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타 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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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히로타 내각은 1936년 3월 9일부터 1937년 2월 2일까지 331일 동안 재임한 일본의 내각이다. 2·26 사건으로 오카다 내각이 물러난 후, 고노에 후미마로가 총리직을 고사하면서 외무대신 히로타 고키가 총리 후보로 지명되어 성립되었다. 히로타 내각은 바바 재정, 외교 정책 등을 추진했으나, 육군의 영향력 확대와 내각 불일치로 인해 총사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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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타 내각 | |
---|---|
내각 정보 | |
내각 명칭 | 히로타 내각 |
일본어 명칭 | 廣田内閣 |
대수 | 32대 |
총리 | 히로타 고키 |
전직 | 외무대신 |
성립 | 1936년 3월 9일 |
종료 | 1937년 2월 2일 |
지휘 | 쇼와 |
이전 내각 | 오카다 내각 |
후임 내각 | 하야시 내각 |
여당 | 거국일치 내각 |
참여 정당 | 입헌민정당 쇼와회 |
정부 수반 직함 | 총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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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각 번호 | 32대 |
의회 | |
회기 | 제69회 제국의회 제70회 제국의회 |
의회 현황 | 다수 (연립) |
링크 | |
관저 링크 | 내각 명부 |
2. 재직 기간
1936년 3월 9일부터 1937년 2월 2일까지 총 331일 동안 재직하였다.
1936년 2월 26일, 육군 청년 장교(황도파) 및 민간 우익이 급진적인 사회 혁신(쇼와 유신)을 꾀하는 쿠데타(2·26 사건)를 일으켰다. 이 사건은 실패했지만, 당시 오카다 내각은 책임을 지고 총사퇴했다. 이후 수상을 추천할 권한을 가진 사이온지 긴모치원로는 혈통과 사회적 명성이 모두 당대 최고였던 고노에 후미마로귀족원 의장을 "중정(中正)한 인물"로 적임자로 여겼다.[1] 그러나 고노에 의장은 심정적으로 황도파의 혁신주의에 가까운 면이 있었고, 황도파로 대표되는 테러리즘을 억제하기 위한 상징으로 자신을 추대하려는 사이온지 원로에게 반발하여 건강 악화를 이유로 사퇴했다.[2]
히로타 내각의 주요 정책은 다음과 같다.
3. 성립 배경
고노에 의장 대신 히로타 외상이 새로운 총리 후보로 지명되어 대명이 내려졌다. 히로타는 외무성 동기인 요시다 시게루를 조각 참모로 인선했지만, 황도파를 축출하고 육군성을 장악한 통제파는 황도파의 완전 추방 및 정·관계 등의 요구를 묵과할 수 없었고,[3] 요시다의 외상 취임을 철회하는 등 인사를 교체해야만 했다.
4. 주요 정책
4. 1. 바바 재정
바바 에이이치 재무상 아래 작성된 1937년도 예산안은 전년 대비 30% 증가한 적극 재정이 되었다. 이는 영·미·중·소 등과의 다가올 무력 충돌에 대비하여 군사비를 증액해야 한다는 바바 재무상의 생각에 따른 것이었지만, 군사비 증액 약 4억 엔은 증세로 충당하고, 이후에도 반 영구적으로 증세를 지속할 예정이었다.[1] 이는 다카하시 재정으로 대표되는 감세·경제 성장을 기본 방침으로 하는 기존의 대장성 방침과 정면으로 대립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바바 재무상은 노선 전환을 달성하기 위해 나가누마 히로키 비서관을 중용하여, 성내 "삼우(三羽烏)"로 불린 가야 오키노리 주계국장, 이시와타 소타로 주세국장, 아오키 가즈오 이재국장을 좌천시켰다.[2] 또한, 예산 편성 방법도 기존의 주계국이 각 성청과 교섭하는 형식의 적상(積上) 방식을 고쳐, 혁신 관료의 아성이었던 내각 조사국의 영향 아래 5상 회의를 통해 중요 국책 및 예산 배분의 우선순위를 먼저 결정하는 톱다운 방식으로 개정되었다.[3] 바바 재무상 주도의 예산안 제출에 따라 군수 물자의 수요 증가를 예상한 상사가 일제히 수입 주문을 냈기 때문에 수입 환율이 폭등하여 엔화가 하락, 이것이 수입 물가의 고등을 초래하여 시장은 혼란, 외국환은 난동하여 경제의 앞날까지 불투명해지는 사태를 초래하기에 이르렀다. 이 예산 편성은 무진장하게 국채를 발행하고 통화 공급량을 늘려, 그 재원을 위해 무제한으로 증세를 한다는, 경제 법칙을 무시한 악정이라고, 후세의 재무성 견해에서도 혹평받고 있다.[4]
4. 2. 외교 정책
유럽의 강대국인 영국, 나치 독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3개국 중, 독일과의 접근이 시도되어, 1936년 11월 25일 독일-일본 방공 협정이 체결되었다.
4. 3. 기타 정책
5. 내각의 구성
각료[1] | |||||
---|---|---|---|---|---|
담당 | 이름 | 정당 | 임기 시작 | 임기 종료 | |
내각총리대신 | 히로타 고키 | 무소속 | 1936년 3월 9일 | 1937년 2월 2일 | |
외무대신 | 히로타 고키 | 무소속 | 1936년 3월 9일 | 1936년 4월 2일 | |
아리타 하치로 | 무소속 | 1936년 4월 2일 | 1937년 2월 2일 | ||
내무대신 | 우시오 시게노스케 | 무소속 | 1936년 3월 9일 | 1937년 2월 2일 | |
대장대신 | 바바 에이이치 | 무소속 | 1936년 3월 9일 | 1937년 2월 2일 | |
육군대신 | 테라우치 히사이치 | 육군 | 1936년 3월 9일 | 1937년 2월 2일 | |
해군대신 | 나가노 오사미 | 해군 | 1936년 3월 9일 | 1937년 2월 2일 | |
사법대신 | 하야시 라이자부로 | 무소속 | 1936년 3월 9일 | 1937년 2월 2일 | |
문부대신 | 우시오 시게노스케 | 무소속 | 1936년 3월 9일 | 1936년 3월 25일 | |
히라오 하치사부로 | 무소속 | 1936년 3월 25일 | 1937년 2월 2일 | ||
농림대신 | 시마다 도시오 | 입헌정우회 | 1936년 3월 9일 | 1937년 2월 2일 | |
상공대신 | 가와사키 다쿠키치 | 무소속 | 1936년 3월 9일 | 1936년 3월 27일 | |
오가와 고타로 | 입헌민정당 | 1936년 3월 27일 | 1937년 2월 2일 | ||
체신대신 | 타노모기 케이키치 | 입헌민정당 | 1936년 3월 9일 | 1937년 2월 2일 | |
철도대신 | 마에다 요네조 | 입헌정우회 | 1936년 3월 9일 | 1937년 2월 2일 | |
척무대신 | 나가타 히데지로 | 무소속 | 1936년 3월 9일 | 1937년 2월 2일 | |
내각관방장관 | 후지누마 쇼헤이 | 무소속 | 1936년 3월 9일 | 1937년 2월 2일 | |
내각법제국장관 | 쓰기타 다이자부로 | 무소속 | 1936년 3월 9일 | 1937년 2월 2일 | |
정무차관[9] | |||||
담당 | 이름 | 정당 | 임기 시작 | 임기 종료 | |
외무 정무차관 | 이노케 토시에 | 입헌정우회 | 1936년 4월 15일 | 1937년 2월 2일 | |
내무 정무차관 | 나베시마 나오타다 | 무소속 | 1936년 4월 15일 | 1937년 2월 2일 | |
대장 정무차관 | 나카지마 야단지 | 입헌민정당 | 1936년 4월 15일 | 1937년 2월 2일 | |
육군 정무차관 | 다쓰미 도요마루 | 무소속 | 1936년 4월 15일 | 1937년 2월 2일 | |
해군 정무차관 | 공석 | 1936년 4월 15일 | 1937년 2월 2일 | ||
사법 정무차관 | 노다 슌사쿠 | 입헌정우회 | 1936년 4월 15일 | 1937년 2월 2일 | |
문부 정무차관 | 야마모토 고조 | 입헌민정당 | 1936년 4월 15일 | 1937년 2월 2일 | |
농림 정무차관 | 타나베 시치로쿠 | 입헌정우회 | 1936년 4월 15일 | 1936년 8월 19일 | |
야마자키 다케시 | 입헌정우회 | 1936년 8월 19일 | 1937년 2월 2일 | ||
상공 정무차관 | 이케다 히데오 | 입헌민정당 | 1936년 4월 15일 | 1937년 2월 2일 | |
체신 정무차관 | 마에다 후사노스케 | 입헌민정당 | 1936년 4월 15일 | 1937년 2월 2일 | |
철도 정무차관 | 다코 이치민 | 입헌정우회 | 1936년 4월 15일 | 1937년 2월 2일 | |
척무 정무차관 | 이나다 마사타네 | 무소속 | 1936년 4월 15일 | 1937년 2월 2일 | |
참여관[9] | |||||
직명 | 성명 | 출신 등 | 비고 | ||
외무 참여관 | 마쓰야마 쓰네지로 | 중의원/ 입헌정우회 | |||
내무 참여관 | 키모츠키 가네히데 | 귀족원/ 무소속(공정회)/ 남작 | |||
대장 참여관 | 탄게 시게주로 | 중의원/ 입헌정우회 | |||
해군 참여관 | 나가타 젠자부로 | 중의원/ 입헌민정당 | |||
사법 참여관 | 아키즈키 타네히데 | 귀족원/ 무소속(연구회)/ 자작 | |||
문부 참여관 | 사쿠타 고타로 | 중의원/ 입헌민정당 | 1936년 12월 28일 면직 | ||
타케치 유키 | 중의원/ 입헌민정당 | 1936년 12월 28일 임명 | |||
농림 참여관 | 고바야시 겐지 | 중의원/ 입헌정우회 | |||
상공 참여관 | 테라시마 곤조 | 중의원/ 입헌민정당 | |||
체신 참여관 | 다다 미쓰나가 | 중의원/ 입헌민정당 | |||
철도 참여관 | 호시지마 지로 | 중의원/ 입헌정우회 | |||
척무 참여관 | 하야시 미치카즈 | 중의원/ 쇼와회 |
6. 종말
1936년 2·26 사건 이후, 오카다 내각은 총사퇴하고 히로타 고키가 총리로 임명되었다. 히로타 내각은 군부의 압력에 굴복하여 군부 대신 현역 무관제를 부활시키는 등 군부의 영향력을 강화시켰다.
히로타 내각은 바바 에이이치 재무상 주도로 전년 대비 30% 증가한 예산안을 편성했는데, 이는 군사비 증액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예산안은 경제 법칙을 무시한 악정이라는 비판을 받았다.[1] 또한, 독일-일본 방공 협정을 체결하여 나치 독일과의 관계를 강화했다.
하마다 구니마쓰 의원과 테라우치 수이치 육군 대신 사이의 "할복 문답" 사건으로 인해 정국이 혼란에 빠지자, 히로타는 내각 불일치를 이유로 총사퇴했다.[1]
7. 기타
- 현재 국회의사당은 히로타 내각 시기인 1936년 11월 7일에 "제국 의회 의사당"으로 준공되었다.[13]
- 2·26 사건 이후 "군부에 거역하면 살해당한다"는 풍조가 정계에 팽배해져, 총리 대신을 맡으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히로타가 총리 대신을 맡았기 때문에, 히로타 내각은 "불 속의 밤을 '''줍다'''"와 "'''히로타'''"를 빗대어 "'''히롯타''' 내각"이라고 불렸다.[13]
참조
[1]
웹사이트
Hirota Cabinet
http://www.kantei.go[...]
[2]
간행물
『官報』号外「叙任及辞令」
https://dl.ndl.go.jp[...]
NDLDC
1936-03-09
[3]
간행물
『官報』号外「叙任及辞令」
https://dl.ndl.go.jp[...]
NDLDC
1936-04-02
[4]
문서
貴族院勅選議員勅任
1937-01-12
[5]
간행물
『官報』号外「叙任及辞令」
https://dl.ndl.go.jp[...]
NDLDC
1936-03-25
[6]
문서
川崎は親任式後の閣議を終えた直後に病に倒れ、回復することなく大臣在任のまま死去した。
[7]
간행물
『官報』号外「叙任及辞令」「彙報」
https://dl.ndl.go.jp[...]
NDLDC
1936-03-28
[8]
간행물
『官報』第2755号「叙任及辞令」
https://dl.ndl.go.jp[...]
NDLDC
1936-03-11
[9]
간행물
『官報』第2784号「叙任及辞令」
https://dl.ndl.go.jp[...]
NDLDC
1936-04-16
[10]
간행물
『官報』第2891号「叙任及辞令」
https://dl.ndl.go.jp[...]
NDLDC
1936-08-20
[11]
문서
貴族院の院内会派・公正会は、旗揚げ当初は実質的に貴族院における憲政会→民政党の別動隊の一つとして活動したが、1926年(大正5年)の内紛以後は会派としての党議拘束を撤廃したため、男爵互選議員の全員が参加する大所帯だったにもかかわらず決して一枚岩ではなかった。
[12]
간행물
『官報』第2784号「叙任及辞令」
https://dl.ndl.go.jp[...]
NDLDC
1936-12-29
[13]
서적
歴代総理のガイドブック 覚えておきたい総理の顔
清水書院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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