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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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산 전투는 1950년 한국 전쟁 중 부산 교두보 방어전의 일부로, 8월 6일부터 9월 19일까지 마산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유엔군은 킨 기동부대를 투입하여 북한군의 남진을 막고 진주를 탈환하려 했으나, 북한군의 저항으로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전투는 격렬하게 전개되었고, 미군은 고립된 채 공중 지원에 의존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킨 기동부대는 북한군의 진격을 막는 데 성공했지만,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었다. 전투 결과, 유엔군은 부산 교두보를 사수하여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 기반을 마련했고, 북한군은 막대한 병력 손실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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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산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 개요 | |
![]() | |
| 분쟁 명칭 | 마산 전투 |
| 부분 | 낙동강 방어선 전투 |
| 시기 | 1950년 8월 5일 ~ 9월 19일 |
| 장소 | 마산시, 대한민국 |
| 결과 | 유엔군의 승리 |
| 교전 세력 | |
| 교전국 1 | 유엔군 |
| 참가국 1 | 미국 대한민국 |
| 교전국 2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 지휘관 | |
| 지휘관 1 | 윌리엄 B. 킨 |
| 지휘관 2 | 방호산 백낙칠 |
| 병력 규모 | |
| 병력 1 | 약 15,000명 |
| 병력 2 | 20,000명 |
| 부대 | |
| 부대 1 | 미국 제25보병사단 미국 제24보병연대 미국 제27보병연대 미국 제35보병연대 미국 제5보병연대전투단 대한민국 해병대 대한민국 경찰 |
| 부대 2 | 조선인민군 제6사단 조선인민군 제7사단 |
| 사상자 규모 | |
| 사상자 1 | 사망: 1,057명 부상: 3,085명 실종: 20명 |
| 사상자 2 | 사망 및 이탈: 11,000명 포로: 3,000명 |
2. 배경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한 침공으로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국제 연합은 남한을 지원하기 위해 군대 파견을 결정했다. 가장 먼저 투입된 미국 제24보병사단은 병력과 장비의 열세 속에서 북한군의 진격을 지연시키는 임무를 맡았다.[3][4] 초기 오산 전투를 비롯한 여러 전투에서 미군은 연이어 패배하며 남쪽으로 후퇴했고, 대전 전투 이후에도 북한군의 공세는 계속되었다.[5][6][7][8] 북한군은 부산 교두보를 확보하려는 유엔군을 압박하며 남진했고, 특히 서부 전선에서 빠르게 진격하여 진주를 점령하는 등 유엔군을 위협했다.[10][13] 이러한 상황 속에서 유엔군은 낙동강을 중심으로 최후 방어선을 구축하게 되었으며, 마산 지역은 이 방어선의 중요한 일부가 되었다.[14][15]
2. 1. 전쟁 발발과 초기 상황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남한을 침략하자 국제 연합은 남한을 지원하기 위해 군대 파견을 결정했다. 미국은 조선반도에 지상군을 투입하여 조선인민군의 남하를 저지하고 남한 정부의 붕괴를 막고자 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5년 동안 극동 지역의 미군은 지속적으로 감축되어 왔고, 당시 가장 가까운 부대는 일본에 주둔 중이던 제24보병사단이었다. 이 사단은 정원 미달 상태였고, 군비 감축의 영향으로 보유 장비 대부분이 구식이거나 노후화된 상태였다. 그럼에도 제24사단은 남한으로 급파되었다.[3]
제24보병사단은 한국 전쟁에 최초로 투입된 미군 부대로, 압도적인 수의 조선인민군을 상대로 진격을 최대한 늦추어 후속 부대가 도착할 시간을 확보하는 임무를 맡았다.[4] 이들은 제1기병사단, 제7사단, 제25사단 및 미국 제8군 지원 부대가 전개될 때까지 몇 주간 고립된 상태에서 조선인민군의 공세를 막아내야 했다.[4] 7월 5일, 제24사단의 선발대는 조선인민군과의 첫 교전인 오산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고 패배했다.[5] 이후 한 달간 제24사단은 수적으로나 장비 면에서 우세한 조선인민군에게 조치원, 천안, 평택 등에서 연이어 패배하며 남쪽으로 밀려났다.[6][7] 제24사단은 대전 전투에서 마지막 저항선을 구축했으나, 큰 피해를 입고 결국 후퇴했지만 7월 20일까지 조선인민군의 진격을 성공적으로 지연시켰다.[8] 이 시점에는 미 제8군의 전투 병력 규모가 한반도 남부로 진격해 온 조선인민군의 병력과 비슷해졌으며, 매일 새로운 유엔군 부대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9]
2. 2. 북한군의 진격과 유엔군의 저항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한 침략 이후, 국제 연합은 남한을 지원하기 위해 군대 파견을 결정했다. 미국은 한반도에 지상군을 투입하여 조선인민군(북한군)의 남침을 격퇴하고 남한의 붕괴를 막고자 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5년간 극동 주둔 미군은 꾸준히 감축되었고, 당시 가장 가까운 부대는 일본에 주둔하던 제24보병사단이었다. 이 사단은 병력이 부족했고 장비 대부분이 노후화된 상태였으나, 남한으로 출동 명령을 받았다.[3]제24보병사단은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증원군 도착 시간을 벌기 위해 한국에 가장 먼저 투입된 미군 부대였다.[4] 이 사단은 북한군을 지연시키면서 제1기병사단, 제7사단, 제25사단 및 미국 제8군 지원 부대가 배치될 시간을 벌기 위해 수 주 동안 고군분투했다.[4] 제24보병사단의 선발대는 7월 5일, 북한군과의 첫 교전인 오산 전투에서 큰 패배를 겪었다.[5] 이후 한 달간 제24보병사단은 조치원, 천안, 평택 등지에서 수적으로 우세하고 장비가 더 나은 북한군에게 거듭 밀려 남쪽으로 후퇴했다.[6][7] 제24사단은 대전 전투에서 마지막 방어선을 구축했으나 큰 피해를 입고 7월 20일까지 북한군의 진격을 지연시키는 데 그쳤다.[8] 이 무렵에는 제8군의 전투 병력이 북한군과 거의 대등해졌으며, 매일 새로운 유엔군 부대가 도착하고 있었다.[9]
대전 함락 후, 북한군은 부산 교두보를 포위하기 위해 진격했다. 북한군 제4사단과 제6보병사단은 광범위한 측면 기동을 통해 남쪽으로 빠르게 내려왔다. 이들은 유엔군의 좌측 측면을 포위하려 했으나, 그 과정에서 병력이 넓게 분산되었다. 북한군은 우세한 병력과 장갑차를 앞세워 유엔군 진지를 반복적으로 공격하며 밀어붙였다.[10]
미군은 한국 남부 지역에서 벌어진 일련의 교전을 통해 마침내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새로 한국에 도착한 제29보병연대 제3대대는 7월 27일 하동에서 북한군의 조직적인 매복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어 부산으로 가는 길이 위협받았다.[11][12] 얼마 지나지 않아 북한군은 서쪽의 진주를 점령하고 미 제19보병연대를 밀어내면서 부산으로 향하는 또 다른 경로를 확보했다.[13] 하지만 미군은 8월 2일 노치 전투에서 측면으로 침투한 북한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서부 전선에서 큰 손실을 입은 북한군 부대는 며칠간 후퇴하여 재정비와 증원을 받았다. 이는 양측 모두에게 부산 교두보 공방전을 준비할 시간을 주었다.[14][15]
3. 마산 전투

1950년 8월, 부산 교두보에서 유엔군의 첫 반격 시도가 마산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월튼 워커 미국 제8군 사령관은 윌리엄 B. 킨 소장이 지휘하는 '''킨 기동부대'''를 투입하여 진주를 확보하려 했으나,[16][17][18] 인민군 제6사단의 완강한 저항과 때마침 시작된 인민군의 공세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다.[23][30][25][39] 이 과정에서 미군은 피의 골짜기 학살과 같은 피해를 입기도 했다.[38]
공세 실패 후, 미 제25보병사단은 마산 서쪽 산악 지대에 방어선을 구축했다.[42] 이후 한 달여간 배틀 마운틴, 필봉 등 주요 고지를 둘러싼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으며,[44][48] 고맘-니, 하만, 남강 유역 등 마산 전역에서 격전이 이어졌다.[47][67][79] 조선인민군은 제7사단 증원과 남한 출신 강제 징집병까지 동원하며 공세를 지속했다.[44][45]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 성공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마산 지역의 조선인민군도 9월 18일 밤부터 철수를 시작했다.[87] 유엔군은 이들을 추격하며 북진을 개시했다.[84][88]
3. 1. 킨 기동부대 편성
중장 월튼 워커가 이끄는 제8군은 1950년 8월, 6.25 전쟁 발발 이후 UN군의 첫 반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16][17] 이 계획은 먼저 마산 지역의 미군 예비 부대를 동원하여 인민군 제6사단으로부터 진주를 확보하고, 이후 8월 중순에는 낙동강까지 전면적인 공세를 펼치는 것을 목표로 했다.[16][17] 워커 중장의 목표 중 하나는 대구 지역에 집결할 것으로 예상되는 인민군 주력 부대의 관심을 분산시키기 위해 일부 인민군 부대를 남쪽으로 유인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8월 6일, 제8군은 제25보병사단 사단장인 소장 윌리엄 B. 킨의 이름을 딴 '''킨 기동부대'''(Task Force Kean)의 공격 작전 지침을 하달했다. ''킨 기동부대''는 제25보병사단(제27보병연대와 야전 포병대대 제외)을 주축으로 제5연대 전투단과 제1임시 해병여단이 배속되어 총 병력은 약 2만 명에 달했다.[18] 작전 계획에 따라 기동부대는 마산 인근 점령지에서 서쪽으로 진격하여 진주로 통하는 고개를 점령하고, 남강까지 전선을 확보하기로 되어 있었다.[19] 그러나 이 공세는 제2보병사단 전체와 3개 대대 이상의 미군 전차가 도착해야 본격적으로 실행될 수 있는 조건이었다.[20]''킨 기동부대''는 8월 7일 마산에서 공격을 시작했다.[21] 마산 북쪽 고개인 '노치'(The Notch)에서 제35보병연대는 약 500명의 인민군 보병과 교전하여 격퇴했다. 이후 부대는 판성으로 진격하여 인민군에게 350명의 추가 사상자를 입히고, 그곳에서 인민군 제6사단 사령부를 점령하는 성과를 거두었다.[22] 하지만 기동부대의 다른 부대들은 인민군의 거센 저항에 부딪혀 진격 속도가 더뎌졌다.[23] ''킨 기동부대''가 진동리 지역으로 진격하는 과정에서 전투는 혼란 양상을 띠었으며, 분산된 부대들은 미 공군의 공습과 보급품 공중 투하에 의존해야 했다.[24] 공교롭게도 ''킨 기동부대''의 공세는 같은 시기 진격을 개시한 인민군 제6사단의 공세와 정면으로 충돌했다.[30][25]
이 지역에서는 3일간 격렬한 전투가 이어졌다. 8월 9일, ''킨 기동부대''는 진주를 탈환할 태세를 갖추었다.[26] 미 공군의 지원 아래 기동부대는 초반에 빠르게 진격했지만, 인민군의 저항은 여전히 완강했다.[27] 8월 10일, 미 해병대가 진격을 개시하여[13] 우연히 인민군 제83자동화연대(제105기갑사단 소속)와 조우했다. 제1해병항공단 소속 F4U 콜세어 전투기들이 즉시 출격하여 후퇴하는 인민군 부대를 수차례 공격했고, 이 과정에서 인민군 약 200명이 사상하고 100여 대의 차량 및 장비가 파괴되었다.[28][29] 그러나 전황 변화로 인해 제1임시 해병여단은 8월 12일부로 ''킨 기동부대''에서 차출되어 다른 지역으로 재배치되었다.[30][31] ''킨 기동부대''는 미 해군 함포 지원[31]과 야전 포병의 엄호를 받으며 계속 진격하여 천동리 인근 지역을 점령했다.[32] 하지만 제8군은 낙동강 방어선 등 다른 전선의 상황 악화로 인해 ''킨 기동부대''의 일부 부대를 대구 지역으로 이동시키도록 명령했다.[14][31]
8월 10일에서 11일로 넘어가는 밤, 제25보병사단 수송대가 계곡을 통해 이동하려다 진흙탕에 발이 묶이는 상황이 발생했다. 다음 날 아침, 고지를 점령한 인민군이 이들을 기습 공격했다.[33] 혼란 속에서 인민군 장갑차 일부가 미군의 방어선을 돌파하여 후방의 미군 포병 진지를 직접 타격했다.[34] 이 기습 공격으로 제555 및 제90야전포병대대는 보유 장비 대부분을 손실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35] 인민군과 미군 양측 모두 기갑 부대를 투입하고 미 해병 항공기가 지속적으로 공중 지원을 제공했지만, 치열한 교전에도 불구하고 어느 쪽도 결정적인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36] 미군은 포병 진지를 탈환하기 위해 여러 차례 공격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이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37] 훗날 미군이 이 지역을 다시 확보한 후 조사한 결과, 당시 전투 현장에서 제555야전포병대대 소속 55명, 제90야전포병대대 소속 20명 등 총 75명의 미군 포병 병사들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이 사건은 이후 피의 골짜기 학살(Bloody Gulch massacre)로 알려지게 되었다.[38] 결국 ''킨 기동부대''는 더 이상 진격을 유지할 수 없었고, 8월 14일까지 마산 방면으로 후퇴하여 공세 시작 지점과 거의 동일한 위치로 물러났다.[39]
''킨 기동부대''는 당초 목표였던 북쪽의 인민군 부대 분산과 진주 고개 확보에 실패했다. 그러나 이 공세는 이후 전투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인 제25보병사단 장병들의 사기를 크게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37][40] 한편, 이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은 인민군 제6사단은 병력이 3,000~4,000명 수준으로 감소했으며, 안동 등지에서 강제 징집한 남한 출신 병력으로 손실을 메워야 했다.[41] 이후에도 마산 일대에서는 6.25 전쟁 기간 동안 전투가 계속되었다.[54]
3. 2. 킨 기동부대의 공세와 좌절
미국 육군 중장 월튼 워커가 이끄는 미 제8군은 1950년 8월, 한국 전쟁 발발 이후 첫 반격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16][17] 이 계획은 먼저 마산 지역의 미군 예비 부대를 동원하여 인민군 제6사단으로부터 진주를 확보하고, 이후 8월 중순에는 낙동강까지 전선을 넓히는 대규모 공세를 목표로 했다. 워커 중장의 의도 중 하나는 인민군 일부를 남쪽으로 유인하여 대구 인근에 집결할 것으로 예상되는 주력 부대를 분산시키는 것이었다.[16][17] 8월 6일, 미 제8군은 미국 육군 소장 윌리엄 B. 킨 (미 제25보병사단 사령관)의 이름을 딴 '킨 기동부대'의 작전 지침을 하달했다. 킨 기동부대는 미 제25보병사단(제27보병연대와 야전 포병대대 제외), 제5연대 전투단 및 미 제1임시 해병여단으로 구성되었으며, 총 병력은 약 2만 명에 달했다.[18] 작전 계획은 마산 인근 점령지에서 서쪽으로 진격하여 진주 고개를 확보하고 남강까지 전선을 구축하는 것이었다.[19] 그러나 이 공세는 미 제2보병사단 전체와 3개 대대 이상의 미군 전차가 도착해야 성공할 수 있는 조건부 계획이었다.[20]킨 기동부대는 8월 7일 마산에서 공세를 개시했다.[21] 마산 북쪽 고개인 노치에서 미 제35보병연대는 500명의 인민군 보병과 교전하여 격퇴했다. 이후 부대는 판성으로 진격하여 인민군에게 350명의 사상자를 입히고 인민군 제6사단 본부를 점령했다.[22] 하지만 기동부대의 다른 부대들은 인민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진격 속도가 늦춰졌다.[23] 킨 기동부대가 진동리 지역으로 진격하면서 전투는 혼란스러운 양상으로 전개되었고, 분산된 미군은 공습과 공중 투하에 의존해야 했다.[24] 이 공세는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 인민군 제6사단이 개시한 공세와 정면으로 충돌했다.[30][25]
이 지역에서는 3일간 격렬한 전투가 이어졌다. 8월 9일, 킨 기동부대는 진주를 탈환할 태세를 갖추었다.[26] 미 공군의 지원을 받은 기동부대는 초기에는 빠르게 진격했으나, 인민군의 저항은 매우 거셌다.[27] 8월 10일, 미 해병대는 진격을 시작하던 중[13] 우연히 인민군 제83자동화연대(인민군 제105기갑사단 소속)를 발견했다. 제1해병항공단 소속 F4U 콜세어 전투기들이 출격하여 후퇴하는 인민군 부대를 수차례 공격했고, 이 과정에서 인민군 약 200명이 사상하고 100여 대의 차량 및 장비가 파괴되었다.[28][29] 그러나 미 제1임시 해병여단은 8월 12일, 다른 전선으로 재배치되기 위해 기동부대에서 철수했다.[30][31] 남은 킨 기동부대는 미 해군 함포 사격[31] 및 야전 포병의 지원을 받으며 계속 진격하여 천동리 인근 지역을 점령했다.[32] 하지만 미 제8군은 낙동강 방어선 등 다른 중요 전선에 병력을 투입하기 위해 킨 기동부대의 일부 부대를 대구로 이동시키도록 명령했다.[14][31]
8월 10일과 11일 사이 밤, 미 제25보병사단의 사단 수송대가 계곡을 통해 이동하려다 진흙탕에 발이 묶이는 상황이 발생했다. 다음 날 아침, 고지를 점령한 인민군이 이들을 기습 공격했다.[33] 혼란 속에서 인민군 장갑차가 방어선을 돌파하여 미군 포병 진지를 직접 공격하는 데 성공했다.[34] 이 기습으로 제555야전포병대대와 제90야전포병대대의 장비 대부분이 파괴되었다.[35] 양측의 장갑차들이 현장으로 몰려들고 미 해병 항공기가 지속적으로 공중 지원을 제공했지만, 치열한 교전에도 불구하고 어느 쪽도 결정적인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36] 미군은 여러 차례 반격을 시도했으나 포병 진지를 탈환하는 데 실패하고 많은 사상자만 냈다.[37] 이후 미군이 이 지역을 다시 확보했을 때, 제555야전포병대대 소속 55명과 제90야전포병대대 소속 20명 등 총 75명의 미군 시신이 발견되었다. 이 사건은 훗날 피의 골짜기 학살로 알려지게 되었다.[38] 결국 킨 기동부대는 더 이상 진격을 유지할 수 없었고, 마산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8월 14일, 기동부대는 공세를 시작했던 지점과 거의 동일한 위치로 물러났다.[39]
킨 기동부대의 공세는 북한군 주력을 북쪽에서 분산시키고 진주 고개를 확보하려던 초기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작전은 미 제25보병사단 장병들의 사기를 크게 높이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들은 이후 전투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37][40] 한편, 인민군 제6사단은 이 전투로 병력이 3,000명에서 4,000명 수준으로 감소했으며, 안동에서 강제 징집한 남한 청년들로 병력을 보충해야 했다.[41] 마산 일대에서의 전투는 이후로도 계속되었다.[54]
3. 3. 유엔군의 방어선 재편
워커는 킨 장군 휘하의 미 제25보병사단에게 마산 서쪽, 즉 부산 교두보 남쪽 측면에 방어 진지를 구축하라고 명령했다. 8월 15일까지 제25보병사단은 이 위치로 이동을 완료했다.[42] 마산 서쪽의 험준한 지형 때문에 방어 진지를 선택하는 데 제약이 많았다. 이 지역의 산악 지대는 진주 고개 동쪽에서 방어가 가능한 첫 번째 지점이었다. 약 609.60m 높이의 소백산 산등성이가 이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마산 서쪽의 유일한 남북 교통로인 고마-니-함안-진동-니 도로를 보호하는 요충지였다.[43]고마-니 북서쪽에는 남강을 따라 약 274.32m 높이의 시비당산이 지배하는 필봉의 험준한 산줄기가 있었다. 시비당산은 주변 지역을 관측하기에 매우 유리한 지점이었고, 고마-니 지역에 배치된 미군 포병은 이곳에서 중암-니의 도로 교차점을 효과적으로 차단할 수 있었다.[44] 미 제35보병연대는 제25보병사단 방어선의 북쪽 부분인 시비당-고마-니 지역에 진지를 구축했다. 제35연대의 방어선은 고마-니에서 서쪽으로 약 3.22km 떨어진 지점에서 시작하여 남강을 따라 동쪽으로 낙동강과 합류하는 지점까지 이어졌다.[42] 이는 약 약 23774.40m에 달하는 매우 긴 연대 방어선으로, 통상적인 연대 담당 구역의 두 배에 달하는 길이였다.[44]
제35보병연대 제1대대는 고마-니 서쪽에서 연대의 좌익을 담당했고, 제2대대는 남강을 따라 우익을 맡았다. 제3대대는 제29보병연대 제1대대에서 차출되어 재배치되었으며, 칠원 남쪽 도로에서 예비대로 대기하며 방어선의 어느 지점이든 신속하게 지원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44] 남쪽으로는 미 제24보병연대가 위치했고, 진동-니 서쪽에는 제5연대 전투단이 사단의 좌익을 담당했다. 사단 명령에 따라 제5연대 전투단은 처음에는 진동-니 해안 도로 위의 야반산까지만 점령했다.[42] 그러나 킨 장군은 곧 제5연대 전투단이 북쪽으로 이동하여 제24보병연대와의 사이의 빈틈을 메워야 한다고 판단했다. 제5연대 전투단이 미군 장교의 지휘 아래 100명의 한국군 부대를 소백산의 더 높은 경사면으로 보냈을 때, 이미 그곳을 점령하고 있던 북한군이 이들을 격퇴했다. 킨 장군은 제5연대 전투단에게 이 지역을 점령하라고 다시 명령했지만, 때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44]
3. 4. 북한군의 증원과 공세 재개
한편, 조선인민군 제6사단은 공격을 재개하기 전에 증원을 기다리라는 명령을 받았다.[45] 당시 사단은 북쪽부터 남쪽으로 제13, 15, 14 연대를 배치하고 있었다. 첫 증원 병력은 8월 12일경 진주에 도착했는데, 이들은 서울 지역에서 징집된 약 2,000명의 비무장 남한 청년들이었다. 제6사단은 이들에게 수류탄만 지급하고, 전장에서 죽거나 다친 병사의 무기를 빼앗아 쓰라고 지시했다. 8월 15일까지 이들이 합류했고, 8월 21일에는 서울 지역에서 징집된 2,500명이 추가로 합류하여 사단 병력은 약 8,500명으로 늘어났다. 8월 마지막 주와 9월 첫째 주에는 대한민국 남서부에서 징집된 3,000명의 신병이 추가로 합류했다. 제6사단은 이 마지막 신병들을 처음에는 노동력으로 동원하다가 나중에 전투 병력으로 투입했다.[44] 이렇게 남한에서 강제로 징집된 병사들은 사기가 매우 낮았으며, 북한군 스스로도 이들이 전선의 약점이 될 수 있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병력 충원 방법이 없었기에, 징집병 부대 뒤에 후방 경계병을 배치하여 탈영하거나 후퇴하려 하면 사살하겠다고 위협하는 방식을 사용했다.[45][44]조선인민군의 남부 전선 병력 증강 계획에 따라, 전투 경험이 부족한 제7사단 역시 10,000명의 병력과 함께 마산 인근으로 이동했다.[42] 제7사단의 초기 임무는 주요 항구를 점령하여 혹시 모를 유엔군의 상륙 작전으로부터 제6사단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제7사단도 다른 조선인민군 부대와 함께 전투에 투입되어, 유엔군 전선을 동시에 공격하여 압도하려는 계획의 일부가 되었다.[44]
8월 17일, 조선인민군은 공세를 재개했다. 조선인민군 1개 대대 병력이 통영을 공격하여 대한민국 경찰을 몰아내고 잠시 점령했다. 하지만 유엔군 해군 함대가 통영에 격렬한 포격을 가했고, 거제도에서 출동한 대한민국 해병대 3개 중대가 통영 인근에 상륙하여 반격을 시작했다. 해병대는 해군의 함포 지원을 받으며 조선인민군을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이 전투에서 조선인민군은 약 350명의 사상자를 내고 남은 병력은 진주로 후퇴했다.[44]
증강된 조선인민군은 미국 제25보병사단의 방어선으로 진격하여 한 달 동안 계속될 일련의 정찰 공격을 시작했다. 때로는 대대 규모의 공격도 감행되었다. 이러한 공격은 주로 함안 서쪽의 높은 산악 지대, 즉 배틀 마운틴(Battle Mountain), 필봉(P'il-bong), 서북산(Sobuk-san) 일대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조선인민군 제6사단은 이 고지들을 점령하여 서쪽 깊은 계곡에 위치한 유엔군의 보급 및 집결 지역을 감시하고 위협하려 했다.[44]
3. 5. 고맘-니 전투

조선인민군(KPA) 제6사단은 공격 방향을 바꾸어, 주력 부대를 남강 바로 아래이자 미군 제35보병연대 담당 구역인 진주-마산 통로 북쪽으로 이동시켰다.[46] 제35보병연대는 조명탄을 이용해 방어선을 지키려 했으나, 조명탄 자체가 부족했고 그마저도 불량률이 높아(약 20%만 정상 작동) 교체도 어려웠다. 설령 조명탄을 사용하더라도 요청 후 실제 투하까지 시간이 걸려, 그 사이에 조선인민군이 침투하는 경우가 많았다.[47]
제64야전포병대대 C포대(제90야전포병대대 배속)와 제88중전차대대 A중대가 제35보병연대를 지원했다. M4A3 셔먼 전차 3대는 고암리(Komam-ni)에서 포병처럼 중암리 방향으로 차단 사격을 실시했고, 다른 M26 퍼싱 전차 6대 역시 남강 건너편의 의령을 향해 비슷한 방식으로 차단 사격을 가했다.[47]
8월 17일 새벽, 조선인민군의 공격이 제35보병연대를 강타했다.[46] 오전 3시부터 조선인민군의 포격이 고암리에 있는 제1대대 지휘소에 집중되었고, 한 시간 뒤에는 조선인민군 보병이 A중대를 공격하여 2개 소대의 진지를 빼앗고 박격포 진지까지 점령했다. 하지만 날이 밝은 후 B중대가 반격하여 빼앗긴 진지를 되찾았다. 이는 고암리 서쪽으로 약 3.22km(약 3.2km) 떨어진 시비당 남쪽 산기슭에서 제1대대가 5일간 벌인 치열한 전투의 시작이었다. 조선인민군은 제35연대의 왼쪽 측면을 돌파하여 제25사단의 방어선을 무너뜨리려 했다. 8월 18일 아침, A중대는 다시 조선인민군의 공격으로 진지를 내주었지만, 곧바로 반격하여 되찾았다. 대한민국 경찰 2개 중대가 대대의 오른쪽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도착했다. 계속되는 조선인민군의 공격에 맞서, 제1대대를 지원하는 포병은 8월 19일과 20일 밤 동안 시간당 평균 200발의 포탄을 쏘며 지원했다.[47]
3일 밤낮의 격전 끝에, 제35보병연대 C중대와 제29보병연대 A중대는 8월 20일 아침 고암리 도로를 따라 이동하여 시비당의 A, B중대를 지원했다. 이때 조선인민군 대규모 병력이 다시 공격을 준비하며 진격해왔다. 미군은 이들에게 집중 포격을 가하고 공습을 요청했다. 관측 결과, 이 포격과 공습으로 약 350명의 조선인민군 병력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었는데, 이는 공격 부대 병력의 절반에 달하는 숫자였다.[47]
하지만 조선인민군은 포기하지 않고 같은 지점을 다시 공격했다. 8월 22일 아침, 조선인민군 보병은 제1대대에 대해 매우 격렬한 공격을 시작했다. 포병이나 박격포의 사전 지원 사격 없이, 병력이 직접 방어선의 철조망을 끊고 소화기와 수류탄을 이용한 근접전을 벌였다. 이 공격으로 미군 3개 중대가 교전에 휘말렸고, 그중 한 중대는 진지에서 밀려나기도 했다. 그러나 3시간의 전투 끝에 A중대가 오전 7시에 반격을 개시하여 잃었던 진지를 모두 되찾았다. 다음 날인 8월 23일, 이 지역에서 공격이 계속 좌절된 조선인민군은 결국 제35보병연대 구역에서 철수했다.[47]
3. 6. 배틀 마운틴 전투
제24보병사단이 방어선을 구축한 하만 서쪽의 이 고지대는 소백산 산맥의 일부였다.[48] 소백산은 진동리 북서쪽 약 12.87km 지점과 하만 남서쪽 약 4.83km 지점에 있는 필봉(743고지라고도 함)에서 약 731.52m 높이에 이른다.[42] 필봉에서 능선의 봉우리는 북서쪽으로 약 1.61km 떨어진 곳에 다시 솟아올라 배틀 마운틴으로 알려진 665고지에 이른다.[48] 미군은 이 고지를 때때로 "네이팜 힐", "올드 발디", 또는 "블러디 너브"라고 부르기도 했다.[42] 필봉과 배틀 마운틴 사이의 능선은 병사들이 "록키 크래그스"라고 부르는 바위 벼랑으로 좁아진다. 배틀 마운틴에서 남강 쪽으로 북쪽으로 가면 땅이 두 개의 긴 산줄기로 급격하게 떨어진다. 그곳에서 싸운 사람들은 동쪽 산줄기를 그린 피크라고 불렀다.[48]
배틀 마운틴과 필봉의 서쪽, 즉 북한군이 점령한 기지에는 정상에서 약 2.01km 떨어진 옥곡과 둔덕 마을이 있었다. 남북으로 이어진 산길은 이 마을 바로 북쪽의 높은 고개를 지나 배틀 마운틴 정상까지 서쪽 사면의 중간 지점까지 이어졌다. 이 도로는 북한군이 이 지역의 공격을 감행하고 보급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다. 옥곡과 둔덕에서 배틀 마운틴과 필봉의 정상까지 이어지는 길도 있었다.[48] 배틀 마운틴 꼭대기에서 관측병은 북한군이 점령한 계곡을 직접 내려다볼 수 있었다. 동시에 배틀 마운틴에서 북한군은 동쪽 하만 계곡을 내려다보며 미 제24보병사단의 지휘소, 보급로, 포병 진지, 접근로를 관찰할 수 있었다.[42] 배틀 마운틴의 정상을 점령한 측은 상대방의 후방 지역을 볼 수 있었기에, 양측은 이곳의 전략적 중요성을 깨닫고 6주간의 전투에서 끈질기게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싸웠다.[48]

제24보병사단의 산악 방어선에 대한 첫 번째 공격은 8월 18일 아침에 시작되었는데, 북한군이 배틀 마운틴 북쪽 산줄기에 있는 E 중대 진지 여러 곳을 점령하고 중대장을 살해했다.[94] 그날, 미국 육군 중령 폴 F. 로버츠는 조지 R. 콜 중령을 대신하여 제24보병사단 제2대대 지휘관이 되었다.[49] 다음 날인 8월 19일, 북한군은 배틀 마운틴의 C 중대를 공격하여 격파했다.[94] 장교들은 40명밖에 수습하지 못해 다시 제자리에 배치했다. 필봉에 있던 많은 한국 경찰들도 전투에서 도망쳤고, 56명만이 방어 진지에 남아 있었다. 미군 장교들은 협박과 물리력을 동원하여 다른 사람들을 다시 제자리에 복귀시켰다. 그날 저녁, 제24보병사단 방어선에는 필봉 북쪽 약 1.61km 지점에 틈이 생겼고, 북한군의 미확인 병력이 그곳으로 이동하고 있었다.[49]
8월 20일, 북한군 제6사단은 배틀 마운틴을 공격하려는 노력을 강화하여 두 봉우리를 점령하기 위해 더욱 강력한 공격을 시작했다.[50] 이에 C 중대는 중대장과 약 25명을 제외한 전원이 배틀 마운틴의 진지를 버리고 도망쳤다. 도망친 병사들은 산 아래에 도착하자 중대장이 사망하고 진지가 포위되어 북한군에게 함락되었다는 잘못된 보고를 했다. 이 잘못된 정보에 따라 미군 포병과 박격포는 C 중대가 전에 점령했던 진지에 집중 포격을 가했고, 전투 폭격기는 38번의 출격으로 배틀 마운틴 정상에 네이팜탄, 파편탄, 로켓 및 기관총을 사용하여 공격했다. 이로 인해 중대장과 남은 25명의 병사는 북한군의 항복 요구를 거부한 채 20시간 동안 배틀 마운틴을 사수하다가 퇴각해야 했다.[51] E 중대 소대도 공격이 시작되자 약 10명을 제외하고 산에서 진지를 떠났다. 연대 좌측에서는 소백산의 K 중대 진지에서 출동한 한국 경찰 순찰대가 북한군 제15연대 지휘관을 생포했지만, 그는 탈출을 시도하다가 몇 분 만에 사살되었다. 순찰대는 그의 시신에서 몇 개의 정보 문서를 수거했다. 배틀 마운틴과 필봉에서 벌어진 이 날의 전투에서 북한군은 소백산의 제24보병사단 좌측 측면에 있던 한국 경찰을 몰아냈다.[51] 제24보병사단 병사들은 제자리에 남아 있으라는 장교들의 명령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진지에서 이탈했다. 흑인 및 백인 장교 모두 이탈자들의 불복종에 격분하여 이들을 고발하는 진술서를 작성했다. 상황이 너무 심각해져서 자리를 지킨 병사들은 전투에서 수적으로 크게 열세였기 때문에 종종 무공 훈장과 무공 십자장을 받았다.[52]
8월 한 달 동안 배틀 마운틴은 너무나 자주 주인이 바뀌어서 정확한 횟수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제24보병사단 제1대대 정보 장교는 봉우리가 19번이나 주인이 바뀌었다고 추정했다.[53] 8월 18일부터 말일까지 북한군은 매일 밤 산을 공격했다. 봉우리는 종종 24시간 동안 두세 번 주인이 바뀌기도 했다.[54] 일반적인 패턴은 북한군이 밤에 점령하고 다음 날 미 제24보병사단이 탈환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형태의 격렬한 전투로 인해 포병 전방 관측 장교와 그들의 장비에 상당한 피해가 발생했다. 8월 15일부터 31일까지 제159야전포병대대의 관측 및 연락반 소속 전방 관측 장교 7명과 다른 8명이 사상했고, 이 과정에서 무전기 8대, 전화 11대, 차량 2대를 잃었다.[53]
제24보병사단은 항상 같은 방식으로 배틀 마운틴을 점령했다. 포병, 박격포, 전차의 포격이 정상을 휩쓸고 네이팜탄을 사용한 공습이 봉우리 상단을 뒤덮었다. 그런 다음 보병은 정상 동쪽 사면 아래 언덕에서 공격했다. 지원 박격포는 화력 기지를 구축하고 보병이 정상 바로 앞까지 도착할 때까지 고지를 융단 폭격했다.[54] 그런 다음 박격포 사격이 중단되고 보병은 마지막 구간을 빠르게 올라갔고, 일반적으로 북한군이 버리고 간 진지를 발견했다.[55]
3. 7. 하만 전투

미 육군 제25사단 전선 중앙 좌측에서는 제24보병연대 제2대대(대대장 폴 F. 로버츠 중령)가 하만 서쪽 두 번째 능선 정상을 점령하고 있었는데, 이는 하만에서 약 약 1.61km 떨어진 거리였다. 북한군이 점령한 충암리에서 하만까지는 낮은 언덕 능선을 따라 논을 가로지르는 2차선 도로가 있었으며, 이 도로는 주요 진주-마산 도로에서 동쪽으로 약 약 1.61km 남쪽에 위치했다. 이 도로는 하만 서쪽 약 1.61km 지점에 있는 로버츠 중령의 제2대대 진지를 통과했다.[61] 8월 31일 늦은 오후, 제24보병연대 G 중대 소속 관측병들은 자신들의 진지 앞에서 북한군의 움직임을 포착했다. 해 질 녘, 이들은 해당 지역에 두 차례의 공습을 요청했다. 미군 포병도 이 지역에 대규모 포격을 가했지만, 그 효과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전선에 있던 모든 미군 부대는 북한군의 공격 가능성에 대비하고 있었다.[62]
그날 밤, 북한군은 낙동강 공세의 일환으로 유엔군 전선 전체에 걸쳐 대대적인 공세를 시작했다. 북한군 제6사단이 먼저 움직여 충암리-하만 도로 고개 북쪽에서 F 중대를 공격했다. 고개에 있던 한국군 병력은 진지를 포기하고 남쪽의 G 중대 쪽으로 후퇴했다.[62] 북한군은 고개에서 75mm 무반동총을 노획하여 미군 전차를 공격했고, 2대의 전차를 파괴했다. 또한 고개 동쪽 끝에 있던 82mm 박격포 진지도 제압했다.[63] 고개 남쪽에서는 새벽이 되자 제1중위 휴스턴 M. 맥머레이가 자신의 소대에 배속된 69명 중 미군과 한국군을 합쳐 15명만이 남아 있음을 확인했다. 북한군은 새벽에 이 진지를 공격했다. 이들은 M1918 브라우닝 자동 소총 사수가 방어하기로 되어 있던 철조망 틈을 통해 침투했는데, 해당 사수는 이미 도주한 상태였다. 북한군은 수류탄을 던지고 PPSh-41 기관단총을 난사하며 순식간에 진지를 점령했다.[62] 수많은 미군 장교와 부사관들이 병사들을 다시 전투 대열로 복귀시키려 했지만, 병사들은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한 예로, 한국군 병사들은 도주를 막으려던 자신들의 중대장을 살해하기도 했다.[63]

북한군의 공격이 시작되자마자 제24보병연대 제2대대의 대부분은 진지를 버리고 후퇴했다.[67] 한 번에 한 개 중대씩, 대대는 전 전선에 걸쳐 강력한 공격을 받았고, 각 중대에서 수십 명을 제외한 대부분의 병력이 빠르게 무너져 내렸으며, 장교들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하만 쪽으로 후퇴했다.[64] 북한군은 급속도로 무너지는 미군 전선을 돌파하여 제2대대 지휘소를 점령하고 일부 병력을 사살했으며, 대대의 장비 상당수를 파괴했다.[65] 제2대대가 붕괴되면서 하만은 직접적인 공격에 노출되었다. 북한군이 하만을 포위하자, 제2대대장 로버츠 중령은 한 장교에게 남은 병력을 이끌고 마을 남쪽 외곽의 도로를 차단하라고 명령했다. 그 장교가 많은 병사들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지시했지만, 단 8명만이 명령에 응했다.[66] 제2대대는 더 이상 효과적인 전투 부대로서 기능하지 못했다.[67] 소수의 병사들이 남아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대부분은 공격을 피해 달아났고, 북한군은 산발적인 저항을 우회하며 이동할 수 있었다. 제2대대가 혼란 속에 무너지면서 북한군은 하만을 포위했다.[68]
북한군의 공격으로 제2대대가 돌파당하자, 제1대대장은 하만에서 남쪽으로 약 약 4.83km 떨어진 진동리 도로에 있던 자신의 부대에게 반격을 가해 전선을 복구하라고 명령했다.[69] 로버츠 중령은 혼란에 빠진 제2대대 병력 중 40명을 수습하여 이 반격에 합류시켰고, 반격은 07시 30분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북한군과 교전하자 제1대대마저 무너져 후방으로 후퇴했다.[67] 결국 해가 뜬 직후, 제24보병연대 제1대대와 제2대대의 흩어진 병력은 하만 동쪽으로 약 약 3.22km 떨어진 고지대로 후퇴했다.[70] 북한군 제6사단의 상당 병력이 하만의 방어선 틈으로 밀려 들어와 도시를 점령했다.[67]
9월 1일 14시 45분, 미 제25사단장 킨 소장은 제24보병연대의 진지를 복구하기 위해 즉각적인 반격을 명령했다.[71] 미국 공군 항공기들이 30분 동안 하만 주변의 북한군 진지를 폭탄, 네이팜탄, 로켓, 기관총 사격으로 공격했다. 또한 마을 주변의 북한군 점령 능선도 공격 대상이 되었다. 이후 15분간 집중적인 포병 사격이 이어졌고, 하만 시내에는 화재가 발생했다. 제3대대 보병들은 제79전차대대 A 중대 소속 전차 1개 소대의 지원을 받으며 16시 30분에 서쪽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보병을 태운 전차 8대가 하만으로 진격했으며, 대부분의 북한군이 이미 퇴각한 상태였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도시를 점령했다. 그러나 북한군은 마을 서쪽 능선에서 강력하게 저항했고, 이들의 기관총 사격은 모든 접근로를 제압하며 미군 전차 1대를 파괴하고 공격하는 보병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대는 공격을 계속하여 18시 25분까지 하만 서쪽 약 457.20m 지점의 첫 번째 긴 능선을 점령했다. 20시까지는 하만 서쪽 약 1.61km 지점에 있는 과거 전투 진지의 절반이 위치한 더 높은 능선까지 확보했다. 나머지 능선 정상에서 약 약 182.88m 떨어진 지점에서 보병들은 밤을 보내기 위해 참호를 팠다. 이들은 하만을 탈환하고 제24연대의 옛 진지까지 다시 밀고 나아갔다.[72]
북한군은 이후 일주일 동안 매일 하만을 공격했다. 9월 7일, 북한군의 침투 시도를 격퇴한 후 하만에 대한 공격은 잦아들었다. 물자와 인력 부족에 시달리던 북한군은 배틀 마운틴의 제24보병연대 진지와 남강의 제35보병연대 진지에 대한 공격에 더 집중했다. 하만의 제24보병연대 병력은 9월 18일까지 주로 정찰 목적의 공격만 받았다.[73]
3. 8. 남강 전투
한편, 조선인민군 제7사단 병력은 미 제35보병 연대의 방어선을 공격하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64] 8월 31일 23시 30분, 남강 건너편에서 온 조선인민군 SU-76 자주포가 강을 내려다보는 제35보병 연대 G 중대 진지에 포탄을 발사했다.[75] 몇 분 만에 조선인민군 포병은 남지리 다리 서쪽에서 연대의 모든 최전선 소총 중대를 공격했다.[59][71] 이 포격의 엄호 아래 조선인민군 제7사단의 증강된 연대가 남강을 건너 제35보병 연대 F중대와 G중대를 공격했다.[74] 다른 조선인민군 병사들은 고맘니 북쪽의 논밭과 남강에서 시비당산 및 진주-마산 고속도로까지 뻗어 있는 언덕선을 방어하는 존 L. 윌킨스 주니어 중령이 지휘하는 제2대대와 버나드 G. 티터 중령이 지휘하는 제1대대의 경계선 근처 수중 다리를 통해 남강을 건넜다.[75] 장비와 증원 부족에 직면한 제35보병 연대는 장비가 부족했지만 공격에 대비했다.[76]
이 두 대대 사이의 낮은 지대인 강 나루터 건너편 부지에 제35보병 연대 사령관은 300명의 대한민국 경찰을 배치하여, 조선인민군이 공격해 올 경우 나머지 병력에게 경고할 시간을 벌도록 했다.[61] 측면 언덕의 포가 낮은 지대를 사격으로 엄호할 수 있었다. 고맘니 후방에는 조선인민군이 침투할 경우 반격을 가할 수 있도록 제3대대를 대기시켰다.[75] 그러나 예상치 못하게도 나루터 근처의 대한민국 경찰 중대는 조선인민군의 첫 번째 포격에 흩어지고 말았다.[71] 00시 30분, 조선인민군 병사들이 이 방어선의 구멍을 통해 쏟아져 들어왔다. 일부는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G 중대의 측면과 후방을 점령했고, 다른 병력은 고맘니 도로 서쪽 땅에 있는 C 중대를 공격하기 위해 오른쪽으로 향했다.[61] I&R 소대와 C중대 및 D중대의 병력이 고맘니 북쪽 둑을 따라 방어선을 형성했고, 미국 육군 전차들이 날이 밝자 합류했다. 그러나 피셔 대령이 예상했던 것과 달리, 조선인민군은 강 남쪽 약 6.44km 지점의 고맘니 도로 분기점을 향해 진격하지 않고, 대신 제2대대 뒤의 언덕으로 동쪽으로 향했다.[75]
9월 1일 날이 밝자, C 중대 본부 병력의 전차를 앞세운 구원 부대가 시비당산으로 가는 길을 확보했다. 이들은 B 중대 제2소대에 탄약을 보급하여 또 다른 조선인민군 공격을 격퇴하고 77명을 사살하고 21명을 포로로 잡는 성과를 거두었다.[77] 피셔의 제35보병 연대는 G 중대의 전진 소대를 제외하고 원래의 모든 진지를 유지했지만, 약 3,000명의 조선인민군 병력이 그들의 후방 지역으로 침투한 상황이었다.[61][71] 가장 동쪽으로 침투한 부대는 치원 남쪽의 고지대에 도달하여 그곳의 남북 도로를 내려다보았다.[77]

오후가 되자 미 제25보병사단장 윌리엄 B. 킨 소장은 상황이 매우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제27보병 연대 제2대대에 제35보병 연대 후방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사단의 많은 포병 부대도 조선인민군 보병의 직접적인 공격을 받고 있었다.[78] 9월 1일 오전, 조선인민군 제7사단 병력이 공격했을 때, 그들이 처음 마주친 미군 부대는 방어선 틈의 북쪽 어깨에 있던 제35보병 연대 G 중대였다.[61] 일부 조선인민군 부대가 G 중대를 공격하는 동안, 다른 병력은 계속 나아가 그로부터 약 3.22km 떨어진 E 중대와 교전했고, 또 다른 병력은 남지리 다리를 지키는 제1소대까지 F 중대의 흩어진 부대를 공격했다. 미 제25사단의 극우 측면에 위치한 이 소대는 치열한 전투 끝에 조선인민군 부대를 몰아냈다. 9월 2일까지 E 중대는 격렬한 전투를 벌여 조선인민군 1개 대대 대부분을 격파했다.[78]
그 후 일주일 동안 제35보병 연대의 방어선 뒤에서는 격렬하고 혼란스러운 전투가 계속되었다.[79] 고립된 대대, 중대, 소대는 상급 부대의 통제나 도움 없이 독립적으로 싸웠으며, 많은 부대가 공중 투하를 통해 보급품을 받았다. 공중 투하는 최전선 부대에 도달하려는 구원 부대에도 보급품을 제공했다. 전차와 장갑차는 식량과 탄약을 싣고 고립된 부대로 이동했고, 돌아오는 길에는 심각한 부상자를 후송했다. 대체로 제35보병 연대는 원래의 전투 진지를 유지하면서 싸웠고, 처음에는 1개 대대, 나중에는 2개 대대가 후방 지역에서 작전을 펼치는 것으로 추정되는 3,000명의 조선인민군을 상대로 싸워나갔다.[80]
9월 5일 이후 미 제25사단에 대한 압박은 전반적으로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심각한 국지전은 계속되었다. 9월 8일과 9일에는 폭우로 남강과 낙동강의 수위가 상승하여 조선인민군의 새로운 도하 위험이 감소했다. 그러나 제35보병 연대 제2대대에 대한 조선인민군의 공격은 매일 밤 발생했다. 연대가 보호해야 할 주요 목표 중 하나인 남지리 다리로 가는 길에는 지뢰가 매설되었다. 한때 그 지역에는 약 100명의 조선인민군 전사자가 있었다.[81] 9월 9일부터 16일까지 제35보병 연대 전선에 제한적인 공격이 있었지만, 조선인민군의 기세는 대부분 꺾였고 더 이상 연대에 대한 강력한 공격을 감행할 수 없었다.[82]
3. 9. 9월 공세와 북한군의 후퇴
유엔군의 인천 상륙 작전 반격으로 조선인민군의 전선이 붕괴되었고, 모든 전선에서 후퇴를 강요받았다. 9월 16일, 미 제8군은 부산 교두보 전투로부터의 돌파를 시작했지만, 제25보병사단은 여전히 후방에서 조선인민군과 교전 중이었으며, 배틀 마운틴, 필봉산, 서북산 고지에는 조선인민군의 거점이 존재했다.[84] 킨 준장은 사단의 전선 중앙의 산악 지대가 정리되어야만 사단이 진주 방향으로 도로를 따라 진격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그는 제25사단의 진격의 열쇠는 조선인민군이 고지를 점령하고 제24보병연대를 매일 공격하는 사단 중앙에 있다고 믿었다.[79] 진주와 마산 사이의 도로를 따라 좌측의 제27보병연대와 우측의 제35보병연대는 그들의 위치를 고수하고 있었으며, 제24보병연대 전선의 상황이 개선될 때까지 진격할 수 없었다.[85]
9월 19일, 유엔군은 조선인민군이 밤 사이에 배틀 마운틴을 포기했다는 것을 발견하고, 제24보병연대 제1대대가 진격하여 점령했다. 우측에서는 제35보병연대가 전진하기 시작했다.[86] 중암리 전방의 고지에 도달할 때까지 저항은 미미했다. 그러나 스파이더 홀(참호의 일종)에 숨어 있던 조선인민군 병사들이 제1대대 병사들을 후방에서 사격했다. 다음 날, 제1대대는 중암리를 점령했고, 제2대대는 중암리에서 남강까지 북서쪽으로 뻗어 있는 긴 능선을 점령했다. 한편, 조선인민군은 제27보병연대가 전진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사단 좌측에 여전히 강력하게 저항했다.[87]
조선인민군은 9월 18일에서 19일 밤 사이에 마산 지역에서 철수했다. 조선인민군 제7사단은 남강 남쪽에서 철수했고, 제6사단은 전선을 방어하기 위해 병력을 이동시켰다. 제6사단의 엄호 아래, 제7사단은 9월 19일 아침까지 남강 북쪽으로 건너갔다. 그 후, 조선인민군 제6사단은 서북산의 진지에서 철수했다.[87] 미군은 그들을 북쪽으로 빠르게 추격하며, 더 이상 전략적 중요성이 없어진 배틀 마운틴 지역을 통과했다.[88]
4. 결과
마산의 민간인들은 유엔군에게 예상치 못한 문제를 안겨주었다. 전투가 치열해지면서 도시 내에 많은 공산주의 동조자와 첩자가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대한언론인협회 마산 지부장이었던 한금조는 자신이 마산 남로당 책임자이며, 부산 본부를 통해 조선인민군에게 정보를 제공했다고 자백했다. 또한 마산 교도소장 역시 부하 7명과 함께 공산당 조직을 운영하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이러한 방첩 정보들은 최전선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는 와중에 드러났다. 미 제25사단장 윌리엄 B. 킨은 상황이 매우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경찰, 공무원, 필수 노동자 및 그 가족을 제외한 모든 민간인에게 마산에서 대피할 것을 명령했다. 9월 10일과 11일 이틀 동안, 제25사단은 상륙함 (LST)을 동원하여 12,000명이 넘는 민간인을 마산에서 성공적으로 대피시켰다.[83]
4. 1. 전후 상황과 평가
마산 주변 지역은 부산 교두보 전투의 6주 동안 격렬한 교착 상태에 놓여 있었다. 양측은 상대방을 밀어내기 위해 여러 차례 공세를 펼쳤지만, 조선인민군은 유엔군의 방어선을 뚫지 못했고, 유엔군 역시 조선인민군을 압도하여 후퇴시키지 못했다.[88] 이 전투는 양측 모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는 점에서 전술적으로는 승패가 명확하지 않았지만, 유엔군은 조선인민군이 더 동쪽으로 진격하여 부산을 위협하는 것을 막는다는 전략적 목표를 달성했다. 이를 통해 유엔군은 인천 상륙 작전이 이루어질 때까지 반복되는 공격을 막아내며 방어선을 유지할 수 있었고, 이후 전투에서 조선인민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87]전투 과정에서 양측 모두 상당한 인명 피해를 입었다.
한편, 미군 제24보병연대는 사실상 인종 차별 부대로 운영되었으며, 탈영 문제가 지속적으로 발생했다. 8월 한 달 동안 제25보병사단이 구금한 24보병연대 소속 탈영병은 116명에 달했는데, 이는 같은 사단 내 제27보병연대(15명)나 제35보병연대(12명)에 비해 월등히 높은 수치였다.[94] 이 연대는 이미 몇 주 전 상주 전투에서의 부진한 성과로 비판을 받은 바 있었다.[95] 8월 말, 사단장 킨은 이 부대의 행동을 조사하기 시작했고, 이 부대의 부진한 성과가 사단의 다른 부대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96] 킨은 이 연대를 '사슬의 약한 고리'로 여기고, 배틀 마운틴 전투와 함안 전투에서 부진한 성과를 거둔 후, 워커에게 이 연대를 해산하고 병력을 현장의 다른 부대에 보충병으로 투입할 것을 제안했다. 연대의 사실상 모든 장교와 사병들이 이 아이디어를 지지했지만, 워커는 연대를 잃을 여유가 없다고 생각하여 거절했다.[97] 반대로, 제35보병연대는 금강 방어선에서의 활약으로 칭찬을 받았다. 이 연대는 북한군을 격퇴하는 데 매우 뛰어난 성과를 거두어 킨은 대통령 부대 표창을 제안했다.[63]
4. 2. 미군의 인종 차별 문제와 카투사
미국 제24보병연대는 사실상 인종 차별 부대로 운영되었으며, 이로 인해 탈영 문제가 지속적으로 발생했다. 통계에 따르면, 8월 한 달 동안 제25보병사단 내에서 제24보병연대의 탈영병은 116명이나 구금되었는데, 이는 같은 사단 내 제27보병연대의 15명, 제35보병연대의 12명과 비교했을 때 매우 높은 수치였다.[94] 이 연대는 이미 몇 주 전 상주 전투에서도 부진한 성과로 비판을 받은 바 있었다.[95] 8월 말, 사단장 킨은 제24보병연대의 문제를 조사하기 시작했고, 이 연대의 부진이 사단 내 다른 부대에까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판단했다.[96] 킨은 제24보병연대를 '사슬의 약한 고리'로 여겼으며, 배틀 마운틴 전투와 함안 전투에서의 부진한 성과 이후, 워커 미8군 사령관에게 연대를 해체하고 그 병력을 다른 부대에 보충할 것을 제안했다. 연대의 거의 모든 장교와 사병들이 이 제안을 지지했지만, 워커는 병력 부족을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97]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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