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산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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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산 전투는 1950년 한국 전쟁 중 북한군의 공세와 유엔군의 방어전이 벌어진 전투이다. 북한군은 부산 교두보를 돌파하기 위해 대구로 진격하려 했고, 가산은 대구 방어의 중요한 지점이었다. 북한군은 가산을 점령했으나, 미군과 대한민국 국군의 반격으로 인해 격퇴당했다. 이 전투에서 북한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이후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으로 인해 철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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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산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분쟁 명칭 | 가산 전투 |
| 부분 | 낙동강 방어선 전투 |
| 위치 | 대한민국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 (가산 (가산, Ka mountain)) |
| 기간 | 1950년 9월 1일 ~ 15일 |
| 결과 | 유엔의 승리 |
| 교전 세력 | |
| 교전국 1 | |
| 지휘관 | |
| 지휘관 1 | 호바트 R. 게이 |
| 지휘관 2 | 홍림 |
| 부대 | |
| 부대 1 | 1 기병사단 |
| 부대 2 | 1 사단 |
| 병력 규모 | |
| 병력 1 | 미국: 15,000명 |
| 병력 2 | 14,000명 |
| 피해 규모 | |
| 피해 1 | 미국: ~600명 사망 |
| 피해 2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0,000명 이상 사망, 부상, 포로 |
| 관련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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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조선인민군은 한국 전쟁 초기, 병력과 장비 면에서 대한민국 국군과 유엔군보다 우위에 있었다.[60] 이들은 정면 공격과 양익 포위 전술을 사용하여 유엔군을 효과적으로 격파하고 남쪽으로 밀어붙였다.[61][62] 그러나 8월, 부산 교두보가 형성되면서 유엔군은 연속적인 방어선을 구축했고, 우수한 병참 체계를 통해 더 많은 병력과 물자를 지원받아 전력을 강화했다.[63]
2. 1. 부산 교두보 전투
조선인민군은 한국 전쟁 초기, 병력과 장비 면에서 대한민국 국군과 유엔군보다 우위에 있었다.[60] 이들은 정면 공격과 양익 포위 전술을 사용하여 유엔군을 효과적으로 격파하고 남쪽으로 밀어붙였다.[61][62] 그러나 8월, 부산 교두보가 형성되면서 유엔군은 연속적인 방어선을 구축했고, 우수한 병참 체계를 통해 더 많은 병력과 물자를 지원받아 전력을 강화했다.[63]
8월 5일, 조선인민군은 부산 교두보로 접근하는 네 가지 주요 경로에서 정면 공격을 시도했다. 8월 내내 조선인민군 제6사단과 조선인민군 제7사단은 마산 전투에서 미국 제25보병사단과 교전하며 고암리 전투[64]와 서북산 전투에서 반격했다.[65] 그러나 유엔군은 충분한 장비와 예비군을 바탕으로 조선인민군의 공격을 반복적으로 격퇴했다.[66] 마산 북쪽에서는 조선인민군 제4사단과 미국 제24보병사단이 낙동강변 지역에서 전투를 벌였다. 제1차 낙동강 전투에서 조선인민군 제4사단은 미군 예비군의 투입으로 50%의 사상자를 내고 강을 건너 철수했다.[67][68] 대구 지역에서는 대구 전투에서 조선인민군 5개 사단이 유엔군 3개 사단에 의해 격퇴되었고,[69][70] 특히 볼링장 전투에서 조선인민군 제13사단이 큰 피해를 입었다.[71] 동해안에서는 포항 전투에서 조선인민군 3개 사단이 추가로 격퇴되었다.[72] 이로 인해 조선인민군은 전쟁 발발 이후 처음으로 전술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 직면했다.[73]
2. 2. 9월 공세
조선인민군 사령부는 유엔 해군의 지원 때문에 유엔군을 측면에서 공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71] 대신, 방어선을 돌파하고 붕괴시키기 위해 정면 공격을 하는 것을 전투에서 성공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으로 선택했다.[63] 소련이 제공한 정보를 통해, 조선인민군은 유엔군이 부산 교두보를 따라 병력을 증강하고 있으며, 곧 공격을 시작하지 않으면 전투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74] 만약 계획이 실패하면, 대구를 포위하고 그곳에 있는 유엔군 부대를 파괴하려고 했다. 이를 위해 조선인민군은 먼저 대구로 가는 보급선을 끊으려고 했다.[75][76]8월 20일, 조선인민군 사령부는 예하 부대에 작전 명령을 내렸다.[74] 이 명령에 따라 유엔군 전선에서 동시에 5개의 공격을 해야 했다. 이러한 공격으로 유엔 방어군을 따돌리고 조선인민군이 최소한 한 곳에서 전선을 돌파하여 유엔군을 퇴각시킬 수 있었다. 5개의 그룹이 조직되었다.[77] 중앙 공격은 조선인민군 제3사단, 제13사단, 제1사단이 미국 제1기병사단과 대한민국 제1사단을 돌파하여 대구로 진격하는 것이었다.[78]
3. 전투

가산 공격과 동시에 유엔군과 조선인민군은 다부동 전투에서 가까운 거리에서 교착 상태에 빠졌다.[79][20] 9월 1일, 조선인민군 제13사단 김송준 소령이 유엔군에 귀순하여[81][22] 그날 해질녘에 조선인민군이 본격적인 공격을 시작할 것이라고 보고했다.[80][21] 그는 13사단이 무기가 없는 2,000명을 포함한 4,000명의 병력을 보충하여 현재 약 9,000명의 병력으로 늘어났다고 말했다. 이 정보를 받은 호바트 R. 게이 제1기병사단장은 그의 사단 모든 최전방 부대에 공격에 대비하라고 경고했다. 백선엽 대한민국 제1사단장도 부하들에게 공격에 대비하도록 지시했다.[81][22]
3. 1. 조선인민군의 공격
9월 2일 밤, 조선인민군은 대구 북방의 볼링장 일대에서 총공세를 개시했다.[82] 상주에서 미8기병연대는 기습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조선인민군은 9월 2일부터 3일까지 볼링장에서 서쪽으로 448고지와 다부동에서 북쪽으로 3.2km 떨어진 언덕에서 제8기병대 소속 2개 대대를 공격하여 점령했다.[83] E중대는 보급이 끊겨 철수해야 했다. 제3대대 지휘관은 I중대를 다부동 바로 북쪽에 있는 봉쇄 위치에 배치했다. 9월 3일 오전 2시에 조선인민군 T-34 전차 2대와 보병 일부가 공격했으나, I중대는 많은 사상자를 내고도 공격을 격퇴했다. 전투로 지친 제2대대는 다부동 남쪽의 방어 진지에 급조된 제3대대를 통해 철수했다.[85] 같은 날 낮, 조선인민군 제1사단은 제8기병 I&R소대와 다부동에서 동쪽으로 6.4km 떨어진 902고지 언덕의 성벽도시 가산에서 경찰 분견대를 몰아냈다.[84] 9월 3일, 유엔군 제8사단은 대구에서 북쪽으로 16km 떨어진 산 꼭대기에 위치한 다부동과 902고지를 모두 잃었다.[85]조선인민군은 902고지 북쪽에 포병을 집중시켰고, 포격은 가볍고 산발적이었지만 제99야전포병대대 진지에 약간의 피해를 입혔다.[27] 이러한 조선인민군의 갑작스러운 대구 남쪽으로의 진격은 중장 월튼 워커를 우려하게 했다.[21]
3. 2. 미군의 반격
미 제8군은 제1기병사단에게 902고지(가산)를 탈환하고 방어하라고 명령했다.[86] 902고지는 대구에서 북쪽으로 약 16.09km 떨어진 곳에 있었으며, 이곳을 점령하면 대구 시내를 관측하고 포병 및 박격포 사격을 지휘할 수 있었다.[83][24]902고지는 다부동 도로를 제압하기에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만약 가까이 있었다면 주요 통신로를 통제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인민군은 포병과 박격포 탄약이 부족했기 때문에 관측소로써 이곳을 점거하여 얻을 이익은 적었다.[86][27]
1950년 당시 가산 정상은 "성벽 도시"로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실제 성벽 도시는 없었다. 가산, 즉 902고지는 해발 약 914.40m의 산으로, 정상부에 약 1.61km 길이의 타원형 반평탄 지형을 가지고 있었다.[27] 고대 시대에 한국인들은 정상 주위에 약 9.14m 높이의 석벽을 쌓고 산정을 요새로 개조했다. 1950년 당시 정상 대부분은 덤불과 작은 소나무가 우거져 있었고, 몇 개의 작은 계단식 밭이 있었다. 한국인들은 가산을 "성산"으로 불렀으며, 능선 북쪽 끝 근처에는 불교 보국사가 있었다.[28]
1950년 8월 29일, 제1기병사단은 가산 정상으로 정찰대를 보냈고, 그곳에서 156명의 경찰을 발견했다.[28] 제1기병사단과 대한민국 제1사단 중 누가 산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조선인민군이 산을 점령한 9월 3일 오후에 이 논쟁은 끝났다.[28]
제8군은 제1기병사단에게 가산, 즉 성벽 도시에 대한 책임을 지라고 명령했다.[29] 이에 제1기병사단 참모장 어니스트 V. 홈즈 대령은 제8공병전투대대 지휘관 윌리엄 C. 홀리 중령에게 제8기병연대 지휘관 레이몬드 D. 팔머 대령에게 보고하도록 지시했다.[30]
그날 오후 팔머는 제8공병전투대대 D중대와 제8기병 E중대 지휘관들에게 가산 탈환 작전을 설명했다. 존 T. 케네디 중위가 지휘하는 공병 D 중대가 공격을 선두로 하고, E중대가 뒤따르기로 했다. 부대가 정상을 점령하고 E중대가 방어 위치를 잡으면 공병 중대는 산에서 내려올 예정이었다. D중대 병사들 중 다수는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던 베테랑 보병이었다.[30]
1950년 9월 4일 아침, D 중대는 즉시 보병 부대로 가산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24] 공병대는 다부동 도로 동쪽 약 3.22km 떨어진 기성동 마을 근처 집결지에 도착했고, 홀리는 통신 지휘소를 설치했다. 저격수의 사격이 가산의 가파른 경사 기슭으로 올라가는 길을 따라 이동하는 병사들에게 쏟아졌다. 가산에는 약 75명의 조직력이 없는 조선인민군이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으나, 실제로는 9월 3일 오후와 저녁에 조선인민군 제2연대 제2대대 제1사단이 가산 정상에 주둔했었다.[30]
공병 중대는 9월 4일 정오경에 남쪽 능선을 따라 산을 오르며 공격을 시작했다.[24] 제1소대가 선두에 섰고, 제2소대와 제3소대가 그 뒤를 따랐다. D 중대 제2소대 소대 상사 제임스 N. 밴디그리프는 이 공격이 "자살 임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31]
D 중대는 길을 약 1.61km도 채 올라가지 못해 기관총 사격을 받아 여러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후 조선인민군의 박격포 사격으로 2명이 사망하고 8~10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때 제2소대장은 신장 질환으로 쓰러졌고, 지휘권은 밴디그리프에게 넘어갔다. 밴디그리프는 중대의 선두에 선 자신의 소대를 이끌고 계곡을 올라갔고, 17:00경 작은 능선 아래 터널을 통과하여 언덕 902 정상의 남쪽 팔인 언덕 755의 분지 모양 정상으로 들어갔다.[31]
3. 3. 가산산성 방어전
9월 5일 새벽, 조선인민군이 다시 공격해왔다.[29] 공병대는 이 공격을 막아냈지만, 피해를 입었다. 조선인민군의 공격으로 밴디그리프의 무전기가 고장나서, 케네디의 지휘소와 연락하기 위해 연락병을 보내야 했다. 탄약이 부족해지자, 세 대의 미국 C-47 수송기가 날아와 공수를 실시했다. 케네디는 주황색 식별 깃발을 펼쳤지만, 조선인민군도 비슷한 깃발을 사용했다. 비행기는 선회했고, 결국 조선인민군 진지에 탄약과 식량을 떨어뜨렸다. 공수 직후, 두 대의 F-51 머스탱 전투기가 날아와 D 중대를 공격했다. 조선인민군의 깃발은 수송기와 전투기 모두를 헷갈리게 했다. 전투기는 D 중대 경계선 안에 두 개의 네이팜탄을 투하했지만, 부상자는 없었다. 그 후 비행기는 제2소대 진지를 향해 기관총 사격을 가했지만, 역시 사상자는 없었다. 이 공습 직후, 조선인민군 병력이 진지를 공격했고, PPSh-41 "버프 건" 사격으로 케네디는 다리와 발목에 총상을 입었다.[33]
오전 10시에서 11시 사이, 제8기병연대 E 중대의 선두 소대가 755고지 정상에 도착하여 D 중대의 경계선으로 들어왔다. 일부 공병대원은 E 중대 병사들이 자신들의 편임을 밝히기 전에 이들에게 사격을 가했다. E 중대 소대는 밴디그리프의 오른쪽에 자리를 잡았고, 케네디는 통합 부대의 지휘권을 E 중대 지휘관에게 넘겼다. 그런 다음 케네디는 부상병 12명을 모아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일행은 대부분의 구간에서 소총 공격을 받았다. 아침에 미국 장교가 이끄는 한국인 A-프레임 짐꾼 부대가 물품을 싣고 산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조선인민군의 공격으로 짐꾼 여러 명이 사망하면서 이들은 퇴각했다.[33]
E 중대는 D 중대가 755고지로 향하는 것을 따라가는 데 늦어졌다. 9월 4일 공병대가 산길을 올라가기 시작한 직후, E 중대는 산기슭에 있는 홀리 지휘소에 도착했다. 당시 조선인민군 박격포 공격이 길에 떨어졌고, 중대 지휘관은 그 때문에 전진할 수 없다고 말했다. 홀리는 이 정보를 팔머에게 무선으로 보고했고, 팔머는 다른 중대 지휘관을 임명했다. 이 두 번째 장교는 곧 다리에 부상을 입었고, 홀리는 세 번째 장교를 임명하여 그날 저녁 8시경 E 중대와 함께 산을 올라갔다.[33] 조선인민군의 공격으로 동이 트기 전, 중대는 고지에서 약 457.20m 떨어진 지점에서 멈춰 섰다. 이는 조선인민군 제13사단이 9월 2일 저녁 공격을 시작하여 타부동 북쪽의 제2대대를 궤멸시켰을 때 차단된 바로 그 중대였다. 이 경험과 연대로 복귀하기 위한 우회적인 여정으로 인해 지치고 낙담한 E 중대 병사들은 사기가 떨어져 있었다.[34]
E 중대 소대가 밴디그리프에 합류한 직후, 조선인민군이 다시 공격했다. E 중대 보병들은 박격포를 가져오지 않았고, 소총만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밴디그리프는 3.5인치 로켓 발사기를 들고 조선인민군 공격자에게 발사하여 공격을 중단시켰다. 이제 밴디그리프 부대는 탄약이 거의 다 떨어졌다. 그는 부하들에게 주변에 쓰러진 조선인민군 사망자로부터 모든 무기와 탄약을 챙기도록 지시했고, 이러한 방식으로 비상용으로 약 30~40정의 소총, 5정의 PPSh-41 기관단총, 그리고 몇 개의 수류탄을 확보했다.[34]
이 무기를 챙기는 과정에서 밴디그리프는 제3분대의 일등병 멜빈 L. 브라운의 참호 진지를 지나쳤다. 브라운은 소대 진지의 가장 왼쪽 벽 옆에 있었다. 브라운의 진지 주변 벽 밑에는 15~20명의 조선인민군 사망자가 있었다. 그날 초, 오전 8시경 케네디는 브라운을 방문하여 브라운이 BAR 사격으로 죽인 5명의 조선인민군 사망자를 보았다. 그 후, 브라운은 자동 소총 탄약을 다 썼고, 몇 개의 수류탄도 다 썼으며, 마지막으로 벽을 넘으려던 조선인민군의 머리를 참호 도구로 쳐서 막아냈다. 브라운은 아침 일찍 어깨에 약간의 부상을 입었지만, 스스로 붕대를 감고 진지를 떠나기를 거부했다.[34]
3. 4. 314고지 전투
9월 12일, 미군 제7기병연대 제3대대는 대구 북쪽의 314고지를 공격하여 치열한 전투 끝에 고지를 탈환했다.[43] 314고지는 대구에서 가장 가까운 조선인민군 점령지로, 대구 방어에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조선인민군은 다음 대구 진격에서 314고지를 사용하려 했으며, 이곳에서 대구까지 관측이 가능했고, 대구 분지를 둘러싼 남쪽의 작은 고지를 지휘할 수 있었다.[40]314고지는 314m 고지 덩어리의 남쪽 봉우리로, 능선은 약 1.61km 길이의 일련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고지 덩어리의 모든 면은 매우 가파른 지형이었다.[42]
제임스 H. 린치 중령이 이끄는 7기병대 3대대는 공격 전날 535명이었으며, 314고지 공격은 이들의 두 번째 작전이었다. 대대는 좁은 능선 꼭대기에 가능한 많은 소총수를 집결시키는 방식으로 공격을 계획했다. 탄약 부족으로 포병 준비는 없었지만, 공격 시작 전 공습이 있었다.[42]
조선인민군의 박격포 사격과 소화기 사격이 격렬해지면서 진격이 늦어졌지만, L 중대 병사들은 약 400명의 조선인민군 반격을 공습과 포병, 박격포, 소화기 사격을 조합하여 격퇴했다. 오후 2시에 시작된 공습은 능선 꼭대기와 북쪽 경사면을 덮었다.[42] 많은 장교들이 부상을 입었지만 후송을 거부하고 공격을 계속했고, 병사들은 자발적으로 공격을 계속했다.[43]
정상이 가까워지자 조선인민군은 격렬한 반격으로 근접전을 벌였다. 일부 병사들이 정상을 점령했지만 조선인민군의 박격포와 기관총 사격으로 쫓겨났다. 세 번째 공격에서 중대장이 병사들을 이끌고 60도의 경사면을 기어 올라 정상에 도착하여 조선인민군과 교전하여 그들의 진지를 유린했다.[43]
L 중대에는 40명 미만, I 중대에는 약 40명의 유효 인원이 남았으며, I 중대는 모든 장교를 잃었다.[43] 3대대는 처음 두 시간 동안 229명의 전투 사상자를 냈는데, 이 중 38명이 사망하고 167명이 부상을 입었다. 조선인민군 박격포 사격이 사상자의 80%를 차지했다.[43]
대대는 6일 동안 314고지를 점령하고 많은 양의 조선인민군 장비와 탄약을 수집했다.[39] 314고지에 있던 조선인민군 병사들은 미군 군복, 헬멧, 전투화를 착용하고 M1 소총과 카빈총을 소지하고 있었다.[24] 314고지 작전 중 조선인민군에 의해 저질러진 몇 가지 전쟁 범죄가 드러났다. 9월 12일 고지에서 최종 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병사들은 묶인 채 휘발유를 붓고 불태워진 미국 장교를 발견했고, 이틀 후에는 손이 묶인 채 칼날총으로 찔리고 총에 맞은 다른 미국 병사 4명의 시신이 발견되었다.[44]
3. 5. 조선인민군의 철수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으로 유엔군은 조선인민군(KPA)의 주요 보급로와 증원로를 차단하였다.[49][50] 9월 16일, 미 제8군은 부산 교두보 돌파를 시작했다.[51][52] 9월 19일, 유엔군은 조선인민군이 밤사이에 부산 교두보 대부분을 포기한 것을 확인하고, 방어 위치에서 벗어나 진격을 시작했다.[51][52]조선인민군은 가능한 한 많은 병력을 북한으로 이동시키기 위해 지연전을 펼치기 시작했다.[53] 9월 18일에서 19일 밤, 마산 지역을 시작으로 조선인민군은 북쪽으로 빠르게 철수했다.[53] 유엔군은 북쪽으로 신속하게 추격하여 더는 전략적 중요성이 없어진 낙동강 방어선을 넘어섰다.[54]
4. 전쟁의 영향
조선인민군 제13사단과 제1사단은 가산 전투에서 거의 궤멸 수준의 피해를 입었다. 9월 1일 공세 시작 당시 제1사단은 5,000명, 제13사단은 9,000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87] 10월까지 제1사단 병력 중 2,000명만이 북한으로 후퇴했고, 제13사단은 완전히 전멸하여 소수의 병력만이 북한으로 돌아갔다. 사단 포병 사령관, 군의관, 참모장, 3개 연대 사령관 중 2명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단 장교들도 전사했다. 인민군 제19연대가 항복했을 때는 167명만이 남아있었다. 결국 9,000명 중 수백 명만이 북한으로 돌아갔으며, 인민군 제2군단도 비슷한 상황에 처해 패배 직전이었다.[88]
미 제1기병사단은 부산 교두보 방어 과정에서 전사 770명, 부상 2,613명, 포로 62명의 피해를 입었다.[89] 여기에는 대구 전투에서 발생한 약 600명의 사상자(전사자 약 200명)가 포함되어 있다.[90] 미군은 계속 후퇴했지만, 조선인민군이 부산 방어선을 돌파하는 것은 저지했다. 9월 1일, 사단 병력은 14,703명으로 감소했지만, 여전히 공격에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91]
대한민국 국군의 피해는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지만, 상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88] 9월 1일, 한국군 제1사단 병력은 10,482명이었다.[9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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