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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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인은 일제강점기 변호사로 활동하며 항일 변론을 펼쳤으며, 대한민국 건국 후 초대 법무부 장관, 제헌 국회의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1896년 대구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 후 변호사로 활동하며 의열단 사건 등 독립운동가들을 변호했다. 광복 후에는 한국민주당 당무부장, 미군정 특별범죄심사위원회 수석대법관을 거쳐 법무부 장관으로 국가보안법 제정에 기여했다. 반민특위 위원장으로서 반민족행위자 처벌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4·19 혁명 이후 참의원으로 활동하다 정계에서 은퇴했다. 그의 유언에 따라 재산은 한글학회에 기증되었고, 저서로는 '법률과 경제', '애산여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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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의 대학 교수 - 신익희
신익희는 해공이라는 호를 가진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내무총장과 외무부장을 역임하고 국민대학교를 설립했으며, 국회의장과 대통령 후보를 지냈고 사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 일제강점기의 대학 교수 - 김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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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이인 |
원어명 | 李仁 |
직책 | 前 초대 대한민국 법무부 장관 |
임기 | 1948년 8월 2일 ~ 1949년 6월 5일 |
대통령 | 이승만 |
부통령 | 이시영 |
총리 | 이범석 |
출생일 | 1896년 10월 26일(음력 9월 20일) |
출생지 | 조선 경상북도 대구군 동상면 사일리 (現 대한민국 대구광역시 중구 사일동) |
사망지 | 서울특별시 강남구 논현동 산28의 22번지에서 16시 15분, 숙환으로 별세 |
소속 | 前 서울 광신상업고등학교 재단 이사장 |
학력 | 일본 니혼 대학교 대학원 법학석사 |
경력 | 정치가, 독립운동가, 법률가, 저술가 |
종교 | 유교(성리학) |
배우자 | 고경희(高慶熙) |
자녀 | 슬하 6남 2녀 장남 이옥(李鈺) |
부모 | 이종영(부), 정복희(모) |
친인척 | 이관준(친조부), 이시영(숙부) |
정당 | 무소속 |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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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서적 | |
저자 | 허종 |
제목 | 반민특위의 조직과 활동 |
날짜 | 2003-06-25 |
출판사 | 선인 |
출판 위치 | 서울 |
ISBN | 978-89-89205-51-7 |
2. 생애
이인은 1896년 10월 26일 경상북도 대구에서 태어나 일본 메이지 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하고 1922년 일본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여 변호사가 되었다. 귀국 후 2년간 경성법학원 강사로도 활동했다. 조선변호사협회 회장, 조선과학협회 회장, 물산장려회 회장, 발명협회 회장, 과학보급회 회장, 조선어학회 간부 등 다양한 사회 활동을 했다. 수원고등농림학교 학생 사건 변론 중에는 법정에서 불온한 변론을 했다는 이유로 6개월 정직 처분을 받았고,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3년간 미결 상태를 거쳐 2년형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출옥하기도 했다.[6]
광복 후에는 한국민주당 총무 겸 당무부장을 맡았고, 1945년 12월 1일 임시정부 봉영식에 참석하여 봉영문을 낭독하였다.[6] 1947년 군정청 대법원장을 거쳐 대법관 겸 특별범죄수사위원장을 지냈으며, 이승만의 단정 수립론에 참여하였다. 1948년 검찰청 총장, 제헌 국회 의원을 거쳐 법무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제헌 국회 의원 당시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1949년 12월 21일 ~ 1950년 5월 30일)을 역임하였다.[6]
1949년 8월 16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조사위원이 되었으나, 반민특위는 강제 해산으로 실패하였다. 이후 국회 법사위원장을 지냈다. 1963년 8월 1일 서울 시민회관에서 열린 국민의 당 창당 발기인 대회에 참석하였다.[7]
1965년 일송 김동삼기념사업회 회장, 안재홍 장례식 주관, 1967년 제헌동지회 회장, 고등고시 출제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했다. 제4대 민의원 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고, 제5대 참의원 의원(임기 3년)을 지냈다. 1972년 1월 고 상허 유석창 장례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2. 1. 생애 초기
1896년 10월 26일 경상북도 대구 중구 사일동에서 태어난 이인은 대구 달동의숙(達東義塾)에서 신학문을 공부했다. 1912년 경북실업보습학교(慶北實業補習學校)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 1914년 세이소쿠 중학교(正則中 किल्ला)를 졸업하였다. 이후 일본대학(日本大學) 전문부 법과 야간부와 메이지 대학교(明治大學) 전문부 법과를 거쳐 메이지대학 법학부를 졸업하였다.[6]1922년 일본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여 변호사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2년간 경성법학원(京城法學院) 강사로도 재직했다. 조선변호사협회 회장, 조선과학협회회장, 물산장려회장, 발명협회 회장, 과학보급회 회장, 어학회 간부 등 다양한 사회 활동을 했다. 수원농림학교 학생사건 변론 중에는 6개월 정직 처분을 받았고,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3년간 미결 상태를 거쳐 2년형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출옥하기도 했다.[6]
1945년 광복 후 한국민주당 총무 겸 당무부장을 맡았고, 12월 1일 임시정부 봉영식에 참석하여 오세창의 개회사에 이어 봉영문을 낭독하였다.[6] 1947년 군정청 대법원장을 거쳐 대법관 겸 특별범죄수사위원장을 지냈으며, 이승만의 단정수립론에 참여하였다.
2. 1. 1. 출생과 가계
이인은 1896년 10월 26일 경상북도 대구 중구 사일동에서 아버지 이종영(李宗榮)과 어머니 연일 정씨 정복희(鄭福姬)의 아들로 출생하였다.[6] 할아버지 이관준은 영남의 명망 있는 성리학자였고, 삼촌 이시영은 독립운동가로 순국하였다. 아버지 이종영은 대한제국 시기 애국 계몽운동단체인 대한자강회와 대한협회의 회원으로 활동하였다.[6]2. 1. 2. 학창 시절
대구 달동의숙(達東義塾)에서 신학문을 공부했고, 경북실업보습학교(慶北實業補習學校)로 진학하였다. 1912년 경북실업보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소쿠 중학교(正則中學校)를 졸업(1914년)하였다. 그해 일본대학(日本大學) 전문부 법과 야간부에 입학했고, 1916년 수료 후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전문부 법과에 편입했다. 메이지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후에는 일본대학 고등전공과(高等專攻科)에서 법학을 공부하였다.2. 2. 변호사 활동 및 항일 변호 활동
1922년 일본 메이지 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하고 일본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여 변호사 개업을 하였다. 귀국 후 2년간 경성법학원 강사로도 활동했다. 이후 조선변호사협회 회장, 조선과학협회 회장, 물산장려회 회장, 발명협회 회장, 과학보급회 회장, 조선어학회 간부 등을 역임하였다.[6]수원고등농림학교 학생 사건으로 법정에서 일본의 학정을 비판하는 변론을 했다가 6개월의 정직 처분을 받기도 했다.[6] 조선어학회 사건에 관련되어서는 3년간 수감되었다가 2년형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출옥하였다.[2]
2. 2. 1. 항일 변호 활동
1922년 일본변호사시험에 합격한 후 귀국하여, 1923년부터 경성부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며 의열단 사건을 시작으로 6·10 만세 운동, 원산총파업, 수양동우회 사건 등 다양한 민족운동 사건의 변호를 맡았다. 독립운동가들의 변호 시에는 변호 비용을 받지 않았다.[6]1925년에는 고학생 지원 단체인 갈돕회의 총재를 맡았고, 조선어연구회의 조선어사전편찬회 발기위원이 되어 사전 편찬 사업을 지원했다.[6] 1927년 신간회 중앙위원으로 활동하며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만의 민족단체 조직을 주장했다.[6]
1930년 수원고등농림학교 학생들의 흥농사 사건 변호 중 법정에서 일본의 학정(虐政)을 비난하여 변호사 자격정지 처분을 받기도 했다.[6] 1931년 조선변호사협회 회장을 역임하고,[6] 1935년에는 조선어사전 편찬을 위한 비밀후원회를 조직하여 재정 지원을 했다.[6]
2. 2. 2. 태평양 전쟁 이후
일제의 감시와 탄압 속에서도 조선어학회를 비밀리에 지원하고 신사참배를 거부하였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가 뒤에 풀려났다.[2]2. 3. 정치 활동
1922년 일본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고 변호사로 개업하였다. 2년간 경성법학원 강사로 활동했고, 조선변호사협회 회장, 조선과학협회 회장, 물산장려회 회장, 발명협회 회장, 과학보급회 회장, 어학회 간부 등을 역임했다. 수원농림학교 학생사건 변론 중 불온한 발언으로 6개월 정직 처분을 받았고,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3년간 미결 상태를 거쳐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출옥했다.[6]광복 후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여 당무부장을 맡았다. 1945년 12월 1일 임시정부 봉영식에서 오세창의 개회사, 이인의 봉영문 낭독, 권동진의 만세삼창 순으로 진행되었다. 봉영문은 권동진, 김성수, 이인을 통해 김구에게 전달되었다.[6] 1947년 군정청 대법원장을 지냈으며, 대법관 겸 특별범죄수사위원장을 역임했다. 이승만의 단정 수립론에 참여하였고, 1948년 검찰청 총장을 거쳐 제헌 국회 의원이 되었다. 1949년 12월 21일부터 1950년 5월 30일까지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6]
1949년 8월 16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설치하고 조사위원이 되었으나, 반민특위는 강제 해산으로 실패하였다. 이후 국회 법사위원장을 지냈다. 1963년 8월 1일 서울 시민회관에서 열린 국민의 당 창당 발기인 대회에 참석하여 김병로, 허정, 이범석을 당 공동대표로, 김도연, 이응준, 이인, 안호상, 전진한을 당 지도위원으로 선출했다.[7]
1965년 일송 김동삼기념사업회 회장을 맡았고, 같은 해 안재홍 사망 소식을 접하고 서울 정의여고 강당에서 그의 장례식을 주관하였다. 1967년 제헌동지회 회장, 고등고시 출제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제4대 민의원 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고, 제5대 참의원 의원(임기 3년)을 지냈다. 1972년 1월 고 상허 유석창 장례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2. 3. 1. 광복 직후
1945년 광복 이후 백관수, 김병로 등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이던 안재홍과 협상을 적극적으로 벌였으나, 건준 위원장 여운형이 안재홍과 이인의 협상 결과를 허락하지 않아 결렬되었다. 이후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여 당무부장이 되었다가, 10월 미군정 특별범죄심사위원회 수석대법관 겸 심사위원장이 되면서 한민당을 탈당하였다.1946년 군정청 검찰청 검찰총장이 되어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등의 수사를 지휘하는 등 좌파 세력 근절에 노력했으며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1947년 이후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론을 지지하였다.[6]
2. 3. 2. 정부 수립 참여
1948년 8월 초대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국가보안법, 국적법 등 주요 법률 제정에 기여했다. 반민법 제정 당시에는 민족 분열과 법의 평등 원칙 위배 등을 이유로 반대했다.[3]1949년 3월 장면의 주미대사 임명으로 공석이 된 서울 종로구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당선되어 제헌 국회의원이 되었다. 같은 해 6월 법무부 장관직을 사임하고, 7월 7일 김상덕의 사임으로 반민특위 위원장에 취임했다.
이인은 반민특위 위원장으로서 반민특위 특경대를 해산시키고, 반민법 개정안을 제출하여 반민특위를 해체시켰다.[4] 1949년 9월 22일 국회에서 반민특위의 낮은 효율성과 막대한 운영 비용, 남은 사건의 검찰 이관 등을 이유로 반민특위 해체를 주장했다.
2. 3. 3. 한국 전쟁 이후
1963년 민정당 창당에 참여하여 최고위원이 되었으나, 범국민단일야당운동 추진에 실패하고 정계에서 은퇴했다. 1965년 안재홍이 사망하자 서울 정의여고 강당에서 그의 장례식을 주관하였다. 당시 안재홍은 자진 월북자로 오해받아 금기시되었으나, 이인은 이범석 등과 함께 안재홍의 시신 없는 장례식을 진행했다. 군사정권은 그의 의도를 의심하여 내사했지만 혐의점을 찾지 못하였다.[6]1972년 민족통일촉진회를 결성하고 국토통일원 고문에 선임되었으며, 1974년 통일원 고문에 재선임되었다. 1965년 일송 김동삼기념사업회 회장을 맡았다.[7] 1967년 제헌동지회 회장, 1972년 1월 고 상허 유석창 장례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건국대학교·명지대학교에서 명예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 1969년 무궁화 국민훈장이 수여되었다.
2. 3. 4. 야당 정치인
1963년 민정당 창당에 참여하고 최고위원이 되었으나 범국민단일야당운동 추진에 실패하자 정계에서 은퇴했다. 1965년 안재홍 사망 소식을 접하고, 서울 정의여고 강당에서 그의 장례식을 집행, 주관하였다. 당시 안재홍은 자진월북자라는 오해와 편견으로 금기시되었고, 꺼려했다. 그러나 이인은 이범석 등과 함께 안재홍의 시신없는 장례식을 진행하였다. 군사정권은 그의 의도가 불순함을 의심하여 내사하였으나 혐의점을 찾지는 못하였다. 1972년 민족통일촉진회를 결성했으며 국토통일원 고문에 선임되었다. 1974년에는 통일원 고문에 재선임되었다.건국대학교·명지대학교에서 명예 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 1969년 무궁화 국민훈장이 수여되었다.
2. 4. 사후
유언에 따라 재산은 한글학회에 기증되었고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다.[6] 묘소는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 북양리에 안장되었다가 2011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지사 제4묘역)으로 이장되었다.[6] 저서로는 〈법률과 경제〉, 〈법률과 여성〉, 〈애산여적 愛山餘滴〉, 〈반세기의 증언〉 등이 있다.3. 평가
이인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 건국 초기에 걸쳐 법조인, 정치인, 사회 운동가로서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긍정적 평가
- 법조인: 일본 메이지 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하고 일본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경성법학원 강사, 조선변호사협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법조계에 기여했다.
- 독립운동가: 수원농림학교 학생사건 변론, 조선어학회 사건 등으로 옥고를 치렀으나,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해방 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친일파 청산에 앞장섰다.
- 정치인: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검찰총장, 법무부 장관, 제헌 국회의원,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 사회 운동가: 조선과학협회, 물산장려회, 발명협회, 과학보급회 회장, 조선어학회 간부 등을 역임하며 과학, 경제, 교육,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 기타: 일송 김동삼기념사업회 회장(1965년), 안재홍 장례식 집행(1965년), 제헌동지회 회장(1967년), 유석창 장례위원회 위원장(1972년) 등을 역임했다.
부정적 평가
- 일제 강점기 변호사 활동 중 수원농림학교 학생사건 변론에서 불온한 발언으로 6개월 정직 처분을 받았다.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3년간 미결 상태로 있다가 2년형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 해방 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을 맡았으나, 반민특위 강제 해산으로 실패하였다.
3. 1. 긍정적 평가
이인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 건국 초기에 활동한 법조인, 정치인, 사회 운동가였다. 그는 뛰어난 지식과 능력을 바탕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법조인: 일본 메이지 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하고 일본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여 변호사로 활동했다. 경성법학원 강사, 조선변호사협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법조계 발전에 기여했다.[6]
- 독립운동가: 수원농림학교 학생사건 변론, 조선어학회 사건 연루 등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지만,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해방 후에는 임시정부 봉영식에 참석하여 봉영문을 낭독하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친일파 청산에 앞장섰다.[6]
- 정치인: 해방 후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검찰총장, 법무부 장관, 제헌 국회의원,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정치 발전에 기여했다.
- 사회 운동가: 조선과학협회 회장, 물산장려회 회장, 발명협회 회장, 과학보급회 회장, 조선어학회 간부 등을 역임하며 과학, 경제, 교육,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회 발전에 공헌했다.[6]
- 기타: 1965년 일송 김동삼기념사업회 회장, 1965년 안재홍 장례식 집행, 1967년 제헌동지회 회장, 1972년 고 상허 유석창 장례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3. 2. 부정적 평가
이인은 일제 강점기에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조선변호사협회 회장, 조선과학협회 회장 등 다양한 직책을 맡았지만, 수원농림학교 학생사건 변론 중 불온한 발언으로 6개월 정직 처분을 받기도 했다. 또한,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3년간 미결 상태로 있다가 2년형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출옥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을 맡았으나, 반민특위가 강제 해산되면서 실패하였다. 이러한 행적은 그에 대한 부정적 평가의 근거가 된다.[6][7]4. 저서
이인한국어의 저서는 현재까지 알려진 바가 없다.
5. 가족 관계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이인의 가족 관계에 대한 정보가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해당 섹션에는 내용을 작성할 수 없습니다.
6. 기타
약간의 소아마비 증세를 앓고 있었으나 생활이나 대화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소아마비를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1896년 같은 해에 태어난 김두종, 윤일선, 이병도, 이인, 이희승 등은 만년에 동갑 모임을 만들어 돈독한 우정을 나누곤 했다. 태어난 해가 병신(丙申)년이어서 모임 명칭은 '병신회'로 하였다. '병신회'의 회장 선출을 놓고 설왕설래하던 중 애산 이인이 “병신회 회장이야 당연히 내가 맡아야지”라고 해서 만장일치로 애산을 회장으로 옹립했다고 한다.[9]
7. 이인을 연기한 배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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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서적
반민특위의 조직과 활동
선인
2003-06-25
[2]
서적
빛과 소망의 숨결을 찾아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7
[3]
뉴스
조선일보
1967-08-16
[4]
뉴스
조선일보
1949-07-16
[5]
뉴스
常任委員長改選(상임위원장개선)
https://newslibrary.[...]
조선일보
1949-12-22
[6]
서적
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1993
[7]
서적
파벌로 보는 한국야당사
에디터
2006
[8]
웹인용
대구의 인물
http://www.koreastor[...]
2008-09-25
[9]
뉴스
[여적]당당한 장애인
http://car.khan.co.k[...]
경향신문
2002-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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