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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모토 다카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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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시모토 다카아키는 일본의 사상가, 평론가, 시인으로, 전후 일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1924년 도쿄에서 태어나 도쿄 공업대학에서 전기화학을 전공했으며, 마르크스주의, 개인주의, 공동 환상 등의 개념을 중심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1960년대 안보 투쟁에 참여하고 신좌파 운동에 영향을 미쳤으며, 이후 보수적인 입장으로 전환하여 대중 이론과 도시 이론을 발표했다. 그는 2012년 폐렴으로 사망했으며, 방대한 저작을 통해 문학, 서브컬처, 정치, 사회, 종교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사상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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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모토 다카아키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이름요시모토 다카아키
출생 이름요시모토 다카아키
다른 이름류메이 요시모토
로마자 표기Yoshimoto Takaaki
출생일1924년 11월 25일
출생지도쿄부 도쿄시 쓰키시마
사망일2012년 3월 16일
사망지도쿄도 분쿄구 센다기
국적일본
묘소도쿄도 스기나미구, 쓰키지혼간지 와다호리 묘소
직업
직업시인, 철학자, 문학 평론가
활동 기간1952년–2012년
학력
모교도쿄 공업대학 전기화학과 졸업
문학 활동
장르시, 평론
사조아라치, 시행
주요 작품『고유시와의 대화』 (1952년)
『전위를 위한 10편』 (1953년)
데뷔 작품『고유시와의 대화』 (1952년)
가족
배우자가즈코 (1956년 결혼 - 사망)
자녀하루노 요이코 (장녀)
요시모토 바나나 (차녀)
영향 및 사상
영향을 준 인물칼 마르크스
친란
이마우지 오토하루
미야자와 겐지
다카무라 코타로
하기와라 사쿠타로
요코미쓰 리이치
고바야시 히데오
근대 문학 동인
아라치 동인 시인
영향을 받은 인물아라치 동인 시인
요시마스 고조
후쿠시마 야스키
나카가미 겐지
엔도 미치로
소에다 카오루
노무라 기와오
이소다 고이치
가토 노리히로
이토이 시게사토
야마구치 이치로 외 다수
주요 개념전후 일본의 사상
수상
수상고바야시 히데오 상 (2003년)
후지무라 기념 레키테이상 (2003년)
제19회 미야자와 겐지 상 (2008년)
기타
학자 정보
연구 기관도쿄 공업대학 세계문명센터 특임교수
영향을 준 인물칼 마르크스
지크문트 프로이트
시몬 베유
마태오 복음서
고바야시 히데오
친란
호다 요주로
도야마 케이 외 다수
영향을 받은 인물이소다 고이치
가와카미 하루오
미카미 오사무
쓰키무라 토시유키
야마모토 데쓰시
우에무라 다케오
다카하시 준이치
가미야마 무쓰미
우에노 치즈코
나카자와 신이치
우치다 다쓰루
미야다이 신지
60년 안보 투쟁
공산주의자 동맹 반기파 외 다수
주요 작품『예술적 저항과 좌절』 (1959년)
『언어에게 미란 무엇인가』 (1965년)
『공동 환상론』 (1968년)
『심적 현상론 서설』 (1971년)
『매스 이미지론』 (1984년)

2. 생애

요시모토 다카아키는 1924년 도쿄도 쓰키시마에서 조선업을 하는 가정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2] 10대 시절 다카무라 고타로미야자와 겐지의 작품에 영향을 받아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군국주의 청년'이었으나, 징용 중 전쟁이 끝나자 마르크스주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야마가타 대학을 거쳐 1947년 도쿄 공업대학 전기화학과를 졸업했다.[2]

졸업 후 산업계에 진출, 1952년 도쿄잉크 제조에 입사했고, 시인으로서 아레치상을 받으며 문단에 등장했다. 지식인의 전쟁 책임론을 연구하고, 1960년 미일 안보 조약 개정에 반대하는 안보 투쟁에 참여하여 전학련 학생 운동가들의 지지를 받았다.[3][4] 국회 앞 시위 도중 간바 미치코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요시모토는 체포되었으나 무혐의로 석방되었다.[3][5]

안보 투쟁 실패 후 '구좌파'에 환멸을 느낀 요시모토는 1961년 타니가와 간 등과 잡지 ''실험''(実験|Shikkō일본어)을 창간, 독자적인 사상을 전개했다. 1960년대 후반, 신좌파 학생 운동의 "예언자"(予言者|kyōso일본어)로 불리며[7] '공동 환상'(共同幻想|kyōdō gensō일본어) 개념을 제시하며 큰 영향을 주었다.[7][8]

1980년대부터는 대중 이론과 도시 이론을 발표하며 꼼 데 가르송 의류를 입고 여성 잡지에 등장, 우경화 논란을 빚기도 했다.[22] 오에 겐자부로 등의 반핵 운동을 "반핵 파시즘"이라고 비판하고, 오움진리교를 옹호하여 논란이 되었다.

1996년 수영 중 사고로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으나 회복했고, 2003년 고바야시 히데오상을 수상했다.

2. 1. 초기 생애 (1924년 ~ 1947년)

요시모토 다카아키는 1924년 도쿄도 쓰키시마에서 조선업을 하는 가정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2] 그의 가족은 그가 태어나기 직전 구마모토현 아마쿠사시에서 도쿄로 이주했다.[2] 본가는 구마모토현 아마쿠사시에서 이주해 온 배 만드는 목수였으며, 작은 배부터 대형 선박까지 제작했는데, 가장 큰 배는 타이완 항로를 운항하는 운송선이었다.[12]

10대 시절 사교육을 받으며 문학에 영향을 받아 시를 쓰기 시작했고, 다카무라 고타로미야자와 겐지의 작품에 영향을 받았다. 그는 전쟁 중 '군국주의 청년'이었지만, 징용된 상태에서 전쟁이 끝나는 것을 경험하고 나서 마르크스주의에 매료되었다.

1937년(12세) 도쿄부립화학공업학교에 입학했다. 1942년(17세) 요네자와고등공업학교(현 야마가타대학 공학부)에 입학했다. 1943년부터 미야자와 켄지, 타카무라 코타로, 고바야시 히데오, 요코미치 리이치, 호다 요시로, 불경 등의 영향을 받아 본격적인 시 창작을 시작한다.

무코지마에서의 징용 후, 1945년 도쿄공업대학에 진학했다. 재학 중 수학자 도오야마 히라쿠를 만났고, 패전 직후 도오야마 히라쿠 교수의 자주적인 강좌에서 「양자론의 수학적 기초」를 수강하고 결정적인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1947년 9월 도쿄공업대학 전기화학과를 졸업했다.

요시모토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총력전의 최대 동원 대상이 되어 사상자가 가장 많았고, 유년기에는 황국 신민화 교육이 강화되어 중등·고등 교육을 제대로 받을 기회가 없었던 소위 "전쟁 세대"이다.

요시모토는 자신의 고등학교 시절 동급생 대다수가 군대에 동원되어 다수 전사한 가운데 패전 후 결과적으로 살아남았기 때문에, “패전해도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에 대해 수치스러운 심정이었다고 말한다.

2. 2. 작가 활동과 안보 투쟁 (1948년 ~ 1970년대)

요시모토 다카아키는 지식인들의 전쟁 책임론을 연구했으며, 종전 15년 후인 1960년 미일 안보 조약 개정에 반대하는 안보 투쟁을 전후 질서의 모순이 드러난 것으로 보고 지지했다. 그는 새로운 조약에 강력히 반대하며 전학련 학생 운동가들의 "열렬한 지지자"이자 "수호 성인"이 되었다.[3][4] 1959년 12월과 1960년 1월, 요시모토는 전학련 집회에서 연설을 요청받았고, 1960년 6월 4일 조약에 반대하는 전국적인 총파업의 일환으로 도쿄 시나가와 역에서 학생 운동가들과 함께 농성에 참여했다.[3] 1960년 6월 15일, 시위가 절정에 달했을 때 그는 전학련 학생들과 함께 국회로 돌진했다. 트럭 위로 뛰어올라 학생들에게 저항을 계속하도록 격려하는 즉흥 강연을 했다.[3][4] 그 후 경찰과의 격렬한 충돌이 발생하여 도쿄대학 학생인 간바 미치코가 사망했다.[5] 그 여파로 요시모토는 체포되어 경찰의 심문을 3일 동안 받았지만, 무혐의로 석방되었다.[3]

조약 반대 운동이 조약 비준을 막지 못한 것은 요시모토를 분노하게 만들었고, "구좌파"식 정치 활동에 대한 환멸을 안겨주었다.[3] 1960년 10월, 그는 "허구의 종말"(虚偽の終焉|Gisei no shūen일본어)이라는 제목의 시위에 대한 신랄한 사후 분석 에세이를 발표하여, 조약 반대 시위가 집권 보수파의 "허구"뿐만 아니라 기존 좌파 정치 조직과 주류 좌파 지식인들의 "허구"를 드러냈다고 주장했다.[6] 요시모토는 앞으로 나아갈 유일한 길은 존재의 억압을 거부하고 절대적인 개인 자율성(自立性|jiritsusei일본어)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6]

1961년 9월, 요시모토는 타니가와 간 등과 함께 기존 조직에 의존하지 않고 에세이와 비평을 발표할 장소로 ''실험''(実験|Shikkō일본어)이라는 잡지를 공동 창간했다.

1960년대 후반, 요시모토는 신좌파 학생 운동가들의 영웅이 되었고, 신좌파의 "예언자"(予言者|kyōso일본어)로 알려지게 되었다.[7] 신좌파 운동가들은 조약 반대 운동 실패 후 공산당의 영웅적 지위 붕괴와 좌파 내부의 분열 속에서 요시모토가 긍정적인 이론적 담론을 전개하고 있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요시모토의 책들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는데, 특히 1962년 에세이 모음집 ''허구의 종말''이 유명했다. 이 에세이들에서 요시모토는 공산당 비판과 분파적인 문학 이론에 맞서 독자적인 예술 이론을 전개하며 언어의 미학과 심리적 현상을 강조하고, 전시기의 선전과 군국주의가 "전쟁 광기에 대한 물결 속에서 사실상 전체 인구를 휩쓸어 버렸다"고 묘사하는 "공동 환상"(共同幻想|kyōdō gensō일본어)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7][8] 요시모토의 급진적 개인주의 철학은 당시 분파적이고 관료적인 마르크시즘에 염증을 느낀 학생들과 지식인들에게 안식처가 되었다.

요시모토의 분파주의 반대와 개인주의 철학은 1960년대와 1970년대 전학련, 전공투, 그리고 다른 '비분파' 신좌파에게 주요한 영향과 이론적 자원이 되었다.[8] 그는 1968년-69년 일본 대학 시위 참가자들에게 필독서로 여겨졌다. 이는 그가 1960년대 후반 학생 시위에 대해 초연한 태도를 유지하고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가능했는데, 이는 분파주의와 당 중심 운동에 대한 그의 혐오감의 결과였다.[7][8] 요시모토는 결국 급진적 신좌파 시위 단체조차도 충분히 개인주의적이지 못하며, 일본을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이끌었던 "공동 환상"(共同幻想|kyōdō gensō일본어)의 일부라고 결론지었다.[7][8]

1958년에는 전전 공산주의자들의 전향을 논한 『전향론』을 『현대비평』 창간호에 발표했다. 공산주의자와 일본 지식인들의 전형에는, ① "고도의 근대적 요소"와 "봉건적인 요소"가 모순된 채 결합한 일본 사회가, "지식"을 익히는 대로 이치에 맞지 않는 것으로 보여 한번 떠나지만, 일본 사회에 타당성을 찾아내어 굴복하는("2단계 전향론") ② 마르크스주의의 체계 등에 의해, 처음부터 현실 사회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사상으로 모델링하는("비전향"="전향의 한 형태")의 두 가지가 있다고 논했다. 미야모토 겐지를 지도부로 하는 일본 공산당은 "비전향"에 해당하고, 그 논리는 원칙적인 사이클을 공전시켜 "일본의 봉건적 열등과의 대결을 회피하고 있다"고 비판했다.[15]

1959년, "마티우서 시론", "전향론" 등을 수록한 『예술적 저항과 좌절』을 간행했다.

단가연구사 『단가연구』 1960년 8월호 발췌


1956년부터 1960년에 걸쳐 화타다 세이키와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문학가의 전쟁 책임론에서 시작되어 정치와 예술 운동을 둘러싼 그 공방은, 화타다의 철수와 함께 요시모토의 승리를 강하게 인상짓는 것처럼 종결되었다.

1960년 1월, "전후 세대의 정치 사상"을 『중앙공론』에 발표했다. 4월호에는 일본공산당(共産主義者同盟) 전학련 서기장 시마 시게로 등과 함께 강연회를 여는 등, 요시모토는 60년 안보를 전학련 주류파에 적극적으로 동행함으로써 통과했다. 요시모토는 6월 행동 위원회를 조직하고, 6월 3일 밤부터 다음 날에 걸쳐 시나가와 역 구내의 지지 시위에 참가하고, 6월 15일 국회 구내 항의 집회에서 연설했다. 경찰과의 마찰로 사망자까지 나온 유혈 사건 속에서 100명 이상과 함께 "건조물 침입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다.[17] 18일 석방되었다.

60년 안보 직후, 그 총괄을 둘러싸고 전학련 주류파가 혼란 상태에 빠졌다. 이후 "자립의 사상"을 표방하여 잡지 「시코(試行)」을 창간(1961년 9월)했다. 이 『시코』에서 요시모토는 『언어에게 있어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심적 현상론』을 집필·연재했다. 「시코」 창간호 편집 후기에서는 "어떠한 기성의 질서, 문화 운동으로부터도 자립한 곳에서 창간된다. 동인은 물론, 기고자도, 자신에게 있어 가장 본질적인, 가장 힘을 쏟은 작품을 계속한다는 작업을 계속하면서, 점차 결정된다는 방책 이외에 출발점을 찾지도 찾을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라고 그 이념이 기술되어 있다. 1962년 구로다 칸이치가 제6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 전국구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요시모토는 "구로다 칸이치 교조를 숭배하는 광신적인 종교 단체 마루가쿠도(マル学同)의 폭거를 용서하지 마라"라는 공동 성명을 시미즈 이쿠타로, 카야마 켄이치, 모리타 미노루 등과 함께 제출했다.

발행 부수 500부, 60년 안보 당시 분토 서기장이었던 시마 시게로가 스폰서를 찾아 시작된 『시코』는 처음 타니가와 간, 무라카미 이치로, 요시모토 다카아키 세 동인에 의해 편집되고, 11호 이후 요시모토의 단독 편집으로 1997년 12월 19일 발행의 74호까지 계속되었다. 1970년대 후반에는 8000부를 넘는 부수까지 증가시켰다.[19]

1962년 마츠다 마사오, 야마구치 켄지, 카와니 히로시 등 "자립 학교"를 기획하고, 타니가와 간, 하니야 유타카, 구로다 칸이치 등과 함께 강사를 맡았다.

요시모토가 주장한 "자립의 사상"― 국가로부터의 자립을 의미하는 국가론인 "공동 환상론" ― 은 "빵"의 문제를 은폐하고, 혁명적인 것처럼 행동하는 "지식인"은 수상하다고 변주되어, 요시모토에게 일관되게 주장되는 것이 된다. 1963년 『마루야마 마나오론(증보 개고판)』에서는 "지식인"의 수상함을 대표하고 있는 것이, 마루야마 마나오에 상징되는 대학 교원이라고 되어 있고, 마루야마로부터의 "루산치망"과의 응답을 포함한 격렬한 논전이 전개되었다.

요시모토는 1956년 동양 잉크 제조 주식회사를 퇴직한 후, 토오야마 케이의 소개로 특허 사무소에 간일 근무하고, 1970년에 문필업으로 생계를 세우기로 결심할 때까지 이것을 계속했다.

1962년 안보투쟁에 대한 총괄 문서인 "의제의 종언"을 발표했다. 1965년 『언어에게 있어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간행했다. 오에 겐자부로에토 준의 "완전 책임 편집" 안솔로지 "와레라노 문학" 최종권은 "에토 준·요시모토 다카아키"였다.

1968년 『요시모토 다카아키 시집 현대시 문고 8』을 간행했다. 『요시모토 다카아키 전저작집 2 초기시편 1』을 제1회 배본으로 간행. 저작집은 1978년까지 계속 간행되었다. 12월, 『공동 환상론』을 간행했다.

2. 3. 1980년대 이후: 대중 이론과 보수적 입장

1980년대부터 요시모토 다카아키는 『대중 이미지』, 『고 이미지 I-III』 등 대중 이론과 도시 이론을 발표했다. 이 시기 요시모토는 여성 잡지 앙앙에 꼼 데 가르송 의류를 입고 등장했는데, 하니야 유타카에게 "자본주의 그 자체를 입고 있다"고 비판받으며 우경화했다는 비난을 받았다.[22] 이후 요시모토는 오자와 이치로를 지지하는 등 보수적인 정치 성향을 보였다.

1980년대 후반, 요시모토는 오에 겐자부로 등 전후 민주주의 지식인들이 주도한 반핵 운동을 "반핵 파시즘"이라고 비판했다. 1981년 나카노 코우지(中野孝次) 등이 시작해 500명의 문학가 서명을 모아 2천만 명의 서명 운동으로 발전한 반핵 서명 운동과,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 이후 고조된 반원전 운동을 "섬뜩할 정도로 어리석다"고 비판했다.

1990년대에는 오움진리교 아사하라 쇼코의 요가 수련을 초기 불교 금욕주의의 핵심을 표현한 것이라고 묘사하며, 도쿄 지하철 사린 가스 공격 이후 나카자와 신이치와 함께 오움진리교를 옹호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1996년 8월, 시즈오카현 도이초(東伊豆町)에서 수영 중 의식을 잃고 위독한 상태에 빠졌으나 생존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그의 작품은 비형식적인 수필 쪽으로 기울었다.

2003년, 『나쓰메 소세키 읽기(夏目漱石を読む)』로 고바야시 히데오상을 수상했고, 전집은 후지무라 기념상을 받았다.

2. 4. 만년 (2000년대 ~ 2012년)

1994년, 냉전 구조 붕괴 후 요시모토 다카아키는 과거 자신의 '전향론'을 의식한 「나의 전향」을 문예춘추에 발표했다.[23] 오자와 이치로의 『일본 개조 계획』을 "온건하고 타당한 말을 하고 있다"며 높이 평가했다. 그는 "사회주의는 선이고 자본주의는 악이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좌익에서 우익이 된 것이 아니다", "체제-반체제"라는 의미의 좌익성은 필요도 의미도 없다"면서 자신을 "신·신좌익"으로 규정하고, "개별적인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때그때 태도를 명확히 하면 된다"고 말했다.

같은 시기에 그는 제3차 산업이 발전하고, 공기나 천연수처럼 가격이 없던 것까지 상품으로 팔리는 성숙한 소비 사회인 "초자본주의"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보았다. 그는 "마르크스 경제학이 말하는 자본주의는 소비 과잉이 되었을 때 이미 끝나 버려 마르크스 경제학이 통하지 않는 단계가 되었다"고 했다. 또한 일본 국민은 중류 의식이 91%를 차지하지만, 99%가 되는 것은 멀지 않다고 보았다. 그렇게 되면 국가에 대한 관심도 이상도 필요 없어진다. 그때 현재의 자본주의는 끝난다고 하였다. 그는 "지금 선진국의 진정한 과제는 민족 국가를 어떻게 없앨 것인가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1995년에 발생한 한신·아와지 대지진과 오움진리교의 지하철 사린 사건에 관해서는 "일본의 단절을 상징한다"고 하였고, 특히 오움진리교의 무차별 테러는 "20세기의 소련 붕괴에 버금가는 대사건으로, 전후 민주주의가 얼마나 무력했는가 하는 것이 명확해졌다"고 말했다.

1992년 아사하라 쇼코요가를 중심으로 한 원시 불교 수행을 기술한 사람으로 평가했던[24] 것으로부터, 1995년 오움진리교 사건 발생 후 나카자와 신이치 등과 함께 오움진리교 옹호자라는 비판을 받았다.[25]

1996년 8월, 시즈오카현 토이정의 야가타 해수욕장에서 수영 중 익사하여 의식불명 중태에 빠졌지만, 치료를 통해 목숨을 건졌다.

1997년에는 오츠카 히데시와의 대담에서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세카이계"에 대한 감상을 말했다.

1998년, 자신의 "시코우샤"에서 『아프리카적 단계에 관하여 사관의 확장』을 출판했다.

1999년, 고바야시 요시노리의 만화 『전쟁론』과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에 관련하여 『나의 전쟁론』을 간행하고, 자신의 전쟁 경험을 곁들여 "공", "사", "국가", 특공대, "나쇼날리즘의 서브컬처화" 등에 대한 생각을 말했다.

3. 사상과 평가

요시모토 다카아키는 전후 일본 사상계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그의 사상과 활동은 다양한 평가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1960년대 미일 안보 조약 반대 운동에 참여하며 전학련 학생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운동 실패 후 '구좌파'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독자적인 사상 노선을 걸었다. 그는 '공동 환상' 개념을 통해 개인의 자율성을 강조하며, 1960년대 후반 신좌파 학생 운동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했다.

1980년대 이후에는 대중문화와 도시 이론을 탐구하며 서브컬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지만, 꼼 데 가르송 의류를 입고 등장하거나 오자와 이치로를 지지하는 등 보수적인 행보를 보여 '우경화' 논란을 빚기도 했다. 또한 오에 겐자부로 등의 반핵 운동을 '반핵 파시즘'이라고 비판하고, 오움진리교를 옹호하는 듯한 발언으로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요시모토는 하나다 기요테루(花田清輝),[16] 하니야 유타카(半谷尤夫),[22] 오에 겐자부로 등 당대 지식인들과 활발한 논쟁을 벌였다. 특히 1956년부터 1960년까지 하나다 기요테루와 벌인 논쟁은 전후 문학사상 가장 중요한 논쟁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16]

그는 학문적 배경 없이 독학으로 자신의 사상을 구축했으며, 미셸 푸코, 펠릭스 가타리 등 해외 지식인들과의 대담을 통해 국제적으로도 이름을 알렸다. 마르크스주의스탈린주의의 교조주의는 부정했지만, 마르크스에게서 받은 영향은 공언하는 그의 태도는 여러 방면에 영향을 주었다.[40][41]

오쿠라 토모에는 요시모토의 "대중의 원형" 개념의 추상성을 비판했고, 이와이 카츠토와 가타야마 기타로는 이 개념이 고도성장기에 이미 사라졌다고 평가했다.[50] 소쿠마 에이지는 요시모토의 사상이 “전중파”(미시마 유키오, 하시카와 붕사 등)의 특징을 종합한 것이라고 서술했다.[51] 가타야마 히토토는 하나다·요시모토 논쟁과 관련하여 “전쟁에서 죽은 구체적인 사망자를 논의를 위해 직접적으로 대리하여 대변하지 마라.”라고 비판했다.[52]

요시모토는 자신을 비판한 아사다 아키(浅田彰), 가타야 기토(柄谷行人) 등을 "지식의 밀교주의자" 등으로 칭하며 날 선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54] 나카자와 신이치(中沢新一)는 요시모토의 "아프리카적 단계" 개념이 자신의 "예술인류학" 컨셉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밝혔다.

1990년대 오움진리교 사건 이후에는 아사하라 쇼코(麻原彰晃)를 종교가로서 평가하는 발언으로 비판받았다.[24][25]

요시모토는 구조주의, 포스트구조주의,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비판했지만,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말과 사물』만은 높이 평가했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 이후 고조된 반핵 운동에 대해 "원전 촉진론자는 아니지만 반핵 운동에도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2011년 후쿠시마 제1 원전 사고 이후, 반핵 운동을 비판하고 원전을 옹호하는 입장을 다시 한번 분명히 했다.[64]

요시모토 다카아키(吉本隆明)는 역사 인식과 전쟁관을 둘러싸고 고바야시 요시노리(小林よしのり)와 논쟁을 벌였다. 요시모토는 고바야시의 국가관을 비판하고, "개인"이나 "시민 사회가 국가나 공보다 개념적으로 더 크다"고 주장했다. 1996년에 발족한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3. 1. 주요 사상

요시모토 다카아키는 지식인의 전쟁 책임론을 연구했으며, 1960년 미일 안보 조약 개정에 반대하는 안보 투쟁을 지지했다. 그는 전학련 학생 운동가들의 "열렬한 지지자"이자 "수호 성인"이 되었다.[3][4] 1960년 6월 15일, 시위가 절정에 달했을 때 그는 전학련 학생들과 함께 국회로 돌진하여, 트럭 위에서 학생들에게 저항을 계속하도록 격려했다.[3][4] 이후 경찰과의 격렬한 충돌로 도쿄대학 학생 간바 미치코가 사망했고,[5] 요시모토는 체포되었으나 무혐의로 석방되었다.[3]

조약 반대 운동이 실패하자 요시모토는 "구좌파"식 정치 활동에 환멸을 느꼈다.[3] 1960년 10월, 그는 "허구의 종말"이라는 에세이에서 조약 반대 시위가 기존 좌파 정치 조직과 지식인들의 "허구"를 드러냈다고 주장하며, 개인 자율성(''jiritsusei'')을 추구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6]

1961년 9월, 요시모토는 타니가와 간 등과 함께 ''실험''이라는 잡지를 창간하여, 기존 조직에 의존하지 않는 비평을 발표했다.

1960년대 후반, 요시모토는 신좌파 학생 운동가들의 영웅이 되었고, 신좌파의 "예언자"로 알려졌다.[7] 그의 책들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는데, 특히 1962년 에세이 모음집 ''허구의 종말''이 유명했다. 이 에세이들에서 요시모토는 "공동 환상" 개념을 제시하며, 전시기의 선전과 군국주의가 "전쟁 광기에 대한 물결 속에서 사실상 전체 인구를 휩쓸어 버렸다"고 묘사했다.[7][8] 그의 급진적 개인주의 철학은 분파적 마르크시즘에 염증을 느낀 학생과 지식인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했다.

요시모토의 철학은 1960년대와 1970년대 전학련, 전공투 등 신좌파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8] 그는 1968년-69년 일본 대학 시위 참가자들에게 필독서로 여겨졌지만, 정작 자신은 학생 시위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7][8] 그는 급진적 신좌파 단체조차도 "공동 환상"의 일부라고 결론지었다.[7][8]

요시모토 다카아키는 문학, 서브컬처, 정치, 사회, 종교 등 광범위한 분야를 다룬 작가였다. 그는 1960년대와 1970년대 일본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전후 사상의 거장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미셸 푸코 등 해외 지식인들과 많은 대담을 출판했다.

학문적 배경이 없었던 요시모토는 혼자 연구에 헌신한 지식인들을 지지했다. 그는 하나다 기요테루(花田清輝), 하니야 유타카(半谷尤夫) 등과 격렬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요시모토는 노동조합 운동으로 직장을 잃은 후, 1949년 도쿄공업대학 대학원 특별연구생 시험에 합격하여 급여를 받으며 연구를 계속했다. 1951년 특별연구생 과정을 수료하고 도요잉크제조 주식회사에 취직했다.

1952년 시집 『고유시와의 대화』를 자가 발행했고, 1953년에는 시집 『전위를 위한 십편』을 자가 발행했다. 1954년 "아라치 신인상"을 수상하고, 아유카와 신오 등이 주재하는 "아라치 시집"에 참가했다. 같은 해 『현대평론』을 창간하고 "반역의 윤리——마티우서 시론"을 발표, "관계의 절대성"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했다.

1956년, 타케이 아키오와 공동 저술한 『문학자의 전쟁 책임』에서 전시 중 츠보이 시게지 등의 행동을 비판하고, 신일본문학회 인사들의 행동을 비판했다. 같은 해 요시모토는 도요잉크제조 주식회사를 퇴직했다.

1958년 『전향론』을 발표, 공산주의자와 일본 지식인들의 전향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고 주장했다. 미야모토 켄지의 일본 공산당은 "비전향"에 해당하며, "일본의 봉건적 열등과의 대결을 회피하고 있다"고 비판했다.[15]

1959년, 『예술적 저항과 좌절』을 간행했다.

1956년부터 1960년까지 화타다 세이키(花田清輝)와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이소다 코이치(磯田光一)는 이 논쟁을 전후 문학사상 가장 중요한 논쟁 중 하나로 평가했다.[16]

1960년 1월, "전후 세대의 정치 사상"을 발표하고, 일본공산당(共産主義者同盟) 전학련 서기장 시마 시게로(島成郎) 등과 강연회를 열었다. 요시모토는 60년 안보를 신좌익(新左翼) 집단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6월 행동 위원회를 조직하고 시나가와 역 시위에 참가했으며, 6월 15일 국회 항의 집회에서 연설했다. 경찰과의 충돌로 사망자가 발생했고, 요시모토는 100명 이상과 함께 체포되었다.[17] 18일 석방 후 근대 문학상을 수상했다.

60년 안보 이후 전학련 주류파가 혼란에 빠지자, 요시모토는 "자립의 사상"을 표방하며 잡지 「시코(試行)」을 창간했다(1961년 9월). 요시모토는 『시코』에서 기성 미디어에 의존하지 않고 『언어에게 있어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심적 현상론』을 집필·연재했다. 「시코」 창간호 편집 후기에는 "어떠한 기성의 질서, 문화 운동으로부터도 자립한 곳에서 창간된다"는 이념이 기술되어 있다. 1962년 구로다 칸이치가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요시모토는 시미즈 이쿠타로(清水幾太郎) 등과 함께 공동 성명을 제출했다.

발행 부수 500부로 시작된 『시코』는 타니가와 간(谷川雁), 무라카미 이치로(村上一郎), 요시모토 다카아키 세 동인에 의해 편집되었고, 11호 이후 요시모토 단독 편집으로 1997년 종간까지 36년간 계속되었다. 70년대 후반에는 8000부를 넘는 부수까지 증가했다.[19]

1962년 "자립 학교"를 기획하고, 타니가와 간(谷川雁), 하니야 유타카(埴谷雄高) 등과 함께 강사를 맡았다.

요시모토가 주장한 "자립의 사상"은 국가로부터의 자립을 의미하며, "공동 환상론(共同幻想論)"이 구상된다. "빵"의 문제를 은폐하고 혁명적인 척하는 "지식인"은 수상하다고 변주되며, 요시모토에게 일관되게 주장된다. 1963년 『마루야마 마나오론(丸山真男論)(증보 개고판)』에서는 마루야마 마나오(丸山眞男)에 상징되는 대학 교원을 비판했다.

요시모토는 1956년 퇴직 후, 대학 시절 은사 토오야마 케이(遠山啓)의 소개로 특허 사무소에 간일 근무하고, 1970년 문필업으로 생계를 세우기로 결심할 때까지 계속했다.

1962년 안보투쟁(安保闘争) 총괄 문서인 "의제의 종언"을 발표했다. 1965년 『언어에게 있어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간행. 같은 해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郎)와 에토 준(江藤淳)의 "완전 책임 편집" 문학 전집 최종권은 "에토 준(江藤淳)·요시모토 다카아키"였다.

1968년 『요시모토 다카아키 시집 현대시 문고 8』을 간행. 같은 해 저작집을 전집적인 형태로 간행, 1978년까지 계속 간행되었다. 12월, 『공동 환상론(共同幻想論)』을 간행했다.

요시모토의 "이론적" 서적에 대한 비판은 간행 직후부터 현재까지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핵심 저서는 "탈취"되었다고 논하는 평론가도 있다.

1980년대, 텔레비전과 만화 등을 논한 『매스 이미지론(マス・イメージ論)』과 도시론을 다룬 『하이 이미지론』을 발표했다. 서브컬처를 평가하고, 키요시로 이키노(忌野清志郎) 등을 높이 평가했다. 『공동 환상론』 등 대표 저서들이 각카와 붕코(角川文庫)에서 간행되었다. 이토이 시게리(糸井重里)와는 대담 등을 통해 친분을 맺었고, 이후에도 교류가 계속되었다.(이토이는 2008년 요시모토 강연회 협력자가 되었다.[20]) 펑크 밴드 스타린(スターリン)의 엔도 미치로(遠藤ミチロウ)는 요시모토에게 강한 영향을 받았다.

1984년, 여성지 『an・an』에 꼼 데 가르송(コム・デ・ギャルソン)을 입고 등장했다. 하니야 유타카(埴谷雄高)로부터 비판을 받는 등, 요시모토의 “전향”이 화제가 되었다. 요시모토는 “‘진보’나 ‘좌익’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반세기 이상 지나서 보니, 프롤레타리아 해방 전쟁에서 자본주의 국가에 뒤처져 버렸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이 사실을 踏まえない 한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 “자본제 자체를 긍정하는 것과도, 자본주의에는 아무런 긍정적 문제가 없다는 것과도 전혀 다르다”라고 응답했다. 요시모토는 자신을 “좌익”이라고 칭하고 있다.[22]

1981년 반핵 서명 운동을 비판했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 이후 고조된 반원전 운동도 비판하며, “반핵”이 “반원전”으로, “생태주의”로 귀결되는 것은 “섬뜩할 정도로 어리석다”고 했다.

냉전 붕괴 후인 1994년, 「나의 전향」을 발표했다.[23] 오자와 이치로(小沢一郎)의 『일본 개조 계획』을 높이 평가했다. “사회주의는 선이고 자본주의는 악이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좌익에서 우익이 된 것이 아니다”, “체제-반체제”라는 의미의 좌익성은 필요도 의미도 없다”, “전혀 다른 조건을 가진 좌익성이 필요하다”면서 자신을 “신·신좌익”으로 규정하고, “어떤 개별적인 문제가 발생했을 때,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그때마다 태도를 명확히 하면 된다”고 말했다.

같은 시기 현재 사회를 제3차 산업이 발전하고, 소비 사회가 성숙한 “초자본주의” 단계로 보고, “마르크스 경제학이 말하는 자본주의는 소비 과잉이 되었을 때 이미 끝나 버려 마르크스 경제학이 통하지 않는 단계가 되었다”고 했다. “일본 일반 국민은 중류 의식이 91%를 차지하지만, 99%가 되는 것은 멀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국가 사회에 특별한 요구는 없어진다. 그때 현재의 자본주의는 끝난다. 선진국의 진정한 과제는 민족 국가를 언제 어떻게 없앨 것인가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1995년 한신·아와지 대지진(阪神・淡路大震災)과 오움진리교(オウム真理教)의 지하철 사린 사건(地下鉄サリン事件)에 관해서는 “일본의 단절을 상징한다”고 하였고, 오움의 무차별 테러는 “전후 민주주의가 얼마나 무력했는가 하는 것이 명확해지고, 전후 좌익 운동의 모든 라디컬리즘이 뛰어넘어졌다”고 말했다.

1992년 오움진리교 아사하라 쇼코(麻原彰晃)를 평가했던[24] 것으로부터, 1995년 오움진리교 사건 발생 후 나카자와 신이치(中沢新一) 등과 함께 오움 옹호자라는 비판을 받았다.[25]

1996년(1996年) 수영 중 익사하여 의식불명 중태가 되었지만, 목숨을 건졌다.

1997년 오츠카 히데시(大塚英志)와의 대담에서 『신세기 에반게리온』(新世紀エヴァンゲリオン) 및 “세카이계”에 대한 감상을 말한다.

1998년, 『아프리카적 단계에 관하여 사관의 확장』을 출판했다.

1999년, 고바야시 요시노리(小林よしのり)의 만화 『전쟁론』(新・ゴーマニズム宣言SPECIAL 戦争論)과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新しい歴史教科書を作る会) 관련하여 『나의 전쟁론』을 간행하고, 특공대(特攻隊), “나쇼날리즘(ナショナリズム)의 서브컬처화” 등에 대한 생각을 말했다.

2001년 9월 11일 미국 동시다발 테러 관련, 2002년 저서 『초・전쟁론』을 출간, 미국과 이슬람 근본주의의 대결을 “근대주의적인 망상” 대 “원시적인 망상”의 싸움으로 규정하고, “자유”라는 관점에서 “양자 모두 자유에 대해 망상적이다”라고 주장하며, 21세기의 과제는 국민이 “국가를 열어나가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지구 규모의 기증 경제를 생각해야 한다”고 인식하면서 “일본의 비전투 헌법만이 현재와 미래의 인류 역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유일하게 가리키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2003년 『여름의 밤을 읽다』로 고바야시 히데오상을, 『기시모토 다카아키 전시집』으로 후지무라 기념 역정상을 수상했다.[26] 2000년대 초반 당뇨병성 망막증을 앓았다.[27]

2008년 “시행” 사이트에서 『심적 현상론·본론』이 출판되었다.

같은 해 『게공선』 관련, 정보 기술 발전, 격차 사회, 워킹 푸어에 대해 논하며 “사물이나 사람을 당파로 나누어 판단하는 사고방식이 전반적으로 무너졌다”고 평가하면서도 “좋은 것은 좋고 나쁜 것은 나쁘다는 원칙도 없어졌다”, “이 사회에서 사는 것의 어디에 좋은 점이 있느냐고 물으면, 어디에도 없다고 말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같은 해, 1980년대 하니야 유우타카와의 소비 사회 논쟁을 되짚어보며 현재를 “소비 산업(제3차 산업) 담당자인 통신·정보 담당 과학 기술에 의해 (1980년대) 상황 판단은 나의 사고력을 훨씬 뛰어넘어 극적으로 전개되었다”, “지역의 공간과 시간의 무경계화에 대응하거나 대항하는 사고나 사상도 우리는 가지고 있지 않다”, “정보 과학과 교통 이념은 세계적인 독점 지배 수단 이외에는 이것을 변경할 수 없는 제2의 천연 자연으로 변해가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 현황을 “3, 4년 전부터 일본은 제2의 전후(패전기)로 변해가고 있다”, “전후도 전중도 전전도 ‘미래’와 함께 절단되었다”고 말했다.

2009년 제19회 미야자와 켄지상 수상.

2012년 3월 16일, 폐렴으로 사망했다. 향년 87세.[28]

마르크스주의스탈린주의의 교조주의는 부정하지만, 마르크스에게서 받은 영향은 공언하는 그의 태도는 여러 방면에 영향을 주었다.[40][41] 츠루미 슌스케는 요시모토 다카아키 저 『소생하는 베이유』(1992년) 서평에서, 「소련 붕괴 후 일본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는 각자 나름의 변호적인 주장이 펼쳐지고 있다. 요시모토 다카아키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변호적인 입장과는 확연히 다른 주장을 펼친다.」[42]

오쿠라 토모에는 1980년대 후반 저서 『바보에게 먹일 약』에서 요시모토를 비판했다. "대중의 원형" 추상성을 비판하고, 요시모토가 하나다 키요테루 등 좌익 진영 내 논쟁에서 무적이었던 것은 "신학자 흉내를 낸 신학자"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요시모토가 의존하는 신란의 "악인정기"는 사상이라기보다는 요시모토에게만 허용되는 곡예라고 논했다. "일본인은 평화와 물은 공짜라고 생각한다" 발언을 한 외국인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했다.

이와이 카츠토와 가타야마 기타로는 1980년대 후반, 요시모토 "자립 사상" 근거 "대중의 원형"은 1970년대 초까지 고도성장기에 거의 사라진 것이 아닐까 평가했다.[50]

요시모토는 1986년, "비언어적·비영상적인 존재로서는" 대중은 사라졌다. 하지만 "대중의 원형"은 푸코의 정의와 유사하게 사용하고 있으므로, "지금도 "대중의 원형"을 근거로 하는 것은 상대적 진리로서의 이상으로, 계속 확고하게 존재한다"고 말했다.

요시모토는 1980년대~90년대 자신을 비판한 아사다 아키(浅田彰) 등을 향해, "지식의 밀교주의자", "지적 스노브 삼바카", "지적 스타리니스트"라고 칭했다.[54] 가타야 기토(柄谷行人)에 관해서는, 1989년 "분토(ブント) 경험을 가지고 있는데", "최악의 분토 붕괴자"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2005년에는, 가타야 기토(柄谷行人)를 "젊고 정치운동가로서의 자질도 의욕도 있는" 인간으로서, "하고 싶은 것, 해야 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아사다 아키(浅田彰)에 관해서는, "문부성(文部省)은 권위주의적인 암기식 교육을 유지하는 편이 좋았다"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아사다 아키 수준이 낮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론경제학(理論経済学) 분야에서도 학자로서 전혀 뛰어나지 않습니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신란(親鸞)의 "환상(還相)"을, 요시모토는 2002년 『초전쟁론』(超戦争論)에서 "시선의 문제"라고 하고 있다. "신란(親鸞)이 환상(還相)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물을 현실 측면, 현재 측면에서 보는 시선에 더하여, 반대 방향에서ー미래 측면에서라고 하죠, 저쪽에서 이쪽을 보는 시선을 함께 갖는다는 식으로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나카자와 신이치(中沢新一)는, 자신의 "예술인류학" 컨셉트는, 요시모토 1998년 "아프리카적 단계" 개념과 매우 깊은 관계가 있다고 하고 있다. 나카자와는 요시모토 『마지막 신란』(最後の親鸞) 문고판(2002) 해설 "21세기를 향한 사상의 포환"을 쓰고, 2008년에는 요시모토와 대담을 했다.[56]

불교학자 하카타니 노리아키(袴谷憲昭)는, 요시모토 다카아키・우메하라 타케시(梅原猛)・나카자와 신이치(中沢新一) 공저 『일본인은 사상했는가』(1995년)에 대해, "불교 기본적인 '상식'조차 모르고 제멋대로 발언을 반복하고 있다", "이 책을 서평 대상으로 선택한 것은, 이러한 불온한 것을 그냥 파는 것을 맡길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비판하고 있다.[57]

3. 2. 평가와 논쟁

요시모토 다카아키는 지식인의 전쟁 책임론을 연구했으며, 1960년 미일 안보 조약 개정에 반대하는 안보 투쟁을 지지했다. 그는 전학련 학생 운동가들의 "열렬한 지지자"이자 "수호 성인"이 되었다.[3][4] 1960년 6월 15일, 시위가 절정에 달했을 때 국회로 돌진하여 학생들에게 저항을 계속하도록 격려했다.[3][4] 이후 경찰과의 충돌로 간바 미치코가 사망했고, 요시모토는 체포되었으나 무혐의로 석방되었다.[3]

조약 반대 운동이 실패하자 요시모토는 "구좌파" 정치 활동에 환멸을 느꼈다.[3] 1960년 10월, "허구의 종말" 에세이에서 기존 좌파 정치 조직과 지식인들의 "허구"를 비판하며, 개인 자율성(''jiritsusei'') 추구를 주장했다.[6]

1960년대 후반, 요시모토는 신좌파 학생 운동가들의 영웅이 되었고, "예언자"로 불렸다.[7] 그의 책들은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특히 1962년 에세이 모음집 ''허구의 종말''이 유명했다. 그는 "공동 환상" 개념을 제시하며 전시기의 선전과 군국주의가 "전쟁 광기에 대한 물결 속에서 사실상 전체 인구를 휩쓸어 버렸다"고 묘사했다.[7][8]

요시모토의 분파주의 반대와 개인주의 철학은 1960년대와 1970년대 전공투 등 신좌파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8] 1968년-69년 일본 대학 시위 참가자들에게 필독서로 여겨졌지만, 그는 학생 시위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7][8]

1980년대부터 요시모토는 대중 이론인 『대중 이미지』와 도시 이론인 『고 이미지 I-III』를 발표했다. 앙앙에 꼼 데 가르송 의류를 입고 등장하여 우경화했다는 비난을 받았다.[22] 이후 보수적인 정치 성향을 보이며 오자와 이치로를 지지했다.

1980년대 후반, 오에 겐자부로 등 전후 민주주의 지식인들의 반핵 운동을 "반핵 파시즘"이라고 비판했다. 1990년대에는 오움진리교의 도쿄 지하철 사린 가스 공격 이후 나카자와 신이치와 함께 오움을 옹호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2003년에는 『나쓰메 소세키 읽기』로 고바야시 히데오상을 수상했다.

요시모토는 전후 사상의 거장으로 알려져 있으며, 1960년대와 1970년대 일본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미셸 푸코, 펠릭스 가타리 등 해외 지식인들과의 대담도 출판했다. 학문적 배경이 없었던 요시모토는 독학으로 연구에 헌신한 지식인들을 지지했다. 하나다 기요테루(花田清輝), 하니야 유타카(半谷尤夫) 등과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1956년부터 1960년까지 화타다 세이키(花田清輝)와 논쟁을 벌여, 정치와 예술 운동을 둘러싼 공방 끝에 요시모토가 승리한 것처럼 종결되었다.[16] 1960년 60년 안보 당시 요시모토는 분토(ブント) 전학련에 적극적으로 동행했다.[17] 6월 15일 국회 구내 항의 집회에서 연설하고 경찰과 충돌하여 체포되었으나,[17] 18일 석방되었다. 1961년 9월, 잡지 ''시코(試行)''을 창간하여 기성 미디어에 의존하지 않고 『언어에게 있어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심적 현상론』을 집필, 연재했다. 1962년, 마루야마 마나오(丸山眞男)를 비판하며 논쟁을 벌였다.

1980년대 요시모토는 서브컬처를 평가하고, 키요시로 이키노(忌野清志郎), 사카모토 류이치(坂本龍一), 비트 다케시(ビートたけし) 등을 높이 평가했다. 카와쿠보 레이(川久保玲)의 꼼 데 가르송(コム・デ・ギャルソン)을 입고 하니야 유타카(埴谷雄高)에게 비판받는 등, "전향"이 화제가 되었다.[22] 1981년 반핵 서명 운동과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 이후 고조된 반원전 운동을 비판했다.

1994년, 자신의 '전향론'을 의식한 「나의 전향」을 발표하고, 오자와 이치로(小沢一郎)의 『일본 개조 계획』을 높이 평가했다. 1995년 한신·아와지 대지진(阪神・淡路大震災)과 오움진리교(オウム真理教)의 지하철 사린 사건(地下鉄サリン事件)을 "일본의 단절을 상징한다"고 했다. 1992년 아사하라 쇼코(麻原彰晃)를 평가했던 것으로부터,[24] 1995년 오움진리교 사건 발생 후 나카자와 신이치(中沢新一) 등과 함께 오움 옹호자라는 비판을 받았다.[25] 1999년, 고바야시 요시노리(小林よしのり)의 만화 『전쟁론』(新・ゴーマニズム宣言SPECIAL 戦争論)과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에 관련하여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2001년 미국 동시다발 테러 이후, 저서 『초・전쟁론』을 출간하여 미국과 이슬람 근본주의의 대결을 비판했다.

오쿠라 토모에는 요시모토의 사상적 기반인 "대중의 원형"의 추상성을 비판했다. 이와이 카츠토와 가타야마 기타로는 요시모토가 근거로 삼는 "대중의 원형"이 고도성장기에 사라진 것이 아닌가 평가했다.[50] 소쿠마 에이지는 요시모토의 사상이 “전중파”(미시마 유키오, 하시카와 붕사 등)의 특징을 종합한 것이라고 서술했다.[51] 가타야마 히토토는 하나다·요시모토 논쟁과 관련하여 “전쟁에서 죽은 구체적인 사망자를 논의를 위해 직접적으로 대리하여 대변하지 마라.”라고 비판했다.[52] 요시모토는 이공계 대학 진학은 의도적인 병역 기피가 아니며, "죄책감"은 없다고 말했다.

요시모토는 1980년대~90년대 자신을 비판한 아사다 아키(浅田彰), 가타야 기토(柄谷行人), 렌지쓰 시게히코(蓮實重彦)를 "지식의 밀교주의자" 등으로 칭했다.[54] 나카자와 신이치(中沢新一)는 자신의 "예술인류학" 컨셉이 요시모토의 "아프리카적 단계" 개념과 관계가 있다고 했다. 불교학자 하카타니 노리아키(袴谷憲昭)는 요시모토, 우메하라 타케시(梅原猛), 나카자와 신이치(中沢新一)의 공저 『일본인은 사상했는가』를 비판했다.[57]

요시모토는 오움진리교 사린 사건 이후 인터뷰에서 종교가로서의 아사하라 쇼코(麻原彰晃)를 평가한다고 말해 비판을 받았다.[58][59][60] 사회학자 하시즈메 다이자부로(橋爪大三郎)는 『공동 환상론』에서의 구조주의 인류학 해석에 의문을 품고 요시모토에게 번역을 보냈다. 하시즈메는 『언어에게 있어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의 역학적인 방법을 놈 촘스키(Noam Chomsky)와는 독립적으로 품사 문제를 다룬 것이라고 평가했다.[50]

요시모토는 구조주의, 포스트구조주의,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비판했지만,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말과 사물』만은 높이 평가했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 이후 고조된 반핵 운동에 대해 요시모토는 "원전 촉진론자는 아니지만 반핵 운동에도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2011년 후쿠시마 제1 원전 사고 이후, 반핵 운동을 비판하고 원전을 옹호하는 입장을 다시 한번 분명히 했다.[64]

요시모토 다카아키(吉本隆明)는 역사 인식과 전쟁관을 둘러싸고 고바야시 요시노리(小林よしのり)와 논쟁을 벌였다. 요시모토는 고바야시의 국가관을 비판하고, "개인"이나 "시민 사회가 국가나 공보다 개념적으로 더 크다"고 주장했다. 1996년에 발족한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1981년 문학가들의 반핵 성명에 대해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 나카가미 켄지(中上健次)에 관해서는 고전적인 스타일의 『고목탄』(枯木灘)을 높이 평가했다. 1997년 『신세기 에반게리온』에 대해 논하며 세카이계의 감각에 불편함을 언급했다. 미야다이 신지는 요시모토에게 깊이 감명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4. 저작

요시모토 다카아키의 저작 목록은 다음과 같다.


  • 『예술적 저항과 좌절』 (未來社일본어, 1959년), こぶし書房일본어, 2012년

:: マチウ書試論일본어 수록. 마쓰모토 쇼우지 신판 해설

  • 『서정의 논리』 (未來社일본어, 1959년)
  • 『의제의 종언』 (現代思潮社일본어, 1962년)
  • 『마루야마 마나부론』 (一橋新聞部일본어, 1963년), 후에 증보개고판
  • 『요시모토 다카아키 시집』 (思潮社일본어, 1963년), 후에 여러 차례 신판
  • 『모사와 거울』 (春秋社일본어, 1964년, 증보판 1968년, 2008년)
  • 『언어에 있어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Ⅰ・Ⅱ』 (勁草書房일본어, 1965년), 후에 각가원문고, 각가소피아문고
  • 다카무라 고타로』 (春秋社일본어, 1966년, 고단샤문예문고 1991년)
  • 『공동환상론』 (河出書房新社일본어, 1968년, 개정판·角川文庫일본어 1982년), 후에 角川ソフィア文庫일본어
  • 『상황에 대한 발언』 (徳間書店일본어, 1968년), 완본판·洋泉社일본어, 2011년
  • 『자립의 사상적 거점』 (徳間書店일본어, 1970년)
  • 『상황』 (河出書房新社일본어, 1970년)
  • 『심적 현상론 서설』 (北洋社일본어, 1971년), 후에 개정판·角川文庫일본어, 角川ソフィア文庫일본어
  • 미나모토노 사네토모』 (일본시인선: 筑摩書房일본어, 1971년), ちくま文庫일본어
  • 『패배의 구조 기시모토 타카아키 강연집』 (弓立社일본어, 1973년)
  • 『상황에 대한 발언 기시모토 타카아키 강연집』 (徳間書店일본어, 1973년)
  • 『이단과 정계』 (現代思潮社일본어, 1975년)
  • 『시적 건곤』 (国文社일본어, 1975년)
  • 『서적의 해체학』 (中央公論社일본어, 1975년), 후에 中公文庫일본어, 講談社文芸文庫일본어
  • 『주박으로부터의 해방』 (こぶし書房일본어, 1976년)
  • 『지의 기슭으로』 (弓立社일본어, 1976년)
  • 『패배의 구조 기시모토 타카아키 강연집』 (弓立社일본어, 1976년)
  • 『지의 기슭으로 기시모토 타카아키 강연집』 (弓立社일본어, 1976년)
  • 『초기 가요론』 (河出書房新社일본어, 1977년), ちくま学芸文庫일본어 1994년
  • 『전후 시사론』 (大和書房일본어, 1978년 9월)
  • 『기시모토 타카아키 세이지키』 (日本エディタースクール出版部일본어, 1978년 10월)
  • 『기시모토 타카아키 시집』 (思潮社일본어 現代詩文庫일본어, 1979년)
  • 『비극의 해독』 (筑摩書房일본어, 1979년 12월), ちくま学芸文庫일본어 1997년
  • 『초원으로의 말씀』 (青土社일본어, 1980년 2월)
  • 『세계 인식의 방법』 (中央公論社일본어, 1980년 6월)
  • 『마지막 신란』 (春秋社일본어, 1981년, 증보신판 1984년 4월, ちくま学芸文庫일본어 2002년)
  • 『말이라는 사상』 (弓立社일본어, 1981년)
  • 『아유카와 노부오론』 (思潮社일본어, 1982년 1월)
  • 『승려로서의 료칸 요시모토 타카아키 강연록』 (「すうら」出版部일본어, 1982년)
  • 『공허로서의 주제』 (福武書店일본어, 1982년 4월)
  • 『「반핵」이론』 (深夜叢書社일본어, 1982년)
  • 『교육학교 사상』 (日本エディタースクール出版部일본어, 1983년 7월)
  • 『신란 불의로부터의 편지』 (日本エディタースクール出版部일본어, 1984년 10월)
  • 『매스·이미지론』 (후쿠타케 쇼텐, 1984년)
  • 『은둔의 구조 료칸론』 (すうら出版部일본어, 1985년 1월)
  • 『대환상 n개의 성을 둘러싸고』 (春秋社일본어, 1985년 1월) (시리즈 가족 1)
  • 『죽음의 위상학』 (潮出版社일본어, 1985년 6월)
  • 『현재에 있어서의 차이』 (福武書店일본어, 1985년 1월)
  • 『겐지모노가타리론』 (大和書房일본어, 1985년 9월, ちくま学芸文庫일본어 1992년, 洋泉社일본어 MC신서 2009년)
  • 『중층적인 비결정으로』 (大和書房일본어, 1985년 9월)
  • 『사상의 유기와 원칙 증보』 (勁草書房일본어, 1986년 6월)
  • 『〈지〉의 파토그래피 근대문학으로부터 현대를 본다』 (海鳴社일본어, 1986년 10월)
  • 『백열화된 말 요시모토 타카아키 문학사상 강연집』 (思潮社일본어, 1986년 10월)
  • 『기호의 숲의 전설가 장편시』 (角川書店일본어, 1986년 12월)
  • 나쓰메 소세키적 주제』 (春秋社일본어, 1986년 12월)
  • 『여름을 지난 영화 전쟁·호러·SF·애니메이션』 (潮出版社일본어, 1987년 8월)
  • 『초서구적까지』 (弓立社일본어, 1987년 11월)
  • 『환상의 왕조로부터 현대도시로 하이·이미지의 횡단』 (河合文化教育研究所일본어, 1987년 12월)
  • 『하이·이미지론 1』 (후쿠타케 쇼텐, 1989년), 후에 福武文庫일본어, ちくま学芸文庫일본어
  • 『말로부터의 촉수』 (가와데 쇼보 신샤, 1989년)
  • 『요시모토 타카아키 전기독교론 집성』 (春秋社일본어, 1988년 12월)
  • 『요시모토 타카아키 전 천황제·종교론 집성』 (春秋社일본어, 1989년 1월)
  • 미야자와 겐지』 (筑摩書房일본어, 1989년 7월, ちくま学芸文庫일본어 1996년)
  • 『상으로서의 도시 요시모토 타카아키·도시론집』 (弓立社일본어, 1989년 9월)
  • 사이교론』 (講談社文芸文庫일본어, 1990년 2월), 신편
  • 『하이 이미지론 2』 (福武書店일본어, 1990년), 후에 福武文庫일본어, ちくま学芸文庫일본어
  • 『미래의 신란』 (春秋社일본어, 1990년 10월)
  • 『마태복음시론·전향론』 (講談社文芸文庫일본어, 1990년 10월)
  • 『야나기다 구니오론 집성』 (JICC出版局일본어, 1990년 11월, 洋泉社일본어, 1995년)
  • 『하이 오이디푸스론 개체환상의 향방』 (幻想社일본어, 1990년 12월)
  • 『시마오 미네오』 (筑摩書房일본어·ちくま叢書일본어, 1990년 11월)
  • 『상황으로서의 영상 고도자본주의하의 「텔레비전」』 (河出書房新社일본어, 1991년 6월)
  • 『대상황론』 (弓立社일본어, 1992년 3월)
  • 『보이기 시작한 사회의 한계』 (コスモの本일본어, 1992년 4월)
  • 『신·서물의 해체학』 (メタローグ일본어, 1992년 9월)
  • 『요시모토 타카아키 초기 시집』 (講談社일본어, 1992년 10월)
  • 『추도사기』 (JICC出版局일본어, 1993년 3월) 각·증보판, 洋泉社일본어 1997년, 지쿠마 문고 2000년 講談社文芸文庫일본어 2019년
  • 『하이 이미지론 3』 (福武書店일본어, 1994년 3월), ちくま学芸文庫일본어 2003년
  • 『세계인식의 임계점으로』 (深夜叢書社일본어, 1993년 9월)
  • 『마음에서 말로』 (弘文堂일본어, 1993년 11월)
  • 『배경의 기억』 (母土社일본어, 1994년 1월)
  • 일본사회당 혹은 사회당적인 것의 향방』 (日本社会党機関紙局일본어, 1994년 1월)
  • 『사상의 기준을 둘러싸고』 (深夜叢書社일본어, 1994년 7월)
  • 『상황으로』 (母土社일본어, 1994년 11월)
  • 『사랑하는 작가들』 (コスモの本일본어, 1994년 12월)
  • 『현재는 어디에 있는가』 (新潮社일본어, 1994년 12월)
  • 마르크스 읽어나가는 방법』 (深夜叢書社일본어, 1995년 2월), 「카를 마르크스」光文社文庫일본어, 2006년
  • 『나의 「전향」』 ( 분게이슌주, 1995년, 文春文庫일본어 1997년)
  • 『왜, 고양이와 사귀는가』 (ミッドナイト・プレス일본어, 1995년 3월, 河出文庫일본어, 1998년), 講談社学術文庫일본어, 2016년
  • 『말로부터의 촉수』 (河出書房新社일본어, 1995년 8월, 河出文庫일본어 2003년)
  • 신란부흥』 (春秋社일본어, 1995년 7월)
  • 『여유 없는 일본을 생각한다』 (コスモの本일본어, 1995년 10월)
  • 『초자본주의』 ( 도쿠마 쇼텐, 1995년, 徳間文庫일본어 1998년)
  • 『모형론』 ( 学習研究社일본어, 1995년)
  • 『학교·종교·가족의 병리 요시모토 타카아키씨에게 듣는다』 (深夜叢書社일본어, 1996년 3월)
  • 『세기말 뉴스를 해독한다』 (マガジンハウス일본어, 1996년 3월)
  • 『말의 비옥한 땅 서평집성 상(일본편)하(해외편)』 ( 中公文庫일본어 1996년 4·5월)
  • 『소비 속의 예술 베스트셀러를 읽는다』 (ロッキング・オン일본어, 1996년 9월)
  • 『종교의 최후의 모습 오움사건의 해결』 ( 슌주샤, 1996년 7월)
  • 『진정한 생각·거짓된 생각 켄지·베이유·을 둘러싸고』 (春秋社일본어, 1997년 1월)
  • 『나라면 이렇게 생각한다 마음을 치유하는 5가지 힌트』 (青春出版社일본어, 1997년 6월, 동문고 2000년)
  • 『한신·아와지 대지진·오움 이후 사상의 원형』 (徳間書店일본어, 1997년 6월)
  • 『신·죽음의 위상학』 (春秋社일본어, 1997년 8월)
  • 『음식 이야기』 (光芒社일본어, 1997년 12월)
  • 『유서』 (角川春樹事務所일본어, 1998년 1월, ハルキ文庫일본어 2004년)
  • 『아프리카적 단계에 관하여 사관의 확장』 (試行社일본어, 1998년)
  • 『아버지의 모습』 (筑摩書房일본어, 1998년 9월)
  • 『냄새를 읽는다』 (光芒社일본어, 1999년 4월)
  • 『시인·평론가·작가를 위한 언어론』 (メタローグ일본어, 1999년 3월)
  • 『소년』 (徳間書店일본어, 1999년 5월 徳間文庫일본어 2001년)
  • 『나의 「전쟁론」』 (ぶんか社일본어, 1999년)
  • 『현재를 어떻게 사는가』 (ボーダーインク일본어, 1999년 7월)
  • 『나라면 말한다! 세기말 일본의 올바른 바라보기, 사귀는 방법』 (青春出版社일본어, 1999년 9월)
  • 『신란 결정판』 (春秋社일본어, 1999년 12월, 신판 2004년)
  • 『写生の物語일본어』(講談社일본어, 2000년 6월), 講談社文芸文庫일본어, 2017년
  • 『행복론』(青春出版社일본어, 2001년 3월)
  • 『일본 근대 문학의 명작』(毎日新聞社일본어, 2001년 4월), 新潮文庫일본어, 2008년
  • 『마음이란 무엇인가 심적 현상론 입문』(弓立社일본어, 2001년 6월)
  • 『현재를 사는 신란』(講談社일본어 +α 新書일본어, 2001년 9월)
  • 류타 나리오론・마루야마 마사오론』(ちくま学芸文庫일본어, 2001년 9월), 신편
  • 『먹거리 탐방기』(光芒社일본어, 2001년 11월)
  • 『독서의 방법 무엇을, 어떻게 읽을까』(光文社일본어, 2001년 11월), 知恵の森文庫일본어, 2006년
  • 『요시모토 다카아키의 미디어를 의심하라 넘쳐나는 보도에서 "진실"을 읽는 법』(青春出版社일본어, 2002년 4월)
  • 『노년의 방식』(日本放送出版協会일본어, 2002년 6월), 古木友恵일본어
  • 히키코모리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는 것』(大和書房일본어, 2002년 12월), 후에 동서점 문고, SB 신서
  • 나쓰메 소세키를 읽는다』(筑摩書房일본어, 2002년 11월), ちくま文庫일본어, 2009년
  • 『나날을 음미하는 사치 노년에서 발견한 작은 즐거움』(青春出版社일본어, 2003년 2월)
  • 『현대 일본의 시가』(毎日新聞社일본어, 2003년 4월), 「시의 힘」 新潮文庫일본어, 2009년
  • 『이형의 심적 현상 정신분열증과 문학의 표현 세계』(批評社일본어, 2003년 12월)
  • 『「불량 국가」이론』(光文社일본어, 2004년 1월)
  • 『인생이란 무엇인가』(弓立社일본어, 2004년 2월)
  • 『요시모토 다카아키 대표 시선』(思潮社일본어, 2004년 4월)
  • 『소세키의 큰 여행』(日本放送出版協会일본어, 2004년 7월)
  • 『전쟁과 평화』(文芸社일본어, 2004년 8월), 후에 문고
  • 『초연애론』(大和書房일본어, 2004년 9월)
  • 『불교론 집성』(春秋社일본어, 2004년 11월)
  • 『요시모토 다카아키 「음식」을 말하다』(朝日新聞社일본어, 2005년 3월) 경청 宇田川悟일본어, 후에 朝日文庫일본어
  • 『중학생을 위한 사회과』(一井文学일본어, 2005년 3월)
  • 『유년론 21세기의 대환상에 관하여』(2005년 6월)
  • 『끝없는 시혼 나의 만남의 시인들』(思潮社일본어, 2005년 1월)
  • 『13세는 두 번 있을까 「현재를 사는 자신」을 생각한다』(大和書房일본어, 2005년 9월)
  • 『시학 서설』(思潮社일본어, 2006년 1월)
  • 『가족의 가는 길』(光文社일본어, 2006년 3월), 知恵の森文庫일본어, 2012년
  • 『시란 무엇인가 세계를 얼리는 말』(思潮社일본어, 2006년 3월)
  • 『초기 노트』(光文社文庫일본어, 2006년 7월)
  • 『돌아온 말 요시모토 다카아키와 신란이라는 주제』(雲母書房일본어, 2006년 5월)
  • 『노년의 넘어서기』(朝日新聞社일본어, 2006년 5월), 후에 문고
  • 『소생하는 시몬 베유』(洋泉社일본어 MC 신서, 2006년 9월)
  • 『사상이란 무엇인가』(春秋社일본어, 2006년 10월)
  • 『평생 현역』(洋泉社일본어, 2006년 11월)
  • 『사상의 안솔로지』(筑摩書房일본어, 2007년 1월), ちくま学芸文庫일본어, 2013년
  • 『진위』(講談社インターナショナル일본어, 2007년 2월), 講談社文庫일본어, 2011년 7월
  • 『요시모토 다카아키 저서를 말하다』(ロッキング・オン일본어, 2007년 6월), 신판 2012년
  • 『よせやい일본어』(ウェイツ일본어, 2007년 9월)
  • 『일본어의 가는 길』(光文社일본어, 2008년 1월), 知恵の森文庫일본어, 2012년
  • 『「상황에 대한 발언」전집 1 1962~1975』(洋泉社일본어 MC 신서, 2008년 1월)
  • 『「상황에 대한 발언」전집 2 1976~1983』(洋泉社일본어 동, 2008년 3월)
  • 『「상황에 대한 발언」전집 3 1984~1997』(洋泉社일본어 동, 2008년 5월), 완전판·洋泉社일본어, 2011년 11월
  • 『심적 현상론·본론』(文化科学高等研究院出版局일본어, 2008년 7월, 동·지의 신서, 2022년)
  • 『「예술 언어론」에 대한 각서』(以文社일본어, 2008년)
  • 『빈곤과 사상』(青土社일본어, 2008년)
  • 『요시모토 다카아키 전 만화론 표현으로서의 만화·애니메이션』(小学館クリエイティブ일본어, 2009년)
  • 『제2의 패전기: 앞으로의 일본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春秋社일본어, 2012년)
  • 『미야자와 켄지의 세계』(筑摩選書일본어, 2012년). 강연집
  • 『요시모토 다카아키가 마지막으로 남긴 30만 자 하: 요시모토 다카아키, 시대와 마주하다』(ロッキング・オン일본어, 2012년)
  • 『프란시스코에게』(講談社일본어, 2013년 3월, 講談社文庫일본어, 2016년 3월). 滝春美일본어 구성·문장
  • 『요시모토 다카아키의 경제학』(筑摩選書일본어, 2014년). 나카자와 신이치 편저
  • 『「탈원전」반론』(論創社일본어, 2015년 1월)
  • 『사상의 중심축과 나의 궤적: 사상 표출편』(文化科学高等研究院出版局일본어, 2015년 7월)
  • 『전남도론』(作品社일본어, 2016년)
  • 『아시아적이라는 것』(筑摩書房일본어, 2016년)
  • 『신란의 말씀』(中公文庫일본어, 2019년). 신편
  • 『두 명의 무라카미: 무라카미 하루키·무라카미 류론 집성』(論創社일본어, 2019년)
  • 『지옥과 인간: 요시모토 다카아키 수집 강연집』(ボーダーインク일본어, 2020년)
  • 『나의 쇼와사』(ビジネス社일본어, 2020년)
  • 『시가의 부름: 오카이 다카시론 집성』(論創社일본어, 2021년), 松岡祥男일본어
  • 『애국적 문학가들에게: 60년 안보·전공투론 집성』(講談社文芸文庫일본어, 2021년)
  • 『심적 현상론·본론』(지의 신서 SONDEOS A01, 文化科学高等研究院出版局일본어, 2022년)
  • 『요시모토 다카아키가 말한 초자본주의의 현재: 그 본질에 대한 사상』(지의 신서 004, 文化科学高等研究院出版局일본어, 2022년)
  • 『나의 책은 곧 끝난다: 요시모토 다카아키 시집』(講談社文芸文庫일본어, 2024년)
  • 『요시모토 다카아키 시집』(岩波文庫일본어, 2024년). 八海比美일본어
  • 『문학자의 전쟁책임』(武井昭夫일본어 공저), 淡路書房일본어, 1956
  • 『민주주의의 신화 안보투쟁의 사상적 총괄』(谷川雁일본어, 埴谷雄高일본어, 森本和夫일본어, 梅本克己일본어, 黒田寛一일본어 공저), 現代思潮社일본어, 1960
  • 『현대일본사상대계(現代日本思想大系) 4 민족주의(ナショナリズム)』(기요시모토 타카아키(吉本隆明) 편집・해설), 筑摩書房일본어, 1964
  • * 山路愛山일본어, 高山樗牛일본어, 石光真清일본어, 徳富蘇峰일본어, 陸羯南일본어, 中野正剛일본어, 杉本五郎일본어, 다케우치 요시
  • 『현대시론대계(現代詩論大系) 2 1955-1959 상권』(편저), 思潮社일본어, 1965
  • * 谷川雁일본어, 아유카와 노부오, 武井昭夫일본어, 清岡卓行일본어, 아유카와 노부오, 쓰루미 슌스케, 黒田三郎일본어, 中村稔(詩人)일본어, 乾武俊일본어, 寺田透일본어, 오오카 마코토, 関根弘일본어, 唐木順三일본어
  • 『어디에 사상의 근거를 두는가 기요시모토 타카아키(吉本隆明) 대담집』, 筑摩書房일본어, 1972.5
  • * 쓰루미 슌스케, 磯田光一일본어, 에토 준, 小川国夫일본어, 다케우치 요시, 松原新一일본어, 粟津則雄일본어, 清岡卓行일본어, 島尾敏雄일본어, 이소자키 아라타, 가라타니 고진
  • 『사상의 근원으로부터 기요시모토 타카아키(吉本隆明) 대담집』, 青土社일본어, 1975
  • 『사상의 방식과 원칙 기요시모토 타카아키(吉本隆明) 대담집』, 勁草書房일본어, 1976
  • 『의식혁명우주 하니야 유우코(埴谷雄高) 대담 기요시모토 타카아키(吉本隆明)』,(埴谷雄高일본어 공저), 河出書房新社일본어, 197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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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近松門左衛門일본어의 세계』, 大東急記念文庫일본어, 1976
  • * 中村幸彦일본어, 広末保일본어, 中村鴈治郎일본어, 武智鉄二일본어, {{llang|ja|桶谷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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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서적 Japan at the Crossroads: Conflict and Compromise after Anpo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4] 문서 Cassegard 0000-00-00 #날짜 정보 부족으로 00-00-00으로 설정
[5] 서적 Japan at the Crossroads: Conflict and Compromise after Anpo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6] 서적 Japan at the Crossroads: Conflict and Compromise after Anpo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7] 서적 Japan at the Crossroads: Conflict and Compromise after Anpo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8] 문서 Cassegard 0000-00-00 #날짜 정보 부족으로 00-00-00으로 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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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방송 吉本隆明 語る~沈黙から芸術まで~
[21] 웹사이트 これまでの放送内容 https://www.nhk.or.j[...] NHK 2018-10-17
[22] 서적 重層的な非決定へ 大和書房 1985-10-00 #날짜 정보 부족으로 00으로 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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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서적 オウムと全共闘 草思社 1995-12-00 #날짜 정보 부족으로 00으로 설정
[26] 간행물 文藝別冊 総特集 吉本隆明 詩人思想家の新たな全貌 河出書房新社
[27] 서적 隆明だもの 晶文社
[28] 뉴스 【吉本隆明氏死去】 戦後思想に圧倒的な影響 時代と格闘したカリスマ 若者を引きつけた吉本思想 http://www.47news.jp[...] 共同通信 2012-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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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서적 句集 七 耀 https://www.shinyaso[...] 深夜叢書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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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서적 世紀末を語る : あるいは消費社会の行方について 紀伊國屋書店 1995-06-00 #날짜 정보 부족으로 00으로 설정
[36] 서적 状況へ 宝島社 199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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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서적 編集者の仕事 白地社 19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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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서적 「反核」異論 深夜叢書社 1982
[66] 서적 吉本隆明 自著を語る ロッキング・オン 2007
[67] 웹사이트 吉本隆明語る 「思想を生きる」/京都精華大学 創立40周年記念事業レポート - Kyoto Seika University Report on 40th Anniversary Events http://www.kyoto-sei[...] 京都精華大学 2018-10-17
[68] 뉴스 日 진보 사상가 요시모토 다카아키 타계 http://www.yonhapnew[...] 연합뉴스 2012-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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