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전투비행단 외자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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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전투비행단(JG 1)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 공군의 전투기 부대였다. 1939년 5월 제130 전투비행단 제1비행단으로 시작하여, 1940년 프랑스 침공 직전 해체되었다가 북해 연안 방어를 위해 재창설되었다. 주요 임무는 북해 해안의 항공 엄호였으며, 초기에는 메서슈미트 Bf 109, 이후 포케불프 Fw 190, 하인켈 He 162 제트 전투기 등을 운용했다. 헬골란트 만 해전, 프랑스 전투, 제국 방공전, 노르망디 상륙 작전 등 다양한 작전에 참여했으며, 1945년 종전과 함께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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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전투비행단 외자우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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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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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속 기간 | 1939년–1945년 |
국가 | 나치 독일 |
소속 | 독일 국방군 공군 |
병과 | 전투기 |
종류 | 제공권 공세적 대공전 |
규모 | 공군 비행단 |
별칭 | 외자우 |
마스코트 | 발터 외자우 |
장비 | 메서슈미트 Bf 109 포케불프 Fw 190 하인켈 He 162 |
장비 종류 | 전투기 |
해체일 | 1945년 5월 4일 |
지휘관 | |
주요 지휘관 | 한스 필리프 헤르만 그라프 발터 외자우 하인츠 베어 헤르베르트 이흘레펠트 |
참전 | |
주요 전투 | 제2차 세계 대전 독일 본토 방공전 보텐플라테 작전 |
관련 비행단 | |
전투비행단 명칭 | JG 1 외자우 JG 2 리히트호펜 JG 3 우데트 JG 5 아이즈미어 JG 6 호르스트 베셀 JG 7 노보트니 JG 26 슐라게터 JG 27 아프리카 JG 51 묄더스 JG 53 피크 아즈 JG 54 그뤼헤르츠 JG 77 헤르츠 아즈 JG 134 호르스트 베셀 JG 142 호르스트 베셀 JG 234 슐라게터 |
전투비행단 서수 | JG 4 JG 11 JG 20 JG 21 JG 25 JG 28 JG 50 JG 52 JG 70 JG 71 JG 72 JG 76 JG 80 JG 130 JG 131 JG 132 JG 133 JG 135 JG 136 JG 137 JG 138 JG 141 JG 143 JG 144 JG 231 JG 232 JG 233 JG 300 JG 301 JG 302 JG 331 JG 333 JG 334 JG 400 JG 433 |
훈련 비행단 | JG 101 JG 102 JG 103 JG 104 JG 105 JG 106 JG 107 JG 108 JG 109 JG 110 JG 111 JG 112 JG 113 JG 114 JG 115 JG 116 JG 117 |
야간전투비행단 | NJG 1 NJG 2 NJG 3 NJG 4 NJG 5 NJG 6 NJG 7 NJG 11 NJG 100 NJG 101 NJG 102 NJG 200 |
중전투비행단 | ZG 1 ZG 2 ZG 26 호르스트 베셀 ZG 52 ZG 76 ZG 101 ZG 141 ZG 142 호르스트 베셀 ZG 143 ZG 144 |
폭격비행단 | KG 1 KG 2 KG 3 KG 4 KG 6 SKG 10 KG 25 KG 26 KG 27 KG 28 KG 30 KG 40 KG 50 KG 51 KG 53 KG 54 KG 55 KG 60 KG 66 KG 76 KG 77 KG 100 KG 101 KG 102 KG 152 KG 153 KG 154 KG 155 KG 157 KG 158 KG 200 SKG 210 KG 252 KG 253 KG 254 KG 255 KG 257 KG 355 |
급강하폭격비행단 | StG 1 StG 2 이멜만 StG 3 StG 5 StG 51 StG 76 StG 77 StG 101 StG 102 StG 151 StG 160 StG 162 StG 163 StG 165 StG 167 StG 168 |
공격비행단 | SG 1 SG 2 이멜만 SG 3 SG 4 SG 6 SG 9 SG 10 SG 77 SG 101 SG 102 SG 103 SG 104 SG 111 SG 151 SG 152 |
교도비행단 | LG 1 LG 2 LG 3 |
수송비행단 | TG 1 TG 2 TG 3 TG 4 TG 5 TG 172 |
공수비행단 | LlG 1 LlG 2 |
정찰비행단 | AG 11 AG 12 AG 13 AG 101 AG 102 AG 103 |
기사십자 철십자장 수훈자 | |
수훈자 | 빌헬름 발타자르 게오르크페터 에더 한스 에흘러스 알프레트 그리슐라프스키 로베르트 올레이니크 안톤루돌프 피퍼 카를알프레트 슈마허 레오 슈흐마허 |
주석 | : JG 2에서 기사십자 수훈}} : JG 52에서 기사십자 수훈}} |
2. 편성 역사
제2차 세계 대전 중 루프트바페의 조직을 따라, 제1전투비행단(JG 1)은 일반적인 비행단(독일어: Geschwaderde)의 표준적인 루프트바페 조직 구조를 따랐다. 비행단은 비행단장(독일어: Geschwaderkommodorede)이 지휘했으며, 이는 미국 육군 항공대(USAAF)의 비행단장이나 영국 공군(RAF)의 그룹 캡틴에 해당한다. 비행단장은 보통 중령(Oberstleutnant) 또는 대령(Oberst) 계급이었으나, 때로는 더 낮은 계급의 장교가 맡기도 했다.
초기 대부분의 루프트바페 전투기 비행단처럼 JG 1도 3개의 집단(독일어: Gruppede)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는 USAAF의 그룹 또는 RAF의 윙에 해당한다. 집단은 로마 숫자로 식별되었다(예: I./JG 1). 1942년, JG 1은 4번째 집단을 통합하여 확장된 최초의 부대가 되었으며, 이는 다른 루프트바페 전투기 비행단들이 1943년 중반부터 4개 집단 체제를 도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각 집단은 보통 3~4개의 비행대(독일어: Staffelnde)로 구성되었고, 숫자로 식별되었다(예: 3./JG 1). 각 비행대는 하위 본부 편대(독일어: Stabschwarmde)를 두었다. 12~16대의 항공기로 구성된 비행대는 일반적으로 4대의 항공기로 이루어진 3~4개의 편대(독일어: Schwärmede)로 나뉘어 "손가락 4개 대형"으로 비행했다. 비행대 지휘관(독일어: Staffelkapitände)은 보통 선임 중위(Oberleutnant) 또는 대위(Hauptmann) 계급이었다. 비행대의 편대는 "빨강", "파랑", "노랑", "녹색"으로 색상 코드가 부여되었다.
비행단 본부 부대(독일어: Geschwaderstabde)는 전체 비행단의 본부 편대 역할을 했으며, 각 집단 수준에도 본부 부대가 존재했다. JG 1이 예버에서 재편성될 당시, 초기에는 크릭스마리네(독일 해군)의 대공포 및 신호 부대와의 조정을 위해 1939년 11월 30일 지역 전투기 사령부(독일어: Jagdfliegerführer 2de)로 구성되었다. 이 해안 방어 사령부는 카를-아우구스트 슈마허 중령의 지휘 아래 있었다. JG 1의 비행단 본부 부대(Stab./JG 1)는 JG Nord 또는 JG Schumacher라는 별칭으로도 불렸으며, Bf 109 D형과 E형으로 장비되었다.
2. 1. 창설과 초기 활동 (1939년 ~ 1942년)
1939년 5월, 독일 공군의 편성이 변경되면서 많은 부대가 재지정되고 지휘부 명칭이 변경되었다. 이 과정에서 제130 전투비행단(JG 130) 제1 비행단(I. ''Gruppe'')은 제1 전투비행단(I./JG 1)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당시 주요 부대였던 제2 전투비행단 "리히트호펜"(JG 2 "Richthofen")은 이 명칭을 원했으나, "2순위"로 남게 되었다.그러나 1940년 5월 7일, 프랑스와 저지대 국가 침공 직전에 제1 전투비행단 제1 비행단은 제27 전투비행단(JG 27)에 통합되어 제27 전투비행단 제3 비행단(III./JG 27)으로 개칭되었다. 이로 인해 제1 전투비행단은 일시적으로 해체되었다. 7개월 후인 1940년 12월 7일, 북해 연안에 주둔하던 여러 방어 부대를 기반으로 예버에서 새로운 제1 전투비행단 제1 비행단(I./JG 1)이 창설되었다.
재창설된 제1 전투비행단의 주요 임무는 북해 해안의 광대한 지역에 대한 항공 엄호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초대 지휘관은 카를-아우구스트 슈마허 중령이었으며, 작전 지역은 네덜란드에서 남부 노르웨이까지 포함했다. 1942년 1월 5일, 슈마허 중령은 제5 항공함대의 전투기 부대 지휘관(''Jagdfliegerführer Norwegen'')으로 임명되면서 에리히 폰 젤레 소령에게 지휘권을 넘겨주었다.
2. 2. 재편성과 제국 방공전 (1943년 ~ 1944년)
제2전투비행단과 유사하게, 제1전투비행단은 1943년 3월 31일 제11전투비행단 (JG 11)이라는 새로운 부대를 창설하는 데 기여했다. 제1전투비행단의 I. 및 II. ''전투단''은 제11전투비행단으로 이전되었고, IV. ''전투단''은 I./JG 1로 재지정되었다. 새로운 III. ''전투단''은 네덜란드 레우와르덴에서 카를하인츠 레스만 소령의 지휘 아래 창설되었다.새롭게 재편된 제1전투비행단은 딜렌으로 이동하여 당시 점령 하에 있던 네덜란드 영토를 보호하는 임무를 맡았다. 한편, 제11전투비행단은 네덜란드와 덴마크 사이의 북부 독일 국경을 방어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비행단장은 에리히 믹스에서 한스 필리프 소령으로 교체되었다. 1943년 중반까지 제1전투비행단은 ''제국 항공대''를 형성하게 된 ''공군지휘본부 미테''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2. 3. 종전과 해체 (1945년)

1944년 말, 아르덴 대공세가 시작되면서 제1전투비행단은 루프트바페의 일원으로 서부 전선에 투입되었다. 악천후 속에서도 근접 항공 지원 임무를 수행하려 했으나, 미국 제9공군과의 교전에서 큰 손실을 입었다. 연합군의 압도적인 공군력 앞에서 제공권 확보는 어려웠다. 12월 18일, 비행단은 몬쇼와 말메디 근처 전투 지역에서 제6 기갑군을 엄호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2월 23일에는 미국 제8공군의 폭격 작전에 맞서 P-47 2대와 B-17 1대를 격추했지만, Fw 190 6대를 잃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III./JG 1은 영국 공군 폭격기 요격을 시도했으나 캐나다 공군 스핏파이어의 저지로 에리히 보이트케 대대장 등 조종사 2명을 잃었다.
제1전투비행단은 제3전투비행단과 함께 아르덴 상공에서 467 폭격 비행단 소속 B-24 폭격기들을 요격하여 479 전투 비행단의 P-51 전투기들이 도착하기 전에 여러 대를 격추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어진 공중전에서 독일 전투기 14대가 격추되었고, 제1전투비행단은 편대 지휘관을 포함해 8명의 사상자를 냈다. 12월 26일 바스토뉴 공방전 중 독일 지상군 엄호 임무에서도 숙련된 조종사 3명을 포함해 8명의 조종사를 추가로 잃었다. 12월 27일, 한스 엘러스가 이끄는 I./JG 1의 Fw 190 18대는 디낭 근처에서 364 전투 비행단 소속 P-51에게 요격당해 6대를 잃었고, 엘러스 자신도 전사했다. 이날 제1전투비행단은 총 14명의 조종사가 사상 또는 실종되었으며, 최소 7명이 사망했다. I./JG 1은 호위 임무를 수행하던 III./JG 3 Bf 109가 연합군의 방공 풍선으로 인해 퇴각해야 했기 때문에 피해를 입었고, Fw 190은 약 121.92m의 낮은 고도에서 취약해졌다. 엘러스의 후임인 게오르크 하크바르트 대위 역시 며칠 만인 12월 31일 전사했다.
1945년 1월 1일, 독일 공군 최고 사령부(OKL)는 전세를 뒤집기 위해 보덴플라테 작전을 개시했다. 제1전투비행단은 겐트/신트데니스베스트럼, 말데겜, 우르셀 공군 기지 공격 명령을 받았다. 헤르베르트 이힐펠트 중령이 비행단을 지휘했으며, Stab(본부 편대), I./JG 1, II./JG 1은 Fw 190을, III./JG 1은 Bf 109를 운용했다. 작전 시작부터 I./JG 1은 아군 대공포 오인 사격으로 4대의 Fw 190과 조종사 3명을 잃는 등 불운을 겪었다. I./JG 1과 II./JG 1은 치열한 공중전에 휘말렸고, III./JG 1은 목표 상공에서 단 1대의 손실만 기록했다(적의 공격 아님). 아군 대공포로 인한 추가 손실도 발생했다. Stab 및 I./JG 1은 Fw 190 13대를 잃고 조종사 9명이 실종(사망 5, 포로 4)되어 인원 39%, 기체 56%의 손실률을 기록했다. III./JG 1은 Bf 109 3대 손실과 조종사 1명 사망, 2명 포로라는 비교적 적은 피해를 입었다. I./JG 1은 말데겜에서 지상 주기된 영국 스핏파이어 30대 파괴와 2대 격추를 주장했지만, 실제 말데겜과 우르셀에서 파괴된 영국 항공기는 총 22대(스핏파이어 15대 포함)였다. II./JG 1은 신트데니스베스트럼 비행장을 공격하여 스핏파이어 2대를 격추하고 지상에서 18대를 파괴했지만, 출격한 Fw 190 36대 중 17대를 잃어 47%의 손실률을 기록했다. 보덴플라테 작전 하루 동안 제1전투비행단은 조종사 25명과 항공기 29대를 잃었다. 이는 상당한 전과에도 불구하고 결코 성공적인 작전이라 할 수 없었다. 손실된 전투기 중 9대만이 스핏파이어와의 공중전에서 격추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영국 공군은 조종사 2명이 사망하고 스핏파이어 약 32대를 잃었다.
보덴플라테 작전 다음 날에도 제1전투비행단은 전투 임무를 수행하다 조종사 4명을 추가로 잃었다. 1945년 1월 14일에는 야크트바페(독일 공군 전투기 부대) 역사상 최악의 날 중 하나를 겪었다. 제1전투비행단은 트벤테 근처에서 영국 공군 전투기와의 교전으로 조종사 12명을 잃었으며, 이 중 7명이 사망했다. 영국 측 손실은 스핏파이어 2대였다. 짙은 안개 속 비행 경험이 부족한 신참 조종사들은 방향을 잃고 비상 착륙하는 경우가 많았다.
1945년 1월, 제1전투비행단은 동부 전선의 북부 집단군 구역인 단치히 근처로 이동했다. 이는 아르덴 전선에서의 심각한 손실과 악화된 상황을 반영하는 조치였다. 이동 직후 귄터 카피토 소령이 지휘에서 해임되고 에밀 데무트 중위가 잠시 지휘를 맡았으며, 4월 12일 베르너 조버 소령이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적군의 동프로이센 공세와 비스툴라-오데르 공세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제1전투비행단은 2월 2일 하일리겐바일 포켓에서 철수해야 했다. 철수는 매우 급하게 이루어져 일부 지상 요원들은 Fw 190 동체 내부에 탑승하여 탈출하기도 했다. 비행단은 2월 중순까지 단치히로 후퇴했다. 이 기간 동안 I./JG 1은 제트기 전환 준비 전까지 주로 크릭스마리네(독일 해군)의 한니발 작전을 지원하는 호송 호위 및 지상 공격 임무를 수행했다.
1945년 2월과 3월, 제1전투비행단의 일부 부대는 He 162 폴크스예거(국민 전투기)로 기종 전환을 시작했다. 3월 20일, OKL은 제1전투비행단 전체에 He 162로 재장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He 162는 BMW 109-003 터보제트 엔진을 탑재하고 MG 151/20 기관포와 MK 108 기관포로 무장한 단거리 요격기였으나, 약 30분이라는 짧은 항속 시간, 불안정한 비행 특성, 구조적 약점 등 여러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조종사들의 반응은 엇갈렸으며, 극도로 민감한 조종성, 미끄러짐 경향, 저속에서의 위험성 등이 지적되었다. 특히 급선회 시 터빈 주변 공기 흐름 제한으로 인한 실속(일반적으로 300 km/h 이하에서 발생), 제트 와류로 인한 방향타 고정 및 스핀 진입 가능성 등이 위험 요소였다. II./JG 1 지휘관 파울-하인리히 데네 대위는 이러한 비행 특성을 간과하고 사출 좌석으로 탈출하려다 캐노피에 목이 부러져 사망하기도 했다.
He 162의 보급은 더디게 진행되었다. 4월 중순 I./JG 1은 10~12대의 운용 가능한 He 162를 보유했지만, II./JG 1은 여전히 기체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II./JG 1은 4월 말에야 8~10대의 He 162를 인도받아 레크 기지로 이동했다. 서부 연합군의 독일 침공과 임박한 베를린 전투로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He 162의 실전 투입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 제1전투비행단에서 He 162로 가장 성공적인 조종사는 B-17 3대 격추 기록을 가진 프리드리히 엔더레 상사였으나, 그 역시 He 162 이륙 중 추락 사고로 사망했다.
1945년 5월 1일, 이힐펠트 중령은 비행단에 아돌프 히틀러의 죽음을 알리고 부대원들을 의무에서 해방시켰다. 대부분의 부대원들은 그의 제안에 따라 영국군이 도착할 때까지 레크에 머물렀다. 3일 후 뤼네부르크 황무지에서의 독일 항복으로 제1전투비행단의 전쟁은 사실상 끝났고, 5월 8일 유럽 전승 기념일과 함께 독일 국방군이 공식적으로 항복하면서 부대는 해체되었다.
3. 조직 구조
제2차 세계 대전 중 루프트바페의 조직 문서를 참고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제1전투비행단(JG 1)의 조직은 루프트바페의 표준적인 비행단(Geschwader) 조직 구조를 따랐다. 부대는 Geschwaderkommodore(비행단장)가 지휘했으며, 이는 미국 육군 항공대(USAAF)의 비행단장이나 영국 공군(RAF)의 대령에 해당한다. 비행단장은 보통 중령(Oberstleutnant) 또는 대령(Oberst) 계급이었으나, 때로는 비교적 낮은 계급의 장교가 임명되기도 했다.
초기 대부분의 루프트바페 전투기 비행단은 3개의 집단(Gruppe)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는 USAAF의 집단 또는 RAF의 비행단에 해당했다. 집단은 로마 숫자로 식별되었고(예: I./JG 1), 1942년 JG 1은 4번째 집단을 통합하여 확장된 최초의 부대가 되었다. 이러한 JG 1의 확장에 영향을 받아 다른 루프트바페 전투기 비행단들도 1943년 중반부터 4번째 집단을 통합하기 시작했다.
각 집단은 보통 3~4개의 비행대(Staffel)로 구성되었고, 아라비아 숫자로 식별되었다(예: 3./JG 1). 각 비행대에는 하위 본부 편대(Stabschwarm)가 있었다. 12~16대의 항공기로 구성된 비행대는 보통 4대의 항공기로 이루어진 3~4개의 편대(Schwarm)로 나뉘어 "손가락 4개 대형"으로 비행했다. 비행대 지휘관(Staffelkapitän)은 보통 상위(Oberleutnant) 또는 대위(Hauptmann) 계급이었다. 비행대의 편대는 "빨강", "파랑", "노랑", "녹색"으로 색상 코드가 부여되었다.
비행단 참모부(Geschwaderstab)는 전체 비행단의 본부 부대 역할을 했다. 집단 수준에도 본부 부대가 있었다. JG 1이 예버에서 재편성될 때, 처음에는 해군(Kriegsmarine) 대공포 및 신호 부대와의 조정을 위해 1939년 11월 30일 지역 전투기 사령부(Jagdfliegerführer 2)로 조직되었다. 이 해안 방어 자율 사령부는 카를-아우구스트 슈마허(Carl-August Schumacher) 중령의 지휘를 받았다. 비행단 참모부 JG 1(Stab./JG 1)은 JG Nord 또는 JG Schumacher라고도 불렸으며, Bf 109 D형 및 E형으로 무장했다.
'''I./JG 1''' (제1집단)은 하나의 지휘 편대(''Gruppenstab'')와 제1, 2, 3 비행대(''Staffel'')로 구성되었다. 프랑스 공방전이 시작된 1940년 5월 10일, I./JG 1은 JG 27의 행정 통제 하에 있었다. 광범위한 작전 후, 이 부대는 1940년 7월 5일 III./JG 27로 재지정되었다. ''Gruppenstab''은 9월 1일에 창설되었으며, 에리히 믹스(Erich Mix) 소령의 지휘를 받았다.
1./JG 1은 1940년 12월 7일 플리싱겐에서 "홀란드" 비행대(''Jasta Holland'')를 개편하여 재창설되었다. 2./JG 1은 1941년 7월 5일 네덜란드 카트베이크에서 제2항공함대의 ''뮌스터-로덴하이드'' 비행대(''Jasta Münster-Loddenheide'')를 기반으로 창설되었고, 3./JG 1은 1941년 3월 1일 데 코이에서 JG 52의 훈련/보충 비행대 일부를 기반으로 창설되었다. 이 세 부대는 1941년 9월까지 독립적으로 운용되다가 에리히 믹스 소령 지휘 하에 I./JG 1으로 통합되었다.
3./JG 1은 시칠리아와 이후 아프리카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1941년 11월 30일 JG 51의 6. 비행대로 재지정되었다. 같은 날 반게로게에서 또 다른 3./JG 1이 창설되었다. 1944년 1월, 18개의 비행대 부대가 I./JG 1 옆에 위치한 도르트문트로 이전되어 I./JG 1 지휘관 루돌프-에밀 슈노르(Rudolf-Emil Schnoor) 소령의 지휘를 받았다. 1944년 8월 15일, JG 77의 9. 비행대가 I./JG 1을 강화하기 위해 이전되어 4./JG 1이 되었다. 1943년 중반부터 이 집단은 독특한 체크 무늬 카울링을 사용했으며, 세 개의 비행대 각각 고유한 색상 조합을 가졌다.
JG 1 부대 | 날짜 | 원 부대 | 위치 | 항공기 유형 |
---|---|---|---|---|
I./JG 1 참모부 | 1941년 9월 1일 | Führer der Jagdkräfte | 예버 | Bf 109 E-4 |
1./JG 1 | 1940년 12월 7일 | Jasta Holland | 카트베이크 및 플리싱겐 | Bf 109 E-4 |
2./JG 1 | 1941년 7월 5일 | Jasta Münster-Loddenheide | 뒤셀도르프 | Bf 109 F-2 |
3./JG 1 | 1941년 3월 1일 | Ergänzungsgruppe/JG 52의 일부 | 데 코이 | Bf 109 E-4 |
4./JG 1 | 1944년 8월 15일 | 9./JG 77 | 오네-오-플랑슈 | 포케불프 Fw 190 A-8 |
'''II./JG 1''' (제2집단)은 1941년 9월 동부 전선에서 독일로 이동하여 휴식과 보급을 받던 한스 폰 한 대위의 JG 3 제1비행단(I./JG 3)이 1942년 1월 15일 카트베이크에서 재지정되면서 창설되었다. 이 부대는 I./JG 3 소속으로 프랑스 공방전과 동부 전선 작전에 참여하여 1941년 9월까지 421대의 적기를 격추하는 전과를 올렸다. II./JG 1은 카트베이크와 플리싱겐에서 해안 방어 및 해상 수송로 보호 임무를 맡았다.
JG 1 부대 | 날짜 | 원 부대 | 위치 | 항공기 유형 |
---|---|---|---|---|
사령부 II./JG 1 | 1942년 1월 15일 | 사령부 I./JG 3 | 카트베이크 | Bf 109 F-4 |
4./JG 1 | 1942년 1월 15일 | 제3전투비행단 제1비행대에서 | 카트베이크 | Bf 109 F-4 |
5./JG 1 | 1942년 1월 15일 | 제3전투비행단 제2비행대에서 | 보엔스드레흐트 | Bf 109 F-4 |
6./JG 1 | 1942년 1월 15일 | 제3전투비행단 제3비행대에서 | 카트베이크 | Bf 109 F-4 |
7./JG 1 | 1944년 8월 15일 | 4./JG 1 | 콩안트르 | Bf 109F |
8./JG 1 | 1944년 8월 15일 | 7./JG 51 | 콩안트르 | Bf 109F |
1944년 초, 제국 항공부(RLM)는 동부 전선에서 추가 부대를 이동시켜 "제국 방어"의 주간 전투기 전력을 강화했다. 1944년 8월 15일, II./JG 1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기지에서 Bf 109 G-6 "구스타프"를 장비한 7./JG 51이 추가되어 4개 비행대로 증강되었다. 이 부대는 1944년 5월 스토르메데에 도착하여 포케불프 Fw 190로 재장비되었으며, 1944년 8월 15일 8./JG 1으로 재지정되었다. 기존의 4./JG 1은 7./JG 1으로 재지정되었다. 이 시점부터 1945년 종전까지 II./JG 1은 사령부 편대, 5., 6., 7., 8. 비행대로 구성되었다.
'''III./JG 1''' (제3집단)은 1942년 1월까지 루프트바페의 많은 전투 비행단이 자체 훈련 그룹(Ergänzungsgruppe)을 만들어 훈련생들이 모 비행단에서 작전 임무를 수행할 준비를 시켰던 배경 하에 창설되었다. 각 훈련 그룹에는 교관과 훈련생으로 구성된 보충 비행대(Einsatzstaffel)가 있었고, III./JG 1은 이러한 보충 비행대에서 형성되었다.
JG 1 부대 | 날짜 | 원 부대 | 위치 | 항공기 종류 |
---|---|---|---|---|
사령부 III./JG 1 | 1942년 2월 6일 | 사령부 보충 그룹/JG 52 | 후줌 | Bf 109 E-7 및 E-8 |
7./JG 1 | 1942년 2월 6일 | Jagdfliegerschule 글라이비츠, 브레슬라우 및 쾨니히스베르크의 Einsatzschwärme | 후줌 | Bf 109 E-7 및 E-8 |
8./JG 1 | 1942년 2월 6일 | Ergänzungsgruppe/JG 27의 Einsatzstaffel | 후줌 | Bf 109 E-7 및 E-8 |
9./JG 1 | 1942년 2월 6일 | Ergänzungsgruppe/JG 52의 Einsatzstaffel | 후줌 | Bf 109 E-7 및 E-8 |
III./JG 1은 1942년 1월 후줌에서 창설되었다. 7./JG 1은 전투기 조종사 학교(Jagdfliegerschule) 글라이비츠, 브레슬라우, 쾨니히스베르크의 보충 편대(''Einsatz-Schwärme'')로 구성되었다. III./JG 1은 1943년 4월 1일에 I./JG 11로 재지정되었으며, 1943년 5월 23일 레우와르덴에서 카를-하인츠 레스만(Karl-Heinz Lessmann) 소령의 지휘 하에 새로운 III./JG 1이 설립되었다. 1944년 8월 15일 I. 집단과 II. 집단에 네 번째 비행대가 추가되면서, 이전 III. 집단의 7. 비행대는 10. 비행대로, 8. 비행대는 11. 비행대로 재지정되었고, 9. 비행대는 원래 명칭을 유지했다.
'''IV./JG 1''' (제4집단)은 III./JG 1과 거의 같은 시기에 다른 비행단의 훈련 비행단(Ergänzungsgruppen)과 훈련 편대(Einsatzstaffeln)를 사용하여 편성되었다.
JG 1 부대 | 날짜 | 원 부대 | 위치 | 항공기 유형 |
---|---|---|---|---|
사령부 IV./JG 1 | 1942년 1월 | JG 53의 사령부 | 반 | Bf 109 E-7, F-1 및 F-2 |
10./JG 1 | 1942년 1월 | Ergänzungsgruppe/JG 2의 1. (Einsatzstaffel) | 반 | Bf 109 E-7, F-1 및 F-2 |
11./JG 1 | 1942년 1월 | Ergänzungsgruppe/JG 26의 1. (Einsatzstaffel) | 반 | Bf 109 E-7, F-1 및 F-2 |
12./JG 1 | 1942년 1월 | Ergänzungsgruppe/JG 51의 1. (Einsatzstaffel) | 반 | Bf 109 E-7, F-1 및 F-2 |
1942년 3월 21일 IV./JG 1은 III./JG 5로 재지정되었다. 같은 날 베르노이헨에서 이전 IV./JG 1의 일부 부대와 제1, 4 전투기 학교의 훈련 편대를 사용하여 재편성되었다. 1943년 4월 1일, 이 두 번째 IV./JG 1은 I./JG 1로 재지정되었다.
JG 1 부대 | 날짜 | 원 부대 | 위치 | 항공기 유형 |
---|---|---|---|---|
사령부 IV./JG 1 | 1942년 3월 15일 | — | 베르노이헨 | Bf 109 E-1, E-3, E-4, E-7, F-1, F-2 및 F-4 |
10./JG 1 | 1942년 3월 | Jagdfliegerschule 1의 Einsatzschwarm | 베르노이헨 | Bf 109 E-1, E-3, E-4, E-7, F-1, F-2 및 F-4 |
11./JG 1 | 1942년 3월 | Jagdfliegerschule 4의 Einsatzschwarm | 베르노이헨 | Bf 109 E-1, E-3, E-4, E-7, F-1, F-2 및 F-4 |
12./JG 1 | 1942년 3월 | 이전 IV./JG 1의 잔존 병력 | 베르노이헨 | Bf 109 E-1, E-3, E-4, E-7, F-1, F-2 및 F-4 |
1944년, OKL은 Luftflotte Reich를 조직하고 창설했다. 제1전투비행단(JG 1)은 JG 3과 함께 ''Jagddivision'' 3에 배속되었다. JG 1은 네덜란드 방어를, JG 3는 라인란트 방어를 담당했다. JG 1에서는 1943년 11월에 ''Oberst'' 발터 오사우가 헤르만 그라프의 지휘를 이어받았다. 루프트바페의 조직 개편에도 불구하고, 미국 육군 항공대(USAAF)는 장비, 전략, 조직 면에서 변화를 거듭하며 1944년 독일 전투기 부대를 상대로 효과적인 소모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JG 1은 비교적 양호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1943년 12월 31일 ''Jagddivision'' 3의 작전 명령에 따르면, 데엘렌에는 Fw 190 2대(1대 작전 가능)의 참모 편대, 도르트문트에는 I. 집단 소속 Fw 190 29대(27대 작전 가능), 라인에는 II. 집단 소속 Fw 190 18대(14대 작전 가능), 폴켈 비행장에는 III. 집단 소속 Bf 109 42대(36대 작전 가능)가 배치되어 있었다.
1월 11일, 제8공군은 오셔슬레벤, 할버슈타트, 브라운슈바이크를 상대로 정규 작전을 수행했다. Fw 190 A-6을 장비한 I. 집단은 새로운 ''sturmtaktik''(돌격 전술)을 훈련했다. 부대로서 폭격기 대열의 뒤쪽에서 근거리에서 공격하여 손실 없이 폭격기 3대를 격추시켰다. 또한 표준적인 정면 공격도 수행했다. II. 집단은 지휘관 발터 획크너의 독특한 전술인 "뱀 물기" 전술, 즉 후면 저고도에서 파상 공격을 사용했다. 이 집단은 Fw 190 2대와 조종사 1명을 잃고 폭격기 10대와 또 다른 폭격기를 격추했다고 주장했다. 이 임무는 완전한 성공으로 여겨졌다. 전반적으로 미군 호위기의 지원을 받는 RLV(Reichsluftverteidigung, 제국 공중 방어)의 전진 배치는 파괴된 폭격기 60대와 손상으로 폐기된 5대를 상쇄했다. 독일 전투기 53대가 파괴되고 31대가 손상되었으며, 조종사 38명이 사망하고 22명이 부상을 입었다. 하인리히 바어는 복종하지 않은 이유로 JG 77의 지휘에서 해임된 후 1944년 1월 중순에 평범한 조종사로 II./JG 1에 합류했다. OKL은 사기를 우려하는 듯했다. 2월 11일, 울트라는 JG 1, JG 3, ZG 26에게 프랑크푸르트 방어 작전에서 보여준 활약에 대한 축하 메시지를 가로챘다. 비록 단 하나의 폭격기만 격추했지만 [10대의 전투기로]. ''Jagddivision'' 3은 이제 I.과 II. 집단에 IV./JG 3와 ''Sturmstaffel'' 1을 "중(重)" 부대로, I./
4. 주요 작전
제1전투비행단 제1비행단(I./JG 1)은 폴란드 침공 당시 동프로이센 지역에 배치되었으나 실질적인 전투는 거의 치르지 않았고, 적기 격추 기록 없이 아군 대공포 오인 사격으로 인한 사상자만 발생했다. 가짜 전쟁 기간 동안에는 주로 독일 북부 해안 방어 임무를 수행하며 메서슈미트 Bf 109 D형 및 E형, 메서슈미트 Bf 110 등을 운용했다.
1939년 12월, 비행단은 전쟁 초기 중요한 해상 항공전 중 하나인 헬골란트 만 해전에 참전하여 영국 공군의 비커스 웰링턴 폭격기 편대를 성공적으로 요격했다. 이 전투는 영국 공군이 주간 폭격 작전을 포기하게 만드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940년 프랑스 공방전에서는 저지대 국가 침공과 프랑스 본토 작전에 참여하여 마스트리흐트 전투 등에서 교량 방어 및 슈투카 급강하폭격기 호위 임무를 수행했으며, 됭케르크 철수 작전 당시에는 연합군 항공기와 치열한 공중전을 벌였다. 그러나 프랑스 항복 이후 I./JG 1이 JG 27에 통합되면서 JG 1은 실질적인 전투 부대 없이 본부만 남게 되어 영국 본토 항공전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1941년 I./JG 1이 재편성되면서 JG 1은 다시 전투 능력을 갖추고 네덜란드 해안 방어 임무에 투입되었다. 이 시기 영국 공군의 주간 공습은 제한적이었으나, JG 1은 JG 2, JG 26과 함께 영국 공군 전투사령부의 공세 작전(Circus operations)에 대응했다. 1942년에는 도너케일 작전과 주빌리 작전 등 주요 작전에 참여했다.
1943년부터 본격화된 미국 제8공군의 주간 전략 폭격에 맞서 JG 1은 제국 방위전(Reichsverteidigung)의 최전선에 섰다. Bf 109와 Fw 190을 혼용하며 미군 폭격기 및 호위 전투기 편대와 치열한 공중전을 벌였으나, 점차 연합군의 공세가 강화되면서 막대한 손실을 입기 시작했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JG 1은 프랑스 전선에 증원 부대로 투입되었으나 압도적인 연합군 공군력 앞에 큰 피해를 입고 결국 독일 본토로 철수해야 했다. 이후 재편성과 신참 조종사 충원을 거쳤지만, 1944년 후반 메르제부르크, 함부르크, 베를린 등을 방어하는 과정에서 다시 한번 재앙적인 손실을 겪었다. 이 시기부터 일부 부대는 성능이 향상된 Fw 190 D-9 '도라' 기종을 수령하기 시작했다.
전쟁 말기인 1944년 12월 아르덴 대공세를 지원하고 1945년 1월 1일 보덴플라테 작전에 참여했으나, 이 과정에서 다시 한번 극심한 손실을 겪었다. 이후 1945년 1월, 비행단은 동부 전선의 동프로이센 지역으로 이동하여 급속히 진격하는 소련군에 맞서 싸웠다. 이들은 하일리겐바일 포켓에서 철수하고, 독일 해군의 피난민 수송 작전인 한니발 작전을 엄호하는 등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임무를 수행했다.
1945년 2월부터 JG 1의 일부 부대는 He 162 '폴크스예거' 제트 전투기로 기종 전환을 시작했다. 그러나 훈련 부족, 기체의 기술적 문제, 어려운 조종 특성 등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훈련 중 사고도 발생했다. He 162는 제한적으로 실전에 투입되었으나 전쟁의 흐름을 바꾸지는 못했다. 1945년 5월, 뤼네부르크 황무지에서의 독일 항복으로 제1전투비행단은 종전을 맞이했다.
4. 1. 헬골란트 만 해전 (1939년)
사흘 후, 제1전투비행단은 헬골란트 만 해전에 참전했다. 독일 전투기 부대는 늦게 경보를 받았지만, 제1전투비행단 지휘관 카를-아우구스트 슈마허는 조종사들에게 비커스 웰링턴 폭격기가 빌헬름스하펜으로 향하는 사각 지대이므로 측면(beam) 공격을 하라고 지시했다. 함미(stern) 공격은 폭격기 후방 사수가 집중된 화력으로 대응할 수 있어 위험했기 때문이다. 또한, 초기 웰링턴 모델에는 자가 밀폐 연료 탱크가 없다는 약점이 발견되어, 독일 전투기가 날개를 공격하면 폭격기가 쉽게 화재에 휩싸일 수 있었다.제1전투비행단의 단장 슈마허는 이 전투에서 폭격기 두 대를 격추하는 전과를 올렸다. 오후 1시 45분경, 독일 전투기들은 연료 부족으로 기지로 복귀했다. 이 전투의 결과로 영국 공군 폭격기 사령부는 주간 폭격 작전을 포기하게 되었다. 이는 역설적으로 독일 공군 최고 사령부(OKL)가 본토 방공의 중요성을 간과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으며, 전쟁 후반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역사가 도널드 콜드웰과 리처드 R. 뮐러는 이 해전을 "전쟁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작전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 이 전투 이후 수년 동안 독일 상공의 주간 방공망은 실질적인 시험대에 오르지 않았다.
4. 2. 프랑스 전투 (1940년)

1940년 5월 10일, 제1전투비행단은 예버(Jever) 기지에서 카를-아우구스트 슈마허 중령의 지휘 아래 프랑스 공방전에 투입되었다. 제1전투비행단의 제1 비행집단(I./JG 1)은 제8항공군단(VIII. Fliegerkorps)에 배속되어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에어프트슈타트 인근 김니히(Gymnich) 비행장에 주둔했다. 전술적으로 I./JG 1은 제27전투비행단(JG 27)의 행정 통제 하에 있었으며, 6월 4일 잠시 제77전투비행단(JG 77)의 통제를 받다가 다시 JG 27 소속으로 복귀했다. 작전 개시 시점에서 비행단 사령부(Stab./JG 1)는 4대의 메서슈미트 Bf 109를 보유하고 있었고 모두 작전 가능한 상태였다. I./JG 1은 46대의 Bf 109 E형을 보유했으나, 이 중 24대만이 즉시 전투 투입이 가능했다.
독일 국방군은 5월 10일 황색 작전(Fall Gelb)을 개시하며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를 동시에 침공했다. JG 1은 마스트리흐트 전투 등에서 알베르트 운하 상공의 교량 방어 임무를 수행하며 전투에 참여했다. 5월 11일, 3 비행대대(3./JG 1)는 영국 공군 제18 및 제53 비행대대와 교전하여 첫 공중전 전과를 기록했다. 1 비행대대(1./JG 1)와 JG 27의 1 비행대대(1./JG 27)는 벨기에 공군 소속 페어리 배틀 경폭격기 및 글로스터 글래디에이터 전투기와 교전했다. 이 전투에서 벨기에 공군의 배틀 폭격기 9대 중 3대만이 심하게 손상된 채 귀환했으며, 1./JG 1은 글래디에이터 전투기 6대 중 4대를 격추(총 7대 격추 주장)하고 같은 지역에서 페어리 폭스 전투기 2대도 격추했다. 프랑스 공군의 리오레 에 올리비에 LeO 45 폭격기 18대가 모란-솔니에 M.S.406 전투기 18대의 호위를 받으며 출격했으나, I./JG 1과 메서슈미트 Bf 110 부대의 요격으로 폭격기 1대와 전투기 4대가 격추되었다. 5월 12일, JG 1은 마스트리흐트 교량 상공에서 추가 전과를 올렸다. 영국 공군 제139 비행대대의 브리스톨 블레넘 경폭격기들이 호위 없이 출격했다가 Stab./JG 1, 2./JG 1, 그리고 JG 27의 3 비행대대(3./JG 27)에 의해 7대가 격추되었다. 작전 개시 후 첫 24시간 동안 I./JG 1과 모체 부대인 JG 27은 총 340회 출격하여 4대의 손실로 적기 28대 격추를 주장했다. 5월 13일, JG 1은 최전선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영국 해외 파견군(BEF) 소속 웨스트랜드 라이샌더 정찰기(영국 공군 제4 비행대대) 1대 격추를 주장했다. JG 27은 리에주 지역에서 융커스 Ju 87 슈투카 급강하폭격기를 호위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독일군의 스당 돌파 이후 기갑 부대는 솜강 하구의 아브빌까지 진격했다. 캉브레 인근에서 프랑스군의 반격을 격퇴한 후, 독일군은 영국 해협 연안 항구들을 목표로 진격을 재개하여 불로뉴 전투, 칼레 포위전, 됭케르크 전투가 이어졌다. I./JG 1은 됭케르크 상공에서 제76급강하폭격비행단(StG 76)을 지원하며 영국 공군 전투기 사령부와 교전하고 연합군의 철수를 저지하는 작전을 수행했다. 이 과정에서 훗날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활약하게 되는 에이스 조종사 에밀 클라이데가 영국 공군 제19 비행대대의 슈퍼마린 스핏파이어를 격추하는 전과를 올렸다. 1./JG 1을 지휘하던 빌헬름 발타자르는 프랑스 공방전에서 총 23대의 격추 기록을 세우며 두 번째로 기사십자 철십자장을 수여받은 전투기 조종사가 되었다. 클라이데의 격추는 5월 26일 됭케르크 상공에서 I./JG 1이 기록한 4건의 격추 중 하나였으며, 이는 됭케르크 전투 기간 동안 I./JG 1이 기록한 유일한 전과였다. 또 다른 조종사인 발터 아돌프(2./JG 1 소속)도 이 시기 김니히에서 작전을 시작하며 JG 1과 함께 전쟁 초기를 보냈다.
적색 작전(Fall Rot)으로 명명된 프랑스 공방전의 두 번째 단계가 시작되자, I./JG 1은 여전히 VIII. Fliegerkorps 소속으로 기즈 북쪽 튀피니(Tupigny) 비행장에 주둔했다. JG 27과 그 예하 부대(I./JG 1 포함)는 6월 6일 하루 동안 17번의 임무에서 총 265회 출격했다. 6월 16일경, 독일군의 진격에 따라 I./JG 1은 Stab./JG 27, I./JG 27, I./제76전투비행단(JG 76)과 함께 로미이쉬르센으로 이동했다. 프랑스 공방전 전체 기간 동안 JG 27 예하 부대들은 총 250대의 연합군 항공기 격추를 주장했으며, 이 중 JG 1 소속의 빌헬름 발타자르가 가장 뛰어난 전과를 기록한 조종사였다. I./JG 1은 프랑스 공방전에서 총 82대의 적기를 격추하는 전과를 올렸다. JG 1 비행단장 카를 아우구스트 슈마허 중령은 프랑스 공방전에서의 지휘 공로를 인정받아 7월 21일 기사십자 철십자장을 수훈했다.
1940년 6월 22일의 휴전으로 서부 전선에서의 전투는 일단락되었다.
4. 3. 제국 방공전 (1943년 ~ 1944년)

JG 1은 1942년 중부 공군 사령부(Luftwaffenbefehlshaber Mitte, 나중에 ''Luftflotte Reich'')에 배속된 유일한 전투기 비행단이었다. JG 1의 4개 비행단(''Gruppe'')은 노르웨이에서 네덜란드까지 넓게 분산되어 있었고, 독일 본토 내의 유일한 전투기 부대는 전투기 학교나 특정 공장, 시설에 배속된 소규모 부대뿐이었다. JG 1의 부대들은 제1전투사단(''Jagddivision 1'')과 제2전투사단(''Jagddivision 2'')에 나뉘어 배치되었다. 1942년 JG 1이 참여한 주요 작전으로는 2월의 도너케일 작전과 8월의 주빌리 작전이 있었다. 도너케일 작전 중 JG 1은 텍셀 근처에서 영국 공군 폭격기 7대를 격추했으며, 이 중 4대는 제5비행중대(5./JG 1)의 전과였다.
JG 1의 구성은 일반적인 전투기 비행단이 3개의 비행단을 두는 것과 달리 4개의 비행단을 보유했다는 점에서 독특했다. JG 1이 네덜란드에서 강력한 방어선을 제공했지만, 그 후방의 방어는 1939년처럼 여전히 취약했다. 1943년 초, 비행단 본부(Stab)와 I. 비행단은 예버에 주둔했다. 본부 비행대는 4대의 포케-울프 Fw 190(모두 작전 가능)을 보유했고, I. 비행단은 40대의 Bf 109(27대 작전 가능)를 운용했다. II. 비행단은 우덴드레흐트에 40대의 Fw 190(41대 작전 가능)을, III. 비행단은 덴마크와 남부 노르웨이에 53대의 Fw 190(48대 작전 가능)을 보유했다. IV. 비행단은 묀헨글라트바흐에 41대의 Fw 190(27대 작전 가능)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비행단장(Geschwaderkommodore) 에리히 믹스(Erich Mix)의 지휘 아래, 비행단은 영국 해안 사령부와 전투 사령부의 침투를 요격하고 해안을 따라 호송 임무를 수행하며 미국 육군 항공대(USAAF)의 중폭격기 공습에 대비했다. 전후 연구에 따르면 최소 23명의 영국 전투 사령부 사상자가 JG 1과의 교전에서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1943년 5월 2일, JG 1은 스핏파이어 7대를 격추했지만 4대의 손실을 입었다. 다음 날, 하워드 블래치포드 비행대장이 네덜란드 상공에서 JG 1과의 교전 중 전사했는데, 한스 엘러스가 그를 격추했을 가능성이 있다.

독일 공군은 1942년에서 1943년 겨울 동안 전투기의 엔진 출력과 화력을 증강하는 데 주력했다. 항공기 무게가 증가함에 따라 속도를 유지하기 위해 엔진 출력을 높여야 했다. 독일은 엔진 압축비를 높이는 데 필요한 고강도 합금과 고옥탄 연료가 부족했기 때문에, 기술자들은 화학적 성능 향상 방식을 택했다. DB 605A 엔진을 장착한 Bf 109 G-1 고고도 전투기에는 GM-1 질소산화물 부스터 시스템이 장착되었다. Fw 190 A-3는 더 강력한 BMW 801D-2 엔진을 탑재하여 도입되었다. 곧이어 개량된 무선 장비와 유도 장치를 갖춘 Fw 190 A-4와 Bf 109 G-4가 등장했다. 이 기종들은 Fw 190의 경우 약 6096.00m 미만, Bf 109의 경우 그 이상의 고도에서 스핏파이어 Mk.IX와 대등한 성능을 보였다.
Bf 109는 뛰어난 공중전 기동성을 가졌으며, 특히 9000m 이상의 고도에서 우수한 성능을 발휘했다. JG 1은 Bf 109와 Fw 190을 함께 운용했는데, 이 두 기종은 독일 상공에서의 방어 임무에서 서로를 보완하도록 사용되었다. 강력한 무장을 갖춘 Fw 190은 주로 폭격기 요격에 투입되었고, 고고도 성능이 좋은 Bf 109는 호위 전투기와의 교전을 담당했다. Bf 109 G-6는 기존의 MG 17 기관총을 더 강력한 13mm MG 131 기관총 2정으로 교체하고 기수의 MG 151/20 기관포를 유지하여 화력을 강화했다. MW 50 (물-메탄올 혼합액) 분사장치는 저고도 성능을 향상시켰지만, 무게 증가로 인해 기동성은 다소 저하되었다. 독일 조종사들은 Bf 109의 상대적인 취약성을 지적하면서도 Fw 190의 견고한 구조를 높이 평가했으며, Fw 190은 서부 전선 조종사들 사이에서 선호되는 기종으로 남았다.
1943년 1월, 제8공군은 독일 본토에 대한 주간 공세를 시작했다(1944년 2월 22일 제8공군으로 재지정). 당시 JG 2는 대서양 연안, 브르타뉴, 노르망디의 U보트 기지를 방어했고, JG 26은 Jafü 2(제2전투기지휘부)에 배속되어 있었다. JG 27의 I. 비행단은 잠시 북부 프랑스에 배치되어 영국 해협 전선을 지원했다. 1943년 3월 말, 동부 전선에서 철수한 JG 54의 III. 비행단이 브레멘 인근 올덴부르크로 이동하여 JG 1을 지원하며 연합군 전투기의 항속거리 밖에 위치하면서 USAAF 폭격기로부터 북부 독일을 방어했다. 당시 미 제8공군은 한 번에 약 100대의 중폭격기만 투입할 수 있었다.
1943년 1월 27일, 미국은 맑은 날씨를 이용해 독일 본토에 대한 첫 공습을 감행했다. 64대의 B-17 플라잉 포트리스와 27대의 B-24 리버레이터가 빌헬름스하펜을 폭격했다. 이는 JG 1이 미군 중폭격기와 처음으로 교전할 기회였다. 예버에 주둔한 I. 비행단은 폭격기 편대의 비행 경로 바로 아래에 위치하여 전력을 다해 요격에 나섰다. 그러나 Bf 109 G-1의 상대적으로 약한 무장 때문에 독일 조종사들은 제1폭격비행단에 큰 피해를 주지 못했다. 미군 폭격기의 방어 사격으로 독일 조종사 3명이 사망하고 1명은 탈출해야 했다. 미군은 10대 격추를 주장했지만, JG 1은 B-17 3대 격추를 기록했고 실제로는 1대만 격추되었다. B-24 편대는 네덜란드 우덴드레흐트 근처 해안을 통과한 후 항로를 잃고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네덜란드 상공을 비행했다. II. 및 IV. 비행단이 출격하여 북쪽으로 향했다. II. 비행단은 조종사 1명이 부상당했지만 B-24 2대 격추를 주장했다(이 전과는 베를린으로 보고되지 않은 것으로 보임). IV. 비행단은 테르스헬링 근처에서 요격하여 Fw 190 1대를 잃었으나 B-24 1대를 격추했다. 또 다른 Fw 190이 두 번째 B-24와 공중 충돌하여 양측 승무원 모두 사망했다. 미군 사수들은 독일 전투기 12대 격추를 주장했다. 양측의 총 손실은 독일군 6대, 미군 3대로 제8공군에 유리했다. 비행단을 지휘하던 준장 헤이우드 S. 핸셀은 "적의 공격은 주로 후방에서 수평 또는 약간 위에서 이루어졌다. 그들의 기술은 점령된 프랑스에서의 경험에 비해 예상보다 낮았다. 이 지역에서의 다음 공습에서는 더 숙련된 공격이 예상된다."고 평가했다.
이후 몇 주 동안 제8공군은 프랑스의 U보트 기지에 집중했지만, 2월 4일 다시 독일 본토로 향했다. 65대의 B-17과 21대의 B-24가 함을 목표로 했으나, 목표 상공을 90분간 선회한 후 결국 엠덴을 폭격했다. JG 1과의 장시간 교전에서 미군은 Bf 109 7기를 파괴하고 조종사 5명을 사망시켰다. 제91폭격그룹은 II. 비행단에 B-17 2기를 잃었고, 제303폭격그룹은 1기, 제305폭격그룹은 2기를 잃었다(하나는 Fw 190과의 충돌, 다른 하나는 Bf 110 야간 전투기와의 교전). 3월 4일, 제8공군은 다시 함으로 향했다. 제91폭격그룹과 제306폭격그룹의 B-17 71대는 각각 1기씩만 잃었지만, JG 1은 Fw 190 2기를 잃었다. 이번에도 소규모 미군 편대에 대한 성과는 미미했다. 지원 나온 야간 전투기 부대인 IV./NJG 1은 2기 손실로 3기를 격추하며 더 나은 성과를 보였다. 4일 후, 헬골란트 상공에서 I. 및 IV./JG 1은 2./JG 27과 다양한 야간 전투기의 지원을 받아 미군 중폭격기 2기를 격추했지만, 독일군은 전투기 3기와 조종사 2명(JG 1 소속 1명 포함)을 잃었다. 제1폭격비행단의 핸셀은 미군 폭격기의 성공 요인으로 향상된 사격술, 전투 대형, 그리고 "적의 결단력 부족"을 꼽았다. 54대의 폭격기로 구성된 컴뱃 박스 대형은 독일 전투기에 효과적인 방어 수단임이 입증되어 제8공군의 표준 대형이 되었다. 3월 9일 기준으로 JG 1의 부대들은 더 넓게 분산되었다. 본부, II., IV. 비행단은 각각 암스테르담-스키폴, 우덴드레흐트, 묀헨글라트바흐에 주둔하며 제1전투사단 예하 'Jafü 홀란트-루르 게비트'의 지휘를 받았고, I. 및 III. 비행단은 예버, 후줌, 메스에 일정 기간 주둔했다. 당시 전력은 본부 비행대 Fw 190 2대(1대 작전 가능), I. 비행단 Bf 109 37대(28대), II. 비행단 Fw 190 35대(29대), III. 비행단 Fw 190 43대(31대), IV. 비행단 Fw 190 30대(20대)를 보유했다.

이 시기는 루프트바페 부대 내에서 공식 및 비공식적인 무장 실험이 이루어진 때였다. 2./JG 1 소속 조종사 하인츠 크노케 중위는 250kg 폭탄과 15초 지연 신관을 이용한 자체 실험을 수행했다고 주장했다. 크노케는 3월 22일 폭격기 편대 상공 1000m에서 폭탄을 투하하여 폭발로 B-17 1기를 격추했다고 주장했다. 그날 III. 비행단이 격추한 B-17은 1기뿐이었지만, 독일 공군 최고 사령부(OKL)는 크노케의 이야기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루프트플로테 3은 4월 16일 로리앙 상공의 미군 폭격기를 상대로 폭탄을 탑재한 전투기 11기를 출격시키려 했으나 작전은 실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 승무원들은 루프트바페가 이 전술을 포기한 후에도 몇 년 동안 독일군이 폭탄 투하 전술을 사용한다고 보고했다. 날개 밑에 장착하는 WGr 21 로켓 발사기 실험은 유망했지만 개발에 시간이 걸렸다. 임시방편으로 Bf 109 G의 대폭격기 화력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날개 밑에 기관포 포드를 장착했다. 1943년 4월 II. 비행단과 JG 300의 II. 비행단이 라인강 유역 공군 기지를 공유했을 때, 더 강력하게 무장한 Fw 190 A-5를 함께 운용했다는 사진 증거가 있다.
1943년 4월에는 조직 개편이 있었다. JG 1의 4개 비행단은 4월 1일부로 JG 1과 JG 11으로 분리되어 각각 2개의 비행단을 갖게 되었다. 각 부대는 III. 비행단을 창설해야 했다. JG 1의 III. 비행단은 5월 23일 레우와르덴에서 창설되었고, 카를-하인츠 리스만이 7월 25일 전사할 때까지 지휘했다. 한스 필리프가 같은 날 JG 1의 지휘를 맡았고, I. 비행단은 델렌으로 이동했다. JG 11은 후줌의 III./JG 1(I./JG 11로 개편)과 예버의 I./JG 1(II./JG 11로 개편)을 인수했다. JG 11은 남부 노르웨이, 덴마크, 독일 북해 연안 최북단을 방어했으며, 'Jafü 도이체 부흐트'(독일 만 전투기지휘부)에 보고했지만 제2전투사단의 일부를 구성했다. JG 1은 IV. 비행단(I. 비행단으로 개명)을 델렌에, II./JG 1을 우덴드레흐트에 유지하며 제1전투사단의 'Jafü 홀란트-루르'에 보고했다. 이로써 JG 1의 담당 구역은 이전의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같은 달, 미군의 첫 작전 전투기 그룹이 북유럽에 투입되었다. 제8공군의 P-47 썬더볼트는 4월 4일 첫 전투 호위 임무를 수행했다. 록히드 P-38 라이트닝 그룹은 손실 보충을 위해 북아프리카로 이동했고, 영국에는 전투기 부대가 거의 남지 않았다. 미군 제78전투그룹이 이 공백을 메웠고, 제56전투그룹과 제4전투그룹이 곧 뒤따랐다. P-47은 과급기를 장착하여 고고도 성능이 뛰어났고 급강하 성능도 우수했다. 8정의 .50 BMG 브라우닝 기관총은 강력한 화력을 제공했다. 그러나 중고도 및 저고도에서는 일대일 공중전 시 기동성이 좋지 않았다. 4월 15일, P-47은 루프트바페와 처음으로 교전했는데, 상대는 II./JG 1이었다. 양측 모두 격추를 주장했지만(미군 3기, 독일군 2기), 실제 손실 없이 교전은 끝났다. 이 전투는 미군이 약 1828.80m의 고도 우위를 점하고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조종사들이 스플릿 S 기동으로 탈출한 뒤 P-47의 후미를 잡을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 사건 이후 루프트바페 회의가 열렸고, 아돌프 갈란트 전투기 총감, 헤르만 괴링 공군 최고사령관, 발터 그라브만, JG 1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회의 결론은 Fw 190 A-5의 고고도 성능 약점 때문에 호위 전투기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더 우수한 Bf 109 G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각 전투 비행단은 호위기 요격을 위해 경전투기 그룹(Bf 109 G)을 창설 또는 유지하고, 이들을 전방에 배치하여 적 호위기가 독일 영공에 진입할 때 교전하도록 했다. 더 강력한 무장을 갖춘 전투기(Fw 190)는 후방에 대기하다가, 미군 호위기가 경전투기와 완전히 교전했을 때 미군 폭격기를 공격하도록 지시받았다. 당분간 미군의 독일 본토 공습은 호위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JG 1은 중폭격기를 상대로 작전을 계속했다. 4월 17일 제8공군은 브레멘을 공격했다. 프리츠 로시히카이트 소령은 폭탄 투하 후 귀환하는 미군을 요격하여 Fw 190 2기를 잃고 조종사 1명을 잃었지만, B-17 16기를 격추했다고 주장했다. 표적이었던 포케-울프 공장은 심각한 피해를 입어 생산 능력의 50%를 상실했고, Fw 190 30기가 미완성 상태가 되었다. 총 115대의 B-17 중 16대가 손실되었다.
미군의 손실은 비록 적었지만 심각했으며, 폭격기 교체 속도보다 더 빠르게 손실되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 해안 상공에서의 작전을 일시적으로 축소했다. 독일 전투기 부대 역시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 성과를 장려하고 사기를 높이기 위해 훈장 수여를 위한 점수제가 도입되었다. 서부 전선 조종사들은 동부 전선 동료들이 훈장과 공중전 승리를 훨씬 쉽게 얻는 것처럼 보여 불만을 가졌다. 미군 중폭격기와의 전투 어려움을 감안하여 점수제가 마련되었다. 전투기 격추는 1점, 쌍발 엔진 폭격기는 2점, 4발 엔진 폭격기는 3점이 부여되었다. 쌍발 엔진 폭격기를 대형에서 이탈시키는 것(''Herausschuss'')은 1점, 4발 엔진 폭격기는 2점이었다. 낙오된 폭격기의 최종 격추는 쌍발 엔진의 경우 0.5점, 4발 엔진의 경우 1점이었다. 1점은 철십자 훈장 2급, 3점은 철십자 1급, 10점은 루프트바페 명예 고블렛, 20점은 금십자 독일 훈장, 40점은 철십자 기사 십자 훈장을 받을 수 있었다. 기사 십자 훈장은 조종사의 목에 착용했으며, 전투 중에도 착용했다. 영광에 목마른 조종사들은 "목의 발진"이 있었다고 묘사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군 폭격기의 집중 사격과 대규모 전투기 호위대와의 전투에서 살아남는 것이 운에 달렸던 서부 전선에서는, 두 명의 역사가가 언급했듯이 "그들의 목은 죽을 때까지 계속 가려웠을 가능성이 높다".
1943년 7월, 제8공군은 "블리츠 위크"를 시작했다. 7월 25일, 미국은 함부르크를 목표로 삼았다. II. 및 III. 비행단이 요격에 나섰다. 미 제1폭격비행단은 B-17 15기를 잃었다고 보고했는데, 대부분 함부르크 방공포에 손상된 후였다. 이는 미군 승무원들이 보고한 가장 격렬한 지상 포화였다. 경험 많은 제4폭격비행단은 전투기와의 교전에서 4기만 잃었다. 방어군은 전투기 7기를 잃었고, 1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당했으며, 네덜란드 해안 근처에서 영국 해군 함정에 의해 구조된 야간 전투기 승무원 2명이 포로로 잡혔다. 다음 날, 제1폭격비행단의 6개 그룹이 함부르크와 하노버로 돌아왔다. 하노버로 향한 부대는 주로 JG 1 소속 Fw 190에 의해 B-17 16기를 잃었다. 총 4명의 독일 조종사가 사망하고 1명이 부상당했다(소속 부대는 명시되지 않음). 7월 28일, I. 비행단은 제95폭격그룹 소속 폭격기 3기를 격추했다. 7월 29일에는 미군 폭격기 승무원들이 자신들의 대형을 향해 "불타는 야구공"이 사용되었다고 보고했는데, 이는 베르퍼-그라나테 21 공대공 박격포의 첫 실전 투입이었다. JG 1과 JG 11이 이 무기를 운용했으며, III./JG 26도 일주일 내에 장비했다. 1943년 8월, JG 1은 슈바인푸르트-레겐스부르크 임무에 투입되었다. II. 비행단은 접근하는 폭격기와 접촉하지 못하고 귀환을 기다리기 위해 착륙했다. I. 비행단은 B-17 3기를 파괴하고 3기를 대형에서 이탈시켰다고 주장했으며, 손실은 없었다. III. 비행단은 폭격기 1기를 격추하고 1기를 잃었다고 주장했다. II./JG 1은 I./JG 26 및 III./JG 3와 합류하여 귀환하는 폭격기를 공격했지만, 북해 상공에서 제222 비행대 RAF의 스핏파이어 편대 아래로 비행하다가 독일 대형이 흩어지고 Bf 109 3기가 격추되었다. I. 비행단은 중대(''Staffel'') 단위로 정면 공격을 가한 후 반복적인 후속 공격을 펼쳤다. 6대의 폭격기를 파괴하고 추가로 대형에서 이탈시켰다고 주장했다. 이 중 3기의 격추가 확인되었지만, 비행단은 추락 또는 불시착으로 Fw 190 4기를 잃었고 조종사 1명이 부상당했다. I. 비행단은 그날이 끝나기 전에 3기를 더 격추했다고 주장했다. III./JG 1도 결국 폭격기 편대와 교전하여 격추를 주장한 것으로 보인다. I./JG 1과 JG 50이 이날 가장 성공적인 부대였으며, 양 부대 모두 6기의 폭격기 격추를 확인받았다. 전투가 끝날 무렵, 독일군은 미군만큼 지쳐 있었다. 해안 근처에서 미 제56전투그룹은 폭격기 주변에 남아 있던 독일 전투기들을 공격하여 Fw 190 7기, Bf 109 5기, Bf 110 5기를 격추했다고 주장했다. Fw 190은 I./JG 1과 II./JG 26 소속이었고, Bf 109는 JG 50, Bf 110은 NJG 1 소속이었다. Bf 110을 구하기 위해 개입한 III./JG 3에 의해 P-47 3기가 손실되었다고 보고되었다. 제국 방공군(RLV)은 이날 뛰어난, 그러나 일시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제8공군은 9월 6일까지 독일 상공 작전을 중단했다가 10월 4일 프랑크푸르트를 공격했다. 제1폭격사단에서 파견된 155대의 B-17 중 130대가 투입되었다. I., II., III. 비행단 모두 출격했다. 결과는 명시되지 않았지만, ZG 76도 참가했으나 제56전투그룹과의 교전에서 심각한 손실을 입었다. 괴링은 가울라이터들이 미군 폭격기가 "뉘른베르크 전당대회" 대형으로 자신들의 도시 상공을 행진했다고 불평한 후 오버잘츠베르크에서 회의를 소집했다. 괴링은 전투기 조종사들의 훈련, 전술, 기술, 사기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다. 갈란트와 에르하르트 밀히는 실패가 전적으로 비겁함 때문이라는 주장을 반박했다. 밀히는 일부 고도로 훈장을 받은 베테랑들이 지쳐서 젊은 세대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제안했다. 갈란트는 그들을 명백히 변호하지는 않았지만, 리더십과 결단력의 질을 "재확인"하겠다고 약속했다. JG 1 조종사 한 명은 전투기가 이륙하여 적과 교전할 수 없는 기상 조건은 없으며, 승리나 전투 피해 없이 기지로 돌아오는 조종사는 군사 재판에 회부
4. 4. 노르망디 상륙 작전 (1944년)
1944년 6월 6일 오버로드 작전, 즉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시작되어 서부 전선이 다시 열렸다. 제1전투비행단(JG 1)은 루프트플로테 라이히에서 루프트플로테 3으로 증원된 비행단 중 하나였다. II. ''Gruppe''는 그날 오후 Fw 190 25대와 함께 르망으로 이동했고, 다음 날 해안 기지에서 동남쪽으로 3개의 ''gruppe'' 규모 순찰을 수행했지만 연합군 항공기를 만나지 못했다. 6월 8일, ''gruppe'' 전투기는 약 249.48kg 폭탄을 장착하고 영국 해협의 선박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독일 조종사들은 연합군 전투기를 피했지만, 함선 위에서 격렬한 대공 사격을 받았다. 그들은 폭탄을 투하하고 저고도로 도망쳤다. 연합군 기록에 따르면 어떤 배도 맞지 않았지만, 여러 Fw 190이 손상되었으나 파괴된 것은 없었다. 6월 9일의 반복 작전은 비슷한 결과를 얻었지만, 이번에도 그룹은 사상자가 없었다.르망은 6월 10일에 100대 이상의 에이브로 랭커스터 및 핸들리 페이지 핼리팩스 폭격기가 강타하여 착륙장, 작전실, 격납고 3개, 건물 여러 채를 파괴했다. Fw 190은 적어도 약 457.20m 떨어진 곳에서 분산 및 위장되어 손상을 입지 않았지만, 비행장을 다시 사용할 수 있기까지 6일이 걸렸다. 6월 16일에는 에세이로 이동하여 4일 동안 순찰을 수행했다. 이후 알랑송 근처의 세멜로 이동했다. 이곳 비행장은 P-51 머스탱에 의한 저고도 공격을 받았고, 일련의 사격으로 보이는 모든 것을 파괴했다. 15분 만에 Fw 190 15대가 파괴되었고, II. ''Gruppe''는 전투에서 제외되었다. III ''Gruppe''는 초기 공격대에 프랑스로 보내졌지만, 상태가 좋지 않아 노르망디에서 작전을 수행하지 못했고, 6월 14일에 독일로 돌아왔다.

D-Day 상륙 이후 전투에 투입된 루프트바페 부대는 더욱 치명적인 손실을 입었다. D-Day 이후 10주 동안 JG 1은 106대의 항공기(공중전에서 41대)와 조종사 30명을 잃었으며, 단 32대의 격추 기록만 올렸다. 이 기간 동안 많은 경험 많고 대체 불가능한 ''Experte''가 사망했다. III./JG 1의 ''Gruppenkommandeur'' 카를-하인츠 베버 (136회 격추)는 1944년 6월 7일, 파리 북쪽에서 폴란드 비행대 머스탱과의 교전 중 사망했고, 1944년 6월 17일에는 ''Leutnant'' 안톤-루돌프 피퍼 (35회 격추)가 미국 육군 항공대 전투기와의 공중전에서 격추되어 사망했다. 피퍼는 사망 4개월이 넘어서 10월 20일에 기사십자훈장을 추서받았다. 그의 총격추 기록에는 4발 엔진 폭격기 26대가 포함되었다. JG 1과 JG 11은 노르망디 전역 동안 나란히 싸웠으며, 그 사이 100명의 조종사를 잃었다.
석유 부족이 7월에 시작되었고, 그 달 첫 주에 폭격기 그룹은 독일로 철수하여 해산되었다. 8월 11일, 중폭격기만 공격하는 작전에 연료 사용을 제한하는 일반 명령이 내려졌다. 독일군이 큰 피해를 입고 노르망디 전선이 붕괴되면서 독일군을 지원하기 위해 소규모 증원이 파견되었지만, 남은 75대의 단발 전투기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루프트바페의 잔존 세력은 프랑스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1944년 8월 18일의 울트라 요격 정보는 JG 1이 ''Jagdivision'' 5와 함께 노르망디에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것을 언급했다. 센강 서쪽에서 작전을 수행한 JG 27과 ''Jagdivision'' 4가 그들을 대신했다.
1944년 9월 JG 1은 프랑스에서 입은 손실을 보충하기 위해 훈련 학교에서 새로운 조종사를 증원받았다. 경험이 부족한 이들은 전투 작전에 대비가 부족했다. III. ''Gruppe''(고고도 요격 부대)는 앙클람으로 이동하여 Bf 109 G-10을 장비했다. ''Hauptmann'' 헤르만 슈타이거는 라인젤렌에서 붕괴된 II. ''Gruppe''를 재건했다. I. ''Gruppe''는 노르망디에서 후줌에 도착하는 데 10일이 걸렸고, 재건을 시작했다. I. ''Gruppe''는 JG 1이 노르망디 이후 회복하는 기간을 그라이프스발트에서 보냈다. 이 그룹은 1944년 11월 말까지 전투에 다시 투입되지 않았지만, 중무장한 Fw 190 A-8을 갖추고 있었다.
11월 21일, JG 1은 제8공군으로부터 메르제부르크와 함부르크의 유류 목표를 방어하기 위해 전투에 투입되었다. 그 결과로 이루어진 요격은 비행단에게 재앙이었다. I. ''Gruppe''만 이 한 번의 작전에서 Fw 190 27대를 잃었고, 조종사 15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당해 ''gruppe''가 사실상 궤멸되었다. 11월 26일, JG 1은 하노버 지역의 목표를 방어했다. I.과 II. ''Gruppe''는 사령관 헤르베르트 이레펠트가 이끌고 III./JG 6이 고공 엄호를 했다. 그들은 호위받지 않은 제91폭격단, 제1폭격사단을 공격하여 미국 제356전투비행단이 반응하기 전에 B-17 4대를 격추하는 데 성공했다. JG 1은 12명이 사망하고 3명이 부상당했으며, Fw 190 15대가 파괴되었고, 요한 코글러가 이끄는 III./JG 6은 Bf 109 12대를 잃고, 6명이 사망하고 6명이 부상당했다. 11월 27일, 제8공군은 폭격기 임무를 가장했지만, 독일 상공에 10개의 전투기 그룹을 보내 JG 1과 JG 3을 유인하여 요격하도록 했다.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깨닫자, 그들은 가벼운 손실로 빠르게 철수했다. 8일 후, JG 1은 전쟁에서 최악의 패배 중 하나를 겪었다. 제8공군이 베를린을 공격했고, 세 ''gruppen'' 모두와 참모 편대가 노르망디 이후 처음으로 함께 출격했다. III. ''Gruppe'' 고공 방어 부대는 미국 P-51 호위기 아래에 위치한 상태에서 캐노피의 얼음을 제거할 수 없었다. 그 결과, 미군 그룹은 Bf 109를 쉽게 돌파하고 폭격기에 대한 공격 위치에 도달하기 전에 Fw 190 ''gruppen'' 2대에 돌진했다. 비행단의 전투기 37대가 파괴되어 조종사 25명이 사망하고 14명이 부상당했다. JG 1은 재건을 위해 두 번째로 최전선에서 물러나야 했다.
4. 5. 보덴플라테 작전 (1945년)
1944년 12월,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와 히틀러는 서부 전선에서 반격을 통해 전황을 유리하게 바꾸고자 했다. 암호명 '라인강의 파수꾼'으로 명명된 이 작전은 아르덴 대공세로 알려져 있으며, 제1전투비행단(JG 1)은 루프트바페의 주요 전력 중 하나로 투입될 예정이었다. 연합군의 ULTRA 암호 해독팀은 JG 1을 포함한 독일군의 증강과 관련된 통신을 감청하여 독일 국방군이 공세 작전을 준비 중임을 파악했다. ULTRA는 약 24~25개의 Gruppe(대대) 규모 부대를 식별했으며, 작전을 위해 제국 방어선에서 600~700대의 전투기가 동원될 것으로 추정했다. JG 1은 JG 3, JG 4, JG 11, JG 26, JG 27, JG 77, JG 300, JG 301과 함께 보고서에 언급되었다. JG 1의 세 Gruppe는 모두 네덜란드로 이동했으며, II. Gruppe는 1944-45년 겨울 동안 네덜란드 국경 근처 드로페(Drope)에 주둔했다.공세는 12월 16일에 시작되었으나, 악천후 속에서 독일 공군은 지상군 지원을 위한 대규모 근접 항공 지원 임무를 수행하려다 미국 제9공군과의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고 작전을 중단해야 했다. 제9공군, 제8공군, 영국 공군 제2 전술 항공대를 합쳐 약 3,500대에 달하는 압도적인 연합군 공군력 앞에서 제공권 장악은 거의 불가능했다. 1944년 12월 18일, JG 1은 몬샤우와 말메디 인근 전투 지역에 도달한 몇 안 되는 독일 비행대 중 하나였으며, 이들의 목표는 제6SS기갑군을 엄호하는 것이었다. 12월 23일, JG 1은 독일 통신 시설을 목표로 한 제8공군의 전략 폭격 작전을 저지하려 했으나, P-47 2대와 B-17 1대를 격추하는 대가로 6대의 항공기를 잃었다. Hauptmann 한스 엘러스는 이날 P-47 한 대를 격추한 조종사 중 한 명이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III. Gruppe가 쾰른과 아헨 사이에서 영국 공군 폭격기를 요격하려 했으나, 캐나다 왕립 공군 제421 비행대의 스핏파이어에 저지당했다. 이 교전에서 Major 에리히 보이트케를 포함한 Bf 109 조종사 2명이 사망했다. Leutnant 한스 할베이는 스핏파이어 격추를 주장했지만, 기지로 귀환했을 때 가장 먼저 착륙했다는 이유로 비겁함을 의심받아 Geschwaderkommodore 이힐펠트로부터 군법 회부 위협을 받기도 했다. 다음 날 크리스마스에 할베이의 항공기는 격추되었으나 그는 무사히 탈출했다.
12월 25일, JG 1은 JG 3과 함께 아르덴 상공에서 467 폭격 비행단 소속의 B-24 폭격기들을 요격했다. 이들은 479 전투 비행단의 P-51 호위기들이 도착하기 전에 여러 대의 폭격기를 파괴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어진 공중전에서 큰 손실을 입었다. 초기 교전에서 독일 전투기 6대가 격추되었고, 미군은 총 17대의 격추를 주장했으며 독일 기록상 14대의 손실이 확인되었다. JG 1은 10 Staffel(편대) 지휘관을 포함하여 8명의 사상자를 냈다. 미군 에이스 조지 프레디 소령은 이날 여러 독일 전투기를 격추하는 활약을 보였으나, 안타깝게도 그날 늦게 아군의 오인 사격으로 사망했다. 12월 26일, JG 1은 바스토뉴 공방전 동안 독일 지상군을 엄호하는 임무를 수행하다가 8명의 조종사를 추가로 잃었다. 이 중 3명은 숙련된 조종사들이 포함된 8. Staffel 소속이었다. 루프트바페는 계속해서 대규모 병력을 투입했다. 12월 27일, 전투 폭격기 탐색 및 파괴 임무에 337대, 추가 지상 공격 작전에 78대가 투입되었으나, 미군 조종사들은 이 중 86대를 격추했다고 주장했다. JG 1은 선봉 부대를 엄호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큰 피해를 입었다. 한스 엘러스가 이끄는 I. Gruppe의 Fw 190 18대가 디낭 근처에서 364 전투 비행단 소속 P-51에게 요격당해 6대가 파괴되었고, 엘러스 자신도 전사하여 부대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날 JG 1은 총 14명의 조종사를 잃거나 부상을 입었으며, 최소 7명이 사망했다. I. Gruppe는 호위 임무를 맡았던 III./JG 3 소속 Bf 109들이 연합군의 방공 풍선 때문에 후퇴하면서 약 121.92m의 저고도에서 취약한 상태로 노출되어 피해가 컸다. 이 작전에서 살아남은 게르하르트 슈티머는 임무에 나섰던 18명의 JG 1 조종사 중 자신과 다른 한 명만이 기지로 돌아왔다고 증언했다.
엘러스의 후임으로 Hauptmann 게오르크 하크바르트가 임명되었으나, 그 역시 며칠 만인 12월 31일에 전사했다. 이날 JG 300과 JG 301이 가장 큰 피해(사망/실종 24명, 부상 11명)를 입은 반면, JG 1은 제한적인 작전 중 조종사 3명과 전투기 4대를 잃었다. 특히 I. Gruppe의 피해가 컸다.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독일 공군 최고사령부(OKL)는 1945년 1월 1일 보덴플라테 작전을 감행했다. 이는 연합군 비행장을 기습 공격하는 대규모 작전이었다. JG 1은 겐트/Sint-Denijs-Westrem, 말데겜, 우르셀 공군 기지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Oberstleutnant 헤르베르트 이힐펠트가 비행단을 이끌었으며, 편성은 Stab(본부 편대), I. 및 II./JG 1은 Fw 190을, III./JG 1은 Bf 109를 운용하는 혼성 부대였다.
작전 중 JG 1은 심각한 손실을 입었다. I./JG 1은 이륙 직후 아군 대공포의 오인 사격으로 4대의 Fw 190을 잃고 조종사 3명이 사망했다. 우르셀로 향하는 도중에도 아군 대공포로 인한 추가 손실이 발생했다. I. 및 II./JG 1은 목표 상공에서 치열한 공중전에 휘말렸고, III./JG 1은 목표 상공에서 단 1대의 항공기만 잃었으나(적의 공격이 아닌 원인), 아군 대공포 오인 사격으로 최소 2대의 Fw 190을 추가로 잃었다. 말데겜 비행장의 영국군 대공 방어 시설이 12월에 철수되지 않았다면 사상자는 더 많았을 것이다.
최종적으로 Stab 및 I./JG 1은 Fw 190 13대를 잃고 조종사 9명이 실종(사망 5, 포로 4)되어 인원 손실률 39%, 장비 손실률 56%를 기록했다. III./JG 1은 Bf 109 3대를 잃고 조종사 1명이 사망, 2명이 포로로 잡혔다. II./JG 1은 St. Denijs Westrem 비행장을 공격하여 이륙한 Fw 190 36대 중 17대가 격추되어 47%의 높은 손실률을 보였으며, 이 중에는 숙련된 조종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대가로 JG 1은 연합군 항공기에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 I./JG 1은 말데겜에서 지상에 주기된 스핏파이어 30대와 공중에서 2대를 격추했다고 주장했다. 실제 연합군 손실은 말데겜에서 항공기 16대 파괴(스핏파이어 13대 파괴, 2대 수리 불가), 우르셀에서 항공기 6대 파괴(B-17 1대, 아브로 랭커스터 2대, 드 하빌랜드 모스키토 1대)였다. 제131 영국 공군 비행단/폴란드 비행단은 총 15대의 스핏파이어를 잃었다. St. Denijs Westrem에서는 지상에서 스핏파이어 18대가 파괴되었고, 공중전에서 독일군은 스핏파이어 2대를 격추했으며 7대가 추가로 불시착했다.
총체적으로 JG 1은 조종사 25명과 항공기 29대를 잃는 대가로 약 60대의 적 항공기(대부분 지상 파괴)를 파괴했다. 이는 완전한 성공이라고 보기는 어려우나, St. Denijs Westrem과 말데겜에 가해진 피해는 상당했다. JG 1이 이날 잃은 전투기 중 9대는 스핏파이어와의 공중전에서 격추된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추가로 3대는 스핏파이어 또는 지상 화재로 격추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영국 공군은 스핏파이어 2대가 격추되고 2대가 손상되었으며, 제308 및 제317 비행대에서 각각 조종사 1명이 사망했다. 총 스핏파이어 손실은 약 32대로 추정된다.
보덴플라테 작전 다음 날인 1월 2일, JG 1은 다시 전투 임무에 나서 조종사 4명을 잃었다. 1945년 1월 14일은 독일 공군 전투기 부대(Jagdwaffe) 역사상 가장 참혹한 날 중 하나로 기록되었는데, JG 1은 트벤테(Twente) 근처에서 영국 공군 전투기와의 교전에서 12명의 조종사를 잃었다. 이 중 7명이 사망했으며, 영국 공군은 스핏파이어 2대를 잃었다. 짙은 안개는 시계 비행에 익숙하지 않은 신참 조종사들에게 큰 어려움을 주어 독일 전투기들이 비상 착륙하는 사태를 유발했다. Major 귄터 카피토는 그룹 지휘관을 군법 회부하려 했으나, JG 1이 동부 전선으로 이동하면서 무산된 것으로 보인다.
5. 운용 기종
제1전투비행단(JG 1)이 창설되었을 때, 주로 메서슈미트 Bf 109 E-1을 운용했다. 1942년 중반부터 II., III., IV./JG 1은 Fw 190으로 기종을 전환하기 시작했다. 반면, I./JG 1은 Bf 109 E형과 F형, 그리고 이후에는 G형 모델을 계속 사용했는데, 여기에는 GM-1 아산화 질소 분사 장치를 장착하여 출력을 높인 특수한 F-4 및 G-1, G-6 고고도 전투기가 포함되었다. 1943년까지 I./JG 1도 대부분 Fw 190 A형으로 전환했지만, III./JG 1은 다시 Bf 109 G형으로 복귀했다.
1944년 가을, JG 1은 Fw 190 D형(별칭: 도라 또는 롱노즈 도라, Langnasen-Dora|랑나젠-도라de)으로 부분적인 기종 전환을 시작했다. 주요 생산형인 Fw 190 D-9은 기존의 방사형 엔진 대신 융커스 유모 213A 12기통 액랭식 역V형 엔진을 탑재했으며, MW 50 물-메탄올 분사 장치를 사용했다. 이 전투기는 이전 모델의 빠른 롤 기동성은 부족했지만, 전반적으로 속도가 더 빨라 6600m 고도에서 최고 속도 680km/h를 기록했다. 새로운 엔진과 기체 변경을 통해 미국의 중폭격기와 호위 전투기를 요격하는 데 필요한 고고도 성능을 확보했다. 그러나 1944년 말 전황이 바뀌면서 Fw 190 D형은 폭격기 요격 임무보다는 메서슈미트 Me 262 제트 전투기 비행장 보호나 최전선 지원 임무에 투입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1945년 초, JG 1의 I. 및 II. ''그룹''은 하인켈 He 162 A-2 ''슈파츠''(Spatz|슈파츠de, 참새) 제트 전투기를 최초로 장비한 부대가 되었다. 1945년 2월 파르힘에 주둔한 I./JG 1에 첫 He 162가 인도되었고, 4월경 II./JG 1은 기체 인수를 위해 하인켈 공장 근처의 로스토크-마리엔에로 이동했다. 3월 20일, 독일 공군 최고사령부(OKL)는 JG 1 전체를 He 162로 재편성하라고 명령했다.
He 162 ''폴크스예거''(Volksjäger|폴크스예거de, "국민 전투기")는 BMW 109-003E-1 또는 E-2 터보제트 엔진으로 구동되었고, MG 151/20 기관포와 MK 108 30mm 기관포로 무장하여 강력한 화력을 갖추었다. 하지만 약 30분 정도만 비행할 수 있는 단거리 요격기였으며, 조종사들 사이에서는 평가가 엇갈렸다. 시험 비행 조종사 에드가르 페테르젠은 엔진의 고고도 성능 부족, 약한 노즈기어, 연료 누출, 불안정한 비행 특성(특히 롤 기동) 등을 지적했다.
JG 1 조종사들은 He 162 조종이 어렵다고 느꼈다. 조종 장치가 매우 민감했고, 기체가 미끄러지려는 경향이 있었으며, 특히 저속에서 위험했다. 기체와 날개 연결부의 구조적 약점도 문제였다. 엔진이 동체 위에 장착되어 있어 조종석 보호가 취약하다는 점도 지적되었다. 급선회 시 터빈 주변 공기 흐름 제한으로 실속이 발생하기 쉬웠고(300km/h 이하에서 주로 발생), 제트 엔진 배기가스가 수직 꼬리날개를 간섭하여 방향타 대신 에일러론만 사용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II. ''그룹'' 지휘관 파울-하인리히 데네 대위는 이러한 비행 특성을 간과하고 사출좌석으로 탈출하려다 캐노피가 제대로 열리지 않아 사망하기도 했다. 제트 와류로 인해 방향타가 고정되어 기체가 급강하하며 스핀에 빠지는 현상도 보고되었다.
He 162의 공급은 원활하지 못했고, 훈련도 부족했다. 1945년 4월 초까지 II. ''그룹''은 기체를 거의 받지 못했으며, 4월 말에야 10대의 인도를 기대할 수 있었다. 전쟁 말기 혼란 속에서 He 162를 이용한 실전 기록은 거의 없었다. 가장 성공적인 조종사로 알려진 프리드리히 엔더레 하사는 B-17 폭격기 3대를 격추한 전과가 있었으나, 이륙 중 He 162 추락 사고로 사망했다. 종전 시점인 1945년 5월 1일, JG 1은 레크 기지에 45대의 He 162를 보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6. 주요 지휘관
'''비행단장 (Geschwaderkommodore)'''
계급 | 이름 | 임기 시작 | 임기 종료 |
---|---|---|---|
중령 | 카를-아우구스트 슈마허 | 1939년 11월 12일 | 1942년 1월 5일 |
소령 | 에리히 폰 젤레 | 1942년 1월 6일 | 1942년 8월 27일 |
중령 | 에리히 믹스 | 1942년 8월 | 1943년 3월 31일 |
중령 | 한스 필리프 | 1943년 4월 1일 | 1943년 10월 8일 |
소령 | 헤르만 그라프 | 1943년 10월 | 1943년 11월 10일 |
대령 | 발터 외사우 | 1943년 11월 12일 | 1944년 5월 11일 † |
소령 | 하인츠 배어 (대행) | 1944년 5월 12일 | 1944년 5월 20일 |
대령 | 헤르베르트 일레펠트 | 1944년 5월 20일 | 1945년 5월 5일 |
'''제1 비행대(I./JG 1)'''
계급 | 이름 | 임기 시작 | 임기 종료 |
---|---|---|---|
소령 | 베른하르트 볼덴가 | 1939년 5월 1일 | 1940년 2월 |
대위 | 요아힘 슐링 | 1940년 2월 13일 | 1940년 7월 5일 |
선임 중위 | 에리히 믹스 | 1941년 9월 | 1942년 8월 |
선임 중위 | 파울 슈톨테 | 1942년 8월 | 1942년 9월 |
대위 | 귄터 바이세 | 1942년 9월 | 1943년 3월 31일 |
1943년 4월 1일, 제1전투비행단(JG 1)의 제1 비행대(I./JG 1)는 제11전투비행단(JG 11)의 제2 비행대(II./JG 11)로 재지정되었다. 그 결과, 제1전투비행단(JG 1)의 제4 비행대(IV./JG 1)가 제1전투비행단(JG 1)의 새로운 제1 비행대(I./JG 1)가 되었다. | |||
대위 | 프리츠 로지히트 | 1943년 4월 1일 | 1943년 5월 20일 |
소령 | 루돌프-에밀 슈노르 | 1943년 5월 21일 | 1944년 4월 16일 |
대위 | 한스 엘러스 | 1944년 4월 17일 | 1944년 12월 27일 † |
대위 | 게오르크 하크바르트 | 1944년 12월 28일 | 1945년 1월 1일 † |
소령 | 귄터 카피토 | 1945년 1월 3일 | 1945년 1월 14일 |
선임 중위 | 에밀 데무트 | 1945년 1월 15일 | 1945년 4월 12일 |
소령 | 베르너 조버 | 1945년 5월 1일 | 1945년 5월 5일 |
'''제2 비행대(II./JG 1)'''
계급 | 이름 | 임기 시작 | 임기 종료 |
---|---|---|---|
대위 | 한스 폰 한 | 1942년 8월 27일 | 1942년 6월 |
선임 중위 | 데트레프 로어 | 1942년 6월 20일 | 1942년 10월 |
소령 | 헤르베르트 키예스키 | 미상, 1942년 | 1943년 3월 31일 |
대위 | 디트리히 빅코프 | 1943년 4월 16일 | 1943년 5월 16일 |
대위 | 로베르트 올레즈닉 | 1943년 5월 | 1943년 6월 28일 |
대위 | 발터 횔크너 | 1944년 1월 1일 | 1944년 1월 31일 |
대위 | 헤르만 세가츠 | 1944년 2월 | 1944년 3월 8일 † |
소령 | 하인리히 바르 | 1944년 3월 15일 | 1944년 5월 12일 |
선임 중위 | 게오르크-페터 에더 | 1944년 5월 13일 | 1944년 6월 |
선임 중위 | 뤼디거 키르히마이어 (대리) | 1944년 6월 | 1944년 7월 |
대위 | 헤르만 슈타이거 | 1944년 8월 1일 | 1945년 1월 |
선임 중위 | 프리츠 베게너 (대리) | 1944년 12월 | 1945년 3월 1일 |
대위 | 파울-하인리히 데네 | 1945년 3월 | 1945년 4월 24일 † |
'''제3 비행대(III./JG 1)'''
1943년 4월, 제3 비행대(III./JG 1)는 제11전투비행단(JG 11)의 제1 비행대(I./JG 11)로 재지정되었다. 제1전투비행단(JG 1)에는 전투 학교의 작전 비행대를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제3 비행대(III./JG 1)가 추가되었다.
계급 | 이름 | 임기 시작 | 임기 종료 |
---|---|---|---|
대위 | 프리드리히 에버레 | 1944년 1월 1일 | 1944년 4월 27일 |
소령 | 하르트만 그라서 | 1944년 4월 27일 | 1944년 5월 31일 |
대위 | 카를-하인츠 베버 | 1944년 6월 3일 | 1944년 6월 7일 † |
대위 | 알프레트 그리슬라브스키 (대리) | 1944년 6월 7일 | 1944년 6월 |
대위 | 에리히 보이테 | 1944년 6월 | 1944년 8월 |
선임 중위 | 에리히 부흐홀츠 (대리) | 1944년 7월 | 1944년 6월 |
대위 | 하인츠 크노케 | 1944년 8월 13일 | 1944년 10월 |
대위 | 에리히 보이테 | 1944년 10월 | 1944년 12월 24일 † |
대위 | 하랄트 몰덴하우어 | 1944년 12월 25일 | 1945년 5월 5일 |
'''제4 비행대(IV./JG 1)'''
계급 | 이름 | 임기 시작 | 임기 종료 |
---|---|---|---|
대위 | 프리츠 로지히트 | 1943년 3월 | 1943년 4월 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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