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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소카베 모리치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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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소카베 모리치카는 센고쿠 시대 무장으로, 조소카베 모토치카의 넷째 아들이다. 오다와라 정벌과 임진왜란에 참전했으며,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가담하여 영지를 몰수당했다. 이후 오사카 전투에서 도쿠가와 씨에 대항하다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그는 가독 상속 과정에서 갈등을 겪었고, 세키가하라 전투 패배 후 유배 생활을 거쳤다. 오사카 전투에서는 사나다 유키무라 등과 함께 활약했으나, 결국 패배하여 조소카베 씨는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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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소카베 모리치카
기본 정보
조소카베 모리치카의 초상
이름조소카베 모리치카
로마자 표기Chōsokabe Morichika
한자 표기長宗我部 盛親
출생1575년
사망1615년 6월 11일
출생지시코쿠
사망지오사카
묘소렌코지 (교토부 교토시)
별명우에몬타로(右衛門太郎), 유메(祐夢)
계명領安院殿源翁宗本大居士, 蓮国一栄大禅定門
어린 시절 이름센유마루
가문조소카베 씨
관직
관위궁내소보, 도사노카미
가문 수장조소카베 씨
수장 임기 시작1599년
수장 임기 종료1615년
이전 수장조소카베 모토치카
가계
아버지조소카베 모토치카
어머니모토치카 부인 (사이토 도시미쓰의 여동생)
형제조소카베 노부치카, 가가와 지카카즈, 쓰노 지카타다, 조소카베 우근대부, 조소카베 야스토요, 여자
배우자조소카베 노부치카의 딸 (모리치카 부인, 친조카)
자녀조소카베 모리쓰네, 조소카베 모리타카, 조소카베 모리노부, 조소카베 모리사다, 남자, 우에노 헤이다이부실
군사 활동
소속조소카베 씨, 도요토미 씨, 서군
지휘 지역도사국
주요 전투오다와라 공성전
조선 원정
세키가하라 전투
오사카 전투
덴노지 전투
군대조소카베 씨
기타
주군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요토미 히데요리

2. 생애

조소카베 모토치카의 넷째 아들인 조소카베 모리치카는 1587년 조소카베 노부치카가 사망하면서 조소카베 가문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이후 오다와라 정벌(1590)과 임진왜란에 참전하였다.[1]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이시다 미쓰나리 편에 서서 6,6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참전했다. 이케다 데루마사와 전투를 벌였으나, 큰 전과는 없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사죄했으나 영지를 몰수당했다.[1] 같은 해, 모토치카의 후계자 자리를 두고 경쟁하던 장남 쓰노 치카타다를 처형했다.[1]

1614년 오사카 전투에서 도쿠가와 가문에 맞서 오사카 성을 방어하는 측에 합류하여 사나다 유키무라와 함께 도착했다. 조소카베 부대는 겨울과 여름 전투에서 활약했다. 오사카 성 함락 이후 도주를 시도했으나, 하치스카 병사들에게 체포되어 1615년 5월 11일 아들들과 함께 참수당했다.[1]

2. 1. 가독 상속

덴쇼 3년(1575년), 조소카베 모토치카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지쿠마마루(千熊丸)였다.

덴쇼 14년(1586년) 헤쓰기가와 전투에서 맏형 조소카베 노부치카가 죽자, 가가와 지카카즈나 쓰노 지카타다를 옹립하려는 세력과 가독 상속을 놓고 경쟁했다. 그러나 아버지 모토치카의 지명을 받아 덴쇼 16년(1588년)에 세자(世子)로 지명되었다. 기라 지카자네를 비롯해 반대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는데, 모리치카가 형제들 중에서도 오만하고 경솔한 성격으로 인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모토치카가 어린 지쿠마마루를 세자로 지명한 이유는, 지카카즈와 지카타다가 다른 가계를 이미 잇고 있었고, 모토치카가 아꼈던 아들 노부치카의 딸과 결혼시키기에는 두 사람이 나이 차이가 컸기 때문이었다. 모리치카는 도요토미씨 일문이 아닌 마시타 나가모리를 에보시오야(烏帽子親)로 하여 원복(元服)하고 그의 이름자 한 글자 ‘모리’(盛)를 따서 모리치카(盛親)라 하였고, 도요토미 정권 아래서 조소카베 집안의 격은 더욱 낮아졌다.[3]

조소카베 집안의 가독이 결정된 뒤 아버지 모토치카와 함께 조소카베 집안을 공동 지배하게 되었다. 부자의 이원지배 아래 조소카베씨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덴쇼 18년(1590년) 오다와라 정벌, 덴쇼 20년(1592년)부터 7년 동안 벌어진 임진왜란에도 참전하였다. 분로쿠 3년(1594년) 이후 지행완행권(知行宛行権)이 모리치카에게 이양되었으나, 그 밖의 다이묘 당주로서의 권한은 변함없이 아버지와 공유하였다. 게이초 2년(1597년) 3월 24일에는 아버지 모토치카와 함께 조소카베 모토치카 백개 조를 발표하였다.

2. 2. 세키가하라 전투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가 일어났다. 모리치카는 마스다 나가시게(増田長盛)와 가키미 이치조(垣見一直)와의 인연으로 서군에 가담했는데, 도요토미 정권으로부터 정식 당주로 인정받는 것이 목적이었다.[4] 『고성전승기』(古城伝承記)에 따르면, 처음에는 동군에 가담하려 했으나 오미국 미즈구치(近江国水口)에서 서군에게 길이 막혀 서군에 가담했다고 전해지지만, 야마모토 다이(山本大)는 모리치카와 마스다 나가시게의 관계를 고려할 때 진위가 의심스럽다고 한다.[4]

모리치카는 후시미성 전투(伏見城の戦い) 및 아노쓰성 전투(安濃津城の戦い) 등을 함락시키면서 세키가하라로 향해,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 요시카와 히로이에(吉川広家),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恵瓊), 나가츠카 마사이에(長束正家) 등과 함께 가가야스 본진 후방의 난구산(南宮山)에 포진했다.[4]

그러나 본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내응하는 요시카와 히로이에 때문에 모리 부대는 움직일 수 없었고, 모리 부대 후방에 있던 나가츠카 부대나 조소카베 부대도 모리 부대의 동향을 알 수 없어 움직이지 못했다. 결국 전투에 참가하지 못한 채 서군은 패배했다.

서군 붕괴 후, 모리치카는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소식과 요시다 야스토시(吉田康俊)의 정찰로 서군 붕괴를 알았다.[5] 이케다 데루마사(池田輝政)군이나 아사노 요키나가(浅野幸長)군의 추격을 받아 타라오산(多羅尾山)으로 도망쳤고, 이가국(伊賀国)에서 와카야마현(和泉国)으로 도망쳐 코이데 요시치카(小出吉親)의 추격을 받고 오사카(大坂)의 덴만(天満)에 피해 도사로 돌아갔다.[5]

2. 3. 개역과 칩거

모리치카는 친분이 있던 도쿠가와 씨의 중신 이이 나오마사를 통해 이에야스에게 사죄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도사 이야기』(土佐物語) 등에서는 모리치카가 가신 히사타케 지카나오(久武親直)의 참언을 듣고 형 쓰노 지카타다를 살해하였기에 이에 진노한 이에야스가 모리치카의 영토를 몰수하고 개역시켜버렸다고 한다.[6]

이이 나오마사의 서장에 따르면 모리치카는 도사를 몰수당한 대신에 「어감인분」(御堪忍分)이라는 형태로 대신할 영지를 수여받기로 예정되어 있었고 모리치카의 교토 상경은 거기에 응한 것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접수 때에 구니가 옮겨지게 되는 것에 불만을 품은 가신이나 기라 ・ 쓰노 등의 유신(遺臣)들이 구니를 근거로 우라도 일규(浦戸一揆)를 일으켰고, 그 책임을 물어 「어감인분」 지급을 취소하고 개역에 이르게 되었다는 해석이 있다. 한편으로 쓰노 지카타다 살해의 시비에 대해 언급이 없다는 점에서 이 사건 자체가 개역의 원인은 아니었다는 지적도 존재한다.[4] 다이묘 집안으로써 조소카베 집안은 이때에 멸망하고, 조소카베 가신단은 각지의 다이묘들에게 불려가 기용된 자나 낭인이 된 자, 도로 백성으로 돌아간 자도 있는 등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로닌이 된 모리치카는 게이초 6년에 오사카에서 후시미로 이주해서 다이묘로 복귀하기 위한 운동을 게이초 10년까지 이어나갔다. 게이초 15년에는 삭발하고 오이와 유무(大岩祐夢)라 칭하고 옛 신하들의 돈으로 살았다고 하며, 데라코야의 스승을 하며 살았다는 기록도 있는데 1차 사료에서는 확인되지 않았다. 게이초 17년경에는 교토의 가미타치우리(上立売)에 있는 야나기가즈시(柳ヶ逗子)에서 살고 있었다. 또한 기요하라 히데카타(清原秀賢)와 교우가 있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어찌 되었든 반도쿠가와파 위험인물로써 지목된 모리치카는 교토소사대 이타쿠라 가쓰시게의 감시 아래 놓이게 되었다.

2. 4. 오사카 전투

1614년 오사카 전투(오사카의 진)가 발발하자, 조소카베 모리치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사과문을 보냈음에도 영지를 몰수당했던 과거를 뒤로하고 오사카 성을 방어하는 측에 합류했다. 그는 사나다 노부시게(사나다 유키무라) 등과 함께 이른바 '5인중'이라 불리는 주력 부대를 이끌었다.[1]

겨울 전투에서는 기무라 시게나리, 고토 모토쓰구 등과 함께 하치조메구치(八丁目口)·다니마치구치(谷町口)에 포진, 사나다마루의 지원 거점을 맡았다. 사나다마루 전투에서 성안 화약고 폭발 사고가 발생했고, 난조 모토타다가 이를 배반 신호로 착각하고 공격해 왔으나 이이 나오타카, 마쓰다이라 다다나오 부대에 피해를 주고 격퇴했다. 그 외 대규모 전투는 없었고, 오사카 측과 에도 막부 사이에 화의가 성립되었다.

여름 전투에서는 기무라 시게나리와 함께 이에야스의 본진을 공격하고자 5천여 군세를 이끌고 출진, 도도 다카토라 부대와 격돌했다(야오·와카에 전투). 야오 전투에서 모리치카는 강둑에 병사를 매복시켜 도도 부대를 유인한 뒤 기습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와카에로 진군했던 기무라 시게나리가 이이 나오타카 군세에 패배하고, 이이 부대가 도도 부대를 구원하러 오면서 모리치카는 고립되어 오사카 성으로 퇴각했다. 이 전투에서 모리치카 부대는 큰 피해를 입고 사실상 괴멸되었고, 다음 날 덴노지·오카야마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오사카 함락 후, 모리치카는 도주를 시도했으나 하치스카 병사들에게 체포되어 1615년 5월 11일 아들들과 함께 참수당했다.[1]

2. 5. 최후

1615년 5월 11일, 조소카베 모리치카는 교토 야와타시(八幡市) 부근 하시모토(橋本) 인근 갈대밭에 숨어 있다가 하치스카 요시시게의 가신 나가사카 사부로자에몬(長坂三郎左衛門)에게 발각되어 체포되었고, 후시미로 호송되었다.[1] 그 뒤 교토의 대로변에서 조리돌림당하고 5월 15일에 교토 로쿠조가와라에서 참수되었다.[1] 향년 41세였다.[1]

모리치카의 죽음으로 조소카베씨는 완벽하게 멸망했다.[1] 교토의 렌코지(蓮光寺) 승려가 이타쿠라 가쓰시게에게 요청해 모리치카의 유해를 절에 모셨고, 시호를 '''겐노쇼혼'''(源翁宗本)이라 하였다.[1]

교토 시 시모쿄 구에 있는 렌코지(蓮光寺). 조소카베 모리치카의 목을 장사지낸 곳이다.


3. 가족 관계

아버지조소카베 모토치카 (1539년 ~ 1599년)
어머니모토치카 부인 (사망 1583년)
큰형조소카베 노부치카, 카가와 치카카즈
조소카베 노부치카의 딸
자녀
손자(모리쓰네의 아들) 모리타네 (사망 1615년)



모리치카 사후, 장남 모리쓰네는 후시미에서 참수되었다.[9] 둘째 모리타카와 셋째 모리노부는 도사로 도망쳤으나 야마우치 가문에 의해 처형되었다.[9] 넷째 아들 모리사다와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다섯째 아들은 교토 야와타로 도망쳤으나 이들 역시 모두 붙잡혀 처형되었다.[9]

2015년 6월, 모리치카 사망 400주기를 기리는 법요에서 모리치카의 것으로 전해지는 말갖춤 등자(鐙, 마구의 일종)를 모리치카의 둘째 아들 모리타카의 후손이라고 자처하는 인물이 렌코지에 기증했다.[9] 아부미는 두 개가 한 쌍인데, 그때까지 한쪽 아부미만 렌코지에 소장되어 있었다. 해당 인물이 바친 아부미는 형상과 배색이 모두 렌코지에 소장된 것과 일치하여, 100년 만에 아부미 한 쌍이 갖추어지게 되었다.[9] 자손을 칭한 인물은 할아버지가 백 년 전 300주기 법요 때 절에서 받아온 것이라고 밝혔다.[9] 이것이 사실이라면 오사카 여름 전투 이후 도쿠가와 가문에 의해 철저히 추적당해 쫓겨다녀야 했던 조소카베 모리치카의 핏줄을 이은 인물이 4백 년 동안 존재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일설에 따르면, 도쿠가와 막부 전복을 꾀한 유이 쇼세쓰의 오른팔로 여겨지는 마루하시 주야는 조소카베 모리즈미(長宗我部盛澄)라는 인물로, 모리치카의 측실 소생 차남이라고 한다.

4. 일화


  • 렌코지에 소장된 모리치카의 초상화(원본은 비공개)를 보면 아버지나 형을 많이 닮은 강인한 풍모를 전하고 있다.
  • 오사카 전투에서 패배한 뒤 도쿠가와 측에 잡혀 하쿠슈(白州)로 압송될 무렵, 자결하지 않고 잡힌 것을 도쿠가와 측의 어느 장병이 경멸하며 비웃자 "목숨은 아까운 것이다. 목숨과 오른손이 남아 있어야 이에야스와 히데타다 놈을 지금의 내 꼴로 만들어줄 수 있으니까"라고 대답했다고 한다.[1]출가하겠다」며 목숨을 구걸했다는 이야기도 있다.[1] 그러나 모리치카의 속내를 뻔히 알고 있었던 이에야스는 그의 출가를 허락하지 않았고 끝내 사형에 처했다.[1]
  • 비슷한 일화로 히데타다의 측근이 모리치카에게 "어째서 자결하지 않았나?"라고 묻자 "어엿한 대장의 몸으로 일개 무사처럼 가벼이 자결할 수는 없다. 때가 오면 다시금 병사를 일으켜 내 수치를 씻을 것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상산기담).[1]

참조

[1] 서적 The Samurai: A Military History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3-06-17
[2] 서적 徳川家康没後四〇〇年記念特別展 大関ヶ原展 テレビ朝日ほか 2015-03-28
[3] 논문 長宗我部盛親の家督継承 高知県立歴史民俗資料館 2012
[4] 논문
[5] 논문
[6] 논문
[7] 논문
[8] 논문
[9] 뉴스 長宗我部盛親の馬具、100年ぶりに一対そろう 京都・蓮光寺 https://www.kyoto-np[...] 京都新聞 2015-06-10
[10] 웹사이트 「ワイ、戦国武将・長宗我部元親(ちょうそかべもとちか)の末裔説」を本気で検証してみた。佐賀の『はじまりの名護屋城。』をきっかけに遠い先祖(?)へ思いを馳せる https://news.denfami[...] 株式会社マレ 2024-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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