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계 브라질인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일본계 브라질인은 19세기 말부터 브라질로 이주한 일본인의 후손을 지칭한다. 1908년 시작된 일본의 브라질 이민은 커피 농장의 노동력 부족과 일본의 경제난, 인구 증가가 배경이 되었다. 초기 이민자들은 열악한 환경에 직면했으나, 이후 독립적인 공동체를 형성하고 경제적으로 성공하여 브라질 사회에 기여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차별을 겪었지만, 전후에는 사회적 지위가 향상되었다. 1980년대 브라질의 경제 위기로 인해 많은 일본계 브라질인이 일본으로 역이민(데카세기)을 갔지만, 현재는 다시 브라질로 돌아오거나 브라질과 일본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일본계 브라질인은 브라질 문화에 동화되었지만, 일본의 문화와 전통을 유지하며,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일본계 브라질인 - 마르시아 (1969년)
1969년 브라질에서 태어난 일본계 브라질인 마르시아는 1980년대 후반 일본 가요대회에서 입상하며 일본에 데뷔하여 가수로 성공했을 뿐 아니라 드라마, 영화, 뮤지컬, 예능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일-브라질 외교 관계 수립 기념 친선 대사로도 임명된 가수이자 배우, 뮤지컬 배우이다. - 일본계 브라질인 - 카미야 유우
카미야 유우는 일본계 브라질인 만화가이자 라이트 노벨 작가로, 화려한 채색 기법과 함께 《로그 호라이즌》, 《클록워크 플래닛》, 《에어리세》 등의 대표작을 남겼으며 위암 투병 후에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일본계 브라질인 | |
---|---|
기본 정보 | |
![]() | |
언어 | 포르투갈어 일본어 |
종교 | 주로: 로마 가톨릭교 소수: 불교, 신토, 일본의 신흥 종교, 개신교 |
관련 민족 | 일본인 다른 닛케이 그룹 (주로 라틴 아메리카 및 일본계 미국인) 일본의 라틴 아메리카인 아시아계 라틴 아메리카인 |
인구 | |
브라질 내 거주 | 약 200만 명 (2022년 추정), 브라질 인구의 약 1% |
일본 내 거주 | 211,840명 (2023년), 일본 인구의 0.2% (대부분 일본계) |
분포 지역 | |
주요 거주 지역 | 브라질 (주로 상파울루 주, 파라나 주) 일본 |
명칭 | |
포르투갈어 | Nipo-brasileiros (니푸-브라질레이루스) |
일본어 | 日系ブラジル人 (닛케이 부라지루-진) |
관련 정보 | |
관련 문서 | 브라질 일본인 |
인물 | |
주요 인물 | 우고 오야마 준이치 사이토 치즈카 야마자키 사브리나 사토 파울루 오카모토 다니엘리 스즈키 러브폭스 레오나르두 사카모토 |
2. 역사
일본에서 브라질로의 공식적인 이민은 1908년 고베 항을 떠난 가사토마루호에 탑승한 781명의 이민자들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브라질은 커피 농장의 노동력 부족 문제를 겪고 있었고,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화 과정에서 농촌의 빈곤과 인구 증가 문제에 직면한 일본 정부는 브라질 이민을 장려했다. 이로 인해 브라질은 미국을 제치고 일본인이 가장 많이 이주하는 나라가 되었다.
초기 이민자들은 주로 상파울루 주변의 커피 농장에 정착했으나, 열악한 노동 조건과 인종 차별 등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이들은 점차 자영농으로 전환하거나 새로운 작물을 도입하며 브라질 농업 발전에 기여하고 경제적 기반을 다져나갔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브라질이 연합국으로 참전하면서 1942년 일본과의 국교가 단절되었고, 브라질 내 일본인들은 적성 국민으로 간주되어 일본어 사용 금지, 일본인 학교 폐쇄, 재산 몰수, 강제 이주 등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은 일본계 사회 내부에 깊은 상처와 분열을 남겼다.
전쟁이 끝난 후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 사실을 둘러싸고 브라질 내 일본인 사회는 큰 혼란에 빠졌다. 일본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승리조'(勝ち組|가치구미일본어)와 패배를 받아들인 '패배조'(負け組|마케구미일본어) 사이에 극심한 대립이 발생했다. 정보 접근이 제한적이었던 농촌 지역 이민자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승리조'는 패배 소식을 연합국의 선전이나 유언비어로 치부했다. 이들은 패배를 인정하는 동포들을 '비국민'으로 몰아세우며 테러를 자행했고, 이 과정에서 여러 명이 살해되는 비극이 발생했다. 1946년에는 비일본계 브라질인과의 대규모 충돌(오즈와우두 크루스 사건)까지 일어났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가짜 뉴스 판매, 가짜 귀국 사업 사기 등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한 사기 범죄도 기승을 부렸다.[132] 1951년 양국 국교가 회복된 이후에도 갈등은 수년간 지속되었으나, 1958년 이민 50주년 기념제 등을 계기로 점차 융화가 이루어지면서 1950년대 후반에는 '승리조'의 영향력이 약화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일본계 브라질인 사회에 오랫동안 깊은 상처를 남겼다.
전후 1953년 이민이 재개되었으나, 일본의 경제 성장에 따라 규모는 점차 줄어들었다. 브라질에 완전히 정착한 일본계 브라질인들은 특유의 근면성과 높은 교육열을 바탕으로 사회 각계각층으로 진출하여 의사, 변호사, 정치인, 농장주 등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확보한 경우가 많다. 세대가 거듭되면서 타 인종과의 혼혈도 증가하고 있으며, 초기 정착지였던 상파울루 외에도 파라나 주 등 브라질 전역으로 거주지가 확산되었다. 일부는 아르헨티나 등 주변국으로 재이주하기도 했다.
1908년부터 시작된 일본인의 브라질 이주는 총 25만 명에 달했으며, 그 후손들이 늘어나면서 현재 일본계 브라질인 인구는 200만 명 이상으로 추산되어 브라질 내 동양계 주민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153][154][155] 2008년에는 브라질 이민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양국에서 성대하게 열렸다.[156]
'''주요 연표'''[127][128][132]
연도 | 주요 사건 |
---|---|
1895년 | 일·브라질 수호 통상 항해 조약 체결 |
1908년 | 공식 이민 시작 (가사토마루 이민) |
1915년 | 최초의 일본인 학교 다이쇼초등학교 개교 |
1917년 | 해외흥업 주식회사 설립 (이민 송출 창구 일원화) |
1920년대 | 브라질이 최대 일본 이민 수용국이 됨. 일본 재계의 대 브라질 투자 활발. |
1938년 | 바르가스 대통령, 이민 동화 정책 시작 (일본어 학교 등 제한) |
1941년 | 일본인 이민 수용 중단 |
1942년 | 일·브라질 국교 단절. 일본계 주민 탄압 시작. |
1945년 |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승리조-패배조 갈등 시작. |
1946년 | 오즈와우두크루스 사건 등 승리조-패배조 갈등 격화. 일본어 신문 발간 재개. |
1951년 | 일·브라질 국교 회복 |
1953년 | 일본인 이민 수용 재개 |
1954년 | 일본계 2세 다무라 유키시게, 연방 하원의원 당선 |
1969년 | 일본계 2세 파비오 야스다, 상공부 장관 취임 (최초의 일본계 장관) |
1973년 | 이민선을 이용한 집단 이주 종료 |
1980년 | 상파울루 시의회, 일본인 이민의 날 제정 (6월 18일) |
1989년 | 일본 출입국관리 및 난민인정법 개정, 일본계 브라질인 노동자 수용 시작 (데카세기 시작) |
2008년 | 일본인 브라질 이민 100주년 기념 (일본 브라질 교류의 해) |
2. 1. 배경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브라질 경제의 핵심은 커피 수출이었다. 초기 커피 농장은 주로 아프리카에서 온 노예 노동에 의존했으나, 1888년 브라질에서 노예제가 공식적으로 폐지되면서 심각한 노동력 부족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14] 브라질 정부와 농장주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고, 동시에 국가를 "백인화"하려는 의도[14] 하에 유럽 이민자들을 적극적으로 유치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유럽 이민자들의 여비를 지원하는 정책을 펼쳤고, 이로 인해 수백만 명의 유럽인, 특히 이탈리아인들이 브라질로 이주했다.[15]
그러나 브라질로 건너온 이민자들은 낮은 임금, 장시간 노동, 농장주의 학대 등 열악한 노동 조건에 시달렸다. 이러한 처우에 대한 불만으로 이탈리아 이민자들 사이에서 반발이 일어났고, 결국 1902년 이탈리아 정부는 브라질로의 보조금 지급 이민을 금지하는 프린에티 법령을 제정했다.[16] 이탈리아 이민이 중단되면서 브라질은 다시 농업 노동력 부족 문제에 부딪혔고, 새로운 노동력 공급원을 찾아야 했다.
같은 시기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화 과정에서 여러 사회경제적 문제에 직면했다. 에도 시대 265년간의 쇄국 정책 이후[17] 급격한 개방과 산업화가 진행되었으나, 토지 개혁과 농업의 기계화는 많은 농민들을 일자리에서 밀어냈다. 또한, 높은 세금 부담으로 인해 빚을 지거나 땅을 잃는 농민들도 속출했다. 늘어난 인구와 농촌의 빈곤은 많은 일본인들이 더 나은 삶을 찾아 해외 이주를 고려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일본인들의 해외 이주 경로는 점차 좁아지고 있었다. 미국은 1924년 이민법 제정 등을 통해 아시아계 이민, 특히 일본인 이민을 강력하게 제한했다.[18] 오스트레일리아 역시 백호주의 정책을 내세워 비백인 이민을 막고 있었으며, 캐나다도 유사한 제한 정책을 폈다. 러일 전쟁(1904년)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배상금을 받지 못해 경제난이 가중된 일본 정부는, 국내 문제를 해결하고 해외 이주를 원하는 국민들의 출구를 마련하기 위해 새로운 이민 대상국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노동력이 필요했던 브라질과 새로운 이민지를 찾던 일본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기 시작했다. 1892년 브라질 정부는 일본인 이민 수용 의사를 공식적으로 표명했다. 이후 1895년 양국 간에 일·브라질 수호 통상 항해 조약이 체결되었고, 1897년에는 리우데자네이루 주 페트로폴리스에 일본 공사관이 설치되면서 이민을 위한 외교적 기반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이탈리아 이민자들의 전례와 1897년 '요시사 이민 회사'가 추진하던 첫 이민자 송출 계획이 브라질 측의 갑작스러운 수용 거부로 무산된 사건 등을 이유로 브라질 이민에 대해 초기에는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하지만 미국, 캐나다, 호주 등 기존 이민 대상국들의 문이 좁아지면서, 브라질은 일본에게 점점 더 매력적인 대안으로 떠올랐다. 결국 이러한 국내외적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1908년, 고베 항에서 첫 공식 이민선인 가사토마루가 출항하면서 일본인의 브라질 이민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2. 2. 초기 이민 (1908년 ~ 1941년)

일본의 브라질 이민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브라질의 경제적 필요와 일본 내부의 사회경제적 상황이 맞물리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브라질은 주요 수출품인 커피 농장 운영에 필요한 노동력이 부족했다. 1888년 노예제 폐지 이후,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 등의 유럽 이민자들을 유치했으나,[15] 열악한 노동 조건으로 인해 1902년 이탈리아 정부가 보조금 지급 이민을 금지하면서[16] 노동력 부족 문제는 다시 심화되었다. 브라질 정부는 노동력 확보와 함께 백인화 정책의 일환으로 유럽 이민자를 선호했다.[14]
한편, 에도 시대의 오랜 쇄국 정책 이후 메이지 유신을 거치며 근대화와 개방을 추진한 일본은 농촌 사회의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토지 개혁과 농업의 기계화는 많은 농민을 실업 상태로 내몰았고, 높은 세금 부담은 소작농의 몰락을 가속화했다.[17] 늘어난 인구와 농촌의 빈곤 속에서 많은 일본인이 해외 이주를 모색했지만,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등에서는 인종 차별에 기반한 이민 제한 정책(1924년 이민법, 백호주의)으로 인해 이주가 어려워졌다.[18][20] 특히 미국은 1907년 신사협정을 통해 일본인의 이민을 제한했다.[20]
이러한 배경 속에서 1895년 일본과 브라질 사이에 "일·브라질 수호 통상 항해 조약"이 체결되었고,[127] 1907년 양국 정부는 일본인의 브라질 이주를 공식적으로 허용하는 조약을 맺었다.[19] 1908년 6월 18일, 가사토 마루호가 781명의 일본인 이민자(대부분 농부였으며, 약 절반은 남부 오키나와 섬 출신의 류큐인이었다[21])를 태우고 고베 항을 출발하여 희망봉을 거쳐 브라질 산토스 항에 도착하면서 본격적인 이민이 시작되었다.[22][127] 이민자 모집 과정에서 '황국 식민 회사' 등은 브라질에서의 높은 임금과 좋은 대우를 약속하며 이민을 장려했지만, 이는 많은 경우 사실과 달랐다.
초기 이민자들은 대부분 상파울루 주 주변의 커피 농장에 배치되었다.[23] 그러나 그들이 마주한 현실은 혹독했다. 낮은 임금, 장시간의 고된 노동, 열악한 주거 환경, 트럭 시스템(농장주에게서 생필품을 외상으로 구매하며 빚이 쌓이는 구조)에 의한 부채 누적 등 사실상 노예와 다름없는 처우를 받는 경우가 많았다.[24] 여기에 인종 차별과 고용주의 폭력까지 더해져 많은 이민자가 고통을 겪었다.[29] 당초 수년 내 돈을 벌어 귀국하려던 계획은 이루기 힘든 꿈이 되었고, 가족 단위 이주가 많아 경제적 부담은 더욱 컸다.[27] 1940년 이전에 브라질로 이주한 일본인 중 고국으로 돌아간 비율은 10%에 불과했다.[30] 1909년 외무성 조사에 따르면, 첫 계약 농장에 정착한 이민자는 4분의 1에 불과할 정도로 이탈률이 높았다. 이민자들은 파업이나 야반도주(夜逃げ|요니게일본어)를 감행하거나, 심지어 자살을 선택하기도 했으며, 일부는 인근 주나 아르헨티나 등 다른 나라로 떠나기도 했다.[29]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일본인 이민자들은 자구책을 마련해 나갔다. 계약 기간이 끝나거나 농장을 떠난 이들 중 상당수는 자영농의 길을 택했다. 1911년 상파울루 주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토지를 구매한 사례가 나왔으며,[31] "파트너십 농업" 제도를 활용하거나[30] 자금을 모아 공동으로 농지를 구입하여 植民地|쇼쿠민치일본어라 불리는 일본인 집단 거주지를 형성하기도 했다.[27] 1919년에는 미나스제라이스 주에 최초의 농업 조합인 '일-브라질 산업 조합'이 설립되었고,[127] 이후 상파울루 주의 '코치아 산업 조합' 등 브라질 농업 발전에 기여하는 여러 조합이 생겨났다. 이들은 기존의 커피 외에도 면, 후추, 차, 감자, 딸기, 각종 채소 등 새로운 작물을 도입하고 브라질 환경에 맞게 개량하여 재배에 성공함으로써 브라질 농업 생산성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63] 특히 상파울루 주 오카모토 농원은 몬순 기후가 아닌 브라질에서 홍차 재배에 성공하여 브라질 정부로부터 표창을 받기도 했다.
자녀 교육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여, 1915년 상파울루에 최초의 일본인 학교인 '다이쇼초등학교'가 설립되었다.[127] 이후 각지에 일본인 학교들이 세워졌으며, 이 학교들은 일본어와 일본 문화를 가르치는 역할을 했다. 일본 정부 또한 영사관을 통해 교육에 관여하고 재정적 지원을 제공했다.[27]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인의 브라질 이민은 더욱 활발해져, 1917년부터 1941년 이민 중단 직전까지 17만 명이 넘는 일본인이 브라질로 이주했다.[45][24] 이 시기 브라질은 미국을 제치고 일본인이 가장 많이 이주하는 나라가 되었다. 일본 정부는 1917년 해외흥업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1929년 브라질 개척 조합을 만드는 등 이민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127]
연도 | 이민자 수 |
---|---|
1908–1910 | 1,714 |
1911–1915 | 13,371 |
1916–1920 | 13,576 |
1921–1925 | 11,350 |
1926–1930 | 59,564 |
1931–1935 | 72,661 |
1936–1941 | 16,750 |
그러나 1930년대 제툴리우 바르가스 정권이 들어서면서 브라질 사회 내 민족주의가 강화되고 이민자에 대한 동화 정책이 추진되었다. 브라질 정부는 일본인 공동체가 브라질 사회에 통합되지 않고 고립된 "인종 낭종"(quistos raciaispt)을 형성한다고 비판하며,[27] 1938년부터 본격적인 동화 정책을 시행했다.[127] 이 정책의 일환으로 일본어 사용 및 교육이 제한되었고, 일본어 신문 발행이 금지되는 등 일본인 사회에 대한 압박이 가해졌다.[27]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과 함께 브라질 정부는 일본인의 이민 수용을 중단하게 된다.[127]
2. 3.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1941년 ~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전부터 제툴리우 바르가스 정부는 이민자 사회에 대한 강제 문화 동화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35] 브라질 지배층은 특히 일본계 이민자들이 형성한 공동체를 브라질 사회 통합을 저해하는 '민족적 낭포'(quistos raciais)로 간주하며 경계했다.[27][36]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 브라질이 연합국으로 참전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1942년 1월 29일, 브라질은 일본 제국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했고,[27] 브라질 내 일본계 주민들은 적성국 국민으로 취급받으며 강력한 통제와 탄압에 직면했다.
바르가스 정권은 일본계 브라질인을 대상으로 여러 제한 조치를 시행했다. 경찰이 발급한 안전 통행증 없이는 국내 여행이 금지되었고,[36] 공공장소에서 일본어 사용이 금지되었으며 위반 시 투옥될 수 있었다.[27] 일본어 신문과 학교 운영이 금지되었고,[23][36] 일본으로부터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단파 라디오 수신기도 압수되었다.[36]

경제 활동 역시 제약을 받았다. 일본계 회사의 자산이 몰수되거나 정부 관리하에 놓였으며,[36] 자동차, 버스, 트럭 운전이 금지되어 생계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많았다.[36]
수천 명의 일본계 이민자들이 간첩 혐의로 체포되거나 추방되었는데, 이는 종종 근거 없는 고발에 의한 것이었다.[36] 1943년에는 상투스 (상파울루) 등 해안 지역에 거주하던 약 10,000명의 일본, 독일, 이탈리아계 이민자들이 24시간 내에 강제 이주 명령을 받았으며, 이 중 대다수가 일본인이었다.[36] 파라 주 토메 아수의 일본인 정착촌은 사실상 강제 수용소처럼 운영되기도 했다.[36] 이러한 탄압 속에서 일본계 브라질인 사회 내부에서도 갈등과 분열이 나타났다.[27]
전쟁 기간 동안 일본계 브라질인들이 브라질의 안보에 위협이 되는 활동을 했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36] 이 시기의 억압과 차별은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소수 민족 집단이 겪어야 했던 고난을 보여준다.
2. 4. 전후 이민 재개와 발전 (1953년 ~ 1970년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51년 일본과 브라질의 국교가 회복되었고, 1953년부터 일본인의 브라질 이민이 공식적으로 재개되었다. 전후 이민은 1952년부터 1975년까지 약 5만 명 이상[25][26]이 이루어졌으나, 일본의 경제 성장으로 인해 전쟁 이전보다는 그 수가 줄어들었다.브라질에 정착한 일본계 브라질인들은 특유의 근면함과 높은 교육열을 바탕으로 경제적, 사회적 기반을 계속 다져나갔다. 1960년대 초에는 도시 지역의 일본계 브라질인 인구가 농촌 인구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많은 이들이 상파울루나 파라나 주 등의 도시로 이주하여 세탁소와 같은 소규모 상업이나 서비스업에 종사했으며, 1970년대에는 상파울루 세탁업의 80%를 일본계가 운영할 정도였다.[30]
높은 교육열은 일본계 브라질인들의 사회적 상승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58년에는 일본계가 중등 교육 이상 학력 인구의 21%를 차지했으며,[38] 1977년에는 상파울루 대학교 합격자의 13%, 항공 기술 연구소(ITA) 입학자의 16%를 차지하는 등[38] 학문적 성취를 이루었다.
정치 분야에서도 일본계 브라질인들의 진출이 시작되었다. 1954년에는 일본계 2세인 다무라 유키시게가 브라질 연방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고, 1969년에는 역시 2세인 파비오 야스다(야스다 료지)가 상공부 장관에 임명되어 최초의 일본계 장관이 되었다.
1973년에는 이민선을 이용한 집단 이주가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1970년대에 이르러 일본의 경제적 부상과 함께 일본계 브라질인들의 사회경제적 성공이 가시화되면서, 초기 이민자들이 겪었던 부정적 인식은 점차 긍정적인 이미지로 바뀌어 갔다.[36][37]
2. 5. 일본으로의 역이민 (1980년대 ~ 현재)
1980년대 후반, 브라질은 "잃어버린 10년(Década Perdida)"으로 불리는 심각한 경제 위기를 겪었다. 인플레이션은 1988년 1,037.53%, 1989년 1,782.85%에 달하는 등 극심한 상황이었다.[38][72] 반면, 일본 경제는 "버블 경제(baburu keizai)" 시기를 맞으며 급성장하여 세계적인 경제 대국으로 부상했다.[38][72] 이러한 경제 상황의 역전은 브라질에 거주하던 일본계 브라질인과 그 후손들이 경제적 기회를 찾아 조상의 나라인 일본으로 이주하는 "데카세기(Dekasegi)" 현상을 촉발했다. 1980년부터 1990년 사이 약 8만 5천 명이 일본으로 이주한 것으로 추산된다.[38][72]1990년 일본의 출입국관리 및 난민인정법 개정은 이러한 흐름을 가속화했다. 이 법은 해외에서 태어난 일본인의 후손(자녀 및 손자, 즉 3세까지)에게 장기 체류 비자를 발급하여 일본 내 취업을 허용했다.[73][74][75] 이는 당시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중국, 태국 등지에서 유입되던 비숙련 외국인 노동자를 제한하고, 일본계 라틴 아메리카인, 특히 브라질인에게 우선권을 부여함으로써 노동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국가의 민족적 동질성을 유지하려는 일본 정부의 의도를 반영한 조치였다.[73][74][75] 이 법 개정으로 1990년부터 2000년 사이 일본 내 브라질인 수는 5배 증가하여 25만 명에 달했으며, 일본 국적이 없는 배우자의 동반 입국도 허용되었다.[73][74][75]

일본 정부는 일본계 혈통을 가진 이들이 일본 사회에 쉽게 통합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일본계 브라질인과 일본에서 태어난 그들의 자녀들은 일본인들에게 외국인으로 취급받는 경우가 많으며, 이는 사회 적응의 어려움과 차별 문제로 이어졌다.[76][77][78] 일본으로 이주한 브라질인들은 주로 브라질의 경제 위기로 어려움을 겪던 중산층으로, 더 나은 경제적 기회를 찾아왔다.[80] 이들은 일본인들이 기피하는 소위 "3K (키츠이(Kitsui, 힘든), 키타나이(Kitanai, 더러운), 키켄(Kiken, 위험한))" 업종, 특히 자동차 및 전자 공장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79][80][83] 이들은 주로 군마현 오타시, 오이즈미정, 아이치현 토요타시, 토요하시시, 시즈오카현 하마마츠시, 기후현 미노카모시, 카니시, 오가키시 등 공업 지대에 집중적으로 거주한다.[83] 많은 이들이 일본 기준으로는 낮은 임금을 받으며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지만[84], 2002년 한 해에만 일본 거주 브라질인들이 본국으로 송금한 금액은 25억달러에 달했다.[85] 당초 일시적인 체류 후 귀국을 계획했던 이들도 많았으나, 상당수가 일본에 영구 정착하는 길을 선택했다.[81]
자녀 교육 문제도 심각하다. 많은 아이들이 일본어 습득에 어려움을 겪고 일본 학교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며, 부모 역시 교사와의 소통에 한계를 느낀다.[139][140] 브라질과 일본의 학제 차이(과정주의 vs 연령주의)도 부적응의 원인이 되며, 일부는 미취학 상태에 놓이기도 한다.[139][140][141] 일본 내 브라질 학교는 일본 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학비 부담이 커 대안이 되기 어렵다. 이러한 교육 공백은 일부 청소년들의 비행 문제로 이어지기도 했다.[142][143][144]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당시에는 많은 일본계 브라질인들이 해고되어 자녀 학비를 감당하지 못해 브라질 학교에서 퇴학시키는 사례가 발생하며 사회 문제로 부각되었다.[145]
범죄 문제 역시 존재한다. 2004년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검거된 브라질 국적자는 1,064명이었으며, 국외 도주 건수는 중화인민공화국, 미국에 이어 3위를 기록했다. 일본과 브라질 간에는 범죄인 인도 조약이 체결되어 있지 않아, 일본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브라질로 도주할 경우 일본 경찰이 직접적인 조치를 취하기 어렵다. 브라질 헌법상 자국민 인도 금지 원칙 때문에, 브라질 내에서 재판이 이루어지더라도 일본의 법 감정과 다른 가벼운 처벌에 그치는 경우가 있어 피해자들의 고통이 가중되기도 한다.
일본 내 브라질인 수는 2007년 313,770명으로 정점을 찍었으나[82],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여파로 인한 경기 침체와 실직으로 많은 이들이 브라질로 귀국하면서 2014년에는 177,953명까지 감소했다.[86][87][88][134] 그러나 최근 다시 증가 추세를 보여 2023년에는 211,840명에 달했다.[86][87][88]
2018년 일본 이민법 개정으로 해외 출생 일본인 후손(증손, 즉 4세대)까지 일본 취업이 허용되었으나, 연령 제한 및 일본어 능력 증명 등 엄격한 조건이 부과되었다. 이로 인해 실제 비자 발급 건수는 미미하여, 법 시행 첫해 승인된 43건 중 브라질인은 17명에 불과했다.[89]
2022년 기준, 브라질인은 중국, 한국, 필리핀에 이어 일본 내 외국인 노동자 중 네 번째로 큰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90] 또한 2023년 기준, 일본 내 브라질인 공동체는 미국, 포르투갈, 파라과이, 영국에 이어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큰 해외 브라질인 공동체이다.[91]
결과적으로, 브라질 사회에서는 성공적으로 정착하고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받았던 일본계 브라질인들이 일본에서는 여전히 외국인 노동자라는 틀 안에서 인식되는 경향이 강하다. 이는 일본 사회로의 완전한 통합에 어려움을 겪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3. 문화
라틴아메리카 문화의 영향을 받아 대부분의 일본계 브라질인은 라틴아메리카 양식의 생활을 하고 있지만, 일부는 그들의 전통 문화를 고수하기도 한다.
초기 일본 이민자(이세이) 다수는 브라질에서 몇 년간 돈을 벌어 일본으로 돌아갈 계획이었기 때문에 브라질 사회에 동화되는 데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42][43] 당시 이민자들은 가족 단위로 이주하는 경우가 많았고, 낮은 임금과 트럭 시스템 등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어 실제로 일본으로 돌아간 비율은 낮았다.[27][24][30] 이들은 브라질 시골 지역에 정착하여 민족적으로 고립된 공동체(植民地|쇼쿠민치일본어)를 형성하고, 자녀들을 일본인 공동체가 설립한 학교에 보내 일본어와 일본 문화를 가르쳤다.[27][32]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이 패배한 후, 많은 이민자들은 브라질에 영구적으로 정착해야 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전쟁 이후 브라질로 이주한 일본인들은 처음부터 브라질을 새로운 고향으로 삼으려는 경향이 강했으며, 이전 세대보다 브라질 사회에 더 쉽게 동화되었다.[45] [43] 이에 따라 니세이(2세대)를 거쳐 산세이(3세대), 요세이(4세대)로 세대가 내려가면서 브라질 사회에 더욱 깊이 통합되는 모습을 보인다.[45] 1920년대부터 일부 이민자들은 브라질의 주요 종교인 가톨릭교로 개종하고, 브라질인을 자녀의 대부모로 삼는 등 브라질 사회와의 유대감을 형성하려는 노력을 보이기도 했다.[44]
이러한 "브라질화" 과정에도 불구하고, 일본 문화의 영향은 여러 측면에서 지속되고 있다. 특히 요리와 같은 일상 문화뿐만 아니라, 규율과 교육을 중시하는 가치관은 여러 세대에 걸쳐 중요한 덕목으로 여겨진다. 브라질 지리통계청(IBGE)은 이러한 가치관이 메이지 시대 이민자들로부터 전수되어 후손들의 생활 방식에 영향을 미쳤으며, 일본계 브라질인들이 "공부하고", "지적이며", "규율이 잡힌"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고 분석했다.[45]
: 새로운 세대의 상당수는 일본어를 하지 못한다. 그러나 드물게는 무사도, 즉 전사의 자제심과 같은 특정 강력한 전통적 가치가 후손들에게서 사라지는 경우는 없다. 이는 메이지 시대 이민자들이 전수한 가르침으로, 일과 가족에 대한 접근 방식에서 후세대의 행동을 형성했으며, 어떤 면에서는 일본계 후손의 이미지를 "공부"하고 "지적"이며 "규율이 잡힌" 이미지로 만드는 데 도움이 되었다.[45]
하지만 브라질 사회에 동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계 브라질인들은 종종 외모 때문에 완전히 브라질인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험을 한다. 여러 세대가 지나 브라질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일본어를 전혀 하지 못하고 일본 국적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인(日本人|니혼진일본어)"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 이는 브라질 사회에서 '일본인'이라는 정체성이 국적이나 문화보다는 신체적 특징과 더 강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48] 이러한 구분은 일본계 브라질인 스스로가 다른 브라질인을 "가이진(外人, 외국인)"이라고 부르며 특정 부정적인 특성과 연관시킬 때 강화되기도 한다. 역설적으로 일본에 가면 이들은 일본인으로 여겨지지 않고 "브라질인"으로 취급받으며, 브라질에서는 '일본인', 일본에서는 '브라질인'으로 간주되는 이중적인 정체성을 경험하게 된다.[48]
3. 1. 언어
주로 브라질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며, 스페인어, 이탈리아어를 사용하는 사람도 일부 존재한다. 소수의 일본어, 영어 구사자도 있다.[60]일본에서 이주한 1세대(이세이)는 포르투갈어를 잘 배우지 않거나 자주 사용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초기 이민자 다수는 브라질에서 돈을 벌어 일본으로 돌아갈 계획이었기에 브라질 사회 동화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고, 자녀 교육 역시 일본어 중심으로 이루어졌다.[42][43]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이민자 자녀들은 일본인 공동체가 설립한 학교에서 교육받으며 주로 일본어만 배우고 일본인 공동체 내에서 생활했다.[32] 제툴리우 바르가스 정권 시기에는 공공장소에서 일본어를 사용하는 것이 금지되는 등 탄압이 있었으나, 전쟁 후 긴장이 완화되면서 일본어 신문 발행과 일본어 교육이 재개되었다.[27]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이 패배한 후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많은 이민자들이 브라질에 깊이 뿌리내렸음을 깨닫고 귀국을 포기했으며, 전쟁 이후 새로 이주한 일본인들은 브라질을 새로운 고향으로 삼으려는 경향이 강했다. 이들은 브라질 사회에 더 쉽게 동화되었고, 자녀에게 일본 문화와 언어를 전수하려는 경향도 이전 세대보다 약했다.[45] [43]
이에 따라 세대별 언어 사용 양상에 뚜렷한 차이가 나타난다. 1세대 이민자들은 주로 일본어를 사용했지만, 브라질에서 태어난 2세대(니세이)는 대부분 이중 언어 구사자가 되었다. 반면 3세대(산세이) 이후부터는 포르투갈어를 단일 언어로 사용하거나, 포르투갈어와 함께 유창하지 않은 일본어를 구사하는 경우가 많아졌다.[60]
상파울루 주의 노바 알리안사와 후쿠하쿠 지역 일본계 브라질인 공동체 연구(2003년)는 이러한 변화를 잘 보여준다.
- 1세대 (이세이): 브라질 도착 초기에는 집에서 일본어만 사용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는 비율이 증가했다(알리안사 58.5%, 후쿠하쿠 33.3%). 이는 주로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는 젊은 세대와의 교류 때문으로 보인다.[61]
- 2세대 (니세이): 포르투갈어와 일본어를 번갈아 사용한다. 어렸을 때 가정에서 일본어를 사용한 비율은 알리안사 64.3%, 후쿠하쿠 41.5%였다.[61]
- 3세대 (산세이): 어렸을 때 가정에서 일본어를 사용한 비율은 14.3%에 불과했다. 대부분 모국어로 브라질의 국어인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며, 조부모 세대의 언어인 일본어와는 접촉이 적었다.[61]
일반적으로 일본에서 태어난 친척(주로 1세대)과 함께 사는 경우 일본어를 더 자주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62]
이러한 언어 변화 과정에서 일본어와 포르투갈어가 혼합된 독특한 형태의 언어인 콜로니아어가 등장하여 브라질 일본인 사회에서 널리 사용되게 되었다. 이는 일본어를 주로 사용하는 1세대와 포르투갈어를 주로 사용하는 후속 세대 간의 의사소통 필요성에 의해 자연스럽게 발생했다. 콜로니아어는 기존 일본어와 상당히 다른 표현을 포함하며, 일본에서는 이미 사어가 된 단어(예: 특고)가 계속 사용되기도 한다. 포르투갈어 단어나 구절을 차용하여 일본어 문법에 적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예를 들어, 계약(contrato|콘트라투pt), 식사(comida|코미다pt), 일당(por dia|포르 지아pt), 살충(mata bicho|마타 비슈pt)과 같은 포르투갈어 단어나 구절이 명사처럼 사용된다. 또한 포르투갈어 발음을 일본어식으로 바꾸어 사용하는 경우도 많다(예: 돈을 의미하는 포르투갈어 dinheiro|지녜이루pt를 '지네로'로 발음).[137]
다음은 콜로니아어 사용 예시이다.[137]
: 「콘트라토(계약)는 안 했지만 테 부족해서 포르 지아(일당) 30 밀 바르가스에 코미다(식사)도 카마(잠자리)도 이쪽 부담으로, 세르비소(일)는 토마테(토마토)의 마타 빗쇼(살충) 정도다, 좋은 네고시오(조건)인데, 일주일도 안 돼서 파라르(그만둔다)한다고 말한다. 아무래도 핀가도(일당) 받으면 또 오트로 루가르(다른 곳)에 가서 파제르 메스모(똑같은 짓) 하겠지. 에우 논 텐 지네로(나는 돈이 없어)」
콜로니아어에는 "하이코(配耕)"와 같이 일반 일본어에는 없는 독특한 어휘도 존재한다. 이는 포르투갈어 Distribuição|지스트리부이상pt(분배)을 번역한 말로, 본래 브라질에 새로 온 이민자를 정착지에 분배하는 것을 의미했으나, 현재는 일본에 온 브라질 노동자가 파견 회사에 의해 각지의 회사로 배치되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또한, 브라질의 지명 등을 일본에서는 잘 쓰지 않는 한자 표기(예: 브라질 = 伯国, 상파울루 시 = 聖市, 히우그란데두술 주 = 南大河州)로 나타내는 경우도 있다.
1세대 이민자의 감소와 후손들의 브라질 사회 동화가 진행되었음에도 콜로니아어는 여전히 일본계 브라질인 사회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특히 일본으로 일하러 가는 "데카세기" 현상이 증가하면서 새로운 어휘가 추가되는 등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다.
브라질에서 사용되는 일본어는 기본적으로 일본 각지에서 온 이민자들의 다양한 일본어 방언이 혼합된 형태이며, 포르투갈어의 영향도 받았다. 최근 일본에서 브라질로 돌아오는 이민자(데카세기 귀환자)의 증가는 브라질 내 일본어 사용자 수를 늘리는 데 영향을 줄 수도 있다.[32]
3. 2. 종교
초기 일본 이민자들은 대부분 신토나 불교를 믿었다.[56] 하지만 브라질 사회에 적응하고 동화되는 과정에서 종교적인 변화를 겪게 되었다. 1920년대에는 브라질의 주요 종교인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일본 이민자들이 많아졌다.[44] 이는 브라질 사회의 일원이 되려는 노력의 표현이었으며, 브라질 사제들의 적극적인 선교 활동도 영향을 미쳤다.[56] 또한, 가톨릭 신자와의 결혼이 늘어나면서 공동체 내 가톨릭 신자의 비율이 자연스럽게 증가하기도 했다.[56] 이 시기 일본인들은 자녀의 세례 시 대부모로 브라질인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브라질 사회와의 유대감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44]현재 일본계 브라질인 사회의 종교 분포를 보면, 약 60%는 로마 가톨릭 신자이며, 약 25%는 신토나 불교와 같은 전통적인 일본 종교를 믿는 것으로 조사되었다.[56] 이는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일본계 브라질인 사회 내에서 다양한 종교적 신념이 공존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3. 3. 교육
브라질에서 태어난 일본인 자녀들은 초기에는 주로 일본인 공동체가 설립한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이 학교들은 대부분 일본어만을 사용했으며, 아이들은 주로 시골 지역의 일본인 공동체 내에서 생활했다.[32] 이는 자녀들이 브라질 사회에 동화되기보다는 일본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도록 교육받았음을 의미한다.[42] 당시 아이들은 일본의 역사와 지리는 배웠지만, 브라질의 역사와 지리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했다.[43]1915년 상파울루 시내 콘데 데 살제다스 거리에 브라질 최초의 일본인 학교인 '다이쇼 초등학교'가 설립되었다.[109] 이후 브라질 각지에 일본어 학교들이 세워졌는데, 이 학교들은 공립학교와 경쟁하기보다는 일본어와 일본 문화를 가르치는 학원의 성격이 강했다. 다만, 공립학교가 없는 외진 지역에서는 일반 학교의 역할을 대신하기도 했다.[110] 1932년에는 상파울루에 있는 약 200개의 일본어 보충 학교에서 1만 명이 넘는 니케이 학생들이 공부했으며[111], 1938년까지 브라질 전역에는 총 600개의 일본 학교가 운영되었다.[110] 일본 정부는 상파울루 영사관을 통해 브라질 내 일본인 자녀 교육에 직접 관여하여 일본의 교육 시스템을 모델로 삼고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27]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중 제툴리우 바르가스 정권은 추축국 국민에 대한 동화 정책을 강화하면서 1941년 일본어 신문 발행을 금지했고, 1942년 브라질이 연합국으로 참전하고 일본과 국교를 단절한 후에는 일본인 학교 설립 금지, 공공장소에서의 일본어 사용 금지 등 일본계 주민을 탄압하는 조치를 시행했다.[27] 이로 인해 일본어 교육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전쟁 후, 특히 일본의 패전 이후 많은 일본 이민자들은 브라질에 영구 정착하기로 마음먹었다. 전쟁 이후 브라질로 온 이민자들은 이전 세대와 달리 브라질을 새로운 고향으로 여기고 브라질 사회에 더 적극적으로 동화되려는 경향을 보였다. 이들은 자녀에게 일본 문화와 언어를 이전 세대만큼 강하게 전수하지 않았다.[45][43] 니세이(2세대)가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공동체 내 비난도 줄어들었다.[43] 산세이(3세대)와 요세이(4세대)는 이전 세대보다 브라질 사회에 더욱 깊이 동화되었다.[45]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계 브라질인들 사이에서 교육에 대한 강조는 중요한 가치로 남아 있다. 브라질 지리통계청(IBGE)의 보고서에 따르면, 새로운 세대가 일본어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졌지만, 규율과 같은 전통적 가치는 여전히 남아 있으며, 이는 교육과 일에 대한 접근 방식에 영향을 미쳐 일본계 후손들이 "공부하고", "지적이며", "규율이 잡힌"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고 분석했다.[45]
현재 브라질에는 일본 문부과학성(MEXT)이 인가한 여러 일본계 교육 기관이 운영되고 있다. 주요 기관은 다음과 같다.
- 일본 국제 주간 학교 (전일제 학교):
- 상파울루 일본학교[101]
- 히우 지 자네이루의 히우 지 자네이루 일본 문화 교육 협회[102]
- 마나우스 일본학교[103]
- 과거 벨루 오리존치, 벨렝, 비토리아에도 일본 학교가 있었으나, 2002년 3월 인가가 취소되어 폐교되었다.[105]
- 보충 학교 (보습 학교, 호슈코): 일본어와 일본 문화를 가르치는 주말 또는 방과 후 학교이다.
- 2003년 기준으로 브라질 남부에 수백 개의 보충 학교가 있었으며, 상파울루 주에만 약 500개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상파울루 시에 약 33%가 집중되어 있다.[106]
- MEXT는 쿠리치바에 있는 쿠리치바 일본 보충 학교를 공식 보습 학교로 인정하고 있다.[107]
- 과거 포르투알레그리와 살바도르에 있던 MEXT 승인 보습 학교는 폐쇄되었다.[108]
1970년에는 350개의 일본어 보충 학교에서 400명의 교사가 2만 명의 학생을 가르쳤다. 1992년에는 브라질 전역에 319개의 보충 학교가 있었고, 총 18,782명의 학생(여학생 10,050명, 남학생 8,732명)이 재학 중이었다. 이 중 111개 학교는 상파울루 주에, 54개는 파라나 주에 있었다.[106]
상파울루 대학교의 히로미 시바타는 그의 연구에서 상파울루의 일본 학교들이 단순히 일본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것을 넘어, 일본계 브라질인으로서의 정체성(니포-브라질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분석했다.[112]
3. 4. 무술
일본인들의 브라질 이주는 다양한 문화적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무술 분야에서 두드러진다. 유도가 마에다 미츠요와 같은 일본 이민자들의 활동은 현대 무술 중 하나인 브라질리언 주짓수가 발전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57]또한 일본 이민자들은 스모를 브라질에 소개했다. 1914년 브라질에서 첫 스모 토너먼트가 개최되었으며,[57] 이후 브라질 내 아마추어 스모 인구가 증가했다. 브라질 상파울루에는 일본 외 지역에 있는 유일한 스모 경기장이 존재한다.[58] 브라질은 스모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보여주었는데, 2022년 1월 기준으로 16명의 프로 스모 선수를 배출했으며, 그중 가장 성공적인 선수로는 카이세이 이치로가 있다.[59]
4. 사회
대부분의 초기 일본 이민자들은 브라질에서 단기간 노동하여 돈을 번 후 고국으로 돌아갈 계획이었으나, 낮은 임금과 농장주에게 진 빚 때문에 이는 거의 불가능한 꿈이 되었다.[27][24]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 브라질로 이주한 약 19만 명의 일본인 중 고작 10%만이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30] 이들은 브라질 사회에 쉽게 동화되지 못하고 일본어와 일본 문화를 중심으로 한 고립된 공동체(植民地|쇼쿠민치jpn)를 형성하며 생활하는 경우가 많았다.[27]
1930년대 브라질 사회는 이들의 독립적인 공동체를 "인종 낭종"(quistos raciais|키스투스 하시알리스por)이라 부르며 비판적인 시각을 보냈다.[27] 특히 제툴리우 바르가스 정권은 브라질 국민의 "백색화"를 목표로 외국 이민자들에 대한 강제적인 문화 동화 정책을 추진했다.[35][36] 일본인은 이러한 정책 하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이민자로 여겨졌으며, 올리베이라 비아나와 같은 브라질 지식인들은 일본인을 "용해되지 않는 유황"에 비유하며 배척하기도 했다.[36]
제2차 세계 대전 발발과 함께 브라질이 추축국에 맞서 연합국으로 참전하면서 일본계 브라질인에 대한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1942년 브라질과 일본의 국교가 단절되자, 바르가스 정권은 일본계 주민들의 이동을 제한하고, 일본어 신문 발행과 일본어 교육을 금지했으며, 공공장소에서 일본어를 사용하다 적발되면 투옥시키는 등 강압적인 조치를 시행했다.[27] 재산 몰수, 라디오 압수, 강제 이주 등 인권 침해도 빈번하게 발생했으며[36], 이는 일본계 브라질인 사회 내부의 분열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27]
1945년 8월 일본의 패전 이후, 일본계 브라질인 사회는 극심한 혼란과 분열을 겪었다. 일본의 패배를 믿지 않는 "승리조"(勝ち組|가치구미jpn)와 패배를 인정한 "패배조"(負け組|마케구미jpn)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발생하여 테러와 살인, 심지어 비일본계 브라질인과의 충돌까지 일어났다.[132] 이러한 혼란 속에서 사기 행위도 횡행했다.[132] 이 갈등은 195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점차 완화되었지만, 일본계 브라질인 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132]
전후 브라질 사회의 일본계에 대한 적대감은 점차 완화되었고, 1947년 이후 일본어 신문 발행과 교육이 다시 허용되었다. 수십 년간의 어려움 속에서도 일본계 브라질인들은 특유의 근면함과 높은 교육열을 바탕으로 브라질 사회에 기여하며 점차 사회적 인정을 받기 시작했고, 도시화와 함께 사회경제적 지위 향상의 기반을 마련해 나갔다.[70]
연도 | 내용 |
---|---|
1803년 | 무쓰 국 출신 쓰타유 등 5명, 최초로 브라질에 상륙한 일본인이 됨 |
1908년 | 가사토마루 호를 통한 공식 이민 시작 |
1915년 | 최초의 일본인 학교 "다이쇼초등학교" 개교 |
1938년 | 바르가스 대통령, 이민 동화 정책 시작 |
1942년 | 일-브라질 국교 단절, 일본계 탄압 시작 |
1945년 |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브라질이 일본에 선전 포고. 종전 후 승리조-패배조 갈등 발생 |
1951년 | 일-브라질 국교 회복 |
1953년 | 일본인 이민 수용 재개 |
1969년 | 니세이 파비우 야스다 상공 대신 취임 (일본계 최초 장관) |
1973년 | 이민선에 의한 이민 폐지 |
1989년 | 일본 출입국 관리법 개정, 데카세기 시작 |
2008년 | 일본인 브라질 이민 100주년 |
브라질 내 일본계 인구는 1970년 약 15만 4천 명으로 정점을 찍은 후[64], 일본 출생 이민자 수는 점차 감소하여 2022년 기준으로는 전체 일본계 인구의 5% 미만을 차지한다.[9][55] 그러나 브라질에서 태어난 후손들이 늘어나면서 전체 일본계 인구는 2022년 기준 약 200만 명(일본 외무성 추산)으로 추산된다.[5] 이들은 주로 상파울루 주, 파라나 주, 남마투그로수 주 등지에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다.[45] 2022년 브라질 인구 조사에서는 스스로를 '황색(Amarela)'으로 분류한 인구가 약 85만 명으로 집계되었는데, 이는 주로 동아시아계(일본, 중국, 한국 등)를 포함하는 분류이다.[68]
4. 1. 통합과 혼혈

초기 일본 이민자 대부분은 브라질에서 일하며 돈을 모아 고국으로 돌아갈 계획이었기에, 브라질 사회에 동화되려는 노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했다. 그들은 주로 일본인 공동체 안에서 생활했으며, 자녀들은 공동체가 설립한 학교에서 일본어와 일본 문화를 중심으로 교육받았다.[42][43] 이 시기 혼혈 비율은 6%에 불과했고, 이민자들은 일본인이 아닌 사람과의 결혼을 거의 받아들이지 않았다.[32]
시간이 지나면서 브라질 사회에서는 이들의 폐쇄적인 공동체 생활 방식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1930년대에는 일본인 공동체가 브라질 사회에 통합되지 않는 '인종 낭종'(quistos raciaispor)을 형성한다는 불만이 나왔다.[27] 제툴리우 바르가스 정부는 이민자들에 대한 강제적인 문화 동화 정책을 추진했으며[35],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중 브라질이 추축국과 전쟁을 선포하면서 일본계 브라질인에 대한 탄압은 더욱 심화되었다. 일본어 신문 발행과 일본 학교 운영이 금지되었고, 공공장소에서 일본어를 사용하면 투옥될 수도 있었다.[27][23] 당시 브라질 정부는 국가의 "백색화"를 지향했기에, 아시아계인 일본인은 바람직하지 않은 이민자로 여겨졌고 여러 차별적 조치와 편견에 시달렸다.[36]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이 패배하자, 많은 일본 이민자들은 브라질에 영구적으로 정착해야 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42] 전쟁 이후 브라질로 온 이민자들은 처음부터 브라질을 새로운 고향으로 삼으려는 경향이 더 강했으며, 브라질 사회에 더 쉽게 동화되었다.[45][43] 세대가 바뀌면서 자녀 교육에 대한 기대도 변화하여,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지 못하는 2세(니세이)를 공동체 내에서 비난하는 분위기도 줄어들었다.[43] 이전부터 일부 이민자들은 가톨릭교로 개종하거나 브라질인을 자녀의 대부모로 삼는 등 브라질 사회와의 유대를 형성하려는 노력을 보이기도 했다.[44]
세대가 거듭되면서(2세 니세이, 3세 산세이, 4세 요세이) 브라질 사회로의 통합은 더욱 뚜렷해졌고, 타 인종과의 혼혈도 자연스럽게 증가했다.[45] 하지만 일본계 브라질인들은 여전히 복합적인 정체성 문제를 겪고 있다. 브라질 사회 내에서는 여러 세대가 지나고 일본어를 전혀 하지 못하더라도, 동아시아적인 외모 때문에 여전히 '일본인'으로 분류되는 경우가 많다.[48] 이는 중국계나 한국계 등 다른 동아시아 출신 이민자 후손들에게도 비슷하게 적용되기도 한다. 반면, 정작 일본에 가면 이들은 '브라질인'으로 취급받으며 이방인 취급을 받기도 한다.[48] 이러한 경험은 일본계 브라질인들이 브라질과 일본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하는 이중적인 정체성을 갖게 만들었다. 일부 일본계 브라질인 스스로도 다른 브라질인을 '가이진'(外人, 외국인)이라 칭하며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48]
일본계 브라질인의 경험은 다문화 사회에서 소수 집단이 겪는 통합 과정과 정체성 형성의 복잡성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4. 2. 사회적 지위
일본 이민 초기, 브라질로 건너간 일본인들은 매우 낮은 사회적 지위에 놓여 있었다. 높은 임금을 기대하고 이주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당시 브라질의 토지 소유주들은 노예제 폐지 이후 부족해진 노동력을 일본 이민자들로 대체하려 했고, 법적으로는 자유 시민이었으나 실제로는 노예와 다름없는 취급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24][29] 열악한 거주 환경, 고된 노동, 낮은 임금과 트럭 시스템으로 인한 부채 누적으로 인해 많은 이민자들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으며, 고국으로 돌아가려던 계획은 이루기 힘든 꿈이 되었다.[27][24][30] 일부 농장에서는 신체적 폭력까지 발생했으며, 이에 대한 저항으로 파업, 夜逃げ|요니게jpn(야반도주), 심지어 자살을 선택하는 이들도 있었다.[29] 초기 정착률은 매우 낮아, 첫 계약 농장에 남은 비율은 4분의 1에 불과했다는 보고도 있다.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일본 이민자들은 특유의 근면함으로 점차 기반을 다져나갔다. "파트너십 농업" 제도를 통해 토지를 개간하고 작물을 재배하여 수익을 얻었고, 이를 통해 1911년 상파울루 주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토지를 구매하기 시작했다.[30][31] 이들은 민족적으로 고립된 공동체(植民地|쇼쿠민치jpn)를 형성하며 농업에 종사했고, 딸기, 차, 쌀 등을 재배하며 경제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27][32] 1940년에는 상파울루 주 인구의 3.5%에 불과했지만, 특정 농작물 생산에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며 브라질 농업 발전에 기여했다.[63]
수십 년 동안 일본계 브라질인들은 동화되기 어려운 집단으로 여겨졌고, 값싼 노동력으로만 취급받았다.[36] 브라질 사회에서는 이들이 형성한 독립적인 공동체를 quistos raciais|키스투스 하시알리스por("인종 낭종")라 부르며 경계하기도 했다.[27]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제툴리우 바르가스 정권 하에서 이동의 자유 제한, 일본어 사용 금지 등 탄압을 받기도 했다.[27]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일본의 경제가 성장하면서 일본계 브라질인에 대한 인식도 점차 변화했다. 근면과 교육을 통해 어려움을 극복하고 삶을 개선한 이들의 모습은 브라질 사회에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었다.[36][37] 1970년대에 이르러 일본이 경제 대국으로 부상하고, 일본계 브라질인(니세이)들이 문화적, 경제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면서 이들의 사회적 위상은 크게 향상되었다.[36][37]
1960년대 이후 도시로 이주하는 일본계 브라질인이 늘어나면서 직업 분포도 변화했다. 초기에는 염색업과 같은 소규모 상업이나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으나[30], 점차 농업 관련 분야(과일, 채소, 생선 판매 등)를 넘어 다양한 분야로 진출했다.
특히 높은 교육열은 일본계 브라질인의 사회적 지위 향상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초기 이민자들은 자녀 교육을 위해 일본인 학교를 설립했으며[27], 후세대는 대학 진학에 힘썼다. 이들은 주로 안정적인 수입과 사회적 명망을 얻을 수 있는 공학, 의학, 법학 분야를 선호했다.[38] 1977년 상파울루 대학교 합격자의 13%, 항공 기술 연구소(ITA) 입학자의 16%가 일본계였으며[38], 1995년 Datafolha 조사에서는 일본계 성인의 53%가 대졸자로 나타나 일반 브라질인(9%)과 큰 차이를 보였다.[39] 이러한 높은 교육 수준은 학문적 성취로도 이어져, 2009년 조사에서는 상파울루 시 인구의 1.2%에 불과한 일본계가 상파울루 대학교와 유네스프 합격자의 약 15%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40]
경제적으로도 일본계 브라질인은 브라질 사회에서 상위 그룹에 속한다. 2017년 조사에 따르면, 일본식 성을 가진 브라질인들의 시간당 평균 임금이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41]
성과 인종에 따른 브라질인의 급여.[41] | |
---|---|
민족 기원 (성 및 색상/인종 기준) | 급여 (시간당 브라질 헤알) |
일본인 | 73.4브라질 헤알 |
이탈리아인 | 51.8브라질 헤알 |
독일인 | 48.1브라질 헤알 |
동유럽인 | 47.6브라질 헤알 |
이베리아인 (백인) | 33.9브라질 헤알 |
파르두 (갈색) | 27.8브라질 헤알 |
흑인 | 26.5브라질 헤알 |
원주민 | 26.1브라질 헤알 |
정치 분야에서도 일본계 브라질인의 영향력이 나타나, 1969년에는 니세이인 파비우 야스다가 일본계 최초로 브라질 장관(상공부 장관)에 임명되기도 했다.
현대 일본계 브라질인 사회는 매우 도시화되었으며(1988년 기준 90% 도시 거주), 높은 교육 수준을 바탕으로 농업보다는 기술직, 행정직 등 2차 및 3차 산업 분야에 종사하는 비율이 높다.[70] 이들은 브라질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며 높은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4. 3. 일본과의 관계
일본계 브라질인의 존재는 일본과 브라질 양국의 정치, 경제, 문화 등 다방면에 걸친 교류를 심화시키는 데 기여해왔다. 특히 1950년대 이후 일본의 고도 경제 성장과 브라질 시장의 성장에 힘입어 토요타 자동차, IHI, 미쓰이 스미토모 해상, 일본항공, 파나소닉, NEC, 야마하, 아지노모토, 야쿠르트 등 다수의 일본 기업이 브라질에 진출했다. 이들 기업의 주재원과 가족들이 상파울루를 중심으로 브라질에 거주하게 되면서 일본인의 수가 증가했고, 일본인 학교나 보충 학교도 여러 도시에 설립되었다. 1960년대에는 바리그 브라질 항공과 일본항공이 리우데자네이루, 상파울루와 도쿄 간 직항편 운항을 시작하면서 양국 간 인적 교류는 더욱 활발해졌다.[156]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에서 브라질로의 신규 이민은 거의 중단되었다. 반면, 브라질은 "잃어버린 10년(Década Perdida)"으로 불리는 극심한 경제 위기를 겪었고(인플레이션이 1989년 1,782%에 달함), 일본은 "버블 경제(バブル景気)"로 불리는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이러한 경제 상황의 역전은 일본계 브라질인들이 조상의 나라인 일본으로 이주하는 새로운 흐름을 만들었다. 이들은 더 나은 경제적 기회를 찾아 일본으로 향했으며, "데카세기(Dekasegi)"라고 불리게 되었다.[38][72]
1990년 일본 정부는 출입국 관리법을 개정하여, 일본계 후손(자녀 및 손자, 즉 3세까지)에게 장기 체류 비자를 발급하여 일본 내 취업을 허용했다. 이는 당시 일본 내 노동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중국, 태국 등지에서 증가하던 불법 이민자 문제를 통제하고 국가의 민족적 동질성을 유지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조치였다. 이 법 개정으로 일본계 브라질인의 일본 이주가 급증하여, 1990년부터 2000년 사이 일본 내 브라질인 인구는 5배 증가한 25만 명에 달했다.[73][74][75] 이 법은 일본계 후손이 일본 국적이 없는 배우자를 동반하는 것도 허용했다.[75] 2018년에는 법이 다시 개정되어 4세대(증손)까지 일본 취업이 허용되었으나, 연령 제한 및 일본어 능력 증명 등 더 엄격한 조건이 부과되었다.[89]
일본 정부는 일본계 브라질인들이 혈통적 유사성으로 인해 일본 사회에 쉽게 통합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일본계 브라질인과 일본에서 태어난 그들의 자녀들은 일본인들에게 여전히 외국인으로 취급받으며 사회 통합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76][77][78] 이들은 주로 일본인들이 기피하는 소위 "3K"(きつい|키츠이일본어, 汚い|키타나이일본어, 危険|키켄일본어 - 힘들고, 더럽고, 위험한) 업종인 자동차 및 전자 공장 등에서 일하며, 일본 기준으로 낮은 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79][80][83][84]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브라질로 송금하는 금액은 상당하여, 2002년 한 해에만 25억달러에 달했다.[85]
일본 사회 내에서 일본계 브라질인에 대한 차별 문제도 발생하고 있다. 브라질에서는 성공적인 이민자 집단으로 인정받았던 것과 달리, 일본에서는 외국인 노동자라는 인식이 강하며 사회적 통합이 원활하지 않다. 일본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취업에 어려움을 겪고, 자녀들 또한 일본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아예 취학하지 못하는 문제도 발생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이들의 일본어 교육 기회 확대와 사회보장제도 정비 등을 추진하고 있으나, 차별 문제는 여전히 사회적 과제로 남아있으며, 일본 정부의 보다 적극적인 권익 보호와 사회 통합 노력이 요구된다. 실제로 1997년 아이치현 코마키시에서는 일본인 청소년 집단이 일본계 브라질인 소년을 폭행하여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이 있었고, 2006년 시즈오카현 후쿠로이시에서는 지역 주민들이 일본계 브라질인의 주택 부지 매입을 집단적으로 반대하여 무산시킨 사례도 보고되었다.[146]
일본 내 브라질인 인구는 2007년 약 31만 4천 명으로 정점을 찍었으나,[82]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이후 일본 경제가 침체하면서 많은 이들이 브라질로 귀국하여 2014년에는 약 17만 8천 명까지 감소했다. 하지만 이후 다시 증가 추세를 보여 2023년에는 약 21만 2천 명에 이르렀다.[86][87][88] 2022년 기준으로 일본 내 외국인 노동자 중 브라질인은 중국, 한국, 필리핀에 이어 네 번째로 큰 규모를 차지하고 있으며,[90] 2023년 기준 전 세계 브라질 국외 거주자 커뮤니티 중에서는 다섯 번째 규모이다.[91]
이처럼 일본계 브라질인은 이민과 데카세기라는 양방향의 흐름을 통해 일본과 브라질 사이의 독특한 관계를 형성하며, 양국 사회 모두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들의 존재는 문화 교류를 촉진하고 경제적 관계를 심화시키는 긍정적 측면이 있지만, 동시에 일본 사회 내에서의 차별과 사회 통합 문제는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5. 유명 일본계 브라질인
정치, 경제, 문화, 스포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는 일본계 브라질인들이 많다. 이들은 브라질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 김 카타기리 - 정치가
- 나이토 카츠토시 - 1924년 파리 올림픽 레슬링 자유형 동메달리스트
- 나카오지 오스카 - 프로 야구 선수,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브라질 대표
- 니시모리 히로시 루이스 - 브라질 하원 의원, 전 파라나 주 의원
- 다니엘리 스즈키 - 여배우
- 다레노가레 아케미 - 모델, 탤런트
- 다나카 마르시오 케이조 - 사회인 야구 선수,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브라질 대표
- 다나카 마르쿠스 툴리오 - 축구 선수 (일본 귀화), 2010 FIFA 월드컵 일본 대표
- 라브폭스 - 밴드 칸세이 지 세일 섹시 보컬
- 료토 마치다 - 종합격투기 선수, 전 UFC 세계 라이트 헤비급 챔피언
- 루이스 구시켄 - 좌익 활동가, 정치인, 전 연방 하원 의원, 전 대통령 비서실 공보행정조정관[150]
- 루이스 온무라 - 유도 선수,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유도 은메달리스트
- 루이 오오타케 - 건축가, 주일본 브라질 대사관 건축 참여
- 린다 3세 - 아이돌 그룹 (멤버 전원 일본계 3세)
- 리까르두 오오타케 - 디자이너, 큐레이터, 전 상파울루 주 문화 장관
- 마나부 마베 - 화가
- 마르시아 - 여배우, 가수
- 마에다 미츠요 - 유도 선수, 그레이시 주짓수 창시에 영향
- 마이사 - 그라비아 아이돌
- 마츠모토 유이치 - 프로 야구 선수 (일본 귀화),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브라질 대표
- 멜리사 쿠니요시 - 가수
- 미우라 라우리두 - 농구 코치, 오스카 슈미트 지도
- 미즈모토 코닌 - 상파울루 신문 창간자
- 바니아 이시이 - 유도가
- 보 타카하시 - 프로 야구 선수, 2017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브라질 대표
- 비비아니 오노 - 패션 모델
- 사토 지로 - 프로 야구 선수 (일본 귀화),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브라질 대표
- 사브리나 사토 - 그라비아 아이돌
- 산드로 히로시 - 축구 선수
- 세르지오 에치고 - 축구 해설가, 전 축구 선수
- 세이고 츠즈키 - 전 보건부 장관
- 스기마치 마하우 - 육상 경기 선수
- 시게아키 우에키 - 전 광산동력부 장관, 전 페트로브라스 최고 책임자
- 아나 치에미 타카기 - 여자 배구 선수
- 아드리아나 - 모델
- 아드리아나 리마[151] - 모델 (일본계 혈통 포함)
- 아만다 - 무대 배우
- 아우구스토 아키오 - 스케이트보드 선수
- 알리니 나카시마 - 모델
- 알프레도 코지마 - 프로그래머, Window Maker 제작자
- 안토니오 우에노 - 전 연방 하원 의원
- 에리카 아와노 - 만화가
- 에노미야 유우 - 만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소설가
- 에프라인 린타로 다 실바 - 축구 선수
- 오노 리사 - 보사노바 가수
- 오스카르 오이와 - 화가, 아티스트 그룹 "쇼와 40년회" 멤버
- 오시마 카오루 - 탤런트
- 오오타케 토미에 - 추상 화가, 조형 작가
- 오오히카타 덴 - 배우, 영화 감독
- 오야 로드리고 - 유도 선수
- 오카다 산토스 지오고 - 풋살 선수
- 오쿠다 페드로 - 프로 야구 선수,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브라질 대표
- 요나시로 조지 - 축구 감독, 전 일본 대표 선수 (귀화)
- 요시무라 다이시로 - 축구 선수, 지도자, 전 일본 대표 선수 (귀화)
- 요시무라 켄지 - 사회인 야구 선수,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브라질 대표
- 우구 호야마 - 탁구 선수
- 우에하라 코케이 - 상파울루 대학교 공학부 교수 (수리학), 이타이푸 댐, 싼샤 댐 건설 참여
- 이시하라 밀턴 - 통역
- 조지 코바야시 - 축구 선수
- 주니어 - 패션 모델
- 줄리아나 이마이 - 모델
- 준이치 사이토 - 전 브라질 공군 최고 총사령관 (대장)
- 치아키 이시이 - 유도 선수, 1972년 뮌헨 올림픽 유도 동메달리스트
- 치즈카 야마자키 - 영화 감독
- 카네다 카롤리나 - 패션 모델 (포르투갈계 혼혈)
- 카네후시 우고 - 프로 야구 선수,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브라질 대표
- 카를로스 토시키 - 가수, 전 오메가 트라이브 보컬
- 카를루스 에두아르두 모리모토 - 프로그래머, Kurumin Linux 제작자
- 카를루스 타케시 - 배우, 성우
- 카시오 타니구치 - 전 쿠리치바 시장, 전 연방 하원 의원
- 카이세이 이치로 - 전 스모 선수 (일본 귀화)
- 캐롤 나카무라 - 모델
- 켈리 - 패션 모델
- Ken - 패션 모델
- 코바야시 미도리 - 교육가, 목사, 검도 사범, 브라질 검도 선구자
- 클라우디오 카노 - 탁구 선수
- 키무라 미노루 - 킥복서
- 타케다 라리사 타코 - 성우
- 타마키 시게오 - 프로 야구 선수 (일본 귀화)
- 테츠오 오카모토 - 수영 선수, 1952년 헬싱키 올림픽 동메달리스트
- 토시코 에가시라 - 브라질에 일본 특촬물 및 애니메이션 보급
- 파비오 야스다 - 일본계 최초의 브라질 장관 (상공부 장관)
- 페르난다 타카이 - 뮤지션, 파투 푸 보컬
- 펠리페 키타다이 - 유도 선수, 2012년 런던 올림픽 유도 동메달리스트
- 폴리아나 오키모토 - 수영 선수
- 플라비오 시로 - 추상 화가
- 히라타 브루노 - 사회인 야구 선수,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브라질 대표
- 혼다 루카스 타케시 - 피겨 스케이팅 선수
- Carlos K. - 작곡가
- RINA - 모델
6. 같이 보기
브라질은 1970년대 전반에 외국 자본을 들여와 '브라질의 기적'이라 불리는 경제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부터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겪는 등 경제적 어려움이 지속되었다. 결국 1980년대에 브라질 경제는 세계적인 채무 대국으로 전락하며 파탄에 이르렀고, 극심한 인플레이션 속에서 군사 정권은 물러나게 되었다.
반면, 일본은 고도 경제 성장 이후에도 안정적인 경제 상황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변화는 이민의 흐름을 역전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1990년 일본의 출입국관리법 개정으로 일본계 브라질인 3세까지와 그 가족을 제한 없이 받아들이기 시작하자, 일본에서의 높은 수입을 기대하거나 브라질에서 일자리를 잃은 많은 일본계 브라질인들이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향했다. 1990년대 바리그 브라질 항공, VASP 항공, 일본항공의 도쿄, 오사카, 나고야행 직항편은 이러한 브라질인들로 항상 붐볐다.
돈을 벌기 위해 온 일본계 브라질인과 그 가족들은 대부분 공장 노동자와 같은 블루 칼라 직종에 종사했으며, 전문직이나 기술직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이들은 주로 기간공(기간제 노동자)을 많이 고용하는 공업 지대에 정착했다.
이들은 일본인 노동자들이 기피하는 야간 근무 등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2년 계약으로 돈을 벌기 위해 일본에 왔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이들이 일본에 정착하기를 원하게 되었고, 영주권이나 일본 국적을 취득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일본에 거주하는 브라질인의 수는 계속 증가하여, 한때 31만 명을 넘어서기도 했다[134] (이는 일본 국적 취득자는 제외한 수치이다). 100년간 브라질로 이주한 일본인이 약 13만 명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브라질에서 일본으로의 이주 규모가 훨씬 컸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계속 증가하던 재일 브라질인의 수는 리먼 쇼크를 계기로 변화를 맞았다. 비정규직 고용 형태로 일하던 이들이 경제 위기 속에서 우선적인 해고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일본계라는 배경에도 불구하고 외국인으로서 겪는 언어 장벽과 차별적인 시선 속에서 많은 이들이 어려움을 겪었고, 약 10만 명의 브라질인이 일본을 떠나야 했다[134].
참조
[1]
웹사이트
令和5年末現在における在留外国人数について
https://www.moj.go.j[...]
[2]
웹사이트
Adital – Brasileiros no Japão
http://www.adital.co[...]
2006-07-13
[3]
웹사이트
Brazil
https://2001-2009.st[...]
2007-09-14
[4]
뉴스
Japanese-Brazilians: Straddling Two Cultures
http://lens.blogs.ny[...]
The New York Times
2013-09-25
[5]
웹사이트
Japan-Brazil Relations (Basic Data)
https://www.mofa.go.[...]
2022-10-08
[6]
웹사이트
Countries with the highest number of Japanese residents in 2023 (in 1,000s)
https://www.statista[...]
[7]
웹사이트
Dia Nacional da Imigração Japonesa
http://web.archive.o[...]
Prefeitura Municipal de Promissão
[8]
웹사이트
18 de junho, Dia Nacional da Imigração Japonesa
http://web.archive.o[...]
Migalhas
[9]
웹사이트
Site Oficial da ACCIJB - Centenário da Imigração Japonesa no Brasil - História da Imigração
http://www.centenari[...]
[10]
웹사이트
Entrada de estrangeiros no Brasil segundo as principais nacionalidades pelos 4 períodos constituídos
http://www.scielo.br[...]
2022-12-10
[11]
서적
Resistência & integração : 100 anos de imigração japonesa no Brasil
https://biblioteca.i[...]
2008
[12]
서적
Do outro lado do Atlântico: um século de imigração italiana no Brasil
https://books.google[...]
Livraria Nobel
1989
[13]
웹사이트
Sobrenomes e Ancestralidade No Brasil
http://www.ipea.gov.[...]
IPEA
2016-09
[14]
간행물
Historical Roots of the 'Whitening' of Brazil
2002-01
[15]
웹사이트
Brasil 500 anos
http://www1.ibge.gov[...]
2008-05-30
[16]
웹사이트
HISTÓRICA – Revista Eletrônica do Arquivo do Estado
http://www.historica[...]
[17]
웹사이트
Imigração Japonesa no Brasil
http://www.infoescol[...]
InfoEscola
2008-12-22
[18]
서적
Hirohito, Emperor of Japan
Prentice Hall International, Inc
[19]
웹사이트
Imigração Japonesa no Brasil
http://www.imigracao[...]
2007-12-18
[20]
서적
Shaping Our Nation: How Surges of Migration Transformed America and Its Politics
https://books.google[...]
Crown Forum
2013
[21]
뉴스
A little corner of Brazil that is forever Okinawa
https://www.bbc.com/[...]
2018-02-04
[22]
문서
"Sanctions and Honorary Whites: Diplomatic Policies and Economic Realities in Relations Between Japan and South Africa,'' p. 33].
https://books.google[...]
2002
[23]
웹사이트
A Imigração Japonesa em Itu
http://www.itu.com.b[...]
[24]
웹사이트
Governo do Estado de São Paulo
http://www.saopaulo.[...]
[25]
웹사이트
IBGE – Instituto Brasileiro de Geografia e Estatística
http://www.ibge.gov.[...]
1996-10-13
[26]
웹사이트
日系移民データ – 在日ブラジル商業会議所 – CCBJ
http://jpsite.ccbj.j[...]
2012-06-05
[27]
서적
Diaspora and Identity: Japanese Brazilians in Brazil and Japan
University of Hawai'i Press
[28]
문서
An extensive quotation from this article appears in
[29]
웹사이트
Memoria Da Imigração Japonesa No Brasil
https://www.scribd.c[...]
2008-10-17
[30]
웹사이트
Revista VEJA – Edição 2038 – 12 de dezembro de 2007
http://veja.abril.co[...]
[31]
웹사이트
Cronologia da Imigração Japonesa in Folha de S.Paulo, 20 de abril de 2008
http://www1.folha.uo[...]
Uol
[32]
웹사이트
Enciclopédia das Línguas no Brasil – Japonês
http://www.labeurb.u[...]
2011-05-22
[33]
간행물
Japanese Emigration to Brazil
https://www.jstor.or[...]
1934-03
[34]
웹사이트
RIOS, Roger Raupp. Text excerpted from a judicial sentence concerning crime of racism. Federal Justice of 10ª Vara da Circunscrição Judiciária de Porto Alegre, November 16, 2001
http://www.movimento[...]
[35]
웹사이트
Memória da Imigração Japonesa
https://www.scribd.c[...]
2013-05-10
[36]
뉴스
História da discriminação brasileira contra os japoneses sai do limbo
http://www1.folha.uo[...]
Folha de S.Paulo
2008-04-20
[37]
서적
O Povo Brasileiro
[38]
웹사이트
Revista VEJA – Edição 2038 – 12 de dezembro de 2007
http://veja.abril.co[...]
Revista Made in Japan
2014-05-17
[39]
서적
[40]
웹사이트
Valores impulsionam alunos nipo-brasileiros – Educação – Gazeta do Povo
http://www.gazetadop[...]
Gazeta do Povo
2014-05-04
[41]
웹사이트
O sobrenome influencia no sucesso profissional de um brasileiro?
https://gauchazh.cli[...]
[42]
웹사이트
Revista VEJA - Edição 2038 - 12 de dezembro de 2007
http://veja.abril.co[...]
veja.abril.com.br
2014-05-17
[43]
웹사이트
SER OU NÃO SER JAPONÊS? UM PROCESSO IDENTITÁRIO EM CONSTRUÇÃO
https://www.redalyc.[...]
[44]
웹사이트
Envelhecimento e etnicidade: o processo de aculturação dos imigrantes japoneses
https://www.teses.us[...]
[45]
웹사이트
IBGE. Brasil: 500 anos de povoamento. Rio de Janeiro: IBGE, 2000
https://biblioteca.i[...]
2024-09-19
[46]
서적
Patrícios. Sírios e libaneses em São Paulo
Ed. UNESP
[47]
서적
Negotiating National Identity: Immigrants, Minorities, and the Struggle for Ethnicity in Brazil
[48]
간행물
Japanese in Brazil or Brazilian in Japan: The trajectory of an identity in a migratory context Campinas, 1997
[49]
서적
[50]
웹사이트
A STUDY ON JAPANESE AND THEIR DESCENDANTS IN CURITIBA
http://www.brazzil.c[...]
[51]
논문
Influência da aculturação na autopercepção dos idosos quanto à saúde bucal em uma população de origem japonesa
2006-11
[52]
뉴스
Sabrina Sato: "A análise me ajudou a decidir pela Record"
https://istoe.com.br[...]
2014-01-31
[53]
웹사이트
Revista VEJA - Edição 2038 - 12 de dezembro de 2007
http://veja.abril.co[...]
veja.abril.com.br
2014-05-24
[54]
웹사이트
Menino inicia 6ª geração de descendentes japoneses
https://www1.folha.u[...]
[55]
웹사이트
The Descendants of Japanese Immigrants in Brazil and “Eye Westernization Surgery”
https://periodicos.u[...]
[56]
웹사이트
PANIB – Pastoral Nipo Brasileira
http://www.panib.org[...]
[57]
뉴스
Brazil's Japanese Preserve Sumo and Share It With Others
https://www.nytimes.[...]
2016-11-21
[58]
뉴스
'Sumo feminino': How Brazil's female sumo wrestlers are knocking down gender barriers
http://www.cbc.ca/ne[...]
2016-11-21
[59]
웹사이트
Find Rikishi – Brazil Shusshin
http://sumodb.sumoga[...]
2022-01-13
[60]
논문
A Imigração Japonesa do Passado e a Imigração Inversa, Questão Gênero e Gerações Na Economia
2008-12-31
[61]
논문
As línguas japonesa e portuguesa em duas comunidades nipo-brasileiras: a relação entre os domínios e as gerações
[62]
논문
O ensino de japonês no Brasil como língua de imigração
[63]
웹사이트
São Paulo, o algodão e o japonês na década de trinta
http://www.revistas.[...]
usp.br
2015-01-24
[64]
웹사이트
O papel da migração internacional na evolução da população brasileira (1872 a 1972)
https://www.scielo.b[...]
[65]
웹사이트
The Descendants of Japanese Immigrants in Brazil and “Eye Westernization Surgery”
https://periodicos.u[...]
[66]
웹사이트
Japoneses IBGE
http://www.ibge.gov.[...]
[67]
웹사이트
IBGE traça perfil dos imigrantes
madeinjapan.uol.com.br
2008-06-21
[68]
웹사이트
Censo 2022: população que se declara amarela diminui 60% em uma década
https://exame.com/br[...]
[69]
웹사이트
Censo 2022: veja quais são os municípios mais amarelos, brancos, indígenas, pardos e pretos do Brasil
https://g1.globo.com[...]
G1
2023-12-22
[70]
웹사이트
A língua falada nas comunidades rurais nipo-brasileiras do estado de São Paulo – considerações sobre koronia-go
http://gerflint.fr/B[...]
[71]
웹사이트
Japoneses e descendentes em Maringá passam de 14 mil :: Notícias JusBrasil
http://www.jusbrasil[...]
2009-08-22
[72]
문서
SER OU NÃO SER JAPONÊS? UM PROCESSO IDENTITÁRIO EM CONSTRUÇÃO
https://www.redalyc.[...]
[73]
서적
Theory versus Reality in Japanese Immigration Policy
Stanford University Press
[74]
간행물
Are Foreign Trainees in Japan Disguised Cheap Labores?
[75]
간행물
The New Illegal Immigration in Japan, 1980-1992
Spring
[76]
논문
Parece, mas não é
https://www.unicamp.[...]
2020-11-15
[77]
웹사이트
Brasil: migrações internacionais e identidade
http://www.comcienci[...]
2018-05-04
[78]
논문
Permanentemente temporário: dekasseguis brasileiros no Japão
2006-06
[79]
웹사이트
asahi.com : EDITORIAL: Brazilian immigration – ENGLISH
http://www.asahi.com[...]
2018-05-04
[80]
문서
A imigração para o Japão
https://www.scielo.b[...]
[81]
문서
A imigração para o Japão
https://www.scielo.b[...]
[82]
문서
Number of foreign residents from Brazil living in Japan from 1984 to 2022
https://www.statista[...]
[83]
웹사이트
Estadao.com.br :: Especiais :: Imigração Japonesa
http://www.estadao.c[...]
2018-05-04
[84]
웹사이트
Folha Online – BBC – Lula ouve de brasileiros queixas sobre vida no Japão – 28/05/2005
http://www1.folha.uo[...]
2018-05-04
[85]
웹사이트
Untitled Document
http://www.portaldek[...]
[86]
웹사이트
Eles não pensam em retornar ao Japão .::. Dekassegui NippoBrasil
https://www.nippo.co[...]
2020-10-19
[87]
웹사이트
Estatísticas sobre a comunidade brasileira no Japão - 2018
http://cgtoquio.itam[...]
Consulado-Geral do Brasil em Tóquio
2020-10-19
[88]
문서
令和5年末現在における在留外国人数について
https://www.moj.go.j[...]
[89]
문서
Japão aprova apenas 1% dos vistos previstos para bisnetos de japoneses
https://g1.globo.com[...]
[90]
문서
Origins of Japan's foreign residents shift over 3 decades, further change expected: expert
https://mainichi.jp/[...]
[91]
문서
Origins of Japan's foreign residents shift over 3 decades, further change expected: expert
https://mainichi.jp/[...]
[92]
웹사이트
An Enclave of Brazilians Is Testing Insular Japan,
https://www.nytimes.[...]
New York Times
2008-11-01
[93]
뉴스
Despite Shortage, Japan Keeps a High Wall for Foreign Labor
New York Times
2011-01-03
[94]
웹사이트
Japão: imigrantes brasileiros popularizam língua portuguesa
http://www.correiodo[...]
2018-05-04
[95]
웹사이트
Site Oficial da ACCIJB – Centenário da Imigração Japonesa no Brasil – Comemorações
http://www.centenari[...]
2018-05-04
[96]
웹사이트
Discurso da Profa. Dra. Suely Vilela na visita oficial de sua alteza príncipe Naruhito, do Japão – Faculdade de Direito
http://www.reitoria.[...]
2008-10-23
[97]
웹사이트
Site Oficial da ACCIJB – Centenário da Imigração Japonesa no Brasil – Festividade no Sambódromo emociona público
http://www.centenari[...]
2018-05-04
[98]
문서
Após visita, príncipe Naruhito deixa o Brasil
http://www1.folha.uo[...]
[99]
뉴스
O outro lado da notícia
Estadão
2008-02-09
[100]
웹사이트
Enkyo – Beneficência Nipo-Brasileira de São Paulo
http://www.enkyo.org[...]
2018-05-04
[101]
웹사이트
Home page
http://world.nethall[...]
Escola Japonesa de São Paulo
2014-03-18
[102]
웹사이트
学校紹介
http://rio-nichigaku[...]
Associação Civil de Divulgação Cultural e Educacional Japonesa do Rio de Janeiro
2014-03-18
[103]
웹사이트
Home page
http://cliente.argo.[...]
Escola Japonesa de Manaus
2014-03-18
[104]
웹사이트
Home page
http://www.geocities[...]
Escola Japonesa de Belo Horizonte
2015-01-15
[105]
웹사이트
過去に指定・認定していた在外教育施設
http://www.mext.go.j[...]
Ministry of Education, Culture, Sports, Science and Technology
2015-01-15
[106]
서적
Migrants and Identity in Japan and Brazil: The Nikkeijin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03-08-27
[107]
웹사이트
中南米の補習授業校一覧(平成25年4月15日現在)
http://www.mext.go.j[...]
Ministry of Education, Culture, Sports, Science and Technology
2014-05-10
[108]
웹사이트
中南米の補習授業校一覧
https://web.archive.[...]
MEXT
2017-01-11
[109]
간행물
Latin Americans of Japanese Origin (Nikkeijin) Working in Japan: A Survey
https://books.google[...]
World Bank Publications
2007
[110]
간행물
https://books.google[...]
VDM Publishing
2008
[111]
간행물
Latin Americans of Japanese Origin (Nikkeijin) Working in Japan: A Survey
https://books.google[...]
World Bank Publications
2007
[112]
서적
Negotiating National Identity: Immigrants, Minorities, and the Struggle for Ethnicity in Brazil
https://books.google[...]
Duke University Press
1999
[113]
웹사이트
Amor pelos avós
http://www.japao100.[...]
[114]
웹사이트
O Brigadeiro Saito passa a ser o primeiro nikkei (descendente de japoneses) a ocupar o mais alto posto da Força Aérea Brasileira
http://www.nippobras[...]
[115]
웹사이트
Essa neta de imigrantes japoneses radicados no Brasil
http://www.iadb.org/[...]
[116]
웹사이트
Sabrina Sato - A análise me ajudou a decidir pela Record
https://istoe.com.br[...]
[117]
웹사이트
Modelo nikkei mostra talento na passarela e nos negócios
http://www.ensaionb.[...]
[118]
웹사이트
Os bisavós vieram no Kasato Maru
http://www.japao100.[...]
[119]
웹사이트
Conheça alguns nikkeis que ficaram famosos no Brasil
http://www1.folha.uo[...]
[120]
뉴스
ブラジル連邦共和国(Federative Republic of Brazil)基礎データ
https://www.mofa.go.[...]
2020-06-15
[121]
뉴스
「日本でなくてもいい」日系ブラジル人の「総スカン」食らった新制度
https://withnews.jp/[...]
2018-11-26
[122]
뉴스
日本との友好、一層深化を=天皇即位でメッセージ-ブラジル大統領
https://www.jiji.com[...]
2019-05-03
[123]
뉴스
ブラジル上院、日本移民111周年祝う=190万日系人に感謝
https://www.jiji.com[...]
2019-07-09
[124]
뉴스
ブラジルからの声――日本は誇らしい祖国たりえているか
http://www.huffingto[...]
2017-04-14
[125]
뉴스
Censo 2010: população asiática no Brasil cresceu 177% em dez ano
https://brasil.estad[...]
2011-07-22
[126]
웹사이트
令和5年末現在における在留外国人数について
https://www.moj.go.j[...]
出入国在留管理庁
2024-09-06
[127]
뉴스
【移民107周年】「石巻若宮丸漂流民」 日本人伯国初上陸の歴史背景 – サンパウロ新聞
http://saopauloshimb[...]
2015-06-20
[128]
웹사이트
『百年の水流』開発前線編 第一部=北パラナの白い雲=外山脩=(27)
http://www.nikkeyshi[...]
ニッケイ新聞
2015-08-21
[129]
웹사이트
ブラジル移民の100年「日米開戦前後の日系社会の状況」
https://www.ndl.go.j[...]
[130]
웹사이트
ブラジル移民の100年「第5章 ナショナリズムの昂揚と日本人移民の排斥(1)」
https://www.ndl.go.j[...]
[131]
웹사이트
「43年ブラジル・サントス強制退去 県系375家族が受難 松林さん名簿発見」
https://headlines.ya[...]
ヤフーニュース
2018-03-09
[132]
웹사이트
ブラジル移民の100年「第6章 日系社会の分裂対立(1)」
https://www.ndl.go.j[...]
[133]
서적
ブラジルを知るための56章
明石書店
[134]
웹사이트
在日ブラジル人の人口の推移と特徴
https://www.jica.go.[...]
JICA
2024-09-06
[135]
웹사이트
法務省:【在留外国人統計(旧登録外国人統計)統計表】
https://www.moj.go.j[...]
[136]
웹사이트
NHK NEWS WEB 追跡!“消えた日系ブラジル人”
http://www3.nhk.or.j[...]
[137]
서적
遠きにありてつくるもの 日系ブラジル人の思い・ことば・芸能
みずほ書房
2008
[138]
웹사이트
《記者コラム》「第2の棄民」始めた日本政府=老いた日系に用なし、若いアジア人へ
https://www.brasilni[...]
ニッケイ新聞
2024-09-06
[139]
뉴스
デカセギ子弟=教育の現場から=(上)=「残業」は言い訳=教育への関心薄い父兄
http://www.nikkeyshi[...]
2004-03-27
[140]
뉴스
デカセギ子弟教育の現場から ㊦=学力不足 深刻…=高校進学者「10人に1人」
http://www.nikkeyshi[...]
2004-04-02
[141]
간행물
あーすぷらざ外国人教育相談報告書
http://www.k-i-a.or.[...]
2010-07-29
[142]
웹사이트
日本語が分からず学校をドロップアウト、ギャング化する若者も…「不就学児2万人時代」の日本
https://times.abema.[...]
ABEMA
2024-09-06
[143]
뉴스
デカセギ子弟に日本が震撼=少年犯罪の牽引車=件数は10年間で40倍=中部地方では9割占める
http://www.nikkeyshi[...]
ニッケイ新聞
2003-08-15
[144]
뉴스
NGO文化教育連帯協会が講演会=デカセギ子弟犯罪歯止めかからず=検挙件数10年前比40倍=「言葉」「教育」に=親が無関心
http://www.nikkeyshi[...]
ニッケイ新聞
2004-02-27
[145]
뉴스
派遣切りで外国人支援を要望 厚労省に26自治体
https://web.archive.[...]
産経ニュース
2008-12-18
[146]
웹사이트
自治会がブラジル人転入阻止 「人権侵犯」と法務局通知
http://www.asahi.com[...]
朝日新聞
2007-06-28
[147]
뉴스
代理処罰の日系ブラジル人に時効 ブラジルの州高裁
http://www.asahi.com[...]
2014-04-20
[148]
뉴스
湖西市女児死亡事故=聖州高等裁が一転、時効判決=禁錮2年への減刑に伴い=検察官唖然「信じられない」
http://www.nikkeyshi[...]
2014-04-20
[149]
뉴스
建築家のルイ・オオタケ氏死去 日系ブラジル人|社会|全国のニュース|京都新聞
https://www.kyoto-np[...]
2022-05-10
[150]
웹사이트
http://www.nikkeyshi[...]
[151]
웹사이트
My family is all mixed with Japonese, black, and West Indian. Victoria's Secret Swim Special (TV 2003)
http://ethnicelebs.c[...]
[152]
뉴스
Japanese-Brazilians: Straddling Two Cultures
http://lens.blogs.ny[...]
The New York Times
2013-09-27
[153]
웹인용
Japan-Brazil Relations
http://www.mofa.go.j[...]
Ministry of Foreign Affairs of Japan
[154]
웹인용
ブラジル連邦共和国(Federative Republic of Brazil)基礎データ|外務省
http://www.mofa.go.j[...]
[155]
웹인용
Who are "Nikkei & Japanese Abroad"?
http://www.jadesas.o[...]
The Association Of Nikkei And Japanese Abroad
[156]
뉴스
브라질 이민 100주년 맞은 일본
https://news.naver.c[...]
[157]
웹사이트
Brasileiros no Japão
http://www.adital.co[...]
2006-07-13
관련 사건 타임라인
( 최근 20개의 뉴스만 표기 됩니다. )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