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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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구 전투는 1950년 8월, 6.25 전쟁 중 낙동강 방어선 전투의 일환으로 대구와 그 주변에서 벌어진 일련의 전투를 의미한다. 조선인민군은 대구를 점령하기 위해 5개 사단을 투입하여 낙동강을 도하하려 했으나, 유엔군의 방어와 공습에 의해 저지당했다. 대구의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으며, 낙동강을 건너려는 조선인민군 부대가 303고지 학살 사건과 융단 폭격과 같은 사건을 겪었다. 이 전투에서 조선인민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대구 공격에 실패했으며, 유엔군은 대구를 사수하여 낙동강 방어선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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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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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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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 명칭 | 대구 전투 |
위치 | 대한민국 경상북도 대구시 외곽 (현재의 대구광역시) |
날짜 | 1950년 8월 5일 ~ 8월 20일 |
일부 | 낙동강 방어선 전투 |
결과 | 유엔군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유엔 |
참가국 1 | 미국 대한민국 |
교전국 2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지휘관 | |
유엔군 지휘관 | 더글러스 맥아더 월턴 워커 |
북한군 지휘관 | 최용건 김책 |
병력 규모 | |
유엔군 병력 | 4개 사단 |
북한군 병력 | 5개 사단 |
피해 규모 | |
유엔군 사상자 | 사망 200명, 부상 400명 |
북한군 사상자 | 3,700명 이상 사망 및 부상 |
2. 배경
2. 1. 전쟁 발발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한 침공으로 6.25 전쟁이 발발했다.[48]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대한민국을 지원하기 위해 군대 파견을 의결하였고,[48] 상임이사국인 미국은 일본의 군정기 당시 일본과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던 미 해군과 미 공군(USAF) 병력을 즉시 한국 남동부에 배치했다.[48]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뉴질랜드, 영국 등도 유엔의 결의에 따라 해군 함정을 파견했다.[48]
미군의 초기 목표는 부산 주변에 남은 대한민국 육군을 지원하여 대한민국 정부의 붕괴를 막는 것이었다.[48] 그러나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은 대한민국 시찰 후 미 육군 지상군 투입의 필요성을 인식했다.[48]
당시 일본에 주둔한 제24보병사단은 가장 가까운 미 지상군이었으나, 미 의회의 군사비 절감으로 인해 병력과 장비가 부족한 상태였다.[1] 그럼에도 제24보병사단은 한국으로 파견된 최초의 미군 부대가 되었으며, 미 공군, 미 해군, 미 해병대 항공부대의 지원을 받아 조선인민군의 진격을 늦추고 부산 주변에 방어선을 구축하는 임무를 맡았다.[2] 맥아더 장군은 1950년 이후 서울과 가까운 인천에서 제10군단을 통한 상륙전을 실시할 때까지 미군과 대한민국 육군이 부산 일대를 방어하도록 결정했다.[2]
제24보병사단은 대한민국 육군과 함께 부산 방어선 안에서 증원 및 반격을 기다렸다.[2] 제1기병사단, 제7보병사단, 제25보병사단과 제8군 부대가 부산 방어선 강화에 합류했다.[2] 7월 5일 오산 전투에서 제24보병사단 선발대가 조선인민군과 첫 교전을 벌였으나 패배했다.[3] 이후 제24보병사단은 T-34 전차로 무장한 조선인민군에 밀려 남동쪽으로 후퇴했다.[4][5] 전의 전투, 천안 전투, 평택 전투 등에서 연이어 패배한 제24보병사단은 대전 전투에서 큰 타격을 입었지만, 조선인민군의 진격을 7월 20일까지 지연시켰다.[6] 그 무렵,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에서 새로운 유엔군이 도착하면서 제8군의 전투 병력은 부산 주변을 공격하는 조선인민군과 거의 비슷해졌다.[7]
2. 2. 북한군의 남침과 유엔군의 반격

대전이 함락된 이후, 조선인민군은 부산을 점령하기 위해 북부와 서부에서 포위 기동을 시도했다. 조선인민군 제4사단과 제6사단은 남하하여 측방 공격 전술로 유엔군의 좌측면을 공격하려 했으나, 이 과정에서 병력이 분산되었다. 또한 미 공군과 미 해군의 지속적인 공습에 노출되었다.[8] 초기에는 조선인민군이 수적 우세와 T-34 전차를 앞세워 미군을 압박했지만, 유엔군은 제공권을 장악하고[8] 항공 및 해군 부대의 지원을 받아 부산 교두보를 동중국해까지 확장하며 조선인민군의 공격을 저지했다.
유엔군은 계속 후퇴하다가 부산 방어선 인근에서 벌어진 일련의 전투를 통해 조선인민군의 진격을 멈추는데 성공했다. 7월 27일 하동군에서 제29보병연대 제3대대가 조선인민군의 매복 작전에 의해 전멸당하면서 부산으로 가는 통로가 열렸다.[9][10] 이후 조선인민군이 진주시 서쪽으로 이동하여 미 제19보병연대를 밀어내면서 부산으로 가는 길이 다시 위협받았다.[11] 그러나 미군은 8월 2일 노치 전투에서 조선인민군을 격파하고 밀어냄으로써 상황을 반전시켰다.[12][13] 이 과정에서 큰 피해를 입은 서부 지역의 조선인민군 부대는 재정비와 증원을 위해 며칠간 철수했고, 양측은 부산 방어선 전투를 준비할 시간을 벌게 되었다.
2. 3. 낙동강 방어선 형성
대전이 함락된 이후, 조선인민군은 부산을 포위하기 위해 북부와 서부에서 측면 공격을 시도했다.[55] 측방 공략 전술/Flanking maneuver영어로 진격한 조선인민군 과 은 부산을 남서쪽에서 점령하고자 유엔군의 왼쪽 측면을 공격하려 했으나, 이 과정에서 분산되었다. 이들은 또한 미 공군과 미 해군의 거듭된 공습에 노출되었다.[55] 초기에는 수적 우세와 T-34 전차를 앞세웠지만, 유엔군은 동중국해에서 부산 남쪽 부근으로 가는 도중에 부산을 향한 모든 조선인민군의 공격을 저지할 수 있었다.[55] 부산 방어선에 대한 미국의 제공권은 유엔 지상군이 위치를 유지하는데 중요한 요소였다.[55]유엔군은 계속 후퇴하다가 마침내 부산 방어선 가장자리에서 벌어진 일련의 전투에서 조선인민군의 진격을 멈추게 했다. 7월 27일 하동군에서 제3대대가 조선인민군의 매복 작전으로 전멸되어 부산 지역으로 가는 통로가 열렸다.[56][57] 이후 조선인민군이 진주시 서쪽으로 이동해 미 를 밀어내면서 부산으로 가는 길이 추가로 개방되었다.[58] 8월 2일, 미군은 에서 조선인민군을 격파하고 밀어냈다.[59][60] 서부 지역에서 큰 피해를 입은 조선인민군은 며칠 동안 철수하여 재정비와 증원을 받았다. 이로 인해 양측은 부산 방어선 공격에 대비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59][60]
3. 대구 전투
월턴 워커 중장은 대구에 제8군 사령부를 설치했다.[61] 대구는 부산 방어선 중심에서 조선인민군이 근접 지원을 받으며 대거 진격할 수 있는 지역인 낙동강 계곡 입구에 있었다. 남쪽으로는 낙동강이, 북쪽으로는 산이 많은 지형이 대구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는데, 대구는 부산을 제외하고 유엔군이 확보한 마지막 주요 교통 중심지이자 도시였다.[62] 남쪽에서 북쪽으로 제1기병사단과 대한민국 제2군단 제1보병사단과 제6보병사단이 방어를 하고있었다. 제1기병사단은 왜관읍 남쪽 강변에 제5기병연대와 제8기병연대가 서쪽 면으로 늘어선 채 남쪽으로 낙동강을 따라 24km정도 길게 늘어서있었다. 제7기병연대는 포병과 함께 도하를 시도할 수 있는 지점이라면 어디든 증원할 준비를 하고 동쪽을 향해 진지를 유지했다. 대한민국 제1사단은 시내 바로 북쪽에 있는 산에서 서북향 전선을, 대한민국 제6사단은 동쪽으로 진지를 유지하며 군위군을 끼고 있는 좁은 계곡을 경계했다.[63]
대구에서 조선인민군 5개 사단이 유엔군에 맞서기 위해 모였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제10사단,[64] 제3사단, 제15사단, 제13사단,[65] 제1사단은 특성동에서 왜관읍 부근까지 대구를 에워싸고 왜관읍부터 군위군까지 넓은 영토을 점령했다.[66] 조선인민군은 상주에서 대구까지 이어지는 낙동강 계곡의 자연회랑은 다음 남하를 위한 주요 공격의 주요 축으로 삼을 계획이었으므로 결국 사단은 모두 이 계곡을 통과하여 저지대를 따라 각기 다른 지역에서 낙동강을 건넜다.[67] 제105기갑사단의 부대원들도 공격을 지지했다.[63][68]
3. 1. 대구의 전략적 중요성
월턴 워커 중장은 대구에 제8군 사령부를 설치했다.[61] 대구는 부산 방어선 중심에서 조선인민군이 근접 지원을 받으며 대거 진격할 수 있는 지역인 낙동강 계곡 입구에 있었다. 남쪽으로는 낙동강이, 북쪽으로는 산이 많은 지형이 대구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는데, 대구는 부산을 제외하고 유엔군이 확보한 마지막 주요 교통 중심지이자 도시였다.[62] 남쪽에서 북쪽으로 제1기병사단과 대한민국 제2군단 제1보병사단과 제6보병사단이 방어를 하고있었다. 제1기병사단은 왜관읍 남쪽 강변에 제5기병연대와 제8기병연대가 서쪽 면으로 늘어선 채 남쪽으로 낙동강을 따라 24km정도 길게 늘어서있었다. 제7기병연대는 포병과 함께 도하를 시도할 수 있는 지점이라면 어디든 증원할 준비를 하고 동쪽을 향해 진지를 유지했다. 대한민국 제1사단은 시내 바로 북쪽에 있는 산에서 서북향 전선을, 대한민국 제6사단은 동쪽으로 진지를 유지하며 군위군을 끼고 있는 좁은 계곡을 경계했다.[63]대구에서 조선인민군 5개 사단이 유엔군에 맞서기 위해 모였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제10사단,[64] 제3사단, 제15사단, 제13사단,[65] 제1사단은 특성동에서 왜관읍 부근까지 대구를 에워싸고 왜관읍부터 군위군까지 넓은 영토을 점령했다.[66] 조선인민군은 상주에서 대구까지 이어지는 낙동강 계곡의 자연회랑은 다음 남하를 위한 주요 공격의 주요 축으로 삼을 계획이었으므로 결국 사단은 모두 이 계곡을 통과하여 저지대를 따라 각기 다른 지역에서 낙동강을 건넜다.[67] 제105기갑사단의 부대원들도 공격을 지지했다.[63][68]
3. 2. 북한군의 공세
8월 4일부터 5일까지 밤, 조선인민군 제13사단은 대구에서 북서쪽으로 64km 떨어진 낙동리에 있는 낙동강을 건너기 시작했다.[63] 3일 밤 동안, 사단 3개 연대의 조선인민군 병사들은 무기와 장비를 머리에 이고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넜다.[63][16] 8월 7일까지 모든 사단이 건너가 한국군 1사단의 준비된 방어선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모였다.[63] 대한민국 육군은 제13사단이 도하를 완료하자마자 공격하여 흩어진 조선인민군(KPA) 병력을 산으로 몰아냈다.[21]
동시에, 조선인민군 제1사단은 8월 6일부터 8일까지 함창과 상주 사이에서 바지선을 이용해 강을 건넜다.[16] 두 사단은 8월 17일까지 군위 주변에서 전투를 벌였으며, 조선인민군 사단은 완강한 저항, 맹렬한 공습, 그리고 막대한 사상자를 겪었다.[16] 일주일 안에 조선인민군 제1사단과 제13사단은 대구에서 북쪽으로 약 24km 떨어진 다부동 지역으로 집결하고 있었다.[21]
남쪽으로 이어진 조선인민군 사단 중 다음인 제15사단은 8월 5일 금촌에서 1,500명의 보충병을 받아 병력이 약 6,500명으로 늘어났다.[21] 제45연대는 8월 7일 선산을 통과하여 미군 항공기의 공격을 받으면서 그 도시의 남동쪽에서 강을 건넜다.[21] 다른 두 연대인 제48연대와 제50연대는 8월 8일 새벽 이전에 인동과 왜관 사이에서 낙동강을 건너기 시작했으며, 차량을 위한 수중 다리를 건설했다.[21] 조선인민군 제15사단은 도하 지점에서 강 동쪽에 있는 201고지와 346고지를 점령한 후 동쪽으로 진격하여 다부동까지 11km 떨어진 산으로 향했다.[21] 8월 12일부터 16일까지, 조선인민군 제15사단의 세 연대는 도하 지점에서 동쪽으로 8km, 다부동에서 북서쪽으로 5km 떨어진 유학산 인근 낙동강 동쪽에서 합류했다. 조선인민군 제13사단은 유학산에서 대한민국 제1사단과 신속하게 교전을 시작했다.[22][23]

왜관 남쪽에는 두 개의 조선인민군 사단이 북쪽의 사단들과 협동 공격을 위해 도하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22] 경험이 풍부한 조선인민군 제3사단은 성주 인근에 집중되었고, 훈련받지 않은 조선인민군 제10사단은 고령군 지역에 집중되어 공격을 위해 동원되었다.[24] 조선인민군 제3사단의 제7연대는 8월 9일 오전 3시경 왜관 다리에서 남쪽으로 3km 떨어진 노천 근처에서 낙동강을 건너기 시작했다.[22] 이 도하를 발견한 후, 제5기병연대 부대는 자동 화기 사격을 가하고 도하 지점에 사전 등록된 포격을 요청했다.[24] 약 30분 후, 제8연대와 제9연대가 남쪽으로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22] 소수의 조선인민군 병력만이 동쪽으로 도달했다. 거기서 그들은 유엔군에게 포로로 잡히거나 다음 날 밤까지 숨어 있다가 강을 건너 후퇴했다.[22]
3. 3. 주요 전투
8월 4일부터 5일까지 밤, 조선인민군 제13사단은 대구에서 북서쪽으로 64km 떨어진 낙동리에 있는 낙동강을 건너기 시작했다.[63] 8월 5일 대한민국 포병대의 박격포 사격이 있을 때까지 이 도하는 발견되지 않았다. 사흘 밤 동안, 사단 3개 연대의 조선인민군 병사들은 무기와 장비를 머리에 이고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넜다. 8월 7일까지 모든 사단이 건너 한국군 1사단의 준비된 방어선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모였다.[63]대한민국 육군은 제13사단이 도하를 완료하자마자 공격하여 흩어진 조선인민군 병력을 산으로 몰아냈다. 사단은 동쪽으로 재집결하여 야간 기습을 감행하여 대한민국 방어선을 돌파하고, 대구로 향하는 주요 도로인 낙동강 동쪽 32km 지점까지 진격하기 시작했다. 일주일 안에 조선인민군 제1사단과 제13사단은 대구에서 북쪽으로 약 24km 떨어진 다부동 지역으로 집결하고 있었다.[21]
8월 12일부터 16일까지, 조선인민군 제15사단의 3개 연대는 다부동 북서쪽 5km 지점의 유학산 인근 낙동강 동쪽에서 합류했다. 조선인민군 제13사단은 유학산에서 대한민국 국군 제1사단과 교전을 시작했다.[22][23]
조선인민군 제13사단과 제15사단은 유학산 일대에서 대한민국 국군 제1사단과 격전을 벌였다. 대한민국 국군은 미군의 지원을 받아 북한군을 격퇴하였다.
8월 4일부터 5일까지 밤, 조선인민군 제13사단은 대구에서 북서쪽으로 64km 떨어진 낙동리에 있는 낙동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이 도하는 8월 5일 대한민국 포병대의 박격포 사격이 있을 때까지 발견되지 않았다.[63] 사흘 밤 동안, 3개 연대의 조선인민군 병사들은 무기와 장비를 머리에 이고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넜다. 8월 7일까지 모든 사단이 건너가 한국군 1사단의 준비된 방어선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모였다.[63]
8월 9일 새벽, 호바트 R. 게이 소장은 대구에 있는 사령부에서 왜관 남쪽 지역에서 조선인민군이 낙동강을 건넜다는 소식을 들었다. 게이 장군은 약 750명의 조선인민군 보병 부대가 왜관 동남쪽 4.8km 지점, "삼각산"으로도 알려진 268고지에 집결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25] 게이 장군은 적의 집결지를 공격하여 강을 건너도록 강요하라고 사단에 명령했다. 삼각산은 주요 한국 남북 고속도로와 서울-부산 간선 철도가 산기슭을 따라 지나가기 때문에 보급선과의 근접성 때문에 중요했다.[26]
오전 9시 30분경, 게이 장군은 제7기병대 제1대대에 조선인민군의 침투에 대응하라고 명령했다. 이 대대는 A 중대, 제71중전차대대 소속 전차 5대의 호위를 받았다. 그 동안 제61야전포병대대는 고지에 집중 포격을 가했다.[26]

8월 10일, 공습과 포격으로 268고지가 뒤흔들렸고, 조선인민군 대대는 초토화되었다. 그날 오후, 게이 장군은 미군 전차 5대에 왜관 도로를 따라 이동하여 고지 후사면에 북서쪽에서 사격하라고 명령했다. 이 전차포 사격은 포격으로부터 숨어 있던 조선인민군에게 기습을 가했다. 두 차례의 포격 사이에 갇힌 그들은 진지를 비우기 시작했다. 그 다음 미군 보병 공격이 별 어려움 없이 삼각산 정상에 도달했고, 이 전투는 오후 4시경에 종료되었다. 미군 포병과 박격포 사격이 서쪽으로 이동하여 조선인민군의 퇴로를 차단했다. 제61야전포병대대의 백린탄은 후퇴를 시도하던 조선인민군을 덮쳤고, 그들은 미군 보병에 의해 격파되어 200명 이상이 사망했다.[27]
조선인민군 제3사단 제7연대가 고지에서 전멸했다. 제7기병대 제1대대는 이틀간의 전투에서 14명이 사망하고 48명이 부상을 입었다.[27] 약 1,000명의 제7연대 병력이 낙동강을 건너 268고지에 투입되었고, 그 중 약 700명이 사상자가 되었다.[25] 포병과 박격포가 연대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다. 약 300명의 생존자가 8월 10일 밤에서 11일 밤 사이에 강을 건너 퇴각했다.[25] 왜관 남쪽에서 조선인민군 제3사단의 낙동강 도하 시도는 참사로 끝났다. 8월 12일경 제7연대 생존자들이 사단에 합류했을 때, 제3사단은 약 2,5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무질서한 부대로 축소되었다. 조선인민군은 이 사단을 예비대로 배치하여 보충병으로 재건하도록 했다.[25][28]
8월 12일 오전 3시경, 북한군 제25연대는 고령-대구 도로의 득성동 인근에서 낙동강 도하를 시작했다. 이 지점은 제7기병연대 제2대대가 방어하고 있었으며, 대구 남서쪽 23km 지점이었다. 해가 뜨자 300~400명의 북한군 병력이 위천동까지 침투했고, 제2대대 H중대와 근접 전투를 벌였다. 북한군은 H중대의 전진 진지, 박격포 관측소, 중기관총 진지를 제압했다. 북한군은 용포 동쪽 고지를 장악하여 주력 도하를 보호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29] 그러나 오전 9시까지 제2대대는 제77야전포병대대와 공습 지원을 받아 북한군을 용포를 지나 몰아냈다.[25]
8월 14일 이른 아침, 북한군은 덕성동과 용포 사이의 파괴된 다리 부근에서 다시 낙동강 도하를 시도했다.[25] 오전 6시 20분까지 약 500명의 북한군이 용포까지 진격했다. 15분 후, 제7기병대 제2대대 병사들은 도하 지점 동쪽 1.6km 지점인 위촌동에서 북한군과 교전했다. 오전 8시, 게이 장군은 제7기병대 제1대대에게 제2대대를 지원하기 위해 용포 지역으로 이동하라고 명령했다.[30]
북한군 포병과 전차의 사격 지원을 받으며 보병이 도하했다. 많은 수의 북한군 증원군이 부교를 이용하여 강을 건너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공격은 교착 상태에 빠졌고, 북한군의 최전방은 파괴된 다리에서 2.4km 떨어진 사문동까지였다. 그곳에서 미군의 경무기, 박격포, 포병의 합동 사격으로 북한군은 강으로 밀려났다.[23] 정오까지, 많은 수의 북한군이 미군 포병의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으며 강 서쪽으로 퇴각했다.[30]
밤이 되자 제7기병연대는 용포의 북한군 교두보를 제거했다.[30] 이 전투에서 북한군 제10사단 제25연대와 제27연대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제7기병대는 강을 건너는 데 성공한 1,700명의 북한군 병사 중 1,500명이 사망했다고 추정했다. 전투 이틀 후, H중대는 자대 후방에 267명의 북한군 전사자를 매장했다고 보고했다. G중대는 부대 앞에서 150명의 북한군 전사자를 세었다. 반면 G중대는 전투 중 2명이 사망하고 3명이 부상당하는 경미한 피해를 입었다.[31] 제10사단은 낙동강 도하라는 첫 번째 전투 임무에서 2,500명의 사상자를 냈다.[25][31]


1950년 8월, 낙동강 방어선 전투의 일부로, 왜관 북쪽 303고지에서 북한군이 미군 포로들을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31] 한국군 제1사단과 미군 제1기병사단 경계 부근에서 북한군 제10사단이 도하를 시도했고, 미 제5기병연대 G 중대가 303고지를 점령했다.[31]
8월 15일, G 중대는 북한군의 공격을 받고 포위되었다. 미군 증원 부대가 303고지를 탈환하려 했으나 실패했다.[32] 8월 17일, 미군은 공습과 포격으로 303고지를 탈환했지만, H 중대 박격포병 26명이 손이 묶인 채 총살된 것을 발견했다.[33][34][35] 이 사건으로 총 45명이 총살되었고, 5명만이 생존했다.[36]
이에 분노한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은 북한 지도부에 책임을 묻겠다고 경고했다.[33][38] 그러나 북한군 사령부 역시 포로 학살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고 제한 명령을 내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35]
8월 14일, 맥아더 장군은 조지 E. 스트라테마이어 중장에게 대한민국 육군 제1사단 맞은편 낙동강 서쪽에 있는 약 67km² 크기의 직사각형 지역에 대한 융단 폭격을 명령했다.[25] 이 지역에 가장 많은 수의 조선인민군이 집결해 있었으며, 일부 추정치는 4개 조선인민군 사단과 여러 기갑 연대로 총 4만 명에 달했으며, 이들은 대구 공격을 위해 이 지역을 사용하고 있다고 알려졌다. 스트라테마이어는 그의 항공기가 7.7km²보다 더 넓은 지역을 융단 폭격하는 데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맥아더의 명령을 따랐다.[43]
8월 16일 오전 11시 58분, 미 공군 극동 공군 기지인 일본과 오키나와에서 출발한 제19, 제22, 제92, 제98, 제307 폭격비행단 소속 98대의 B-29 슈퍼포트리스 중 첫 번째 비행기가 목표 지역 상공에 도착했다. 마지막 비행기가 12시 24분에 목표 지역을 벗어났다. 약 3,000m 상공에서 폭격기들은 약 960톤의 500파운드 및 1,000파운드 폭탄을 투하했다.[41][42] 이 공격에는 극동 공군의 모든 폭격 자산이 동원되었으며, 3,084개의 227kg 폭탄과 150개의 454kg 폭탄이 투하되었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노르망디 전투 이후 미 공군의 가장 큰 작전이었다.[43]

워커 장군은 다음 날 맥아더 장군에게 폭격으로 인한 조선인민군의 피해는 연기와 먼지로 인해 평가할 수 없으며, 지상군은 조선인민군의 사격 때문에 그 지역에 접근할 수 없다고 보고했다.[41] 이후 조선인민군 포로들로부터 얻은 정보에 따르면, 극동 사령부가 아직 낙동강 서쪽에 있다고 생각했던 적 부대는 이미 동쪽으로 건너갔으며 폭격 지역에 없었다.[44] 폭격으로 단 한 명의 조선인민군 병사도 사망했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43] 그러나 폭격으로 상당수의 조선인민군 포병대가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대규모 융단폭격은 국민의힘 계열 보수정권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 학살인 제주 4.3 사건을 연상케 하여 비판적인 시각이 제기되었다.
유엔 지상군 및 공군 지휘관들은 적의 집중적인 배치가 확실하고 상황이 위급한 경우가 아니면 대규모 융단 폭격을 재개하는 것에 반대했다.[44] 대신 그들은 전투 폭격기와 급강하 폭격기가 지상군을 더 잘 지원할 것이라고 권고했다.[43]
3. 3. 1. 낙동리 도하 작전
8월 4일부터 5일까지 밤, 조선인민군 제13사단은 대구에서 북서쪽으로 64km 떨어진 낙동리에 있는 낙동강을 건너기 시작했다.[63] 8월 5일 대한민국 포병대의 박격포 사격이 있을 때까지 이 도하는 발견되지 않았다. 사흘 밤 동안, 사단 3개 연대의 조선인민군 병사들은 무기와 장비를 머리에 이고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넜다. 8월 7일까지 모든 사단이 건너 한국군 1사단의 준비된 방어선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모였다.[63]대한민국 육군은 제13사단이 도하를 완료하자마자 공격하여 흩어진 조선인민군 병력을 산으로 몰아냈다. 사단은 동쪽으로 재집결하여 야간 기습을 감행하여 대한민국 방어선을 돌파하고, 대구로 향하는 주요 도로인 낙동강 동쪽 32km 지점까지 진격하기 시작했다. 일주일 안에 조선인민군 제1사단과 제13사단은 대구에서 북쪽으로 약 24km 떨어진 다부동 지역으로 집결하고 있었다.[21]
3. 3. 2. 유학산 전투
8월 12일부터 16일까지, 조선인민군 제15사단의 3개 연대는 다부동 북서쪽 5km 지점의 유학산 인근 낙동강 동쪽에서 합류했다. 조선인민군 제13사단은 유학산에서 대한민국 국군 제1사단과 교전을 시작했다.[22][23]조선인민군 제13사단과 제15사단은 유학산 일대에서 대한민국 국군 제1사단과 격전을 벌였다. 대한민국 국군은 미군의 지원을 받아 북한군을 격퇴하였다.
3. 3. 3. 왜관 전투
8월 4일부터 5일까지 밤, 조선인민군 제13사단은 대구에서 북서쪽으로 64km 떨어진 낙동리에 있는 낙동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이 도하는 8월 5일 대한민국 포병대의 박격포 사격이 있을 때까지 발견되지 않았다.[63] 사흘 밤 동안, 3개 연대의 조선인민군 병사들은 무기와 장비를 머리에 이고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넜다. 8월 7일까지 모든 사단이 건너가 한국군 1사단의 준비된 방어선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모였다.[63]3. 3. 4. 삼각산 (268고지) 전투
8월 9일 새벽, 호바트 R. 게이 소장은 대구에 있는 사령부에서 왜관 남쪽 지역에서 조선인민군이 낙동강을 건넜다는 소식을 들었다. 게이 장군은 약 750명의 조선인민군 보병 부대가 왜관 동남쪽 4.8km 지점, "삼각산"으로도 알려진 268고지에 집결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25] 게이 장군은 적의 집결지를 공격하여 강을 건너도록 강요하라고 사단에 명령했다. 삼각산은 주요 한국 남북 고속도로와 서울-부산 간선 철도가 산기슭을 따라 지나가기 때문에 보급선과의 근접성 때문에 중요했다.[26]오전 9시 30분경, 게이 장군은 제7기병대 제1대대에 조선인민군의 침투에 대응하라고 명령했다. 이 대대는 A 중대, 제71중전차대대 소속 전차 5대의 호위를 받았다. 그 동안 제61야전포병대대는 고지에 집중 포격을 가했다.[26]
8월 10일, 공습과 포격으로 268고지가 뒤흔들렸고, 조선인민군 대대는 초토화되었다. 그날 오후, 게이 장군은 미군 전차 5대에 왜관 도로를 따라 이동하여 고지 후사면에 북서쪽에서 사격하라고 명령했다. 이 전차포 사격은 포격으로부터 숨어 있던 조선인민군에게 기습을 가했다. 두 차례의 포격 사이에 갇힌 그들은 진지를 비우기 시작했다. 그 다음 미군 보병 공격이 별 어려움 없이 삼각산 정상에 도달했고, 이 전투는 오후 4시경에 종료되었다. 미군 포병과 박격포 사격이 서쪽으로 이동하여 조선인민군의 퇴로를 차단했다. 제61야전포병대대의 백린탄은 후퇴를 시도하던 조선인민군을 덮쳤고, 그들은 미군 보병에 의해 격파되어 200명 이상이 사망했다.[27]
조선인민군 제3사단 제7연대가 고지에서 전멸했다. 제7기병대 제1대대는 이틀간의 전투에서 14명이 사망하고 48명이 부상을 입었다.[27] 약 1,000명의 제7연대 병력이 낙동강을 건너 268고지에 투입되었고, 그 중 약 700명이 사상자가 되었다.[25] 포병과 박격포가 연대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다. 약 300명의 생존자가 8월 10일 밤에서 11일 밤 사이에 강을 건너 퇴각했다.[25] 왜관 남쪽에서 조선인민군 제3사단의 낙동강 도하 시도는 참사로 끝났다. 8월 12일경 제7연대 생존자들이 사단에 합류했을 때, 제3사단은 약 2,5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무질서한 부대로 축소되었다. 조선인민군은 이 사단을 예비대로 배치하여 보충병으로 재건하도록 했다.[25][28]
3. 3. 5. 용포 도하 작전
8월 12일 오전 3시경, 북한군 제25연대는 고령-대구 도로의 득성동 인근에서 낙동강 도하를 시작했다. 이 지점은 제7기병연대 제2대대가 방어하고 있었으며, 대구 남서쪽 23km 지점이었다. 해가 뜨자 300~400명의 북한군 병력이 위천동까지 침투했고, 제2대대 H중대와 근접 전투를 벌였다. 북한군은 H중대의 전진 진지, 박격포 관측소, 중기관총 진지를 제압했다. 북한군은 용포 동쪽 고지를 장악하여 주력 도하를 보호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29] 그러나 오전 9시까지 제2대대는 제77야전포병대대와 공습 지원을 받아 북한군을 용포를 지나 몰아냈다.[25]8월 14일 이른 아침, 북한군은 덕성동과 용포 사이의 파괴된 다리 부근에서 다시 낙동강 도하를 시도했다.[25] 오전 6시 20분까지 약 500명의 북한군이 용포까지 진격했다. 15분 후, 제7기병대 제2대대 병사들은 도하 지점 동쪽 1.6km 지점인 위촌동에서 북한군과 교전했다. 오전 8시, 게이 장군은 제7기병대 제1대대에게 제2대대를 지원하기 위해 용포 지역으로 이동하라고 명령했다.[30]
북한군 포병과 전차의 사격 지원을 받으며 보병이 도하했다. 많은 수의 북한군 증원군이 부교를 이용하여 강을 건너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공격은 교착 상태에 빠졌고, 북한군의 최전방은 파괴된 다리에서 2.4km 떨어진 사문동까지였다. 그곳에서 미군의 경무기, 박격포, 포병의 합동 사격으로 북한군은 강으로 밀려났다.[23] 정오까지, 많은 수의 북한군이 미군 포병의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으며 강 서쪽으로 퇴각했다.[30]
밤이 되자 제7기병연대는 용포의 북한군 교두보를 제거했다.[30] 이 전투에서 북한군 제10사단 제25연대와 제27연대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제7기병대는 강을 건너는 데 성공한 1,700명의 북한군 병사 중 1,500명이 사망했다고 추정했다. 전투 이틀 후, H중대는 자대 후방에 267명의 북한군 전사자를 매장했다고 보고했다. G중대는 부대 앞에서 150명의 북한군 전사자를 세었다. 반면 G중대는 전투 중 2명이 사망하고 3명이 부상당하는 경미한 피해를 입었다.[31] 제10사단은 낙동강 도하라는 첫 번째 전투 임무에서 2,500명의 사상자를 냈다.[25][31]
3. 3. 6. 303고지 학살
1950년 8월, 낙동강 방어선 전투의 일부로, 왜관 북쪽 303고지에서 북한군이 미군 포로들을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31] 한국군 제1사단과 미군 제1기병사단 경계 부근에서 북한군 제10사단이 도하를 시도했고, 미 제5기병연대 G 중대가 303고지를 점령했다.[31]
8월 15일, G 중대는 북한군의 공격을 받고 포위되었다. 미군 증원 부대가 303고지를 탈환하려 했으나 실패했다.[32] 8월 17일, 미군은 공습과 포격으로 303고지를 탈환했지만, H 중대 박격포병 26명이 손이 묶인 채 총살된 것을 발견했다.[33][34][35] 이 사건으로 총 45명이 총살되었고, 5명만이 생존했다.[36]
이에 분노한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은 북한 지도부에 책임을 묻겠다고 경고했다.[33][38] 그러나 북한군 사령부 역시 포로 학살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고 제한 명령을 내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35]
3. 3. 7. 융단 폭격
8월 14일, 맥아더 장군(General MacArthur)은 조지 E. 스트라테마이어 중장(Lieutenant General)에게 대한민국 육군 제1사단 맞은편 낙동강 서쪽에 있는 약 67km² 크기의 직사각형 지역에 대한 융단 폭격(carpet bombing)을 명령했다.[25] 이 지역에 가장 많은 수의 조선인민군이 집결해 있었으며, 일부 추정치는 4개 조선인민군 사단과 여러 기갑 연대로 총 4만 명에 달했으며, 이들은 대구 공격을 위해 이 지역을 사용하고 있다고 알려졌다. 스트라테마이어는 그의 항공기가 7.7km²보다 더 넓은 지역을 융단 폭격하는 데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맥아더의 명령을 따랐다.[43]8월 16일 오전 11시 58분, 미 공군 극동 공군 기지인 일본과 오키나와에서 출발한 제19, 제22, 제92, 제98, 제307 폭격비행단 소속 98대의 B-29 슈퍼포트리스 중 첫 번째 비행기가 목표 지역 상공에 도착했다. 마지막 비행기가 12시 24분에 목표 지역을 벗어났다. 약 3,000m 상공에서 폭격기들은 약 960톤의 500파운드 및 1,000파운드 폭탄을 투하했다.[41][42] 이 공격에는 극동 공군의 모든 폭격 자산이 동원되었으며, 3,084개의 227kg 폭탄과 150개의 454kg 폭탄이 투하되었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노르망디 전투 이후 미 공군의 가장 큰 작전이었다.[43]
워커 장군(General Walker)은 다음 날 맥아더 장군에게 폭격으로 인한 조선인민군의 피해는 연기와 먼지로 인해 평가할 수 없으며, 지상군은 조선인민군의 사격 때문에 그 지역에 접근할 수 없다고 보고했다.[41] 이후 조선인민군 포로들로부터 얻은 정보에 따르면, 극동 사령부가 아직 낙동강 서쪽에 있다고 생각했던 적 부대는 이미 동쪽으로 건너갔으며 폭격 지역에 없었다.[44] 폭격으로 단 한 명의 조선인민군 병사도 사망했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43] 그러나 폭격으로 상당수의 조선인민군 포병대가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대규모 융단폭격은 국민의힘 계열 보수정권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 학살인 제주 4.3 사건을 연상케 하여 비판적인 시각이 제기되었다.
유엔 지상군 및 공군 지휘관들은 적의 집중적인 배치가 확실하고 상황이 위급한 경우가 아니면 대규모 융단 폭격을 재개하는 것에 반대했다.[44] 대신 그들은 전투 폭격기와 급강하 폭격기가 지상군을 더 잘 지원할 것이라고 권고했다.[43]
4. 결과
대구 주변 전투에서 조선인민군은 여러 차례 대구를 공격하려 했으나, 미국과 대한민국 국군 병력과 공습에 의해 반복적으로 저지당하거나 지연되었다.[44] 5개의 조선인민군 사단은 각각 심각한 사상자를 냈으며, 증가하는 손실과 보급 부족으로 인해 마침내 붕괴되었다. 그러나 이들 사단의 일부 병력은 산으로 흩어져 나중에 다른 전투를 위해 집결했고, 이들 남은 병력은 결국 볼링 앨리 전투에서 격파되었다.[44][45]
미 제1기병사단의 사상자는 비교적 적어 총 600명 정도의 사상자를 냈으며, 그중 200명 정도가 전투에서 사망했다. 이중에는 303고지에서의 사망자도 포함되어있다. 이미 자리를 잡은 미군은 포격과 공습으로 낙동강을 건너는 조선인민군 부대를 초토화시킬 수 있었다.[46] 조선인민군은 훨씬 더 많은 사상자를 냈으며, 전투에서 사망한 비율도 훨씬 높았다. 용포에서 2,500명,[31] 303고지에서 500명,[34] 삼각산에서 700명이 사망하여 총 사망자는 3,700명이 넘지만,[25] 융단 폭격 작전에서 정확한 사상자 수는 알 수 없다.[44]
5.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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