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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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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지와라 씨는 덴지 천황 시대의 나카토미노 가마타리가 '후지와라노 아손'이라는 가바네를 하사받으면서 시작된 씨족이다. 가마타리의 차남인 후지와라노 후히토가 가바네를 이어받아 후손들이 조정에서 인정받았으며, 후지와라 씨는 홋케, 교케, 난케, 시키케의 네 가문으로 분리되었다. 헤이안 시대에는 후지와라 홋케가 셋칸 정치를 통해 번영을 누렸으나, 무가 정권의 등장과 함께 권력이 쇠퇴했다. 가마쿠라 시대 이후 고셋케로 분화되어 정계에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근대에는 화족의 주류를 이루었다. 현대에는 후예회라는 친목 단체가 조직되어 있으며, 후지와라 씨에서 유래된 많은 성씨들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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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씨
씨족 정보
성씨후지와라 씨
일본어 표기藤原氏 (ふじわらし, ふじわらうじ)
로마자 표기Fujiwara-shi, Fujiwara-uji
다른 이름도우시 (藤氏)
씨성후지와라 아손
가문[[파일:Japanese crest Sagari Fuji.svg|150px]]
늘어뜨린 등나무 (대표적인 가문)
※ 각 후지와라 씨에 따라 다름.
기원아메노 코야네노 미코토
출자나카토미 씨
씨조후지와라노 가마타리
종별신별 (아마쓰카미, 구니쓰카미)
본관야마토국 다카이치군 후지와라
역사
창시자후지와라노 가마타리
창건 연도668년
유래나카토미 씨의 아메노 코야네 (전설적인 계보 이자나기)
주요 인물
분파
관련 용어
섭관 정치인세이
기타 정보
관련 링크루이스 프레데릭의 '일본' (Dicionário e Civilização)
'Japan Encyclopedia', pp. 200-201

2. 출자

후지와라 씨는 일본의 대표적인 우지(氏) 중 하나로, 겐지(源氏), 헤이시(平氏), 타치바나(橘氏)와 함께 '겐페이도키쓰(源平藤橘)'로 불리며 그 중에서도 가장 으뜸으로 꼽히는 명문가였다.

나카토미노 가마타리(中臣鎌足, 614년 ~ 669년)는 다이카 개신에서 큰 공을 세워 덴지 천황에게서 후지와라노 아손(藤原朝臣)이라는 가바네(姓)를 받았다. 가마타리의 아들인 후지와라노 후히토(藤原不比等) 이후 후지와라 씨는 일본 역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귀족 가문으로 성장했으며, 특히 헤이안 시대(794년 ~ 1185년)에는 셋칸정치(攝關政治)를 통해 정치를 독점했다.

후지와라 씨는 나라 시대에 난케(南家), 홋케(北家), 시키케(式家), 교케(京家)의 네 가문으로 나뉘었다. 이 중 후지와라 홋케(北家)가 황실과의 인척 관계를 통해 셋칸정치를 주도했다. 가마쿠라 시대 이후에는 후지와라 씨 대신 고노에(近衛), 다카쓰카사(鷹司), 구조(九條), 니조(二條), 이치조(一條) 등 가명(家名)을 사용했으며, 공식 문서를 제외하고는 '후지와라'라는 이름을 쓰지 않았다.

후지와라 씨의 시조인 나카토미노 가마타리는 하급 귀족 출신이었으나, 덴지 천황이 되는 나카노오에 황자와 함께 을사의 변을 일으켜 다이카 개신을 주도했다. 668년 덴지 천황은 가마타리의 공적을 기려 '후지와라노 아손'이라는 가바네를 하사했는데, 이는 가마타리의 고향인 야마토국 다카이치군의 후지와라(지금의 가시하라시) 땅에서 유래했다.

가마타리의 차남인 후히토가 가바네를 이어받았다고 알려져 있으나, 가마타리 한 사람에게만 주어진 것이라는 설도 있다. 가마타리 사후 나카토미 씨를 이끌던 나카토미노 가네(中臣金)가 임신의 난 때 오토모노 황자 편에 섰다가 패배하면서 가마타리의 후손들도 몰락 위기에 처했었다. 덴무 천황 13년(684년) 야쿠사노 가바네(八色-姓) 제정 당시 '후지와라'는 없었으며, 가마타리의 일족은 '나카토미노 무라치(中臣連)'를 자칭했다. 이후 685년 가마타리의 유족에게 다시 '후지와라노 아손'이 하사되었다.

후히토가 조정에 진출하기에는 어렸기에 나카토미노 오오시마(中臣大嶋)와 나카토미노 오미마로(中臣意美麻呂)가 후견인 역할을 했다. 훗날 후히토가 성장하여 천황의 외척으로서 조정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후지와라 씨는 태정관(太政官), 나카토미 씨는 신기관(神祇官)을 맡는 체제가 되었다. 몬무 천황 2년(698년)에는 후히토의 후손 이외에는 다시 '나카토미'라는 가바네만을 쓰게 되었다.

; 후지와라 씨 계도(후지와라 사가 성립까지)[63]

후지와라 씨 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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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지와라 씨 제 가문의 약식 계도

후지와라 씨 제 가문의 약식 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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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 황족 출신 후지와라 씨

나라 시대에는 황족이 신적강하했을 때, 어머니의 성을 이어받아 후지와라노 아손(藤原朝臣)의 성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후지와라노 뎨이(야마시로 왕, 나가야 왕의 아들)나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양자가 된 이시즈 왕이 해당된다. 그러나 뎨이의 자손은 나가하라 아손의 성을 받고 후지와라 씨를 칭하는 일은 없어졌고, 이시즈 왕은 나카이시노토모로 개명했다고 전해지지만, 어느 쪽이든 후예는 불명확하기 때문에 황손의 후지와라노 아손은 남지 않았다.

2. 2. 후지와라 씨 분리 후의 나카토미 씨

오미마로는 중신 성으로 복귀한 후 후지와라노 후히토의 추천으로 중납언이 되었고, 그의 일곱째 아들 기요마로는 우대신까지 올랐다. 이 때문에 이후에는 이 자손이 중신 씨의 적류로 여겨져 특히 "오오나카토미 아손"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헤이안 시대 이후에는 다른 중신 씨도 오오나카토미 씨를 칭하게 되었지만, 기요마로의 계통이 적류인 것은 변함없이 후지나미가로서 도죠 공가에 속해 있었다.

3. 역사

나카토미노 가마타리가 다이카 개신에 공헌하여 덴지 천황에게서 '후지와라' 성을 하사받은 것이 후지와라 씨의 시초이다. 이후 아들 후지와라노 후히토 대에 이르러 후지와라 씨는 일본 역사에서 중요한 귀족 가문으로 자리 잡았다.[9]

나라 시대에는 후히토의 네 아들이 각각 난케(南家), 홋케(北家), 시키케(式家), 교케(京家)의 네 가문을 이루었다. 이들은 나가야 왕을 제거하고 고묘 황후를 옹립하는 등 권력을 강화했다.[9] 그러나 737년 천연두로 네 형제가 모두 사망하면서, 다치바나노 모로에 등이 득세하며 후지와라 씨는 일시적으로 위축되었다. 이후 후지와라노 나카마로가 권력을 잡았으나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난으로 몰락했다.

헤이안 시대에 들어서면서 후지와라 홋케(北家)가 세이와 천황의 외척으로 셋쇼(攝政)가 되면서 셋칸 정치의 기반을 마련했다.[1] 조와의 변, 안나의 변 등을 통해 경쟁 씨족을 제거하고 권력을 강화했다.[1] 후지와라노 미치나가후지와라노 요리미치 부자 시대에 셋칸 정치는 전성기를 맞이했다.[1]

그러나 헤이안 시대 후기에 인세이와 미나모토 씨, 다이라 씨 등 무가 정권이 등장하면서 후지와라 씨의 권력은 약화되었다.[1] 비록 에도 시대 말까지 셋쇼, 간파쿠(關白) 직을 독점했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잃었다.[1]

가마쿠라 시대 이후 후지와라 씨는 고노에가, 다카쓰카사가, 구조가, 니조가, 이치조가의 고셋케로 분열되어, 이들이 교대로 셋쇼와 간파쿠를 맡았다.[1]

3. 1. 아스카 시대

나카토미노 카마타리는 덴지 천황이 되는 나카노오에 황자와 함께 을사의 변을 일으켜 다이카 개신으로 이어지는 여러 개혁을 주도했다. 덴지 천황은 가마타리의 공적을 기려 죽기 직전 그에게 '''후지와라'''라는 성을 하사했다.[9] '후지와라'라는 이름은 가마타리의 고향인 야마토국 다카이치군의 후지와라(지금의 가시하라시) 땅과 관련이 있으며, 훗날 후지와라쿄가 세워지는 곳이기도 하다.

통설에 따르면, 가마타리의 차남인 후지와라노 후히토가 이 성을 이어받았고, 이후 후히토의 후손들이 '후지와라노 아손'으로서 조정으로부터 인정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일설에는 이때 하사된 후지와라 성은 가마타리 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며, 이후 가마타리의 유족들에게 다시 '후지와라노 아손'이라는 성이 하사되었다는 주장도 있다.[55]

가마타리 사후, 나카토미 씨를 이끌던 우대신 나카토미노 가네는 임신의 난 때 오토모 황자 편에 섰다가 패배하여 처형당했다. 이 때문에 난 자체와는 관련이 없었던 가마타리의 후손들까지도 몰락할 위기에 처했다. 덴무 천황 13년(684년)에 야쿠사노카바네가 제정되었을 때, '아손' 성을 받은 52개 씨족 중 '후지와라'는 없었다. 가마타리의 적자였던 후히토를 포함한 가마타리의 일족은 처음에는 '나카토미노 무라치'를 자칭했다고 한다(후에 아손으로 바뀜). 《일본서기》에 가마타리 사후 처음으로 '후지와라'가 등장하는 덴무 천황 14년 9월 이전에, 가마타리의 유족에게 다시 '후지와라노 아손'이라는 성이 하사되어 그 범위가 정해졌다고 한다.

당시 후히토는 조정에 나아가기에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후히토 외의 다른 이들에게도 '후지와라노 아손'이라는 성이 하사되었다. 가마타리의 일족이었던 나카토미노 오시마나 가마타리의 사위 나카토미노 오미마로가 후히토가 성장할 때까지의 후견인 자격으로 잠정적인 '우지노가미'(씨족의 당주)가 되었다. 훗날 후히토가 성장하여 천황의 중신이자 외척으로서 조정에서 두각을 드러내게 되자, 몬무 천황 2년 8월, 가마타리의 적자인 후히토의 후손 이외에는 다시 '나카토미'라는 성만 쓰게 되었다.

지토 천황 말년에 젊은 나이로 출사한 후지와라노 후히토697년 몬무 천황에게 딸 후지와라노 미야코를 부인으로 들여보내 중앙 정계에 진출했다. 이와 동시에 '후지와라노 아손'이라는 성은 후히토의 자손들에게만 한정되어 쓰이게 되었고, 후히토가 가마타리의 후사로서 인정받아 '후지와라 씨 = 후히토의 집안'이라는 공식이 성립하였다.

후지와라노 후히토는 시모쓰케누노 고마로 등과 함께 다이호 율령을 편찬하여 일본의 율령 제도를 확립하는데 공헌하였다. 딸 미야코는 쇼무 천황이 되는 오비토 황자를 낳았다. 또한 다른 딸인 고묘시를 쇼무 천황의 황후로 들여 왕실과 인척 관계를 맺었다. 이는 일본에서 황족 출신만이 황후가 될 수 있다는 전례를 깬 최초의 사례였다.

후히토는 네 아들을 두었는데, 각각 가문의 분가를 창시했다.

  • 홋케(북가): 후지와라노 후사사키가 창시[10]
  • 교케 가문: 후지와라노 마로가 창시[11]
  • 난케(남가): 후지와라노 무치마로가 창시[12]
  • 시키케 가문: 후지와라노 우마카이가 창시[13]

이 중 홋케는 가문 전체의 지도자로 여겨지게 되었다. 네 형제 모두 737년 일본의 대규모 천연두 유행으로 사망했다.[14]

한편, 후히토의 출생에 대해 《고후쿠지 연기》, 《오카가미》, 《공경보임》, 《존비분맥》에는 덴지 천황의 사생아였음을 시사하는 듯한 기술도 보인다.

3. 2. 나라 시대

후지와라노 후히토에게는 무치마로(武智麻呂), 후사사키(房前), 우마카이(宇合), 마로(麻呂)라는 4명의 아들이 있었다. 이들 형제는 당시 덴무 천황의 손자 나가야 왕(長屋王) 등 황족이 중심이 된 일파와 대립하였는데, 덴표 원년(729년) 나가야 왕의 변으로 나가야 왕이 자결하면서 끝났다. 나가야 왕의 정변은 후지와라 4형제가 이복 여동생이자 천황의 비였던 고묘 황후를 황후로 세우는 것에 반대하던 나가야 왕을 모함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으로 해석된다. 왕족 출신이 아닌 자로서 황후가 된 것은 고묘 황후가 최초였고, 이는 후지와라 씨의 지위를 높였을 뿐만 아니라, 후지와라 씨를 외가로 하고 있던 쇼무 천황조차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9]

이들 4형제는 무치마로의 후손인 난케(南家), 후사사키의 후손인 홋케(北家), 우마카이의 후손인 시키케(式家), 마로의 후손인 교케(京家)의 네 가문으로 분가하여 후지와라 사가를 이루게 된다. 덴표 3년(731년) 이들 형제 모두 관인들의 투표를 통해 의정관 지위에 올랐는데, 이는 당초 후지와라 씨가 추진했던 후궁 정책에 후히토 이래 율령 편찬 과정에서 쌓은 실적을 토대로 후지와라 씨가 일본의 관료 조직을 장악한 결과였다. 다만 이 과정에서 후지와라 교케가 가장 먼저 쇠퇴했다.

덴표 9년(737년), 일본을 휩쓴 천연두로 후지와라 4형제가 차례로 병사하자, 황족 출신의 다른 귀족인 다치바나 씨의 다치바나노 모로에(橘諸兄), 당나라 유학승인 겐보(玄昉), 견당사 기비노 마키비(吉備真備) 등이 후지와라 씨의 독주를 막고자 했다. 그러나 이는 당시 고묘 황후의 신임을 얻고 있던 후지와라 난케의 후지와라 나카마로(藤原仲麻呂)가 대두하면서 수그러들었다. 나카마로는 덴표호지(天平寶字) 원년(757년) 모로에의 아들인 다치바나노 나라마로를 제거하고(다치바나노 나라마로의 난) 독재 권력을 행사했지만, 고켄 상황(孝謙上皇)의 총애를 얻은 승려 도쿄(道鏡)가 대두하면서 덴표호지 8년(764년)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하고 자신도 죽었다(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난).

나카마로의 실각으로 후지와라 씨는 침체기에 빠졌다가 후지와라 시키케의 후지와라노 요시쓰구(藤原良繼)・후지와라노 모모카와(百川)나 홋케의 후지와라노 나가테(藤原永手)의 조력으로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이후 난케・홋케・시키케의 세 집안이 경쟁을 벌인 끝에 정쟁이나 일족의 반란 등의 사건을 겪은 난케・시키케가 헤이안 시대 전기에 쇠퇴하면서 홋케가 융성하게 되었고 후지와라 씨의 '본가(本家)'로 불리게 되었다.

후지와라 씨의 적류(嫡流)에 대해서는 후히토의 맏아들인 무치마로의 후손인 난케를 적류로 보는 설과, 형 무치마로보다 일찍 출세했던 차남 후사사키의 후손인 홋케를 적류로 보는 설이 있다. 후사사키가 생전에 겐메이 천황(元明天皇)이나 쇼무 천황의 신임을 얻으며 할아버지 가마타리가 얻었던 우치노오미(內臣)의 지위를 얻었기는 하지만, 당시의 관습으로는 고관의 '적남'은 아버지가 살아있는 와중에 고위직에 오르는 것을 기피하고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난케가 후지와라 씨의 적류였다고 보는 설이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3. 3. 헤이안 시대

후지와라 홋케는 헤이안 시대 중기 이후 번영을 누렸으며, 후지와라노 요시후사(藤原良房)가 세이와 천황의 외척으로서 신하로서 일본 역사상 최초의 셋쇼(攝政)가 되면서 셋칸 정치(攝關政治)의 토대가 마련되었다.[1] 요시후사의 양자인 후지와라노 모토쓰네(藤原基經)도 요제이 천황의 외척으로서 셋쇼와 간파쿠(關白)를 맡았다.[1] 후지와라 씨는 황실과의 연척관계를 통해 다른 씨족들을 제거하고 권력을 증강했는데, 842년 조와의 변, 969년 안나의 변이 대표적이다.[1] 이 사건들로 후지와라 홋케는 다른 씨족들을 배척했고, 후지와라노 미치나가(藤原道長)・후지와라노 요리미치(藤原賴通) 부자 대에 셋칸 정치는 최전성기를 맞이했다.[1]

그러나 헤이안 시대 후기, 후지와라 씨와 연척 관계가 없던 상황(上皇)이 정국을 주도하는 인세이(院政)가 시작되고, 미나모토 씨와 다이라 씨 등 무가(武家) 정권이 들어서면서 후지와라 씨의 권력은 쇠퇴했다.[1] 다만 에도 시대 말기까지 셋쇼・간파쿠 직은 대부분 후지와라 홋케 계통이 독점했다.[1] 후지와라 홋케 외에 간파쿠를 맡았던 유일한 예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카 도요토미 히데쓰구(豊臣秀次)뿐이었고(히데요시는 후지와라노 히데요시藤原秀吉로서 임관), 고셋케(五攝家) 외에는 셋쇼가 될 수 없었다.[1]

일본 헤이안 시대(794년 ~ 1185년) 동안 호케는 어린 천황을 위한 섭정(세쇼) 또는 성인 천황을 위한 관백(간파쿠) 직을 세습하며 권력을 확립했다. 주요 후지와라 가문 인사들은 여러 천황을 위해 이 직책을 여러 번 역임했다. 덜 중요한 일원들은 귀족, 지방 지사 및 부지사, 사무라이 등으로 활동했다. 후지와라 씨는 헤이안 시대 일본 정치를 지배한 4대 가문 중 하나였으며, 그중 가장 중요한 가문이었다. (나머지 가문은 다치바나, 타이라, 미나모토) 특히 10세기와 11세기 섭정 정치 기간 동안 후지와라 씨는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며 많은 천황을 꼭두각시 군주로 만들었다.

후지와라 씨는 794년부터 1160년까지 일본 정부를 지배했다. 이들의 행정 지배는 1192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마쿠라 막부 수립으로 상실되었다. 후지와라 공작들은 황실 조정의 최고 대신(''간파쿠'')과 미성년 군주를 위한 섭정(''세쇼'')으로 활동하며 수 세기 동안 "왕좌 뒤의 권력"을 행사했다. 이들은 황실 왕조를 대체하려는 야망은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황실과의 결혼 동맹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했다. 황태자, 어린 아들, 천황의 배우자는 대개 후지와라 여성이었고, 후지와라 가문의 남성 수장은 천황의 장인, 처남, 삼촌, 외할아버지가 되었다.

후지와라노 미치나가(966년 ~ 1027년) 시대는 후지와라 가문 권력의 절정기였다. 그는 세 천황의 외할아버지, 여섯 황후 또는 황실 배우자의 아버지, 일곱 황실 배우자의 외할아버지였다. 사실상 미치나가가 일본을 통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간파쿠 칭호 없이도 그 이상의 권력을 가졌다. 세이 쇼나곤의 ''베개 책''에 후지와라 씨족이 등장하며, ''겐지 이야기''의 겐지는 미치나가를 부분적으로 모델로 했다. 후지와라 섭정은 헤이안 시대 정부의 주요 특징이었다. 교토(헤이안쿄)는 지정학적으로 강을 통한 바다 접근성과 동부 지방과의 육로 연결성이 좋은 곳이었다.

헤이안쿄 천도 직전, 천황은 8세기 보편적 징병제를 폐지했고, 곧 지역적이고 사적인 군대가 생겨났다. 9세기 후반, 다이라 씨족, 미나모토 씨족과 함께 후지와라 씨족은 새로운 군사 계급의 지원을 받는 유력 가문 중 하나였다. 9, 10세기에는 거대 가문들이 교토 정부의 중국식 토지 및 세금 제도를 무시하며 많은 권한을 가졌다. 헤이안 시대 일본은 안정되었지만, 황실 계승이 보장되었음에도 권력은 후지와라 가문에 집중되었다.

가문 행정은 공공 기관이 되었고, 후지와라 가문은 일본 통치, 왕위 계승 등 국가 문제를 결정했다. 가문과 국가의 일은 철저히 뒤섞였으며, 이는 다른 가문, 수도원, 황실에서도 따랐던 패턴이었다. 소가가 6세기에 왕위를 장악했던 것처럼, 9세기에 후지와라는 황실과 통혼했고, 그 일원이 천황의 사적 사무실의 첫 번째 수장이 되었다. 헤이안 시대 초반 간무 천황-사가 천황(781–823) 등은 스스로 통치하는 강력한 천황들이었지만, 후지와라는 9세기 전반 후지와라노 후유쓰구 아래에서 영향력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후지와라노 요시후사는 858년 손자 세이와 천황 즉위와 함께 섭정 지위를 얻은 최초의 비황족이었다. 그의 양아들 후지와라노 모토쓰네는 ''간파쿠''(성인 천황에 대한 섭정)로 임명되었다. 모토쓰네 사후 우다 천황(후지와라 딸의 아들이 아님)은 정부의 많은 부분을 되찾았다. 그러나 다이고 천황(897–930) 퇴위 후, 모토쓰네의 아들 후지와라노 도키히라는 909년 갑작스러운 죽음까지 매우 중요한 지위에 복귀했다. 다이고 재위 기간은 후지와라 지배에서 비교적 자유로웠지만, 스자쿠 천황 통치 시작과 함께 후지와라는 후지와라노 타다히라의 지도력으로 다시 궁정 지배력을 확립했다.

후지와라는 다이고 천황에 의해 강등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강해졌다. 중앙 통제는 쇠퇴했고, 후지와라는 10세기 초 다른 거대 가문 및 종교 재단과 함께 더 큰 ''쇼엔''과 부를 획득했다. ''쇼엔''은 법적 지위를 얻었고, 거대 종교 시설은 영구 소유권, 세금 면제, 정부 검사 면제를 요구했다. 사람들은 수확량 일부를 대가로 쇼엔 소유주에게 소유권을 이전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사람과 토지는 중앙 통제와 과세에서 벗어나 다이카 개혁 이전 상태로 돌아갔다.

후지와라노 미치나가 (966–1028)


다이고 천황 사후 수십 년 안에, 후지와라는 궁정을 절대적으로 통제했다. 1000년까지 후지와라노 미치나가는 천황 즉위와 폐위를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전통 관료에게는 권한이 거의 없었고, 정부 업무는 후지와라 가문의 사적 행정을 통해 처리되었다. 후지와라는 역사가 조지 B. 샌섬이 "세습 독재자"라고 부른 존재가 되었다. 후지와라 시대는 황실 궁정과 귀족들 사이에서 문화적, 예술적 번영기였다. 우아한 시와 구어 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일본어 글쓰기는 중국 표의 문자(''한자'')에 의존했지만, ''가나''(''가타가나'', ''히라가나'')로 보완되었다. ''히라가나''는 구어에 대한 글쓰기 표현을 제공했으며, 일본 구어 문학의 부상을 가져왔다. 대부분 궁정 여성들이 썼으며, 10세기 말과 11세기 초 세 여성("미치쓰나의 어머니"의 ''가게로 일기'', 세이 쇼나곤의 ''마쿠라노소시'', 무라사키 시키부의 ''겐지모노가타리'')은 헤이안 궁정의 삶과 로맨스에 대한 견해를 제시했다. 후지와라 시대에 토착 예술도 번성하여, 궁중 생활과 사찰, 신사 이야기를 묘사한 ''야마토에''(일본 스타일) 그림이 헤이안 시대 중후반에 흔해져 오늘날까지 일본 미술의 패턴을 형성했다.

식량 생산 감소, 인구 증가, 가문 간 자원 경쟁은 후지와라 권력 쇠퇴로 이어져 10세기 중후반과 11세기에 군사적 혼란을 야기했다. 후지와라, 다이라, 미나모토 가문 구성원들은 모두 황실 가문 후손이었으며, 서로 공격하고, 정복한 토지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하고, 라이벌 정권을 세우며 일본의 평화를 깨뜨렸다. 후지와라는 9세기 후지와라 어머니에게서 태어나지 않은 최초의 천황 고산조 천황(1068–73) 통치 때까지 왕위를 통제했다. 고산조 천황은 강력한 개인 통치로 황실 통제를 회복하고, 후지와라 영향력을 억제하기 위한 개혁을 시행했다. 그는 중앙 통제 재확립을 위해 장원(Estate (house)) 기록 편집 및 유효화 사무소를 설립했다. 많은 ''쇼엔''이 제대로 인증되지 않았고, 후지와라 등 대지주들은 토지 상실 위험을 느꼈다. 고산조 천황은 ''인세이''(상황 정치)를 설립, 퇴위한 천황들이 뒤에서 정부를 수행했다.

''인세이''는 후지와라 권력 쇠퇴로 남겨진 공백을 채웠다. 후지와라는 추방되지 않고 민간 독재자, 중심부 대신이라는 이전 지위를 유지하며 의사 결정에서 제외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후지와라의 많은 사람들이 교체되었고, 대부분 떠오르는 미나모토 가문 구성원이었다. 후지와라가 분쟁에 빠져 북부와 남부 파벌을 형성하는 동안, 인세이 시스템은 황실 부계가 왕위에 대한 영향력을 얻도록 했다. 1086년부터 1156년까지는 ''인세이'' 지배와 전국적 군사 계급 부상 시대였다. 민간 권한보다 군사력이 정부를 지배했다.

12세기 중반 계승 투쟁은 후지와라에게 이전 권력 회복 기회를 제공했다. 후지와라노 요리나가는 1158년 은퇴한 천황과 폭력적인 전투에서 다이라와 미나모토가 지원하는 후계자에 대항하여 편을 들었다. 결국 후지와라는 파괴되었고, 이전 정부 시스템은 대체되었으며, 무사들이 궁정 업무를 장악하면서 ''인세이'' 시스템은 무력해졌고, 이는 일본 역사에서 전환점이었다. 1년 안에 다이라와 미나모토가 충돌했고, 20년의 다이라 부상 기간이 시작되었다. 다이라는 궁중 생활에 매료되어 지방 문제를 무시했다. 마지막으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1147–99)는 가마쿠라(현 도쿄 남서쪽 간토 지방) 본부에서 일어나 다이라를 물리쳤고, 그들과 그들이 통제하는 어린 천황 안토쿠 천황겐페이 전쟁(1180–85)에서 물리쳤다.

몰락 이후, 후지와라 씨족의 젊은 분파는 정치에서 예술로 초점을 돌려, 후지와라노 슌제이와 후지와라노 테이카 등 문학 학자들을 배출했다.

3. 4. 가마쿠라 시대 이후

가마쿠라 시대가 되면서 후지와라 씨의 적류는 다카쓰카사(應司), 구조(九条), 니조(二条), 이치조(一条), 고노에(近衛)의 다섯 가문으로 나뉘었고, 이들을 통틀어 '''고셋케(五攝家)''' 또는 '''셋칸케(摂関家)'''라고 불렀다. 고셋케는 교대로 간파쿠, 셋쇼를 독점하며 교토 구게 사회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메이지 시대까지 정치의 중추에서는 밀려나 있었다.[1]

고셋케 외에 후지와라 씨의 지류나 서류로는 산조가(三條家), 사이온지가(西園寺家), 한닌가(閑院家), 가잔인가(花山院家), 미코히다리가(御子左家), 시조가(四條家), 가주지류(勧修寺家), 히노가(日野家), 나카미카도가(中御門家) 등이 있었다.[1] 구게 외에도 홋케 계통으로서 후지와라노 미치카네(藤原道兼)의 자손인 우쓰노미야씨(宇都宮氏) 계통이나, 후지와라노 나가이에(藤原長家)의 자손인 나스 씨(那須氏) 계통, 후지와라노 후사사키의 아들 우오나(魚名)의 자손인 후지와라노 도시히토(藤原利仁), 후지와라노 히데사토(藤原秀郷) 등에서 많은 무가(武家)도 나왔다.[1]

4. 후지와라 씨와 종교

조에가 출가한 이후, 후지와라 씨는 많은 불교 승려를 배출해 왔다. 헤이안 시대 후기에는 대사원에서 몬제키 제도가 정해져, 대사원의 주인을 섭가 출신자가 차지하는 것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섭가 출신의 고승으로는 지엔, 만사이, 진손 등이 알려져 있다.[64]

정토진종의 조상이 된 신란은 히노 씨 출신이며, 신란의 증손으로 제3대 혼간지 문주였던 카쿠뇨는 후지와라 씨의 일족임을 강하게 의식하고 히로하시 카네나카의 양자가 되는 등, 히노 씨 일족과의 관계를 깊게 했다. 혼간지 10세 쇼뇨는 쿠죠 히사츠네의 유우시가 되었고, 이후 쿠죠 가문과 깊은 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후 대대의 법사(문주 계승 예정자)도 쿠죠 가문의 유우시가 되는 관례가 에도 시대까지 이어졌다.

5. 후지와라 씨의 무가

가마쿠라 시대 이후, 홋케 계통에서는 후지와라노 미치카네(藤原道兼)의 자손인 우쓰노미야씨(宇都宮氏) 계통, 후지와라노 나가이에(藤原長家)의 자손인 나스 씨(那須氏) 계통, 후지와라노 후사사키의 아들 우오나(魚名)의 자손인 후지와라노 도시히토(藤原利仁), 후지와라노 히데사토(藤原秀郷) 등에서 많은 무가(武家)가 나왔다.[1] 에도 시대후다이 다이묘 중에도 후지와라 씨를 칭하는 가문이 있었는데, 이이 씨, 혼다 씨, 오쿠보 씨, 나이토 씨, 토다 씨, 타누마 씨 등이 대표적이다.[1]

후지와라 씨는 지방 관인을 많이 배출했기 때문에 무가가 된 가문도 많았다. 특히 후지와라노 토시히토나 후지와라노 히데사토의 후예를 자처하는 무가가 많았다. 이들 중 에도 시대에 다이묘로 남아 메이지 시대에 화족이 된 가문은 후지와라 씨의 옛 도조 가문과 동족으로 취급되었다.[1]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임관상의 편의를 위해 일시적으로 후지와라 씨를 칭하기도 했다.[1]

후지와라 씨의 주요 무가 계통은 다음과 같다.[1]

가계주요 가문
후지와라 남가타메노리 계(為憲流) - 구도씨(工藤氏), 이토씨(伊東氏), 니카이도씨(二階堂氏), 사가라씨(相良氏) 등
후지와라 북가
후지와라 쿄가나오에씨(直江氏)


6. 현대의 후지와라 씨

메이지 유신 이후, 1869년 8월 15일 직원령 공포에 따라 정부 관료 및 정치가는 임관 증서인 "관위기"와 직원 명부에 본성으로 기재되었다.[61] 이 시기 "후지와라 아손(藤原朝臣)"을 칭했던 인물로는 산조 사네토미,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등이 있다. 그러나 1871년 11월 24일에는 성씨를 공용 문서에 쓰는 것이 폐지되었고, 씨가 공적인 역할을 하는 일은 없어졌다.[62]

하지만, 공가(公家)·다이묘 제후들의 신분인 화족의 대부분은 후지와라 씨의 일족이었다. 1876년에 시작된 종족 제도는 화족을 선조별 "류(類)"로 분류했는데, 후지와라 아손의 "류"가 가장 많아 제42류에서 제63류까지 21류에 달했다. 이러한 후지와라 씨 후예의 화족들은 많은 정치인 등을 배출했다. 내각총리대신을 두 번 역임하고, 실질적인 수상 선정자였던 원로가 된 사이온지 긴모치, 세 번 수상으로 역임한 고노에 후미마로 등이 대표적이다.

후지와라 씨의 후예로 구성된 친목 단체인 "후예회(藤裔会)"가 조직되어 연 1회 가을 즈음에 전국 각지의 후지와라 씨 후예들이 나라시의 가스가 대사에서 회합 등을 개최하고 있다.

6. 1. 후지와라 씨에서 유래된 성씨

가마쿠라 시대에 후지와라 씨의 적류는 다카쓰카사가(다카쓰카사), 구조가(구조), 니조가(니조), 이치조가(이치조), 고노에가(고노에) 다섯 가문으로 나뉘었고, 이들을 '''고셋케(오섭가)''' 또는 '''셋칸케(섭관가)'''라고 불렀다. 고셋케는 교대로 간파쿠(관백), 셋쇼(섭정)를 독식하며 교토의 구게(공가) 사회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메이지 시대까지 정치의 중추에서는 밀려나 있었다.[63]

고셋케 외에도 후지와라 씨의 지류나 서류로는 산조가(삼조가), 사이온지가(서원사가), 한닌가(한인가), 가잔인가(화산원가), 미코히다리가(미자좌가), 시조가(사조가), 가주지류(권수사가), 히노가(일야가), 나카미카도가(중어문가) 등이 있었다. 구게 외에도 홋케 계통으로 후지와라노 미치카네(등원도겸)의 자손이었던 우쓰노미야 씨(우도궁씨) 계통이나, 후지와라노 나가이에(등원장가)의 자손이었던 나스 씨(나수씨) 계통, 후지와라노 후사사키(등원후사사키)의 아들 우오나(어명)의 자손이었던 후지와라노 도시히토(등원도시인), 후지와라노 히데사토(등원수향) 등으로부터 많은 무가(무가)도 배출되었다.[63]

도쇼 공가에 한정하여 에도 시대 말에는 도쇼 공가인 5섭가, 9세이카 가, 3대신가, 66우리바야시 가, 28묘카, 26한가(계 137가) 중, 5섭가, 7세이카 가, 2대신가, 55우리바야시 가, 25묘카, 2반가(계 96가)가 후지와라 씨 출신이었다.

후지와라 씨에서 파생된 주요 가문들은 다음과 같다.

가문 분류가문 목록
오섭가고노에 가, 다카쓰카사 가, 구조 가, 니조 가, 이치조 가
세이카 가산조 가, 사이온지 가, 도쿠다이지 가, 가잔인 가, 오이노미카도 가, 기쿠테이 가, 히로하시 가
대신가나카미카도 가, 미나세 가
기타 주요 가문시조 가, 가주지류, 히노 가, 우쓰노미야 씨, 나스 씨, 사이토 씨, 가토 씨, 오슈 후지와라 씨, 아시카가 씨, 사토 씨, 이토 씨, 나이토 씨, 오토모 씨, 류조지 씨, 다치바나 씨



다잔 신사가 조직한 "다잔의 모임"이 발행한 『후지와라씨 족보 목록』에는 3,452개의 성씨가 게재되어 있다. 특히 "藤"(후지) 자가 들어간 성씨는 후지와라 씨의 후손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65]

그러나 전국에 흩어져 있는 후지와라 씨 동족으로 여겨지는 많은 씨족들이 후지와라 씨와 씨신을 공유하지 않고, 지방으로의 부임 상황이 불명확하며, 족보상에서도 부자 관계 등에 의문이 남는 것들도 존재한다. 이러한 상황에는 다른 씨족의 후예가 후지와라 씨 일족의 양자·유자(猶子)가 되거나, 선조의 족보를 후지와라 씨에 억지로 연결시켰다는 사례가 무가에서 매우 많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또한 지방의 고족(古族)(국조나 현주 등) 중에서 선조가 불분명해진 것들에는, 중앙의 권문세가에 핑계를 대어 후지와라 씨 일족이라고 칭한 것들도 다수 존재했다고 보인다. 사토, 사이토, 이토, 카토, 고토, 무토, 콘도, 안도, 오토, 엔도 등은 그 대부분이 본래 후지와라 씨와는 무관했던 것으로 보인다.[65]

다음 성씨는 특히 십육등(十六藤)이라고 불린다.[66]

성씨유래 지역 또는 관직
사토(佐藤)시모쓰케 국아소 군사노 장원
이토(伊藤)탄제이다이
가토(加藤)가고노카미
사이토(斎藤)사궁료
고토(後藤)빈고 국
콘도(近藤)오미노죠
엔도(遠藤)도토미노카미
구도(工藤)목공조
안도(安藤)시나노 국아즈미 군
나이토(内藤)나이진
스도(須藤)시모쓰케 국 나스 군
무토(武藤)무사도코로
신도(進藤)수리소신
신도(新藤)무사시 국니자 군
진도(神藤)스와 신가
슌도(春藤)야마토 국소에카미 군가스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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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서적 Dicionário e Civilização Globo Livr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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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웹사이트 藤原氏概覧 http://wwr2.ucom.ne.[...]
[66] 방송 ビーバップ!ハイヒール 朝日放送 2009-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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