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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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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세자는 군주제의 국가에서 왕위 계승 예정자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조선 시대에는 저하 등의 호칭과 함께 동궁, 춘궁 등으로 불렸으며, 왕비의 장남인 적장자를 원자라 칭하고 세자로 책봉하여 왕에 버금가는 예우를 했다. 왕세자는 세자익위사의 호위를 받고 세자시강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혼례를 치르고 세자빈 이외에 소실을 둘 수 있었다. 왕세자가 불초하거나 덕이 없는 처신을 할 경우 폐위되기도 했으며, 즉위 전에 죽으면 그의 아들인 왕세손이 왕위 계승권을 이어받았다.

유럽에서는 장자상속 원칙을 따르거나 왕세자에게 법정추정 상속인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작위를 수여하는 등의 제도를 운영했다. 영국은 웨일스 공, 스페인은 아스투리아스 공, 네덜란드는 오라녜 공 등의 작위를 왕위 계승권자에게 수여하는 전통이 있다. 왕세자 외에도 원자, 왕세녀, 왕세손, 왕세제, 왕세질 등의 호칭이 존재한다.

2. 조선시대

왕세자는 저하(邸下)라고도 불렸으며, 동궁(東宮),[8] 춘궁(春宮), 저군(儲君), 정윤(正胤), 이극(貳極), 국본(國本) 등 다양한 호칭으로 불렸다.[9][10] 왕위 계승에는 왕비의 장남이 왕이 되는 적장자 왕위계승과 덕이 있는 사람이 왕이 된다는 두 가지 원칙이 있었다.[14]

왕비가 낳은 적장자는 원자(元子)라 불렸으며,[16] 원자의 세자 책봉은 후계 구도를 확정하는 중요한 일이었다. 세자로 책봉되면 부모 곁을 떠나 동쪽의 동궁(東宮)에서[8] 생활했고, 다른 왕자(대군)들은 궁궐 밖 사가에서 지냈다. 세자에게는 독립된 기관, 인원, 예산이 배정되어 왕에 버금가는 예우를 받았다.

2. 1. 호칭 유래와 변화

왕세자에 대한 경칭으로 저하(邸下)라는 호칭을 사용하기도 했다. 다른 말로는 동궁(東宮),[8] 춘궁(春宮), 저군(儲君), 정윤(正胤), 이극(貳極), 국본(國本) 등이 있다.[9][10] 중국에서 유래된 태자라는 호칭은 세자보다 높은 의미를 갖기 때문에 왕국이라도 왕세자 대신 왕태자를 사용해서 권위를 높이기도 한다. 한국의 경우 위만조선 시기부터 고려 초기까지 태자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고려 시대 원나라 간섭기 때부터 태자 대신 왕세자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10] 1894년부터 다시 왕태자라는 칭호를 복권시켰다.[11] 처음에는 대조선국 대군주 폐하와 왕태자 전하였다가, 후에 대한제국이 성립되면서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로 바뀐다.[12] 후궁이 낳은 왕자는 군(君)이라 하고 왕비의 아들은 대군(大君)이라 구별하여 불렀다. 호칭 구별에만 그치지 않고 누리는 혜택도 큰 차이가 있었다.[13]

2. 2. 왕위계승 원칙

왕위 계승에는 두 가지 원칙이 있었다. 왕비의 장남이 왕이 되는 적장자 왕위계승과 덕이 있는 사람이 왕이 된다는 원칙이다.[14] 적장자 왕위계승은 왕자 간의 권력 투쟁을 예방하고, 권력 공백을 줄이며 후계자를 미리 교육시켜 장래를 준비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14]

그러나 적장자보다 다른 왕자가 유능한 경우에는 쿠데타의 가능성 때문에 정국이 불안했다. 또 왕비가 아들을 낳지 못하고 후궁들만 여러 아들이 있는 경우 이들 사이의 치열한 암투로 정치 불안이 가중되었다.[15] 적장자 계승 원칙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조선의 27명의 왕 중 7명만이 적장자 출신이었다. 적장자로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나 즉위하지 못한 경우도 7명이나 된다. 반면 적장자가 아니면서 왕이 된 경우는 20명이나 된다. 후궁의 아들로 왕위에 오를 경우 대부분 격렬한 궁중 암투를 겪었다.[15]

2. 3. 왕세자의 삶

왕비가 낳은 적장자를 원자(元子)라 칭하는데,[16] 원자의 세자 책봉은 후계 구도를 확정하는 중요한 일이었다. 백관들을 모아놓고 세자 책봉례를 거행한 후 바로 종묘에 이 사실을 고하고 팔도에 알리며, 형식적이었지만 사후에 중국의 허락을 받았다. 세자로 책봉되면 부모(왕과 왕비) 곁을 떠나 동쪽에 있는 동궁(東宮)에서[8] 기거하기 시작하며, 나머지 왕자(대군)들은 궐 밖으로 나가 사가에서 지냈다. 세자에게는 독립된 기관, 인원, 예산이 배정되어 왕에 버금가는 예우를 받았다. 세자의 호위는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가 맡았고, 세자의 교육은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서 담당했다.[17] 혼례는 대체로 10세 전후 시기에 치렀다. 세자는 세자빈 이외에 공식적으로 소실을 둘 수 있었다. 세자는 정치와 인사에 간여할 수 없었으나, 필요에 따라 대리청정하는 경우는 있었다.[15] 세자가 불초(不肖)하거나[18] 덕이 없는 처신을 할 경우에 폐위되기도 한다.[19] 또한 즉위하기 전에 죽으면 그의 아들인 왕세손이 왕위 계승권을 이어받는다.

3. 유럽

유럽의 여러 왕가에서는 왕위 계승과 관련하여 다양한 제도를 운영해왔다. 많은 나라에서 장자 우선 제도를 채택했지만, 몽골족은 막내 우선제를, 만주족이나 튀르크는 경쟁을 통해 후계자를 선정하기도 했다.[20] 프랑크 왕국은 살리카법을 통해 여성 상속을 금지하고 형제간 분할 상속제를 택했으나,[21][22][23] 이로 인해 상속 불만에 따른 갈등과 분열이 반복되었다. 샤를마뉴의 카롤링거 왕조 말기까지 이러한 문제가 지속되었고,[20] 이후 프랑스와 독일은 분할 상속제를 버리고 장자 상속제를 도입했다.[20]

현대 유럽의 대부분 군주국에서는 적장자, 남성 우선 왕위 계승을 원칙으로 하되, 아들이 없을 경우 장녀가 왕위를 계승할 수 있다. 영국, 스페인, 덴마크, 모나코 등이 이 원칙을 따르며, 스웨덴, 벨기에, 노르웨이, 네덜란드 등은 성별에 관계없이 첫째가 왕위를 계승한다.[33] 차기 왕위 계승 1순위자에게는 법정추정상속인[34]이라는 의미가 부여된 상징적인 귀족 작위를 내리는 전통이 있다. 예를 들어 영국은 웨일스 공, 스페인은 아스투리아스 공, 네덜란드는 오라녜 공이라는 공식 직함을 사용한다.

3. 1. 장자상속

왕위 계승에는 왕비의 장남이 왕이 되는 적장자 왕위계승과 덕이 있는 사람이 왕이 된다는 두 가지 원칙이 있었다. 적장자 왕위계승은 왕자 간의 권력 투쟁을 예방하고, 권력 공백을 줄이며 후계자를 미리 교육시켜 장래를 준비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14] 그러나 적장자보다 다른 왕자가 유능한 경우에는 쿠데타의 가능성 때문에 정국이 불안했다. 또 왕비가 아들을 낳지 못하고 후궁들만 여러 아들이 있는 경우, 이들 사이의 치열한 암투로 정치 불안이 가중되었다.[15] 적장자 계승원칙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조선 27명의 왕 중 7명만이 적장자 출신이었다. 적장자로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즉위하지 못한 경우도 7명이나 된다. 반면 적장자가 아니면서 왕이 된 경우는 20명이나 된다. 후궁의 아들로 왕위에 오를 경우 대부분 격렬한 궁중 암투를 겪었다.[15]

상속과 왕위 세습에 있어서 많은 나라들이 장자 우선 제도를 채택하는 반면에, 몽골족은 막내 우선제를, 만주족이나 튀르크는 경쟁을 통해 후계자를 선정하는 등 다양한 제도가 운용되어 왔다.[20] 각기 장단점이 있기는 하나 골치 아픈 것은 동일하다. 살리족은 살리카법을 제정하여 여성 상속을 금지했으며 형제간에는 분할 상속제를 선택하였다.[21][22][23] 부족을 넘어 프랑크 왕국을 경영하면서도 이런 전통을 고수했다. 이로 인해 많은 문제가 발생했는데, 상속의 불만으로 인해 골육상쟁이 벌어졌고 분열과 통일이 반복되었다. 메로빙거 왕조에 이어 샤를마뉴의 카롤링거 왕조의 말기까지 이런 갈등과 분열은 지속되었다.[20] 동프랑크 왕조에서 카롤링거의 직계는 911년에, 서프랑크에서는 987년에 카롤링거 왕실이 끝났는데, 이후 프랑스와 독일은 모두 분할 상속제를 버리고 장자 상속제를 도입하였다.[20]

3. 2. 공동통치와 반란

왕위 계승에는 왕비의 장남이 왕이 되는 적장자 왕위계승과 덕이 있는 사람이 왕이 된다는 두 가지 원칙이 있었다. 적장자 왕위계승은 왕자 간의 권력 투쟁을 예방하고 권력 공백을 줄이며 후계자를 미리 교육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14] 그러나 적장자보다 다른 왕자가 유능한 경우에는 쿠데타의 가능성 때문에 정국이 불안했다. 또한 왕비가 아들을 낳지 못하고 후궁들만 여러 아들이 있는 경우, 이들 사이의 치열한 암투로 정치 불안이 가중되었다.[15]

상속과 왕위 세습에 있어서 많은 나라들이 장자 우선 제도를 채택했지만, 몽골족은 막내우선제를, 만주족이나 튀르크는 경쟁을 통해 후계자를 선정하는 등 다양한 제도가 운용되었다.[20] 프랑크 왕국은 살리카법을 제정하여 여성 상속을 금지하고 형제간에는 분할상속제를 선택하였는데,[21][22][23] 이로 인해 상속 불만에 따른 골육상쟁이 벌어졌고 분열과 통일이 반복되었다. 샤를마뉴의 카롤링거 왕조 말기까지 이런 갈등과 분열은 지속되었다.[20] 이후 프랑스와 독일은 모두 분할상속제를 버리고 장자상속제를 도입하였다.[20]

'''독일'''의 하인리히 4세는 1087년에 13살이 된 장남 콘라트를 공동 통치자로 임명하였다.[24] 그런데 콘라트는 1093년에 반란을 일으켰다.[24] 1098년, 반란 진압에 성공한 하인리히 4세는 장남 콘라트를 폐위시키고,[25] 차남 하인리히 5세를 공동 통치자로 임명하였다.[24] 하인리히 4세는 차남 하인리히 5세에게 제국 정치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선서를 시켰지만, 차남 역시 1104년 반란을 일으켰다.[26] 반란 진압에 실패한 하인리히 4세는 1105년 12월에 강제 퇴위당한 뒤 다음 해 병사했다.[26]

'''잉글랜드'''의 헨리 2세는 1170년에 왕세자 헨리를 공동 통치자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실권을 넘기지 않았기에 장남 헨리와 빈번하게 갈등했다.[26] 1173년 장남 헨리가 동생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26][27] 반란은 진압되었으나 장남 헨리는 1181년에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가 1183년 6월에 갑자기 죽었다.[26] 1188년에 차남 리처드가 상속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28][29][30] 헨리 2세는 평소 아끼던 막내 존마저 반란에 가담하자[30] 충격을 받고 1189년 7월 투렌 시농에서 죽었다.[24][31][32]

3. 3. 법정추정 상속인

현대 유럽 대부분의 군주국에서 왕위 계승은 적장자, 남성 우선 왕위계승을 원칙으로 하되, 아들이 없을 경우 장녀가 왕위를 계승할 수 있다. 영국, 스페인, 덴마크, 모나코 등이 이 원칙을 지키며 스웨덴, 벨기에, 노르웨이, 네덜란드 등은 성별에 관계없이 첫째가 왕위를 계승하고 있다.[33] 차기 왕위 계승 1순위자에게는 왕위계승권자나 왕위에 대한 법정추정상속인[34]이라는 의미가 부여된 상징성이 있는 실질적인 귀족 작위를 내리는 전통이 있다. 예를 들어 영국은 웨일스 공, 스페인은 아스투리아스 공, 네덜란드는 오라녜 공이라는 공식 직함을 가진다.

3. 4. 영국

원래 웨일스 공은 웨일스 전체를 대표하는 군주를 의미하는 정식 작위였다. 그러나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1세가 웨일스를 병합한 뒤, 1301년에 7살 된 장남 에드워드(훗날 에드워드 2세)를 웨일스 공으로 임명하면서 웨일스 공은 영국 왕위 계승권자의 작위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35][36] 에드워드 2세의 아들인 에드워드 3세는 왕세자 시절에 웨일스 공에 서임된 적이 없으나, 즉위한 후 장남 흑태자 에드워드에게 1343년에 웨일스 공의 칭호를 내렸다. 불행히도 흑태자 에드워드가 왕위를 계승하지 못한 채 1376년에 사망하자 웨일스 공의 자리는 같은 해 의회에 의해 흑태자의 아들 리처드(에드워드 3세의 손자)에게로 이어지게 되었다.[37] 이후에 잉글랜드의 차기 왕위 계승자에게 웨일스 공에 오르는 관례가 정착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2022년 현재의 웨일스 공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맏아들인 찰스 왕세자이다.

캐릭 백작은 본래 스코틀랜드 남서부 캐릭(게일어 발음으로는 하레크, 오늘날의 사우스에어셔)의 지배자 작위였고 나중에는 영국 귀족 체계에 편입되었다. 모계로부터 백작위를 계승받은 캐릭 백작 로버트 더 브루스가 14세기 초 스코틀랜드의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캐릭 백작위는 스코틀랜드 왕위와 매우 밀접해졌고, 15세기 이래로 왕위 계승자가 캐릭 백작위를 자동으로 겸하게 되었다.

이후 생겨난 작위 로스시 공작은 스코틀랜드 왕위(현 연합왕국 왕위)의 상속인에게 주어지며, 스코틀랜드 최고위의 공작 작위이다. 초대 로스시 공작 작위는 1398년, 로버트 1세의 외증손 로버트 3세의 장남 데이비드에게 수여되었다. 그 이후 국왕의 장남에게 주어졌으며, 이것이 바뀌어 왕위계승자에게 수여되게 되었다(초대 공작 데이비드는 왕위에 앉기 전에 정쟁에 휘말려 의문사하였다고 한다). 잉글랜드와 나라를 합친 후에도 작위는 계속 이어져, 잉글랜드의 콘월 공작과 동격으로 일컬어진다.

3. 5. 프랑스

1349년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가 도피네 영지를 매입하면서,[38] 도피네 영주의 별칭이던 도팽(프랑스어: Dauphin)이라는 칭호를 프랑스 왕실에서 사용하게 되었다.[39] 최초로 도팽의 칭호를 받은 프랑스 왕세자는 샤를(훗날 샤를 5세)였다.[39] 필리프 6세는 도피네 매입을 추진하며 당시 왕세자였던 장(훗날 장 2세)에게 줄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협상이 타결된 1350년에 사망하고 왕세자 장(Jean)이 장 2세로 즉위하면서 도피네를 자신의 아들이자 새로운 왕세자인 샤를에게 물려주었다. 1364년에 장 2세가 죽고 샤를 5세가 즉위하였는데, 샤를 5세는 1368년에 자신의 아들 샤를 왕세자 (훗날 샤를 6세)에게 도팽 칭호를 물려주었다.[40] 이때부터 이 칭호는 프랑스 왕국의 왕위계승자(법정추정 상속인)를 뜻하는 말로 굳어지게 되었다.[41] 그러나 '도팽'이란 용어는 1791년 9월 3일에 입헌군주제가 시작되면서 헌법 제2장 제3조 제1항에 의거하여 폐지된 후 프랑스의 왕세자 (prince royal de France)로 변경되었다. 왕세자라는 용어 역시 1892년 프랑스 제1공화국과 1848년 제2공화국 시절에 폐기되었다.

3. 6. 스페인

스페인의 왕위 계승자를 부르는 공식 호칭이다. 1388년 바요나 조약을 통해 장차 왕위 계승자에게 아스투리아스 지방을 직속 영지로 주는 것이 결정되었다. 아스투리아스는 스페인 북서부의 지방으로 레콩키스타의 출발지이기도 하다. 최초의 아스투리아스 공은 카스티야의 엔리케 3세이며, 2022년 현재 아스투리아스 공은 아스투리아스 여공 레오노르이다.

3. 7. 포르투갈

포르투갈에서는 1640년 이래 왕세자에게 브라간사 공작이나 베이라 공에 임명하는 전통이 생겼다.[42] 1578년, 국왕 세바스티앙이 사망하자 그의 삼촌 엔히크 추기경이 66세 고령에 즉위하지만 1년 6개월만인 1580년 1월 31일에 후계없이 죽고말았다. 포르투갈 왕위 계승을 놓고 경쟁이 벌어졌는데, 스페인 펠리페 2세가 마누엘 1세의 외손자 자격으로 집권에 성공하며 포르투갈을 합병하였다.[43] 이후 스페인의 포르투갈 통치는 60년간 이어지다가 1640년에 브라간사 공작주앙 4세로 즉위하며 투쟁을 통하여 독립하였다.[44] 주앙 4세는 1649년에 그의 장남 아폰수(훗날 아폰수 6세)를 브라간사 공작에 임명하여 왕세자임을 공인하였다. 1683년에 형 아폰수 6세의 왕위를 찬탈한[45] 페드루 2세는 1696년에 장남인 주앙을 브라간사 공작으로 임명하였다.[46] 이로써 왕세자에게 브라간사 공작위가 수여되는 일은 전통으로 정착되었다. 그러나 1910년 혁명으로 군주제가 폐지되고 오늘날까지 공화정이 이어지고 있다.[47]

3. 8. 네덜란드

Prins van Oranjenl는 원래 오라녜 공국의 통치자인 오라녜 공에게 주어지는 칭호였다.

1815년부터 네덜란드의 왕위 계승자에게 이 칭호가 주어졌다. 현재 네덜란드의 왕세자는 빌럼알렉산더르의 장녀인 카타리나아말리아 공주이다.

4. 그 외

왕세자 외에도 원자, 왕세녀, 왕세손, 왕세제, 왕세질 등의 호칭이 있다.

4. 1. 원자

왕비(정비)에게서 태어난 적장자가 세자로 책봉되기 전에는 원자(元子)라고 불리었다.[16] 원자 책봉은 태종 때 처음 시행되었다.[48] 태종은 원자 교육을 위해 성균관 동북쪽 모퉁이에 학궁을 짓고, 원자를 보위할 기구로 경승부(敬承府)라는 관청을 두었다.[49] 원자는 장차 세자가 될 인물이자 제2의 임금이라 할 수 있으므로, 어려서부터 바르게 양육하고 가르치고자 했던 것이다. 태종은 경승부 건립 후 성균관에서 원자의 입학례를 치르는 등 원자의 양육과 교육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는데, 이는 후계자의 자질과 품성이 강한 왕권 확립에 필수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50]

4. 2. 왕세녀

왕세자 외에도 원자, 왕세녀, 왕세손, 왕세제, 왕세질 등의 호칭이 있다.

유럽 왕실에서는 왕의 딸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면서 왕위계승서열 1위인 여성에게 왕세녀라는 칭호를 부여한다. 2022년 기준으로 스웨덴, 네덜란드, 벨기에, 스페인 등이 있다.

4. 3. 왕세손

왕의 손자인 왕세손(王世孫)이 세대를 건너 왕통을 잇는 경우도 있다. 왕세손의 경칭은 각하(閣下)였으나 동궁정립을 받은 왕세손의 경우에는 왕세자처럼 저하(邸下)라고 부르기도 했다. 조선 시대에는 정조와 헌종은 왕세손으로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왕세자의 아들이 일정한 나이가 되었으면 왕은 자신의 손자인 왕세자의 아들을 왕세자 다음의 왕위 계승자로 왕세손을 세우기도 하였는데 단종, 의소세손, 정조, 현종 등이 있다.

4. 4. 왕세제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왕의 동생을 왕위 계승자로 삼는 경우는 왕세제(王世弟)라고 한다. 예시로 조선 국왕 영조, 작센 국왕 안톤, 게오르크, 작센 왕세제 막시밀리안(작센 국왕 안톤의 동생이자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 요한 형제의 부친) 등이 있다. 특이한 점으로 태종은 왕세제가 아닌 왕세자로 책봉되어 왕위에 올랐다.

4. 5. 왕세질

왕세질은 왕세자와 비슷한 개념으로, 왕위 계승 순위가 높은 왕족을 가리키는 칭호 중 하나이다. 왕세제와 비슷한 경우로, 작센 국왕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 무함마드 빈 나예프 등이 왕세질의 예시에 해당한다. 작센 왕국의 경우, 선대 국왕 안톤에게 후사가 없었고, 다음 왕위 계승자인 왕세제 막시밀리안이 고령으로 왕위 계승을 포기하면서 그의 장남인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가 왕세질 자격으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작센 왕국은 후사가 없는 국왕이 많았던 사례로 꼽힌다.

5. 왕세자의 칭호

왕세자는 저하(邸下)라는 경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동궁(東宮),[8] 춘궁(春宮), 저군(儲君), 정윤(正胤), 이극(貳極), 국본(國本) 등으로도 불렸다.[9][10] 중국에서 유래한 태자 칭호는 세자보다 격이 높아, 왕국에서 왕세자 대신 왕태자를 사용하여 권위를 높이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위만조선부터 고려 초기까지 태자 칭호를 사용했다. 고려원나라 간섭기부터 태자 대신 왕세자 칭호를 사용했다.[10] 1894년에 왕태자 칭호가 복권되었다.[11] 처음에는 대조선국 대군주 폐하와 왕태자 전하였다가, 대한제국 성립 후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로 바뀌었다.[12] 후궁 소생 왕자는 군, 왕비 소생 왕자는 대군으로 구별하여 불렀으며, 누리는 혜택에도 큰 차이가 있었다.[13]

5. 1. 군주제 유지국가

몽트블랑 공작
세르베라 백작
발라게르 영주아라곤 왕국의 왕세자가 받는 칭호로서, 스페인이 통일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비아나 공작나바르 왕국의 왕세자가 받는 칭호로서, 스페인이 통일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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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웨일스 공웨일스 공 윌리엄198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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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콘월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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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로스시 공작


5. 2. 군주제 폐지국가

나폴리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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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브라질 공작프린스 로열
베이라 공작브라간사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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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도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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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프린스 로열도팽프랑스로마왕프랑스프린스 임페리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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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렉스 일리오르


참조

[1] 문서
[2] 네이버 국어사전 왕세자 (王世子) 제후국에서, 임금의 자리를 이을 임금의 아들
[3] 네이버 지식백과 태자 한국학중앙연구원
[4] 네이버 지식백과 훈요십조 https://terms.naver.[...] 두산백과
[5] 서적 이야기 프랑스사 청아출판사 2005-12-10
[6] 서적 A Source Book for Medieval Economic History Biblo and Tannen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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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네이버 지식백과 동궁 https://terms.naver.[...] 두산백과
[9] 네이버 지식백과 왕세자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01-03-30
[10] 서적 조선의 세자로 살아가기 돌베개 2013
[11]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1894년(고종 31년) 12월 17일 1번째 기사 http://sillok.histor[...]
[12] 네이버 지식백과 태자 https://terms.naver.[...] 한국학중앙연구원
[13] 서적 조선의 세자로 살아가기 돌베개 2013
[14] 네이버 지식백과 태자 한국학중앙연구원
[15] 네이버 지식백과 왕세자 https://terms.naver.[...] 문화원형 디지털콘텐츠 2003
[16] 네이버 국어사전 원자 (元子) 아직 왕세자에 책봉되지 아니한 임금의 맏아들
[17] 네이버 지식백과 태자 한국학중앙연구원
[18] 네이버 국어사전 불초하다 (不肖하다) 못나고 어리석다. 아버지를 닮지 않았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19] 네이버 지식백과 태자 https://terms.naver.[...] 한국학중앙연구원
[20] 네이버 지식백과 베르됭 조약 - 근대 서유럽의 테두리가 그려지다 https://terms.naver.[...] 함규진 2014-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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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네이버 지식백과 하인리히 4세 https://terms.naver.[...]
[25] 서적 케임브리지 독일사 시공사 2004-10-15
[26] 네이버 지식백과 하인리히 4세
[27] 네이버 지식백과 리처드 1세
[28] 서적 Henry II Yale University Press 2000
[29] 네이버 지식백과 리처드 1세 https://terms.naver.[...]
[30] 서적 이야기 영국사 청아출판사 2006-01-05
[31] 네이버 지식백과 헨리 2세 https://terms.naver.[...]
[32] 서적 Henry II Yale University Press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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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다음백과 법정상속인 https://100.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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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백과사전 도팽(Dauphin de France) 다음백과 1349 #추정
[41] 백과사전 Charles of France 브리테니커 백과사전 1349 #추정
[42] 웹사이트 브라간사 왕가 (House of Bragança) https://100.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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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서적 스페인,포르투칼사 대한교과서 1988-04-15
[45] 서적 스페인,포르투칼사 대한교과서 1988-04-15
[46] 서적 Reis de Portugal: D. João V Temas & Debates 2009
[47] 서적 스페인,포르투칼사 대한교과서 1988-04-15
[48] 서적 조선의 세자로 살아가기 돌베개 2013
[49] 역사기록 태종실록 3권, 1402년 태종 2년 4월 28일 http://sillok.histor[...] 1402-04-28
[50] 서적 조선의 세자로 살아가기 돌베개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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