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양 (후한 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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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양은 후한 영제 시기 권력을 휘두른 십상시의 수장이었다. 그는 조등의 휘하 내시로 시작하여 조절, 왕보, 후람 등과 함께 권세를 누렸으며, 황건적의 난 당시 장균을 모함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고, 하진을 암살하는 등 권력 유지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하진 암살 이후 조조, 원소 등이 궁궐을 공격하자 소제와 헌제를 데리고 도주하다가 자살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도 십상시의 리더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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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상시 - 곽승 (후한)
후한 영제 시대 십상시 중 한 명인 곽승은 황제의 총애를 받아 권세를 누리고 사리사욕을 채웠으나, 십상시의 난 때 하진 암살 시도에 연루되어 살해당했다. - 십상시 - 하운
후한 영제 시대의 환관 하운은 십상시 중 한 명으로 권력을 누렸으며, 장균의 탄핵 대상이 되고 환관 여강을 모함해 죽이는 등 부정부패를 일삼았고, 동태후와 깊은 관계를 맺고 사복을 채웠다는 기록이 있다. - 189년 사망 - 후한 영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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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양 (후한 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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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로마자 표기 | Jang Rang |
출생 | 양가 4년 (135년) |
출신지 | 영천군 |
사망 | 광희 원년 (189년) |
사망지 | 뤄양 |
직업 | 중상시 |
관직 | |
주요 활동 시기 | 환제 → 영제 → 소제변 → 헌제 시대 |
2. 생애
십상시의 난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영제 때 국정을 어지럽히던 십상시(十常侍)의 수장으로 영제가 그를 아버지라 불렀다고 한다. 어린 시절 환관이 되면서 조등에 의해 키워졌고 장성해서도 조등의 휘하 내시였다. 그 후 조등이 죽은 후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젊은 시절, 조충과 함께 급사중의 지위에 있었고, 환제 시대에 소황문이 되었다. 영제 시대에는 조충과 함께 중상시가 되었고, 조절·왕보/王甫중국어·후람 등과 함께 권세를 누리며 황제의 총애를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채웠다. 우부풍 사람인 맹타(맹달의 아버지)라는 인물은 환관에게 뇌물을 보내 량주자사의 지위를 얻었다고 하는데, 그 환관이 바로 장양이다.
169년, 후람과 함께 제2차 당고의 옥 등을 일으켰다.
후람이 자결하고, 왕보가 형사했으며, 조절도 광화 4년(181년)에 병사하자, 장양이 조충과 함께 환관 세력의 중심이 되었다. 장양은 영제에게 우리 아버지라고 불리며 숭배받았다. 이 시기에 중상시로 임명된 12명의 환관(십상시) 중에 장양의 이름도 올라 있었고, 그들은 모두 열후에 봉해졌으며, 일족을 각지의 지방관에 임명하여 영광을 누렸다고 한다.
중평 원년(184년), 태평도의 교주 장각이 난을 일으키자(황건적의 난), 낭중 장균 (동한)/張鈞 (東漢)중국어은 십상시가 난의 원인이라며 그들을 베어 천하에 사죄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십상시들은 영제에게 자신들의 처벌을 간청함과 동시에 각지의 지방관인 일족을 파면시키고, 더 나아가 사재를 국고에 제공했기 때문에 불문에 부쳐졌다. 그 후, 장양 등은 곧바로 장균을 황건당의 내통자라고 참언하여 죽음에 이르게 했다. 그러나, 사실 장양 등 십상시야말로 황건당과의 내통자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상시 봉서/봉서중국어, 서봉/서봉중국어가 황건당의 내통자임이 발각되자, 더 나아가 왕윤은 장양이야말로 사실 태평도의 신자임을 폭로한 뒤, 영제에게 처분을 요구했다. 격노한 영제에게 장양은 이미 사망한 왕보와 후람에게 책임을 전가했으며, 또 다시 처벌을 면했다. 그리고 그 후, 즉시 왕윤을 참언하여 면직시켰다. 또한 환관을 비판한 채옹도 면직시켰다.
중평 2년(185년), 궁궐에 화재가 발생하여 수리를 위해 각지에서 세금을 추징하게 되었는데, 장양 등은 이를 착복하여 사리사욕을 채웠기 때문에 궁궐은 다음 해에도 완성되지 않았고, 부담에 시달리는 지방의 태수와 백성들의 원한을 샀다.
대장군 하진이 자신들을 죽이려 하자 하태후(何太后)를 찾아가, 하진에게 입궁하게 하였고 아무것도 모른체 입궁한 하진은 상방감 거목에게 살해당하였다.(189년 9월 22일(음력 8월 25일))
그러나 이에 분노한 하진의 부하 조조·원소·원술·오광 등의 군사가 궁궐로 난입하여 환관들을 무참하게 죽였다.(→십상시의 난)
이에 동료 단규·조절·후람과 함께 황제 소제와 진류왕 유협을 데리고 도주하지만 곧 하남 중부연리 민공이 추격해오자 황하 강에 뛰어들어 자살했다.
광희 원년(189년), 영제가 죽고 유변이 즉위하자, 환관을 적대시하는 외척의 하진과 대립했다. 영제의 생모 동태후와 친했던 견석이 하씨를 제거하려 하자, 십상시는 견석과 내통했으나, 최종적으로는 하씨에게 붙어 하진에게 견석을 살해하게 하고, 동태후와 동중을 실각시켰다.
그러나 하진이 십상시마저 제거하려는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자, 유변의 생모 하태후(하진의 이복 여동생)와 하묘(하태후의 이복 형)를 아군으로 삼아 이에 저항하려 했다. 또한, 하진은 십상시와 하태후의 권력에 대항하기 위해 지방에서 군권을 쥐고 있던 동탁과 정원을 불러들여 군사력으로 굴복시키려 했다. 이 때문에 장양 등 십상시는 하진을 가짜 조칙으로 불러 암살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 후의 군권 장악에 실패했다. 이 일로 오광, 원소, 원술 등이 궁정에 난입하여 조충 등 환관의 대부분을 살해했기 때문에, 장양과 단규 등 일부 환관은 황제와 그 동생 진류왕(유협, 후의 헌제)을 옹립하고 성 밖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오광, 노식의 추격을 받게 되자, 진퇴양난에 빠진 장양은 입수자살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도 십상시의 리더격 환관으로 등장하며, 거의 비슷한 최후를 맞이하여 하남 중부 연의 민공중국어에 의해 그 수급이 거론되었다.
2. 1. 초기 생애
젊은 시절, 조충과 함께 급사중의 지위에 있었고, 환제 시대에 소황문이 되었다. 영제 시대에는 조충과 함께 중상시가 되었고, 조절·왕보/王甫중국어·후람 등과 함께 권세를 누리며 황제의 총애를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채웠다. 우부풍 사람인 맹타(맹달의 아버지)라는 인물은 환관에게 뇌물을 보내 량주자사의 지위를 얻었다고 하는데, 그 환관이 바로 장양이다.후람이 자결하고, 왕보가 형사했으며, 조절도 광화 4년(181년)에 병사하자, 장양이 조충과 함께 환관 세력의 중심이 되었다. 장양은 영제에게 우리 아버지라고 불리며 숭배받았다. 이 시기에 중상시로 임명된 12명의 환관(십상시) 중에 장양의 이름도 올라 있었고, 그들은 모두 열후에 봉해졌으며, 일족을 각지의 지방관에 임명하여 영광을 누렸다고 한다.
2. 2. 권력 장악
영제 때 국정을 어지럽히던 십상시(十常侍)의 수장으로 영제가 그를 아버지라 불렀다고 한다. 어린 시절 환관이 되면서 조등에 의해 키워졌고 장성해서도 조등의 휘하 내시였다. 그 후 조등이 죽은 후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젊은 시절, 조충과 함께 급사중의 지위에 있었고, 환제 시대에 소황문이 되었다. 영제 시대에는 조충과 함께 중상시가 되었고, 조절·王甫 (東漢)중국어·후람 등과 함께 권세를 누리며 황제의 총애를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채웠다. 우부풍 사람인 맹타(맹달의 아버지)라는 인물은 환관에게 뇌물을 보내 량주자사의 지위를 얻었다고 하는데, 그 환관이 바로 장양이다.
169년, 후람과 함께 제2차 당고의 옥 등을 일으켰다. 후람이 자결하고, 왕보가 형사했으며, 조절도 광화 4년(181년)에 병사하자, 장양이 조충과 함께 환관 세력의 중심이 되었다. 장양은 영제에게 우리 아버지라고 불리며 숭배받았다. 이 시기에 중상시로 임명된 12명의 환관(십상시) 중에 장양의 이름도 올라 있었고, 그들은 모두 열후에 봉해졌으며, 일족을 각지의 지방관에 임명하여 영광을 누렸다고 한다.
중평 원년(184년), 태평도의 교주 장각이 난을 일으키자(황건적의 난), 낭중 張鈞 (東漢)중국어은 십상시가 난의 원인이라며 그들을 베어 천하에 사죄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십상시는 영제에게 자신들의 처벌을 간청함과 동시에 각지의 지방관인 일족을 파면시키고, 더 나아가 사재를 국고에 제공했기 때문에 불문에 부쳐졌다. 그 후, 장양 등은 곧바로 장균을 황건당의 내통자라고 참언하여 죽음에 이르게 했다. 그러나, 사실 장양 등 십상시야말로 황건당과의 내통자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상시 封諝중국어, 徐奉중국어가 황건당의 내통자임이 발각되자, 더 나아가 왕윤은 장양이야말로 사실 태평도의 신자임을 폭로한 뒤, 영제에게 처분을 요구했다. 격노한 영제에게 장양은 이미 사망한 왕보와 후람에게 책임을 전가했으며, 또 다시 처벌을 면했다. 그리고 그 후, 즉시 왕윤을 참언하여 면직시켰다. 또한 환관을 비판한 채옹도 면직시켰다.
중평 2년(185년), 궁궐에 화재가 발생하여 수리를 위해 각지에서 세금을 추징하게 되었는데, 장양 등은 이를 착복하여 사리사욕을 채웠기 때문에 궁궐은 다음 해에도 완성되지 않았고, 부담에 시달리는 지방의 태수와 백성들의 원한을 샀다.
대장군 하진이 자신들을 죽이려 하자 하태후(何太后)를 찾아가, 하진에게 입궁하게 하였고 아무것도 모른체 입궁한 하진은 상방감 거목에게 살해당하였다.(189년 9월 22일(음력 8월 25일)) 그러나 이에 분노한 하진의 부하 조조·원소·원술·오광 등의 군사가 궁궐로 난입하여 환관들을 무참하게 죽였다.(→십상시의 난) 이에 동료 단규·조절·후람과 함께 황제 소제와 진류왕 유협을 데리고 도주했지만 곧 하남 중부연리 민공이 추격해오자 황하 강에 뛰어들어 자살했다.
2. 3. 황건적의 난과 연루
젊은 시절, 조충과 함께 급사중의 지위에 있었고, 환제 시대에 소황문이 되었다. 영제 시대에는 조충과 함께 중상시가 되었고, 조절·왕보 (동한)/王甫 (東漢)중국어·후람 등과 함께 권세를 누리며 황제의 총애를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채웠다. 우부풍 사람인 맹타(맹달의 아버지)라는 인물은 환관에게 뇌물을 보내 량주자사의 지위를 얻었다고 하는데, 그 환관이 바로 장양이다.후람이 자결하고, 왕보가 형사했으며, 조절도 광화 4년(181년)에 병사하자, 장양이 조충과 함께 환관 세력의 중심이 되었다. 장양은 영제에게 우리 아버지라고 불리며 숭배받았다. 이 시기에 중상시로 임명된 12명의 환관(십상시) 중에 장양의 이름도 올라 있었고, 그들은 모두 열후에 봉해졌으며, 일족을 각지의 지방관에 임명하여 영광을 누렸다고 한다.
중평 원년(184년), 태평도의 교주 장각이 난을 일으키자(황건적의 난), 낭중 장균 (동한)/장균 (동한)중국어은 십상시가 난의 원인이라며 그들을 베어 천하에 사죄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십상시들은 영제에게 자신들의 처벌을 간청함과 동시에 각지의 지방관인 일족을 파면시키고, 더 나아가 사재를 국고에 제공했기 때문에 불문에 부쳐졌다. 그 후, 장양 등은 곧바로 장균을 황건당의 내통자라고 참언하여 죽음에 이르게 했다. 그러나, 사실 장양 등 십상시야말로 황건당과의 내통자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상시 봉서/봉서중국어, 서봉/서봉중국어가 황건당의 내통자임이 발각되자, 더 나아가 왕윤은 장양이야말로 사실 태평도의 신자임을 폭로한 뒤, 영제에게 처분을 요구했다. 격노한 영제에게 장양은 이미 사망한 왕보와 후람에게 책임을 전가했으며, 또 다시 처벌을 면했다. 그리고 그 후, 즉시 왕윤을 참언하여 면직시켰다. 또한 환관을 비판한 채옹도 면직시켰다.
2. 4. 몰락
십상시의 난을 일으킨 장본인이다.대장군 하진이 자신들을 죽이려 하자 하태후(何太后)를 찾아가, 하진에게 입궁하게 하였고 아무것도 모른체 입궁한 하진은 상방감 거목에게 살해당하였다.(189년 9월 22일(음력 8월 25일))
그러나 이에 분노한 하진의 부하 조조·원소·원술·오광 등의 군사가 궁궐로 난입하여 환관들을 무참하게 죽였다.(→십상시의 난)
이에 동료 단규·조절·후람과 함께 황제 소제와 진류왕 유협을 데리고 도주하지만 곧 하남 중부연리 민공이 추격해오자 황하 강에 뛰어들어 자살했다.
광희 원년(189년), 영제가 죽고 유변이 즉위하자, 환관을 적대시하는 외척의 하진과 대립했다. 영제의 생모 동태후와 친했던 견석이 하씨를 제거하려 하자, 십상시는 견석과 내통했으나, 최종적으로는 하씨에게 붙어 하진에게 견석을 살해하게 하고, 동태후와 동중을 실각시켰다.
그러나 하진이 십상시마저 제거하려는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자, 유변의 생모 하태후(하진의 이복 여동생)와 하묘(하태후의 이복 형)를 아군으로 삼아 이에 저항하려 했다. 또한, 하진은 십상시와 하태후의 권력에 대항하기 위해 지방에서 군권을 쥐고 있던 동탁과 정원을 불러들여 군사력으로 굴복시키려 했다. 이 때문에 장양 등 십상시는 하진을 가짜 조칙으로 불러 암살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 후의 군권 장악에 실패했다. 이 일로 오광, 원소, 원술 등이 궁정에 난입하여 조충 등 환관의 대부분을 살해했기 때문에, 장양과 단규 등 일부 환관은 황제와 그 동생 진류왕(유협, 후의 헌제)을 옹립하고 성 밖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오광, 노식의 추격을 받게 되자, 진퇴양난에 빠진 장양은 입수자살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도 십상시의 리더격 환관으로 등장하며, 거의 비슷한 최후를 맞이하여 하남 중부 연의 민공중국어에 의해 그 수급이 거론되었다.
3. 삼국지연의에서의 장양
《삼국지연의》에서의 장양은 정사의 내용과 같다.
하지만 「연의」에 기록된 십상시는 10명이지만, 「정사」에 기록된 십상시는 12명이다. 또한 사람들의 이름 또한 모두 차이가 있다.
4. 가계
5.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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