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리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가자리아는 1266년 제노바가 흑해 연안의 카파를 수도로 삼아 형성된 영토이다. 1261년 니케아 제국과의 조약을 통해 흑해 무역 독점권을 얻은 제노바는 몽골의 침입, 흑사병의 확산 등 격동의 시기를 겪었다. 1308년 몽골의 침입으로 카파를 잠시 상실했으나, 이후 되찾아 식민지 행정을 구축했다. 1347년 흑사병이 가자리아를 통해 유럽으로 확산되는 사건이 발생했으며,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에는 성 조지 은행에 주권이 양도되었고, 1474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정복되었다. 가자리아는 크림 반도, 서부 흑해, 타만 반도, 압하지야, 아자리야 등 흑해 연안의 다양한 지역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제노바는 1261년 님파이움 조약을 통해 니케아 제국으로부터 흑해에서의 독점 무역권을 확보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1266년 카파를 양도받아 가자리아 식민지의 수도로 삼았다.[2]
2. 역사
1308년, 골든 호드의 칸 토크타에게 카파를 빼앗겼으나, 5년 뒤인 1313년 그의 후계자인 오즈베크 칸으로부터 도시를 되찾았다. 이후 제노바는 가자리아의 행정 체계를 정비하였다.[2][3] 1341년에는 식민지 법률을 모아 Liber Gazarielat를 편찬했으며, 이는 1441년 Statuta Gazarielat로 개정되었다.[2]
1347년, 자니 베그가 이끄는 골든 호드가 다시 카파를 포위하는 과정에서 흑사병이 발생했다. 당시 몽골군이 흑사병으로 사망한 시신을 투석기로 성 안에 던져 넣었다는 기록이 있으며[4], 이 사건은 흑사병이 제노바의 무역망을 통해 콘스탄티노플과 메시나를 거쳐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4]
가자리아의 재정은 식민지 방어 비용을 담당했던 국가 채권자 협회인 compera di Gazariaita에 의해 관리되었으며, 이 조직은 사실상 성 조지 은행 소속이었다.[5]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 제노바 공화국은 오스만 제국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가자리아의 주권을 성 조지 은행에 넘겼으나, 결국 1474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정복당하며 가자리아 식민지는 소멸하였다.[5]
2. 1. 제노바령 가자리아의 성립
제노바가 가자리아 식민지를 건설하게 된 정치적 배경은 1261년 체결된 님파이움 조약이다. 이 조약을 통해 니케아 제국은 제노바 상인들에게 '마레 마이우스'(흑해)에서의 독점적인 무역 권리를 부여했다. 이를 바탕으로 1266년 카파가 제노바에 양도되었고, 이곳은 가자리아 영토의 수도가 되었다.[2]
그러나 1308년, 칸 토크타가 이끄는 골든 호드의 몽골군이 오랜 포위 공격 끝에 카파를 점령했다. 5년 뒤인 1313년, 제노바는 토크타의 후계자인 오즈베크 칸으로부터 카파를 되찾는 데 성공했다. 도시를 탈환한 제노바 공화국은 식민지 행정을 보다 체계적으로 조직했다. 입법권은 6개월 임기의 치안 판사 8명으로 구성된 '오피치움 가자리애'(Officium Gazariela)에 주어졌다. 행정권은 제노바 정부가 임명하고 서기 또는 재무관이 보좌하는 카파의 영사에게 위임되었으며, 영사의 임기는 1년이었다. 또한, 1년 임기의 24명으로 구성된 의회가 있었는데, 귀족과 상인 또는 장인이 절반씩 참여했다. 특히 상인/장인 대표 중에는 제노바 시민권을 얻은 현지 주민 4명이 포함될 수 있었다. 이 의회는 다시 24명 의원 외 인물 중에서 6명으로 구성된 소규모 의회를 선출했다. 가자리아 내 다른 도시들도 카파의 행정 체계에 종속되는 유사한 형태의 행정 조직을 갖추었다.[2][3]
1341년에는 제노바령 가자리아에서 시행되던 법률들을 모아 '리베르 가자리애'(Liber Gazariela)라는 법률집으로 편찬했으며, 이 자료는 현재 제노바 국립 문서 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다. 이 법률집은 이후 1441년에 '스타투타 가자리애'(Statuta Gazariela)라는 이름으로 개정되었다.[2]
1347년, 자니 베그가 이끄는 골든 호드가 다시 카파를 포위했다. 당시 익명의 연대기 기록에 따르면, 포위군은 흑사병으로 사망한 병사들의 시체를 투석기로 성벽 안으로 던져 넣었다고 전해진다. 이 병사들은 동쪽에서부터 확산되고 있던 흑사병에 걸려 사망한 상태였다. 카파의 주민들은 시체를 가능한 한 빨리 바다에 버렸지만, 도시 내에 흑사병이 퍼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카파에서 시작된 흑사병은 제노바의 광대한 상업 네트워크를 통해 지중해 전역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1347년 가을, 카파에서 출발한 제노바 상선에 실린 흑사병은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여 유럽 최초의 감염 도시가 되었고, 이후 시칠리아의 메시나를 거쳐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4]
가자리아의 세입은 '콤페라 디 가자리애'(compera di Gazariait)라는 국가 채권자 협회에 할당되었다. 이 협회는 식민지 방어 비용을 미리 부담하는 역할을 했으며, 사실상 성 조지 은행에 소속되어 가자리아의 세금 관리를 담당했다.[5]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 제노바 공화국은 오스만 제국의 위협에 맞서 가자리아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주체라고 판단하여 식민지에 대한 주권을 성 조지 은행에 넘겼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가자리아는 결국 1474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정복되었다.[5]
2. 2. 몽골의 침입과 흑사병
1308년, 칸 토크타가 이끄는 골든 호드의 몽골군은 오랜 포위 공격 끝에 카파를 정복했다.[2] 5년 후인 1313년, 제노바인들은 토크타의 후계자인 오즈베크 칸으로부터 식민지를 되찾는 데 성공했다. 도시를 되찾은 후, 제노바 공화국은 식민지 행정을 더욱 체계적으로 조직했다. 입법 권한은 6개월 임기의 치안 판사 8명으로 구성된 '오피치움 가자리에'(la)에게 주어졌고, 이들은 후임자를 직접 임명했다. 행정 권한은 제노바 정부가 임명한 서기 또는 재무관의 보좌를 받는 1년 임기의 카파 영사에게 위임되었다. 또한, 귀족과 상인 또는 장인이 각각 절반씩 참여하는 24명의 의회가 1년 임기로 선출되어 활동했다. 상인/장인 그룹에는 제노바 시민권을 얻은 지역 주민 4명이 포함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 의회는 24명 의원 외의 인물 중에서 6명으로 구성된 소규모 의회를 별도로 선출했다. 가자리아 내 다른 도시들도 카파의 행정 체계에 종속되는 유사한 행정 구조를 가졌다.[2][3]
1341년, 제노바 가자리아에서 시행되던 법률들은 '리베르 가자리에'(la)라는 이름으로 수집 및 편찬되었으며, 이 문서는 현재 제노바 국립 문서 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다. 이 법률 모음집은 이후 1441년에 '스타투타 가자리에'(la)라는 이름으로 업데이트되었다.[2]
1347년, 이번에는 자니 베그가 이끄는 골든 호드가 다시 카파를 포위했다. 익명의 연대기에 따르면, 포위 공격 중 몽골군은 당시 동쪽에서 퍼지고 있던 흑사병으로 사망한 병사들의 시체를 투석기를 이용해 성벽 안으로 던져 넣었다고 한다. 카파의 수비수들과 주민들은 가능한 한 빨리 시체를 바다에 버렸지만, 흑사병은 이미 도시 안에 퍼지기 시작했다. 카파에서 발생한 흑사병은 지중해 전역으로 뻗어 있던 제노바의 광대한 상업 네트워크를 통해 빠르게 확산되었다. 1347년 가을, 카파에서 출발한 제노바 상선을 통해 흑사병은 콘스탄티노플에 도달했는데, 이는 흑사병에 감염된 최초의 유럽 도시였다. 이후 흑사병은 메시나를 거쳐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4]
2. 3. 행정 체계
가자리아 식민지 건설의 정치적 기반은 1261년 님파이움 조약으로 마련되었다. 이 조약을 통해 니케아 제국은 제노바인에게 흑해에서의 독점적인 무역 권리를 부여했다. 그 결과 1266년 카파가 제노바에 양도되어 가자리아 영토의 수도가 되었다.[2]
1308년, 칸 토크타가 이끄는 골든 호드의 몽골군이 오랜 포위 끝에 카파를 점령했다. 그러나 5년 뒤인 1313년, 제노바는 토크타의 후계자인 오즈베크 칸으로부터 식민지를 되찾는 데 성공했다. 도시를 되찾은 제노바 공화국은 식민지 행정을 보다 체계적으로 조직했다.[2][3]
구분 | 내용 |
---|---|
입법 | 6개월 임기의 치안 판사 8명으로 구성된 오피시움 가자리애(Officium Gazariela)가 담당. 후임자 직접 임명. |
행정 | 제노바 정부가 임명하는 카파의 영사 (임기 1년)가 담당. 서기 또는 재무관이 보좌. |
의회 | 선출된 24명 (귀족 12명, 상인/장인 12명)으로 구성. 임기 1년. 상인/장인 그룹에는 제노바 시민권을 얻은 현지 주민 4명 포함 가능. |
제한된 의회 | 24명 의회가 의회 외부 인물 중에서 6명을 선출. |
기타 도시 | 카파의 행정에 종속되며 유사한 행정 체계 운영. |
1341년에는 제노바 가자리아에서 시행되던 법률들을 모아 '리베르 가자리애'(Liber Gazariela)로 편찬했다. 이 법률집 원본은 현재 제노바 국립 문서 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다. 이 법전은 이후 1441년에 '스타투타 가자리애'(Statuta Gazariela)라는 이름으로 개정되었다.[2]
가자리아의 세입 관리는 '콤페라 디 가자리애'(compera di Gazariait)라는 국가 채권자 협회에 맡겨졌다. 이 협회는 식민지 방어 비용을 미리 부담하는 역할을 했으며, 사실상 성 조지 은행에 소속되어 가자리아의 과세 행정을 관리했다.[5]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 제노바 공화국은 오스만 제국에 대한 저항을 조직할 유일한 주체로 성 조지 은행을 지목하고 가자리아에 대한 주권을 은행에 넘겼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가자리아 영토는 결국 1474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정복되었다.[5]
2. 4. 오스만 제국의 정복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 공화국은 오스만 제국에 대한 저항을 조직할 수 있는 유일한 실체라고 믿고 가자리아에 대한 주권을 성 조지 은행에 양도했다. 그러나 이 영토는 1474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정복되었다.[5]3. 식민지
제노바 공화국은 흑해 연안의 크림 반도를 중심으로 우크라이나, 루마니아, 러시아 남부, 압하지야, 조지아 등 광범위한 지역에 교역 거점과 식민지를 건설하고 관리했다. 이러한 식민지들은 '가자리아'라고 통칭되었으며, 제노바의 동방 무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3. 1. 크림 반도
- 카파 (Caffait)
- 쳄발로 (Cembaloit)
- 솔다이아 (Soldaiait)
- 보스포로 (Vosporoit)
- 사르소나 (Sarsonait)
- 고티아 관할구 (Capitanatu Gotiait) (테오도로 영토)
3. 2. 서부 흑해 (우크라이나 및 루마니아)
크림 반도를 제외하고, 제노바는 흑해 서부 해안에도 여러 요새와 식민지를 소유하고 있었다.[1] 주요 거점은 다음과 같다.
3. 3. 타만 반도 및 타나이스 (러시아)
가자리아는 흑해 북동부의 타만 반도와 타나이스강(현대의 돈강) 하구 지역에도 중요한 도시들을 건설하고 관리했다. 이 지역은 러시아 남부에 해당하며, 주요 도시는 다음과 같다.
3. 4. 압하지야
3. 5. 아자리야 (조지아)
- 로 바티 (바투미)
참조
[1]
웹사이트
Genova e il mare
https://www.storiapa[...]
2022-03-05
[2]
서적
Navi e navigazione a Genova nel Trecento : il Liber Gazarie
Istituto internazionale di Studi Liguri
[3]
서적
Collection de Lois Maritimes Anterieures Au Xviiie Siecle
[4]
웹사이트
The Genoese Gazaria and the Golden Horde
https://www.e-anthro[...]
2021-06-10
[5]
웹사이트
La Casa delle Compere e dei Banchi di San Giorgio
http://www.lacasadis[...]
2021-06-10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