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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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만수는 대한민국 프로 야구 선수이자 지도자이다. 1982년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하여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으며, KBO 리그 최초 홈런, 트리플 크라운 달성 등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5년 연속 골든글러브를 수상하고, 통산 252홈런을 기록하며 삼성 라이온즈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선수 은퇴 후에는 지도자로 변신하여 메이저 리그 코치와 SK 와이번스 감독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라오스에서 야구 보급에 힘쓰고 있다. 그의 등번호 22번은 삼성 라이온즈의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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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수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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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정보 | |
이름 | 이만수 |
한자 표기 | 李萬洙 |
로마자 표기 | I Mansu |
출생일 | 1958년 9월 9일 |
포지션 | 포수, 1루수 |
타석 | 우타 |
투구 | 우투 |
프로 입단 | 1982년 |
데뷔 리그 | KBO |
데뷔 팀 | 삼성 라이온즈 |
데뷔일 | 1982년 3월 27일 |
최종 리그 | KBO |
최종 팀 | 삼성 라이온즈 |
최종 시즌 | 1997년 |
타격 성적 | |
타율 | 0.296 |
홈런 | 252개 |
안타 | 1,276개 |
타점 | 861점 |
수상 경력 | |
주요 수상 | KBO 리그 첫 트리플 크라운 (1984년) KBO 리그 우승 (1985년, 한국시리즈 미개최) KBO MVP (1983년) KBO 골든 글러브 수상 (1983년~1987년, 5회) |
선수 경력 | |
선수 | 삼성 라이온즈 (1982년~1997년) |
지도자 경력 | |
코치 | 시카고 화이트삭스 (2000년~2007년) SK 와이번스 (2007년~2011년) |
감독 | SK 와이번스 (2011년~2014년) |
기타 정보 | |
영구 결번 | 22번 (삼성 라이온즈) |
별칭 | 헐크 |
2. 선수 시절
한양대학교 졸업 후, 1982년 한국 프로 야구 원년 멤버로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했다. 그는 군인이었던 아버지가 강원도에 부임하는 동안 철원군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자랐다.
1982년 3월 27일 KBO 리그 개막전에서 MBC 청룡을 상대로 한국 프로 야구 역사상 첫 홈런이자 첫 타점을 기록했다. 데뷔 첫해부터 팀의 주전 포수로 활약하며 팀의 한국시리즈 진출에 기여했다. 강력한 힘과 홈런 생산 능력으로 "헐크"와 "대한민국의 베이브 루스"라는 별명을 얻었으며,[3] 삼성 라이온즈에서만 16시즌 동안 주전 포수와 1루수로 활약하며 통산 252개의 홈런과 861개의 타점을 기록했다. 프로 선수로서의 의식이 부족했던 리그 초창기에 철저한 자기 관리로 오랫동안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는 평가를 받는다.[7]
1983년에는 첫 홈런왕 타이틀과 함께 리그 MVP로 선정되었다. 이듬해인 1984년에는 타율 .340, 홈런 23개, 타점 80개를 기록하며 타격, 홈런, 타점 3개 부문에서 모두 1위를 차지, 리그 최초의 타격 3관왕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다.[3] 이 타격 3관왕 기록은 2006년 롯데 자이언츠의 이대호가 달성하기 전까지 KBO 리그 유일한 기록이었다. 1985년에도 홈런과 타점 부문에서 리그 1위를 차지했으며, 1983년부터 1987년까지 5년 연속 포수 부문 골든 글러브를 수상했다. 올스타전에는 총 12번 출전했다.
그의 통산 252홈런 기록은 1999년 5월 23일 한화 이글스의 장종훈이 253번째 홈런을 치기 전까지 KBO 리그 최다 홈런 기록이었다.[4] 팀과 지역 대구를 대표하는 간판선수로서의 공헌을 인정받아 등번호 22번은 삼성 라이온즈의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다. 이는 정식 지정 전부터 준영구결번으로 취급되어 그의 은퇴 후 22번을 단 선수는 없었다.
공격에서는 뛰어난 활약을 보였지만, 수비에서는 포수로서 도루 저지 능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가 수상한 5번의 골든 글러브 역시 수비보다는 공격에서의 활약을 더 높게 평가받은 결과라는 시각이 있다. (한국의 골든 글러브는 MLB의 실버 슬러거상이나 NPB의 베스트 나인과 유사한 성격이다.)
2. 1. 삼성 라이온즈 시절 (1982-1997)
대구중앙초등학교, 대구중학교, 대구상업고등학교를 거쳐 한양대학교 체육학과(78학번)를 졸업하고, 1982년 KBO 리그 원년 멤버로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하며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군인이었던 아버지가 강원도에 부임했을 때 철원군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성장했다.1982년 3월 27일, 동대문에서 열린 MBC 청룡과의 KBO 리그 개막전에서 프로 야구 역사상 첫 안타와 첫 홈런을 기록하는 진기록을 세웠다.[3] 이만수는 데뷔 첫해부터 팀의 주전 포수로 활약하며 삼성 라이온즈가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는 데 기여했으나, 팀은 OB 베어스에게 1승 1무 4패로 패배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강력한 힘과 홈런 생산 능력으로 "헐크", "대한민국의 베이브 루스"라는 별명을 얻었으며,[3] 삼성 라이온즈에서 16시즌 동안 주전 포수와 1루수로 활약하며 통산 252개의 홈런과 861개의 타점을 기록했다. 특히 프로 선수로서의 의식이 부족했던 리그 초창기에 철저한 자기 관리로 오랫동안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는 평가를 받는다.[7]
1983년에는 첫 홈런왕 타이틀과 함께 리그 MVP로 선정되었고, 이듬해인 1984년에는 타율 .340, 홈런 23개, 타점 80개를 기록하며 타격, 홈런, 타점 3개 부문에서 모두 1위를 차지, 리그 최초의 타격 3관왕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다.[3] 하지만 그해 MVP는 수상하지 못했는데, 시즌 막판 롯데 자이언츠의 홍문종과의 타격왕 경쟁 과정에서 삼성 투수진이 홍문종에게 9타석 연속 고의사구를 던지는 등[9] 타이틀 경쟁을 인위적으로 조작했다는 비판이 있었고, 한국시리즈에서도 롯데 에이스 최동원의 활약에 막혀 팀이 패배하면서 기자단 투표에서 외면받았다. 결국 그해 MVP는 정규시즌 27승과 한국시리즈 4승을 거둔 최동원에게 돌아갔다. 이만수의 타격 3관왕 기록은 2006년 롯데 이대호가 달성하기 전까지 KBO 리그 유일한 기록으로 남아 있었다.
1985년에도 홈런과 타점 부문에서 리그 1위를 차지했으며, 1983년부터 1987년까지 5년 연속 포수 부문 골든 글러브를 수상했다.[10] KBO 리그 통산 100호 홈런과 200호 홈런을 최초로 달성한 선수이기도 하며, 그의 포수 통산 홈런 기록은 훗날 박경완에 의해 경신되기 전까지 리그 1위였다. 올스타전에는 총 12번 출전했다. 그의 통산 252홈런 기록은 1999년 5월 23일 한화 이글스의 장종훈이 253번째 홈런을 치기 전까지 KBO 리그 최다 홈런 기록이었다.[4]
그러나 1986년에는 마산 전지훈련 중 허리 부상을 당해[11] 시범경기에 출전하지 못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5월 7일 대구 해태전에서 4번 지명타자로 복귀했지만 삼진 3개를 당하는 등 4타수 무안타로 부진했고,[12] 후기리그 초반 다시 허리 부상이 재발해 한동안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8월 2일 대구 해태전에서 복귀했고, 한 달 뒤인 9월 2일 빙그레 이글스전에서는 1회말 선두타자 초구 홈런으로 KBO 리그 최초 100호 홈런을 달성했지만, 5회말 데드볼에 왼쪽 복숭아뼈를 맞아 교체된 후 또다시 결장해야 했다.[13] 결국 이 해에는 59경기 출전에 그치며 규정 타석을 채우지 못했고, 3년 연속 차지했던 홈런왕과 타점왕 타이틀도 내주게 되었다.
공격에서는 뛰어난 활약을 보였지만, 수비에서는 포수로서 발이 느리고 송구가 좋지 않아 도루 저지 능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때문에 1980년대 한국시리즈에서 상대 팀의 기동력 야구에 고전하며 팀이 우승에 실패하는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기도 했다. 그가 수상한 5번의 골든 글러브 역시 수비보다는 공격에서의 활약을 더 높게 평가받은 결과라는 시각이 있다. (한국의 골든 글러브는 MLB의 실버 슬러거상이나 NPB의 베스트 나인과 유사한 성격이다.) 이러한 수비 부담 등으로 인해 1994년부터는 포수 대신 1루수와 지명타자로 주로 출전했다.
1997 시즌 종료 후, 코치 연수 지원 문제를 놓고 구단과 갈등을 겪다가 결국 팀에서 방출되어 은퇴했다. 그는 자비로 미국으로 건너가 코치 연수를 받아야 했다.[14] 이만수 은퇴 후 삼성 라이온즈는 1999년 두산 베어스에서 진갑용을 영입하기 전까지 확실한 주전 포수 부재로 어려움을 겪었다.
이만수는 명실상부한 삼성 라이온즈의 프랜차이즈 스타이며, 그의 등번호 22번은 삼성 라이온즈의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다.[17] 정식 지정 전부터 준영구결번으로 취급되어 그의 은퇴 후 22번을 단 선수는 없었으며, 2004년 공식적으로 영구 결번 처리되었다.[21]
하지만 구단과의 관계는 순탄치 않았다. 2003년 시즌 후, 선동열 수석코치와 한대화 타격코치를 영입하면서 이만수에게도 배터리 코치직을 제안했으나, 삼성 측이 이를 갑자기 철회했다. 이 때문에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코치 제안을 거절했던 이만수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2006년 KBO 리그에 복귀했을 때도 친정팀 삼성이 아닌 SK 와이번스 유니폼을 입었는데, 이는 "한번 버린 사람은 다시 쓰지 않는다"는 삼성그룹의 내부 방침[18], 80~90년대 삼성의 숙원이던 우승을 달성하지 못한 것에 대한 '괘씸죄'[19], 그리고 만 40세까지 현역 생활을 이어가려던 그의 꿈을 구단이 반대한 점[20]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는 해석이 있다. 이만수 본인도 삼성이 1997년 이후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고 생각했으며, 등번호 22번의 영구 결번 지정으로 그나마 억울함을 조금이나마 덜었다고 회고했다.[21]
3. 지도자 경력
1997년 선수 은퇴 후 1998년 미국으로 건너가 지도자 연수를 시작했다. 2000년부터 2006년까지 시카고 화이트삭스 코치로 활동하며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 리그 코칭 스태프가 되었고,[15][5] 2005년에는 팀의 월드 시리즈 우승에 기여하며 한국인 코치 최초로 월드 시리즈 우승 반지를 받았다.[5]
2007년부터 SK 와이번스의 수석코치로 부임하여 김성근 감독을 보좌했다. 2011년 8월 18일 김성근 감독 경질 후 감독 대행을 맡아 팀을 2011년 한국시리즈 준우승으로 이끌었고,[16][6] 이는 KBO 리그 역사상 최초의 감독 대행 한국시리즈 준우승이었다. 시즌 후 정식 감독으로 선임되어 2012년에도 팀을 한국시리즈 준우승으로 이끌었으나, 이후 성적 부진으로 2014년 시즌 종료 후 퇴임했다. 그의 후임으로는 김용희가 선임되었다.
퇴임 후에는 라오스에서 야구 보급 활동에 힘쓰는 한편, KBO 리그 육성위원회 부위원장 및 해설가로도 활동했다.
3. 1. 미국 메이저 리그 코치 시절 (1998-2006)
1997년 은퇴 후, 1998년 미국으로 건너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산하 마이너 리그 싱글 A 팀인 킨스턴 인디언스에서 지도자 연수를 받으며 타격 코치를 맡았다. 1999년에는 시카고 화이트삭스 산하 트리플 A 팀인 샬럿 나이츠로 옮겨 1루 코치로 활동했다.2000년 1월부터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불펜 포수(Bullpen Catcher)[15]를 맡아 2006년까지 코칭 스태프로 활동했다. 이 기간 동안 이만수는 메이저 리그에서 코치로 활동한 최초의 한국인이 되었다.[5] 특히 2005년에는 시카ゴ 화이트삭스가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하는 데 기여했으며, 한국인 코치로서는 사상 처음으로 월드 시리즈 우승 반지(챔피언 링)를 받는 영예를 안았다.[5] 2006년 시즌을 마친 후 대한민국으로 돌아왔다.
3. 2. SK 와이번스 코치 및 감독 시절 (2007-2014)
미국 시카고 화이트삭스 코치로서 2005년 월드 시리즈 우승을 경험한 후, 2006년 10월 30일 SK 와이번스와 2년 계약을 맺고 김성근 감독 아래 수석코치로 부임하며 한국으로 돌아왔다.[15][5][6]2007년 시즌 중, 팀의 좋은 성적에도 불구하고 홈 구장인 문학 야구장의 관중석이 채워지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홈 10경기 중 한 경기라도 만원이 되면 팬티만 입고 그라운드를 돌겠다"고 공약했다. 실제로 10번째 경기에서 만원 관중이 기록되자, 약속대로 속옷 차림으로 그라운드를 도는 퍼포먼스를 선보여 큰 화제를 모았다.
2010년 6월에는 잠시 계형철 당시 2군 감독과 보직을 맞바꾸기도 했으나, 같은 해 8월 다시 1군 수석코치로 복귀했다. 2011년 시즌 개막 후 다시 2군 감독으로 보직이 변경되었다.
2011년 8월 18일, 김성근 감독이 시즌 중 갑작스럽게 경질되면서 1군 감독 대행을 맡게 되었다.[16][6] 어수선한 팀 분위기 속에서도 포스트시즌 준플레이오프에서 KIA를, 플레이오프에서 롯데를 꺾고 팀을 2011년 한국시리즈에 진출시키는 지도력을 보여주었다. 비록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이는 KBO 리그 역사상 감독 대행으로서 최초의 한국시리즈 준우승 기록이었다. 이 과정에서 투수 윤희상과 박희수 등을 적극적으로 기용하여 SK 투수진 강화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11년 한국시리즈 종료 후인 10월 29일, 능력을 인정받아 SK 와이번스의 제4대 정식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2012년에도 팀을 한국시리즈에 진출시켜 2년 연속 준우승을 이끌었다. 하지만 이후 2013년 6위, 2014년 5위로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하며 성적 부진을 겪었고, 2014 시즌 종료 후 3년 계약 기간이 만료됨에 따라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SK는 그의 후임으로 김용희를 제5대 감독으로 선임했다.
4. 은퇴 이후
1997년 은퇴 후 미국으로 건너가 클리블랜드 가디언스의 마이너리그 싱글 A팀인 킨스턴 인디언스 코치를 맡으며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시카고 화이트삭스 산하 AAA팀인 샬럿 나이츠를 거쳐, 2000년부터 2006년까지는 MLB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불펜 포수로 활동했다. 2005년 시카고 화이트삭스가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했을 때 코칭 스태프의 일원으로 챔피언 링을 받았다.
2007년 한국으로 돌아와 SK 와이번스의 수석 코치로 부임했다. 그해 시즌 중 팀 성적이 좋음에도 홈 구장인 문학 야구장 관중석이 채워지지 않자, "앞으로 홈에서 열리는 10경기 중 1경기라도 구장이 만원 되면 팬티 한 장만 입고 그라운드를 한 바퀴 돌겠다"고 공언했다. 실제로 10번째 경기에서 만원 관중이 기록되자 약속대로 팬티 차림으로 그라운드를 도는 퍼포먼스를 선보여 화제를 모았다.
2010년 시즌 중 1군 수석 코치에서 2군 감독으로 보직이 변경되었다. 2011년 시즌에는 다시 1군 수석 코치로 시작했으나 개막 후 또다시 2군 감독으로 보직이 변경되었고, 같은 해 8월 18일 김성근 감독이 경질되면서 1군 감독 대행을 맡게 되었다. 정규 시즌은 3위로 마쳤지만, 포스트시즌 준플레이오프에서 KIA, 플레이오프에서 롯데 자이언츠를 꺾고 한국시리즈까지 진출하는 지도력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성과를 인정받아 시즌 종료 후인 11월 1일, SK 와이번스의 제4대 정식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감독 부임 첫 해인 2012년에는 팀을 한국시리즈에 진출시켰으나, 2013년 6위, 2014년 5위로 상위권 진입에 실패하면서 계약 기간 3년이 만료된 2014년 시즌을 끝으로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퇴임 후에는 라오스에서 야구 보급 활동 등 자선 사업에 참여했으며, 2015년부터는 프로야구 중계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KBO 육성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고 있다.
삼성 라이온즈 시절 등번호 22번은 구단의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어 있다. 팀을 떠난 지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대구 지역 팬들에게는 여전히 상징적인 스타 선수로 남아있다. 선동열 감독이 재임 기간(2005년~2010년) 동안 두 차례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만수가 감독으로 삼성 라이온즈에 복귀하기를 바라는 지역 팬들의 수도 적지 않았다.
5. 출신 학교
6. 가족 관계
- 아버지: 이창석 (1925년 ~ 1994년)
- 어머니: 장영순 (1928년 ~ 2015년)
- 배우자: 이신화
- * 장남: 이하종
- ** 며느리: 박미리
- ** 손자
- * 차남: 이언종
- ** 며느리: 심진혜
- 누나 : 이미옥 (1952년생)
- 형 : 이만길 (1955년생)
- 남동생 : 이만호 (1961년생)
7. 주요 기록
1982년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하여 KBO 리그 원년 멤버로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1982년 3월 27일, 동대문야구장에서 열린 MBC 청룡과의 개막전에서 KBO 리그 역사상 1호 안타와 1호 홈런(3점 홈런)을 동시에 기록하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이는 KBO 리그 1호 타점 기록이기도 하다.
1984년에는 타율(.340), 홈런(23개), 타점(80개) 부문에서 모두 1위를 차지하며 KBO 리그 최초의 타격 3관왕을 달성하는 대기록을 세웠다.[3] 하지만 이 해 MVP 투표에서는 아쉬움을 남겼다. 시즌 막판 타격왕 경쟁자였던 롯데 자이언츠의 홍문종에게 삼성 투수진이 9타석 연속 고의사구를 내주는 등[9] 타이틀 경쟁 과정에서의 논란과 한국시리즈 패배가 겹치면서 기자단 투표에서 불리하게 작용했고, 결국 MVP는 한국시리즈에서 4승을 거두며 롯데 자이언츠의 우승을 이끈 최동원에게 돌아갔다. 이만수의 타격 3관왕은 2006년 이대호(롯데 자이언츠)가 달성하기 전까지 KBO 리그 역사상 유일한 기록이었다.
KBO 리그 통산 1호 100호 홈런(1986년 9월 2일 빙그레전)[13]과 1호 200호 홈런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의 통산 252홈런은 훗날 박경완이 기록을 경신하기 전까지 포수 최다 홈런 기록으로 남아 있었다. 1983년부터 1987년까지 5년 연속 포수 부문 골든 글러브를 수상하며 리그 최고의 공격형 포수로 인정받았다.[10]
1983년에는 홈런왕 타이틀과 함께 정규시즌 MVP를 수상했으며, 1983년부터 1985년까지 3년 연속 홈런왕, 1983년부터 1985년까지 그리고 1987년에 총 4차례 타점왕 타이틀을 차지했다.
1986년에는 마산 전지훈련 중 당한 허리 부상으로 시범경기에 불참하고[11] 5월 7일에야 시즌 첫 경기에 나섰으나 부진했고[12], 후기리그 초반 다시 허리 부상으로 결장했다. 8월에 복귀하여 9월 2일에는 통산 100호 홈런을 기록했지만, 같은 경기에서 데드볼을 맞아 또다시 부상으로 이탈하는 등[13] 악재가 겹쳐 결국 규정 타석을 채우지 못하고 3년 연속 이어오던 홈런, 타점왕 타이틀도 내주어야 했다.
1994년부터는 수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 포수 마스크를 벗고 1루수 및 지명타자로 주로 출전했다.
강력한 파워를 바탕으로 한 홈런 능력 덕분에 "헐크", "한국의 베이브 루스"라는 별명을 얻었다.[3] 그의 통산 252홈런은 1999년 한화 이글스의 장종훈이 경신하기 전까지 KBO 리그 통산 최다 홈런 기록으로 남아있었다.[4]
타격에서는 KBO 리그 역사에 남을 뛰어난 기록을 남겼지만, 포수로서의 수비 능력, 특히 도루 저지 능력에 대해서는 다소 아쉽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5차례의 골든 글러브 수상 역시 공격에서의 활약이 크게 반영된 결과로 여겨진다.
삼성 라이온즈에서만 16년간 활약하며 팀과 대구를 대표하는 프랜차이즈 스타였으며, 그의 등번호 22번은 2003년 삼성 라이온즈 구단 최초의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다.
=== 통산 타격 성적 ===
연도 | 소속 | 나이 | 출장 | 타석 | 타수 | 득점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도루 | 도실 | 볼넷 | 삼진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루타 | 병살타 | 몸맞 | 희타 | 희플 | 고4 |
---|---|---|---|---|---|---|---|---|---|---|---|---|---|---|---|---|---|---|---|---|---|---|---|---|---|
1982 | 삼성 | 25 | 78 | 322 | 270 | 46 | 78 | 16 | 1 | 13 | 51 | 6 | 2 | 46 | 27 | .289 | .400 | .500 | .900 | 135 | 13 | 4 | 0 | 1 | 0 |
1983 | 26 | 98 | 410 | 357 | 53 | 105 | 12 | 0 | 27 | 74 | 0 | 3 | 41 | 51 | .294 | .379 | .555 | .934 | 198 | 11 | 8 | 2 | 2 | 2 | |
1984 | 27 | 89 | 342 | 300 | 45 | 102 | 17 | 1 | 23 | 80 | 3 | 8 | 26 | 37 | .340 | .414 | .633 | 1.048 | 190 | 10 | 12 | 0 | 4 | 3 | |
1985 | 28 | 103 | 423 | 357 | 63 | 115 | 19 | 2 | 22 | 87 | 7 | 9 | 42 | 37 | .322 | .414 | .571 | .985 | 204 | 13 | 14 | 1 | 9 | 6 | |
1986 | 29 | 59 | 239 | 212 | 31 | 68 | 8 | 0 | 16 | 39 | 1 | 0 | 21 | 20 | .321 | .398 | .585 | .982 | 124 | 7 | 6 | 0 | 0 | 2 | |
1987 | 30 | 85 | 357 | 299 | 56 | 103 | 14 | 1 | 18 | 76 | 6 | 2 | 47 | 23 | .344 | .431 | .579 | 1.010 | 173 | 16 | 4 | 0 | 7 | 4 | |
1988 | 31 | 86 | 334 | 285 | 47 | 92 | 13 | 0 | 18 | 58 | 6 | 3 | 41 | 22 | .323 | .419 | .558 | .977 | 159 | 8 | 7 | 0 | 1 | 5 | |
1989 | 32 | 110 | 413 | 359 | 55 | 102 | 11 | 0 | 20 | 64 | 4 | 5 | 42 | 48 | .284 | .373 | .482 | .855 | 173 | 12 | 10 | 0 | 2 | 0 | |
1990 | 33 | 110 | 421 | 359 | 50 | 103 | 13 | 0 | 26 | 57 | 3 | 4 | 54 | 37 | .287 | .386 | .540 | .926 | 194 | 16 | 5 | 0 | 2 | 6 | |
1991 | 34 | 118 | 446 | 378 | 51 | 120 | 18 | 0 | 17 | 74 | 6 | 2 | 56 | 27 | .317 | .414 | .500 | .914 | 189 | 7 | 8 | 0 | 3 | 12 | |
1992 | 35 | 93 | 368 | 305 | 50 | 88 | 11 | 0 | 22 | 70 | 7 | 3 | 48 | 41 | .289 | .402 | .541 | .943 | 165 | 8 | 12 | 0 | 3 | 8 | |
1993 | 36 | 78 | 219 | 193 | 21 | 40 | 3 | 1 | 5 | 20 | 0 | 2 | 21 | 23 | .207 | .294 | .311 | .605 | 60 | 8 | 3 | 0 | 1 | 0 | |
1994 | 37 | 109 | 269 | 233 | 24 | 59 | 14 | 0 | 12 | 37 | 0 | 2 | 28 | 42 | .253 | .343 | .468 | .811 | 109 | 5 | 5 | 1 | 2 | 1 | |
1995 | 38 | 97 | 192 | 158 | 17 | 34 | 10 | 0 | 5 | 27 | 1 | 0 | 24 | 20 | .215 | .344 | .373 | .717 | 59 | 1 | 8 | 0 | 2 | 3 | |
1996 | 39 | 97 | 222 | 193 | 14 | 55 | 12 | 1 | 6 | 38 | 2 | 2 | 14 | 25 | .285 | .359 | .451 | .810 | 87 | 5 | 10 | 0 | 3 | 0 | |
1997 | 40 | 39 | 57 | 52 | 2 | 12 | 2 | 0 | 2 | 9 | 0 | 0 | 3 | 10 | .231 | .298 | .385 | .683 | 20 | 0 | 2 | 0 | 0 | 0 | |
KBO 통산 : 16년 | 1449 | 5034 | 4310 | 625 | 1276 | 193 | 7 | 252 | 861 | 52 | 47 | 554 | 490 | .296 | .388 | .519 | .907 | 2239 | 140 | 118 | 4 | 42 | 52 |
- 시즌 기록 중 '''굵은 글씨'''는 해당 시즌 최고 기록, ''기울인 글씨''는 해당 시즌 KBO 리그 역대 최고 기록
=== 수상 내역 ===
8. 통산 기록
연도 | 소속 | 나이 | 출장 | 타석 | 타수 | 득점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도루 | 도실 | 볼넷 | 삼진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루타 | 병살타 | 몸맞 | 희타 | 희플 | 고4 |
---|---|---|---|---|---|---|---|---|---|---|---|---|---|---|---|---|---|---|---|---|---|---|---|---|---|
1982 | 삼성 라이온즈 | 25 | 78 | 322 | 270 | 46 | 78 | 16 | 1 | 13 | 51 | 6 | 2 | 46 | 27 | .289 | .400 | .500 | .900 | 135 | 13 | 4 | 0 | 1 | 0 |
1983 | 26 | 98 | 410 | 357 | 53 | 105 | 12 | 0 | 27 | 74 | 0 | 3 | 41 | 51 | .294 | .379 | .555 | .934 | 198 | 11 | 8 | 2 | 2 | 2 | |
1984 | 27 | 89 | 342 | 300 | 45 | 102 | 17 | 1 | 23 | 80 | 3 | 8 | 26 | 37 | .340 | .414 | .633 | 1.048 | 190 | 10 | 12 | 0 | 4 | 3 | |
1985 | 28 | 103 | 423 | 357 | 63 | 115 | 19 | 2 | 22 | 87 | 7 | 9 | 42 | 37 | .322 | .414 | .571 | .985 | 204 | 13 | 14 | 1 | 9 | 6 | |
1986 | 29 | 59 | 239 | 212 | 31 | 68 | 8 | 0 | 16 | 39 | 1 | 0 | 21 | 20 | .321 | .398 | .585 | .982 | 124 | 7 | 6 | 0 | 0 | 2 | |
1987 | 30 | 85 | 357 | 299 | 56 | 103 | 14 | 1 | 18 | 76 | 6 | 2 | 47 | 23 | .344 | .431 | .579 | 1.010 | 173 | 16 | 4 | 0 | 7 | 4 | |
1988 | 31 | 86 | 334 | 285 | 47 | 92 | 13 | 0 | 18 | 58 | 6 | 3 | 41 | 22 | .323 | .419 | .558 | .977 | 159 | 8 | 7 | 0 | 1 | 5 | |
1989 | 32 | 110 | 413 | 359 | 55 | 102 | 11 | 0 | 20 | 64 | 4 | 5 | 42 | 48 | .284 | .373 | .482 | .855 | 173 | 12 | 10 | 0 | 2 | 0 | |
1990 | 33 | 110 | 421 | 359 | 50 | 103 | 13 | 0 | 26 | 57 | 3 | 4 | 54 | 37 | .287 | .386 | .540 | .926 | 194 | 16 | 5 | 0 | 2 | 6 | |
1991 | 34 | 118 | 446 | 378 | 51 | 120 | 18 | 0 | 17 | 74 | 6 | 2 | 56 | 27 | .317 | .414 | .500 | .914 | 189 | 7 | 8 | 0 | 3 | 12 | |
1992 | 35 | 93 | 368 | 305 | 50 | 88 | 11 | 0 | 22 | 70 | 7 | 3 | 48 | 41 | .289 | .402 | .541 | .943 | 165 | 8 | 12 | 0 | 3 | 8 | |
1993 | 36 | 78 | 219 | 193 | 21 | 40 | 3 | 1 | 5 | 20 | 0 | 2 | 21 | 23 | .207 | .294 | .311 | .605 | 60 | 8 | 3 | 0 | 1 | 0 | |
1994 | 37 | 109 | 269 | 233 | 24 | 59 | 14 | 0 | 12 | 37 | 0 | 2 | 28 | 42 | .253 | .343 | .468 | .811 | 109 | 5 | 5 | 1 | 2 | 1 | |
1995 | 38 | 97 | 192 | 158 | 17 | 34 | 10 | 0 | 5 | 27 | 1 | 0 | 24 | 20 | .215 | .344 | .373 | .717 | 59 | 1 | 8 | 0 | 2 | 3 | |
1996 | 39 | 97 | 222 | 193 | 14 | 55 | 12 | 1 | 6 | 38 | 2 | 2 | 14 | 25 | .285 | .359 | .451 | .810 | 87 | 5 | 10 | 0 | 3 | 0 | |
1997 | 40 | 39 | 57 | 52 | 2 | 12 | 2 | 0 | 2 | 9 | 0 | 0 | 3 | 10 | .231 | .298 | .385 | .683 | 20 | 0 | 2 | 0 | 0 | 0 | |
KBO 통산 : 16년 | 1449 | 5034 | 4310 | 625 | 1276 | 193 | 7 | 252 | 861 | 52 | 47 | 554 | 490 | .296 | .388 | .519 | .907 | 2239 | 140 | 118 | 4 | 42 | 52 |
- 시즌 기록 중 '''굵은 글씨'''는 해당 시즌 최고 기록
삼성 라이온즈에서 16시즌 동안 주전 포수와 1루수로 활약하며 통산 1449경기에 출장하여 타율 .296, 1276안타, 252홈런, 861타점을 기록했다. 강력한 파워를 바탕으로 "헐크", "한국의 베이브 루스"라는 별명을 얻었다.[3]
1982년 KBO 리그 원년 멤버로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하여 3월 27일 동대문야구장에서 열린 MBC 청룡과의 개막전에서 KBO 리그 역사상 첫 안타와 첫 홈런(3점 홈런), 첫 타점을 기록하는 주인공이 되었다. 또한 KBO 리그 통산 첫 100호 홈런(1986년 9월 2일 빙그레 이글스전)과 첫 200호 홈런(1992년)을 달성하기도 했다. 그의 통산 252홈런 기록은 1999년 5월 23일 한화 이글스의 장종훈이 253호 홈런을 치기 전까지 KBO 리그 통산 최다 홈런 기록으로 남아 있었다.[4]
1983년에는 27홈런, 74타점으로 첫 홈런왕과 타점왕을 차지하며 정규 시즌 MVP를 수상했다. 1984년에는 타율 .340, 23홈런, 80타점으로 타격, 홈런, 타점 부문에서 모두 1위를 차지하며 KBO 리그 최초의 타격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다.[3] 하지만 시즌 막판, 롯데 자이언츠 홍문종과의 타격왕 경쟁 과정에서 소속팀 투수들이 홍문종에게 9연타석 고의사구를 던지는 등 인위적으로 타이틀 경쟁에 개입하여 야구팬들과 언론의 큰 비판을 받았고[9], 이 여파로 강력한 MVP 후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수상에 실패했다. 그 해 MVP는 한국시리즈에서 4승을 거둔 롯데 자이언츠의 최동원에게 돌아갔다. 이만수의 타격 3관왕 기록은 2006년 롯데 자이언츠의 이대호가 달성하기 전까지 KBO 리그에서 유일한 기록이었다. 1985년에도 홈런(22개)과 타점(87개) 부문에서 리그 1위를 기록했으며, 1987년에도 76타점으로 타점왕 타이틀을 차지했다.
포수로서 골든 글러브를 1983년부터 1987년까지 5년 연속 수상했으며[10], 올스타전에는 12번 출전했다. 다만, 한국의 골든 글러브는 수비보다 공격 기여도를 더 높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어 그의 수상 역시 타격에서의 활약이 크게 반영된 결과였다. 포수로서의 수비 능력, 특히 도루 저지 능력은 다소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1986년에는 마산 전지훈련 중 허리 부상을 당해 시범경기에 불참했고, 5월 7일 해태전에서야 시즌 첫 경기에 나섰지만 부진했다.[11][12] 후기리그 초반 다시 허리 부상으로 결장했고, 9월 2일 빙그레 이글스전에서 KBO 최초 100호 홈런을 기록했으나 바로 다음 타석에서 데드볼을 맞아 다시 부상으로 이탈하는 등[13] 악재가 겹쳐 59경기 출장에 그치며 규정 타석을 채우지 못했다. 이로 인해 3년 연속으로 노리던 홈런왕, 타점왕 타이틀도 내주어야 했다. 1994년부터는 주로 1루수와 지명타자로 출전했다.
철저한 자기 관리로 삼성 라이온즈에서만 16년간 선수 생활을 이어갔으며[7], 팀과 대구를 대표하는 간판 선수로 활약했다. 그의 등번호 22번은 삼성 라이온즈 구단 최초의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다.
1997 시즌 후, 코치 연수 지원 문제로 구단과 의견 차이를 보이다 결국 방출되어 현역에서 은퇴했다. 구단의 지원 없이 자비로 미국 야구 연수를 떠나야 했다.[14] 그의 갑작스러운 은퇴 이후 삼성 라이온즈는 1999년 진갑용을 영입하기 전까지 확실한 주전 포수를 확보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다.
참조
[1]
뉴스
Ex-home run king takes over Korean pro baseball champs
http://english.donga[...]
2011-08-19
[2]
웹사이트
Howe welcomes 'dear friend' Peterson
https://www.espn.com[...]
ESPN. Associated Press
2003-11-06
[3]
뉴스
Lee Man-soo tops vote for all-time baseball greats
http://www.koreahera[...]
2011-06-27
[4]
뉴스
Jang Jong-hoon sweeps all the offensive career categories
http://media.daum.ne[...]
1999-05-23
[5]
뉴스
This is the World Series ring!
http://sports.media.[...]
2006-10-30
[6]
뉴스
SK Wyverns sack manager, promote Lee Man-soo
http://www.koreahera[...]
2011-08-18
[7]
문서
1982년 한국 프로야구 창설 당시 선수 중 현역 생활을 가장 오래 한 선수.
[8]
웹사이트
“한눈 실명, 준혁아 할 수 있어” 헐크 이만수의 감동 페북글
http://news.kmib.co.[...]
국민일보
[9]
뉴스인용
[장환수기자의 장외홈런]올스타 투표의 ‘오차범위’
https://sports.news.[...]
동아일보
2002-05-13
[10]
웹사이트
OB의 재구성 - 삼성 역대 최고 타선
http://isplus.joins.[...]
일간 스포츠
2010-04-24
[11]
뉴스인용
主戰(주전)들 負傷(부상)많아 울상
https://newslibrary.[...]
경향신문
1986-03-24
[12]
뉴스인용
프로야구 전기 宣(선)동렬 6연속 完投勝(완투승)
https://newslibrary.[...]
경향신문
1986-05-07
[13]
뉴스인용
李萬洙(이만수) 5회 死球(사구)로 부상
https://newslibrary.[...]
동아일보
1986-09-03
[14]
웹사이트
데일리안, 대구와 삼성, 그리고 이만수
http://www.dailian.c[...]
데일리안
[15]
문서
코치진의 일원. 대한민국 언론에서는 '보조 코치'라고 표현.
[16]
웹사이트
SK 이만수 감독 대행 체제로. 김성근 감독 전격 경질
https://news.naver.c[...]
Naver Sports
[17]
간행물
김성근, 이만수 그리고 SK 3회 우승 주역들
http://www.pressian.[...]
주간 오마이뉴스
2007-11-02
[18]
뉴스인용
[거꾸로읽는스포츠] 삼성은 왜 아직도 장효조, 이만수를 미워하나
https://n.news.naver[...]
매일신문
2021-10-03
[19]
뉴스인용
[거꾸로읽는스포츠] 삼성은 왜 아직도 장효조, 이만수를 미워하나
https://n.news.naver[...]
매일신문
2021-10-03
[20]
뉴스인용
[거꾸로읽는스포츠] 삼성은 왜 아직도 장효조, 이만수를 미워하나
https://n.news.naver[...]
매일신문
2021-10-03
[21]
뉴스인용
[거꾸로읽는스포츠] 삼성은 왜 아직도 장효조, 이만수를 미워하나
https://n.news.naver[...]
매일신문
2021-10-03
[22]
웹사이트
이종도(청룡) 굿바이 만루홈런
http://gonews.kinds.[...]
한국일보
1982-03-28
[23]
웹사이트
김재박 9회말 결승타
http://dna.naver.com[...]
경향신문
1984-08-09
[24]
웹사이트
신기록 使者, 李萬洙 21호 홈런 81타점
http://dna.naver.com[...]
동아일보
1985-09-12
[25]
서적
2010 Korean Baseball Record Book
(사)한국야구위원회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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