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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 필암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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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성 필암서원은 1590년 김인후를 기리기 위해 호남 선비들에 의해 창건된 서원으로, 여러 차례 이건과 사액을 거쳐 1672년 현재의 위치에 자리 잡았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존속되었으며, 1975년 사적으로 지정되고 2019년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등재되었다. 김인후와 그의 제자 양자징을 배향하며, 확연루, 청절당, 경장각 등의 주요 시설을 갖추고 있다. 현재는 주변 정비 사업을 통해 유물 전시관과 평생교육센터를 운영하며 청렴 교육의 메카로 활용되고 있다. 필암서원은 호남 유학의 중심지로서 조선 시대 서원 건축의 전형을 보여주는 역사적,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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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 필암서원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필암서원 확연루
필암서원 확연루.
이름장성 필암서원
한자 표기長城 筆巖書院
유형사적
지정 번호242
지정일1975년 4월 23일
주소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 377번지
시대조선시대
면적5,832m2
세계유산 정보
이름한국의 서원
세부 이름필암서원
지정 번호1498-005
기준(ⅲ)
영문명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
불문명Seowon, académies néo-confucéennes coréennes
회차제43차
등록년2019년
소재국대한민국
등록 구분문화유산

2. 역사

1590년(선조 23) 제자 변성온(卞成溫)・기효간(奇孝諫)・변이중 등 호남 선비들이 김인후의 고향 마을 인근 장성읍 서쪽 기산리(岐山里)에 서원을 세우고 제향하였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었다.[21] 1624년(인조 2) 추담 김우급(金友伋) 등 지방 선비들의 노력으로 기산리 서쪽 증산동(甑山洞)에 이건 복설하였다.[21]

1658년(효종 9) 복설 이후 서원의 지위 고양을 위한 전라도 유생 오이익(吳以翼)을 소두(疏頭)로 사액 청원이 활발히 이루어졌다.[21] 1659년(효종 10) 3월 ''''필암''''(筆巖)이라 사액이 내려졌다. 김인후는 이조 판서·양관 대제학에 추증되고, '문정(文靖)'의 시호가 내려졌다.[21] 1662년(현종 3) 2월 현종의 어필로 ''''필암서원''''(筆巖書院)이라 선액하고, 예조정랑 윤형계(尹衡啓)를 예관으로 보내 사제하였다. 이로써 필암서원은 경제력을 확보하여 서원으로서의 규모와 기능을 갖추고, 사회적 지위와 위상을 높힐 수 있었다.[21]

1672년(현종 13) 3월 서원을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고, 마을 이름도 해타리에서 필암리로 바뀌었다. 이건에는 원장 송준길의 협조와 남계 이실지(李實之)·기정연(奇挺然)·박승화(朴升華) 등의 노력이 있었다. 이건 작업의 완성으로 서원은 사액 서원답게 면모를 일신하였다.[21]

1786년(정조 10) 제자이자 사위인 고암(鼓巖) 양자징(梁子徵)을 종향하였다. 1796년(정조 20) 11월 문묘에 승배하고, 영의정 추증 및 부조를 명하였다. 시호를 '문정(文正)'으로 개시하였다. 정조가 사제문을 짓고, 우부승지 이면긍(李勉兢)을 예관으로 보내 치제하였다.

1864년(고종 1) 흥선대원군서원 철폐령 때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된 전국의 47개 서원중 하나이다.[22]

1975년 4월 23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242호 '''장성 필암서원'''으로 지정되었다.[22] 1999년부터 장성군에서 주변 정비 사업을 추진하여 2008년 유물전시관인 『원진각』과 『삼연정』 등을 준공하였다. 2010년 원진각 뒤편에 청소년・유림들의 한학교육 및 선비 체험 교육 공간 목적의 평생교육센터인 『집성관』을 준공하였다. 2019년 7월 10일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등재되었다.

2. 1. 창건과 초기 역사 (1590년 ~ 1672년)

1590년(선조 23) 하서 김인후의 제자 변성온(卞成溫)・기효간(奇孝諫)・변이중(邉以中) 등 호남 선비들이 그의 고향 마을 인근 장성읍 서쪽 기산리(岐山里)에 서원을 세우고 제향하였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었다.[21] 1624년(인조 2) 추담 김우급(金友伋) 등 지방 선비들의 노력으로 기산리 서쪽 증산동(甑山洞)에 복설하였다.[21]

1658년(효종 9) 복설 이후 서원의 지위 고양을 위한 전라도 유생 오이익(吳以翼)을 소두(疏頭)로 사액 청원이 활발히 이루어졌다.[21] 1659년(효종 10) 3월 '''필암'''(筆巖)이라 사액이 내려졌으며, 김인후는 이조 판서·양관 대제학에 추증되고, '문정(文靖)'의 시호가 내려졌다.[21] 1662년(현종 3) 2월 현종의 어필로 '''필암서원'''(筆巖書院)이라 선액하고, 예조정랑 윤형계(尹衡啓)를 예관으로 보내 사제하였다. 이로써 필암서원은 경제력을 확보하여 서원으로서의 규모와 기능을 갖추고, 사회적 지위와 위상을 높힐 수 있었다.[21]

1672년(현종 13) 3월 서원을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고, 마을 이름도 해타리에서 필암리(筆岩里)로 바뀌었다. 이건에는 원장 송준길(宋浚吉)의 협조와 남계 이실지(李實之)·기정연(奇挺然)·박승화(朴升華) 등의 노력이 있었다. 이건 작업의 완성으로 서원은 사액 서원답게 면모를 일신하였다.[21]

2. 2. 발전과 중흥 (1672년 ~ 1864년)

1672년(현종 13) 3월 서원을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고, 마을 이름도 해타리에서 필암리(筆岩里)로 바뀌었다.[21] 이건에는 원장 송준길(宋浚吉)의 협조와 남계 이실지(李實之. 1624~1702)·기정연(奇挺然. 1627~?, 금강 현손)·박승화(朴升華, 백우당 증손)등의 노력이 있었다. 이건 작업의 완성으로 서원은 사액 서원답게 면모를 일신하였다.[21] 1662년(현종 3) 2월 현종의 어필로 ''''필암서원''''(筆巖書院)이라 선액하고, 예조정랑 윤형계(尹衡啓)를 예관으로 보내 사제하였다. 이로써 필암서원은 경제력을 확보하여 서원으로서의 규모와 기능을 갖추고, 사회적 지위와 위상을 높힐 수 있었다.[21]

1786년(정조 10) 제자이자 사위인 고암(鼓巖) 양자징(梁子徵)을 종향하였다. 1796년(정조 20) 11월 문묘에 승배하고, 영의정 추증 및 부조를 명하였다. 시호를 '문정(文正)'으로 개시하였다. 정조가 사제문을 짓고, 우부승지 이면긍(李勉兢)을 예관으로 보내 치제하였다.

2. 3. 시련과 극복 (1864년 ~ 현재)

1864년(고종 1) 흥선대원군서원 철폐령 때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된 전국의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22] 일제강점기6.25 전쟁 중에도 피해를 입지 않고 옛 규모를 잘 간직하고 있다.

1975년 4월 23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242호 '''장성 필암서원'''으로 지정되었다.[22] 1999년부터 장성군에서 주변 정비 사업을 추진하여 2008년 유물전시관인 『원진각』과 『삼연정』 등을 준공하였다. 2010년에는 원진각 뒤편에 청소년・유림들의 한학교육 및 선비 체험 교육 공간 목적의 평생교육센터인 『집성관』을 준공하였다.

2019년 7월 10일 유네스코 세계 유산 '''한국의 서원'''으로 등재되었다.

3. 주요 시설

3. 1. 확연루

확연루(廓然樓)는 서원의 문루(門樓)로, '확연'은 하서 선생의 마음이 맑고 깨끗하며 확연하게 크고 공평무사하다는 의미의 '확연대공(廓然大公)'을 집자한 말이다.[12][13] 이는 널리 모든 사물에 사심이 없이 공평한 성인의 마음을 배우는 군자의 학문하는 태도를 뜻한다.[12][13]

확연루는 서원을 넘나드는 사람들에게 진리 추구의 엄중함으로 압도할 뿐만 아니라, 네 귀퉁이에 조각된 귀공포(龜拱包)는 엄숙하면서도 고졸한 맛을 풍긴다. 편액은 우암(尤庵) 송시열의 글씨이다.[14]

3. 2. 청절당

청절당은 유생들의 강학 공간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집이다. 옛 진원현 객사를 옮겼다고 한다. 강당 청절당 편액은 동춘당(同春堂) 송준길의 글씨이다. 『청절당(淸節堂)』이란 이름은 우암 송시열이 쓴 하서 선생 『신도비명』 중 '청풍대절(淸風大節)'이라는 구절에서 인용한 것이다.

처마 밑의 사액 현판 필암서원(筆巖書院)은 병계(屛溪) 윤봉구의 글씨이다.[15]

청절당 내에는 백록동(白鹿洞) 학규(學規), 정조대왕의 어제(御製) 사제문(賜祭文), 문묘종사(文廟從祀) 반교문(頒敎文)·교서(敎書)·정조대왕 전교(傳敎)등의 편액이 걸려 있다.

또 제봉 고경명, 송강 정철, 중봉 조헌, 서경 유근, 반항당 홍천경(洪千璟), 석주 권필, 청음 김상헌, 추담 김우급(金友伋), 삼연 김창흡, 유하 김진옥(金鎭玉), 병계 윤봉구, 초천 김시찬(金時粲), 일재 어윤중 등의 시판(詩板)도 걸려 있다.[15]

3. 3. 경장각

청절당 앞에는 일반 서원과 어울리지 않는 화려함이 가득한 3칸의 『경장각(敬藏閣)』 건물이 있는데, 정조하서 김인후문묘에 종사하면서 내려 보낸 내탕금으로 세워졌다. 이곳에는 인종이 세자 시절 손수 그려 하서 김인후에게 하사한 「묵죽(墨竹)」 그림의 판각(板刻)을 보관하고 있다. 이 「묵죽도(墨竹圖)」는 훗날 하서 선생의 높은 절의(節義)를 표시하는 상징물이 되었다. 편액은 정조의 어필(御筆)로 벌레 등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망이 쳐져 있다.

주심포식 팔작지붕으로 귀공포와 네모서리 중 전면 좌우와 후면 우측 처마도리에는 여의주를 문 용과 양 곁에 봉황이 조작되어 있고, 한양을 향하는 후면 좌측 처마도리에는 용이 없고 봉황 3마리가 조각되어 있다. 용머리와 국화문(菊花紋)을 조각한 것도 어제(御製) 「묵죽(墨竹)」을 보관하기 때문이라 한다.

3. 4. 우동사

경장각을 지나 내삼문 안으로 들어가면 제향 공간인 우동사(祐東祠)가 있다. 중앙 북벽에 하서 김인후의 신위가 봉안되어 있고, 동벽에 고암(鼓巖) 양자징/梁子澂중국어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17] 「우동(祐東)」의 의미는 송시열의 「신도비명」에 「하늘이 우리 동방(東方)을 도와(祐) 하서 김선생을 종생하게 하였다.」의 뜻이다.[17] 편액은 주자의 글씨를 집자하였다.[17]

3. 5. 장판각

동쪽 토담 밖에는 유생들의 학습을 위한 책을 인쇄하기 위한 목판을 보관하는 장판각이 있다. 이곳에는 하서전집 649판, 초서천자문 18판, 해자무이구곡 18판, 백련초해 13판 등 목판 700여 매를 보관하고 있다.[18]

3. 6. 기타 시설

장판각 옆 동쪽에 서원을 관리하는 노비(奴婢)의 우두머리가 거처하는 한장사(汗丈舍)가 장판각과 나란히 위치해 있다. 우동사로 들어가는 내삼문 서쪽에는 춘·추향 제례를 준비하는 전사청(奠祀廳)이 있다. 청절당 강당 서쪽 담장 너머 별도 공간에 작은 마당 둘레의 민도리집 양식 건물들이 있는데, 이곳은 서원을 관리하는 수호인(守護人)이 거처하는 고직사(庫直舍)이다. 고직사는 직사(直舍)・창고(倉庫)・행랑(行廊)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의를 갖추어 경의를 표하는 신성한 장소임을 알리는 붉은 칠을 한 문 홍살문(紅살門)이 서원 정면에 세워져 있다. 옆에는 하마석(下馬石)이 설치되어 있다.

4. 배향 인물


  • 주향(主享) : 하서 김인후
  • 종향(從享) : 고암 양자징/楊子澄중국어


하서 김인후는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로 호남을 대표하는 유학자이다. 동국 18현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인종과의 각별한 관계를 맺었으며, 도학과 절의를 겸비한 인물로 칭송받았다.

고암 양자징/楊子澄중국어은 하서 김인후의 제자이자 사위이다.

4. 1. 하서 김인후

하서 김인후는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로 호남을 대표하는 유학자이다. 동국 18현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인종과의 각별한 관계를 맺었으며, 도학과 절의를 겸비한 인물로 칭송받았다.

4. 2. 고암 양자징

고암 양자징/楊子澄중국어은 하서 김인후의 제자이자 사위이다.

5. 봉향 의례

김인후의 학덕을 기리는 『춘향제(春享祭)』와 『추향제(秋享祭)』가 매년 음력 2월과 8월 중정일(中丁日)에 각 기관, 사회단체, 유림, 주민들의 참여하에 봉행되고 있다.

6. 관련 문화재

필암서원은 유네스코 세계 유산인 한국의 서원 중 하나이다. 대한민국의 사적 제242호로 지정되었다. 국립광주박물관에는 보물 제587호인 필암서원 문적 일괄이 소장되어 있다. 장성 필암서원 하서선생문집목판장성 필암서원 하서유묵목판일괄은 각각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15호와 제216호로 지정되어 있다.

7. 현대적 활용

7. 1. 주변 정비 사업

장성군에서는 1999년부터 ‘필암서원 주변 정비사업’을 추진하여 2008년 원진각(元眞閣)과 삼연정(三然亭)을 준공하였다. 2010년에는 집성관(集成舘)을 준공하고, 그 안에 선비체험 프로그램 시설인 진덕원(進德院)과 숭의관(崇義館) 등을 갖추었다. 원진각(元眞閣)이라는 명칭은 정조가 감탄했다는 하서 선생의 시 《중니원기자양진》(仲尼元氣紫陽眞)이라는 시구의 ‘원(元)’자와 ‘진(眞)’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유물 전시관에는 양영재단과 하서학술재단에서 기증한 하서 선생 유물 29종 3천 7백여 점 가운데 국가지정 보물 제587호 『노비보』와 『봉심록』, 『상징필』, 『현판』, 『앞다지』 등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이 전시물은 하서 선생의 생애와 학문 세계를 알 수 있는 자료들이다.

서원 내 교육 공간인 진덕재와 숭의재가 비좁고 낡아 2008년부터 2년여 간의 공사 기간을 거쳐 집성관(集成舘)을 준공하여 평생교육센터로 이용하고 있다. 이곳에는 청소년・유림들의 한학 교육 및 선비 체험 교육 공간 목적 등의 진덕원(進德院)과 숭의관(崇義館) 등이 갖추어져 있다. 집성관 1층에는 회의실·다도실·예절교실·서예실·교육실·숙소 등이, 지하 1층에는 식당·체력단련실·휴게실 등이 마련되어 있다.

이곳 평생교육센터는 장성군이 대한민국 청렴 교육의 메카로 만들겠다는 의지로 지은 것으로, 현재 전국 지자체나 기관·단체의 예약을 받아 주 2~3회 청렴교육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7. 2. 청렴 교육의 메카

장성군은 필암서원을 대한민국 청렴 교육의 메카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서원 내 교육 공간을 확충했다. 기존의 진덕재와 숭의재가 비좁고 낡아, 2008년부터 2년여 간의 공사 기간을 거쳐 집성관(集成舘)을 준공하여 평생교육센터로 이용하고 있다.

집성관에는 청소년과 유림들의 한학 교육 및 선비 체험 교육 공간인 진덕원(進德院)과 숭의관(崇義館) 등이 갖추어져 있다. 집성관 1층에는 회의실, 다도실, 예절교실, 서예실, 교육실, 숙소 등이, 지하 1층에는 식당, 체력단련실, 휴게실 등이 마련되어 있다.

현재 이곳 평생교육센터는 전국 지자체나 기관, 단체의 예약을 받아 주 2~3회 청렴 교육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8. 역사적 가치와 의의

그리 높지 않은 문장산(文章山)[19]이 뒤를 감싸고, 앞에는 문필천(文筆川)이 흐르고 있는 평지에 자리 잡은 필암서원은 교육과 학문 수련의 공간을 앞쪽에, 선현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공간을 뒤쪽에 배치한 전학후묘(前學後廟)의 전형적인 서원 배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서원이다.[20] 호남 유학의 본산(本山)이며, 호남 사림들의 기풍 진작과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고 있다.

학문(문장)으로는 장성만 한 곳이 없다.』는 『문불여 장성(文不如 長城)』의 근원이며, 장성에 가서 글자랑 하지 말라는 연유이기도 하다. 1864년(고종 1)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고, 피해를 면한 서원이다. 일제강점기나 6·25 사변 때에도 피해를 면한 서원으로, 옛 규모를 잘 간직하고 있다.

조선시대 서원의 주요 기능인 '교육'과 '제향'이 균형을 이루던 시기에 조성된 건물로 서원 건축의 기본 구조를 모두 갖추고 있는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어, 조선 시대 서원 공간의 꾸밈새를 연구하는데 역사적・학술적으로 귀중한 사적지가 되고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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