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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시 스텡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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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케이시 스텡걸은 1890년에 태어나 1975년에 사망한 미국의 야구 선수이자 감독이다. 1912년 메이저 리그에 데뷔하여 외야수로 활동했으며, 브루클린 다저스, 피츠버그 파이리츠 등 여러 팀을 거쳤다. 1934년부터 감독으로 전향하여 브루클린 다저스와 보스턴 브레이브스를 거쳐 뉴욕 양키스 감독을 맡아 10번의 아메리칸 리그 우승과 7번의 월드 시리즈 우승을 이끌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이후 뉴욕 메츠의 초대 감독을 맡았으며, 1966년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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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시 스텡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케이시 스텡걸
1957년의 스텡걸
출생일1890년 7월 30일
출생지미국 미주리주 캔자스시티
사망일1975년 9월 29일
사망지미국 캘리포니아주 글렌데일
포지션우익수 / 감독
타석/투구좌타/좌투
선수 경력
선수브루클린 다저스 / 슈퍼바스 / 로빈스 (1912–1917)
피츠버그 파이리츠 (1918–1919)
필라델피아 필리스 (1920–1921)
뉴욕 자이언츠 (1921–1923)
보스턴 브레이브스 (1924–1925)
코치브루클린 다저스 (1932–1933)
감독브루클린 다저스 (1934–1936)
보스턴 브레이브스 (1938–1943)
뉴욕 양키스 (1949–1960)
뉴욕 메츠 (1962–1965)
통계 (MLB)
타율0.284
홈런60
타점535
감독 기록1,905–1,842
승률0.508
수상 및 업적
월드 시리즈 우승9회 (1921, 1922, 1949–1953, 1956, 1958)
영구 결번뉴욕 양키스 No. 37
뉴욕 메츠 No. 37
기념 공원 헌액해당사항 없음
뉴욕 메츠 명예의 전당해당사항 없음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타임 팀해당사항 없음
명예의 전당 헌액1966년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베테랑 위원회)

2. 생애 초기

찰스 딜런 스텡걸은 1890년 7월 30일 미주리주 캔자스시티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독일과 아일랜드 혈통으로, 1886년 결혼 후 캔자스시티로 이주했다.[1] 찰스 스텡걸은 세 자녀 중 막내이자 둘째 아들이었다.

어릴 때부터 운동을 좋아했던 스텡걸은 모래밭 야구를 즐겼으며, 센트럴 고등학교에서는 야구, 미식 축구, 농구 선수로도 활동했다. 그의 농구팀은 시 챔피언십에서, 야구팀은 주 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1]

십 대 시절, 스텡걸은 여러 세미프로 야구팀에서 선수로 뛰었다. 1908년과 1909년 여름에는 캔자스시티 레드삭스라는 순회팀에서 활동하며 하루에 1USD를 벌기도 했다. 이후 마이너 리그 캔자스시티 블루스로부터 한 달에 135USD를 받는 계약 제안을 받았고, 아버지의 동의를 얻어 계약했다.

스텡걸은 치과의사가 되기를 희망하여 1910년부터 1911년까지 마이너 리그에서 활동하며 번 돈으로 치과 대학에 다녔다. 하지만 왼손잡이였던 그는 오른손잡이용 장비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럼에도 마이너 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브루클린 다저스에 입단하게 되었다. 1912년 시즌 대부분을 서던 어소시에이션(Southern Association) 리그의 몽고메리 클럽에서 뛰면서 2할 9푼의 타율과 뛰어난 주루 능력을 선보이며 도루를 잘하는 선수로 이름을 알렸다. 시즌 막바지에 다저스로 불려가면서 본격적으로 야구 선수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한편, 스텡걸은 캔자스시티에서 야구와 풋볼 코치였던 빌 드라이버와 연락을 유지했고, 드라이버가 미시시피 대학(University of Mississippi)에서 코치를 맡게 되면서 스텡걸도 같은 대학 야구팀 코치를 맡아 13승 9패의 성적을 거두었다. 이 대학 지도자 경력은 훗날 그를 '노 교수'라고 부르게 된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3. 선수 시절

케이시 스텡걸은 1912년 9월 17일 브루클린 다저스 소속으로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다.[1] 14년 동안 외야수로 뛰면서 통산 타율 0.284를 기록했는데, 여러 팀을 옮겨 다녔을 만큼 슈퍼스타는 아니었다. 스텡걸이 거쳐간 팀은 다음과 같다.



스텡걸은 다저스 시절인 1916년과 자이언츠 시절인 1922년, 1923년에 월드 시리즈에 참가했고, 1922년 월드 시리즈에서 뉴욕 양키스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1958년 미국 상원에서 구성한 '메이저 리그의 반독점법 위반'을 조사하기 위한 에스티스 키포버 위원회에서 스텡걸은 자신의 선수 시절에 대해 "많은 세월을 메이저 리그 생활을 했지만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다."라고 증언했다.[15]

1923년 월드시리즈에서 스텡걸은 비록 팀은 패했지만 2개의 홈런을 치며 자이언츠가 2경기를 승리하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시리즈가 끝난 후 만년 하위팀인 보스턴 브레이브스로 트레이드되어 울분을 터뜨려야 했다. 훗날 그는 이 트레이드에 대해 "시리즈에서 홈런을 2개만 치길 다행이었어. 그렇지 않았으면 맥그로는 나를 Three-I 리그[16]로 보냈을 거야."라며 당시 상황을 간략하게 말했다.

스텡걸의 선수 시절 통산 기록은 다음과 같다.

선수 시절 통산 기록
연도소속팀경기타수안타홈런타율
1912브루클린 다저스1757181.316
1913브루클린 다저스1244381197.272
1914브루클린 다저스1264121304.316
1915브루클린 다저스1324591093.237
1916브루클린 다저스1274621298.279
1917브루클린 다저스1505491416.257
1918피츠버그 파이리츠39122301.246
1919피츠버그 파이리츠89321944.293
1920필라델피아 필리스1294451309.292
1921필라델피아 필리스2459180.305
뉴욕 자이언츠182250.227
1922뉴욕 자이언츠84250927.368
1923뉴욕 자이언츠75218745.339
1924보스턴 브레이브스1314611295.280
1925보스턴 브레이브스121310.077


3. 1. 마이너 리그

스텡걸은 1910년 캔자스시티 블루스에서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1] 그 전에 이웃이자 전직 스타 투수인 키드 니콜스로부터 조언을 받았는데, 감독과 고참 선수들의 말을 경청하고, 조언을 거부할 마음이 들더라도 적어도 한 달 정도는 숙고하라는 내용이었다.

a young man in an old-style baseball uniform wears a glove and stares at the camera
1910년 메이즈빌 리버멘의 선수로 활동하던 스텡걸


스텡걸은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 소속의 캔자스시티 블루스에 합류하는 데 실패했다. 이 리그는 최고의 마이너 리그 중 하나로 여겨졌다. 캔자스시티는 스텡걸을 외야수 경험을 쌓도록 클래스 D 노던 어소시에이션의 칸카키 케이스로 옵션시켰다. 그는 칸카키에서 .251의 타율을 기록했지만, 7월에 리그가 해체되었다. 이후 시즌 중반에 연고지를 옮겨 메이즈빌 리버멘이 된 클래스 D 블루 그래스 리그의 셸비빌 그레이스에서 뛰었고, .221의 타율을 기록했다.[1][2] 시즌 마지막 주에 블루스로 복귀했고, 1910년 전체 타율은 .237이었다.

1910–1911년 오프시즌에 스텡걸은 웨스턴 치과대학에 다녔다. 그는 나중에 오른손잡이 장비를 사용하는 왼손잡이 치과의사가 되려는 자신의 고충에 대한 이야기를 하곤 했다. 블루스는 스텡걸을 클래스 C 위스콘신-일리노이 리그의 오로라 블루스에 팔았다. 그는 리그에서 .352의 타율로 1위를 기록했다. 브루클린 다저스의 스카우트인 래리 서튼은 시카고에서 인근 오로라로 가서 스텡걸을 발견했고, 다저스는 1911년 9월 1일에 그의 계약을 구매했다.[1]

3. 2. 브루클린 다저스 (1912-1917)

스텡걸은 1912년 9월 17일에 브루클린 다저스 소속으로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다.[1] 14년 동안 선수 생활을 하면서 외야수로 뛰었고, 통산 타율은 0.284로 준수했지만, 여러 팀을 옮겨 다녔을 만큼 슈퍼스타는 아니었다. 그가 거쳐간 팀은 다음과 같다.

1910년, 스텡걸은 전직 스타 투수인 키드 니콜스로부터 감독과 고참 선수들의 조언을 경청하라는 조언을 받았다. 스텡걸은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 리그에 합류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이후 여러 마이너 리그 팀을 거치며 경험을 쌓았다.[1][2] 야구 선수로서의 성공에 확신이 없었던 스텡걸은 1910-1911년 오프시즌에 웨스턴 치과대학에 다니기도 했다.[1] 이후 브루클린 다저스의 스카우트인 래리 서튼의 눈에 띄어 1911년 9월 1일에 다저스와 계약했다.[1]

다저스는 1912년 시즌을 위해 스텡걸을 클래스 A 서던 어소시에이션의 몽고메리 레벨스에 배정했다. 키드 엘버펠트 감독 아래에서 스텡걸은 .290의 타율을 기록하고 리그 외야 어시스트 1위를 차지하며 실력을 인정받았다.[1] 9월에는 브루클린에 합류하여 메이저 리그를 경험했다.[1] 1914년에는 미시시피 대학(University of Mississippi) 야구팀 코치를 맡아 13승 9패의 성적을 거두기도 했다. 이 경력은 그가 '노 교수'라고 불리게 된 이유 중 하나이다.

스텡걸은 다저스 시절인 1916년에 월드 시리즈에 진출했지만, 팀은 보스턴 레드삭스에 패배했다.

3. 3. 피츠버그 파이리츠와 필라델피아 필리스 (1918-1921)

1918년, 스텡걸은 피츠버그 파이리츠로 트레이드되었다.[15]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해군에 입대하여 브루클린 해군 기지 야구팀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활동했다. 1919년에는 필라델피아 필리스로 트레이드되었다.[15]

3. 4. 뉴욕 자이언츠와 보스턴 브레이브스 (1921-1925)

1921년, 스텡걸은 필라델피아 필리스에서 뉴욕 자이언츠로 트레이드되었다.[1] 자이언츠는 내셔널 리그의 강팀 중 하나였으며, 스텡걸은 이 트레이드를 통해 존 맥그로 감독을 만나게 되었다. 맥그로 감독은 스텡걸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스텡걸은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1921년, 자이언츠에서 스텡걸은 주로 대타로 출전하며 18경기에만 나섰다. 하지만, 팀은 맥그로 감독의 지휘 아래 내셔널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스텡걸은 1921년 월드 시리즈 로스터에는 포함되었지만, 경기에 출전하지는 못했다. 자이언츠는 1921년 월드 시리즈에서 뉴욕 양키스를 5승 3패로 꺾고 우승했다.

1922년, 스텡걸은 백업 외야수로 활약하며 84경기에서 .368의 높은 타율을 기록했다. 자이언츠는 다시 1922년 월드 시리즈에서 양키스와 맞붙었고, 스텡걸은 1차전에서 안타를 쳤지만, 오른 다리 근육 부상으로 인해 대주자와 교체되었다. 결국 자이언츠는 4승 0패 1무로 우승을 차지했다.

1923년에도 스텡걸은 백업과 주전을 오가며 활약했고, .339의 타율을 기록하며 팀의 세 번째 우승에 기여했다. 1923년 월드 시리즈에서 스텡걸은 2개의 홈런을 치며 팀 승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1차전에서는 9회말 4-4 동점 상황에서 인사이드 더 파크 홈런을 쳐 팀에 승리를 안겼다. 3차전에서도 홈런을 기록하며 팀의 1-0 승리를 이끌었다. 하지만, 양키스가 결국 시리즈에서 승리했다.

1923년 시즌 후, 스텡걸은 데이브 밴크로프트, 빌 커닝햄과 함께 보스턴 브레이브스로 트레이드되었다. 스텡걸은 맥그로와의 좋은 관계 때문에 처음에는 트레이드에 불만을 가졌지만, 곧 마음을 바꾸고 브레이브스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1924년, 스텡걸은 브레이브스에서 134경기에 출전하여 .280의 타율과 팀 내 최다 도루(13개)를 기록했지만, 팀은 최하위에 머물렀다. 1925년에는 12경기에만 출전하고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1]

스텡걸의 뉴욕 자이언츠와 보스턴 브레이브스 시절 통산 기록은 다음과 같다.

연도소속팀경기타수안타홈런타율
1921뉴욕 자이언츠4281230.284
1922뉴욕 자이언츠84250927.368
1923뉴욕 자이언츠75218745.339
1924보스턴 브레이브스1314611295.280
1925보스턴 브레이브스121310.077


4. 감독 경력

스텡걸은 1925년 이스턴 리그의 우스터 팬서스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활동하며 감독 경력을 시작했다.[1] 1934년부터 1936년까지 브루클린 다저스, 1938년부터 1943년까지 보스턴 브레이브스 감독을 맡았으나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15]

1944년 밀워키 브루어스(지금의 메이저 리그 팀과 다른 팀)와 1948년 오클랜드 오크스를 리그 우승으로 이끌며 마이너 리그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1949년 뉴욕 양키스 감독으로 선임됐다.

스텡걸은 양키스 감독 시절, 월드시리즈 5연패(1949년 ~ 1953년)를 포함하여 총 7번의 월드시리즈 우승과 10번의 아메리칸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그는 플래툰 기용과 경기 초반 과감한 대타 기용 등 당시에는 잘 쓰지 않던 전략을 활용하며 탁월한 전략가로 명성을 얻었다.[17]

1960년 월드시리즈 패배 후, 70세의 고령에 따른 지휘력 저하를 이유로 양키스 감독직에서 물러났다.[23] 이후 1962년 신생팀 뉴욕 메츠의 초대 감독으로 임명되었으나, 팀의 좋지 않은 성적에도 불구하고 유머스러운 언변으로 많은 인기를 얻었다. 1965년 메츠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4. 1. 마이너 리그 (1925-1931, 1944-1948)

1925년, 스텡걸은 이스턴 리그의 우스터 팬서스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활동하며 감독 경력을 시작했다.[1] 1926년부터 1931년까지 톨레도 머드 헨스 감독을 맡아 1927년 팀을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스텡걸은 감독 역할 외에도 1931년까지 가끔 선수로 출전했으며, 1927년에는 머드 헨스에서 그의 프로 경력 마지막 홈런을 쳤다.

1944년, 밀워키 브루어스(현 밀워키 브루어스와 다른 팀) 감독을 맡아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1945년에는 캔자스시티 블루스 감독을 맡았다. 1946년부터 1948년까지 오클랜드 오크스 감독을 맡아 1948년 퍼시픽 코스트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4. 2. 브루클린 다저스와 보스턴 브레이브스 (1934-1943)

1934년, 스텡걸은 브루클린 다저스 감독으로 임명되며 메이저 리그 감독 경력을 시작했다.[24] 다저스에서 1936년까지 감독을 맡았지만, 좋은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다. 1938년부터 1943년까지 보스턴 브레이브스 감독을 맡았지만, 역시 하위권을 맴돌았다.

1942년 브레이브스에서 스텡걸과 함께 했던 워렌 스판은 "난 아마도 스텡걸이 천재가 되기 전과 된 후에 함께 뛴 유일한 사람일 것이다."라고 회고했다.[26]

4. 3. 뉴욕 양키스 (1949-1960)

스텡걸과 양키스는 각종 우승 기록들을 세우기 시작했다. 스텡걸은 월드시리즈 5연패를 달성한 유일한 감독이 되었으며(1949년 ~ 1953년), 1954년에 우승을 못한 것은 잠시 숨을 돌리는 과정이었을 뿐 이후에도 2번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포함해(1956년, 1958년) 5번의 아메리칸 리그 우승을 더 차지했다. (1955년 ~ 1958년, 1960년)[17]

양키스 감독을 하면서 스텡걸은 당시에는 잘 쓰지 않던 작전을 적시 적소에 쓰면서 탁월한 전략가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예를 들어 투수에 맞춰 좌/우 타자를 플래툰으로 돌리는 것은 1940년대 후반까지 잊혀진 전략이었는데 적절하게 재도입했다. 그리고 경기 전체에서 중요한 시점이라고 판단되면 비록 경기 초반이라도 선발투수를 내리고 대타를 사용하기도 했다.[17]

스텡걸은 감독 능력 외에도 이야기를 재미있게 말하는 기술도 뛰어나 기자들에게 팀을 알리는데 능했고, 미키 맨틀 같은 스타 선수들 못지않은 유명 인사로 꼽혔다. 덕분에 타임지와 같이 스포츠 잡지가 아닌 일반 잡지 표지로 등장하기도 했다. 그가 야구 역사나 전술에 (혹은 관심사나 취미 같은 것들) 대해 얘기할 때면, 마치 의식의 흐름 기법의 소설처럼 생각이 가는 대로 혼자서 중얼거리곤 했다. 스포츠 기자들은 그런 그에게 'Stengelese'[18] 이나 '노 교수' 같은 별명을 붙여줬다.

1953년 봄, 양키스가 월드시리즈 4연패를 달성한 후 그는 다음과 같은 전망을 했다. "만약 우리가 아메리칸 리그 우승에만 다가가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 생각만큼 우리가 똑똑하지는 않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할 겁니다."[19] 이런 그의 호언장담은 요기 베라로 대표되는 '노 교수'의 모범생 같은 스타 선수들에 의해 쉽게 달성되어버렸다.

비록 양키스가 든든한 재정을 바탕으로 한 좋은 선수들을 싹쓸이한 덕을 보기는 했지만, 그 선수들로 성적을 내는 건 감독인 스텡걸이었다. 예를 들어 1949년에는 선수들이 차례차례로 부상당하면서 전력 곳곳에 구멍이 나버렸지만, 스텡걸의 플래툰 시스템은 부상 선수들의 공백을 메꿔줄 수 있었다. 1951년에도 조 디마지오의 하락세가 왔지만 플래툰 시스템이 제 역할을 하며 위기를 넘어갈 수 있었다. 미키 맨틀이 디마지오를 완전히 대체하기는 힘든 상황에서, 두 선수 중 컨디션이 좋은 선수를 먼저 기용하고, 경기 후반에 다른 선수를 출전시키는 방식으로 시즌을 꾸려나갔다. 결국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를 뿌리치면서 아메리칸 리그 정상에 올랐고, 월드시리즈에서 뉴욕 자이언츠를 만나 4-2로 승리하면서 우승을 차지했다.[20]

1960년 월드시리즈에서 피츠버그 파이리츠빌 매저로스키가 날린 7차전 9회말 끝내기 홈런으로 패배하자 사람들은 70세의 고령에 따른 지휘력 저하를 의심했고, 이때문에 "다시는 70살을 먹는 실수를 범하지 않겠다"라고 말한 뒤 감독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23] 양키스가 1949년에서 1960년까지의 12년 동안 10번의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과 7번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했던 것은 바로 스텡걸의 지휘 아래였다. 리그 챔피언이 되지 못한 해는 딱 2년밖에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1960년의 시리즈에서 스텡걸의 지휘력에 대한 평가는 하락해버렸다. 한 수 아래로 여겨지던 피츠버그에게 7차전에서 패한데다, 에이스 화이티 포드를 1차전부터 투입하지 않고 3차전에 등판시키는 바람에 2번밖에 등판하지 못했던 것이 스텡걸의 전략 미스로 여겨졌다. 결과적으로 화이티 포드는 2경기 모두 완봉승을 거뒀고 (홈에서 거둔 1승은 양키스 팬들에게 더욱 강한 인상을 줬다.) 포드 대신에 1경기에 등판했던 아트 디트마르(Art Ditmar)는 패했기 때문에 스텡걸의 투수 기용에 더욱 아쉬움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4. 4. 뉴욕 메츠 (1962-1965)

1961년 양키스에서 물러난 뒤, 스텡걸은 1962년 신생팀 뉴욕 메츠의 초대 감독으로 임명되었다.[24] 당시 메츠는 메이저 리그 확장으로 생긴 팀이라 계속해서 패배를 거듭했다. 스텡걸은 자신의 나이에 대한 조롱에도 불구하고 "남북 전쟁 무렵 사라진 뉴욕의 야구팀 니커보커스와 함께 하게 된 것을 영광이다."라는 말과 함께 감독으로 복귀했다.

스텡걸은 메츠의 좋지 않은 성적에도 불구하고 유머스러운 어록을 많이 남겼다.

  • "나의 '놀라운 메츠팀'을 와서 보라. 내가 오랜 세월 동안 야구를 봐왔지만, 전에 누구도 본 적 없는 방식으로 지는 팀이 여기에 있다."
  • "나에게는 3명의 포수가 있는데, 하나는 던질 줄은 아는데 받지를 못하고, 다른 하나는 받을 줄은 아는데 던질 줄 모른다. 그리고 나머지는 칠 줄은 아는데 수비가 안된다."
  • 신인 에드 크레인풀과 그렉 그로슨에 대해서는 "저기 있는 저 20살의 선수를 보라. 10년 안에 스타가 될 것이다. 그리고 또 한 명의 20살 선수를 봐라. 10년 안에 30살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25]


메츠의 성적은 스텡걸 감독 부임 동안 계속 리그 꼴찌를 기록했지만, 스텡걸은 여전히 인기가 많았다. 메츠는 '사랑스러운 패배자'라는 매력을 어필했고, 브루클린 다저스와 뉴욕 자이언츠가 서부로 떠난 뒤 양키스를 응원하지 않던 뉴욕의 야구팬들은 옛 폴로 그라운드(옛 뉴욕 자이언츠의 홈 구장이자 메츠가 셰이 스타디움이 새로 지어지기 전까지 있었던 구장)를 가득 채우며, 다양한 색깔의 플래카드와 구호로 응원했다.

1942년 브레이브스와 1965년 메츠에서 스텡걸과 함께 했던 워렌 스판은 "난 아마도 스텡걸이 천재가 되기 전과 된 후에 함께 뛴 유일한 사람일 것이다."라고 말했다.[26]

1965년 8월 30일, 스텡걸은 메츠 감독직에서 물러난다는 사실을 발표했고, 한 달 뒤 교통사고로 부상을 입었다.

5. 은퇴 이후와 죽음

1966년, 스텡걸은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2] 그의 등번호 37번은 뉴욕 양키스뉴욕 메츠에서 영구 결번되었다. 양키스는 1970년 8월 8일에, 메츠는 1965년 9월 2일에 그의 등번호를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1976년 7월 30일, 양키스는 모뉴먼트 파크에 스텡걸을 기념하는 명판을 세웠다.[2]

1975년 9월 14일, 스텡걸은 캘리포니아주 글렌데일에 있는 병원에 입원하여 림프샘 암 진단을 받았다. 그는 15일 후인 1975년 9월 29일에 사망했고, 포레스트 론 메모리얼 파크 묘지에 안장되었다.[2]

6. 유산 및 평가

케이시 스텡걸은 메이저 리그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감독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그는 플래툰 시스템을 널리 알리고, 젊은 선수들을 키워내는 데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그의 독특한 말투는 '스텡걸어록(Stengelese)'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며 야구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스텡걸은 뉴욕 양키스뉴욕 메츠 두 팀에서 모두 영구 결번된 유일한 인물이다.

스텡걸은 야구에서 플래투닝을 다시 활성화시켰다. 스텡걸의 선수 시절 대부분은 공격 플래투닝 이후였는데, 좌타자를 우완 투수, 그 반대의 경우를 선택하는 전술은 1914년 보스턴 "미라클" 브레이브스가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하며 성공적으로 사용했다. 이것은 플래투닝의 광범위한 사용을 촉발했다. 스텡걸 자신도 선수 시절 여러 번 우완 투수 상대로 플래투닝을 했지만, 이 관행은 1930년경에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스텡걸은 이를 양키스에 다시 도입했고, 팀의 성공 속에서 이 전술의 두드러진 사용은 다른 팀들이 이를 따라 하게 만들었다.[2] 빌 제임스는 스텡걸과 얼 위버를 가장 성공적인 플래툰 감독으로 평가했다.

이러한 전략적 선택은 투수들에게도 적용되었으며, 스텡걸은 자신의 투수진을 활용하여 최고의 투수를 최고의 상대를 상대로 선발 등판시켰다. 스텡걸이 양키스에서 이 전술을 사용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브루클린과 보스턴을 감독하던 시절에도, 그리고 매우 제한적인 범위에서 메츠에서도 이를 사용했다. 투수가 최대한 많은 선발 등판을 할 수 있도록 정기적인 선발 로테이션을 사용하는 대신, 스텡걸은 종종 투수들에게 더 긴 휴식을 주어 자신이 인지하는 상황적 이점을 활용했다. 예를 들어, 스텡걸은 에디 로파트가 클리블랜드를 상대로 정기적으로 승리했기 때문에, 가능할 때마다 그를 선발 투수로 내세웠다.

제임스는 스텡걸이 1950년대 최고의 감독이었을 뿐만 아니라, 야구 역사상 한 시대를 지배한 가장 뛰어난 감독이었다고 언급했다. 스텡걸은 양키스 감독으로 재임하는 동안 다른 팀들과는 달리, 자신의 모든 선수들을 활용했다. 다른 팀에서는 대타 선수들이 거의 출전 기회를 얻지 못했다. 스텡걸의 플래투닝 사용은 더 많은 선수들이 더 많은 경기에 출전하는 것을 의미했고, 그는 다른 감독들보다 대타를 투입하거나 투수를 교체하는 경향이 더 컸다.

스텡걸은 종종 내야수들을 포지션별로 로테이션했는데, 양키스는 1954년부터 1958년까지 정규 2루수나 유격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키스는 강력한 수비 내야진을 유지했다. 스텡걸은 병살타에 큰 주의를 기울였고, 수비와 라인업 계획 모두에서 이를 고려했으며, 양키스는 그의 12년 재임 기간 동안 6번이나 리그에서 병살타 수비 1위를 기록했고, 타자들은 그 시대에 팀으로서 가장 적은 병살타를 기록했다.

마티 아펠은 스텡겔에 대해 "그는 모든 시대의 사람이 아니었고, 야구 시즌을 위한 사람이었다"고 썼다. 스텡겔은 5번 연속 월드 시리즈에서 자신의 클럽을 승리로 이끈 유일한 감독으로 남아있다.[2] 그가 그 업적에 대해 얼마나 공로를 인정받아야 하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데, 그가 관리했던 양키스 팀의 재능 때문이다. 박에 따르면, "일부 양키스를 포함한 논쟁은 팀이 너무 좋아서 ''누구든지'' 팀을 타이틀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필 리주토는 "당신이나 내가 관리하고 여름을 보낸 후에도 저 깃발들을 딸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빌 베크는 1966년, 감독의 은퇴 직후 스텡겔에 대해 "그는 반드시 가장 위대한 감독은 아니었지만, 승리할 기회가 있는 야구 클럽을 가지고 있을 때는 언제나 승리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스텡겔의 아메리칸 리그 라이벌인 알 로페스는 한때 그에 대해 "나는 그가 감독할 때 하는 일 중 일부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라고 말했다. 비록 플래투닝이 살아남았지만, 스텡겔의 직관적인 관리 방식은 더 이상 야구에서 통용되지 않으며, 통계의 사용으로 대체되었다.

스텡겔은 메츠를 성공적으로 창단하는 데 기여한 역할로 칭찬을 받았다. ''뉴욕 타임스''의 아서 데일리는 "그는 메츠가 가장 필요할 때 필요한 동력을 제공했다. 그는 그들을 출발시키고 여정을 시작하게 해준 부스터였다. 그가 폭발과 함께 생성한 연막은 결점을 가렸고, 메츠에게 그가 없이는 얻을 수 없었던 수용과 추종을 안겨주었다"라고 썼다. 제임스는 "스텡겔은 너무나 거대한 인물이 되어서, 과거형으로 그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다. 그는 경기의 지속적인 부분이 되었다"라고 썼다.

짐 크로우 시대의 아이였고, 국경 주 (미주리) 출신인 스텡겔은 때때로 인종차별주의자로 비난을 받았다. 예를 들어 로이 캄파넬라 주니어는 스텡겔이 월드 시리즈 기간 동안 덕아웃에서 그의 아버지 로이 캄파넬라, 재키 로빈슨 및 다른 다저스의 흑인 스타들에게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했다고 진술했다. 박은 스텡겔이 "악독하고 창의적인" 벤치 조키였으며, 상대 팀을 그들의 퍼포먼스를 망칠 수 있는 모든 것으로 괴롭혔다고 언급했다. 스텡겔은 로빈슨과 좋지 않은 관계를 가졌고, 서로 싫어했으며, 공개적인 비판자였다. 그러나 엘스턴 하워드는 스텡겔이 다저스에게 인종차별적인 욕설을 외쳤다는 것을 부인하며 "나는 케이시 주변에서 어떤 편견도 느껴본 적이 없다"라고 말했다. 스텡겔 밑에서 메츠의 흑인 투수였던 알 잭슨은 "그는 나를 존경심 외에는 어떤 방식으로도 대하지 않았다"라고 동의했다. 시대의 변화를 의식한 스텡겔은 메츠와 함께 있을 때 자신의 단어 선택에 더 주의를 기울였다.

그의 등번호 37번은 양키스와 메츠 두 팀 모두에게서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고, 메츠에서는 오직 스텡걸만이 착용한 번호였다. 양키스는 1970년 8월 8일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고, 1976년 7월 30일 모뉴먼트 파크에 그를 기념하는 명판을 봉헌했다. 명판에는 "영원한 젊음으로 50년간 야구를 밝힌 사람. 양키스 감독(1949년~1960년). 10번의 리그 우승과 월드시리즈 5연패(1949년 ~ 1953년)를 포함한 7번의 제패"라는 문구가 쓰여져 있다. 덧붙여 명예의 전당에는 1966년에 입성했고, 뉴욕 메츠 명예의 전당에는 1981년에 입성했다. 스텡걸은 MLB 역사에서 유일하게 감독성적으로 여러 팀에서 영구 결번으로 지정된 사람이다.

명예의 전당에 있는 케이시 스텡걸의 명판


메츠의 현재 야구장인 시티 필드에 있는 스텡겔 게이트 (2017년 촬영)

7. 통산 성적

1959년 양키스는 79승 75패로 3위를 기록했는데, 이는 1925년 이후 최악의 성적이었다.[2] 스텡걸은 너무 늙었고 선수들과 소통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1959년 시즌 후, 로저 매리스가 양키스로 트레이드 되었고, 스텡겔은 그를 3번 타자로 기용하여 매리스는 1960년에 MVP 시즌을 보냈다. 스텡겔은 1960년 시즌 중 건강 문제로 10일 동안 입원하기도 했다. 양키스는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도전을 받았지만, 스텡겔의 감독으로서 열 번째 페넌트를 획득하여 메이저 리그 기록과 동률을 이루었다.

1960년 월드 시리즈에서 양키스는 피츠버그 파이리츠와 맞붙었다. 스텡겔은 15승 투수 아트 딧마를 1차전 선발로 내세웠으나 파이리츠는 1회에 딧마를 무너뜨리고 승리했다. 딧마는 5차전에서도 무너졌고, 화이티 포드는 3차전과 6차전에서 완봉승을 거두었지만 7차전에는 등판할 수 없었다. 파이리츠는 빌 마제로스키의 9회말 홈런으로 7차전에서 10-9로 승리했다.

양키스가 뉴욕으로 돌아온 직후, 스텡겔은 구단주로부터 새로운 계약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1960년 10월 18일, 스텡겔은 기자 회견에서 "사임, 해고, 뭐가 됐든 상관없다"라고 말하며 해고 사실을 알렸다. 구단주는 스텡겔이 70세의 나이 때문에 해고되었으며, 양키스가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했더라도 해고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7. 1. 선수 시절

케이시 스텡걸은 1912년 브루클린 다저스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하여, 피츠버그 파이리츠, 필라델피아 필리스, 뉴욕 자이언츠, 보스턴 브레이브스를 거쳐 1925년까지 선수로 활동했다.

통산 타격 성적은 다음과 같다.

통산 타격 성적
연도나이리그경기타석타수득점안타2루타3루타홈런타점도루볼넷삼진타율출루율장타율OPS
191221BRONL1774579181011351590.3160.4660.3860.852
191322BRONL124502438601191687431956580.2720.3560.3930.748
191423BRONL1264834125513013104601956550.3160.4040.4250.829
191524BRONL132510459521092012350534460.2370.2940.3530.647
191625BRONL127511462661292788531133510.2790.3290.4240.753
191726BRONL1506225496914123126731860620.2570.3360.3750.711
191827PITNL391421221830411121116140.2460.3430.3200.663
191928PITNL89370321389410104431235350.2930.3640.4240.788
192029PHINL12950444553130256950738350.2920.3560.4360.792
192130PHINL24665971831041670.3050.3690.3900.759
NYGNL1823224510020150.2270.2610.2730.534
전체NL4289811123410617120.2840.3410.3580.699
192231NYGNL842832504892810748421170.3680.4360.5641.000
192332NYGNL752462183974115543620180.3390.4000.5050.905
192433BSNNL131518461571292065391345390.2800.3480.3820.730
192534BSNNL1215130100020120.0770.1430.0770.220
통산1,2774,8694,2885751,21918289605351314374530.2840.3560.4100.766


7. 2. 감독 시절

스텡걸은 1934년부터 1936년까지 브루클린 다저스 감독을 맡았고, 이후 보스턴 브레이브스로 옮겨 1938년부터 1943년까지 감독직을 수행했다. 당시 브레이브스는 리그에서 하위권을 맴도는 약팀이었다. 스텡걸은 "나는 몇몇 메이저 리그 팀에서 감독직을 수행하다 잘렸다. 내가 당시 거둔 성적들을 보면 나는 팀에서 잘린다는 표현이 매우 적절했다."라고 회상하기도 했다.[15]

1944년, 스텡걸은 마이너 리그 밀워키 브루어스를 맡아 팀을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 리그 우승으로 이끌며 지도력을 발휘했다. 1948년에는 퍼시픽 코스트 리그오클랜드 오크스를 맡아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1949년에 뉴욕 양키스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양키스 감독 시절, 스텡걸은 당시에는 드물었던 플래툰 시스템을 적극 활용하고, 경기 초반이라도 중요한 순간에는 선발 투수를 교체하는 등 과감한 전략을 선보였다.[17] 이러한 전략을 통해 양키스는 1949년부터 1953년까지 월드 시리즈 5연패를 달성했고, 1956년과 1958년에도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또한 1955년부터 1958년, 그리고 1960년에는 아메리칸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스텡걸은 선수 시절의 경험과 유머 감각을 바탕으로 언론과 대중에게 팀을 알리는 데 능숙했고, 미키 맨틀과 같은 스타 선수들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 타임지 표지에 등장하기도 했으며, 그의 독특한 화법은 'Stengelese'[18]라는 별명을 얻었다.

1953년, 양키스가 월드시리즈 4연패를 달성한 후 스텡걸은 "만약 우리가 아메리칸 리그 우승에만 다가가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 생각만큼 우리가 똑똑하지는 않다고 생각하기 시작할 것이다."[19]라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1960년 월드 시리즈에서 피츠버그 파이리츠에게 패배한 후, 스텡걸은 70세의 나이로 인해 감독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는 "다시는 70살을 먹는 실수를 범하지 않겠다"라는 말을 남겼다.[23] 양키스 감독으로 12년 동안 10번의 아메리칸 리그 우승과 7번의 월드 시리즈 우승을 이끌었지만, 1960년 월드시리즈에서의 투수 기용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양키스에서 물러난 후 1년 뒤, 스텡걸은 신생팀 뉴욕 메츠의 감독으로 현장에 복귀했다. 그는 "니커보커스와 함께 하게 된 것을 영광이다."라는 말과 함께[24] 메츠 감독직을 수락했다. 메츠는 약팀이었지만, 스텡걸은 유머와 재치로 팀을 이끌며 많은 명언을 남겼다.

1965년 8월 30일, 스텡걸은 메츠 감독직에서 물러났고, 한 달 후 교통사고로 부상을 입었다.

워렌 스판은 "난 아마도 스텡걸이 천재가 되기 전과 된 후에 함께 뛴 유일한 사람일 것이다."라고 말했다.[26]

스텡걸의 감독 시절 통산 성적은 다음과 같다.

연도리그경기승률순위비고
1934브루클린 다저스NL15371810.4676
1935브루클린 다저스NL15470830.4585
1936브루클린 다저스NL15667870.4357
1938보스턴 비스NL15377750.5075
1939보스턴 비스NL15263880.4177
1940보스턴 비스NL15265870.4287
1941보스턴 브레이브스NL15662920.4037
1942보스턴 브레이브스NL15059890.3997
1943보스턴 브레이브스NL10747600.4396시즌 중 두 번째
1949뉴욕 양키스AL15597570.6301월드시리즈 우승
1950뉴욕 양키스AL15598560.6361월드시리즈 우승
1951뉴욕 양키스AL15498560.6361월드시리즈 우승
1952뉴욕 양키스AL15495590.6171월드시리즈 우승
1953뉴욕 양키스AL15199520.6561월드시리즈 우승
1954뉴욕 양키스AL155103510.6692
1955뉴욕 양키스AL15496580.6231아메리칸리그 우승
1956뉴욕 양키스AL15497570.6301월드시리즈 우승
1957뉴욕 양키스AL15498560.6361아메리칸리그 우승
1958뉴욕 양키스AL15592620.5971월드시리즈 우승
1959뉴욕 양키스AL15579750.5133
1960뉴욕 양키스AL15597570.6301아메리칸리그 우승
1962뉴욕 메츠NL161401200.25010
1963뉴욕 메츠NL162511110.31510
1964뉴욕 메츠NL163531090.32710
1965뉴욕 메츠NL9631640.32610시즌 중 첫 번째
브루클린 다저스 합계4632082510.453
보스턴 브레이브스 합계8703734910.432
뉴욕 양키스 합계1,8511,1496960.623리그 우승 10번, 월드시리즈 우승 7번
뉴욕 메츠 합계5821754040.302
전체 합계3,7661,9051,8420.508리그 우승 10번, 월드시리즈 우승 7번


8. 수상 경력

스텡걸 감독의 수상 및 영구 결번 기록
연도내용
1949-1953월드 시리즈 5연패
1949-1953, 1955-1958, 1960아메리칸 리그 우승 10회
1949-1953, 1956, 1958월드 시리즈 우승 7회
1965뉴욕 메츠 영구 결번 (No. 37)[7]
1966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8]
1969프로 야구 100주년 기념 "최고의 생존 감독" 선정[6]
1970뉴욕 양키스 영구 결번 (No. 37)[6]
1976모뉴먼트 파크 헌액. 명판에는 "50년 이상 야구를 빛냄; 영원한 젊음의 정신으로; 1949–1960년 양키스 감독, 10번의 페넌트 우승과 7번의 월드 챔피언십 우승(1949–1953년 5연승 포함)"라는 내용이 적혀있다.[6]
1981뉴욕 메츠 명예의 전당 헌액[8]
2009MLB 네트워크 "야구계 최고의 캐릭터" 선정 (\요기 베라를 제치고 선정)[6]


참조

[1] 웹사이트 Casey Stengel http://sabr.org/biop[...] Society for American Baseball Research 2017-10-03
[2] 뉴스 It's a Long Way Back to Kankakee https://news.google.[...] 1960-05-11
[3] 뉴스 Nap Rucker Holds Pirates in Check and the Winning Streak is Broken https://news.google.[...] 1912-09-18
[4] 뉴스 On and Off the Field https://news.google.[...] 1912-09-18
[5] 웹사이트 Casey Stengel https://www.baseball[...] Sports Reference 2015-09-27
[6] 뉴스 The Greatest Man in Baseball?' Here's A Vote for Stengel https://www.latimes.[...] 1985-08-11
[7] 뉴스 Shaq and 31 More Athletes with Numbers Retired by Multiple Teams http://www.foxsports[...] 2016-02-12
[8] 웹사이트 Mets Hall of Fame http://newyork.mets.[...] New York Mets 2017-09-04
[9] 뉴스 Question Box https://www.nytimes.[...] 1987-04-06
[10] 뉴스 ニューヨークの両球団、ヤンキースとメッツでそれぞれ50本塁打以上の2人が球界を去った https://news.yahoo.c[...] Yahoo!ニュース 2020-02-02
[11] 문서 他に当時の[[ボードヴィル]]のヒットソング"Casey at the Bat"から名付けられたとも言われている。
[12] 문서 現存するメジャー球団の[[ミルウォーキー・ブルワーズ]]とは異なり、当時はブレーブス傘下のAAA球団であったが、[[1952年]]限りで消滅している。
[13] 문서 "There is less wrong with this team than any team I have ever managed."
[14] 문서 "I'm probably the only guy who worked for Stengel before and after he was a genius."
[15] 서적 https://archive.org/[...]
[16] 문서 일리노이(Illinois)-인디애나(Indiana)-아이오와(Iowa)의 3주에서 주로 경기를 하는 마이너리그를 뜻한다.
[17] 웹인용 지명타자제도 (指名打者制度, designated hitter system) http://100.naver.com[...] 네이버 백과사전
[18] 문서 스텡걸이 사라진, 넋을 잃은
[19] 서적
[20] 서적 https://archive.org/[...]
[21] 웹인용 exploding scoreboard 사진 http://flyingsock.co[...] 2011-03-04
[22] 서적
[23] 웹인용 (타임머신)8월29일-케이시 스텡걸 http://column.inews2[...] 조이뉴스24 2005-08-29
[24] 서적
[25] 문서 크레인풀은 스타가 된 적은 없지만 18년 동안 선수생활을 지속했고, 선수 생활 동안 메츠에서만 뛰다 1979년에 은퇴를 했다.
[26]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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