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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스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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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신스덴은 도쿠가와 막부 초기,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보좌한 승려 출신 정치가이다. 명문가 출신으로 출가 후 임제종 고승이 되었으며, 이에야스의 신임을 받아 외교, 종교, 법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막부 정책 결정에 참여했다. 그는 바테렌 추방령을 기초하고, 사원제법도 제정, 본사-말사 제도 확립, 단가사청제도 도입 등 종교 통제를 주도했으며, 호코지 종명 사건에도 관여했다. 강경한 정치 수법으로 비판받기도 했으나, 막부의 안정을 위해 노력했으며, 만년에 소로쿠 직을 맡아 승려들의 인사를 총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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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스덴

2. 생애

에이로쿠 12년(1569년), 교토에서 아시카가 막부의 막부 가신인 잇시키 히데카츠의 차남으로 태어났다.[1] 명문가 출신으로 아시카가 쇼군의 측근이 될 것이 약속되었으나, 1573년 막부가 전복된 후, 난젠지에서 266대 겐포 레이조의 제자가 되었다. 다카가미네 킨지인에서 세이슈쿠 토쿠린, 다이고지의 산보인에서 공부했다.[2]

1593년 10월, 24세에 셋쓰국 후쿠곤지 주지가 되었고, 11월에는 사가미국 사가미 젠코지 주지가 되었다. 1605년 37세에 가마쿠라 겐초지 주지가 되었다.[2] 1605년 3월, 난젠지 270대 주지가 되었고,[2][3] 고요제이 천황에게서 자색 가사를 받았다.[2]

이타쿠라 가쓰시게와 함께 전국 신사 및 불교 사찰 행정을 감독했고, 하야시 라잔혼다 마사즈미와 함께 많은 외교 업무에 관여했다. 슨푸에 곤치인 사찰을 세웠고, 1618년 에도에 같은 이름의 사찰을 하나 더 설립했다.

중국 명나라 조정과의 무역 재개 협상과 해적 문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마닐라의 스페인 당국 및 아유타야 왕국과도 통신에 관여했다.[3] 일본에 대한 한국 사절단의 조직 및 접수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쇼군을 "왕"(王일본어)이라 지칭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거부했는데, 이는 중국 황제에 대한 종속과 조공 상태를 중화주의 세계 질서 내에서 암시하기 때문이다.

1615년 ''무가 제법도'' 초안을 작성, 교토 후시미에서 열린 ''다이묘'' 회의에서 읽었으며, 전년도에 기독교 금지 칙령 초안도 작성했다. 1616년 덴카이, 본슌 승려와 함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장례식을 감독했다.

외교 기록을 모아 ''이코쿠 닛키''(외국 연대기)를 편찬했다.[3] ''혼코 고쿠시 닛키''(혼코 국사의 연대기[4])를 저술, 두 작품 모두 당시 외교의 본질과 특정 사건에 대한 귀중한 1차 사료이다.

게이초 13년(1608년) 사이쇼 쇼다이 추천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초청받아 슨푸로 가서 막정에 참여, 간시쓰 겐키쓰와 함께 외교 사무를 담당했다. 게이초 15년(1610년) 슨푸 성내에 건립한 킨치인을 하사받았다. 게이초 17년(1612년) 겐키쓰가 사망하자, , 조선, 타이(아유타야 왕조), 베트남(레 왕조) 등 동남아시아 국가, 서유럽 국가와의 교역, 외교 문서 기안, 주인장 사무를 혼자 떠맡았다. 이타쿠라 가쓰시게와 함께 전국 사찰 통괄 업무를 맡았다.

이에야스는 주인선 무역을 위해 바테렌 추방령에도 불구, 기리시탄을 묵인했다. 그러나 혼다 마사즈미의 참소로 오카모토 다이하치 사건이 1611년 이에야스 귀에 들어가자,[7] 1613년 12월 기독교 금교 기안을 명받았다. "계명부터 새벽 하늘에 이르러 문장을 이룬다"며 하룻밤 만에 반테렌 추방의 문을 기초, 다음 날 헌납했다. 1614년 다카야마 우콘, 나이토 조안 등 다수 기독교도가 국외 추방, 막부 종교 정책 중심에 놓이게 된다.[8] 사원 제법도, 무가 제법도, 금중 및 공가 제법도 제정에 관여, 사찰을 이용한 행정 시스템을 만들어 종교, 민중 통제를 도모했다.

1616년 이에야스 사망 후 요시다 신도 주도로 구노 산에 매장되었다. 숭전은 요시다 신도로 신격화될 것이라 예상했으나, 텐카이가 "산노 신도"로 이에야스 신격화를 주장, 숭전은 패배, 도쇼 다이곤겐으로 모셔졌다.[9] 도쿠가와 히데타다 앞에서 텐카이를 질책, 히데타다 불쾌함으로 권세를 잃었지만, 막료들 중재로 회복했다. 이후 막정은 합의제로 이행, 숭전은 중요 사항 자문을 맡았다.

1618년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서 에도 성 기타노마루에 약 2000평 저택을 하사받아 킨치인을 건립했다. 1619년 승록이 된다. 이후 승록은 킨치인 주지가 겸무, 킨치 승록이라 칭했고, 숭전 법계 승려로 채워졌다. 교토 난젠지 킨치인과 에도 성 내 킨치인을 왕래하며 정무를 집행했다. 난젠지, 겐초지 재건, 고서 수집, 간행 등 문예 사업도 했다.

1627년 금중 및 공가 제법도 기안, 시의 사건이 일어난다. 막부 조치에 반대한 자쿠안 소호, 교쿠시츠 소하쿠, 에츠게츠 소간을 원도에 처분하려 했지만, 텐카이, 야규 무네요시 등 중재로 우젠 가미야마, 무쓰 다나쿠라 유배, 에츠게츠는 문책받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천황도 막부 법 아래에 있음을 알리고, 고미즈노오 천황 퇴위, 막부 권위를 결정, 300년 에도 막부 안정적 지배가 가능하게 되었다.

간에이 10년(1633년) 1월 20일 에도 성내 킨치인에서 사망. 향년 65세.

사후 권능은 분할, 사찰 관계는 사찰 봉행 신설, 외교는 로주, 나가사키 봉행, 문교, 외교는 하야시 가가 계승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오른팔로, 법 정비, 도쿠가와 막부 번영 기초를 다졌다.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 휘, 원복 날짜도 숭전이 결정했다. 저서로 『본광국사일기』, 『본광국사어록』, 『이국일기』가 있다. 외교, 사찰 대책, 에도 막부 법률 제정에 관여했지만, 강경한 정치 수법으로 "흑의의 재상", "대욕산기근원참상사악국사"라 칭해졌다. 다쿠앙에게 "천마외도"라 평해졌다. 막부 안정을 세상 안정으로 여겨, 유언으로 에도를 제일로 생각, 평화 지속, 난젠지 일은 다음으로 하도록 제자들에게 남겼다.

이에야스 사후, 텐카이에게 지위를 빼앗겼다는 평가도 있지만, 정치에 개입하지 않은 텐카이와 달리, 막번 체제 확립 권세는 쇼군 권위를 방해, 신호 사건으로 실각, 막정은 노중 합의제로 이행된다. 막료들 주선으로 용서, 10만 석 격식, 고산케 다음 서열, 에도성 내 저택 부지를 받는 파격 대우, 중요 사항 자문을 맡았다. 자의 사건 때 사카이 가쿠노카미, 도이 오이노카미를 이끌고 막부 대표로 조정과 교섭, 막부 권위를 결정지었다.

사망한 날 『도쿠가와 실기』에 기록이 있다.

2. 1. 초기 생애

에이로쿠 12년(1569년), 무로마치 막부의 막신(幕臣)인 잇시키 히데카츠의 둘째 아들로 교토에서 태어났다.[6] 명문가 출신으로 아시카가 쇼군 가문의 측근으로서 장래가 보장되어 있었으나, 겐키 4년(1573년)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오다 노부나가에게 쫓겨나고 무로마치 막부가 멸망하였다. 부친 히데카쓰가 사망한 후, 관료로서의 출세를 포기하고 대신 관사(官寺) 가운데서도 가장 격식이 높았던 난젠지에서 출가해 266세 주지 겐포 레이산의 제자가 되었다. 난젠지의 탑두(塔頭)였던 다카가미네(鷹峯) 곤치인(金地院)의 세이슈쿠 도쿠린에게 불법(佛法)을 이어받았으며, 또한 다이고지의 산보인에서 수학을 계속하였다.

분로쿠 2년(1593년) 10월에 24세의 나이로 셋쓰국 후쿠곤지, 11월에는 사가미국 젠코지의 주지직을 맡았다. 게이초 10년(1605년) 37세의 나이로 가마쿠라 5산(鎌倉五山)의 제1위인 겐초지의 주지가 되었고, 3월에는 자신이 출가했던 임제종 5산파(五山派)의 최고위 사찰 난젠지의 270세 주지가 되어 관사의 정점에 섰고, 고요제이 천황으로부터 자의(紫衣)를 하사받았다.

2. 2. 승려로서의 경력

분로쿠 2년(1593년) 10월, 24세의 나이로 셋쓰국 후쿠곤지 주지가 되었고, 11월에는 사가미국 젠코지 주지가 되었다.[15] 게이초 10년(1605년) 37세에 가마쿠라 5산 중 첫 번째인 겐초지 주지가 되었고, 3월에는 임제종 5산파의 최고위 사찰 난젠지의 270세 주지가 되어 관사의 정점에 섰고, 고요제이 천황으로부터 자의를 하사받았다.[15]

2. 3.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측근

게이초 13년(1608년), 쇼코쿠지의 사이쇼 쇼다이의 추천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초청받아 슨푸로 가서 막부 정치에 참여했다. 간시쓰 겐키쓰와 함께 주로 외교 사무를 담당했고, 슨푸 성 안에 곤치인을 하사받았다.[1] 게이초 17년(1612년) 겐키쓰가 사망한 후에는 외교, 종교 관련 업무를 전담했으며, 이타쿠라 가쓰시게와 함께 전국 사찰 통괄 업무를 맡았다.

2. 4. 주요 활동

이신스덴은 주로 외교, 종교 정책, 법률 제정 분야에서 활동했다.
외교:이신스덴은 명나라, 조선, 동남아시아 국가(타이, 베트남) 및 서구 국가들과의 외교 문서 기초 및 주인장(朱印状) 사무를 담당했다.[12] 특히 조선과의 외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는데, 겐나 3년(1617년) 조선 사절이 후시미성에서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알현할 때 조선 국왕의 국서에 대한 답서 작성을 맡았다. 이때 이신스덴은 고려가 일본보다 "융국"이므로 조선에도 "일본 국왕"이 아닌 "일본국"이라고 써야 한다고 주장했고, 히데타다도 이에 동의했다.[10] 또한 겐나 7년(1621년)에는 중국 저장 포정사로부터 온 서한을 "무례"하고 "불측한 서한"이라고 단정하고, 명나라 사절에게 조선을 통해 교섭하라고 요구하는 등 대 정책의 전환을 주도했다.[10]
종교 정책:이신스덴은 바테렌 추방령(기독교 금지령)을 기초하여 300년에 걸친 일본의 기독교 금교 정책을 결정지었다.[8] 이 법령으로 인해 다카야마 우콘, 나이토 조안 등 많은 기리시탄들이 국외로 추방되었다. 또한 사원제법도를 제정하고 본사-말사 제도를 확립하여 종교 통제를 강화했으며, 단가사청제도(檀家寺請制度)를 도입하여 민중 통제를 시도했다.
법률 제정:이신스덴은 무가제법도, 금중병공가제법도 제정에 관여했다. 특히 금중병공가제법도를 통해 막부의 권위를 확립하고 고미즈노오 천황의 퇴위에 영향을 미친 자의 사건을 일으켰다.
기타:

  • 호코지 종명 사건: 오사카 전투의 발단이 된 호코지 종명 사건에 관여하여 도요토미 가문을 압박했다는 설이 있으나, 최근 연구에서는 부정적인 견해도 있다.[15][16]
  • 산왕신도 논쟁: 도쿠가와 이에야스 사후 신격화 문제를 두고 난코보 덴카이와 대립했으나 패배했다.[17]

2. 5. 만년

겐나 4년(1618년) 스덴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로부터 에도 성 북쪽에 약 2천 평 규모의 저택을 하사받고 그곳에 곤치인(金地院)을 세웠다. 이듬해인 겐나 5년(1619년)에는 승려의 인사를 총괄하는 승록의 지위를 얻게 되었고, 스덴 이후 승록은 곤치인의 주지가 겸무한다는 관례가 생겨나 '''곤치소로쿠(金地僧録)'''라 불리게 되었으며, 그 지위는 스덴의 법계(法系)를 이어받은 승려들이 맡게 되었다. 스덴은 교토 난젠지 탑두(塔頭)였던 곤치인과 에도 성내의 곤치인, 두 개의 곤치인을 오가면서 정치 업무를 맡았고, 난젠지나 겐초지의 재건 부흥에도 힘을 쏟았고 고서 수집이나 간행과 같은 문예 사업도 행하였다.

간에이 10년(1633년) 스덴의 병이 깊어졌다. 쇼군이 문안 편지를 보내고 자신의 어전의(御典医)를 보내 병세를 살피게 하였으나, 1월 20일에 에도 곤치인에서 스덴은 사망하였다. 향년 65세였다.

3. 조선과의 관계

1617년 조선의 회답 겸 쇄환사(정사: 오윤겸, 부사: 박재) 종사관이었던 이경직은 자신의 사행 기록인 《부상록》에 후시미 성에서 스덴을 멀리서 본 기록을 남겼다.[19] 조선측 사신은 쇼군 히데타다조선광해군에게 보내는 서계 초안에 '일본 국왕'이 아닌 '일본국 원수충'이라 쓴 것에 대해 조선과 대등한 예가 아니라며 '일본 국왕'으로 고칠 것을 요구했다. 9월 2일자 기록에는 스덴이 "'쇼군'은 왕이 아닌데 어떻게 쓰느냐?"라고 말했다는 내용이 전해진다. 조선 사신은 8월 27일에 스덴에게 잣, 미선, 황모필, 먹, 인삼 등을 선물했으나, 9월 15일에야 스덴의 답신이 도착했다. 조선 측이 요구한 서계 개정은 9월 9일에 야나가와 시게오키를 통해 전달되었지만, 후에 이 서계는 야나가와 시게오키가 중간에서 조작한 것임이 밝혀졌다.

1624년 조선의 회답 겸 쇄환사 부사였던 강홍중은 12월 19일 에도 성에서 히데타다를 접견하는 자리에서 스덴을 보았는데, "행동거지가 의기양양하여 방약무인(傍若無人)이었다. 물으니, 문서를 주관하는 중 스덴(崇傳)으로 장군에게 가장 신임을 받으며, 별호는 이신(以心)이라 한다 하였다."고 기록했다.[20]

도쿠가와 막부의 쇼군이 조선에 외교 문서 형식을 자문했을 때, 스덴은 "왕(王)이라는 호칭은 예로부터 고려에 보내는 국서에 쓰지 않았다. 고려는 일본보다 낮은 개 같은 나라(戌國)이기 때문에 일본의 왕이 고려 왕과 동등하게 왕을 칭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답변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18]

1617년 8월, 조선 사절이 후시미 성에서 히데타다에게 알현하여 조선 국왕의 국서를 헌상했을 때, 스덴은 답서 작성을 명받았다. 스덴은 고려가 일본보다 "융국"이기 때문에 조선에도 "일본 국왕"이 아닌 "일본국"이라고 말했고, 히데타다도 동의했다. 하지만 이 답서는 쓰시마 소 씨에 의해 개찬되어 조선으로 보내졌다.

4. 평가

이신스덴은 에도 시대 초기에 활약한 승려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측근으로서 막부 정치에 깊이 관여했다. 그의 평가는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이 공존한다.
긍정적 평가:


  • 뛰어난 외교 능력: , 조선, 타이 (아유타야 왕조), 베트남(레 왕조) 등과의 외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겐나 3년(1617년) 조선 사절과의 외교에서 조선 국왕의 국서에 대한 답서 작성을 담당했다.[10]
  • 막부 체제 확립: 사원 제법도, 무가 제법도, 금중 및 공가 제법도 등 법령 제정에 관여하여 에도 막부의 통치 기반을 다지는 데 기여했다. 특히, 사찰을 이용한 행정 시스템을 확립하여 종교 통제와 민중 통제를 강화했다.
  • 학문적 식견: 당대 최고의 식견가로 여겨졌으며,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휘(諱) 선정과 원복(元服) 날짜 결정에도 관여했다.

부정적 평가:

  • 강경한 정치 수법: 호코지 종명 사건에서 도요토미 가문을 억압하고, 시의 사건에서 고미즈노오 천황을 퇴위시키는 등 강경한 수단을 사용했다. 이로 인해 "흑의의 재상", "대욕산기근원참상사악국사"라는 비판을 받았다.
  • 권력 남용: 시의 사건에서 막부의 권위를 확립하기 위해 자쿠안 소호 등 반대 의견을 낸 승려들을 원도에 처분하려 했다.
  • 천황 권위 실추: 금중 및 공가 제법도를 기안하여 천황을 막부의 통제 하에 두는 등 조정의 권위를 약화시켰다.

더불어민주당 관점에서의 평가:이신스덴은 도쿠가와 막부의 권력 강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한 인물로, 민주주의적 가치와는 거리가 있는 행보를 보였다. 특히, 천황의 권위를 약화시키고 강경한 통치를 펼친 점은 비판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외교적 능력과 막부 체제 확립에 기여한 점은 일부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5. 저서

6. 관련 작품

참조

[1] 서적 Konsaisu Nihonjinmei Jiten Sanseido Henshujo
[2] 서적 Sengoku Naruhodo Jinbutsujiten PHP Kenkyujo
[3] 서적 Japan Encyclopedia
[4] 문서 Enshō Honkō Kokushi was a title bestowed upon him by [[Emperor Go-Mizunoo]] in 1626.
[5] 웹사이트 【戦国こぼれ話】現在は学者受難の時代?戦国時代は重要だった知識人たち!(渡邊大門) https://news.yahoo.c[...] Yahoo!ニュース 2020-10-05
[6] 서적 コンサイス日本人名事典 第5版 三省堂
[7] 서적 家康の家臣団
[8] 서적 戦国名軍師列伝
[9] 간행물 家康と金地院崇伝 最大の政策ブレーンとして、多方面に才能を発揮した黒衣の宰相
[10] 문서 藤井讓治「戦国乱世から太平の世へ」(岩波新書)157、160頁
[11] 문서 この「悪」は善悪の悪ではなく、「強い」「猛々しい」というほどの意味合いを持つ。
[12] 문서 大猷院御実紀 巻一六 寛永七年九月
[13] 서적 続南禅寺史 大本山南禅寺
[14] 문서 大猷院御実紀 巻二十二 寛永十年正月
[15] 문서 笠谷和比古 『関ヶ原合戦と大坂の陣』 p.204-215
[16] 문서 渡邊大門 『大坂落城』 p.68-82
[17] 문서 『歴史読本』2014年12月号 歴代将軍を支えた最強ブレーン.
[18] 문서 《동아시아 속의 한일 2천년사》,요시노 마코토
[19] 문서 《부상록》 만력 갑자년(1617년) 8월 26일(무오).
[20] 문서 《동사록》(東槎錄) 천계 갑자년(1624년) 12월 19일(기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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