묘에 헌화하고 PFLP 지지자들과 사진을 찍었다.[31][37] 같은 날 도쿄에서도 오카모토 고조 지원 단체 주최로 약 100명이 참가한 집회가 열렸다.[38] 이에 대해 재일 이스라엘 대사는 트위터에 오카모토와 시게노부 후사코 전 최고 간부가 환영받는 모습에 경악했다는 입장을 밝혔다.[39]

5. 2. 일본 송환 문제

1997년 2월 15일, 레바논 당국은 위조 여권 사용 및 비자 위반 혐의로 오카모토 고조를 포함한 다섯 명의 적군파 멤버(와코 하루오, 아다치 마사오, 야마모토 마리코, 토히라 카즈오)를 구금했다. 이들은 3년형을 선고받았으며, 판결은 1997년 7월 31일 소힐 압둘-샴스 판사에 의해 내려졌다. 형기가 만료된 후, 오카모토를 제외한 네 명의 적군파 멤버는 요르단으로 강제 추방되어 암만에서 러시아 전세기를 통해 일본으로 송환되었다. 그러나 레바논 정부는 오카모토에게 정치적 망명을 허가했다. 레바논 정부는 그가 "이스라엘에 대한 저항 작전에 참여했고 이스라엘 감옥에서 고문을 받았다"는 점을 망명 허가 사유로 밝혔다.[11]

오카모토는 2000년 3월 2일 언론 앞에서 이슬람교개종했다고 발표했다.[26] 2002년에는 TV 아사히의 보도 프로그램 "더 스쿠프"가 레바논에 잠복 중이던 오카모토를 독점 취재하여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 인터뷰에서 그는 피해자에게 사과하는 듯한 발언을 했으나, 2001년에 사실상 와해된 일본 적군의 존속 여부에 대해서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반면 "아직 사건 당시 24세의 마음 그대로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2003년에는 교도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일본에 돌아가 예전 친구들을 만나고 싶다"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나타냈다. 당시 오카모토는 행동이 느리고 건강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였는데, 레바논 정부는 이를 "이스라엘 감옥에서 치안 기관으로부터 고문을 받은 후유증으로 인한 정신 질환으로 발어 등에 장애가 생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본 경찰은 여전히 오카모토를 수배 중이며, 일본 정부는 레바논 측에 그의 범죄인 인도를 요청하고 있다.[12] 2016년 기준으로, 그는 베이루트 근처의 난민 캠프에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13] 2017년 5월, 오카모토는 베이루트에서 ''마이니치 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언젠가는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14] 2022년 5월 30일에는 베이루트에서 열린 로드 공항 사건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동료 적군파 대원들의 묘에 화환을 놓고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PFLP) 지지자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15]

참조

[1] 서적 p. 202 1999
[2] 뉴스 Red Army guerrillas arrested http://news.bbc.co.u[...] 2011-09-06
[3] 웹사이트 https://www.haaretz.[...]
[4] 뉴스 Kozo Okamoto's long life after Israel suicide mission https://www.france24[...] 2023-11-06
[5] 간행물 ISRAEL: Terrorist on Trial http://www.time.com/[...] 1972-07-24
[6] 뉴스 The Strange Story of the Japanese Terrorists Behind the '72 Israel Airport Massacre https://www.haaretz.[...] 2022-05-27
[7] 뉴스 How the terrorist who attacked Israel's main airport escaped the death penalty http://www.haaretz.c[...] 2012-09-24
[8] 웹사이트 Japanese militant Kozo Okamoto marks 1972 attack on Israel airport https://www.arabnews[...] 2023-11-06
[9] 뉴스 3 seize jet with 145 aboard, order it flown to Mideast 1973-07-21
[10] 웹사이트 https://www.haaretz.[...]
[11] 뉴스 Japanese Red Army member Okamoto wants to return to Japan http://www.lebanonwi[...] Lebanonwire. 2011-09-06
[12] 문서 Press Conference The Ministry of Foreign Affairs of Japan March 21, 2000
[13] 뉴스 Japanese Red Army member Kozo Okamoto living quietly in Lebanon refugee camp http://www.japantime[...] 2017-01-29
[14] 뉴스 Wanted Japanese Red Army member maintains 1972 airport attack wasn't terrorism https://mainichi.jp/[...] 2019-11-16
[15] 뉴스 With last gunman, Palestinian terrorists in Beirut mark 50 years since Lod massacre https://www.timesofi[...] 2022-05-31
[16] 웹사이트 国際手配中の日本赤軍 - 警視庁 https://www.keishich[...]
[17] 서적 越過死海 香港中文大学出版社 2015
[18] 웹사이트 テルアビブ空港乱射事件・犯人速報 2012-07
[19] 서적 若松孝二と赤軍レッド・アーミー 세계書院 2016-07
[20] 서적 若松孝二と赤軍レッド・アーミー
[21] 뉴스 過激に走った秀才兄弟 1972-06-02
[22] 웹사이트 鹿児島大学教養部 詳細年表 1972年度(昭和47年度) http://www.sci.kagos[...] 鹿児島大学
[23] 뉴스 第四の男日本潜入 赤軍ゲリラ 1972-06-06
[24] 뉴스 警察庁、釈放された岡本公三を国際手配 朝日新聞 1985-05-23
[25] 뉴스 釈放の岡本公三の引き渡しを要求へ 警察庁方針 朝日新聞 1985-05-20
[26] 웹사이트 Red Army guerrillas arrested http://news.bbc.co.u[...] BBC.com 2011-09-06
[27] 웹사이트 ヒズボラが保護下に置いた「岡本公三」の利用価値 https://web.archive.[...] 「フォーサイト」 2002-07
[28] 웹사이트 【音楽】レバノンにある奥平元赤軍派幹部の墓前で追悼ライブ 頭脳警察のPANTAが開催、岡本容疑者も姿 https://itest.5ch.ne[...]
[29] 뉴스 頭脳警察・PANTAさん 奥平元幹部の墓前でライブ https://archive.fo/F[...] 2010-04-29
[30] 간행물 元日本赤軍『岡本公三』がレバノンでハマッた『スカイプ』 2011-10-13
[31] 웹사이트 元日本赤軍の岡本公三容疑者、集会に姿現す 亡命先のレバノンで https://www.asahi.co[...] 朝日新聞 2022-05-31
[32] 웹사이트 テルアビブ空港乱射事件から49年 元日本赤軍「岡本公三」容疑者の今(デイリー新潮) https://news.yahoo.c[...] 2021-05-30
[33] 웹사이트 パレスチナに骨をうずめたい・日本赤軍岡本容疑者が謝罪 http://www.chugoku-n[...] 中国新聞
[34] 웹사이트 テルアビブ空港乱射:岡本容疑者「一度は日本に帰りたい」 https://archive.li/y[...] 2017-05-30
[35] 뉴스 レバノンの日本赤軍支援か 口座不正開設容疑で左翼紙社長を逮捕 兵庫県警 https://www.sankei.c[...] 産経新聞 2019-11-10
[36] 뉴스 元日本赤軍メンバー支援でカード詐取 「人民新聞」社長に有罪判決 神戸地裁 https://www.sankei.c[...] 産経新聞 2018-07-18
[37] Youtube 【独自】ANNカメラが捉えた 国際手配中の「日本赤軍」メンバー岡本公三容疑者の近影(2022年5月31日) - YouTube https://www.youtube.[...]
[38] 웹사이트 ロッド空港乱射から50年で集会 https://jp.reuters.c[...] ロイター 2022-05-30
[39] 웹사이트 1/ 1972年にロッド空港で発生した乱射事件から50年を記念する集会に参加した岡本公三容疑者、および先週末出所した重信房子元最高幹部が温かく迎えられる姿を見て愕然としました。>>> https://archive.ph/4[...] twitter.com 2022-05-31
[40] 웹사이트 決着~岡本公三と若松孝二の40年~ http://www.kyodo-tv.[...]
[41] 서적 若松孝二と赤軍レッド・アーミー 世界書院 2016-07
[42] 뉴스 3人のパスポート 写真製版で精巧な偽造 朝日新聞 1972-06-02
[43] 뉴스 イスラエル大使にわび状 岡本公三の父 朝日新聞 1972-06-05
[44] 웹사이트 イスラエルから見た「日本赤軍」の謎 50年前の空港乱射事件、イスラエル人はどう受け止めたのか https://dot.asahi.co[...] AERA.dot 2022-06-17
[45] 웹사이트 岡本公三 テルアビブ空港乱射50年 本人が手記で明かした「日本を出てから事件を起こすまで」 https://www.dailyshi[...] デイリー新潮 2022-05-30
[46] 웹사이트 国際手配中の日本赤軍 - 警視庁 https://www.keishich[...] 警視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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