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민 (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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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강태민은 일제강점기 만주국에서 군 복무를 했으며, 대한민국 육군 장교로 한국 전쟁에 참전한 군인이다.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하여 신징보안사령부에서 근무한 경력으로 인해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한국 전쟁에서 여러 전투에 참전했으며, 육군 제9사단 참모장, 제26사단장 등을 역임했다. 1959년 예비군으로 편입되었고, 1960년 사망 후 소장으로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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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 정보
이름강태민
현지어 표기姜泰敏
생애1922년 ~ 1960년 10월 22일
복무만주국군
대한민국 육군
복무 기간1941년 ~ 1959년 4월 26일
최종 계급만주국군 중위
대한민국 육군 준장
지휘대한민국 육군 제26사단장
근무대한민국 육군본부
주요 참전 전투/전쟁한국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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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강태민은 어린 시절 만주국으로 이주하여 젠다오성 룽징시의 광명(光明)중학교를 졸업하고,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예과 3기 및 일본 제국 육군사관학교 58기 과정을 졸업했다. 만주국군 장교로 복무하다 광복 후 귀국하여 대한민국 국군에 합류했다.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여러 전투를 지휘했으며, 박정희와는 1기 선배로 친분이 두터워 매주 일요일 그의 자택에서 환담을 나누었다고 한다. 백선엽의 추종자라는 보고도 있다.

전쟁 이후 육군 포병 지휘관으로 복무하며 준장으로 진급했고, 여러 사단장 및 군수사령부 요직을 거쳤다. 1959년 육군 내 각종 사고에 대한 지휘 책임을 지고 예비역으로 편입되었으며, 암 투병 중 1960년 사망하여 소장으로 추서되었다.

2.1. 초기 생애 및 만주국군 복무

어린 시절에 만주국으로 이주했으며 젠다오성 룽징시에 있던 광명(光明)중학교를 졸업했다. 1941년 4월에 신징에 위치한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에 입학했고 1943년 4월에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예과 3기 과정을 졸업했다. 1944년 5월에 일본 제국 육군사관학교에 편입학했고 1945년 6월에 일본 제국 육군사관학교 58기 과정을 졸업했다.

만주국군에서 견습군관 과정을 마친 다음에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되어 조선인 만주국군 장교들과 함께 신징보안사령부에서 근무했다. 이러한 행적으로 인해 민족문제연구소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만주국군 중위로 복무하던 도중에 일본 제국이 중일 전쟁에서 패망하자 1946년 4월에 인천으로 귀국했다.

2.2. 대한민국 국군 복무

1949년 3월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8기 특별 4차 과정을 졸업하고 대한민국 육군 소위로 임관되었다. 처음에는 대한민국 해군에 배속되어 해군사관학교 생도대장을 맡았지만, 이후 육군으로 전과하여 독립 장갑 연대 제1대대장을 역임했다.

1950년 2월 15일 육군 제22연대장(중령)으로 임명되었다. 한국 전쟁 발발 후 한강 전투, 신사동-과천 전투, 시흥-안양-수원 전투, 영덕-강구 전투, 울진-평해 전투에 참전했다. 1951년 5월 25일 박정희의 뒤를 이어 육군 제9사단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8월 9일 다리 조기 폭파로 많은 장병들이 익사하고 1개 대대 분량의 장비가 유기되어 8월 15일자로 해임되었다. 이후 국민방위군 사관학교 교장, 육군 제3사단 참모장을 역임했다.

1952년 10월 13일 광주 육군 포병학교에서 3개월 간 훈련을 받은 육군 포병장성 16인 중 한 명으로, 이후 미국으로 유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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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10월 13일, 육군 포병 장성 16인
박정희 (제2군단 포병단장, 대통령)
박경원 (제11포병단장, 내무장관)
이기건 (제9포병단장, 준장)
이명재 (소장)
송석하 (소장)
이창정 (소장)
김영주 (준장)
최경만 (중장)
박현수 (소장)
김동수 (제15포병단장, 준장)
이춘경 (제20포병단장, 준장)
김상복 (제1군단 포병단장, 중장)
강태민 (제9사단 포병단장, 소장)
김동빈 (제7사단 포병단장, 중장)
이희권 (제12사단 포병단장, 소장)
이백우 (제12포병단장, 소장)


귀국 후 육군 포병 지휘관 및 준장으로 진급했고, 1953년 육군 제9사단 포병단장, 1957년 8월 육군 제26사단장을 역임했다. 그 외에 육군 군수사령부 부사령관, 육군 제9사단 부사단장, 제3군단 부사단장, 제8사단장, 군수사 부사령관으로 근무했다.

1959년 4월 26일 육군에서 일어난 각종 사고에 대한 지휘 책임을 물어 육군 제20사단장 이정석 준장과 함께 예비군으로 편입되었다.

2.3. 예편 및 사망

1959년 4월 26일, 육군에서 일어난 각종 사고에 대한 지휘 책임을 물어 제20사단장 이정석 준장과 함께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 당시 이미 암에 걸려 고향으로 돌아가 농업을 하면서 요양 생활을 했다. 1960년 10월 22일에 사망했고, 1960년 11월 4일에 소장으로 추서되었다.

3. 평가

박정희와는 1기 선배이자 친밀한 사이로, 매주 일요일 박정희의 자택을 방문하여 환담을 나누었다고 한다.

필립 찰스 하비브의 보고서에 따르면, 백선엽의 추종자라고 한다.