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고속도교통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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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도고속도교통영단(약칭 교통영단 또는 영단)은 1941년 7월 4일에 설립된 일본의 특수 법인으로, 도쿄도 23구 및 그 부근의 지하철 건설 및 운영을 담당했다. 2차 세계 대전 중 운수 통제를 위해 도쿄 지하철도와 도쿄 고속철도를 통합하여 노선을 양도받았으며, 영어 표기는 Teito Rapid Transit Authority(TRTA)였다. 1941년 3월 6일 공포된 제도고속도교통영단법에 근거하여 설립되었으며, 2004년 4월 1일 도쿄 지하철 주식회사법 시행으로 도쿄 지하철 주식회사에 모든 권리와 의무가 승계되어 해산되었다. 영단은 4S(Speed, Safety, Security, Service)를 의미하는 S마크를 사용했으며, 2004년 민영화 과정에서 차량 및 사인 시스템을 변경했다. 주요 사건으로는 지하철 사린 사건, 히비야선 나카메구로역 열차 탈선 충돌 사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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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고속도교통영단 | |
---|---|
기본 정보 | |
![]() | |
영문 명칭 | Teito Rapid Transit Authority |
약칭 | 에이단, 교통 에이단, 에이단 지하철 |
전신 | 도쿄 지하철도 주식회사, 도쿄 고속 철도 주식회사 |
후신 | 도쿄 지하철 주식회사 |
설립 | 1941년 (쇼와 16년) 7월 4일 |
해산 | 2004년 (헤이세이 16년) 3월 31일 |
종류 | 특수 법인 |
지위 | 제도 고속도 교통 영단법 |
목적 | 도쿄의 지하철 정비 사업 |
본부 | 도쿄도 다이토구 히가시우에노 3초메 19번 6호 |
관련 조직 | 재단법인 지하철 호조회 |
웹사이트 | 아카이브 |
2. 역사
제2차 세계 대전 후, 일본을 점령한 연합군 최고사령부(GHQ)는 제도고속도교통영단을 제외한 영단을 해산 혹은 공단으로 이행시켰다. GHQ는 당초 영단이 전시 체제 하의 비민주적 조직이라며 폐지를 검토했고, 지하철 운영 주도권을 노리던 도쿄도가 이를 지지했다. 그러나 도쿄도에 지하철 운영 실적이 없었고, '교통영단은 전쟁 목적이 아닌, 당시 세계적인 추세였던 교통 사업 재편 논의의 일환으로 설립되었다'는 국가와 영단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존속되었다.[4]
1960년 도영 지하철 개시, 1987년 국철 분할 민영화 등 교통 경영 환경 변화에도 영단은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 1951년 4월, 영단의 공적 성격 명확화, 운수정책심의회의 답신으로 재정 투융자에 의한 도쿄 지하철 건설 촉진을 위해 각 민간 철도의 출자금을 인상하고, 일본국유철도와 도쿄도로 이관이 이루어졌다.
- 1975년 12월 - 각 열차의 선두 차량 (434량 868곳)에 실버 시트를 도입.
- 1987년 4월 - 국철 분할 민영화에 의해, 일본국유철도의 출자 지분이 일본국유철도 청산사업단에 계승된다.
- 1988년
- * 1월 1일 - 영단 전역에서 전면 금연화를 실시.
- * 봄 무렵 (마루노우치선 02계 데뷔 무렵) - 도어 스티커를 갱신. 이전까지 문자만 있는 주의 환기용이었고, 양쪽으로 열리는 문 차량의 경우 한쪽 문에만 붙어 있었던 것을 캐릭터 일러스트가 그려진 둥근 디자인으로 변경하고 양쪽 문 모두에 부착.
- 1990년
- * 초두 - 도어 스티커를 갱신. 국제 꽃과 녹색 박람회 개최에 따라, 그 선전의 일환으로 기존 캐릭터 일러스트 아래에 꽃 박람회 광고가 들어간 둥근 디자인으로 변경.
- * 투맨 운전 노선에서 차장의 육성 차내 안내 방송이 주류였지만, 여객 서비스 향상과 차장 부담 경감을 위해 성우 시미즈 마키코를 기용한 차내 자동 방송 도입. 01계 일부・02계・03계・05계 일부・6000계 일부・7000계 일부・8000계 8110편성에서 사용 개시. 그 외 차종・편성은 육성 차내 안내 방송 유지.
- * 자동 개찰기 본격 도입 시작.
- * 6월 - '일본국유철도 청산사업단의 채무 부담 경감을 도모하기 위해 헤이세이 2년도에 긴급하게 강구해야 할 특별 조치에 관한 법률' 시행으로 일본국유철도 청산사업단의 출자 지분이 일본 정부에 양도.
- 1991년
- * 도어 스티커를 갱신. 기존 캐릭터 일러스트에서 고양이 캐릭터가 문에 끼이는 디자인으로 변경. 난보쿠선 개통 직전까지 하단에 '''''자동 개찰' 영단 지하철에서는 헤이세이 2년도부터 5개년 계획으로 전역에 설치하겠습니다.'''''라는 자동 개찰기 도입 안내 표시. 이 디자인은 민영화 후에도 '''S 영단 지하철''' 표기를 삭제하고 2007년까지 사용.
- * 차내 자동 방송 말투가 ''''다음은 ○○, ○○입니다.'''''' 였던 것을, 난보쿠선 개통에 따라 운용 개시한 9000계부터 ''''곧 ○○, ○○입니다.''''''로 변경. 다음 해까지 전 노선에서 갱신.
- * 제복을 영단으로서 마지막 변경.
- * 난보쿠선에, 파타파타식이나 방향막식 행선지 표시기 대신, 발차 시각 표시 대응 발광 다이오드식 홈 행선 안내 표시기 도입.
- * 난보쿠선에 구형 수직 버튼식 매표기 대신 높이가 낮고 경사진 버튼식 매표기 신설 (도쿄 메트로화 후에도 교환이 완료되지 않아 수직 버튼식 매표기는 2005년까지 존속).
- 1993년 - 난보쿠선 이외 영단 전역에서 발차 시각 표시 대응 발광 다이오드식 홈 행선 안내 표시기로 교환 시작 (일부 역은 LED 표시였지만 종래 타입 답습).
- 1995년 - 자동 개찰기 영단 전역 도입 완료. 단, 일부 개찰구에는 유인 개찰 잔존.
- 1996년
- * 영단 전 노선 전 차종・차량에서 완전 냉방화 100% 달성[20]。 동시에 마루노우치선에서 터널 냉방 사용 중지. 나카무라 총재 시대에는 1998~1999년경 완전 냉방화를 목표로 했으나, 나가미츠 총재로 교체되며 방침을 바꿔 예정보다 앞당겨 02계 증비를 1996년까지 실시.
- * 3월 - 운수 지령・차량 지령・전력 지령・시설 지령을 통합, 종합 지령소 발족[21]。
- * 4월 - 실버 시트를 모든 차량 (2401량 3050곳)으로 확대.
- 1999년
- * 초두 - LED식 홈 행선 안내 표시기 전역 교환 완료.
- * 11월 1일 - 전 2419량에서 실버 시트를 우선석으로 일제 변경. 휴대 전화 매너 관련 차내 방송 시작.
- 2004년 3월 31일 - 4월 1일 도쿄 지하철 주식회사 발족으로 제도고속도교통영단 폐지・해산 (직원・사옥・역・철도 차량・시설은 도쿄 지하철에 승계).
역대 총재는 다음과 같다.
이름 | 재임 기간 |
---|---|
하라 쿠니조 | 1941년 7월 3일 ~ 1944년 6월 20일 |
기야스 겐지로 | 1944년 6월 21일 ~ 1946년 7월 9일 |
스즈키 키요히데 | 1946년 7월 9일 ~ 1961년 7월 8일 |
우시지마 타츠야 | 1961년 7월 9일 ~ 1970년 4월 1일 |
아라키 시게히사 | 1970년 4월 1일 ~ 1978년 7월 14일 |
야마다 아키요시 | 1978년 7월 15일 ~ 1983년 7월 14일 |
소노무라 야스히코 | 1983년 7월 15일 ~ 1986년 7월 15일 |
나카무라 시로 | 1986년 7월 15일 ~ 1991년 7월 14일 |
나가미츠 요이치 | 1991년 7월 15일 ~ 1996년 7월 14일 |
테라시마 키요시 | 1996년 7월 15일 ~ 2000년 6월 29일 |
도사카 야스토시 | 2000년 6월 30일 ~ 2004년 3월 31일 |
2. 1. 설립 배경
제2차 세계 대전 등을 수행하기 위해 구 일본제국에서 통제관리 목적으로 만든 특수 법인인 '영단'(営団일본어) 가운데 하나로 만들어졌다. '''교통영단'''(交通営団|고쓰에이단일본어)이나 '''영단'''으로 줄여 불리기도 하였다. 해산하기 전까지는 ‘영단’이라고 하면 제도고속도교통영단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 법인이 운영하는 지하철 노선을 영단선(営団線|에이단센일본어)이라고 일컬었다. 영어 표기는 Teito Rapid Transit Authority로, '''TRTA'''라는 약칭도 있었다.제도고속도교통영단법에 기초하여 도쿄도 23구 및 그 부근의 “지하도시고속도교통사업”을 목적으로 1941년 7월 4일에 설립되었으며, 같은 해 9월 1일에 제2차 세계 대전 중의 운수통제를 위하여 육상교통사업정비법에 의해 현재의 긴자 선을 운영하던 도쿄 지하철도와 도쿄 고속철도를 통합하여 노선을 양도받았다.[15][16]
중일 전쟁 중, 국가에 의한 통제 관리를 위해 설치된 '경영재단', 이른바 '영단' 중 하나이다. '제도'는 대일본제국의 수도, 즉 도쿄를 말하며, '고속도'는 신칸센과 같은 고속철도의 의미가 아니라, 과거 시내 교통의 주역이었던 노면전차에 대해 '고속'인 '도시고속철도'의 의미이다.
도쿄 지하철과 도쿄 고속철도에 의해 행해지고 있던 도쿄시의 지하철 건설·운영 사업을 통합하여, 일원적으로 도쿄 지하철을 건설·경영하는 공공 기업체로서 발족했다. 원래는 1930년대의 불황 속에서, 다른 교통 기관과 경쟁을 계속하며 경영난에 빠졌던 교통 사업자를 통합하여 구제하는 '교통 조정'을 목적으로 설립이 검토되었으며(이 이념을 체현한 것이 훗날의 육상교통사업조정법이다[3]。당시 이러한 교통 사업의 재편은, 자동차의 급증을 배경으로 런던이나 베를린에서 이미 행해지고 있어, 세계적인 트렌드였다), 지하철뿐만 아니라 도쿄 근교의 모든 철도와 버스 사업을 담당하는 거대한 교통 사업자가 될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1937년에 중일 전쟁이 개전하면서 일전 호경기가 되어, 이에 따른 수송량의 급증으로 인해 '교통 조정'의 전제가 무너졌다. 그래서 계획이 재검토되어, 지하철의 정비를 신설의 특수법인(교통영단)이 담당하고, 노면전차나 버스 등은 도쿄시(후에 도쿄도)가 관리하는 체제가 되었다[4]。
1941년 (쇼와 16년) 3월 6일에 공포 (같은 해 5월 1일 시행)된 제도고속도교통영단법에 근거하여[15], 도쿄부도쿄시 (1943년, 도쿄도제 시행에 따라 도쿄도가 됨) 및 그 부근의 "지하 도시 고속도 교통 사업"을 목적으로 1941년 (쇼와 16년) 7월 4일 설립되었다[15]。 자본금 6000만엔은 대일본 제국 정부의 4000만엔, 도쿄시의 1000만엔 외에, 도쿄요코하마전철(도요코), 도부철도(도부)가 각 200만엔, 게이세이 전기 궤도(게이세이)・오다큐 전철 (구)(오다큐)가 각 100만엔, 세이부 철도(세이부), 무사시노 철도, 국철 공제 조합이 각 50만엔을 출자했다.
같은 해 9월 1일, 중일 전쟁 중의 전시 체제로 인해, 육상교통사업조정법 (1938년 8월 시행)에 따라 현재의 긴자선을 운영하고 있던 도쿄 지하철도 및 도쿄 고속 철도의 지하철 노선을 인수한 외[16], 양사의 미개통선, 도쿄시의 지하철 미개통선, 게이힌 지하철도의 미개통선 면허를 양수했다[16]。 양수 대가는 총액 1.23235억엔이었으며, 주로 교통 채권으로 지불되었다.[16]
회사명 | 양수 대가 | 양수 내용 |
---|---|---|
도쿄 지하철도 | 6955.400000000001만엔 | * 아사쿠사 - 신바시 간의 개통선, 미타 2초메 - 고탄다 - 마고메 간의 미개통선, 스토어 업[17][16] |
도쿄 고속 철도 | 3097.4만엔 | * 시부야 - 신바시 간의 개통선, 신바시 - 도쿄 간, 신주쿠역 - 쓰키지 간 및 요쓰야미쓰케 - 아카사카미쓰케 간의 미개통선[16] |
게이힌 지하철도 | 149.4만엔 | * 신바시 - 시나가와 간의 미개통선[16] |
도쿄시 | 30.15만엔 | * 메구로 - 미나미센주 간, 도쿄 - 스가모 간, 쓰키지 - 오쓰카 간 및 이케부쿠로 - 다카다노바바 - 스자키 간[18]의 미개통선[16] |
2. 2. 영단 설립과 전시 체제
제2차 세계 대전 등을 수행하기 위하여, 구 일본제국에서 통제관리 목적으로 만든 특수 법인인 '영단'(営団일본어) 가운데 하나로 만들어졌으며, '''교통영단'''(交通営団|고쓰에이단일본어)이나 '''영단'''으로 줄여 불리기도 하였다. 제도고속도교통영단법에 기초하여 도쿄도 23구 및 그 부근의 “지하도시고속도교통사업”을 목적으로 1941년 7월 4일에 설립되었다.[15]1941년 3월 6일에 공포 (같은 해 5월 1일 시행)된 제도고속도교통영단법에 근거하여[15], 도쿄부도쿄시 (1943년, 도쿄도제 시행에 따라 도쿄도가 됨) 및 그 부근의 "지하 도시 고속도 교통 사업"을 목적으로 1941년 7월 4일 설립되었다.[15]。 자본금 6000만엔은 대일본 제국 정부의 4000만엔, 도쿄시의 1000만엔 외에, 도쿄요코하마전철(도요코), 도부철도(도부)가 각 200만엔, 게이세이 전기 궤도(게이세이)・오다큐 전철 (구)(오다큐)가 각 100만엔, 세이부 철도(세이부), 무사시노 철도, 국철 공제 조합이 각 50만엔을 출자했다.
같은 해 9월 1일, 중일 전쟁 중의 전시 체제로 인해, 육상교통사업조정법 (1938년 8월 시행)에 따라 현재의 긴자선을 운영하고 있던 도쿄 지하철도 및 도쿄 고속 철도의 지하철 노선을 인수하였고[16], 양사의 미개통선, 도쿄시의 지하철 미개통선, 게이힌 지하철도의 미개통선 면허를 양수했다.[16]。 양수 대가는 총액 1.23235억엔이었으며, 주로 교통 채권으로 지불되었다.[16]。
양수 대상 기업 | 양수 대가 | 양수 내역 |
---|---|---|
도쿄 지하철도 | 6955.400000000001만엔 | 아사쿠사 - 신바시 간의 개통선, 미타 2초메 - 고탄다 - 마고메 간의 미개통선, 스토어 업[17][16] |
도쿄 고속 철도 | 3097.4만엔 | 시부야 - 신바시 간의 개통선, 신바시 - 도쿄 간, 신주쿠역 - 쓰키지 간 및 요쓰야미쓰케 - 아카사카미쓰케 간의 미개통선[16] |
게이힌 지하철도 | 149.4만엔 | 신바시 - 시나가와 간의 미개통선[16] |
도쿄시 | 30.15만엔 | 메구로 - 미나미센주 간, 도쿄 - 스가모 간, 쓰키지 - 오쓰카 간 및 이케부쿠로 - 다카다노바바 - 스자키 간[18]의 미개통선[16] |
영단 설립 후 1941년 12월 8일,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었지만, 영단 지하철은 설립의 사명인 지하철 신 노선 건설 계획을 추진했다.[19]。
긴급 시공 노선으로 신주쿠 - 도쿄 간을 건설하기로 결정하고[19], 요쓰야미쓰케 - 아카사카미쓰케 간을 1942년도(쇼와 17년도) 착공, 1945년도(쇼와 20년도) 완성, 신주쿠 - 요쓰야미쓰케 간 및 아카사카미쓰케 - 도쿄 간을 1943년도(쇼와 18년도) 착공, 1946년도(쇼와 21년도) 완성 예정으로 했다.[19]。 차량 120량 및 신주쿠 차량기지 계획을 포함한 건설 비용은 1.405억엔을 계획했다.[19]。
이어 이케부쿠로 - 도쿄 간(차량 162량을 포함한 건설 비용은 1.55068억엔), 쓰키지 - 고탄다 간(차량 118량을 포함한 건설 비용은 1.15446억엔)을 1942년도(쇼와 17년도)부터 순차적으로 착공[19], 1947년 이후 완성을 목표로 건설하기로 했다.[19]。
1942년 6월 5일에 요쓰야미쓰케 - 아카사카미쓰케 간의 기공식을 거행하고, 벤케이보리 부근의 건설 공사가 진행되었다.[19]。 그러나, 이후에는 전황 악화로 자금, 자재, 노동력이 부족해지면서 1944년 6월에 건설 공사는 중단되었다.[19]。
2. 3. 전후 영단의 존속과 변화
제2차 세계 대전 후, 일본을 점령한 연합군 최고사령부(GHQ)는 제도고속도교통영단을 제외한 영단을 해산 혹은 공단으로 이행시켰다. GHQ는 당초 영단이 전시 체제 하의 비민주적 조직이라며 폐지를 검토했고, 지하철 운영 주도권을 노리던 도쿄도가 이를 지지했다. 그러나 도쿄도에 지하철 운영 실적이 없었고, '교통영단은 전쟁 목적이 아닌, 당시 세계적인 추세였던 교통 사업 재편 논의의 일환으로 설립되었다'는 국가와 영단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존속되었다.[4]1960년 도영 지하철 개시, 1987년 국철 분할 민영화 등 교통 경영 환경 변화에도 영단은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1941년 3월 6일 공포(같은 해 5월 1일 시행)된 제도고속도교통영단법에 따라,[15] 1941년 7월 4일 도쿄부도쿄시(1943년 도쿄도제 시행 후 도쿄도) 및 그 부근의 "지하 도시 고속도 교통 사업"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15] 자본금 6,000만 엔은 대일본 제국 정부 4,000만 엔, 도쿄시 1,000만 엔 외에, 도쿄요코하마전철(도요코), 도부철도(도부)가 각 200만 엔, 게이세이 전기 궤도(게이세이)・오다큐 전철 (구)(오다큐)가 각 100만 엔, 세이부 철도(세이부), 무사시노 철도, 국철 공제 조합이 각 50만 엔을 출자했다.
같은 해 9월 1일, 중일 전쟁 중 전시 체제로 육상교통사업조정법(1938년 8월 시행)에 따라 도쿄 지하철도 및 도쿄 고속 철도의 긴자선 노선과 미개통 노선, 도쿄시의 지하철 미개통선, 게이힌 지하철도의 미개통선 면허를 양수했다.[16] 양수 대가는 총 1.23235억엔이었으며, 주로 교통 채권으로 지불되었다.[16]
회사명 | 양수 대가 | 양수 내역 |
---|---|---|
도쿄 지하철도 | 6955.400000000001만엔 | 아사쿠사 - 신바시 간 개통선, 미타 2초메 - 고탄다 - 마고메 간 미개통선, 스토어 업[17][16] |
도쿄 고속 철도 | 3097.4만엔 | 시부야 - 신바시 간 개통선, 신바시 - 도쿄 간, 신주쿠역 - 쓰키지 간 및 요쓰야미쓰케 - 아카사카미쓰케 간 미개통선[16] |
게이힌 지하철도 | 149.4만엔 | 신바시 - 시나가와 간 미개통선[16] |
도쿄시 | 301500JPY | 메구로 - 미나미센주 간, 도쿄 - 스가모 간, 쓰키지 - 오쓰카 간 및 이케부쿠로 - 다카다노바바 - 스자키 간[18] 미개통선[16] |
2. 4. 민영화 과정
2001년 12월, 제1차 고이즈미 내각은 약 160개 정도의 특수 법인 및 인가 법인을 대상으로 한 특수 법인 개혁 기본법을 각의 결정하였고[5], 그중 영단을 한조몬선 연장 개업 다음 해인 2004년 봄에 특수 회사화하기로 결정했다.이러한 민영화는 국철 분할 민영화와 비교되기도 하는데, 일본국유철도의 경우 거액의 채무로 경영 파탄을 일으키고 있었던 반면, 영단은 일본국 정부의 행정 개혁의 일환으로 특수 법인 개혁을 실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영에는 문제가 없었다. 또한 도쿄 지하철 건설이라는 인프라스트럭처 정비의 필요성이 남아 있어 민영화에 반대하는 의견이 많았지만, 도시 고속도로 건설의 필요성이 있었던 수도 고속도로 공단도 민영화 대상이었기 때문에 영단도 예외 없이 민영화 대상으로 삼았다.[6]
신회사에서는 신주 발행, 대표이사 선정 등 중요한 사항에 관해서는 행정 기관과의 협의 및 인가가 필요하지만, 사업 계획 및 결산은 일본국 정부(국토교통대신)에 보고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또한 그 외 관련 사업, 사채 모집 등은 영단 시대에는 국가의 인가가 필요했지만, 신회사에서는 불필요하게 되었다. 발족 단계에서는 일본국 정부와 도쿄도가 신회사에 출자(출자율은 일본 정부가 53.4%, 도쿄도가 46.6%)하고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전체 주식을 상장시켜 완전 민영화할 계획이다.
2004년 4월 1일, 도쿄 지하철 주식회사법의 시행으로 영단의 모든 권리와 의무, 설비, 차량은 도쿄 지하철에 승계되었다.
2. 5. 역대 총재
이름 | 재임 기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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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라 쿠니조 | 1941년 7월 3일 ~ 1944년 6월 20일 |
기야스 겐지로 | 1944년 6월 21일 ~ 1946년 7월 9일 |
스즈키 키요히데 | 1946년 7월 9일 ~ 1961년 7월 8일 |
우시지마 타츠야 | 1961년 7월 9일 ~ 1970년 4월 1일 |
아라키 시게히사 | 1970년 4월 1일 ~ 1978년 7월 14일 |
야마다 아키요시 | 1978년 7월 15일 ~ 1983년 7월 14일 |
소노무라 야스히코 | 1983년 7월 15일 ~ 1986년 7월 15일 |
나카무라 시로 | 1986년 7월 15일 ~ 1991년 7월 14일 |
나가미츠 요이치 | 1991년 7월 15일 ~ 1996년 7월 14일 |
테라시마 키요시 | 1996년 7월 15일 ~ 2000년 6월 29일 |
도사카 야스토시 | 2000년 6월 30일 ~ 2004년 3월 31일 |
3. 운영 노선
4. 특징
제도고속도교통영단은 양쪽 개방형 문, WN 구동 방식, 알루미늄 합금 차체, 전기자 초퍼 제어, 착석 구분 좌석 등 최첨단 기술을 적용한 차량을 도입하여 국철, JR, 사철 등에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차량 냉방 장치 및 VVVF 제어 탑재는 차량 기술 및 폐열 문제로 인해 역 구내와 터널 냉방을 우선하여 소극적이었다.[30][31][32] 차량 냉방은 1988년부터 본격 도입되어 1996년에 완료되었다.[33][34]
영단은 관과 민간 공동 출자 형태였으나, 1951년 법 개정으로 민간 자본이 배제되고 일본국유철도(국철 분할 민영화 후 일본국유철도 청산사업단을 거쳐 대장성→재무성)와 도쿄도 출자 공법인으로 변모했다.[15]
일본 민영 철도 협회 및 일본 사철 노동조합 총연합회에 가맹하여 사기업처럼 행동했지만, TV 광고 등 대외 광고는 2003년 6월까지 규제되었다. 지하철 사업은 지방 철도법(철도사업법)에 근거했다.
영단 지하철 시설은 외부인 촬영을 허용하지 않던 시기가 있었고,[7] "철도 포럼"에서는 2012년까지 시설 내 촬영 이미지 게시가 금지되었으나,[8] 대외적 촬영 금지 고지는 없었고, 『철도 팬』 등 철도 잡지에서도 사진 게재 규제는 없었다. 후기에는 사진 촬영 전제 시책도 시행되었다.
4. 1. 4S 마크
영단 마크는 '''S'''를 도안으로 만든 것으로, 지하철을 의미하는 '''Subway'''의 S 외에 다음 네 가지 '''S'''로 시작하는 단어('''4S''')를 의미했다.[12]- '''Speed''' 스피드
- '''Safety''' 안전
- '''Security''' 정확
- '''Service''' 서비스
영단 발족부터 1960년까지는 원 안에 터널 단면과 레일을 배치한 마크를 이용했으나, 1953년 마루노우치선 심볼마크로 처음 등장했고 1960년에 정식 영단 마크가 되었다.[12]
도쿄 메트로로 이행할 때 이 '4S' 마크를 유지해 달라는 의견이 많았지만, 메트로(METRO)의 M을 추상·도안화한 '하트 M' 심볼 마크를 채용했다. 다만 이 마크의 상표권은 현재도 도쿄 메트로가 보유하고 있다.[13]
4. 2. 사인 시스템
영단은 일본 철도 사업자 중 처음으로 사인 시스템(안내 표지 시스템화)을 도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1973년 5월에 치요다선 오테마치역에 도입)[24], 실제 설치는 1972년 12월에 개통한 요코하마 시영 지하철 1호선이 더 빨랐다(개통 시부터 전 역에 도입).[25][26][27]
그전까지 안내 사인 양식이 통일되지 않아, 방대한 문자 정보가 무질서하게 나열되어 있었지만, 외부 전문가에게 위탁하여 다음과 같이 시스템화했다.
- 안내 사인의 표시 서체에는 '''고딕4550'''이 사용되었다.[28]
- 흰색 바탕에 검은색 문자를 기본으로(방향 지시 화살표는 검은색 정방형을 바탕색으로 뺀 것), 개찰구는 녹색, 출구는 노란색으로 하여, 멀리서도 잘 보이도록 표시판이 통로를 좌우로 가로지르는 형태로 게시했다.
- 노선별 라인 컬러로 색칠한 ○표의 노선 심볼을 만들어, 노선명 표시에 반드시 붙이도록 했다.
- 개찰구·출구 부근에는 지하 구내도와 지상 주변 지도를 동일 도면 내에 일체화한 2미터 각의 도해 사인을 배치했다.
- 홈으로 내려가는 계단 상부 벽에는 노선의 정차역 안내를 표시하여, 안내를 읽기 위해 계단 중간에 멈춰 서는 일이 없도록 문자를 크게 했다.
- 홈 위에는 기둥 부착형 환승 노선 안내를 15미터 간격으로 배치했다.
광고와 광고 제휴 안내 사인을 철거하고, 사인 시스템에 기반한 새로운 안내 사인을 설치하여 광고 수입 감소가 예상되었지만, 여객 안내를 최우선으로 했다.[28] 그 대신 열차 차량 내에 새로운 광고 매체를 설치하여 광고 대리점 등의 양해를 얻었다.[28]
체계적으로 구축된 영단 지하철 사인 디자인은 1989년 '89 디자인 이어 기념 일본 디자인상'을 수상했으며, 출구 색상으로 사용한 노란색은 1995년 출구 명시색으로 JIS 규격화되었다.[24] (단, 사인 시스템 도입 전 영단 오테마치역·긴자역[24]이나 1964년 도카이도 신칸센 개업 당시 일본 국철 등, 이미 몇몇 철도 사업자에서 출구 안내 사인에 노란색이 사용된 것에 따른 것이며, 1973년 영단 사인 시스템이 출구를 나타내기 위해 노란색을 사용한 첫 번째 예는 아니다.[28])
1991년 개통한 난보쿠선에서는 7호 비전의 일환으로, 동선의 단독 역을 시작으로 사인 시스템 규정을 일부 개정하여, 지하역 출입구 상부에 둥근 S마크를 게시했지만, 이후 개통 역 및 대규모 개수 역에서는 역 입구 역명 간판과 통합하는 형태로 폐지되었다(S마크는 역 입구 역명 간판에 기재, 역명 간판 베이스 컬러를 짙은 파란색으로 변경[29]). 난보쿠선과 유라쿠초 신선에서는 역명 표지 디자인도 일부 변경되어, 고딕4550은 답습되었지만, 라인 컬러 위치를 맨 위로 가져오도록 수정하고, 라인 컬러 중앙에 역삼각형 도안을 그린 것으로 변경되었다.
영단은 사인 시스템을 "일종의 공공재"라고 생각하여, 오테마치역에서 사인 시스템 도입 후 완성된 매뉴얼을 전국 각지 지하철 사업자에게 무상 배포, 교토, 나고야, 삿포로, 후쿠오카 등 각 도시 지하철이 참고하여 사인 시스템을 구축했다고 한다.
그러나, 개성이 강하게 나타난 영단 지하철 사인 시스템은 민간 기업이 된 도쿄 메트로에는 ○표를 제외하고 계승되지 않고, 남색 바탕에 흰색 문자를 기본으로 하는 새로운 사인 시스템이 도입되어, 기존 안내를 순차적으로 교체했다(단, 민영화 직후 이후에도 일부 영단 시대 사인 시스템이 남아있다).
새로운 사인 시스템에서는 노선 심볼을 표시할 때 남색 바탕을 흰색으로 뺀 다음, ○표와 영문 노선 기호를 표시하고 있어, 디자인적으로 번잡하고, ○표 크기도 작아져, 시인성이 저하되었다는 의견도 있다.[24]
4. 3. 차량
제도고속도교통영단은 발족 이후 양쪽 개방형 문, WN 구동 방식, 알루미늄 합금 차체, 전기자 초퍼 제어, 착석 구분 좌석 등 시대마다 최첨단 기술을 적극적으로 채택한 차량을 도입했으며, 이는 국철, JR, 사철 등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차량 냉방 장치 및 가변 전압 가변 주파수(VVVF) 제어 탑재에는 소극적이었는데, 이는 차량 기술 및 폐열 처리 문제로 인해 차량보다는 역 구내와 터널 냉방을 우선했기 때문이다.[30][31][32] 차량 냉방은 1988년부터 본격적으로 도입되어,[33] 1996년에 모든 차량의 냉방화가 완료되었다.[34]- -|]]|thumb|280픽셀|영단 01계 전동차 (2002년경)]]
이미 영업 운행을 종료한 차량 및 미완성 차량도 포함하여 영단이 운영했던 차량은 다음과 같다.
- 긴자 선
- 1000형 (1968년 운행 종료, 1975년 폐차)
- 1100형 (1968년 폐차)
- 1200형 (1986년 운행 종료)
- 100형 (1968년 운행 종료, 1981년 폐차)
- 200형 (발주만으로 끝난 미완성 형식)
- 1300형 (1986년 운행 종료)
- 1400형 (1986년 운행 종료)
- 1500형 (1986년 운행 종료)
- 1600형 (1986년 운행 종료)
- 1700형 (1986년 운행 종료)
- 1800형 (1986년 운행 종료)
- 1900형 (1987년 운행 종료)
- 1500N형 (1993년 운행 종료)
- 2000형 (1993년 운행 종료, 일부는 히타치 전철, 초시 전기 철도에 매각)
- 01계 (도쿄 지하철이 계속 보유, 2017년 운행 종료, 일부는 구마모토 전기 철도에 매각)
- 마루노우치 선
- 300・400・500・900형 (1996년 운행 종료, 일부는 아르헨티나・부에노스아이레스 지하철에 매각, 현지에서 폐차 후 도쿄 지하철이 보존을 위해 4량을 다시 구입[35])
- 100형 (지선용, 1968년 운행 종료)
- 2000형 (지선용, 1993년 운행 종료)
- 02계 (도쿄 지하철이 계속 보유, 지선용은 2022년에 운행 종료)
- 히비야 선
- 3000계 (1994년 운행 종료, 일부는 나가노 전철에 매각하여 3500계로 운용, 현지에서 폐차 후 도쿄 지하철에서 보존을 위해 2량 편성 1편성이 반환)
- 03계 (도쿄 지하철이 계속 보유, 2020년 운행 종료[36], 일부는 구마모토 전기 철도・나가노 전철・호쿠리쿠 철도・조모 전기 철도에 매각)
- 도자이 선
- 5000계 (도쿄 지하철이 일부 계속 보유, 2007년 운행 종료, 일부는 도요 고속철도에 매각하여 1000계가 되었지만 2006년 운행 종료, 영단차, 도요차 모두 일부는 인도네시아 PT Kereta Api에 매각)
- 05계 (도쿄 지하철이 계속 보유, 민영화 후에도 제조, 일부는 지요다 선(현재는 기타아야세 지선만)에 전속 혹은 PT Kereta Api에 매각)
- 지요다 선
- 5000계 (아야세 - 기타아야세 간 운전용) (도쿄 지하철이 계속 보유, 2014년 운행 종료)
- 6000계 (도쿄 지하철이 계속 보유, 2018년 운행 종료, 대부분은 PT Kereta Api에 매각, 제2편성이 지요다 선 운용 당시 모습 그대로 신키바 차량기지 구내에 보존)
- 06계 (도쿄 지하철이 계속 보유, 2015년 운행 종료)[37][38]
- 유라쿠초 선・신선 (현 후쿠토신 선)
- 7000계 (도쿄 지하철이 계속 보유, 일부는 PT Kereta Api에 매각, 2022년 운행 종료, 제1편성이 부도심선의 모습으로 신키바 차량기지 구내에 보존.)
- 07계 (도쿄 지하철이 전 차량 계속 보유, 현재는 전 차량 도자이 선에 전속)
- 한조몬 선
- 8000계 (도쿄 지하철이 계속 보유, 현재도 일부 차량을 보유 중)
- 08계 (도쿄 지하철이 전 차량 계속 보유, 영단 마지막 신형식 차량)
- 난보쿠 선
- 9000계 (도쿄 지하철이 전 차량 계속 보유, 민영화 후에도 제조)
5. 주요 사건
- 1968년 1월 27일, 히비야선 롯폰기역 - 가미야초역 구간을 운행하던 도부 철도 2000계 회송 열차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6량 중 1량이 완전히 불타고 1량이 절반 정도 탔으며, 승무원과 소방관 11명이 부상당했다. 롯폰기역에서 승객을 모두 하차시킨 덕분에 승객 중 부상자는 없었다.
- 1972년 11월 27일, 히비야선 하행 열차가 히로오역 앞에서 멈춰 운행이 불가능해졌다. 측선에서 점검 중 바닥 아래 기기에서 화재가 발생했으나, 직원의 빠른 대처로 사상자는 없었다.[1]
- 1978년 2월 28일, 도자이선 가사이역 - 미나미스나마치역 사이 아라카와 나카가와 교량 위에서 토네이도로 인해 열차가 탈선하고 뒤집히는 사고가 발생하여 20여 명이 부상당했다.[2]
- 1990년 6월 5일, 마루노우치선 신주쿠역 회차선에서 02계 전동차가 브레이크를 늦게 작동시켜 차막이를 넘어 펌프실 벽에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회차선 사용이 불가능해져 신주쿠 종착 열차는 신나카노역까지 회송 후 회차해야 했다. 사고 당일 신주쿠 종착 열차 2편은 운행 중지, 7일 15편은 오기쿠보역까지 연장 운행되었다. 영단은 사고 사실을 이용자에게 알리지 않았고, 경시청에도 신고하지 않아 7일 밤에야 사고 사실이 알려졌다. 사고 차량은 6월 10일까지 제거되었다.[3]
- 1992년 6월 16일, 히비야선 나카메구로역 회차선에서 도부 철도 2000계 열차가 출고하려던 영단 3000계 열차와 충돌했다. 회송 열차였기 때문에 승객 피해는 없었다.[4]
- 2000년 3월 8일, 히비야선 나카메구로역 부근에서 전차가 솟아오르며 탈선, 마주 오던 전차와 충돌하여 크게 파손되었다. 이 사고로 5명이 사망했으며, 영단 지하철 사고 중 승객 사망자가 발생한 유일한 사고이다.[5]
- 1963년 9월 5일, 지하철 긴자선 폭파 사건 발생. 긴자선 교바시역에 도착 직후 열차 맨 앞 좌석 아래 설치된 시한 폭탄이 폭발하여 승객 10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여배우 요시나가 사유리 앞으로 소카 지로 명의의 협박장이 발송되었으나 미수에 그쳤고, 범인은 검거되지 않은 채 1978년 9월 5일 공소시효가 만료되었다.[6]
- 1995년 3월 20일, 지하철 사린 사건 발생. 히비야선, 마루노우치선, 지요다선 등 5개 열차에 옴진리교 신자들이 신경 가스인 사린을 살포하여 다수의 승객이 사상당하고, 영단 직원 2명이 순직했다. 긴자선, 도자이선, 한조몬선도 당일 오전에 운행이 중단되었다.[7]
참조
[1]
문서
철도청 → 운수통신성 → 운수성 → 국토교통성
[2]
법률
제국고속도교통영단법 제1조
[3]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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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경제사
1954-01
[4]
웹사이트
제국고속도교통영단 설립 80주년, 전쟁에 휘말린 역사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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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아몬드사
2023-03-11
[5]
간행물
철도저널 2003년 3월호 (No.437) P.103 도쿄 지하철 주식회사 (RJ ESSENTIAL)
[6]
간행물
철도저널 2004년 7월호 (No.453) P.59 도쿄의 지하철과 일원화론
[7]
간행물
철도다이아 정보 2002년 2월호 P.33
[8]
웹사이트
【알림】도쿄 메트로 시설 내 사진 촬영이 해금되었습니다
https://www.railforu[...]
철도포럼
2012-04-18
[9]
웹사이트
메트로카드 등의 사용 종료와 잔액의 환불에 대해
https://www.tokyomet[...]
도쿄 지하철
2014-12-15
[10]
웹사이트
연혁
http://www.metrocf.o[...]
[11]
웹사이트
일본 공산당 지하철 위원회
http://members.jcom.[...]
[12]
문서
도쿄 지하철 오기쿠보선 건설사, p.51
[13]
특허
일본 제3077244호, 제3098355호, 제3102904호
[14]
특허
일본 제4796893호, 제4796894호
[15]
문서
도쿄 지하철 마루노우치선 건설사(상), pp.75-77
[16]
문서
도쿄 지하철 마루노우치선 건설사(상), pp.82-84
[17]
문서
지하철 스토어
[18]
문서
고다마바 - 스자키 간은 현재의 도쿄 메트로 도자이선과 거의 같은 노선이다. 스자키는 현재의 에도가와구 토요 2정목이다.
[19]
문서
도쿄 지하철 마루노우치선 건설사(상), pp.84-86
[20]
저널
철도저널
철도저널사
1996-08
[21]
뉴스
영단지하철의 종합지령소 4지령의 일원화 달성
교통신문사
1996-10-22
[22]
뉴스
제국고속도교통영단 총재에 데라시마씨 오늘 발령
교통신문사
1996-07-15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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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서적
역을 디자인한다
치쿠마 신서
2015
[25]
수상
일본 사인 디자인 협회 제7회 일본 사인 디자인상 은상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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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하마시 교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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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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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마 출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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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iatss.or.[...]
공익재단법인 국제교통안전학회
2015-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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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역 입구의 역명 간판은, 남북선 고라쿠엔역의 출입구의 일부에서는 백지에 청문자의 것이었다 등의 예외도 있었다
[30]
문서
1980년대 이후가 되면 직통 운전을 실시하는 국철·사철에서 냉방을 탑재한 차량이 들어오게 되었지만, 지하철 내에서는 냉방 스위치를 꺼고 운행하고 있었다.
[31]
웹사이트
도쿄 메트로에 있어서의 냉방화의 역사
https://web.archive.[...]
도쿄 메트로 뉴스레터
2017-08
[32]
웹사이트
지하철에 있어서의 공기 조화 설비
https://www.hitachih[...]
히타치 제작소
1977-06
[33]
문서
단, 1980년대 이후의 신조차의 일부는 장래의 차량 냉방 탑재를 전제로 한 「냉방 준비차」로서 완성하고 있었다.
[34]
웹사이트
도쿄 메트로에 있어서의 냉방화의 역사
https://www.tokyomet[...]
도쿄 메트로 뉴스레터
2017-08
[35]
웹사이트
아르헨티나 공화국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활약한 마루노우치선 구 500형 차량이 약 20년 만에 도쿄에 귀향합니다! - 도쿄 메트로 프레스 릴리스(7월 20일)
https://www.tokyomet[...]
2016-09-03
[36]
뉴스
東京メトロ03系が北館林まで廃車回送される
http://railf.jp/news[...]
鉄道ファン(交友社)
2017-02-03
[37]
뉴스
【東京地下鉄】06系、新木場へ
http://rail.hobidas.[...]
鉄道ホビダス RMニュース
2015-08-13
[38]
뉴스
東京メトロ06系の解体が始まる
http://railf.jp/news[...]
交友社「鉄道ファン」 railf.jp鉄道ニュース
2015-09-25
[39]
뉴스
暴走地下鉄を”放置” 2日間折り返せず 営団新宿駅構内
朝日新聞
1990-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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